행주와 행주성당 연재 (19)
행주나루와 행주마을 (6): 행주의 생선
겸재 정선의 ‘행호관어(杏湖觀漁)’는 ‘행호(杏湖), 즉 덕양산(행주산성)과 돌방구지(행주나루) 사이의 한강에서 고기 잡는 것을 살펴본다’는 뜻이다. [조선시대에는 행주(幸州)를 행주(杏州)를 함께 쓰는 경우가 많아졌는데 살구꽃이 많이 피는 행주를 시어(詩語)로 행주(杏州)라고 표현임을 앞에서 언급한 바 있다. 같은 맥락으로 행주 앞의 넓은 한강을 종종 행호(杏湖)라고 불렀다.] ‘행호관어’에서 행호를 병풍처럼 둘러싼 강변 산기슭에는 귀래정(歸來亭), 장밀헌(藏密軒), 낙건정(樂健亭)이 한강을 굽어보고 있고 앞뒤로 여러 척의 작은 고깃배들이 행호 물길을 가로질러 그물질을 하고 있다. 무엇을 잡는 것일까?
행주를 대표하는 생선은 웅어이다. 웅어는 매년 4~5월에 바다로부터 한강의 하류로 올라와서 행주부근 갈대밭 등에 산란을 한다. 알에서 부화한 어린 웅어는 여름부터 가을에 걸쳐서 바다로 내려가서 월동을 하고, 성장한 뒤 다시 알을 낳은 곳으로 되돌아온다. 웅어는 회, 구이, 그리고 젓갈용으로 널리 애용되었다. 음력 3, 4월 봄에 잡히는 것이 연하고 가시가 별로 없어 주로 회로 먹고 여름철에 잡히는 것은 가시 억세져서 주로 젓갈용으로 쓴다. 회를 쓸고 난 대가리와 등뼈는 다져 완자를 만들어 부쳐 먹거나 매운탕을 끓여 먹었다. 웅어는 김포(金浦), 통진(通津), 교하(交河), 양천(陽川) 등에서도 잡았으나 행주가 주산지였고 품질도 제일 좋았다. 행주에는 사옹원(司饔院)의 분장(分掌)인 웅어소(위어소, 葦魚所)를 설치하여 웅어를 잡아 궁궐에 공급하게 하였다. 웅어젓은 궁궐에서 쓰는 필수 젓갈이었으므로 웅어잡이 매우 중요한 사옹원의 업무였다. 사옹원에서는 제철인 음력 3~4월이 되면 고양군에 웅어의 진상을 재촉하고 광해군, 인조 등 임금한테 웅어소(위어소) 소속 어부들의 역이 너무 무거우니 조세·부역을 줄여줄 것을 거듭하여 주청을 하고 있다.
행주에는 또한 웅어에 얽힌 전설도 전해온다.
행주나루 돌방구지 앞에 가난한 어부의 아들이 살고 있었다. 이 총각은 병든 아버지를 돌보며 주로 웅어 등 생선을 잡아 생계를 유지하던 착한 총각이었다. 웅어가 많이 잡히면 이 총각의 건강과 표정이 좋아졌고 웅어가 적게 잡히면 총각은 늘 허약한 모습으로 마을을 돌아다니곤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이 행주에 서울에서 대감댁 예쁜 여자아이가 나타났다. 이 아이는 큰 대감집의 막내딸로 병이 걸려 웅어를 많이 먹으면 병이 낫는다는 의원의 말에 따라 웅어로 많이 잡히는 이곳 행주에 내려오게 된 것이다. 큰 대감집 마름인 조영감은 대감댁에 공급할 웅어잡이 일을 이 총각에게 맡겼다. 웅어는 주로 음력 3,4월에 잡히기 때문에 총각은 석빙고[돌방구지 산너머 평구데이가 옛 석빙고 자리였다고 한다]를 만들어 이곳에 장기간 웅어를 보관하여 가면서 몇 년을 한결같이 웅어를 공급한 결과 대감집 딸 병이 낫게 되었다. 그리고 웅어잡이 총각과 대감집 막내딸 두 사람은 서로 깊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서로의 신분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두 집안에서 서로 혼인을 반대하자 두 사람은 석빙고 안에 들어가 웅어와 함께 얼음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백제 패망 당시 적장 소정방이 의자왕의 궁중 최고 보양식품이 웅어라는 이야기를 듣고 어부들에게 "우여(충청도에서는 웅어를 우여라고 불렀다고 한다)"를 잡아오도록 했으나, 백마강에 그렇게 많던 웅어가 백제를 패망시킨 적장의 식탁에 오를 수 없다하여 모두 물 밑으로 숨어버려 단 한마리도 잡을 수 없었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그런 뒤 금강을 따라 당으로 압송되는 백제의 포로 선단의 뱃전에 수없이 많은 웅어들이 스스로 몸을 부딪쳐 죽었다하여 임금에게 의리를 지킨 물고기란 뜻에서 의어 (義漁)라고도 부른다고 한다.]
노기남 대주교님은 웅어철이면 종종 행주를 방문하셨다. 행주 태생인 황민성 주교님도 [신학대학 교수시절] 동료신부님들과 웅어를 드시려 여러 차례 행주를 방문하셨고 “이곳이 내 고향이야”라는 말을 반복하셨다고 한다. 행주 출신 류봉구 신부님은 웅어젓이 없이는 식사를 하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류봉구 신부님이 돌아가셨을 때 냉장고 냉동실에는 길이가 한 자쯤 되는 웅어가 한 두름 있었는데 나중에 이것을 동창인 박고안 신부님께서 드셨다고 한다].
웅어와 더불어 행주의 별미는 황복(하돈: 河豚)이다. 웅어철이 되기 전인 음력 2월경부터 황복이 행주에서 많이 잡혔고 행주사람들은 황복을 그저 ‘복’이라고 불렀다. 황복은 입은 작고 위턱과 아래턱에는 각각 2개의 이빨이 박혀있다. 등은 흑갈색이고 배는 흰색인데 몸의 양측 중앙에는 선명하고 넓은 노란색의 띠가 있다. 가슴지느러미의 등쪽 과 등지느러미의 기부에는 흰 테두리가 있는 검은 점이 양쪽에 하나씩 있다. 황복은 4~5월 행주강가 바닥에 모래와 자갈이 깔린 곳에서 알을 낳으며, 알에서 깨어난 새끼 복어는 여름 한철 강가에 몰려다니며 크다가 가을쯤 서남해 바다로 내려가서 성장한다. 황복은 배를 갈라 알과 간을 꺼내버린 후 물에 씻어 하루 이틀 빨래줄에 걸어 말린 후 매운탕을 끓여 먹었다[요즘처럼 회로는 잘 먹지 않았다]. 특히 산란기 직전 음력 2-3월에 잡히는 놈이 가장 맛이 좋았다.
그러나 황복알, 간, 피에는 강한 독이 포함되어 있어 이를 잘못 먹고 죽는 행주사람이 종종 있었다. 황복의 독과 얽힌 이야기도 많다. 정을손(丁乙孫)사위가 정도(鄭道)가 황복의 독을 정을손의 국에 타서 독살하였다고 하며[조선왕조실록 세종 26권, 6년(1424 갑진 / 명 영락(永樂) 22년) 12월 6일(정미) 2번째기사], 최명길(崔鳴吉)의 손자로서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최석정(崔錫鼎)은 골치 아픈 일이 있으면 으레 행주에 와서 쉬곤 하였는데 하루는 최석정이 황복을 먹고 거의 죽다가 살아나자 남구만(南九萬)이 이 이야기를 듣고서 비웃기를, ‘저술할 만한 글이 한 가지만이 아닌데 하필이면 “예기유편(禮記類編)”[최석정의 저서]이고, 먹을 것이 얼마나 많은데 하필이면 황복이냐’라고 했다고 한다[조선왕조실록 숙종 47권, 35년(1709 기축 / 청 강희(康熙) 48년) 2월 21일(계해) 2번째기사]. 아마 남구만은 황복의 진미를 몰랐던 것 같다.
[이 황복을 닦달하고 남은 알은 모아서 강가에 비치된 옹기항아리나 드럼통에 버렸는데 이것이 부패하면서 황갈색 기름으로 변한다. 이 기름을 한때 약장사들이 무좀이나 치질의 특효약으로 팔러 다녔다고 한다.]
자가사리(동자개)도 겨울철 행주의 맛이었다 [자가사리는 빠가사리라고도 하는데 점잖지 못한 표현이다]. 행주강 자가사리는 보통 20㎝길이로 튼실하였으며 몸은 짙은 노란색 바탕에 머리와 등쪽은 국방색이다. 머리 모양은 삼각형으로 주둥이 끝은 넓고 편평하며, 입가에는 4쌍의 수염이 있다. ‘별주부전’에서 병조판서로 묘사된 이놈은 등과 옆지느러미에는 매우 날카로운 뿔이 숨겨져 있어 손을 베이거나 쏘이기 일 수다. 가을과 겨울, 특히 녹은 한강의 얼음구멍 사이로 올라오는 놈들을 잡아다가 보통 김치를 넣고 매운탕을 끓여 먹었다. 맛은 별미였으나 잘못 먹으면 등짝에 붙어 있는 뿔이 목에 걸려 꽤 많은 사람들이 병원신세를 지지도 했다. 고려사에는 중서성(中書省)에서 차약송(車若松)이 기홍수(奇洪壽)[행주 사람]에게 묻기를 “공작(孔雀)이 잘 있는가?”라고 하니 기홍수가 대답하기를
“생선을 먹이다가 가시가 목구멍에 걸리어 죽었다”라고 하였다[고려사, 제101권 - 열전 제14, 차약송]라는 대목이 나오는데 기홍수가 공작에게 잘못 먹인 생선이 아마도 자가사리였을 것 같다.
행주에서는 웅어, 황복, 자가사리외에도 장어, 숭어, 잉어, 붕어, 메기, 농어, 면어(綿魚)가 많이 잡혔고 짠물이 짙어지는 행주 아래쪽에서는 밴댕이(蘇魚)도 많이 잡혔다. 아울러 행주어부들은 때에 따라 서해로 나아가 황석어, 조기 등도 잡았다.
행주강은 한때 월산대군(月山大君)의 낚시하는 장소이도 하였다. 청구영언(靑丘永言)에 수록된 월산대군의 시조에서 추강(秋江)은 행주강의 가을 모습이다.
秋江에 밤이 드니 물결이 차노매라.
낙시 드리치니 고기 아니 무노매라.
無心한 달빗만 싯고 빈배 저어 오노매라
월산대군은 세조(世祖)의 맏손자로 태어났으나 세자였던 아버지가 일찍 죽는 바람에 삼촌인 예종(睿宗)이 임금이 되었고 또한 예종이 즉위 2년 만에 승하하자 이번에 월산대군의 동생인 성종(成宗)이 임금이 된다[예종의 아들인 제안대군은 4살로 너무 어렸다]. 권력에서 아쉽게 소외된 월산대군은 행주에서 오리정도 떨어진 능골에 살면서 행주강에서 낚시질과 강호한정가(江湖閑情歌)를 짓고 부르며 무심한 한평생을 보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