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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 남선 교수님과 함께하는 풍수답사입니다. *
정기답사는 홀수달 둘째주 일요일에 실시하며 일정에 변동이 생길 시 미리 공지하겠습니다.
우리의 명절 한가위가 9월 12일인 관계로 정기답사를 그 다음주로 미루어 진행하오니 양해바랍니다. 풍수 격언에 '생거진천(生居鎭川) 사거용인(死居龍仁)'이란 말이 있듯이 진천에 터를 잡고 살지는 못할지라도 답사는 꼭 가야할 것 같기에 벌초때문에 마음고생 하시지 마시고, 조상님께 정성과 예를 다해 성묘도 잘 하시고, 바람 선선하게 부는 좋은 날에 진천으로 가시게요.
1. 일시 : 2011년 9월 18일 (일)
2. 장소 및 시간 : 아주대 정문 오전 8시 출발
3. 답사지
1. 배극렴 선생 묘(충북 증평군 증평읍 송산리 산28)
배극렴은 자는 양가(量可), 호는 필암(筆菴)·주금당(晝錦堂), 시호는 정절공(貞節公)으로 1376년(우왕 2년)과 1378년(우왕 4년) 2차례에 걸쳐 왜구를 격파하였다. 1388년(우왕 14년) 조전원수(助戰元帥)로서 위화도회군을 결행하여 구세력을 추방하고, 1392년 우시중으로 있을 때 조준(趙浚)과 모의하여 공양왕을 폐하고 이성계(李成桂)를 추대하여 조선 최초의 영의정이 되었다. 묘의 형태는 직사각형으로 봉분 아랫부분에 둘레석을 둘렀으며, 묘 앞에는 상석과 향로석이 있다. 묘역에는 신도비(神道碑: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 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 비)가 있는데, 1888년(고종 25년)에 세운 것이다. 1994년 12월 30일 충청북도기념물 제98호로 지정되었다.
2. 정철 선생 묘(충북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 531)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시인인 송강 정철(1536년∼1593년)의 묘소이다.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계함(季涵), 호는 송강(松江). 한양 출신. 아버지는 돈녕부판관 정유침(鄭惟沈)이고, 어머니는 안팽수(安彭壽)의 딸이다. 어려서 인종의 귀인인 큰누이와 계림군(桂林君)의 부인이 된 둘째 누이 때문에 궁중에 자주 출입하면서 경원대군(慶源大君 : 명종)과 친해졌다. 1545년(명종 즉위년) 을사사화에 계림군이 관련되자 그 일족이 연루되었는데, 이때 아버지의 배소(配所)에 따라다녔다. 1551년 아버지가 유배에서 풀려나자 할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전라도 담양으로 이주하여 과거에 급제할 때까지 10년간을 살았다. 임억령(林億齡)에게 시를, 김인후(金麟厚)·송순(宋純)·기대승(奇大升)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이이(李珥)·성혼(成渾)·송익필(宋翼弼) 같은 유학자들과 친교를 맺었다. 명종 17년(1562년)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였고,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쳐 선조 17년(1584년)에 대사헌이 되었다. 1589년 우의정이 되어 서인의 대표로 동인을 추방하였으며, 다음해 좌의정에 올랐다. 1591년 광해군의 책봉을 건의하여 파직하였으나,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기·충청·전라의 3도체찰사가 되었고, 1593년 중국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정철은 정치가로서 큰 일을 많이 하였지만, 붕당 싸움에 말려 반대당의 배척을 받았다. 그러나 가사문학의 대가로 국문학에 크게 공헌하였으며, 작품으로는『관동별곡』·『사미인곡』·『속미인곡』등의 가사와 시조 107수가 전한다. 묘는 원래 고양군(현 고양시) 원당면에 있던 것을 조선 현종 6년(1665년)에 송시열 선생이 현 위치에 묘자리를 정하고 후손 정양이 이장하였다. 묘 앞에는 상석이 있고, 상석을 중심으로 좌우에는 망주석·문인석이 각 1쌍씩 있으며, 묘의 오른쪽에는 묘비가 있다.
3. 보탑사(충북 진천군 진천읍 연곡리 483)
충북 진천군 보련산(寶蓮山) 자락에 있는 사찰로, 1996년 고려시대 절터로 전해지는 곳에 비구니스님인 지광·묘순·능현스님이 창건하였다. 1992년 대목수 신영훈을 비롯한 여러 부문의 장인들이 참여한 불사를 시작하여 1996년 8월 3층 목탑을 완공하였고, 그 후 지장전·영산전·산신각 등을 건립하고 2003년 불사를 마쳤다. 황룡사 9층목탑을 모델로 만든 3층목탑의 높이는 42.71m로, 상륜부(9.99m)까지 더하면 총 높이가 무려 52.7m에 이르는데 이는 14층 아파트와 맞먹는 높이이다. 목탑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은 모두 29개이다. 강원도산 소나무를 자재로 하여 단 한 개의 못도 사용하지 않고 전통방식을 고수하여 지어졌다 한다. 1층은 대웅전(199㎡), 2층은 법보전(166㎡), 3층은 미륵전(136㎡)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웅전에는 사방불(동방 약사우리광불, 서방 아미타여래불, 남방 석가모니불, 북방 비로자나불)이 배치되어 있으며, 법보전에는 윤장대(輪藏臺; 경전을 넣은 책장에 축을 달아 회전하도록 만든 책장)를 두고 팔만대장경 번역본을 안치했고, 한글법화경을 총 9t의 돌판에 새겨 놓았다. 미륵전에는 화려한 금동 보개 아래에 미륵삼존불을 모셨다. 2층과 3층 외부에는 탑돌이를 할 수 있도록 난간이 설치되어 있다. 보탑사에는 그밖에 장수왕릉(장수총)을 재현해 만든 지장전, 너와지붕을 얹은 귀틀집 형식의 산신각, 부처가 500명의 비구들에게 설법하던 모습을 재현해 만든 영산전, 와불 열반적정상을 모신 적조전, 법종각·법고전·불유각·삼소실 등의 건축물이 조성되어 있다. 경내에는 보물 제404호로 지정된 고려시대의 석비인 ‘진천 연곡리 석비’도 있다.
4. 이상설 선생 생가(충북 진천군 진천읍 산척리 134-2)
이상설(1870년∼1917년) 선생이 태어난 생가이다. 선생은 현 가옥에서 학자이신 이행우의 아들로 태어나 1894년 문과에 급제한 뒤 성균관 교수, 한성 사범학교 교관 등을 역임하면서 영어, 프랑스어 등 7개 국어를 구사하여 신학문을 깨우쳤다. 1904년에는 보안회의 후신으로 대한 협동회를 조직하여 민족 운동을 하였으며, 탁지부 재무관 법부협판을 거쳐 1905년에는 의정부 참찬에 발탁되었다. 같은 해인 11월7일에 수옥헌에서 이또 주재하에 대신회의가 강제 개최되어 이완용 박제순 등의 찬성을 조약체결을 선언하였는바 선생은 대신회의에 실무 책임자임에도 일본군의 방해로 참석하지 못하고 다음날 새벽에 알게 되어 땅을 치며 통곡하였다. 1906년 4월에 국권회복운동에 앞장설 것을 결심하고 이동녕, 정순만과 같이 망명길에 올라 상해를 거쳐 북간도 용정으로 가서 서전서숙을 건립하고 자비로 항일 민족교육을 시켰으며 1907년 헤이그에서 개최하는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라는 고종황제의 위임장을 받고 이준, 이위종과 함께 한국의 실권과 국권의 회복문제를 국제여론에 호소하려다 실패한 후 이준은 현지에서 순사하였다. 선생은 귀국하지 않고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등 여러 나라로 다니면서 일본의 침략성을 폭로하고 한국의 독립이 동양평화의 열쇠라고 주장하였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소련령으로 이주, 한흥동의 한인마을을 건설, 민족교육을 시키다 1917년 47세 때 병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5. 이시발 선생 묘(충북 진천군 초평면 용정리 산21-3)
이시발은 자(字)가 양구(養久)요 호(號)는 벽오(碧梧)이고 경주인(慶州人)으로 오촌 대건(梧村大建)의 아들로 청원군 오창면 오근리(현 청주시 오근장)에서 선조(宣祖) 2년(1569년)에 태어났다. 오자(梧字)는 오근리(梧根里)의 연고를 딴 것으로 그의 부친의 묘(墓)를 시발(時發)이 죽은 뒤 초평면 용정리로 이장(移葬)하고 그 뒤 자손이 늘어나 초평 이씨(草坪 李氏)의 호칭이 붙었다. 선조 22년(1589년)에 문과(文科)에 급제 승문원(承文院)에 등용되고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박춘무(朴春茂)와 함께 큰 공을 세웠으며 선조 29년(1596년)10월 이 몽학의 난(李夢鶴亂)을 평정하고 장락원정(掌樂院政) 형조판서(刑曹判書)와 북변(北邊)을 방어하기 위해 함경감사로 포대와 성곽을 보수하였다. 이괄의 난(李适亂)때 체찰부사(體察副使)로서 난을 수습하는데 공을 세우고 남한산성의 역사(役事)를 감독하다 죽었다. 이에 사후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고 시호(諡號)는 충익(忠翼)이다. 신도비(神道碑)는 효종(孝宗) 9년 (1658년)에 건립되었는데 비의 비문은 송시열(宋時烈)이 지었으며 서(書)는 송 준길(宋浚吉) 이,전(篆)은 이정영(李正英) 썼다. 비문의 내용은 선조 광해군 인조의 삼대왕(三代王)을 잘 섬기면서 여진인(女眞人)을 무마하여 백성의 생활에 안정을 주고 지방민(地方民)을 평온하게 하였던 공(攻)을 찬양하였다. 진천군 초평면 용정리 경주이씨 묘역은 이시발이 세상을 떠난 몇 해 후 이시발의 아들 이분에 의해 두 번째로 이장한 곳이다. 이시발의 묘도 1626년 이시발이 세상을 떠났을 당시에는 청원군 옥산면 환희리 천내의 선영 아래 장례를 치렀으나 1658년 아들 이분이 진천군 초평면 용정리 현 위치로 이장한 것이다. 그 뒤 자손들이 이곳에서 번성함에 따라 그 일족에게 초평이씨(草坪李氏)라는 호칭이 붙게 되었다.
4. 회비 : 4만원 (차량 대여비 및 중식 석식 기타 비용 포함) (당일 총무에게 납부)
5. 연락처 : 총무 김 은 희 (010 - 3228 - 6489) 회장 김 종 대 (010 - 4234 - 70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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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총무님 수고많으시네요.. 2명 예약신청합니다.
예 잘 보내시고 답사때 뵈어요 ()
총무님 찐득한 여름 잘보내셨죠?...1명 예약(김항용) 신청합니다^^
예이 그날 뵙겠습니다. 잘 보내셔요
참가 합니다. 다음주에는 벌초(사초 ,금초)를 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예환영합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오셔요
저도 가겠습니다~!! (조재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