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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역 고려사 : 열전
[ 鄭道傳 ]
정도전(鄭道傳)1)은 자가 종지(宗之)이며 검교밀직제학(檢校密直提學)을 지낸 정운경(鄭云敬)의 아들이다. 공민왕(恭愍王) 때 과거에 급제2)하여 충주사록(忠州司錄)으로 임명되었고 거듭 승진해 통례문지후(通禮門祗侯)가 되었다. 부모상을 잇달아 당하여 여묘(廬墓)살이3) 하며 상을 마치자 불러서 태상박사(太常博士)로 임명하였다. 왕이 몸소 종묘에 제향할 때 정도전을 시켜 그림을 상고해 악기를 만들게 하였다. 예의정랑(禮儀正郞)·예문응교(藝文應敎)·성균사예(成均司藝)를 지냈으며 문학(文學)으로 이름이 나 왕이 그를 매우 아꼈다.
우왕(禑王) 초 북원(北元)의 사신이 왔을 때 이인임(李仁任)과 지윤(池奫)이 그들을 받아들이려고 하자 정도전(鄭道傳)이 김구용(金九容)·이숭인(李崇仁)·권근(權近)과 함께 도당(都堂)에 글을 올려4)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인임과 경복흥(慶復興)이 그 글을 물리쳐버리고 정도전에게 원나라 사신을 영접하라고 지시하자 정도전은 경복흥의 집으로 가서,
“내가 사신의 머리를 베어 오든지 그렇지 않으면 명나라로 묶어 보낼 것이오.”
라고 대들었다. 경복흥이 노해,
“그런 식으로 생각한다면 신하 김의(金義)5)와 무엇이 다른가?”
라고 꾸짖으니 정도전이 이해득실을 자세히 말했는데 그 태도가 매우 불손했다. 또한 태후(太后)에게도 사신을 받지 말아야한다고 건의하자 경복흥이 더욱 노해 이인임과 함께 정무를 보지 않으니 왕이 정도전을 회진현(會津縣 : 지금의 전라남도 나주시)6)으로 유배7)보냈다. 대성(臺省)의 시종관(侍從官)들이 도성의 동쪽 교외에서 전송했는데, 염흥방(廉興邦)이 배상도(裵尙度)를 보내어,
“내가 시중(侍中)에게 말씀드려 화가 어느 정도 풀렸으니 가지 말고 잠시 기다리라.”
는 전갈을 보냈다. 정도전이 술을 마시다가 분연히,
“내가 주장한 것이나 시중이 노한 것은 각자의 견해를 지킨 일로 모두 나라를 위해 그리한 것이오. 지금 왕명이 내린 터에 어찌 공의 말을 듣고 중지하겠소?”
하고는 말을 타고 떠나버렸다. 재상(宰相)이 그 말을 듣고 아직 뉘우치지 않았다고 여겨 사람을 보내 곤장을 때리려고 하였는데, 마침 석기(釋器)의 난8)이 일어나는 바람에 중지했다.
얼마 후에 사면하여 편의대로 거주지를 선택9)하게 하자 정도전은 삼각산(三角山 : 지금의 서울특별시 북한산) 아래에 움막을 짓고 경서를 강의했는데 배우는 자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그는 항상 후학들을 가르치고 이단을 물리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 고성(固城 : 지금의 경상남도 고성군)의 요망한 백성 이금(伊金)10)이 스스로를 미륵(彌勒)이라고 칭하면서,
“만약 내 말을 믿지 않으면 3월에 이르러 해와 달에 모두 빛이 없어질 것이다.”
라고 많은 백성들을 현혹시키자 승려 찬영(粲英)11)은,
“이금이 말하는 것은 모두 황당무계하다. 해와 달에 빛이 없어질 것이라는 그의 말은 더욱 가소롭다. 나라 사람들이 어찌 그 같은 헛된 말을 믿겠는가?”
라고 했다. 이에 정도전이,
“이금과 석가(釋迦)는 그 말에 있어서 다름이 없다. 다만 석가는 멀리 전생(前生)이나 후생(後生)의 일을 말하니 사람들이 그 거짓됨을 알지 못하고, 이금은 바로 석 달 뒤의 일을 말하니 거짓이 바로 나타날 뿐이다.”
고 하니 승려 찬영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시 전의부령(典儀副令)으로 임명되고 성균좨주(成均祭酒)로 승진하였다가 외직을 간청해 남양부(南陽府 : 지금의 경기도 화성군)의 수령으로 나가게 되었다. 우리 태조(이성계)가 그를 천거하자 불러서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으로 임명하였더니 여러 차례 계책을 올렸다.
창왕(昌王)이 왕위에 오르자 그를 서연시독(書筵侍讀)으로 충원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밀직부사(密直副使)로 발탁하였다. 우리 태조를 따라 공양왕(恭讓王)을 추대12)하니 왕이 그를 충의군(忠義君)으로 봉하고 추충논도좌명공신(推忠論道佐命功臣)의 호를 내렸으며 삼사우사(三司右使)로 임명했는데 그 교서는 이러하다.
“경의 학문은 하늘과 인간의 일에 통하고 식견은 고금을 꿰뚫어 일찍이 과거에 급제한 후 드디어 무사(膴仕)13)의 지위에 올랐다. 부모상을 당하여서는 옛 성인의 제도대로 삼년상을 치렀으며 어린 동생들을 훈육해 자립할 수 있게 하고 노비 가운데 건장하고 힘이 센 자는 모두 형제와 자매에게 주고 자신은 늙고 약한 자만 가졌으니 효성스럽고 우애 있는 성품에서 그렇게 한 것이다. 현릉(玄陵 : 공민왕)이 경을 선발해 주상(冑庠)14)에 두고 조서(詔書)의 작성을 맡기니 경은 염락(濂洛)의 도15)를 주창하고 이단의 설을 배척하였다. 또 후학을 훈육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고 인재를 양성하여 사장(詞章 : 시가와 문장)을 좋아하는 우리나라의 풍습을 완전히 바꾸었다.
명나라가 개국하자 우리 현릉께서 다른 나라보다 앞서 그 제도를 본받으니 천자께서 가상히 여겨 제복(祭服)과 악기(樂器)를 내려 주었다. 이에 따라 왕이 몸소 태실(太室)에 제사를 모실 때 경은 태상(太常)으로 음률을 조화시키고 제도를 정비하니 현릉께서 더욱 소중하게 여기게 되었다. 현릉이 돌아가시자 권신들이 신우(辛禑)를 옹립하기로 결정하자 경이 허금(許錦)과 유백유(柳伯濡)16)에게 ‘대세가 이미 결판났으니 무효화하기는 어렵다.’고 하며 왕대비(王大妃)께서 섭정하도록 건의하려 했다. 그러나 그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유백유와 함께 ‘이 일에 참여할 한 명의 충신도 없구나.’ 하고 탄식했다.
그 전에 김의가 명나라의 사신과 함께 요동(遼東)으로 가다가 현릉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는 갑자기 역심을 품고 사신을 죽인 후 오랑캐의 땅으로 달아났다. 경은 정몽주(鄭夢周)·임박(林樸)·박상충(朴尙衷)과 함께 집정(執政)에게 ‘선왕이 돌아가시고 명나라 사신도 환국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 사정을 명나라에 알리지 않는다면 사직이 위태로울 것이다.’라고 알렸다. 집정은 사람들이 모두 겁을 내어 난색을 표하며 감히 가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을 구실로 내세워 거부했는데, 경이 정몽주 등과 함께 최원(崔源)17)을 설득해 사신으로 가게 함으로써 명나라로부터 우리가 받을 죄를 면하게 했다. 권신이 신우를 현릉의 아들이라고 오랑캐(북원)에게 보고함으로써 왕위 계승을 기정사실화하려고 표문을 만들었는데, 경은 박상충·임박과 함께 서명을 거절하여 그 일은 중지되고 말았다. 경이 적인걸(狄仁傑)·장간지(張柬之)나 진평(陳平)·주발(周勃)처럼 나라를 부흥시킨 충성이 있음을 이런 일에서 잘 알 수 있다.
그 후 북원의 태자가 사신 편에 조서라는 것을 보냈는데 글과 말이 심히 불손했으나 권신들은 나라 사람을 거느리고 영접하려고 했다. 이에 경이, ‘정말 현릉의 신하된 자라면 이 사신을 영접해서는 안 된다.’고 역설하자 집정이 마지못해 그 말을 따랐다. 그러나 그의 뜻에 거슬리어 남쪽 변두리에 유배를 당하여 모두 7년을 보냈지만 아무런 어려운 빛을 보이지 않았다. 올바른 길을 돈독히 지키는 자가 아니라면 누가 이처럼 할 수 있었겠는가?
뒤에 김유(金庾)·홍상재(洪尙載)18)·김구용(金九容) 등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모두 억류당하고 조빙(朝聘)의 길도 끊어졌다. 그러나 경이 정몽주와 함께 황제의 생신을 축하하는 사신이 되어 서둘러 도착하자 황제가 가상히 여겨 김유와 홍상재 등을 돌려보냈다. 우리나라가 사대(事大)의 예를 잃지 않고 종묘사직과 백성들이 영원히 명나라에 의지하게 된 것은 오직 경과 정몽주의 힘이다. 임무를 완수하고 귀국하자 나는 장차 경을 재상에 올리려 하였으나 경은 도리어 외직을 구했으니 마음속에 추구하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남양(南陽 : 지금의 경기도 화성군)의 백성들은 경의 은혜로운 행정에 감화되어 지금도 칭송하고 있다.
신우(辛禑)·신창(辛昌) 부자가 왕위를 이어 왕을 참칭하고서 우리 왕실의 제사를 단절하고 우리 백성을 해치려 하니 조상의 신령과 백성들이 원통해 한 것이 무릇 16년이었다. 천자가 다른 성씨로 왕을 삼은 것을 질책하자 경은 여러 대신들과 함께 결단하여 내가 신종(神宗)의 가장 가까운 현손19)이자 연장자라는 이유로 나로 하여금 종사를 잇게 했다. 단 하루 만에 사직을 회복하여 만세토록 큰 복록을 연장하게 했으니 그 크고 위대한 공훈은 고금의 역사를 살펴보아도 비교할 것이 드물다.
경은 온축해둔 경륜을 펴고 배운 바를 행하여 폐정(弊政)을 혁파하고 예악(禮樂)을 밝혔으니 참으로 왕을 보좌할만한 유능한 신하라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공신각에 초상을 걸고 공을 기록하며, 조상을 추증(追贈)하고 대대로 죄를 용서하도록 하며 적손들이 작위를 세습하도록 할 것이다. 또한 토지와 노비와 은과 비단을 내려주노니 나의 명을 받들어 더욱 충성을 다하라.”
당시 어떤 자가 큰 범을 잡아 바치자, 정도전이 건의했다.
“여러 도에서 명목도 없이 바치는 물품은 물리치는 것이 편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해당 관청에 맡겨서 나라의 비용에 충당하게 하소서. 큰 범과 같은 것은 들것으로 운반하려면 수십 명이 동원되어야 하고 그 고기는 제수로도 쓰지 못하니 장차 무슨 용도로 사용하겠습니까?”
왕이 옳은 말이라 여겨 올라오는 공물은 모두 해당 관청에 맡겼다. 왕이 경연(經筵)에 참석해 정도전에게 “가짜 조정에서 둔 첨설직을 없애려고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라고 물었다. 정도전이,
“옛날에 사람 쓰는 법에는 네 가지가 있었는데, 문학(文學)·무과(武科)·이과(吏科)·문음(門蔭)이 그것입니다. 이 네 과로 사람을 뽑아 적합하면 등용하고 적합하지 못할 경우 내친다면 누가 원망하겠습니까?”
라고 대답하자 다시 “품계가 높은 자는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라고 물었다. 이에,
“옛날 송나라 때 산관(散官)을 위하여 대단관(大丹館)과 복원궁(福源宮)을 설치하거나 혹은 제조(提調)나 제거(提擧)로 임명하기도 했습니다. 그것을 본받아 별도로 궁성숙위부(宮城宿衛府)20)를 두고 밀직(密直)과 봉익(奉翊)21)의 자리에 있는 자는 제조궁성숙위사(提調宮城宿衛事)로 삼고, 3·4품은 제거궁성숙위사(提擧宮城宿衛事)로 삼으소서. 그리하면 적절한 행정이 될 것이고 체통도 엄격해질 것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외지에 있는 자의 처리방안을 묻자,
“개경에 있는 자를 이와 같이 처리하면 외지에 있는 자도 다투어 와서 부임하여 왕실을 호위할 것입니다. 그런 뒤 품계의 고하를 따져서 제조(提調)22)나 제거(提擧)23)로 삼으소서.”
라고 하니 왕이 그 말에 따라 궁성숙위부를 설치했다. 정도전이 또 다음과 같이 건의했다.
“당나라에서 관리를 임용하는 법에는 다섯 가지 조목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교양(敎養)으로서 재능과 덕망을 성취시키는 것이고, 둘째는 선거(選擧)로서 특출나게 우수한 자를 뽑는 것입니다. 셋째는 전주(銓注)로서 직책과 소임을 맡기는 것이고, 넷째는 고과(考課)로서 공적과 과실을 조사하여 밝히는 것이며, 다섯째는 출척(黜陟)으로서 징계와 권장의 본보기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조목 가운데 또 각각의 조목이 있으니, 경서와 사서를 널리 배우고 율령에 통달하며 궁술과 기마술을 익히는 것의 세 가지가 교양의 조목입니다. 문학(文學)·재간(才幹)·무예(武藝)·문음(門蔭)의 네 가지는 선거의 조목입니다. 덕망과 식견이 있는 자는 재상으로 삼고 지략과 위용이 있는 자는 장수로 삼으며, 거리낌 없이 직언하는 자는 대간으로 삼고 밝게 살펴 공평하게 용서하는 자는 형관(刑官)으로 삼으며, 산수(算數)에 통달한 자에게 재정을 맡기고, 기예가 있고 정밀한 자에게 공장(工匠)을 맡겼으니, 이 여섯 가지는 전주의 조목입니다. 사적인 일을 도외시하고 공적인 일만 알아 자기 직무에 부지런히 힘쓰는 것을 공적으로 삼고, 공적인 일을 피폐시킨 채 사복만 채우면서 관청을 비워두고 자기 직무에 충실치 않은 것을 과실로 삼았으니 이 두 가지는 고과의 조목입니다. 직위를 올리고 녹봉을 더해주는 것은 척(陟)이고, 관직을 삭탈하고 유배보내는 것이 출(黜)이니, 이 두 가지는 출척의 조목입니다.
본조의 관직 임용하는 법식은 현재 크게 무너진 상황입니다. 교양하려고 해도 사도(師道)가 밝지 않고, 선거를 하려 해도 사욕이 공적인 이익을 가려버리며, 전주하려고 해도 현명한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이 뒤섞여 있으며, 고과하려고 해도 청탁이 무성하며, 출척하려고 해도 뇌물이 공공연히 횡행하고 있습니다. 다섯 가지가 모두 피폐해졌으니 무엇으로부터 사람을 얻겠습니까? 근래에 5도출척사(黜陟使)24)를 각 도에 파견했으나, 이것은 그 근본을 헤아리지 않고 그 말단만 정리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왕이 그 건의를 깊이 납득하고 경연검토관(經筵檢討官) 한상경(韓尙敬)25)에게 글로 작성해서 바치라고 분부했다.
금성(金星)이 달을 꿰뚫자 왕이 정도전에게 “무슨 재앙이 생길 것 같은가?”라고 물었다. 그가 “허물이 중국에 있지, 우리 조정과는 관계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하니 당시 여론이 그를 비난하였다. 검토관(檢討官) 신원필(申元弼)이 세자의 명령을 빙자했다고 헌부에서 탄핵하자 왕이 그를 파직시켰으나 얼마 후 탄핵한 사람을 괘씸하게 여겨 그에게 죄를 주려 했다. 이에 정도전이,
“신원필은 바로 전하께서 왕위에 오르시기 전부터 모셨던 신하이니 만약 그의 죄를 용서한다면 언관들이 필시 전하의 감정이 사심에서 나왔다고 할 것입니다. 이는 즉위초의 정치적 사안으로는 좋은 일이 아닙니다.”
라고 건의하자 왕의 노여움이 적이 풀어졌다. 뒤에 정당문학(政堂文學) 동판도평의사사사(同判都評議使司事) 겸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으로 임명되자 왕이 적경원(積慶園)26) 중흥비(中興碑)를 짓게 한 후 옷 한 벌과 어구(御廐)의 말 한 필을 내려주었다. 5군(軍)을 줄여 삼군도총제부(三軍都摠制府)로 하고 정도전을 우군총제사(右軍摠制使)로 삼으니27) 정도전이 사양하며 말했다.
“삼군을 창설할 때 저는 중국에 있었기 때문에 헌사(憲司)의 건의 내용을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원수(元帥)를 없애 삼군으로 개편하면서 저를 총제사(摠制使)로 삼으신다면 모든 직위에서 쫓겨난 원수들이 필시, ‘정도전이 원수를 없애고 스스로 총제가 되었다.’고 앙앙불락하면서 원망과 비방을 퍼부을 것입니다. 또한 저는 궁술과 기마술에도 익숙하지 못하니 이 직책을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심지어 사전(私田)을 없애고 관복(冠服)을 고치는 등의 일은 모두 제가 한 것이 아닌데도 주변에서 모두 저를 지목하는 판에, 제가 다시 외람되게 이 임무를 맡게 되면 참소하는 말이 매일 나와 위험에 처할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다른 사람에게 명하소서.”
그러자 왕이 다음과 같이 설득했다.
“큰 나라가 삼군을 둔 것은 옛날의 제도인데 중간에 권신들에 의해 폐지되고 재상들이 각자 원수를 칭하니 모든 백성이 그들의 지휘하에 들어가 버렸다. 지금 원수를 없애고 삼군을 세우는 것은 옛날의 제도를 복구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총제는 막중한 임무를 맡은 자리로, 두 시중(侍中)과 의논해 그대를 임명한 것이니 경은 사양하지 말라.”
정도전이 “만약 참소하는 말이 나오더라도 받아들이지 마시고 미천한 저를 끝까지 지켜주소서.”라며 취임을 승낙하니 왕이 기뻐하였다.
왕이 남경(南京 : 지금의 서울특별시)으로부터 개경으로 돌아오다가 회암사(檜巖寺)28)에 들렸는데 마침 자신의 생일이었기 때문에 예불을 올리고 승려들에게 공양했다. 정도전이,
“탄신일에 승려들에게 공양하는 것은 비록 옛 법도는 아니지만 신하들이 그렇게 한다면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임금이 스스로 복을 빌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라고 반대했으나 왕은 듣지 않았다. 왕이 연복사(演福寺)29) 탑전(塔殿)을 조성하려고 경기(京畿)와 양광도(楊廣道)의 백성을 시켜 나무 5천 그루를 운반해오도록 하니 실어 나르는 소가 모두 죽어 백성들이 크게 원망하였다. 정도전이 그 피해를 극언한 후 곧이어 병을 구실로 사직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왕이 직언을 구하는 교서를 내리자 정도전이 다음과 같이 상소했다.
“제가 엎드려 교서를 읽어보니 위로는 천문(天文)의 이변을 경계하시고 아래로는 신하들의 직언을 구하면서 여덟 가지 일을 가지고 자책하셨습니다. 저는 그것을 재삼 읽으며 감탄을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전하께서는 하늘이 견책을 내려 경고하는 것을 자기 탓으로 돌리고 널리 언로를 열어 스스로의 과오에 대해 듣기를 원하셨으니 비록 옛날의 현철한 왕이라도 전하의 뜻을 넘어서지는 못할 것입니다. 저는 외람되게 재상으로 있으면서 전하를 제대로 보좌하지 못해 근심을 끼쳐드렸으며 결국 번거롭게 직언을 구하는 교서를 내리시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옛말에 임금은 머리이고 신하는 팔다리라는 말이 있으니 사람의 몸으로 비유하자면 군신은 진실로 한 몸인 것입니다. 임금이 부르면 신하가 화답하고 신하가 말하면 임금이 듣고서, 서로의 옳고 그름을 따져야만 훌륭한 정치를 기약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하늘이 견책을 내려 경고하는 것은 곧 신하로부터 말미암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재앙과 이변이 발생하면 3공(公)을 면직시키고 대신(大臣) 또한 직위를 박탈해 그것을 물리쳤으니 바라옵건대 저를 면직하시어 재앙과 이변을 그치게 하소서. 그러나 옛날의 대신들은 퇴직을 청할 때 경계하는 말을 올렸으니 교서를 받든 지금 어찌 감히 어리석은 견해나마 올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만분의 일이라도 채택되면 다행이겠습니다.
엎드려 교서를 읽어보니 ‘내가 덕을 닦지 못하여 상제(上帝)께서 믿음직스럽게 여기지 못한 것인가? 정치가 잘못되어 백성들의 여망(輿望)에 맞지 못한 것인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덕(德)이라는 것은 득(得)이니 마음에서 얻는 것이고 정(政)이란 것은 정(正)이니 그 자신을 바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른바 덕이라는 것은 애초부터 타고난 사람도 있고 수양을 거쳐 얻는 사람도 있습니다. 전하께서 지니시니 관대한 큰 도량과 인자하신 천성은 애초부터 타고 나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전하께서는 평소에 책을 읽어 성현(聖賢)께서 이루신 법을 상고해보신 적이 없으며, 일을 하시면서 당대에 필요한 일을 알지 못하시니 어찌 반드시 덕을 닦았다고 할 수 있으며 정사에 결점이 없다고 보장하겠습니까? 한성제(漢成帝)는 정무를 볼 때 조용하고 말이 적어서 군주로서의 도량을 갖추었으나 한 왕실이 망할 때 그러한 태도는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양무제(梁武帝)는 사람이 사형이 당하는 것을 보고 울면서 밥을 먹지 않아서 인자하다고 소문이 났지만 강남(江南)의 난을 막지 못하였습니다. 하늘이 부여한 천성이 아름다웠지만 덕(德)과 정(政)을 제대로 닦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아름다운 천품만을 믿지 마시고 아직 미진한 부분을 열심히 닦는 것을 늘 염두에 두신다면 덕이 닦여지고 정치가 잘 행해질 것입니다.
엎드려 교서를 읽어보니 ‘사람을 임용할 때 혹시 사적인 감정에 따라서 하였던가? 상벌이 정도(正道)를 벗어난 점이 있었던가?’라고 자책하셨습니다. 저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사람을 임용할 때 공·사 간의 어떤 마음에서 나왔건 전하께서 스스로 아실 따름이지 제가 어찌 그 마음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임명자 명단이 발표된 후 사람들이 그것을 두고, ‘아무개는 주상의 오랜 친구요 아무개는 외척이다.’라고 비판하고 있으니 저는 그 임용에 개인적인 감정이 작용하지 않았나 우려합니다. 상은 공이 있는 자를 권면하는 것이요 형벌은 죄 지은 자를 징계하는 것입니다. 상을 천명(天命)이라 하고 형벌을 천토(天討)라고 하는 것은 하늘이 상벌에 대한 권한을 임금에게 부여했다는 말이니 임금된 자는 하늘을 대신하여 상벌을 행할 뿐입니다. 상벌은 비록 임금에게서 나오는 것이나 임금이 사사로이 이것을 시행하거나 거둬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후 상벌을 받은 사람 가운데 사안은 동일한데도 상벌이 상이하게 적용된 경우가 있습니다. 김저(金佇)30)의 공술은 하나인데 그에 따라 극형에 처해진 자가 있는 반면 발탁되어 등용된 자가 있습니다. 김종연(金宗衍)이 옥중에서 달아난 사건31)은 하나인데, 감시하던 관리 가운데 한 사람은 처형당하고 한 사람은 등용32)되었습니다. 김종연이 도피 중에 반란을 모의한 것은 하나인데, 모의에 가담하고 숨겨준 사람 가운데 어떤 자는 살고 어떤 자는 죽었습니다. 잘 모르겠지만 형벌을 받아 처형된 자에게 죄가 있다면, 발탁 등용되어서 살아 있는 자는 무슨 행운을 누려 그렇게 된 것입니까? 그리고 발탁 등용되어 살아 있는 자에게 죄가 없다면 형벌을 받아 처형된 자는 무슨 잘못으로 그렇게 된 것입니까?
신우(辛禑)와 신창(辛昌)은 우리 왕씨(王氏)의 왕위를 도적질하였으니 참으로 조종(祖宗)의 죄인이며 왕씨의 자손과 신하들에게는 공동의 원수입니다. 만약 그 인척과 일당들을 처형하지 않으시려 한다면 그들을 먼 변방으로 내쫓아야만 사람들과 신령들의 마음이 흡족할 것입니다. 옛날 측천무후(則天武后)는 당 고종(高宗)의 황후로서 자기 아들 중종(中宗)의 황위를 탈취하였는데, 5왕33)이 혁명을 일으켜 무씨를 물리치고 다시 중종을 황제의 자리에 올렸습니다. 무씨는 어머니며 중종은 아들입니다. 호씨(胡氏)는, 지친(至親)인 어머니가 아들의 자리를 빼앗았는데도 5왕이 대의에 입각해 무씨를 처형시키지 않고 그 종족들을 멸족시키지 못한 것을 비난했습니다. 하물며 신우와 신창은 왕씨에게는 무씨처럼 지친의 관계가 아닙니다. 그들이 무씨와 같은 죄를 지질렀다면 그 인척과 일당들은 마땅히 무씨의 종족보다 더한 벌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근래에 대간의 간언에 따라 그들을 외지로 내쫓았기에34) 비록 하늘이 내리는 천벌을 분명히 보이지는 못했다고 하더라도 조종과 신민의 분노를 조금은 풀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몇 달도 지나지 않아 모두 전하의 은총을 받고 개경에 모여들어 거리낌없이 출입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지금 간관의 간언에 따라 그 가운데 몇 사람을 쫓아내었으나 이는 전하께서 마지못해 따른 것으로 그들을 머물러두고 돌보려는 마음은 계속 남겨두고 있습니다. 이런 조치가 무엇을 뜻하는지 저는 알지 못하겠습니다.
장수들이 회군한 후 왕씨를 옹립하기로 의논을 모았으니 이는 하늘이 재앙을 준 것을 후회하고 조종이 음으로 도와서 왕씨가 부흥할 기회였습니다. 그런데 그 의논을 저지하고 결국 신우의 아들 신창을 옹립함으로써 왕씨를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한 자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신우를 도로 맞이하여 영원히 왕씨의 계통을 단절시키려는 자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난적(亂賊)의 일당이 되었으므로 국법상 용서할 수 없는 죄인입니다. 전하께서는 이미 그들의 생명을 보전해주고 먼 지방에 안치시켰으니, 그까지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을 모두 집으로 불러놓고 위안하고 계시니 이는 마치 그들의 죄가 무고에 의한 것으로 생각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이 왕씨를 저지하고 가짜 왕 신창을 옹립한 것은 장수들이 모두 아는 바이며, 그들이 직접 사실대로 자복해 명백한 공술상의 증거도 있습니다. 그들이 신우를 맞이하여 왕씨의 계통을 끊으려고 했다는 것을 김저·정득후(鄭得厚)가 먼저 말하였고 이림(李琳)·이귀생(李貴生)35)이 뒤에 사실대로 자복하여 공술상의 증거가 아주 명백합니다. 이런데도 그것을 무고라고 한다면 천하의 난신적자 가운데 토벌할 수 있는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무릇 사람의 행동이 공의(公義)에 부합하지 않으면 반드시 사정(私情)에 부합되게 마련입니다. 전하께서 취하신 이번 조처가 공의에 부합하는 것이라면 신우와 신창의 일당들은 모두 조종의 죄인이 될 것이며, 사정에 부합하는 것이라면 신우와 신창의 일당을 남겨두어 뒷날의 근심거리를 남기는 것입니다. 윤이(尹彛)36)와 이초(李初)가 친왕(親王)더러 천하의 군사를 동원해 달라고 청한 것과 같은 일이 또한 어찌 인정(人情)에 맞다고 하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죄지은 자를 용서하면 은혜가 이보다 큰 것이 없으니 훗날 그 덕분에 인심이 저절로 안정되고 재앙과 난리도 저절로 그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저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형법은 난리를 막는 도구로 임금이 그것에 의지해 지위를 안정시키고 존경을 받는 것입니다. 형법이 한 번 흔들리면 난리를 막는 도구가 허물어지는 것을 의미하니, 힘을 얻기도 전에 재앙이 먼저 올 것이고 인심이 안정되기도 전에 난리가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당(唐)의 중종과 무삼사(武三思)의 일을 가지고 밝혀보려 합니다. 무씨 일당 가운데 가장 권세를 부린 자가 무삼사였는데 중종은 그가 자기 모친의 친조카라 하여 처형시키지 않았으며 오히려 더욱 후하게 대우했습니다. 지금 살펴보면, 5왕이 무씨의 아들을 황제로 삼았기 때문에 무삼사가 도마 위의 고기 신세에서 벗어났으니, 5왕이 중종에게만 공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무삼사에게도 천지간에 다시 살아남도록 만든 은혜가 있었습니다. 무삼사는 그 은혜를 생각해보지도 않고 스스로 자신의 죄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 걱정한 나머지 밤낮으로 5왕을 두고 권세가 너무 크고 공을 믿고 함부로 한다고 참소해 중종의 마음을 미혹시켰습니다. 중종은 무삼사가 자기를 경모한다고 여겨 가까이 하고 5왕의 권세가 너무 크다고 여겨 그들을 기피했습니다. 따라서 5왕과는 날로 소원해지고 무삼사는 나날이 밀착되어서 끝내 5왕은 죽임을 당하고 중종 자신도 시해되었습니다. 중종이 잘못 판단한 것을 탓하지 않고서, 다만 그가 공신을 살리지 못했을 뿐이라고 말한다면, 어찌 중종도 무삼사의 손에 시해당할 것을 짐작이나 했겠습니까? 친척으로 말한다면 모친의 조카며 은혜로 말한다면 생명의 은인인데도 조력을 받기는커녕 참화를 당했으니 참소하는 자를 믿기 어려운 것이 이와 같습니다. 참소하는 자의 계략을 보면, 처음에는 자신을 지키려고 참소하는 데 지나지 않지만, 그러한 악한 행위가 계속되면 그 길에 점점 이력이 나 딴 사람의 몸을 망치고 딴 사람의 집안과 나라를 결딴내기에 이른 후, 자신도 패망하고 나서야 그치게 됩니다. 무삼사와 같은 자가 어찌 고금의 사람들 가운데 유별난 경우이겠습니까? 하늘과 사람 사이에는 털끝을 용납할만한 간극도 없어 길흉(吉凶) 및 재앙과 상서가 각각 동일하게 감응하는 법입니다.
지금 안으로는 모든 관리들이 관직을 받고 서민들은 생업에 편안히 종사하고 있으며, 밖으로는 상국(上國)과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섬 오랑캐는 복종하고 있으니 난리가 생길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참소하는 자가 밑에서 참언을 만들어내면 근심 걱정하는 모양이 하늘에 나타나는 법입니다. 객성(客星)이 자미성(紫微星 : 왕궁)을 범하는 것은 무삼사 같은 자가 측근에 있는 것으로 우려되며, 화요성(火曜星)이 여귀성(輿鬼星)으로 들어가는 것은 끝내 무삼사가 끼친 재앙이 다시 생긴 것으로 우려됩니다. 저희들이 비록 5왕과 같은 피해를 당한다 하더라도 아무 근심할 것은 없사오나, 왕씨가 이미 이루어놓은 왕업을 두고 본다면 참으로 애석합니다. 그런 일이 결코 없을 것이라 말하는 것은 망령된 짓입니다. 중종인들 어찌 그런 일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겠습니까마는 결국 뒷사람의 비웃음거리를 남겼습니다. 저는 뒷사람이 지금의 상황을 비웃는 것이 지금 사람이 옛날의 상황을 비웃는 것과 같을까봐 두렵습니다. 동중서(董仲舒)는 ‘하늘의 마음이 어질어 임금을 아낀다.’고 말했으니, 이는 하늘이 먼저 재앙과 이변을 나타내어 견책함으로써 임금으로 하여금 두려워하여 수양하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사람을 쓰거나 형벌에 처할 때, 자신과의 친소 관계나 신분의 귀천을 따지지 마시고 오로지 공과의 유무만을 살피시어 각자 올바르게 행동하게 하고 분수에 넘치는 짓을 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그리되면 임용이 공평하고 상벌이 바르게 되어 사람의 일은 제대로 되고 하늘의 도는 순응할 것입니다.
엎드려 교서를 읽으니 ‘민폐가 아직 다 제거되지 못하고 국가의 재정이 낭비되고 있지 않은가? 아랫사람의 생각이 다 위로 전달되지 못하여 불만과 원망이 그냥 쌓여있지 않은가? 빼어난 재주를 가지고도 임용되지 못한 자가 누구인가? 참소하는 무리로서 쫓겨나지 않은 자가 누구인가?’라고 자책하셨습니다. 제가 듣건대 삼사(三司)의 회계(會計)에서 불공을 위해 쓴 것이 가장 많다하니 재정의 낭비가 이만한 것이 없습니다.37) 그러나 불교의 폐해는 예로부터 분명히 밝히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 무리들이 ‘불교야말로 좋은 일이며 선한 일이니, 우리에게 귀의하면 나라가 부강해지고 백성들은 복록을 누릴 수 있다.’라고 하니 임금된 이가 그 말을 듣고 좋아라하며 재력을 쏟아 부으며 부처에게 아첨하고 섬기게 되었습니다. 누가 그러한 행동을 비판하면, ‘내가 부처를 섬기는데 저들이 비난하니, 나는 선하고 저들은 악하며 나는 도(道)를 지키는 사람이고 저들은 마귀다. 내가 부처를 섬기는 것은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백성들이 복록을 누리게끔 하는 것이지 나를 위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며 불교의 교리로 더욱 마음을 다지니 남의 말은 들어갈 여지가 없습니다. 전하께서 즉위한 이래로 도량(道場)을 궁궐보다 더 웅장하게 세웠고 법석(法席)을 늘 절에서 열었으며 도전(道殿)의 초제(醮祭)38)를 무시로 행하고 무당의 제사는 번잡하게 열립니다. 이것을 전하께서는 선한 일이라고 하시지만 기실은 선한 일이 아님을 깨닫지 못하고, 나라가 부유하게 된다고 여기시지만 나라가 기실은 궁핍해짐을 깨닫지 못하십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복록을 누리게 된다고 생각하시지만 사실은 궁핍하게 되는 줄을 깨닫지 못하십니다. 간언하는 자가 있어도 대개 모두 받아들이지 않으면서도 스스로는 간쟁을 막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은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불교의 선행과 복록에 대한 교리를 먼저 마음에 품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옛날 양무제(梁武帝)는 천자로서의 존귀함을 팽개치고 세 번이나 몸을 던져 절의 종이 되었고 강남(江南)의 재력을 다 기울여 불탑(佛塔)을 크게 만들었습니다. 마음속으로 이익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무엇 하러 그런 짓을 했겠습니까? 그러나 한 필부가 난39)을 일으키자 구속과 치욕을 당하고 자손을 보존할 수 없었으며 나라도 망해버렸으니 선을 닦아 복을 얻는다는 불교의 교리가 과연 들어맞았습니까? 양무제의 경우는 오히려 다른 시대의 일이거니와, 현릉(玄陵 : 공민왕)께서도 불교를 숭상한 나머지 머리 깎은 중에게 친히 제자로서의 예를 지켰으며 해마다 궁중에서의 백고좌도량(百高座道場)40)이나 연복사(演福寺)에서의 문수회(文殊會)41)를 빠짐없이 열었습니다. 높이 솟은 절의 단청이 산골짜기에 휘황찬란하고 영정을 모신 전각의 용마루와 처마는 하늘로 치솟았습니다. 국가의 재정과 백성의 힘을 고갈시키는 바람에 원망과 비방이 마구 일어났는데도 전혀 돌보지 않았으니 정말 부처를 지극정성으로 섬겼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끝내 복을 얻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명백한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주나라 말기에 유신(有莘)42)에게 귀신이 들자 태사(太史) 과(過)가 ‘나라가 흥하려 할 때는 사람의 말을 듣고 나라가 망하려 할 때는 귀신의 말을 듣는다.’고 말했는데 주나라는 결국 그 때문에 망하였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해 부처나 귀신을 섬기는 일은 아무 이익이 없이 해악만 끼치는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해당 관청에 분명히 지시하셔서 사전(祀典)에 실린 것을 제외43)하고 나머지 모든 추잡한 음사(淫祀)를 엄금하게 한다면 국가 재정을 절약해 낭비를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전하께서 즉위한 이래로 사람들 가운데 혹 죄를 범했더라도 문책당하지 않은 자도 있고 방면된 자도 있었으니, 원통하고 억울함이 해소되지 못한 사례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면이라는 것은 간악한 자에게는 행운이지만 선량한 사람에게는 해악을 끼치는 것이니, 사면을 자주 행하는 자체가 원통함을 남기는 일이 되기도 합니다. 근자에 대간이 종사(宗社)의 큰 계책을 글로 올려 간쟁하다가 모두 쫓겨난 바 있습니다. 저는 원통함과 억울함이 해소되지 못하고 뛰어난 재주를 가진 사람이 임용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지금이 아닌가 우려합니다.
참소하고 아첨하는 자들은 그 자취를 드러내지 않고 언사가 은밀하기 때문에 그들이 어떤 존재인지 알기가 어렵습니다. 군주가 잘못을 저질렀을 경우 분명하게 간쟁하고 누가 죄를 지었으면 면전에서 그를 타박하며, 고상한 절조로 세속에 야합하지 않고 초연히 홀로 서서 다른 사람의 비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바른 선비입니다. 자신의 자취를 감추고 다른 사람이 알까봐 두려워하며 많은 사람들 앞에서는 말하지 않고 임금과 독대(獨對)해서는 조금씩 남을 헐뜯는 자는 간사한 아첨꾼입니다. 전하께서는 밖으로는 사대부(士大夫)를, 안으로는 소신(小臣)과 환관을 거느리고 있으니 시험 삼아 저의 말대로 관찰해보신다면 참소하고 아첨하는 정황을 아시게 될 것입니다. 아무리 어리석은 자라도 자신을 아낄 줄은 아는 법이니, 처자를 위한 일의 경우 누구에겐들 사랑하는 마음이 없겠습니까? 옛날 한나라 성제(成帝) 때 일식(日食)이 있었는데, 다들 외척이 정권을 휘두를 조짐이라고 말했습니다. 성제가 긴가민가하여 장우(張禹)에게 물었는데, 장우는 자신이 늙은데다 자손들이 미약했으므로 외척들로부터 화를 당할까 겁을 낸 나머지 명백하게 그 까닭을 말하지 않았으므로 결국 왕망(王莽)으로 하여금 한나라를 패망시키게 만들었습니다. 곡영(谷永)과 같은 무리들은 처음에는 성제에게 거리낌 없이 직언을 퍼부었지만, 왕씨가 정권을 쥐자 겁을 내어 피하며 간언하지 않은 결과 한나라는 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처자를 살린답시고 나라일은 돌볼 겨를이 없었던 것입니다.
제가 비록 크게 망령된 자이지만 아직 미친병에는 이르지 않았으니 어찌 속으로 근심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혼자 몸으로 고립되어 많은 원망을 받고 있으니, 이런 말을 하면 재앙이 닥칠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하께서 솔직히 물으시니 제가 어찌 간절하고 바르게 응답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제가 차라리 화를 당하는 일이 있더라도 근심하지 않고 숨김없이 간절히 말씀드리는 까닭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 유의하시고 채택함으로써 제가 죽음을 무릅쓰고 나라 일에 종사하는 뜻을 밝혀주신다면 만 번 죽어도 유감이 없겠습니다.”
이어 사직을 청원하는 글을 올렸으나 왕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 당시 글을 올린 사람이 매우 많았으나 정도전이 올린 글이 제일 나았으므로 왕이 매번 칭찬하였다. 그러나 거리낌없이 할 말을 다해 왕의 비위를 거슬렸으며, 또한 무삼사(武三思)를 우현보(禹玄寶)의 일당에 견주니 우현보의 손자 우성범(禹成範)44)이 부마(駙馬)였기 때문에 왕이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리고 우현보와 이색(李穡)의 일당도 정도전을 미워했다. 정도전이 다시 도당(都堂)에 글을 올려 이색과 우현보의 처형을 건의했다.
“재상의 직책은 모든 책임을 맡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석개보(石介甫)는 ‘위로는 음양을 조화롭게 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편안하게 하며 관작과 상벌이 시행되는 관문이자 교화와 정령이 나오는 곳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재상의 임무는 이 네 가지보다 중요한 것이 없고, 특히 상벌에 관한 임무는 막중한 것입니다. 이른바 음양을 조화롭게 한다는 것은 그러한 일을 하지 않고도 음양이 저절로 조화롭게 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공로에 합당한 상을 내리면 선을 행하는 사람을 권면하게 되고, 죄지은 자에게 합당한 벌을 내리면 악한 자를 징계하게 됩니다. 생각건대 가장 큰 형벌을 받아야 할 죄는 왕위를 찬탈하는 반역죄이니, 왕씨의 습위를 가로막고 신우의 아들 신창을 왕위에 올리고 신우를 다시 맞아다가 왕씨의 계통을 끊은 죄는 찬탈한 반역죄 가운데 가장 심한 것이며 난신적자 가운데 으뜸입니다. 구차히 천벌을 면한지 여러 해가 지나자 다시 가면을 쓰고는 따르는 무리들을 많이 만들어 거리낌 없이 온 나라를 휘젓고 다니고 있습니다. 그들의 자제와 조카들이 요직에 포진하고 있어 아무도 시비를 따지지 못하니, 지금 재상의 직에 있으면서 상벌의 권한을 가지고 있는 자가 그 책임을 면할 수 없습니다. 마땅히 죄상을 철저히 따져 전하께 보고한 후 나라 사람들과 함께 태묘(太廟)에 아뢰고 그들의 죄를 헤아려 처형해야만 하늘에 계신 영령이 위로를 받을 것이며 신하와 백성들의 분노가 풀릴 것이며 하늘과 땅이 올바르게 자리잡힐 것이니 그제야 재상의 책임도 완수될 것입니다.
만약 ‘사람의 죄악은 내 알 바가 아니다. 생사와 출척은 임금이 맡은 권한이니 재상이 어찌 관여하겠는가?’라고 변명한다면, 동호(董狐)45)는 왜 조순(趙盾)이 임금을 시해한 난적을 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를 악인이라 불렀겠습니까? 춘추(春秋)시대에 진(晋)의 조천(趙穿)이 임금을 시해하자 직사(直史)인 동호(董狐)는 ‘조순이 임금을 시해했다.’고 썼습니다. 조순이 임금을 시해한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고 하자 동호는, ‘그대가 정경(正卿)이면서 망명했다가도 국경을 넘지 않았고 돌아와서도 역적을 치지 않았으니 임금을 시해한 자가 그대가 아니면 누구인가?’라고 반문했습니다. 공자는, ‘동호는 훌륭한 사관(史官)이고 조순은 훌륭한 대부였기 때문에 법을 위하여 악명을 감수했다.’고 하였습니다. 조순은 정경으로서 임금을 시해한 역적을 토벌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임금을 시해한 반역자라는 오명을 받고도 사양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되어야 역적을 쳐야 할 명분이 뚜렷해지고 난적의 무리들은 아무데도 발붙일 곳이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임금이나 아비가 되어 『춘추(春秋)』가 제시한 명분에 통하지 못하면 반드시 악인의 수괴라는 오명을 받게 된다. 신하나 자식이 되어 『춘추』가 제시한 명분에 통하지 못하면 반드시 왕위를 찬탈하고 시해하는 죄에 빠지게 된다.’고 하는 것은 이를 일컫는 말입니다. 어리석은 제가 비록 재주는 없으나 재상의 말석에 앉아 국정에 참여하고 있으니 어찌 훌륭한 사관이 가할 비난을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혹자는 ‘이른바 죄인 가운데는 유학의 종장인 사람이 있고 또 왕실의 외척되는 사람도 있으니 법대로 따지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옛날에 임연(林衍)이 원종을 폐위시킨 후 그 친동생인 왕창(王淐)을 옹립46)할 때 자신이 먼저 다 결정해놓고 시중(侍中) 이장용(李藏用)에게 보고하자 이장용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저 ‘예예’라고만 했습니다. 뒤에 원종이 복위하자 이장용의 지위가 상상(上相)이면서도 반역 모의를 종식시키고 반란을 막지 못했다 하여 서인으로 강등시킨 바 있습니다. 지금 유학의 종장이라는 이색을 이장용과 비교해볼 때 어떠합니까? 이색이 간악한 음모를 앞장서 발의해 왕씨를 저지하고 신창을 옹립한 반면 이장용은 다만 임연의 음모에 복종했을 따름입니다. 호씨(胡氏)47)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옛날 문강(文姜)은 노나라 환공(魯桓公)의 시해에 가담했고 애강(哀姜)은 두 임금의 시해에 가담했다. 그런데도 공자께서 전례대로 손위(遜位)했다고 씀으로써 그들이 가서 돌아오지 않은 것으로 해 완전히 단절해버린 것은, 은혜는 가볍고 의리는 무겁다는 점을 드러내고자 한 까닭이다. 환공을 시해한 자는 양공(襄公)이고 두 임금을 시해한 자는 경보(慶父)이니 문강(文姜)과 애강(哀姜)48)은 죄가 없다고 할 지 모르나 공자는 두 부인이 사전에 알고 있었다는 이유로 완전히 단절해버리고 이처럼 통렬히 비판했다.’ 왕위를 계승하는 자는 부인의 소생이지만 모자간의 사사로운 정 때문에 군신간의 대의를 폐하지는 못하는 법인데 하물며 그 아랫사람이야 어떻겠습니까?
어떤 자는 ‘이색의 말로는, 「신우가 비록 신돈(辛旽)의 아들이라 하더라도 현릉이 자기 아들이라고 하면서 강녕대군(江寧大君)으로 봉했으며 또한 천자의 고명(誥命)을 받아 임금까지 되었다. 또한 이미 신하가 되었으면서 그를 내쫓는 것은 큰 잘못이다」라고 했는데 그 말도 옳지 않으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왕위는 태조(太祖)의 왕위이고 사직도 태조의 사직이니 현릉도 함부로 결정하지 못할 바입니다. 옛날에 연나라 자지(子之)49)가 나라를 어린 자쾌(子噲)에게 양여하자 어떤 이가 ‘연나라를 토벌해야 하는가?’라고 맹자(孟子)에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맹자는, ‘불가하다. 자지가 연나라를 남에게 양여해서는 안되고 자쾌도 연나라를 양보받아서는 안된다.’고 했습니다. 성현(聖賢)께서는 토지와 인민은 선왕으로부터 받은 것이므로 현재의 임금일지라도 함부로 남에게 양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또한 주혜왕(周惠王)이 총애하는 아들로 세자를 바꾸자 제(齊)나라 환공(桓公)은 제후들을 거느리고 원래의 왕세자(王世子)를 수지(首止)에서 만나 왕위계승을 확정지어 주었습니다. 당시에도 적서(嫡庶)의 구분이 있긴 했으나 그들이 혜왕의 아들인 점은 동일합니다. 또한 존귀한 천자일지라도 자신이 총애하는 아들에게 함부로 세자의 지위를 주지 못하였으며, 그보다 낮은 제후일지라도 다른 제후들을 거느리고 천자의 명에 항거한 것을 성인께서는 의롭게 여겼던 것입니다. 이 때문에, 세자가 부왕의 명을 거역하고 환공이 천자의 명령에 항거했다는 말을 듣지 않은 것은, 진실로 천하의 의리가 크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현릉께서 어찌 태조께서 물려주신 왕위와 백성을 역신 신돈의 아들에게 함부로 줄 수 있겠습니까?
또한 천자의 고명(誥命)은 그 당시의 권신이 신우를 현릉의 아들이라 속여서 받아온 것입니다. 뒤에 천자께서, ‘고려의 왕위를 이을 후사가 끊어지는 바람에 왕씨를 가탁해 다른 성씨를 왕으로 삼았으나 이는 삼한(三韓)이 대대로 지켜나갈 좋은 계책이 아니다.’고 하면서 다시, ‘과연 현명하고 지혜로운 신하가 나타나 왕과 신하의 지위를 정한다면 ···.’이라고 했으니 앞서 보냈던 고명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천자도 알았기에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사정이 이러한데 어찌 감히 고명을 입에 담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이색이 ‘이미 우왕의 신하가 되었으니 ···.’ 하는 말도 분명히 밝혀야 합니다. 『강목(綱目)』에서는 앞에 ‘심이기(審食其)50)가 황제의 태부(太傅)가 되고 주발(周勃)과 진평(陳平)이 승상(丞相)이 되었다.’고 쓴 후 ‘한나라 대신(大臣) 등이 자홍(子弘)을 죽이고 대왕(代王) 항(恒)을 맞이하여 황제에 즉위시켰다.’라고 썼는데, 거기에 황제라고 쓰고 승상이라고 쓴 것은 신하가 되었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대신이라고 쓰고 자홍을 죽였다고 쓴 것은 역적을 토벌했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측천무후가 황제를 칭한 지 오래되었을 때 적인걸(狄仁傑)이 장간지(張柬之)를 천거하여 재상으로 삼았는데 장간지가 측천무후를 폐위시키고 다시 중종을 맞아다가 황제 자리에 올렸으니 천거를 받아 재상이 된 자는 신하가 아니란 말입니까? 장간지가 측천무후를 폐위한 것은 무후를 역적으로 여겨 토벌한 것입니다. 아득한 후대에 주발과 진평이 한나라를 안정시키고 장간지가 당나라를 회복한 공을 칭송할지언정, 아직까지 이러한 분들이 신하 주제에 옛 왕을 폐위시켰다고 비난하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이색과 우현보가 인의(仁義)가 부족한 자이지만 그래도 글을 읽어 옛 사실에 통한 선비인데 어찌 이 말을 듣지 못했겠습니까? 사리를 깨닫지 못한 채 미혹에 빠진 나머지 앞장서 그릇된 주장을 함으로써 사람들을 현혹시킴을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선왕의 법에 거짓말을 들어 사람들을 현혹하는 자는 그 자리에서 처형시켜야 한다고 하였는데, 하물며 감히 그릇된 주장을 부르짖어 난적의 죄를 구해보려 한 자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어떤 자는 ‘이색과 우현보가 신우를 다시 맞이하려고 모의한 것은 바로 그 아들 신창이 왕위에 있을 때였으니 비록 신우를 맞아오지 않았더라도 왕씨가 어찌 부흥할 수 있었겠는가? 신우를 맞아다가 왕씨의 계통을 단절시키려 했다는 주장은 그에게 죄를 덧붙이려는 말이다.’라고 말합니다. 당시 충신과 의사들이 천자의 명을 받들어 다른 성씨를 축출하고 왕씨를 회복시키려고 논의했는데 가짜 왕 신씨의 일당들이 먼저 명나라 예부(禮部)의 자문(咨文)을 얻어 보고 천자가 명을 내린 것과 충신들이 의논 중임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들은 신창이 유약하다고 하여 그의 아비를 왕위에 올려 자신들의 사적인 이익을 달성하려 했으니, 이야말로 신우를 맞아다가 왕씨를 끊어버리려고 모의한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어떤 자는 저더러, ‘이색과 우현보는 서열로 보아 그대의 선배가 되고 같이 유학을 공부한 옛 정이 있는데 그대가 이처럼 그들을 극력 공격하는 것은 너무 각박하지 않은가?’라고 말합니다. 옛날 소식(蘇軾)은 주자(朱子)보다 선배가 되지만 주자는 소식이 감히 이단의 논리를 펴서 예악을 사라지게 하고 도덕을 무너뜨린다고 조금도 용서없이 극력 질책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감히 옛 사람을 공격하고 꾸짖는 것이 아니다. 성탕(成湯)이, 「내가 상제(上帝)를 두려워하니 옳지 못한 일은 바로잡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으니 나 또한 상제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그를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소식은 이단의 논리를 내세워 예법을 사라지게 한 죄를 저질렀을 뿐인데도, 인자하고 관대한 주자(朱子)는 그를 공격51)하면서 성탕이 걸(桀)을 죽이면서 했던 말까지 인용했던 것입니다. 하물며 다른 성씨의 일당이 되어 왕씨를 저지하는 자는 조종의 죄인이며 유학을 붕괴시키는 적도들의 괴수이니 어찌 선배라 하여 그들을 용서하겠습니까?
하물며 저들은 무진년52) 우왕을 폐위시킬 때 유림에서 이의를 제기했다고 말하는데 이른바 그 이의란 왕씨를 세우자는 의견53)이었습니다. 또한 이색의 아들은 대중 앞에서 ‘장군들이 왕씨를 세우자고 주장하자 우리 부친이 그것을 저지하였으니 우리 부친의 공이 크다.’고 떠들었습니다. 이 말이 신우와 신창의 귀에까지 흘러 들어가서 신우와 신창이 제 뜻대로 했으면 유림과 장군들이 과연 목숨을 보존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들의 천박한 처세가 과연 어떠합니까? 왕씨를 왕위에 올리자는 것을 이의라고 부르고 왕씨의 계승을 저지한 것을 자기의 공이라 하였습니다. 지금 가짜 왕 신씨를 왕위에 올리는 것을 이의라 하면서 왕씨를 저지하는 것을 무거운 죄로 보는 견해가 또한 옳지 않겠습니까?
어떤 자는 ‘그대가 글을 올려 이미 사직한 마당에 전하께 논죄하는 글을 올려 고집을 부리고 또한 조정에도 알리니 너무 심한 짓이 아닌가?’라고 말합니다. 정말 그의 말대로라면, 옛날 제(齊)의 진항(陳恒)54)이 자신의 임금을 시해하자 공자가 목욕재계하고 조정을 찾아가 ‘진항이 자신의 임금을 시해했으니 그를 토벌해주소서.’라고 건의한 일을 생각해야 합니다. 또 공자는 삼자(三子)55)에게도, 진항이 자신의 임금을 시해했으니 그를 토벌하라고 건의했습니다. 왕을 죽인 자가 제나라에 있었으니 노나라와는 아무 관계가 없을 것 같고, 공자는 당시 이미 퇴직하였으니 노나라의 정치에 관여할 바가 없는 것 같으며, 이미 왕에게 건의했으니 반드시 삼자에게 알릴 필요는 없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성인께서 지니신 큰 관용의 마음에도 불구하고 들어가서 임금에게 건의하고 나와서 삼자에게 알린 것은 반드시 그 죄인을 토벌하고야 말겠다는 굳은 결심 때문이었습니다. 진실로 임금을 시해한 역적은 누구라도 죽일 수 있는 것으로 그 악행은 천하 어디에서나 동일합니다. 노나라에 있으면서도 제나라에 있는 역적에 대해 참지 못하였는데, 하물며 같은 나라에 있으면서 같은 나라의 역적을 어찌 참아내겠습니까? 대부의 말석에 있으면서도 이웃 나라의 정치에 대해 참지 못하였는데, 하물며 공신의 반열에 있으면서 왕실의 역적에 대해 참아야만 합니까?
『춘추(春秋)』에 ‘위(衛)나라 사람이 주우(州吁)56)를 죽였다.’고 썼으나 호씨(胡氏(胡安國))는, ‘인(人)은 중(衆)이란 뜻이다. 주우를 죽일 때 석작(石碏)이 모의하고 우재(右宰) 추(醜)로 하여금 실행하게 했다. 글을 고쳐서 인(人)이라고 한 것은 사람들이 모두 역적을 칠 마음이 있다는 것이며, 또한 사람마다 죽일 수 있기 때문에 중(衆)이라고 썼다.’고 설명했습니다. 또한 난신적자는 누구라도 죽일 수 있는 것인데, 재상이면서 그런 자를 토벌해 죽이지 않으면 될 말이겠습니까? 하물며 석작은 주우와 관련해 그의 아들 후(厚)도 함께 죽였으니, 이를 두고 군자는 ‘석작은 사심이 없는 신하다.’라고 평했습니다. 대의로 지친(至親)을 족멸한다는 말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니, 난신적자는 친소나 귀천을 막론하고 모두 죽여서 후사를 끊어야 합니다.
어떤 자는 ‘진항과 주우는 직접 임금을 시해하는 반역을 저지른 자이지만 이색과 우현보는 왕을 시해한 일이 없다. 그런데도 견주어 동일시하는 것은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또한 어떤 자가 죄를 날조해 잘못 덮어씌운 것인지 어찌 알겠는가?’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호씨의 말을 다시 생각해 보아야합니다. ‘임금을 시해한 후 다른 임금을 세워도 종묘가 없어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종묘를 옮기고 나라의 성씨를 바꾸는 것은 아예 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이니 시역하는 죄보다 무겁지 않겠는가?’ 지금 다른 성씨와 일당이 되어 왕씨의 종사를 없앤 행위는 참으로 호씨가 말한 것처럼 종묘를 옮기고 왕실의 성씨를 멸해버린 것이니 그 죄는 시역한 죄보다 더욱 큽니다.
또한 옛날의 대신들은 누가 자신의 죄를 고발해 오면 죄인의 옷을 입고 죄줄 것을 청하였습니다. 한나라의 곽광(霍光)과 같은 사람은 무제(武帝)의 고명대신(顧命大臣)으로서 소제(昭帝)를 옹립하여 공덕(功德)이 지대하였지만, 어떤 자가 자기의 죄를 고발하는 글을 올리자 감히 궁궐에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처분을 기다렸습니다. 이로 볼 때, 죄를 고발해오는 자가 있으면 마땅히 눈물을 흘리면서 임금께 간절히 청한 다음 직접 해당 관청에 출두해 자신의 죄에 대해 밝히고 난 뒤에야 마음이 편안해질 것입니다. 그런데도 처자를 꾀어 글을 올리게 하고 자신은 병을 핑계해 의원에게 다니면서 자신의 죄상을 분명히 밝히지 않으니, 어찌된 일입니까? 이것은 자신에게 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올바른 말로 변명하기 어렵기 때문이 분명합니다. 『춘추(春秋)』에서, 난적을 치는 법은 비록 그 자취가 드러나지 않아도 그 의도를 캐어 처형하는 것이라 했거늘, 하물며 자취가 이미 이처럼 드러난 자들은 마땅히 처형해야 합니다.
옛날 고종(高宗)이 무재인(武才人)을 봉하여 무후(武后)로 삼으려 할 때 저수량(褚遂良)과 허경종(許敬宗)은 같은 재상이었습니다. 저수량은 안된다고 극력 간쟁하다가 결국 처형당했지만 허경종은 고종의 뜻에 따라, ‘그 일은 황제의 집안 내부 일이니 재상이 알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고종은 허경종의 말대로 마침내 무재인을 무후로 봉했고 허경종은 죽을 때까지 부귀를 누렸습니다. 반면 5왕은 반정(反正)을 의논하다가 함께 처형당하고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지금에 와서 보건대, 허경종의 계책은 성공하였고 저수량과 5왕은 실패하였습니다. 그러나 허경종이 누린 한때의 부귀는 홀연히 나부끼는 바람이 귀를 스치는 것 같아서, 아무 자취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저수량과 5왕의 아름다운 명성과 의로움은 역사책에서 빛을 발하며 우주와 함께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제가 비록 미천하고 못난 자이나 허경종을 수치로 여기고 저수량을 사모합니다.
전(傳)에 말하기를 ‘처음에 같이 모의하면 끝내 함께 죽는다.’라고 하였습니다. 저를 어리석다고 팽개치지 않고 반정의 의논에 참여시켜 주었으니 어찌 감히 간악한 무리들로부터 받을 재앙을 두려워하여 입을 다물고 간언함이 없이 구차히 죽음을 면하려 하겠습니까? 엎드려 바라옵건대, 『춘추』로부터 난적을 치는 법을 본받고 공자와 석작(石碏)의 생각을 마음에 아로새기신다면 종사에 큰 다행이 될 것입니다.”
정도전이 다시 전(箋)을 올려 간언했다.
“제가 받고 있는 비방을 낱낱이 아뢰기는 어려우나 전하께서 명백히 아시는 사실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전하께서 저를 삼군도총제부(三軍都摠制府) 우군총제사(右軍摠制使)로 임명하실 때 제가 면대하여, ‘장수들이 군사를 자기 개인에게 소속시켜온 것이 오랜 관습인데 하루아침에 이것을 없애고, 대대로 벼슬한 집안들이 군역도 부담하지 않고 토지의 소출을 차지한지가 오래인데 하루아침에 그들의 이름을 군적(軍籍)에 올리고 군역을 부과한다면, 온갖 원망이 저에게 쏟아질 것이 두렵습니다.’라고 사양한 바 있습니다. 그때 전하께서는 ‘원수를 없애자는 말은 헌사(憲司)에서 올린 것이고 3군(軍)의 설치는 내 결심에 따른 것이니 경이 무슨 상관이 있는가? 이러한 비방이 없을 것을 보증하겠노라.’고 말씀하시기에 그 때 저는 ‘제가 비방을 받으면 반드시 전하의 귀에 들릴 것이니 그때 전하께서는 제가 이유 없이 비방을 받고 있음을 아시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비방이란 것이 모두 이런 근거 없는 것으로 저에 대한 다른 비방도 역시 근거 없는 것으로 밝혀졌으니 어찌 요행이도 제 말이 들어맞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명을 받은 뒤에 과연 어떤 자가 ‘정도전이 중국에서 돌아와 삼군부(三軍府)를 갑자기 설치하니 이것은 오군 도독(都督)의 법을 채용한 것이다. 대대로 벼슬한 집안은 이제부터 모두 천역에 복무하게 될 것이다.’라고 비방했습니다. 만 사람이 입을 모아 말하니 도무지 변명할 여지도 없었습니다. 호구(戶口)를 호적으로 작성하자는 것은 당신(堂臣)들의 건의에 따라 전하께서 허락한 사안으로, 그 일은 제가 중국에 있을 때 발의된 것입니다. 맹인과 무당들의 자제를 모아 전의시(典儀寺)에 악공(樂工)으로 충원한 것은 전하의 명을 받들어 시행한 일입니다. 그런데 호적 없이 이름을 속여 쓴 무리들이 호적이 자기에게 불편한 것을 원망하면서, 그 일을 제가 했다고 말하며, 또 맹인과 무당들은 그 일을 제가 주장했다고 하면서 저를 저주하고 있습니다. 사전(私田)을 혁파하자는 주장을 낼 때 애초 저는 사전을 모두 공공기관에 속하게 함으로써 국가재정을 늘리고 군량을 풍족하게 하며 벼슬아치들에게 녹봉을 주고 군역(軍役)에 나온 이들에게 소출을 주게하여, 결과적으로 상하가 궁핍해지는 근심이 없게 하자는 뜻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 뜻은 결국 실행되지 못하였으며, 곧이어 전하께 청하여 오래전에 제조관(提調官)에서 면직되었습니다. 그런데도 토지의 분배가 불공평하다는 원망은 모두 저에게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작은 일이고 전하께서 훤히 아시는 것이기에 제가 변명하지 못하거니와 하물며 사안이 중대하고 큰 원망을 받은 일은 제가 비록 알지 못하는 일이나 어찌 모면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최원(崔源)을 명나라에 보낼 때 차라리 죽었더라면 안으로는 선왕이 돌아가신 내막이 밝혀지고 위로는 천자를 속이지 않게 되었을 것입니다. 또 서명을 거부할 때 차라리 죽었더라면, 가짜 왕 신씨가 현릉의 후사가 아님이 밝혀졌을 것입니다. 또 북원의 사신을 물리칠 때 죽었더라면, 위로는 임금의 오명을 벗기고 아래로는 온 나라의 신하와 백성들이 임금을 시해하는 일에 참여했다는 누명을 면하였을 것입니다. 제 자신은 비록 죽더라도 누군가가 죽지 않고 살아남아 있을 것이니 어찌 영광스럽지 않겠습니까? 만약 저 참소하고 비방하는 입질에 빠지게 되면 위로는 임금께 공신을 보전하지 못했다는 허물을 끼치고, 아래로는 현명하게 몸을 지키지 못했다는 비난을 초래할 것이니 신은 너무나 두렵습니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저를 해직하시어 여생을 보전하도록 하소서.”
이에 간관(諫官)이,
“정도전이 사직을 보존하는 일에 공을 세웠는데도 글을 올려 사직하는 마당에 여러 날 답을 하지 않으시니 공신을 이처럼 야박하게 대우하면 안 됩니다.”
라고 간언하자 다시 그를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삼았다. 대성(臺省)에서 번갈아 글을 올려 우현보에게 죄를 주라고 청했지만 왕이 우성범(禹成範) 때문에 허락하지 않고 도리어 사람을 시켜 우리 태조(太祖 : 이성계)에게 대성의 주청을 막아달라고 요청하니 태조가 “주상께서 어째서 나더러 대성을 지휘하라고 하시는가?” 하며 탄식했다. 당시 왕은 우리 태조의 공이 높고 인심을 얻은 것을 꺼리고 있었다. 또 대대로 벼슬한 집안에서는 사전을 혁파한 것에 대해 원한을 품고 갖은 방법으로 무고하고 헐뜯었으며, 우왕과 창왕의 무리들도 왕실과 혼인을 맺고 아침저녁으로 참소하였다. 왕이 참언을 믿고 밤낮으로 측근들과 함께 태조를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태조가 참언에 지친 나머지 정도전·남은(南誾)·조인옥(趙仁沃) 등에게,
“내가 경들과 함께 왕실에 힘을 다하였으나 참소하는 말이 자주 일어나니 우리들이 용납되지 못할 것 같다. 내가 동쪽으로 돌아가서 그들을 피하는 것이 옳을 것이니, 먼저 집안 사람들을 시켜 빨리 길 떠날 차비를 하게 하라.”
고 말했다. 정도전 등은,
“공의 한 몸에 종사와 백성들의 생사가 달려 있으니 어찌 거취를 함부로 할 수 있겠습니까? 머물러 왕실을 도우면서 현인을 등용하고 못난 사람을 물리쳐 기강을 진작시켜야 합니다. 이와 같이 하면 왕도 깨닫는 것이 있을 것이고, 참소하는 말도 저절로 그칠 것입니다. 지금 만약 구석진 곳에 은거해버리면 참소하는 자들이 필시 반역할 마음을 가졌다고 무고할 것이고 그리되면 큰 화를 입게 될 것입니다.”
라고 말렸다. 태조가,
“옛날에 장량(張良)이 신선을 따라 떠났지만 고조(高祖)가 죄를 묻지 않았다. 내가 딴 마음이 없는데 왕이 어찌 나에게 죄를 주겠는가?”
며 결심을 굽히지 않자 서로 갑론을박하며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다. 도진무(都鎭撫) 황희석(黃希碩)57)이 가신(家臣) 김지경(金之景)을 통해 태조의 부인 강씨(康氏)에게,
“정도전과 남은 등이 공에게 고향으로 은거하라고 권하는 통애 일이 그릇될 것 같으니 그 몇 명을 없애버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고 알렸다. 강씨가 그 말을 믿고 태종(太宗 : 이방원)58)에게, 정도전과 남은 등은 모두 믿고 의지할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하자 태종은,
“아버님께서 참언에 지쳐 은퇴하려는 뜻을 가졌는데 정도전과 남은 등이 극력 이해득실을 아뢰어 중지시켰습니다.”
고 밝혔다. 그리고 김지경에게,
“그 몇 사람은 공과 함께 고락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니 너는 다시 그런 말을 하지 말라.”
고 꾸짖었다. 왕이 정도전을 불렀으나 정도전이 병을 핑계하고 가지 않았는데, 다시 대언(代言) 안원(安瑗)59)을 보내어 간곡히 설득하자 그제야 왔다. 왕이 이색과 우현보의 죄를 묻자 그는 상소한 내용과 같이 대답했는데, 물 흐르듯 막힘이 없었다. 왕이 “이색의 죄상은 어느 정도 드러났으나 우현보의 죄는 아직 명백하지 않다.”고 지적하자 정도전은,
“이색의 죄는 이미 드러났으니 극형에 처하여 불충한 자들에게 본보기로 보여야 할 것이며, 우현보 같은 자는 죄상이 명백하지 않기 때문에 대간이 글을 번갈아 올려 먼 곳으로 유배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저도 그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오니 선한 자와 악한 자는 분리시켜 두어야 합니다.”
라고 말했다. 왕이,
“이색과 우현보의 일은 이미 오래전에 잠잠해졌는데 아직껏 항의하는 소가 올라오는 것은 필시 경의 상소가 계기가 된 것이다. 경이 요사이 나를 찾아오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라고 하자 정도전이 대답했다.
“군신의 의리는 그 정이 부자지간 같으니, 아버지가 아들의 불효를 꾸짖고도 다음날이면 다시 그전과 같이 사랑하는 것처럼 이는 어쩔 수 없는 하늘의 이치인 것입니다. 전하께서 지금 비록 저를 꾸짖으시나 뒤에 만약 진심을 다해 저에게 직임을 맡겨주시면 제가 어찌 분발하여 힘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농사철이 되었는데도 하늘에서 오래토록 비를 내려주지 않다가 전하께서 저를 불러 마주하고 의논하니 하늘에서 이제야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예전에 장마가 져서 곡식이 잘 자라지 못했는데 전하께서 저를 불러 정사를 의논하니 장맛비가 개인 적이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만약 간악한 무리들이 전하의 뜻이라고 속여 저에게 죄를 주더라도 저는 직접 뵙고 아뢴 뒤에 달게 죄를 받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왕이 불쾌히 여겼다. 규정(糾正) 박자량(朴子良)60) 등이 집의(執義) 우홍득(禹洪得)61)을 영접하지 않았다고 헌사에서 탄핵하자 그들을 하옥시키고 국문하였다. 그 공술에 정도전의 이름이 나왔으므로 평양부윤(平壤府尹)으로 쫓겨나게 되었다. 성헌(省憲)과 형조(刑曹)에서, 정도전이 규정(糾正)을 몰래 꾀어서 대간(臺諫)을 비방했다고 탄핵하며 극형에 처하라는 소를 올렸지만 왕은 공신이라는 이유로 용서하였다. 그러나 정도전이 외람되게 공신의 반열에 있으면서 내심 간악한 흉계를 품고 겉으로는 충직한 척하며 국정을 더럽혔다고 논죄하면서 죄를 주라고 다시 주청하자 왕은 그를 고향인 봉화현(奉化縣 :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으로 쫓아 보냈다. 대성(臺省)에서 글을 번갈아 올려,
“정도전은 가풍이 바르지 못하고 가계가 분명하지 못한데도62) 외람되게 큰 관직을 받고 조정에 섞여 있으니 임명장과 공신녹권(功臣錄券)을 회수하고 그의 죄를 밝혀 바로 잡으소서.”
라고 간언하자 왕은 직첩(職牒)과 녹권(錄券)만 거두어들이고 나주(羅州 : 지금의 전라남도 나주시)로 이배시켰다. 대사헌(大司憲) 김주(金湊) 등이 상소하여 그의 아들 전농정(典農正) 정진(鄭津)과 종부부령(宗簿副令) 정담(鄭澹)을 논죄하니 그들을 서인으로 폐출했다. 얼마 후에 정도전의 죄를 감하여 봉화현(奉花縣 : 지금의 경상북도 봉화군)으로 이배시켜 주었다. 정몽주가 간관(諫官) 김진양(金震陽) 등을 사주하여,
“정도전은 미천한 신분에서 벼슬에 올라 당사(堂司)의 지위를 훔쳤으며 미천한 근본을 감추려고 본래의 주인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몄습니다. 혼자서는 일을 이룰 수 없자 처비(萋斐)63)한 죄를 엮어내어 많은 사람에게 연좌시켰으니 바라옵건대 유배된 곳에서 처형하여 뒷사람들을 경계하소서.”
라는 상소64)를 올리게 했다. 앞서 우현보(禹玄寶)의 족인(族人) 김전(金戩)이 일찍이 중의 신분으로 노비인 수이(樹伊)의 처와 간통하여 딸 하나를 낳았다. 사람들은 모두 수이의 딸인 줄 알았으나 김전만 자기 딸이라고 여기고 몰래 아끼고 돌보았으며 뒤에 사인(士人) 우연(禹延)에게 시집보냈다.65) 그 사이에 난 딸이 정운경(鄭云敬)에게 시집가서 정도전을 낳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뒤에 정몽주가 죽자, 그를 소환해 쌀과 콩 100석을 내려주고 그 아들에게 임명장도 돌려주었으며 다시 충의군(忠義君)으로 봉하였다. 이후의 일은 본조의 기록에 나온다.
[네이버 지식백과] 정도전 [鄭道傳] (국역 고려사: 열전, 2006.11.20, 경인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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