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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용복 장군은 누구?
편하디 편한 잠자리도 잠 못이루는데는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집에서는 밤 늦게 까지, 날짜가 바뀌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건만 모처럼 단잠
자리가 된 1인용 작은 천막.
여름밤이 짧다 하나 일찍 잠자리에 들었으므로 길디 긴 밤이 분명한데도 몹시 짧게
느껴진 밤.
엘리베이터 문열리는 소리가 내 단잠을 깨웠다.
새벽 5시에 복도를 걷는 사람은 약수공원으로 가는 부지런한 새벽산책객일 터.
울릉도에 머무는 동안 이 비할 데 없는 명당을 계속 이용하려면 지켜야 할 에티켓이
있는 것 같다.
5시 이전에 집을 치우는 것이다.
어떤 민원의 소지를 제공해서는 안되기 때문인데 그로 인한 이득이 더 클 것 같다.
부지런한 새가 먹이를 더 많이 먹는다잖은가.(Early bird gets the worm)
평소라면 아직 기상도 하지 않았을 이른 시간에 복도를 깔끔히 원상으로 돌려놓은
후 약수공원으로 갔다.
도동항은 망향봉에 가려 시야에 들어오지 않으나 행남등대 쪽에서 떠오르는 눈부신
아침해를 안고.
간밤에 중량감 있는 비석을 제대로 살펴보지 못했기 때문인데 '안용복장군 충혼비'
(安龍福將軍忠魂碑)다.
안용복은 누구?
동래의 천한 어민이지만 독도와 울릉도가 조선땅임을 일본인들로부터 다짐받아온
거인이다.
"동래수군 능로군(能櫓軍)으로 복무했으며 왜관(倭館)에 자주 드나들며 일본말을 익혔다.
1693년(숙종19) 울릉도에서 고기를 잡던 중 일본 어민이 울릉도에 침입하자 이를 막다가
......일본으로 끌려갔다. 이때 에도 바쿠후(江戶幕府)에게 울릉도가 조선땅임을 주장하여
바쿠후로부터 울릉도가 조선영토임을 확인하는 서계(書啓)를 받았으나 귀국 도중 나가사
키(長崎)에서 쓰시마도주(對馬島主)에게 서계를 빼앗겼다. 같은 해 9월 쓰시마도주는 예
조(禮曹)에 서계를 보내 울릉도(일본명 다케시마/竹島)에서 조선어민의 고기잡이를 금지
시킬 것을 요청했다.
이에 조선정부는 울릉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분명히 밝히고 외딴 섬에 왕래를 금지하는 공
도정책(空島政策)에 일본도 협조할 것을 요청한 예조복서(禮曹覆書)를 보냈다. 1696년 안
용복은 울릉도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중 다시 일본어선을 발견하고 마쓰시마(松島)까지 추
격하여 영토 침입을 꾸짖었으며 스스로 울릉우산양도감세관(鬱陵于山兩島監稅官)이라 칭
하고 하쿠슈(伯州) 태수로부터 영토침입에 대한 사과를 받고 귀국했다.
귀국 후 사사로이 국제문제를 일으켰다는 이유로 사형을 당할 위험에 처했으나 영의정 남
구만(南九萬)의 도움으로 귀양을 가는 데 그쳤다.
1697년 대마도주가 울릉도가 조선땅임을 확인하는 서계를 보냄으로써 조선과 일본 간의
울릉도를 둘러싼 분쟁은 일단락되었다"
위(上)는 브리태니카가 소개하는 안용복에 관한 글이다.
"동해 구름 밖에 한 조각 외로운 섬 아무도 내 땅이라 돌아보지 않을 적에 적굴 속
넘나들면서 저 임 혼자 애 섰던가 상이야 못 드릴망정 형벌 귀양 어인 말고 이름이
숨겨진다 공조차 묻히리까 이제와 울릉군(鬱陵君) 봉하오니 웃고 받으소서"
이은상의 추모시(獻詩) 는 지나치게 감상적이다.
매우 중요시 되던 일본과의 문제에서 관을 사칭하여 일본 중앙무대를 드나들었다면
뒤탈이 없었기 망정이지 자칫 외교 문제로 번질 수 있는 일을 했는데도.
그 때나 지금이나 법이 있고 도가 있는데 결과만 좋으면 찬사를 보내고 상을 준다?
목적을 위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결과가 좋으면 비도덕적 반윤리적 과정이
문제되지 않는 독재자들의 논리와 다를 것 없다.
2002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대니얼 카너먼(Daniel Kahneman/1934~ /이스라엘
국적 미국)의 피크 엔드 효과(Peak-End Effect)라는 것인가.
한데, 안용복장군 충혼비 지역에는 유치환의 울릉도 시비도 있으나 충혼비 바로 옆
자리에 서있는 다른 비는 누구의 무엇인가.
"滄溟孤島國防干城 於村泰化於民至情"(창명고도국방간성 어촌태화어민지정)
동해의 외로운 섬이 국방의 간성되어 마을마다 태평하고 백성마다 정분이 넘치다.
이 비는 안용복 장군과 무슨 관계가 있기에 그 곁에?
다시 숙소로 돌아온 시각은 아침 6시쯤.
밝은 아침이 되어 비로소 내 숙소의 위치가 올바로 확인되었다.
남북 분단으로 인한 월남 실향민들에게 망향(望鄕)은 그리움과 한이 응축된 단어다.
도동항을 응시하고 있는 317.3m 망향봉도 이 섬 개척민들의 향수와 애환이 서린 봉
우리라 망향봉이라는데 이 지역은 망향봉 아래 도동약수지구관광지.
향토사료관, 독도박물관, 독도전망케이블카 승강장 등의 밀집지역이며 이들 명소의
탐방객들을 위한 엘리베이터의 복도다.
약수공원 내에는 해수관음상을 봉안하고 있는 불교 사찰(天台宗 海道寺)도 있다.
해안과 섬에서 해수관음상을 모시지 않은 절이 모신 절보다 찾기 더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도 한반도에서 해난사고가 왜 끊이지 않는가.
동해와 한반도의 수호신 해수관음보살님믜 원력이 쇠약해졌기 때문인가.
해수관음보살님들이 안계시면 사고가 엄청 더 많을 것으로 이해해야 하나.
공원에서 내려가다가 어제 석양에 도동항에서 얼굴 마주쳤던 관광객들 중 약수공원
으로 아침 산책나온 이들을 만났다.
내가 자기네 보다 훨씬 부지런해서 이미 산책을 마치고 하산하는 중인 것으로 보는
듯 한데 크고 무거운 배낭을 메고 새벽산책을 한 괴이쩍은 늙은이라고?
하긴, 내 보금자리가 약수공원임을 알 리 없는 그들이니까.
성인봉을 깎아서 세계 제일의 관광 위락단지를 만들 계획은 왜 없는가
도동항에서 첫 시도는 울릉도 지킴이 석향(石香) 한테 가는 것.
척박한 암벽에서 울릉도민과 함께 살아온 울릉도의 역사 자체인 향나무란다.
수령확인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지 2천년~3천년,더러는 4~5천년까지 끌어올리나
통상 2천년~2천5백년으로 인식되는 듯 하며 세계 최장수라는 나무다.
(입증은 되었나?)
그러나 일반인의 접근을 금지한단다.
태풍(1985년 브렌다?)에 의해서 한 쪽 가지를 잃은 지체장애목(?)의 보호 차원인가
추락사고의 위험 때문인가.
나는 순 일반인이다.
양반은 얼어죽어도 짚불은 안 쬐며 아무리 급해도 개구멍으로 드나들지 않는다는데
경북도지정보호수(11-74호)와의 인연은 시도조차 포기하고 도동 도심을 떠났다.
시계 방향 해안로 걷기가 시작된 시각은 아침 6시 45분.
울릉읍사무소, 울릉초교, 울릉중교, 울릉군의 대표 건물일 KT 등을 거쳐 지속적으로
오르는 길은 저동과 사동 분기 삼거리를 지나 울릉터널까지 계속된다.
삼거리에 서있는 표지판 '35km섬목'이 내게는 중요한 이정표다.
울릉도의 해안로를 걸을 수 있는 종점이며(현재에는) 걸어야 하는 울릉도 옛길(둘레
길)의 시점이기 때문이다.
울릉군보건의료원을 지나 성인봉 등산로 중 하나인 대원사코스 들머리를 눈에 담고
긴 꼬부랑길을 단축시킨 340m 터널을 통과했다.
터널 위 꼬부랑길에서는 KBS중계소에서 시작되는 성인봉길이 있다.
사동천과 짝하는 내리막길 좌우에는 울릉군선거관리위와 대아울릉리조트가 있다.
대아리조트는 강릉~울릉을 운항하는 씨스포빌처럼 동해(묵호)~울릉,포항~울릉을
운항하는 씨플라워, 오션플라워 등의 해운회사다.
이 회사는 주민들의 원성을 사는 일 하지 않는지.
처음 마주치는 사동(沙洞)은 1리 와록사(臥鹿沙)마을.
모래가 귀한 섬에서 옥 같은 모래가 바다에 누워 있다는 뜻으로 와옥사(臥玉沙)라고
불렀고 마을 뒷산의 형국이 사슴이 누워 있는 것과 같아서 와록사(臥鹿沙)라 했단다.
통칭 사동에서 첫 대면은 천연기념물제237호 흑비들기 서식지.
울릉군의 군조(郡鳥)인 흑비들기의 서식지는 후박나무란다.
그래서 후박나무의 보호는 흑비들기의 보호와 직결되어 있다는 것.
사동 해안의 후박나무 5그루를 천연기념물로 지정 보호하는 이유란다.
후박나무 앞 해안, 자그마한 해변이 사동해수욕장이다.
어제 석양에 발이 묶였던 도동항 해안로 끝에 사동해안을 타고 접근을 시도했다.
이 쪽도 공사를 중지한 상태라 최소한의 안전도 보장되지 않아서 걷기가 섬뜩했다.
공사를 중지한 종점까지 갔으나 끝내 접선하지 못하고 돌아섰다.
무사히 백(back)한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천연기념물 옆 평상에서 라면을 끓였다.
아직 이른 시간이지만 어제 종일 빵으로 때웠기 때문이다.
드디어 평화롭고 태평한 해안로가 시작되었다.
지방어항 사동항을 지나 구분된 인도는 가끔 짧게 있을 뿐이지만 왕래 차량이 많지
않은데다 울릉도에는 성미 급한 운전자들이 없는지 과속하지 않아서 걸을만 하다.
하긴, 가속 패달을 힘차게 밟을 만한 길이 있는가.
3개동으로 나뉜 사동의 2리를 지났다.
산등성이가 마치 소가 엎드려 있는 꼴이라 하여 우복동(牛伏)이라 불렀단다.
훗날, 골짜기 냇물이 옥처럼 맑고 깨끗하며 마을 샘물 또한 맛 좋고 맑기가 옥 같다
해서 옥천동(玉川)이라 고쳐 부르고 하천도 옥천천이라 한다는 마을이다.
뒤로 망향봉의 독도전망대와 해안전망대가 신비스럽다.
옥천천(長興橋)을 건너 한 굽이를 돌면 신리마을이다.
식수를 구하기 용이한 옥천마을 일부와 토지가 비옥하고 평지인 중령마을을 합하여
새 마을을 만들었다 해서 신리(新里)라 부르게 되었다는 마을.
대한불교 진각종의 성지라는 금강원이 있고,사동해안을 따르면 빤히 보이는 마을이
사동3리, 울릉8경 중 1인 장흥망월(長興望月)로 유명하다는 마을이다.
밤까지 기다리겠는가 밤에 다시 오겠는가.
대나무가 많아서 죽령이라 했으나 지금은 일부지역만 있을 뿐이며 개척민들이'길이
흥성하라'는 뜻으로 장흥동이라 부른다는데 울릉신항이 들어서고 있는 마을이다.
신항 공사는 지금도 진행중이며 울릉(사동)항 여객선 터미널이 이미 문을 열고 현재
독도여객선과 대아고속해운의 씨플파워호(울릉~묵호)가 입출항하고 있다.
한데, 사동항의 공사 규모는 보다 훨씬 큰 것 같다.
우리 해군의 최대 군함들이 접안할 수 있는 해군기지로.
제주도의 강정마을과 달리 잠잠한 것이 다행일까 기이한 일일까.
울릉도에도 민항시대가 곧 열리게 되며 사동항에 활주로가 개설된단다.
찬성과 반대, 택일이 난처할 사동항이다.
그 뿐 아니다.
가두봉을 절취, 개발하여 현 울릉도 대지면적(전체)의 2배 이상 부지를 새로 만들자.
그래서 공항과 골프장을 유치하는 등 울릉도를 개발하자는 주장이 진작 떴었다는데
그 후 어찌 되어가고 있는지?
성인봉을 깎아서 세계 제일의 고산 관광 위락단지를 만들고, 이를 뒷받침할 전천후
해저터널을 뚫을 계획은 왜 빠졌는가.
일제의 잔재라면 쓰레기통 이름이라도 바로잡을 것 같은데도
성인봉 등산로 안평전 코스가 새각단과 옥천동에서도 있는데 여기 신항에서도 간령
넘어 오르는 등산로가 있다.
하긴, 제주도가 한라산록에 분포되어 있는 것 처럼 3무(無)5다(多),신비의 섬이라는
울릉도 1읍 2면 10리(25행정리) 57마을 10.700여명도 성인봉 자락에 흩어져 있다.
(3무: 도둑, 공해, 뱀 / 5다: 향나무, 바람, 미인, 물, 돌)
488m간령(間嶺)이 남하해 바다로 내려오면 오각형 울릉도의 촤남단 꼭짓점 가두봉
(可頭峰)이다.
해발197m 화산암 가두봉 아래로 난 피암터널, 가두봉터널(35m)을 P턴하듯이 돌면
3층 높이쯤 되는 가두봉등대와 '낙조의 절경 서면' 표석이 있다.
'녹색섬의 관문 울릉읍'이 끝나고 서면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가두봉등대는 방파제위에 서서 방파제의 위치를 알리며 육지와 선박의 위치를 확인
하게 하는 무인등대로 저동항,사동신항에서 이미 보았고 현포항,천부항에도 있단다.
바다로 돌출한 가두봉은 울릉도의 남쪽과 서쪽을 나누며 망향봉에서 사동항까지의
남쪽을 시야에서 완벽하게 차단해버린다.
고개를 우향우로 고정하고 걸을 수 밖에 없는 해안길이다.
크던 작던 배 한 척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 서남동 해안에 비해 아주 단조로운 바다
때문이 아니라 지질에 무지하기 때문에 설명할 수 없는 기묘한 바위들의 인력이다.
울릉도는 모래가 귀한 섬이라 해수욕장 또한 귀하며 하나같이 규모 작은 몽돌해변
인데 서면 통구미마을 해변도 그 중 하나다.
마을 서쪽 산정을 중심으로 천년의 향나무를 비롯해 산 일대에 자생하는 크고 작은
향나무와 해송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데 천연기념물제48호다.
남양3리인 이 마을은 울릉도의 유일한 자연포구 지방어항인데 산이 양쪽으로 높게
솟아있고 골짜기가 좁고 깊어서 통처럼 생겼다 하여 통구미(桶邱尾)라 했단다.
앞 포구의 거북을 닮은 거대한 암석이 마을을 향하여 기어가는 듯 한데 마치 거북이
들어가는 통 같다고 통구미(桶龜味)라고도 불렀단다.
현재의 한자표기 통구미(通九味)는 일제강점기에 일인들에 의하여 시작되었다는데
왜 옛 표기를 되찾으려 하지 않는지 괴이쩍은 일이다.
일제의 잔재 뿌리 뽑기가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 전국적 현상이다.
울릉도땅 독도에 대한 억지부리기가 끊이지 않는 일본과의 관계로 보아서는 일제의
잔재라면 쓰레기통 이름이라도 바로잡을 것 같은데도.
화산분출의 산물인 현무암질 집괴암과 용암류가 모암으로 구성돼 있으며 화산분출
당시 용암류의 유동구조가 잘 나타나 학술적, 교육적 가치가 높다는 거북암.
가두봉등대에서는 이 바위가 분리되지 않아 보였는데 외로이 떠있다.
보는 방향에 따라 바위 위로 올라가는 모양의 거북이와 내려가는 듯한 거북이가 6~
9마리 정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기암이다.
1급 낚시터인데다 몽돌해변, 천연기념물 등 관광자원이 풍부해 작은 마을이 신바람
났나 너른 데크 휴식처를 만드는 등 관광객 맞을 준비에 열성적인 것 같다.
향나무단지 산아래로 뚫린 굴은 142.5m 통구미터널이다.
예산 때문이었을까 통과 차량으로 보아 굳이 넓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을까.
교행할 수 없는 왕복1차로 터널이며 양쪽 입구에 설치된 신호등이 진입을 관리한다.
한쪽이 파란 불일 때 반대쪽은 빨간 불이 켜지는데 울릉도 최초의 신호등으로 명물
대접을 받고 있다나.
기암절벽, 바위산 자락에 조성되어 테트라포드(TTP)로 파도로부터 보호받고 있는
도로는 250m 남통과 375m 남양 두 터널을 통과한다.
양 터널 간의 거리가 짧기 때문인지 역시 같은 왕복1차로 터널의 진입을 두 터널 밖
쪽에 설치된 신호등이 관리한다.
35m남양피암터널을 지나면 남양1리 골계마을이다.
"비파산을 사이에 두고 동서 두 골짜기에서 냇물이 흘러 내리고 있어 다른 마을보다
골짜기와 시내가 많다고 해서 골계(곡계)"라 불렀다는 마을.
이조 고종 때의 검찰사 이규원 일기에는 곡포(谷浦)로 되어 있으나 행정동명을 제정
하면서 겨울에도 울릉도에서 가장 따뜻한 지세라 하여 남앙동(南陽)"이라 했단다.
기암들 중에서도 더 걸출한 바위는 따로 이름을 갖고 있다.
저동항의 촛대바위, 북저바위를 비롯해 서면의 거북바위, 오리바위, 얼굴바위 등은
이미 보고 왔지만 무수히 다가오고 있다.
섬목25km 표지판에 정신이 퍼뜩 드는 듯 했다.
4시간에 겨우 10km 걸었다면 지나치게 만만디 했거나 주변 경관에 몰두한 탓일 터.
명이빵 먹으며 명이를 생각하고, 명이를 생각하며 명이빵 먹고
남양천(남양교)과 남서천(남서천교) 사이, 제법 번화한 남양1리는 서면 소재지다.
남양~태하의 태하령 옛길(울릉도둘레길)이 시작되는 지점이고.
도로변의 간판에 끌려 들어간 집은 '세계속의 녹색섬 울릉도의 상징 명이빵' 집.
일명 '산마늘'인 '명이'로 만드는 빵집인데 메이커의 인심인가 후(厚)하다.
노변에 많이 걸린 현수막 "산나물 채취 중 추락사고로 소중한 생명을 잃었습니다.
당신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를 자주 보아왔는데 명이 때문이란다.
육지와 달리 울릉도에서는 일정기간 채취를 허용하는데 2011~13년에 나물 채취 중
사망10명, 부상50명의 인명 피해가 있었단다.
10.000여명에 불과한 인구에 비하면 큰 피해라 하겠는데 올해에도 이미 3명이 사망
했다는데도 나물채취 인구는 날로 늘어만 간다는 것.
일당 50~60만원을 거뜬히 챙길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채취자의 말이다.
산나물의 왕 중 왕인 명이가 인명 사고의 주범인데 수익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데
반해서 채취의 위험부담 또한 더 크다는 것.
남양몽돌해변을 지나 국가어항 남양항의 끝 방파제 옆 정자를 점심식당으로 정했다.
2층 정자로 빵집에서 산 명이빵을 먹기 안성맞춤인 곳이라.
명이 때문에 유명을 달리한 울릉도민들의 명복을 빌며 명이빵을 먹는다?
명이를 위해 목숨을 버린 의인이 아니라 수입이 가장 좋은 명이 욕심에 위험 지역을
마다 하지 않은 사람들인데.
모든 화(禍)의 근원은 욕심이다.
명이빵을 먹으며 명이를 생각한 결론이다.
바로 곁에는 기이한 바위, 이름하여 사자바위가 있다.
신라22대 지증왕(智證/삼국유사에는智訂麻立干/재위500~514)때 하슬라주(何瑟羅
州)의 군주 이사부(異斯夫)가 우산국(于山國/현 울릉도)을 복속시켰다.
신라군은 군선뱃머리에 나무사자를 싣고 가서 정벌했는데 그 때의 목사자가 현재의
사자바위가 되었다는 것이 전설이다.
남양동 뒷산은 해발503m 비파산(琵琶山)이다.
"화산지형에서 대표적으로 나타나는 주상절리현상으로 갈라진 암석의 모양이 비파
와 비슷하다고 해서 비파산"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산.
옛날 우산국일 때, 우해왕이 딸 하나를 남기고 죽은 사랑하는 왕비의 죽음을 슬퍼해
시녀들에게 매일 비파를 타게 해서 비파산이 되었다는 전설도 있는 산.
국수가락 처럼 갈라진 바위라 해서 국수산이라고도 하는 높이 340m조면암[粗面巖)
자락의 기암이 나 보기에는 사자바위 같은데 글쎄.
사자바위 뒤 짧은 남서터널을 벗어나면 뒤로 독특한 바위가 투구봉이란다.
이사부에게 항복한 우산국 우해왕이 벗어던진 투구가 바위로 변했다는 것.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