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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냐시오를 다시 만나다
때로는 죽음보다 더 버거운 벌이라고 느껴지는 밤샘 수형(受刑).
이 고통에는 어떤 메시지가 담겨 있는가.
감히 예수의 기도를 흉내내려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그 분의 올리브산에서의 기도를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아버지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라면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내 죄과 때문의 형벌이 아닌 고통이 끊이지 않고 계속된다면?
그 까닭은 내가 그 메시지를 여전히 깨닫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므로 감수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소위 기도라는 것을 좀처럼 하지 않는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라.
이런 것들은 모두 이방인들이 찾는 것이다"
이 성구(신약 마태복음6:31,32) 때문이 아니다.
한계에 부딫칠 때까지는 스스로 헤쳐 나가라는 천부의 자구력이 있지 않은가.
만물 중에서 절대 우위임을 의미하는 이 능력을 두고 건건사사 의존하려 한다면 이런 행위야
말로 인간의 본질을 유기하는 짓이기 때문이다.
버티면서 밤을 새는 동안이 힘겹고 벅찼지만 그 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로욜라 성(바스끄 지방)의 성 이냐시오(라틴어: Sanctus Ignatius de Loyola/1491~1556)가
스스로 찾아왔으니까.
예고 없이 왔다가 말 없이 돌아갔지만 그는 흔적(기도)을 남겨놓았다.
이로서, 그의 기도가 내 안에 들어오고 내가 그의 기도 안에 들어감으로서 마침내 그의 기도는
내 기도가 되었다.
<당신의 영혼으로 나를 정화하시고,
당신의 몸으로 나를 구하시고,
당신의 피로 내가 취하게 하시고,
당신 안에 흐르는 물로 나를 씻어 주시고,
당신의 열정으로 나를 평안하게 하시고,
오 선하신 예수여 내 말을 들어 주소서.
당신의 품안에 나를 숨겨 주시고,
내가 당신과 떨어지지 않게 하소서.
사악한 악마에게서 나를 보호하시고,
죽음의 시간에 나를 부르시어
내가 당신에게 갈 수 있도록 허락하소서.
이 밖에 아무 것도 필요치 않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으로부터 받은
나의 자유
나의 기억
나의 지성
나의 의지 등등
모든 것을 당신에게 도로 드리겠습니다>
나는 가톨릭교 신도가 아니다.
개신교 중에서도 소위 진보적이라는 평판을 받고 있으나 성 이냐시오의 영성수련만은 전폭적
으로 실천궁행하고 싶다.
까미노를 걷는 뻬레그리노라면 누구나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하거늘 특정 종교의 전유물처럼
되어 있는 것이 몹시 안타깝다.
극찬이 아깝지 않은 레갈리나 해변
모두 기상하는 시간에 잠자리에 들어간다는 것이 가당한 짓인가.
어지러이 벌려놓지 않았으므로 백팩 메고 나오면 되는 이른 아침.
아침 식사가 포함되었다지만 빵 조각인들 부드럽게 먹힐 리 없다.
깐따브리꼬 바다에서 불어오는 새벽 바람 맛이 더 상쾌했다.
정말로, 내가 나를 모르는데 남들이 나를 이해하겠는가.
간 밤에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한동안이나마 모두와 함께 잘 걷고 있는 나를.
나 혼자라면 빨랑까스 산맥길로 다시 올라가는 우매한 짓을 했을 지도 모른다.
어제 도중 하차한 길, 바요따를 거쳐 까다베도(Cadavedo)까지 가는 산길로.
지자체 꾸디예로(Cudillero)의 마지막 교구 마을인 바요따(Ballota)로 가는 길은 고속도로(A-
8/E-70)와 국도(N-632) 밖에 없다.
모두 해변마을이지만 해발120m 이상의 지형이기 때문인지 센다(senda/소로)도 없다.
기어코 국도를 거부하겠다면 토막길들을 이어가는 억지를 부리지 못할 것도 없겠지만.
산따 마리나에서 2.5km남짓 되며 두 마을을 합해도 인구가 300명 미만인 바요따를 지났다.
다음 마을 따블리소(Tablizo)는 2km 미만의 거리에 있으며 주민수가 30명 안팎의 미니 마을
이지만 기초지자체 발데스(Valdes)의 교구마을 아르까야나(Arcallana)에 속하는 마을이다.
그러므로, 바요따와 따블리소는 각기 지자체 꾸디예로와 발데스를 가르는 경계 마을이다.
바요따에서 따블리소, 리본을 거쳐서 까다베도까지의 노르떼 길은 국도(N-632a)의 지루함을
희석하려는 듯 이따금 국도를 벗어나 해안을 들락거리는 비포장 길이다.
바요따를 떠난 노르떼 길은 잠시 해안을 향한 비포장로가 되어 돌다리(예전에는흔들다리?)로
개울(Rio Cabo)을 건너며 오르내리다가 국도로 돌아온다.
1.5km 남짓 되는 따블리소 ~ 리본(Ribon/아스뚜리아스 주의 기초지자체 발데스의 교구마을
까다베도에 속한 초미니 자연마을)도 비슷한 과정을 거친다.
초미니 마을 리본에서 4.5km쯤 되는 까다베도(Cadavedo까지도 샛길들이 있기는 하나 3개의
계곡(Arroyo/Ribon, Retuerto, Pendas O Frieras)은 N-632a(구 국도)로 건넌다.
왼쪽 산줄기가 까다베도까지 이어지는 해발 600m대의 빨랑까스 산맥길임을 감안하면 건너야
하는 계곡들이 연달아 있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산고수장(山高水長)이라는데 깐따브리꼬 바다로 가는 긴 물줄기들이다.
소또 데 루이냐에서 빨랑까스 산맥을 타면 단 하나의 계곡도 건널 일 없으며 계곡 자락에 형성
되어 있는 8개의 마을도 당연히 거칠 일 없다.
까미노를 관리하고 있는 당국자들에게 다시 묻는다.
빨랑까스 산맥길을 막는 이유가 순례자들의 안전을 위함인가 이해 관계가 걸려 있는 마을들에
대한 배려 때문인가.
아마도 노르떼 길의 개설 당시에는 경유할 해변의 마을과 길이 없었을 것이며 해변(costa) 길
이라는 이름도 세월이 한참 간 훗날에 붙여진 것이다.
나는 어떤 이유로 빨메로스(Palmeros/예루살렘 순례자) 대열에는 끼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로메로스(Romeros/로마 순례자)에 이어서 꼰체이로스(가리비/concha가 까미노의
상징중 하나라는 이유로 뻬레그리노스를 Concheiros라고도함)의 길을 걸으며 변질에 가속이
붙은 듯한 까미노에 헤아릴 수 없이 안타까운 마음이다.
더구나 관광코스화(化) 되어 가는데는 당국의 의도가 작용하고 있는 것 같아서 더욱 유감이다.
해발 90m에 위치해 있으며 인구 391명(2009년기준)인 까다베도에 들어선 우리는 의견일치로
레갈리나 예배당(Ermita de La Regalina)으로 향했다.
마을의 북동쪽 끝, 꾸에르노 곶(Punta de Cuerno) 한하고 가야 하며 레갈리나 해변(Playa la
Regalina)의 너른 평원에 자리한 예배당까지 노르떼 길에서 1.5km의 이탈을 선택한 것이다.
1951년에 건축했다는 건물이라 아직 깔끔한 산따 마리아 예배당(Ermita de Santa Maria de
Regalina)이다.
바요따에서 부터 한 눈에 들어왔으며 매우 인상 깊은 건물이었는데 까다베도 해변(Playa de
Cadavedo)과 꾸에르보스 무인도(Islote de los Cuervos)가 바로 우측 발 아래다.
동북으로는 산따 마리나 한하고(그 뒤로도 멀리멀리) 이슬라(isla/섬)와 뿐따(punta/곶), 그
아래 해변들이 탄성을 발하게 한다.
서쪽으로도 푸라다 섬(Isla de la Furada)과 포르미고사 곶(Punta Formigosa)을 비롯하여
무수한 섬들과 절벽 아래 해변들이 동쪽과 자웅을 결할 태세처럼 보인다.
극찬을 받기 부족함이 없는 자연이며 우리나라 남해의 다도해를 연상케 한다.
오래 전 일이지만 1954년에 아스뚜리아스 지방의 아름다운 마을 콘테스트에서 최고로 뽑혔을
정도로 아름다운 해변마을이다.
깐따브리꼬 해, 베르데 해안(Costa Verde)의 한 절벽 위, 이 천혜의 아름다운 평원에서 매년
8월 마지막 일요일에 축제(Fiesta de La Regalina)가 열린단다.
축제의 핵은 일요일이지만 토요일에 시작하여 화요일에 끝나는 4일간의 대축제란다.
까다베도 출신 신부 갈로(Galo)의 창안으로 1931년부터 시작되었다는 축제다.
사진으로도 전통의상과 춤, 노래 등 화려한 축제라고 느껴진다.
이 축제는 스페인의 지역관광명소(Fiestas de Interes Turistico Regional)로 지정되었단다.
뿐만 아니라 중세와 근대에 이르기 까지 에는 까다베도가 아스뚜리아스 서해안 지역 경제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단다.
아스뚜리아스의 주요 고래잡이 항들 중 하나였으며 성 야고보의 해안길과 강한 유대를 이루고
있었다니까.
인디아노 풍의 집들도 빼놓을 수 없고.
활동적이지 못하는 생존과 직립하지 못하는 생활은 내게 무의미하다
"신선 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仙遊朽斧柯)"고 했던가.
알라인과 디디에르, 알레만녀 안걸라(Angela Plate)와 나, 우리는 오늘 해안에 도착해야 할 먼
곳(Luarca)을 두고 이 예배당 일대에 1시간이나 취해 있었으니.
"넘어진 김에 쉬어가기"인가.
예배당 입구에 위치한 오뗄 아스뚜르 레갈(Hotel Astur Regal)의 식당에서 간단한 점심식사를
한 후 까다베도를 떠났다.
바야흐로 걸음에 피치(pitch)를 올리지 않으면 안되는 처지들이 되었다.
점심때까지 겨우 11km를 왔는데 가야 할 길은 16km나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주 나쁜 신호가 왔다.
우측 하체의 불복종 선언 신호로 이번 까미노에서 최초의 저항 선언(?)이다.
일행을 앞세운 후 애걸하듯 달래고 주저앉기를 거듭하며 떼어놓은 걸음으로 알베르게(Alber
gue de Peregrinos de Cadavedo)가 왼쪽 가까이 보이는 지점까지 갔다.
다리가 저항을 포기하지 않으면 이 알베르게에 머물 수 밖에 없는데 움직일 기미가 전혀 없던
다리가 돌연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통증이 멎고 달아났던 힘이 돌아온 것이다.
일본의 시코쿠 헨로 1.200km에서는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아침 2~3시간씩 고통을 겪는
것이 일과처럼 반복되었다.
이에 반해 1개월이 목전에 와있는 까미노 걷기에서는 최초의 일이며 30여분 만에 물러갔다.
(25일이 단축된 180일 까미노 장정에서 이 까다베도의 벌이 유일한 체벌이었다)
20c초의 마지막 근대적 의술에 의해 죽음의 문턱에서 구명(救命)되었지만 조물주에 버금가는
능력을 가진 21c의 첨단 의학은 구명(究明)하지 못하고 포기상태인 몸.
면역이 되어 아무 일 없는 듯 걷고 있기는 하나 어느 날, 어느 시각에 영영 일어서지도 못하게
될 지 모르는 몸이다.
고백하건대 그 때의 나의 거취에 대해서는 아주 비관적일 수 밖에 없다.
활동적이지 못하는 생존과 직립하지 못하는 생활은 내게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간 밤에도 자신의 이같은 숙명(천형)을 까마득히 잊고 술독에 빠진 상태였으며 아침나절에는
비몽사몽 간에 걸었을 뿐 그 때문에 받는 형벌일 텐데 여기에 무슨 메시지가 담겨 있겠는가.
지극히 짧는 벌이 고마워서 다시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콧노래로 부르며 갈 길을 재촉했다.
오카리나를 꺼내어 부르고 싶었지만 남은 시간이 절대 부족하기 때문에 콧노래로 대신하며... .
이 지점에서 까다베도가 끝나고 비야데모로스(Villademoros)에 진입한다.
곧 지하로 열차(Ferrol~Oviedo)가 가로질러 가는 국도(N-632a)를 계속해서 따라도 무방하나
우측의 비포장 길로 가라는 까미노 마커의 안내를 따르기로 했다.
비옥한 농지들 사잇길이며 근래에 가뭄이 심하기 망정이지 비가 내리면 걷기가 거북할 정도로
질펀할 곳이 많은 농로다.
그렇다 해도 당장에는 상거가 제법되지만 북쪽으로 14c에 세웠다는 우뚝하고 인상적인 대형
사각탑(Torre de Villademoros)을 바라보며 걷는, 걷기 좋은 길이다.
내가 구한 자료에는 이 탑을 건설한 이유 또는 목적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고 1961년에 'BIC'로
지정된 후 1987년에 복원이 되었단다.
이후로는 한가롭게 살피고 생각하며 걸을 만큼 여유롭지 못했다.
알라인 일행이 나를 남겨놓고 앞서 갈 때 적당한 지점에서 기다리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기초지자체 발데스의 15 교구마을 중 하나인 까네로(Canero)에 속한 마을 낀따나(Quintana)
를 지나면서 너무 서둘렀기 때문에 바삐 먹는 밥 체하는 꼴이 되었나.
꾸에또(Cueto) 마을로 들어섬으로서 모자라는 귀한 시간을 잠시지만 낭비까지 했으니.
다음 마을, 까네로 교구마을의 산 끄리스또발(San Cristobal/La Cruz?)에 들어섰다.
까미노 마커가 애매하고 갈림길이 많기 때문에 안내를 받으려 해도 한낮이건만 마치 소개(疏
開)된 마을 처럼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마놀로 바레라스(Manolo Barreras)명패가 붙은 집 앞의 가리비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무작정
전진할 수 밖에 없었다.
곧, 연달아 등장하여 안내를 자임한 안심 마커(amarillo flecha/노랑 화살표)를 따라서 우거진
숲길을 달리듯 속보로 전진했다.
까다베도 이후로는 해발80~90m대라 오르내리는데 부담이 적어서 속도감이 났다.
오래지 않아서 국도(N-632)에 올라서게 되고, 국도의 신설 공사로 인하여 남겨진 자투리 길로
보이는 우회로를 잠시 걸으며 국도를 따라서 께루아스(Queruas)를 지난다.
교구마을 까네로에 속해 있으며 주민수가 160명쯤 되는 마을인데 진행 방향 우측으로 한 블록
(block) 건너에 산따 아나 예배당(Capilla Santa Ana)이 있다.
낡은 집과 인디아노 풍의 집이 혼재해서 어수선한 마을에 장난감 같은 예배당이 앙증스럽다.
께루아스에서 차노 데 까네로(Chano de Canero)까지의 노르떼 길은 2km미만이지만 정답도
오답도 없는 구간인 것 같다.
정답이 있었으나 국도와 고속도로의 개설로 인해 토막나고 여러개의 변수가 생겼기 때문이다.
음식점 까사 암빠로(Casa Amparo) 목전에서 왼쪽 고속도로를 횡단하여( 밑으로) 가는 길이
있고 국도를 따라 로터리를 돌아서 가는 길에도 2개의 길이 있다.
까미노 마커 역시 여러 길을 모두 인정하겠다는 듯 곳곳에 분산되어 있다.
까네로 교구 마을에 속한 차노에서는 A-8(E-70) 고속도로를 가로질러(밑으로 해서) 국도(N-
632a)까지 내려간다.
국도를 따라가도 되지만 국도를 떠나 내려가고 올라가고, 다시 국도를 만나고 국도를 건넌다.
까네로의 교구교회(Parroquia de Canero)인 산 미겔 교회(Iglesia de San Miguel de Cane
ro)와 부속 묘지(Cementerio de Canero)까지.
까다베도에서 6.5km 남짓 되는 위치에 1789년~1800년 사이에 지었다는 교회다.
교회 앞에서 우거진 숲길을 빠져나간 노르떼 길은 N-632a국도를 또 다시 만난다.
이 국도는 반km쯤 지나 로터리에서 N-634국도에 흡수된다.
로터리 변의 음식점(El Bolero Agro Turismo)에 들렀다.
그러나, 발바닥이 불덩이가 될 정도로 7.5km(까다베도에서 여기 로터리까지)를 추적했는데도
보이지 않는 알라인 일행.
"윌 웨이츄 인 어 나이스 프레이스"(We'll wait you in a nice place)
"기다리기 좋은 곳에 있겠다"는 말을 내가 잘못 들은 것인가.
774년의 레꽁끼스따와 무슬림 묘지의 아이러니
상당히 지친 상태에서 에스바 강(Rio Esva)을 건넜다.
아직도 10km 이상 남은 오늘의 예정지(Luarca)가 아득하게 느껴졌으니까.
강과 까네로 사이의 고공을 지나가는 고속도로(A-8/E-70)의 고가교(Viaducto)를 바라보며 N
-634국도를 걷는 중이었다
500여m가 거의 직선인 노상의 보행자 3명이 아스라이 포착되었는데 왠지 그들이 알라인 팀이
라는 느낌이 들었다.
남은 힘을 모아 마치 추격이라도 하는 듯이 쫓아갔다.
내 느낌은 적중했다.
알라인 네인 그들은 N-634국도변에 있는 까네로 오뗄(Hotel Canero)의 야외식탁을 차지하고
나를 기다리기 시작한 것이다.
바르-식당(Bar-Restaurantes)을 겸하고 있으며 순례자들에게 각별한 접대를 한다는 곳인데
이 곳에 묵을 각오로 마냥 기다리기로 했단다.
그레이트 맨(great man)에 대한 경의로 이 정도는 약소하다(a little)는 알라인의 말이 진심일
것이기에 한국의 늙은이로 하여금 감동 먹게 했다.
(그의 나에 대한 성심은 훗날에 더 했다.
혹서의 쁠라따 길(Via de la Plata/Silver Way)을 걸을 때는 거의 매일같이 안부를 물어왔다.
지중해 남쪽 해변인 알메리아(Almeria)에서 백팩을 도둑맞았을 때, 뒤 늦게 소식을 들은 그는
자기의 핸드폰에 담긴 노르떼 길의 나를 모두 보내오기도 했다.
여행 중이라 겨를이 없을 텐데도 기억을 되살리는데 도움이 되기 바란다면서.)
자기네의 예상 보다 내가 빨리 당도함으로서 우리는 당초의 예정을 따르기로 했다.
남은 거리 10km를 위해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최적의 시간이 2시간 반 정도 남았으니까.
체력도 다분히 기분의 영향을 받는다.
재결합한데다 잠시나마 휴식 시간을 가진 후라 10km쯤이야 문제되지 않을 듯 싶었다.
까다베도에서 먹은 것이 빈약했기 때문에 요기를 한 후 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나, 곧 국도를 떠나 점차 심해가는 된비알 산길일 줄이야.
까미노에서 잠자리를 양보하고 경의를 표하는 순례자는 무수해도 무거운 백팩을 바꿔 메자고
제안해 온 사람은 아직껏 만나지 못했다.
뒤쳐질 수 밖에 없는 늙은이를 기다려 주는 것만도 엄청 고마운 일이거늘 뭘 더 바라겠는가.
산을 넘은 노르떼 길은 온전히 P턴,역(逆)으로 달리는 국도를 건너 고속도로(A-8)에 접근한다.
남의 나라 도로에 왈가왈부하려고 걷는 것이 아니지만 이해되지 않는 점이 종종 있다.
여기 N-634국도도 그 중 하나다.
까네로 호텔에서 1km 이상 서남하하여 긴 능선을 P턴, 서남하한 만큼 북동진한다.
까네로 호텔에서 북으로 직진하면 200m도 되지 않는데 2km 이상 달려야 하다니.
이 지점에서 국도는 고속도로를 횡단하여(지하로) 서남하하는데 P턴하지 않고 직진하면 여기
에서도 2km이상 단축된다.
우리나라라면 빗발치는 민원에 굴복하여 역(逆) S 자 형의 이 길이 진작에 해결되었을 길이다.
고속도로와 짝하여 1km쯤 전진,육교를 통해 고속도로를 건넌 노르떼 길은 직각으로 좌회전해
N-634국도를 다시 만날 때까지 잘 정지된 농로와 오크, 유칼립투스, 밤나무 등 숲길을 따른다.
까네로 교구의 마을들을 뒤로 하고 바르시아(Barcia) 교구 마을로 접어든 것이다.
국도를 따라 리깐떼 계곡(Arroyo Ricante)을 건너면 왼쪽 숲속에 담으로 가려진 묘역이 있다.
북 스페인의 유일한 무스림 묘지(Cementerio Musulman)라는데 을씨년스럽다.
스페인의 내전(Guerra Civil Española) 때(1936~1939) 만들었다니까 80년도 되지 않았는데.
아무리 갈길이 바빠도 잠시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역사상 최고의 장기전쟁,7c반이 넘는 레꽁끼스따(Reconquista/718~1492)를 잊었을 리 없는
스페인 땅에서 적군인 무슬림 묘지를 바라보는 시각이 극동의 늙은이라 해서 별날 리 있는가.
더구나 내전 중에 만든 묘역이라는데.
내전때 아스뚜리아스의 에스깜쁠레로(Escamplero) 전투에서 죽은 모르꼬군대의 무덤이란다.
그러니까, 모로꼬에서 쿠데타를 일으킨 프랑꼬(Franco)가 몰고 온 모르꼬 군의 소위 전사자들.
목적 달성을 위해서 774년이라는 지긋지긋한 전쟁의 적군을 앞세운 프랑꼬.
그를 적극 지원한 레꽁끼스따의 주역 가톨릭교회.
내 머리를 헷갈리게 했다.
한 순간에 1500여명 시민의 목숨을 앗아간 나치 히틀러의 게르니카 공습은 프랑꼬를 독재자로
등극시키기 위한 유유상종, 상부상조였다고 볼 수 있지만..
하긴, 중립을 표방하고 한 쪽(정부군)에는 비행기를, 다른 쪽(프랑꼬 반군)에는 기름을 팔아서
재미를 본 나라도 있었으니까.
비는 나그네에게 애물단지
바르시아에서 루아르까로 가는 길은 2갈래로 나뉜다.
N-634 국도를 떠나서 산 세바스띠안 교구 교회(Iglesia de Sn Sebastian de Barcia)에 들른
후 외로운 시골길을 따라 막달레나 계곡(Arroyo de la Magdalena)을 건너간다.
다른 하나는 N-634 국도를 따라서 라 알무냐(La Almuña)를 거쳐가는데 1km쯤을 더 걷지만
한결 수월한 길이다.
라 알무냐 초입에서 루아르까 등대쪽으로 가는 3시 방향의 VA-1지방도를 따르면 되니까.
루아르까의 동구에서는 다운타운을 발 아래로 내려다 보아야 한다.
최저 해발5m에서 135m의 고저 차가 있기 때문이다.
내려가는 것이야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내일 아침에 올라야 할 맞은 편이 겁을 주는 듯 했다.
그러나 내려가며 감상하는 루아르까 항구야 말로 하루의 피로를 씻기 충분한 절경이다.
원론은 까미노 마커에 충실하는 것이지만 안내판 따르기를 접고 발 가는 대로 내려가는 것도
괜찮은 각론이라고 생각되는 루아르까다
어차피 다운타운으로 가려면, 또 까미노를 걸으려면 네그로 강(Rio Negro)을 건너야 하니까.
알베르게 비야 데 루아르까(Albergue Villa de Luarca/Av.Álvaro de Albornoz 3)를 찾아가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누누이 지적한 대로 아스뚜리아스 지방은 자기네의 자부심과 달리 순례자를 위한 열의는 다른
지방에 비해 뒤진 실정이다.
10€짜리(7월~9월에는 11~12€) 사설 알베르게가 있는 것 만도 다행이다.
숙소에 당도해서 곧 비가 내리기 시작했으므로 하마터면 처량한 신세가 될 뻔 했으니까.
22명 수용의 크지 않은 알베르게에 늦게 도착한 우리의 자리가 남아 있는 것만도 행운이거늘
2층 벙크의 아래층을 기대할 수 있는가.
2층의 빈 자리를 찾고 있을 때 초입 하층의 건장한 청년이 재빨리 일어나 내 백팩을 낚아챘다.
젊은 자기가 올라갈 테니 할아버지는 아래층을 쓰시란다.
예의 바른 이 청년은 그의 백팩으로 보아(Deuder) 알레만이다.
베사나에서는 내게 침대를 양보하고 응접실로 갔지만 2층으로 오르기는 노르떼 길 처음이다.
이 젊은이가 한국인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마는 까미노에서 양보하는 한국인은 보지 못했다.
우리 팀 3명은 내가 하층에 들게 된 것을 자기네의 일 이상으로 기뻐했다.
그랬음에도 알라인과 알레만녀는 다른 오스딸로 옮겼고 디디에르와 나만 남았다.
심한 가뭄에 필요한 비지만 오랜만에 내리는 이 비가 나그네들로 하여금 술을 부르게 했는가.
알라인네 숙소로 오라는 초청을 받았으나 나는 간밤의 일을 상기하며 사양했다.
취기가 극상에 오른 듯 자정 무렵에 돌아온 디디에르의 손에 들려 있는 비노 1병.
나를 위해 모두의 마음이 담겨있는 술이라는데 무정할 수 있는가.
더구나 내일 하루를 이 곳에서 쉬겠다는 그들이기에 이별주가 되는 셈인데.
그들은 쉬고, 나는 어차피 자정 넘어 1~2시까지 잠자리에 들지 못하니까 또 마실 수 밖에.
빗소리가 점점 굵어가는 심야에.
비는 나그네에게 애물단지다.
활동을 제약할 뿐 아니라 우수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순례자도 나그네다
그러므로 순례자 역시 비에는 약할 수 밖에 없는데 이 밤이 그랬다.
나는 장거리, 장기간의 여정에 나설 때는 아예 모든 잡념을 지워버리는 방업으로 날자에 대한
무관심을 길들였다.
날이 밝으면 길 떠나고 어두워지기 전에 마감하고 시장할 때 먹고 졸릴 때 잠자는 것외에는 할
일이 없는데 왜, 무슨 관심을 갖어야 하는가.
더구나 한, 두달을 넘어 반년 여정으므로 날자 가는 것에 근시적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
주말에 대비하지 않으면 자칫 굶기 십상이기 때문에 오직 주말에 관심을 가질 뿐.
한데,식당의 고장난 시계 때문에 현재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무심코 핸드폰을 열었다가 오늘이
5월 말일임을 알았다.
한국시간으로는 이미 6월 1일이다.
하긴, 산띠아고에 도착할 날이 어느새 1자리 수로 줄었다. <계 속>
지금은 돌다리지만 예전에는 출렁다리였단다(위)
까다베도에 진입하는 알라인 3인(아래)
레갈리나 해변(위/아래)
알라인(위)과 디디에르(아래)
레갈리나 예배당(위)과 축제마당(아래/전재)
까다베도 알베르게(위) 다리가 파업(?)을 풀지 않았다면 여기에 홀로 남게 되었을 것이다.
국도를 떠난 노르떼 길(아래)
비야데모로스 탑(위)과 낀따나 마을(아래)
께루아스에 진입하면(위) 산따 아나 예배당이 앙증스럽다(아래)
까네로의 교구 교회 산 미겔 교회와 부속 공동묘지(위)
음식점 엘 볼레로 아그로 뚜리스모(아래)
우리가 재결합한 까네로 오뗄(위)
까네로를 뒤로 한다(아래)
노르떼 길은 산길(위)과 농로(아래)로 이어진다.
쓰레기를 비롯해 폐기물의 불법 투기에도 카르텔이 있는가.
까미노의 루트 마다 한 두곳씩 있으니.(위)
일본의 시코쿠헨로에는 곳곳에 고미(ごみ/쓰레기)와의 전쟁을 선포한 현수막과 안내판이 있는데
까미노에도 도입해야 하는가.
스페인 땅에 있는 레꽁끼스따 774년의 적인 무슬림의 대형 묘지를 어떤 눈으로 봐야 할까.
기나긴 세을 전쟁한 적군을 앞세워 쿠데타에 성공했다면 레꽁끼스따의 의미는 무엇인가.(아래)
바르시아에 진입하여(위) 산 세바스띠안 교회(아래)를 지나 루아르까로 가는 노르떼 길과
바르시아에서 라 알무냐를 거쳐서 가는(아래2) 노르떼 길이 있다.
루아르까 동구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보는 루아르까 항구(위)와 루아르까 항구의 야경(아래)
알베르게 비야 데 루아르까.(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