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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이것이 한국이다.
이어령 지음 문학사상사 1963 /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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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피부 빛과 똑같은 그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우리의 비밀, 우리의 마음이 있다. 15
울음에 대하여
“노래하는 새와 우는 새
슬퍼서 울고 배고파서 울고 억울해서 울고... 심지어 즐거운 일이 있으면 이번에는 즐겁다 해서 운다. 아메리카의 슈우 인디언들은 잘 울기로 이름난 종족이지만 그들도 결코 우리를 따르지 못했으리라. 울음과 눈물을 빼놓고서는 한국을 말할 수 없다.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주위의 모든 것까지를 울음으로 들었다.
'운다'는 말부터가 그렇다. 우리는 절로 소리나는 것이면 무엇이나 다 '운다'고 했다.
'birds sing'이라는 영어도 우리말로 번역하면 "새들이 운다"로 된다. sing은 노래부른다는 뜻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반대로 '운다'로 표현했던 것이다.
똑같은 새소리였지만 서구인들은 그것을 즐거운 노랫소리로 들었고, 우리는 슬픈 울음으로 들었던 까닭이다.
아무리 시시한 국산 영화나 방송극이라 할지라도 우는 대목만은 감히 어느 나라의 것도 그것을 따르지 못한다. 우는 연기만큼은 어떤 배우를 시켜도 훌륭하게 해치우는 것이다. 먼 조상으로부터 대대로 물려받은 유산이 바로 그 울음이요 눈물이기 때문이다.“
<흙과 저 바람 속에> 이어령
* 한국인의 한과 슬픔을 녹여 밖으로 용출되는 것이 눈물이다. 한국에서 눈물 연기를 할 수 없으면 배우가 아니다.
눈물이야말로 남에게 깊은 감동을 남겨준다.
슬프다면서 눈물이 없으면 그 슬픔을 실감할 수 없다.
인간 본연의 저변에는 비극의 강이 흐르고 있다. 깊은 감동을 주는 것은 웃음보다는 울음이다. 한국인들이 그것을 잘 표현한다고 해서 유달리 슬픔에 잠긴 민족이라는 식으로 단정 짓는 것은 과하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눈물이기 때문에 한국의 연기자들이 우는 연기를 잘 한다고 하면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
새소리를 듣고 서양인들이 노래한다고 표현했다고 해서 우리도 덩달아 같은 말을 하기 보다는 애절한 음양으로 들리는 두견새는 목이 쉬어서 흐르는 울음소리로 들을 수 있다. 아침에 일어나서 창밖에 들리는 ‘짹 짹’거리는 참새소리를 들으며 운다고 여길 한국인은 없다.
사전을 보면 울다(자동사), 울리다(타동사)는 어떤 대상이 울려서(떨려서) 소리가 날 때 쓰는 말이다. 반드시 눈물을 흘린다는 뜻만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새, 짐승, 벌레 따위가 소리를 내는 것을 ‘울다’로 표현한다는 것이다. ‘종이 울린다, 대들보가 운다. 나무기둥이 운다,’고 할 때 떨려서 나는 소리를 나타내는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먹이 운다’고 할 때도 눈물과는 상관없이 상대를 때려주고 싶다는 표현임은 당연하다.
‘가을 밤 창밖에서 귀뚜라미가 운다’고 하면 눈물을 흘리며 운다는 뜻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시인은 ‘새는 울어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는 우스갯소리를 하게 된다.
AI
울다, 운다, 울리다로 볼 때 새가 운다는 것은 눈물을 흘린다는 뜻이 아니라 그저 소리를 낸다는 뜻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맞아요, 아주 정확한 해석이에요. "새가 운다"라는 표현은 일상 언어에서는 일반적으로 "소리를 낸다", 즉 지저귄다 또는 울음소리를 낸다는 의미로 사용되죠. 여기서 ‘울다’는 반드시 감정을 동반한 눈물과 연결되는 개념이 아니라, 소리를 내며 반응하는 행위로 이해해야 해요.
🔍 어휘적 차이 간단 정리:
표현 일반적 의미 예시 문장
| 울다 | 감정에 의해 눈물을 흘리거나, 소리를 내다 | 아이가 울어요 / 새가 울어요 |
| 운다 | 울다의 현재형 | 까치가 운다 |
| 울리다 | 울게 만들다 (사역형) | 슬픈 영화를 보고 나를 울렸어요 |
📚 언어 속 ‘울다’는 감정적 맥락뿐 아니라 자연의 소리에도 확장되어 쓰이는 말이에요. “종이 울리다”, “천둥이 운다” 같은 표현도 있죠. 이런 맥락에서 보면 "새가 운다"는 말은 청각적 풍경을 묘사하는 데 아주 아름답게 쓰이는 표현이기도 해요.
혹시 이 표현을 가지고 시나 글을 쓰실 계획인가요? 함께 문학적인 표현도 다듬어볼 수 있어요.
굶주림의 그늘
“우리의 슬픔과 그 울음은 대부분이 가난과 굶주림에서 온 것이었다.
‘토끼야, 토끼야, 산속의 토끼야. 겨울이 오면 무얼 먹고 사느냐’
그 꿈 많은 시절에도 이 나라의 아이들은 이렇게 부지불식간에 먹는 타령을 해야만 된다.
영어의 sad(슬프다)는 독일어의 satt에서 온 말이다. 그 어원의 뜻은 포식하다, 배부르다, 물리다(satiate)와 같은 것이다. 같은 슬픔이라 할지라도 우리와는 얼마나 그 차원이 다른가? 우리는 배고픈 설움이며 그들은 배가 부른 다음에 오는 슬픔, 즉 포식 뒤에 오는 정신적인 비탄(형이상학적인 고민)이요 권태다.“
* ‘서구에서는 배불러서 슬프고, 한국에서는 배고파서 슬프다‘는 억지의 극치를 보여준다. 서구에서는 배고픈 사람도 없었고, 늘 식량이 넘쳐나는 사회였던가. 한국이 근대화 과정에서 어렵게 살아온 것은 사실이지만 모든 사람들을 이 틀 속에 꾸겨 넣으려는 것은 너무 지나친 견강부회牽强附會이다.
나는 서울에서 40-50년대에 서민 가정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이런 참혹한 배고픔에 공감하지 못한다. 전쟁 통에 먹을 것이 부족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고 주위에서도 배가 고파 먹는 타령만 하는 걸 거의 보지 못했다.
겨울이 되면 온 세상이 눈밭으로 변하니 귀여운 토끼는 어떻게 먹이를 구할까 토끼를 연민하고 동정하는 마음에서 걱정하는 표현이 아닌가? 이런 어린 마음마저 제가 배고프니까 토끼도 배고프겠지 해서 먹는 타령을 한다고 하니 할 말을 잃을 지경이다.
윷놀이의 비극성
“윷놀이와 사색당쟁
육면체의 주사위는 개개의 면이 각각 독립적인 운명을 나타내고 있지만, 윷은 하나하나의 윷가락들이 서로 얽히고설켜서 그 연관성 아래 비로소 결정적인 한 의미를 형성하게 마련이다. 25
네 개의 윷가락이 떨어지고 있는 것을 보고 앉았으면 조선의 그 사색당쟁이 눈앞에 어린다. 25
굴러 떨어지는 그 운명의 윷가락 그것보다도 말판에서 뛰고 있는 말들을 볼 때 우리는 한층 더 절실한 이 민족의 비극을 암시받게 되는 것이다. 윷의 말판이야말로 저 피비린내 나는 사화 당쟁의 압축도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 네 개라는 숫자만으로 사색당쟁을 연상할 만큼 치우친 편견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편견은 밖으로 나올 때 오류가 되기 쉽다. 고정된 편견을 갖기까지는 오랜 시간 왜곡된 환경과 교육의 영향을 받아왔다고 봐야한다.
신라시대부터 주로 명절에 동네 사람들이 어울려 흥겹게 놀던 놀이를 가지고 필자는 윷가락 네 개를 보며 조선의 사색당쟁을 떠올렸다니 어이가 없는 일이다.
조선 당파싸움의 폐해를 부풀려 강조한 것은 일제의 식민사관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일제 관변사학자들이 조선의 약점으로 첫째로 꼽은 것이 사색당쟁이었다. 당파싸움으로 조선은 망할 수밖에 없었다는 지적을 한 것인데 시데하라 아키라 등은 한국인의 민족성이 본래 싸움을 좋아하고, 잔혹하고, 사람의 목숨을 경시하기 때문에 당쟁이 가열되었다고 주장하였다. 당쟁이 심했던 시기는 한국사 전체에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임진왜란 이후 17-8세기에 집중되어 있는 것을 마치 한국은 처음부터 당쟁으로 시작한 나라로 왜곡한 것이다. 무리를 지어서 정치적으로 대립하고 권력투쟁을 하고 승자가 패자를 숙청하는 구조는 조선에게만 해당되는 사실이 아니다.
어려서부터 일인들에게 교육을 받고 조선인은 미개하고 더러우며 당쟁이나 일삼아 결국 나라는 망하고 선진국인 일본의 지배를 받는 것은 당연한 역사의 순리라고 세뇌당한 사람들이 그 후로도 계속해서 이런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동해의 새우 등>
반도 삼천리 / 삼천리 금수강산 / 토끼, 호랑이 형상의 한반도
아시아 지도를 펴놓고 물끄러미 바라다보고 있으면 우리가 왜 눈물을 흘리며 살아야 했는지를 절감케 된다. 그 지리적 위치는 숙명적인 것이었다.
해양세력의 대륙진출, 대륙세력의 해양진출을 위한 징검다리가 한반도.
*역사적인 한두 차례의 사실을 확대해석한 면이 없지 않다. 한반도는 대륙세력의 종착지이기도 하였다. 종착점이기에 도리어 안전을 도모한 면이 있다.
반도의 징검다리 론은 반대로 대륙과 해양으로의 진출을 용이하게 하는 이점도 있다. 농경국가인 한국은 강대한 군대를 가져보지 못했다. 말을 길러 북으로 정복 전쟁을 일으키고 배를 만들어 남으로 일본을 정복해 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대륙의 주인이면 좋든 싫든 그저 섬겨야만 했던 이 나라의 운명은 원에서 명으로, 명에서 청으로 남북 세력권을 시계추처럼 넘나들며 그 종주국을 수시로 바꾸어 갔다. 제 땅, 제 나라는 있어도 자국의 연호마저 변변히 사용할 수가 없었다.”
*대한민국의 연호는 단기에서 서기로 바뀌고, 음력 중심으로 사용하던 일력은 양력 중심이 되었다. 주권이 없고 종속적이라서가 아니라 세계적인 흐름에 맞추기 위해서 였다.
원은 중국을 멸망시키고 몽고가 중국 땅에 세운 왕조이며, 청은 명을 멸망시키고 중국 땅에 세운 여진족의 왕조였다. 한쪽은 멸망을 했고 다른 한쪽 우리는 강자 쪽에서 살아남았다. 만일 지금 다시 역사의 선택을 한다하더라도 어느 길을 택하겠는가?
<풀 이름, 꽃 이름>
우리 나라의 꽃과 풀 이름 가운데는 ‘도둑놈꽃’의 경우처럼, 아름다운 것보다는 천한 것이, 시적인 것보다는 산문적인 것이 너무나도 많은 편이다. 33
저 가냘픈 풀에게 어째서 ‘도둑’이란 이름을 붙여야만 했던가?
인간의 행복은 그리고 그 진정한 생활은 먹고 자는 문제가 아니라 그 다음에서 생겨나는 즐거움이다. 우리에겐 동물적인 ‘침식’의 안락만 추구하는 것도 힘이 드는 일이었다.
자고 먹는 일에 바빴던 그 생활에서는 하나의 신화가 생겨날 만한 여유가 없었다. 모든 면에서 여유가 없었다는 것, 그것이 또한 우리의 사고 방식과 생활 양식을 푸는 열쇠라고 생각한다. 35
* 한국인은 먹고 사는 일에 지쳐서 삶의 여유가 없었고, 풀이름 꽃이름 조차도 시적으로 붙이지 못했다고 적었다. 세상은 어디나 한결같지 않은 게 특징이다. 먹고사는 걱정을 조선팔도 모든 사람들이 한 것은 아니다. 5%가 될지 1%가 될지 언제나 소수의 여유 있는 사람들에 의해 문화가 이루어져 왔고 생계에 지친 가난한 사람들도 개중에는 예술과 문화의 별이 된 사람들이 있다.
중국의 문호 이태백, 두보, 도연명, 백낙천, 소동파. 이들의 공통점은 성공적인 삶을 살지 못하고 가난하고 피폐한 중에서 문학을 자기 삶의 표출 수단으로 가졌다는 점이다. 지금은 작품 하나가 수 십 억에서 수 백 억을 하는 이중섭이나 박수근 같은 화가 역시 가난하게 불행한 삶속에서 죽음을 맞았다. 세계 최고가를 자랑하는 화가 고흐는 어떤가. 그림 그릴 물감 값을 보내달라는 편지를 동생에게 하며 ‘정말 내 그림은 사람들이 전연 사가지를 않냐’고 비통한 어조로 묻고 있다.
‘가난하기 때문에’를 모든 문화 기저의 원인으로 돌리는 것은 무책임하다. 가난은 자고로 언제나 있어 왔다. 또한 부귀한 자도 언제나 있어 왔다. 가난만을 보면 모두 가난해 보이고, 부유한 자만 보면 모두 부유해 보이기 마련이다. 어느 쪽을 보느냐에 달려 있다.
<눈치로 산다>
아랫 사람이 웃 사람의 기분 상태를 살피는 것은 어느 한 나라의 특성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일본에 사신으로 간 황윤길과 김성일이 도요도미 히데요시의 눈초리만 살피고 와서 ‘조선을 침략할 것 같다’고, ‘침략하지 않을 것 같다’고 보고했다고 적었다. 한편 일본 사신들은 조선의 사정을 요리조리 살펴보았는데 군사들의 창의 길이, 기생과 노는 목사들의 태도를 보고 국가 기강이 많이 해이하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한국을 본 일본인들의 사고방식은 분석적이요, 과학적인 것이었지만, 우리 사신들이 일본을 본 것은 직감적이요, 인상적인 것이었다.”
*이런 생각은 임진왜란이 무방비한 상태에서 일본에게 일방적으로 당했다는 피해의식에서 나오는 것이다. 임진왜란은 남의 땅에서 전쟁을 하다 보니 모든 참화를 고스란히 그 땅에 살던 사람이 당하고 말았다. 임진왜란은 일본이 이긴 전쟁이 아니다. 일본이 최후의 승리를 한 것도 전쟁 목적을 달성한 것도 전연 아니다. 막판에는 겨우 목숨을 부지해서 허둥지둥 도망갔고 얻은 것은 도자기와 도공뿐인데 그걸 얻겠다고 처음부터 일으킨 전쟁은 아니었다. 어설픈 눈치만 보다가 무참하게 침략을 당했다는 주장은 자기학대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사람 살려>와 <헬프 미>
“영국인들은 ‘헬프 미‘라고 하고, 일본인들은 ’다스케테구레‘라고 한다. 그리고 한국의 경우 같으면 ’사람 살려‘다.
제로에서 구원을 청하는 것이 아니라 부족한 힘을 보조해 달라는 의미가 잠재해 있다. 죽음 속에서도 주체적인 힘을 잃지 않고 있는 태도다.
우리는 위급한 경우를 당하였을 때 그냥 살려 달라고만 한다. 그것은 완전한 절망과 무력과 자기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다.“
*혼자 힘으로 살 수가 없어서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도움을 청하는 사람의 외마디를 가지고 ‘무조건 도와만 달라고 한다’와 ‘주체적인 힘을 잃지 않고 조금 도움을 청한다’고 편 가르기 하는 말을 하고 있다.
도리어 한국 사람이 ‘사람을 살리라’는 말 속에는 다른 것이 아니라 가장 귀중한 사람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으니 와서 도와 달라는 말이다. 막연히 도와 달라는 말은 그가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다는 암시가 없는 경우이다. 수영을 전연 못하는 사람이 실수로 물에 빠져 방금 허우적거리며 죽어갈 때 여유 있게 나도 노력하겠지만 누가 조금 도움을 주면 좋겠다는 말을 할 수 있을까?
한국을 비하하고 싶어 몸살이 난 사람의 억지 주장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군대는 우리를 돕기도 하는 것이지만 자국을 미리 방어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왜냐하면 일본이 조선 땅에 들어온 것은 명나라를 치기 위해 지나가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우리가 싸우는 것은 우리 땅에 들어온 침입자와의 전쟁이기도 하지만 크게는 명나라로 처 들어가려는 일본군을 막아주고 있는 꼴이었기 때문이다. 무조건 살려달라고 애원해서 명나라 군대가 온 것이 아니었다. 조선 땅에 외국 군대가 와서 나라를 구원해 준 적이 언제 있었던가?
“오늘날 미국은 한국의 원조를 ‘밑 빠진 독에 물을 퍼붓는 것’이라고 비유한다. 경제 원조가 아니라 ‘먹여 살리는 행위’라고 피차가 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이 책의 초판이 1963년에 나왔는데 1964년 수출 1억 달러 달성을 기념하기 위해 제1회 수출의 날을 만들었다. 사람의 머리카락을 동네마다 모아서 가발을 만들어 수출해서 세계1등 품목이 되었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기술도 자본도 전무하던 시절에 한국인들은 주저앉아서 미국 원조만 바라보고 살지 않았다. ‘한 번 잘 살아보자’고 허리끈을 동여매고 달려 나간 세월이었다. 지금은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 되었다. 원조에 매달려서 살려달라고만 하면서 살지 않았다는 것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모모타로와 해와 달의 설화>
“일본어로 들은 이야기들은 한결같이 침략적이고 야심적인 것이었으며, 우리말로 들은 것은 너무나도 슬프고 너무나도 수난에 찬 이야기였다.”
“(양국의 국가를 들어보면) 같은 영원이라 할지라도 그들은 모래알이 바위덩어리로 커가는 영원이며, 우리 것은 산과 바다가 마르고 닳아 빠지는 영원이다. 일본인들은 침략과 번영의 내일을 생각했고, 우리는 고난과 모멸의 내일을 생각했던 것이다. 사물을 보고 생각하는 그 마음이 그렇게 달랐다.”
*이 말대로라면 일본은 한 없이 번영하고 한국은 끝없이 몰락할 수밖에 없는 나라라는 뜻이다. 60년대 초라면 아마 필자 스스로 한국의 미래를 암담하게 봤을 것이다. 그런 옛날 이야기를 어려서부터 부지런히 들으면서 자라니 그럴 수밖에 없다고 본 것이다.
영원한 시간을 표현하는데 ‘모래가 바위가 되도록’과 ‘바닷물이 마르고 백두산이 닳아 없어지도록’ 이라는 표현은 어느 것이 더 영원성에 가깝나 물어보자. 바위가 모래가 된다는 말은 들었어도 모래가 바위가 되다니 애초에 말이 안 되는 말이다.
2020년대 오늘날은 사정이 어떤가? 일본과 한국은 지는 해와 떠오르는 태양으로 비교될 만 하다. 그렇다면 하늘에서 새끼줄이 내려오기를 비는 남매의 이야기를 지금은 잊었는가? 지금도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귀의 문화와 눈의 문화>
“서구어가 논리적으로 발달해 갔고, 우리나라 말이 감각적인 것으로 발달해 갔다는 것은 흔히들 지적하고 있는 현상이다.”
서구는 보는 문화이고 한국은 듣는 문화라고 일괄적으로 단정하는 것은 퍽이나 편견적이다. 어느 나라 문화이든 사실상 그 양자가 다 공존하고 있다.
“눈의 문화는 지성적이고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며 능동적인 것이다. 그러나 귀의 문화는 정적이고 감성적이고 직감적인 것이며 수동적이라고 할 수 있다.”
*화려하게 펼쳐놓은 문장이지만 너무나 편협하고 단정적이다. 서구는 눈의 문화, 한국은 귀의 문화라고 단정하고 나면 이런 오류에 빠지게 된다. 음악을 놓고 볼 때 서구음악은 감상용이고 한국 음악은 춤과 함께 어우러지는 음악성이 강하다. 이것 역시 양자가 서로 교차하고 있는 것은 말할 것 없다.
<돌담의 의미>
“우리 돌담은 바로 폐쇄와 개방의 중간측에 위치해 있다. 밖에서 들여다보면 그 내부가 반쯤 들여다보인다. 당신은 그 토담 너머로 맨드라미꽃이나 해바라기나, 그리고 영창을 열고 나오는 여인의 그 상반신을 볼 수 있으리라. 내부의 풍경이 보일락 말락 하는 것, 그 반개방성이 바로 우리나라의 울타리가 갖는 상징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돌담의 반개방성 - 그것은 분열이면서도 통일이며, 고립이면서도 결합이며, 폐쇄적이면서도 동시에 개방을 뜻하는 것이다.
이 어렴풋한 돌담의 경계선 - 말하자면 ‘성벽의 문명’과 ‘숲의 문명’의 중간인 ‘돌담의 문명’ 속에서 한국의 문화는 어렴풋이 자라났던 것이다.
<기침과 노크>
한국은 창호지를 바른 미닫이 문이기에 두드리기 보다는 인기척을 기침소리로 냈다. 그것도 젊은 사람의 경우에는 ‘~계신가요?’라고 목소리를 내고 연세가 있는 분은 ‘어험, 흠’하고 기침 소리를 냈다.
서양의 경우에는 문이 판자로 견고해서 두드려서 내가 왔다는 것을 알렸다. 안에서 열어줄 의사가 없으면 계속 두드려도 문은 열리지 않는다. 가옥의 구조로 동서양이 달라진 것이니 거기에 특별한 이유를 붙이기는 무리이고 오늘날에는 한국에서도 창호지 바른 문이 없어져서 거의 다 인기척을 노크로 대신하고 있다.
<김유신과 나폴레옹>
두 사람은 애초에 비교하기 힘 드는 인생을 산 사람들이다. 공정한 눈이 아니라 한 쪽은 비하하고 다른 한 쪽은 미화하겠다는 생각으로 글을 쓴 것처럼 보인다.
김유신은 차근차근 자기 길을 걸어가서 오랜 염원이었던 신라의 삼국통일을 이끈 장군이고, 나폴레옹은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혼란기에 어부지리로 출세해서 애꿎은 남의 나라들을 정복하기 위해 수다한 전쟁을 일으킨 정복자이다.
자기 신념을 지키기 위해 말의 목을 친 김유신과 유부녀인 애인의 안위를 걱정해서 전쟁에서 군대를 되돌렸다는 것이 애초에 비교 대상이 될 수 있겠는가?
‘김유신은 현실에 자기를 순응시키려 했고, 현실을 부수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그 현실에 자기를 맞추기 위해 노력한 사람이다.‘라고 말하면서 나폴레옹은 현실을 자기에게 적응시킨 역풍의 영웅이었다고 했다.
김유신을 그렇게 말하면서도 동생 문희를 내세워 김춘추와 관계를 맺고 출세의 발판을 마련했던 일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앞뒤가 안 맞는 말이다. 또한 김유신이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김춘추에게 접근했는지는 단순히 이 사건만으로는 점치기 어렵다. 국가 대업을 위해 그 둘은 평생을 믿고 의지했던 왕과 신하였기 때문이다. 김춘추가 왕이 되리라고는 본인도 김유신도 그 당시에는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독재자와 아리랑>
“뒷전에 숨어서 은근히 백성의 가슴을 멍들게 한 폭군 아닌 폭군들이 얼마나 많던가? 연산은 네로가 아니다. 김유신은 나폴레옹이 아니다. 역시 이승만은 히틀러가 아니다. 이 땅에는 철저한 폭군도 영웅도 독재자도 없었다. 제대로 타오르지 못하였으니 제대로 꺼져 본 일도 없다. 이것이 소위 한국적 특성으로 학자들이 곧잘 내세우고 있는 ‘은근과 끈기’의 정체인 것이다.” 67
* 아침 산책길에서 버터와 베이컨 냄새가 진동을 했다.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집에서 풍기는 냄새이다. 목축을 하는 민족들이 즐겨 먹는 우유와 돼지고기에서 나온 음식들이다. 위에 나온 비교는 왜 한국에서는 버터나 베이컨 냄새가 안 나냐고 묻는 것과 같다. 한국의 시골 마을길을 아침에 걷다보면 구수한 된장찌개 냄새와 맛있는 밥 짓는 냄새가 났을 것이다. 처음부터 둘은 비교대상이 안 된다. 비교해서 될 일이 아니고 각각의 문화적 전통을 가진 고유성을 지니고 있다.
차라리 폭군이나 영웅이나 독재자라도 되시지. 이도저도 아닌 어중이 우리들의 영웅이요, 독재자라고 자탄한다. 지식인의 머리속이 이 지경이니 그 속에서 무엇이 나오겠는가!
<군자의 싸움>
구경 중에 제일은 쌈구경하고 불구경이라고 했다. 한국인들은 주로 말로 싸우고 핏대를 올리면서 서로 손가락질 하는 경우가 많고 겨우 상대의 멱살을 잡고 흔드는 게 고작이라고 말하고 있다. 시간이 많이 걸리니까 구경꾼들이 모여든다. 결론이 났는지 안 났는지 가름 할 수도 없다고 했다.
일본인들은 피터지게 싸우고 잔인하기는 하지만 결판이 금방 나고 구경꾼들이 모여들기 전에 끝난다고 했다. 서양 사람들은 시비를 가리기 위해 결투를 하는데 둘 중에 한 사람이 죽어야 끝난다. 죽은 사람이 지고, 산 사람이 이기는데 살았다는 것이 정의를 증명이라도 한다고 여기는 것일까?
여기서도 남들의 잔인하고 격렬한 폭력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한국인들이 다른 나라 사람에 비해 뜻드미지근 하다는 식으로 비하하고 변해가는 세태 속에서 어느 쪽을 택해야 하는지 망설이는 것조차 ‘한국적’이라고 말하고 있다.
<음료수 문화론>
“‘콜라’를 마실 때마다 나는 미국 문명이란 것을 생각하게 된다. 강철이 녹슨 것 같은 검붉은 색채부터가 이미 그렇다. 톡 쏘면서도 씁쓸한 맛, 그러면서도 실상 뒷맛의 여운이 전연 없는 그 맛 속에는 무엇인가 자본주의 문명이 갖는 게트림 같은 것이 있다.“
콜라를 즐겨 제대로 마셔보지 못한 사람의 현란한 문장이라는 생각이 든다. 콜라 한 잔의 맛에 무슨 미국 문명이나 자본주의 문명의 맛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일까. 햄버거나 빵 따위를 먹으면서 마른 목을 시원스레 축여주는 게 콜라이다. 먹고 있으면 자연스레 마실 것을 찾게 된다. 여기에 너무 거창하게 문명까지 거론할 게 없다.
“숭늉이나 막걸리에는 다 같이 ‘무성격의 성격‘이라는 아이러니가 있는 것이다. 콜라나 포도주나 맥주와는 달리 사실 그것은 하나의 ’맛‘이라고도 부를 수 없다. 맛이 있다면 ’맛 없는 맛‘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역설적인 미각이다.”
숭늉은 식사 후에 입가심으로, 밥을 푸고 난 뒤 솥에 부어놓았던 물에 밥풀을 몇 개 띄워 마시는 것이다. 특별한 맛을 내는 물을 먹자는 게 아니다. 맵고 짠 음식 맛을 입에서 가셔내기 위해 마시는 데는 덤덤하고 담백한 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초창기 선교사로 들어왔던 ‘언더우드‘는 밥 먹고 나서 마시는 숭늉 맛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한국인이 아니더라도 누구든지 식사 후에 숭늉은 같은 미각으로 느낄 수밖에 없다. 역시 문화는 오랜 세월 축적되어 온 생활 속에 쌓여가게 마련이다.
숭늉에는 구수한 숭늉 맛이 있고, 막걸리에는 텁텁한 누룩 맛과 함께 막걸리 맛이 엄연히 있는데 아무 맛이 없으면서 맛이 좀 있기는 하다는 구차한 표현이 맘에 내키지 않는다. 숭늉과 막걸리의 맛이 이어령 교수의 말대로 정말 ‘맛 없는 맛’일까. 막걸리는 거의 마셔보지 않았고 숭늉은 마셔본지 무척 오래된 사람의 말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
<한복>
“오늘날 한국에 중국옷과도 다르고 서양 옷과도 다른 그 고유의 의상이 있는 데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관복은 신라시대부터 중국의 것을 따라갔으나 일상복은 고유성을 유지해 왔다.
“한국의 치마는 벗으면 하나의 보자기와 다를 것이 없다. 몸에 감아야 비로소 입체성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서양 옷은 ‘걸어두고’ 한국 옷은 ‘개어 두는’ 것이다.” 81
“서양 사람들은 성장한 옷을 보고 ‘뷰티풀(아름답다)’이라고 하지만, 우리는 ‘날씬하다’ 혹은 ‘날아갈 듯하다’라고 말한다.”
옷이 날개다. 바람에 나부끼는 옷자락과 옷고름.
오늘날의 복식을 보면 모두 서양식이다. 그러면서도 부자연스럽게 여기는 사람은 없다. 웨딩드레스는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도 모른다.
명절에만 한복을 입는다.
백의는 순응의 상징
한국인은 흰옷을 좋아한 것이 아니라 할 수 없이 흰옷을 입는 데에 지나지 않고, 한걸음 나아가서는 의상의 색채감에 대해서 둔했던 까닭이라는 이유도 없지 않다. 91
예전에 우리 겨레는 색동옷과 노랑저고리 다홍치마를 즐겨 입었고, 혼인할 때 신랑은 사모관대에 푸른 관복에 가죽장화를 신었고 신부는 원삼 족두리에 화려한 활옷을 입고 비단꽃신을 신고 혼례를 올렸지 서양 사람들처럼 흰 면사포 쓰고 흰 치마를 입지 않았다.
일하러 가는 사람이 이런 옷들을 입고 간다면 보는 사람이 의아하고 웃을 일이다.
<장죽유감長竹有感>
“한국의 담뱃대가 그렇게 길었다는 것은 곧 우리가 게으름과 무기력과 비활동과 비사회적인 환경 속에서 살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
우리는 누워서 4000년을 보냈다. 때로는 일어서 본 일도 있기는 있었지만, 삼국 시대 이후로는 줄곧 누워서 세상을 생각하였다.“ 99
담뱃대가 길어서 게으르고 무기력하다고 결론짓는 용기가 대단하다. 무슨 근거도 없이 우리 민족은 누어서 뭉개는 사람들로 단정 짓는지 모르겠다. 아마 한국 역사에서 이웃 나라를 침략해서 크게 정복전쟁을 벌인 일이 없어서 누워서 지내는 무기력한 민족이라고 표현한 모양이다. 세계를 정복한 로마 제국이나 몽고제국은 다 망했다. 지금은 그들의 흔적을 찾기도 힘들다. 대동아공영권을 내세워 침략전쟁을 일으켰던 대일본제국도 패망했다. 그들은 다시는 이런 일이 없어야겠다고 헌법에도 명시하고 있는데 우리는 은근히 부러워하며 우리는 무기력하다고 한탄한다. 무기력한 원인이 담뱃대가 길어서라면 이런 망발이 어디 있겠는가. 담배가 들어온 것은 임란 이후인데 양반들을 위한 긴 장죽과 서민들을 위한 곰방대는 세계적으로 유일하게 한국에서 발명한 고유한 것이라는 점은 아예 거론도 안 했다.
“우리는 그렇게 세상을 울며 지냈어도 ‘운다’는 동사는 한마디밖에 없다. 그러나 영어에서는 수십 종이 넘는다.”
이 글을 읽고 한글에서 ‘운다‘는 표현을 떠올려 보았다.
운다 / 울다 / 흐느낀다 / 훌쩍거린다 / 눈물 짖는다 / 눈물을 글썽거리다 / 눈물을 흘리다 / 울부짖다 / 통곡하다 / 훌쩍거리다 / 엉엉 울다 /
차근하게 찾아보면 이것보다 훨씬 많은 표현이 있을 것이다. 필자는 자신의 박학만을 과신하고 쉽게 결론을 내리는데 그 저변에는 항상 우리 민족 우리 문화를 저급하게 여기고 일제 때부터 내려오던 열등의식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제는 좋든 궂든 장죽도 옛날의 유물이 되어 버렸다. 다만 궁금한 것이 있다면 과연 우리의 마음속에 있을 그 장죽(게으름, 비행동성)도 그렇게 꺾이었을까 하는 생각이다.”
<끈의 사회>
“서양 사람들이 ‘버튼’에 의해서 사회를 움직여 온 것처럼 한국인들은 ‘끈’에 의해서 세상을 살아왔다. ‘끈’은 한국을 상징한다. 옷고름으로부터 시작해서 갓 끈에 이르기까지 모든 연결이 ‘끈’으로 맺어져 있다.”
서양 사람들이 버튼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요즘 들어서이고 한국 사람들이 끈을 흔히 이용한 것은 옛날 이야기이다. 예전과 지금을 평면 위에 올려놓고 함께 비교하고 있다. 한국 사람들도 지금은 끈 사용이 거의 없고 버튼으로 대부분 움직이고 있다.
“이 땅의 인간관계나 정치적 풍토를 생각하면 끈처럼 얽힌 사회구조가 어떠한 것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를 개조하기도 힘이 든다. 서로 얽혀 있기에 한 곳이 잘리어도 사회 전체가 허물어지고 마는 것이다.”
필자는 끝까지 한국 사회를 부정적인 측면에서만 바라보고 있다.
세계는 하나의 망이나 그물처럼 얽혀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한 쪽에서 흔들면 모두가 흔들린다. 한국사회가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어느 하나가 전체에 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에 잘려서 허물어지기 보다는 강한 연대의식으로 공동목표를 지향해 나갈 수 있다.
강에서 물고기를 잡기 위해 투망을 하면 단 한 줄을 잡아당겨 그물 전체가 끌려와 물고기를 잡게 된다.
<끼리끼리 사는 것>
“한국의 다방이나 음식점 카운터 앞에서는 이따금 진귀한 싸움이 벌어진다. 서로 손을 붙잡고 떠다밀고 옷을 끌어당기는 싸움이다.”
서로 음식 값을 계산하겠다고 벌떡 일어나서 카운터 앞으로 가면 뒷사람은 뛰다 시피 해서 달려가고 상대방의 소매를 붙들고 말린다.
‘아니 내가 내려고 했는데 왜 이래’
‘지난번에도 냈잖아. 이번에는 당연히 내가 내야지.’
‘뭘 그런 걸 따지나 내가 낼게’
심지어는 카운터 직원이 한 사람의 돈이나 카드를 받아들면 목소리가 커진다.
‘그거 받으면 안 되요. 내 돈을 받아요. 여기 있어요.’
서로 먼저 돈을 내겠다고 싸우는 모양이 처절하기만 하다. 결국 계산이 끝나면 화기애애하게 문을 나서지만 한 사람은 돈을 못낸 아쉬움으로 투덜댄다.
이런 한국인들의 모습은 외국에 살면서도 별로 변하지 않는다. 돈을 서로 내겠다는 것은 결국 자기 체면을 지키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남을 대하는 데는 지켜야 하는 도리가 있다고 믿는 한국인들에게는 그것을 지키지 못했을 때 자신의 체면이 깎이고 자존감마저 상처를 입는다고 믿기 때문이 아닐까?
‘저 친구 생전 점심 한 끼 사는 걸 보질 못했다. 맨 날 남들이 먼저 내기만을 기다렸다가 슬그머니 뒤따라 일어서곤 하지. 돈 쌓아놓고 죽을 때 가지고 가려나 보지.’
‘어떤 친구는 계산할 때쯤 되면 화장실 가서 계산 끝나고 나면 나오면서 벌써 다 냈나 하고 엉뚱한 소리하지.’
한국인들은 혹시 남들한테 이런 소릴 듣는 건 아닌지 걱정한다. 남들이 낸 만큼 나도 내야 체면을 유지한다고 여긴다. 체면은 남들의 눈치를 살피는데서 출발하기 마련이다. 면전에서 그런 말을 하지 않지만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본인이 없는 곳에서 이런 저런 말들이 나올 수 있다고 상상하게 된다. 그것이 싫은 것이다.
요즘 젊은이들은 먹은 건 각자 자기 몫만큼 따로 계산한다. 이런 경우에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지만 서로 호의를 음식 값을 냄으로써 상대에게 전할 수 있는 기회도 상실하게 된다.
<두 개의 고도>
“서구의 위인들은 가정을 꾸미는 데에도 성공한 사람들이지만 우리의 경우에는 대부분이 그렇지 못했다. 가정을 저버려야 애국자요, 충신이 되는 경우가 지배적이었던 것이다. 즉 한국은 하나가 아니라 가정과 사회로 분리된 두 개의 孤島다.”
*한국 사회는 가정과 사회가 분리되어 있는 두 개의 섬이라고 말한 뜻을 이해하기 힘들다. 가문을 중시하고 자신의 출세가 가문의 영광을 빛내기 위함이라는 전통은 분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 됨에서 나온 것이 분명하다. 모든 인륜의 출발점이 가정에 있는 것은 거기에 부모와 자식이 거하기 때문이다. 효를 도덕의 근본으로 생각하는 한국인들이 가정을 떠나서 어찌 효를 실천할 수 있을 것인가.
<밥상으로 본 사회>
“한국 사람처럼 식사를 엄숙하게 하는 민족도 없을 것이다. 장례식보다도 한층 근엄하고 고요하다. 밥을 먹으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우리나라의 예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식사할 때 서양 사람들은 유쾌하게 말이 많고, 한국 사람들은 묵묵하니 말이 없다로 요약할 수 있다. 이것은 한옥의 구조와 식사 환경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단순하게 한 장면만 떠올리고 한 말이다. 가족이 다인 가족에서 소인 가족으로 변화하면서는 전연 맞지 않는 말이다. 5인 미만의 소가족에서는 언제나 한 상에서 식사하고 직장에서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서로 묻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일반적이다. 더구나 ‘밥상머리 교육‘이라고 해서 웃어른이 식사 시에 아랫 사람에게 살아가며 도움이 될 만한 좋은 말씀을 전하는 것도 식사 때의 일이다. 음식을 뒤적거리는 것을 못하게 하는 것도 식사예절을 가르침이요, 특히 반주를 하면서 아래 사람에게 술잔을 권하는 것도 주도를 가르치는 한 방편이 된다.
웃고 떠들면서 먹어대는 서양 사람들과 비교해서 한국인들은 장례식에 온 사람처럼 근엄하고 고요하게 식사한다는 비유는 처음부터 맞지 않는 말이다. 한국인의 식사를 폄하하기 위한 몸부림이 여기서도 느껴진다.
<우리와 나>
“한국의 비극은 태반이 ‘나’를 찾지 못한 데에 있었다. 주어를 상실하고 살았기에 진정한 ‘우리’도 찾지 못했다. ‘내’가 ‘우리’속에 매몰된 전제주의 였다. 개 목걸이처럼 운명이라든지, 혈연이라든지, 권력이라든지 하는 것에 끌려 다니며 살았던 것이다. ‘내’가 ‘나‘를 결단하는 독립적인 개인의식, 그 실존의식을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119
*우리 집, 우리나라, 우리 아이, 우리 마누라, 우리 학교, 우리 동네,
‘우리‘라는 말을 ’나‘라는 말 대신에 많이 쓴다고 해서 한국인들은 독립적인 개인의식이 없다는 식으로 단정해 버렸다. 근대사회로 들어오기 전, 왕조 중심의 전제사회에서는 서양이건 동양이건 모두 나를 내세우기 보다는 전체를 먼저 의식하면서 살 수밖에 없는 공동체 우선의 삶을 살았다. 내가 먼저가 아니라 전체가 먼저라야만 전체가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우리‘라는 말은 동물을 가두는 울, 우리에서 기원했다고 여겨진다.
“‘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보다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더 많은 관심을 쓰며 살아왔다.“
이것은 전형적인 공동체 의식이다. 내 주장과 내 이익을 앞세워서는 공동체에서 살아갈 수 없다. 인류가 살아남은 결정적 요소는 바로 ‘떼’로 뭉쳐서 공동체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서양 사람들의 이기주의가 마치 원래부터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르네상스 이후 개인의 권리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겨우 생겨나서 근대에 와서 성립된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이런 과정을 거쳐 오늘날은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하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우리는 죽을 순간에 가서야 ‘나’를 느꼈던 것 같다. 죽을 때만은 ‘아이고 우리 죽는다’ 하지 않고, ‘아이고 나 죽는다’ 라고 했으니까..”
‘나는(저는)’이라는 말은 나를 분명히 지칭할 경우에는 명확하게 쓰이던 말이다.
나 혼자 죽어가면서 우리가 죽어간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나는 학교에 간다. 나는 산에 간다. 나는 왠지 고독하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나는 지금 절망하고 있다. 등등 나는 얼마든지 쓰이고 있다. 필자는 마치 ‘우리‘와 ’나‘를 구별하지 못하고 마구잡이로 쓰는 듯이 말하고 있지만 그건 너무 무책임한 지적이다.
<시집살이의 분석>
“부부 생활의 좌절이 시집살이의 악순환을 일으키게 되고, 그러한 악순환 속에서 한국의 가족은 분열, 반목, 질시, 분란을 거듭했다. 이것을 확대해 놓으면 그대로 한국의 사회가 되고 한국의 역사가 된다.” p144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이어령
*이 말대로라면 한국 가정은 온갖 문제점 투성이고 남편과 아내가 반목하고 가족 간에도 불화와 갈등뿐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더욱이 거창하게 한국 역사 그 자체까지 이런 식으로 물들어 있다고 단정하는 것은 편협한 의견이 아닐 수 없다.
1998년 안동시 정상동 택지 조성 공사를 하던 중 안동대학교 박물관 조사팀이 50여 점의 의복 자료와 함께 발견한 문서 중에 아내가 죽은 남편을 향해 쓴 언문 서간이 무덤 속에서 발견되었다. 이 편지를 한 번만 읽어보았더라면 위와 같은 글은 쓸 수 없었을 것이다.
원이 아버님께 올림
병술년(1586년) 유월 초하룻날 집에서
자네 늘 나더러 이르되 둘이 머리 세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 하시더니 어찌하여
나를 두고 자네 먼저 가시는가. 나와
자식은 누구 말 듣고 어찌하여 살라
하고 다 버리고 자네 먼저 가시는가.
자네 날 향해 마음을 어찌 가졌으며
나는 자네 향해 마음을 어찌 가졌던가.
늘 자네더러 함께 누워서 내가 이르되
이보소 남들도 우리 같이 서로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 남들도 우리 같을까
하여 자네더러 이르더니 어찌 그런 일을
생각치도 않고 나를 버리고 먼저 가시는가.
자네 여의고는 아무리 해도 나는 살 수 없어
얼른 자네한테 가고자 하니 날 데려가소.
자네 향한 마음을 이승에서 잊을 줄이 없으니
아무리 해도 서러운 뜻이 끝이 없으니
이 내 마음 어디다가 두고 자식 데리고
자네를 그리며 살까 하노이다. 이 내 편지
보시고 내 꿈에 와 자세히 일러 주소.
내 꿈에 이 보신 말 자세히 듣고자 하여 이렇게
써넣으니 자세히 보시고 나더러 일러 주소.
자네 내 밴 자식 낳거든 보고 사뢸 것 있다며
그리 가시되 밴 자식 낳거든 누구를 아빠 하라 하시는가.
아무리 한들 내 마음 같을까. 이런 천지 같은 한이
하늘 아래 또 있을까. 자네는 한갓 그곳에 가
계실 뿐이지만 아무리 한들 내 마음 같이 서러울까.
그지그지 끝이 없어 다 못 쓰고 대강만 적으니
이 편지 자세히 보시고 내 꿈에 와 자세히 보고 자세히 일러 주소.
나는 꿈에 자네 보리라 믿고 있노이다. 몰래 와 보여주소.
하 그지그지없어 이만 적노이다.
*여기서 ‘자네‘는 남편을 가리키는 말인데 당시에는 평상어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빈에서는 우리들이 호흡하는 공기도 음악적이다. 그리고 침묵까지도 노래를 부른다.” 장콕토
조선은 선비의 나라다. 그러나 선비는 항상 정치를 떠나지 못했기에 정치에 구속된 문화의 선비였다. 정치 지향적인 붓의 나라.
한국인은 퍽이나 정치지향적이다. 나라를 경영하고 발전을 도모하는 것은 대의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정치의 대의는 나머지 경제 문화 산업을 압도한다. 온통 국민들이 모두 정치에 관심을 갖는 이유이기도 하다.
서양 / 트럼프 / 인물 중심
동양 / 화투 / 자연 중심
<지게를 탄식한다>
“길을 넓히려 하지 않고 좁은 길에 맞도록 지게를 만든 것 같은 그런 소극적인 살고 방식은 상황을 개척하려 하지 않고 상황에 자신을 순응시키려는 것을 의미한다.”
* 남대문 시장과 서울역 앞에는 지게꾼들이 많았다. 도로가 넓어도 지게가 필요하고, 복잡한 시장에서는 지금도 지게가 편리하게 잘 이용되고 있다.
“우리에게도 수레는 있었다. 그러나 수레가 들어갈 수 없는 좁은 길이 너무나도 많았기에 그들은 지게를 만들었던 것이다. 길을 넓히려 들지 않고 좁은 길에 그대로 자기를 순응시켰다.
현실을 타개하는 적극적인 사고보다는 주어진 현실에 나를 맞추고자 한 데서 바로 그러한 지게가 생겨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지게는 한국의 모든 비극을 상징하는 것이라 한 대도 과언은 아니다.“ 166
* 한국은 산악지대가 70%가 넘는 산악 국가이다. 평원은 얼마 되지 않는다. 넓은 도로를 만들어서 수송할 만한 물산도 적거니와 포장되지 않은 도로는 지속적인 관리와 보수가 따르지 않으면 사용할 수 없을 만큼 손상되기 일 수이다.
수평선이 보이는 북미대륙의 대평원에서 처음에는 농사를 지을 수 없었다. 그 넓은 땅을 경작하고 수확하고 수송할 만한 인력과 장비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소를 방목하는 목축업이 발달하기 시작했고 농사는 20세기 초 트랙터와 트럭, 도로가 생기면서 확장되었던 것이다. 지금 상황을 단순히 비교해서 도로를 왜 만들지 않고 겨우 지게질을 했더냐고 한다면 말하기 쉬운 사람의 가벼운 입이 되고 만다.
수 천 년을 이어오던 차마고도가 이제는 차가 다닐 수 있는 포장도로로 변화하고 있다. 이제 와서 옛 사람들은 왜 그 위험한 벼랑 위에 작은 길로 목숨을 걸고 다녔냐고 질책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한국에서도 달구지가 사용되었다. 김제 너른 벌에서는 당연히 소달구지에 볏단을 하늘 높이 쌓아 올리고 운반했다. 하루 한 나절을 걸어야 하는 거리에서 지게로 나를 수는 없다. 길이 척박한 산길에서 나무를 하는 나무꾼들에게 지게는 아주 유용한 운반수단이었다. 한국인의 지혜가 엿보인다고 칭찬해야 한다. 일본인이나 중국인들은 대나무 장대 끝에 소쿠리를 양 쪽으로 매달고 어깨에 메고 간다. 한국의 지게는 다른 나라에서 보기 힘든 고유한 면을 가지고 있다고 말해야 옳다. 지게에는 지게를 지는 사람의 몸무게 보다도 무거운 물건을 지고 갈 수 있다.
오늘날에도 등산하는 사람들은 모두 배낭을 등에 멘다. 그보다 더 편리한 방법을 아직 알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등짐을 진다는 개념으로 볼 때 지게는 가장 우수한 운반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지게가 한국의 모든 비극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하는 필자의 생각은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막무가내로 비극적인 ‘한’으로만 여기기 때문이다. 지금은 거의 지게를 사용하지 않는다. 지난 세월에 썼던 유물이 되었다. 한국의 비극도 여기서 끝났다고 보면 될까?
孝不孝橋 - 신라시대 일곱 아이들을 두고 냇물을 건너 밤마다 정부를 만나러 다니는 어머니를 위해 아들들이 다리를 놓아 주었는데 이 다리를 효성스럽기도 하고 불효이기도 하다는 뜻으로 붙인 이름이다.
황희 정승이 어느 날 싸우는 두 사람의 하소연을 듣고는 ‘자네 둘 다 옳다’라고 했더니 옆에서 ‘두 사람 가운데 누가 옳고 그른 사람이 있을 터인데 어찌하여 다 옳다 하십니까?’하니 정승이 ‘자네 말도 옳다’라고 하였다.
<완구 없는 역사>
“사실 한국의 아이들은 어느 나라의 아이들보다도 심심하고 외로운 것이다. 흙과 바람 속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이었다. 어른들은 그들을 위해서 장난감을 만들어 준 일이 없다.” 172
“결국 우리나라에 완구가 없었다는 것은 아이들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아이들에 관심이 없었다는 것은 곧 미래에 대한 비전이 없었다는 말이 된다.” 174
“조상의 무덤에 망주석은 세울 줄 알아도 어린이에게 완구를 만들어 줄 생각은 없었던 이 민족은 미래의 맹인이었다. 완구 없는 역사, 그것은 미래 없는 역사와 다를 것이 없다.” 176
*이른 아침 외양간의 소를 끌고 나오면 풀이 무성한 뚝 길에 매어놓고 팔베개를 하고 누우면 하늘엔 하얀 구름이 둥실 떠 흘러간다. 앞내에 흐르는 개울에서 가재도 잡고 피라미도 잡다보면 하루 한 나절이 훌쩍 지나간다. 저녁나절에는 버드나무 줄기로 버들피리를 만들어 불면서 소등에 올라타 집으로 돌아온다.
다섯 살만 넘으면 동네 서당에다 한 달에 쌀 반 되박을 갖다 주고 종아리를 맞아가며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한다.
바람 부는 날에는 연을 날리고, 추운 겨울에는 꽁꽁 언 연못 위에서 썰매도 타고 팽이치기도 한다. 동네 공터에 아이들이 모이면 자치기, 제기차기, 공기놀이를 하고 밤이 되면 술래잡기를 하며 놀았다.
한국 같은 농경사회에서는 제 걸음을 할 줄 아는 나이만 되어도 누구나 농사일을 도와야 한다. 한창 바쁜 농사철에는 손이 모자라 ‘빗자루라도 빌리고 싶다’는 말이 나올 정도이다. 곱게 차려 입은 양반집 자제들은 낮이건 밤이건 글을 읽어야 하루가 간다. 우두커니 심심해하는 아이는 어디에서도 발견하기 쉽지 않다.
이런 와중에 근세 서양의 가정에서처럼 백화점이나 완구점에서 파는 장난감을 사서 선물로 주는 풍경과 비교하는 것은 애초에 시절이 서로 맞지 않는다. 서양 사람들이라고 해서 처음부터 아이들에게 완구를 안겨주면서 산 게 아니다. 먹고 살기 힘든 시절이 아니라 산업혁명 이후 대중이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을 때 겨우 선물로 주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모양을 에둘러 완구(장난감)가 없는 우리 아이들에게는 관심이 없었다는 둥, 나라의 미래가 없다는 식으로 껑충 뛰어 단언하는 것은 많이 틀린 생각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의 아이들은 어른들이 선물로 주는 장난감을 갖고 노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서 가지고 놀았다. 혼자 단순히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것 이상으로 놀이문화를 만들어 여럿이 어울려 놀았다.
딱지치기 / 연날리기 / 팽이치기 / 자치기 / 구슬치기 / 썰매타기 / 제기차기 / 고무줄놀이 / 공차기 / 술래잡기 / 줄다리기 / 공기놀이
최근에는 한국의 전통적인 놀이를 ‘오징어게임’이라는 영화 소재로 삼아서 세계적으로 힛트를 친 바도 있다.
<바가지와 형태미>
“서구인들은 마치 다이아몬드를 깎듯이 단순한 형태를 복잡한 형태로 만들어 가고 있지만, 한국인들은 복잡한 형태를 가장 단순한 형태로 만들어 바가지와 같은 것이 되게 한다.
그것이 곧 빼앗기다 빼앗기다 이제는 더 이상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고, 괴로워하다가 이제는 더 이상 괴로워할 것조차도 없이 되어 버린 한국인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192
<서낭당 고개에 서서>
“등촉도 없고 향불도 없고 예악조차 없다. 그들은 가진 것이 없기에 또한 제물도 바칠 것이 없었다. 길가에 굴러다니는 흙 묻은 돌이나 주워 그냥 던지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216
<나들이옷의 비극>
“어째서 꽃 구경이나 야유를 하는 데까지도 남의 시선에 신경을 쓰는 것일까? 모처럼 휴식을 취하러 놀러 온 것인데도 성장한 옷을 버리지 않으려고 조바심을 태우는 꼴은 아무래도 불합리한 일이다. 으레 밖에 나가려면 좋은 옷을 입어야 한다는 그 사고 방식 속에서 우리는 체면에 살고 체면에 죽었던 슬픈 습속을 볼 수 있는 것이다.” 265
“때와 장소를 가려 옷을 입을 줄 아는 국민이 되었으면 싶다. 값진 옷이 있어도 일요일의 외출엔 도리어 실용적인 옷을 입고 나가는 것이 옳다. 마음대로 뒹굴어도 좋고, 풀 물이 들어도 좋을 실용적인 옷을...” 265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이어령
*필자는 ‘휴일의 패션 쇼’라는 말을 썼다. 나름대로 깔끔한 옷 한 벌을 챙겨서 입고 가족들과 함께 또는 친구들과 어울려 화창한 날에 꽃구경을 갔다고 해서 ‘패션 쇼’라고 까지 말할 이유가 있을까? 지식인의 병폐는 대중을 무식하고 무례한 무리로 여기고 스스로 교육을 하고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하는 데 있다. 그런데 지식인 자신은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대중의 생활과는 동떨어진 환경에서 대중을 내려다보며 산다.
현재 한국의 농업 인구는 전인구의 5%가 안 된다. 이것이 해방 전에는 80%가 넘었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농사를 짓는 농부였던 것이다. 옷에 흙이 묻고 풀물이 드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다. 나들이의 개념은 일상을 떠나 바람을 쐬러 나서는 외출을 뜻한다. 기분이 좋다. 흥겹다. 가족과 어울려 오순도순 이야기 꽃을 피우는 시간이다. 그런 경우에 방금 논이나 밭에서 일할 때 입었던 더러워진 일종의 작업복을 입고 나서는 것이 옳은가. 나들이 할 때 입으려고 평상시에는 고이 아껴두던 옷을 큰 맘 먹고 꺼내 입는 게 남들에게 잘 보이려고 ‘패션 쇼’하려고 하는 일일까?
나들이와 서양의 피크닉은 개념에 현격한 차이가 있다. 나들이는 놀러가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한 동안 찾아뵙지 못한 친지를 방문하는 것을 말한다. 대표적인 것이 ‘며느리가 친정 나들이를 다녀왔다.’는 것이다. 하얀 모시 치마저고리를 입고 서방님 좇아서 나들이 가는 길이라는 노랫말은 우리의 서정을 한껏 부풀려 주었다.
한국 문화를 찍어 누르며 같잖게 여기고 가르치려고만 드는 오만한 태도부터 고쳐야 한다.
옛날에 이 길은 새색시 적에
서방님 따라서 나들이 가던 길
어디선가 저 만치서
뻐꾹새 구슬피 울어 대던 길
한세상 다하여 돌아가는 길
저무는 하늘가엔 노을이 섧구나.
<아씨>의 주제곡
<겨울과 참새>
“앙상한 참새의 가슴패기를 눈물을 씹듯 와작와작 씹고 있는 그 비정의 모습을 보며... 아니, 아니 도시인의 고독을 달래기 위해 납치되어 온 앙상한 그 참새의 앞가슴과 해골을 보며 ‘한국의 생’이란 것이 어떠한 것인지를 나는 몰래 생각해 본다.
그리고 또 코펜하겐의 참새들을 생각한다. 카슈타니의 나무 밑에서, 푸른 호수의 오솔길에서 백조와 함께 잠드는 행복한 참새들을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리고 사죄한다. 한국의 참새들에게 이렇게 사죄해 본다.
‘너무 원망하지 마라! 한국의 참새들이여, 사람도 먹을 것이 없는 땅, 너희들과 함께 나누어 먹을 쌀이 우리에겐 없단다. 해골 째 구어서 집어야 한 젓가락도 되지 않는 너희들의 살점을 와작와작 씹어 먹고 있는 우리를 너무 잔인하다고, 너무 야박하다고 원망하지 마라. 우리는 그렇게밖에 더 살 수가 없는 것이란다.“ 268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이것이 한국이다 저자 이어령
*지역에 따라서 무엇을 먹고 무엇을 안 먹는 것은 문명과 야만의 차이가 아니다. 수렵어로로 시작한 인류는 배가 고프면, 먹고 죽지 않는 한 무엇이든지 닥치는 대로 먹어온 것이 그들의 역사였다.
한국에서 농약을 많이 사용하지 않던 예전에는 농촌에 참새 떼들이 극성이었다. 사람 모습을 한 허수아비를 세워놓고도 안 되어 아이들이 논 가에 나가 깡통을 두드리며 참새 떼를 쫓았다. 너른 벌에 누렇게 익어가는 벼 이삭은 참새들의 밥상이었다. 참새는 몸집은 작아도 다른 날짐승에 비해 구으면 고소하고 먹을 만했다.
필자가 덴마크 코펜하겐에 갔다가 은퇴 노인들이 한가롭게 물가에서 백조와 물오리들에게 먹을 것을 던져주는 한가한 모습을 본 모양이다. 그 사이에 참새들도 끼어들어 먹이를 쪼아 먹는 풍경을 보고 서구 문명의 한 모습으로 감탄하면서 한국의 참새를 떠올린 것이다. 포장마차에서 술안주로 먹는 참새만 생각나고 풍성한 가을 벌판에서 떼 지어 나르며 통통하게 살찌우던 참새는 생각이 안 났다. 아마 당시 덴마크와 한국의 참새 숫자를 비교하면 말할 여지없이 엄청 차이 나게 한국이 많았을 것이다.
우리는 먹을 게 없어서 참새까지 잡아먹는데 다른 쪽에서는 먹던 빵조각까지 떼어서 새들에게 준다고 했다. 한결같이 한 쪽은 빈약하고 야만적이고, 다른 쪽은 풍요롭고 문명적이라는 이분법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발상이 아닐 수 없다.
‘푸른 호수의 오솔길에서 백조와 함께 잠드는 행복한 참새들을 생각한다’는 문장에서는 정말 실소를 금할 수 없다. 백조가 오솔길에서 자지도 않거니와 참새가 백조와 함께 동거하는 새도 물론 아니다. 참새를 미화하기 위해서 백조까지 끌어들였다. 우리는 ‘앙상한 참새의 앞가슴과 해골을 씹어 먹는다’고 했다. 해골은 동물이 죽어서 머리가 뼈만 남은 걸 지칭하는 것인데 섬찟한 기분이 들게 하려고 이런 맞지 않는 단어를 사용했다. 그리고 한국인을 스스로 대표해서 참새에게 죄송하다고 사죄까지 했다. 하루에도 수 천 수만의 소와 돼지가 도살장에서 무참하게 죽어나가 식탁 위에서 칼과 삼지창으로 먹어대는 서구인들을 위해서도 사죄의 한 마디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보릿고개>
“우리나라의 인사말은 ‘진지 잡수셨습니까’이다. 늘 굶주려왔기 때문에 우선 만나면 궁금한 것이 ‘밥을 먹고 나왔느냐’하는 문제다. 거기에 또 ‘밤새 안녕하셨습니까’의 인사말도 있으니 먹을 것 없는 나라 살림에 전쟁으로 목숨까지 불안했던 서민들의 그 심정이 그대로 상징되어 있는 셈이다.
‘진지 잡수셨습니까’의 인사말이 우리 사회에서 자취를 감출 날은 언제일까?” 286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이것이 한국이다 저자 이어령
*세계의 모든 인사말을 검토해 본 것은 아니나 ‘밥을 먹었느냐’ ‘식사를 했나’는 인사법은 한국이 거의 유일하지 않나 싶다. ‘식사 하셨습니까?’ ‘진지 드셨습니까?’ ‘점심 하셨습니까?’의 인사는 상대에 대한 관심과 배려의 표시라고 여겨진다. 진정 밥을 굶었을까 걱정이 된다는 뜻은 아니다. 밥을 굶었다고 한다면 함께 가서 밥을 먹일 수 있는 마음의 자세이기도 하다. 이것이 늘 굶주려온 민족이기 때문에 생긴 인사라면 세상에 굶주려온 민족이 한 둘인가. 한국만이 굶주려서 이런 인사를 나누는 것이란 말인가? 굶주리는 나라는 예전에도 오늘날에도 흔하디 흔하다. 그러나 인사는 이런 식으로 하지 않는다.
마당에 펴놓은 평상에서 저녁을 먹고 있을 때 동네 아는 사람이 지나가면 첫마디에 무조건 ‘식사 했냐’고 묻는다. 아직 안 했다고 하면 막무가내로 불러서 밥상머리에 앉히고 안 사람 보고 수저 한 벌 더 가져오라고 한다. 자신은 밥을 먹으면서 다른 사람에게는 밥 먹자는 말을 건네지 않는 것은 한국 농촌 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양반 집에서도 ‘진지 드셨습니까?’라는 인사는 일상적이다. 평생을 밥 걱정 안 하면서 굶는 일이 없는 계층에서도 이런 인사를 나눈다. 그 만큼 먹는 일은 살아가며 가장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밤새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잠자리는 편안 하셨습니까?’ 묻는 것을 문안問安이라고 한다. 필자는 밤 동안에 전쟁이 많은 나라에서 생명의 위협은 없었나 해서 묻는 것이라고 했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발상이다. 세자가 조석으로 임금에게 문안을 올릴 때도 하는 말이다. 임금의 목숨을 걱정해서 ‘밤새 안녕하셨습니까?’라고 하는게 아니다. 멀리 계신 부모님이나 스승에게도 문안편지를 올리며 ‘그 동안 별고 없으셨습니까?, 가내는 다 무고하시지요?’라는 것은 전쟁으로 피해를 입었을까봐 염려가 돼서 하는 말이 아니다.
끝으로 필자는 ‘진지 잡수셨습니까’의 인사말이 우리 사회에서 자취를 감출 날은 언제일까?‘라고 했다. 그런 인사를 안 해도 되는 날이 우리나라가 풍요롭고 행복한 나라가 된다고 여긴 모양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세계 경제 10위권의 나라가 되어서도 직원들이 점심 식사를 마치고 회사로 돌아가다가 길에서 상사와 마주쳤다고 한다면 당연히 ’부장님 점심 식사는 하셨습니까?‘하고 묻게 될 것이다. 부장이 돈이 없어 밥을 굶었을까 걱정해서 묻는 것이 아니다.
한국은 원래 빈한하고 굶주리며 전쟁으로 불행하다는 전제 하에 모든 문제의 원인을 찾으려고 하는 외곬수의 편견을 넘어서야 한다.
스웨덴 / 집에 놀러온 이웃 집 아이에게 밥을 먹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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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다 - 죄다, 감다,
코를 풀다 / 몸을 풀다 / 아픈 다리를 풀다
화를 풀다 / 원한을 풀다 / 일이 잘 풀린다 / 스트레스를 풀다 / 오해를 풀다
이야기보따리를 풀다 / 생각을 풀어 나가다 / 노여움을 풀다
죽다 - 살다
피곤해 죽겠다 / 좋아 죽겠다 / 재미있어 죽겠다 / 우스워 죽겠다 / 보고 싶어 죽겠다 / 먹고 싶어 죽겠다
시계가 죽다 / 불씨가 죽다 / 맛이 죽인다 / 바람이 죽다 / 날씨가 죽인다 /
그냥 - 일부러
그냥 들렸다 / 그냥 만나고 싶다 / 그냥 그렇다 / 그냥 그랬다 / 그냥 사는 거지 뭐
出入口 / Entrance, Exit
昇降機 / Elevator, lift
빼닫이 / Drawer
여닫이 / 미닫이 / 왕래 / 피고지고 /
어쨌든
어쨌든 좋지 않다 / 어쨌든 사고 보자 / 어쨌든 해야 되겠다 / 어쨌든 그 일은 하지마라 / 이유는 알 필요 없고 어쨌든 /
그리움 - 현재에 없는 내 마음 속에 그려진 것을 글로 나타낸다. 고정된 관념의 발현. 현실에서 실현될 수 없는 안타까움. 지워지지 않는 마음 속의 화석.
“아무래도 나는 너무 무서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의 장점은 말하지 않아도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단점은 우리가 똑똑히 인식해 두지 않으면 그것을 다시 되풀이하는 비극을 갖는다. 새로운 세대의 위치란 바로 그러한 단점, 그러한 역사의 깊은 ‘잠’을 인식하고 그 잠으로부터 깨는 데에 있다.“ 345
“부정적인 면에서만 한국을 보자는 게 아니라 옛날 그 앵무새처럼, 상처를 핥는 야생의 짐승처럼 그렇게 내 나라를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350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이어령 경향신문에 연재했던 글(1962.8.12.-10.24)
*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내내 부아가 치미는 것을 어찌 할 수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국문화의 모든 면을 고정된 부정적 편견으로 바라보는 태도가 싫었습니다. 문화는 그 문화를 사랑하는 마음이 우선 전제가 되어야 말할 자격이 생겨납니다. 어머니는 미인이라 어머니가 아니라 나를 낳아주고 길러주었기 때문에 어머니인 것입니다. 어머니가 미인이면 좋아하고 미인이 아니면 싫어합니까?
내 나라의 문화는 처음부터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접근하겠다고 하면 틀린 생각입니다. 우선 내 문화를 사랑하고 아낀다는 마음이 앞서야 합니다. 문화는 상대적이라기보다는 그 문화의 고유성, 특이성을 존중해야 합니다.
필자는 끝마무리에 가서야 ‘부정적인 면에서만 한국을 보자는 게 아니라’고 했습니다. 장점은 다 알고 있는 것이니 단점을 부각시켜 교훈으로 삼아 고쳐나가자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집에서 키우는 아이도 잘못하는 일만 지적하고 닦달을 하면 아이가 자존감을 잃고 나는 저능한 아이라고 단정할 것입니다. 그 아이가 잘 커나가기 힘들겠지요. 나무라는 것 말고는 나머지는 잘하는 것이라는 말은 핑계에 불과한 변명입니다. 네가 가진 장점은 이러 이러한 것이라고 일러주고 그것을 살려나갈 수 있도록 부추기는 것이 옳은 일입니다.
가련한 나라, 슬픈 민족, 내세울게 거의 없는 한심한 나라라고 계속해서 떠들면 사실 그런 나라가 됩니다. 정말 그런 나라인줄 세뇌가 되고 맙니다. 한국은 진정 그런 나라 아닙니다. 아주 매력 있는 나라입니다. 세계사적으로 볼 때 한국이 그렇게 슬프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외침을 많이 받은 나라가 아닙니다.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현재에 어떤 눈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같은 사실도 다르게 보인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의 문화와 역사를 강하게 보면 강하게 되고 약하게 보면 약하게 됩니다. 우리의 시각이 중요합니다. 역사를 보는 태도가 역사를 좌우하게 됩니다.
1960년대 초에 이어령 교수가 그렇게 부정적으로 보았던 한국은 지금 세계 10위권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한국은 원래부터 가난하고 외침에 찌들인 나태한 나라라고 소리쳐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었을까요? 근대화에 뒤졌지만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자고 허리띠를 동여매고 매진했기 때문일까요?
이 책에서는 한국문화가 허약하고 슬픈, 발전가능성은 거의 찾을 수 없는 듯이 지식인으로서 한탄과 질타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장점은 다 알고 있다고 했지만 단점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장점을 말하라고 하면 준비가 안 되어 모른다고 합니다. 이건 단점에만 치중했지 정말 장점과 강점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총 균 쇠>를 쓴 제레드 다이아몬드 교수는 한국이 석유 한 방울 안 나오는 자원 빈국인 것이 다행이라고 했습니다. 먹고살 걱정 안 하는 지식인들은 한국에는 자원이 없다고 점잖게 걱정만 했습니다. 자원이 없으니 외국에서 원자재를 들여다가 완성품을 만들어 수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국은 연간 7천억에 이르는 세계 7위의 수출대국이 되었습니다. 한국의 약점만을 강조하고 부각시키던 백면 지식인들은 지금 아마 그럴 줄 알았다고 손뼉을 칠지는 모르겠습니다. 새삼스럽게 한국발전의 원동력이 된 숨은 장점을 찾으려고 안간 힘을 쓰겠지요.
어쨌든 이 책은 60년 전에 써진 낡은 책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한 시대에 충격을 주었고 지금까지도 후세들이 한국의 부정적 이미지를 갖게 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습니다.
결국 이어령이 본 한국, 한국인은 가난, 슬픔, 게으름, 연약함으로 집약된다. 이런 면은 어느 사회에나 있고 누구에게나 부분적으로 가지고 있는 약점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한국인 전체에 확산시켜서 대부분의 한국인이 그렇고 한국 문화가 그렇다고 한다면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편견이 매우 심하고 왜곡된 자기비하에 집착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밖에 없게 된다.
겉으로는 단점을 알고 고쳐나가자는 뜻이라고 하면서도 일방적인 부정적 견해를 확대하며 결코 민족의 자존을 지켜낼 수 있는 격려의 말에는 너무나 인색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