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을 즐길 수있는 계절이 왔다.
지옥처럼 들끓던 여름 내내 그렇게도 우리를 지지고 볶고 푹 삶아주기까지 하던 날씨가 이젠 얼마 지나지 않아 보고싶을, 마음에 둔 아름다운 사람과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이제 그늘에 들어가면 서늘하다. 아직 따끔거리기도 하고 쨍하는 눈부심이 있지만 눈살을 찌푸리게 하기 보다는 그 따뜻함에 괜한 미소를 머금게 하는 햇살. 거기에 시시때때로 불어와 살갗을 어루만져주는 바람이며 투명한 물이 뚝뚝 듣을 것만 같은 새파란 하늘.
이런 계절엔 운동을 하건 쇼핑을 하건 여행을 가건, 하릴없이 공원벤치에 기대 앉아 눈 감고 있어도 좋다. 뭘 해도 기분이 좋다. 이런 햇살을 즐겨줄 수 있는 기간은 그리 길지 않다. 이제 한 달 남짓? 그 중에 절반 쯤은 몇 차례의 비가 채울 테고, 그러고 나면 또 겨울이겠지.
옷깃을 열어젖히거나 여미지 않아도 되는 이 계절, 나중에 아쉬워하지 않도록 충분히 즐겨줘야겠다.
명동은 쇼핑의 거리다. 평일 주말 할 것없이 오가는 사람들 물결이 끊이지 않는다. 그래서 명동은 여성들의 거리이기도 하며, 관광객의 거리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명동의 거리는 아무리 인파로 넘쳐도 종로 유흥가와 같은 어수선함이 없다. 고가의 명품 매장이 즐비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활기차면서도 차분한 세련됨이 있다. 그러니 세일 기간이 아니라면 적당히 붐비는 사람들 속에 섞여 산책하기에 더없이 좋은 거리다.
그런데, 이 명동 한 복판에 비밀의 정원이 숨어있다는 사실. 아시는가?
울창한 숲을 연상시킬만큼 커다란 정원을 품고 있는 주인공은 바로 이곳, 구 중국대사관 사옥이다.
담쟁이 넝쿨과 밖으로 넘쳐날 듯 보이는 초록의 분수. 담 너머의 정원이 어떤 모습일지 무척 궁금하지만 들여다보기엔 담벼락이 너무 높고 견고해 보인다.
이곳에 자리했던 중국대사관은 지금 효자동과 광화문(영사업무)으로 이전해 현재는 빈 건물이다. 정문에 공사중이라는 안내 팻말이 세워져 있는 걸로 보아 어쩌면 머지않아 헐릴지도 모를 일. 대사관이었을 때도 일반인이 드나들 수 없는 장소였는데, 이젠 어쩌면 영영 없어질지도 모르는 비밀의 정원.
그런데, 방법이 있다. 시야에 꽉 차도록 정원을 감상할 수있는 장소가 있다.
이렇게, 중국대사관으로부터 크게 블록을 돌아 뒷편의 건물에 위치한 몇몇 커피숍과 카페들은 오래 전부터 이 비밀의 정원을 뒷뜰로 삼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정확하게 여섯 군데에서 가능하다. 이 여섯 군데의 카페가 구 중국대사관 비밀의 정원을 들여다볼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기도 하다.
보통 2층에서 3, 4층까지 테이블을 마련하고 있는 비밀의 정원 카페에 가면 이런 풍경을 볼 수 있다는 거다.
이 중에서 네 곳의 커피숍 혹은 카페를 직접 찾았다. 카페마다 볼 수 있는 다채로운 정원의 모습을 구경하도록 하자.
쿵가콩가
유네스코 회관과 사보이 호텔을 잇는 좁은 이 골목은 구두와 옷가지에 먹거리로 가득한 탓에 명동 거리중에 가장 붐비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눈 앞에 닥치는 것들만 보고 걷다간 이 카페들을 지나치기가 쉽다. 이 길에 들어서 한 20미터 쯤 걷다가 고개를 들면 이 커다란 간판을 발견할 수 있다.
아프리카에서 날아 온 소품들을 주 컨셉으로 꾸민 쿵가콩가는 이 골목의 '비밀의 정원 6인방'중에 정원을 가장 잘 활용하고 있는 카페이기도 하다.
창가 테이블에 앉으면 정원에 우거진 녹음이 바로 곁에 있는 것처럼 가까이 느껴진다.
(다른 카페들처럼) 정원을 향해 난 창은 남서향이다. 정오를 넘기면서부터 해가 떨어질 때까지, 햇살이 그 각도를 달리하면서 창을 통해 카페 안에 나뭇가지와 크고 작은 나뭇잎의 그림자를 내려 놓는다. 바람이라도 살짝 불라치면 테이블 위에 빛과 초록의 그림자가 우아하게 흘러내린다.
적당한 소파에 몸을 묻고 눈은 감으면 선명한 초록의 그림자가 눈꺼풀에 어른거린다. 이런 평화로움이라면 마주 앉은 사람이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라도 몇 년쯤 사귀어 온 듯한 친밀함이 저절로 샘솟을 것만 같다. 아무런 대화를 나누지 않더라도 두 사람 사이에 존재했던 그 시간은 영원히 기억될 것 같다.
단 1분을 같이했던 것으로 평생 서로를 잊을 수 없었던 아비와 수리진이 그랬던 것처럼.
사진을 찍는 몇 초 동안에도 이렇게 햇볕과 그늘이 부드럽게 춤을 춘다
점심시간을 지나면 창가 자리를 차지하는데 어려움이 없을 테니, 느지막한 시간까지 이런 평화로움을 즐겨보는 것도 좋겠다. 비밀의 정원에 비치는 노을은 또 어떨지 궁금하다. 역시 사진은 찍어오지 못했지만, 불그스름한 조명이 켜지는 정원의 밤 풍경은 기자가 몇 번 본 적이 있다.
야경은 괜찮냐고? 두 말하면 잔소리.
아프리카풍 인테리어의 멕시칸 스타일 음식들. 쿵가콩가는 식사와 안주 거리도 다양하게 준비되어있는데, 기자가 뻔질나게 드나들던 몇 년전에 비해 많이 올랐다. 가격에 비해 양이나 음식 만족도는 떨어질 수 있으니, 감안하실 것.
이 일대 카페와 커피숍은 대부분 음료를 시키면 서비스로 케익이나 아이스크림 따위를 서비스한다. 쿵가콩가는 아이스크림과 생크림을 곁들인 베이글 반 쪽이 따라 나온다.
돈까스와 볶음밥에 멕시칸 스타일 소스가 얹어 나오는 멕시칸 라이스 7,000원. 카푸치노 6천원. 대부분의 음료가 5천원 안팎.
2층부터 시작되는 쿵가콩가 4층은 지금 수리중.
카페 수다
사보이호텔 방향으로 가장 끝에 위치한 카페 수다는 그리 넓지 않은 장소에 아기자기하게 꾸민 인테리어가 특징이다.
눈부시도록 환한 실내, 2층과 3층의 분리된 공간이 잘 연결되도록 예쁘고 깔끔하게 꾸며 놓았다. 좁은 공간을 오히려 특색있고 아늑한 공간으로 재창조한 셈이다.
기자가 찾은 때는 한창 햇볕이 들이치는 시각이라, 커튼을 치고 블라인드를 내려놓은 창가 자리는 다른 카페에 비해서 적은 편. 2층과 3층을 합쳐 3 테이블 뿐이다.
워낙 폭이 좁은 건물이라 비밀의 정원 프리미엄은 다른 카페에 비해서 부족한 편이지만 높은 층고에, 곳곳에 신경쓴 흔적이 역력한 장식들에서 비롯된 '수다'만의 독특한 분위기가 있다. 서비스로 내오는 케잌 종류도 다른 업소에 비해 월등하게 다양했고, 카푸치노와 커피 맛은 둘러본 네 곳 중에 가장 산뜻한 편.
아이스커피 5천5백원 / 카푸치노 6천원 / 팥빙수,과일빙수 7천5백원 / 생과일주스 6천5백원 선
커피 원두가 살짝 얹어 나온 아이스커피
파티오
카페 이름인 파티오Patio는 스페인어로 집의 안뜰, 곧 정원을 의미한단다. 구 중국대사관의 정원의 축복을 당당히 받아들이겠다는 목적을 당당히 밝히는 카페 이름이 아닐 수 없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특색은 정원 쪽 창가자리 앞으로 난 작은 테라스. 대부분 닫아두지만 개폐형 창을 열고 나가면 정원의 맑고 푸른 공기를 들이마실 수도 있겠다.
테라스에서 올려다본 비밀의 정원 나무들의 키가 하늘을 찌를 듯 하다.
상당한 넓이의 홀이 2층부터 4층까지 이어져 있다. 대리석의 테이블에 모던과 엔틱이 공존하는 듯한 가구와 인테리어, 그리고 원목 마루로 깐 바닥 등으로 미루어 이 카페에 상당한 투자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시간 앞에서 영원한 것은 없는 법. 어딘가 낡은 분위기에 왠지 관리가 소홀하다는 느낌이 드는데, 아니나다를까 '파티오'는 다음 달 10일 경부터 리모델링에 들어가 11월 초에 재오픈한다고 한다.
역시 음료에 서비스로 케익이 딸려나온다. 커피류 4천5백원 ~6천원선.
파티오가 자신있게 추천한다는 바닐라 파르페. 7천원.
가무
통유리를 뒤집어 쓴 말끔한 건물에 역시 2층부터 자리를 잡고 있는 '가무'의 출입구 입간판엔 이렇게 씌어있다.
비엔나 커피라니. 이 얼마만에 들어보는 이름인가.
요즘엔 어디서도 찾아보기 힘든 커피 메뉴가 아닌가. 요즘 대세인 에스프레소는 커녕 드립 추출식 원두커피조차 맛보기 힘들었던 시절, 80년대를 호령했던 커피의 왕.
비엔나 커피란 뜨거운 커피 위에 달달한 휘핑크림을 듬뿍 얹어 내오는 것을 말한다. 음악다방에서 신청곡 메모지를 날리면 디제이가 읽어주던 그 시절, 윗입술에 크림을 묻혀가며 홀짝거리다보면 설탕없이도 달콤한 크림과 뜨겁고 씁쓸한 커피가 조화를 이루어, 마치 우아한 귀족사회의 음식을 누리는 양 내 자신이 근사한 사람이 된 것같은 기분을 느끼게 해주곤 했더랬지.
다시 만나 반갑구나, 비엔나 커피. 자매품 아이스 비엔나 커피
'가무'는 케익이나 아이스크림 대신 서비스로 미니 팬케익을 준다.
아니나다를까, '가무'는 이곳에 자리잡은지 31년 째란다. 인테리어나 가구들도 몇 번인가 바뀌었을테지만 이곳에 쌓인 시간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역사와 분위기로 짐작할 수 있듯 주로 중장년층 손님들이 자리를 채우고 있다. 2층은 금연.
고풍스러운 칸막이 너머에서 TV보시는 아저씨의 모습이 화양연화 같은 영화의 한 장면을 생각나게 한다.
비엔나커피 및 hot 커피류 4,500원 / 아이스비엔나커피 및 아이스음료 5천원 / 주스, 쉐이크, 파르페 류 6천원.
그 밖의 카페들
오늘 소개하지 못한 두 곳의 카페는 '아로마'와 '소호'인데, 가격대나 메뉴는 다른 곳과 큰 차이가 없으리라 추측한다.
참고로 '아로마'는 수다보다 약간 좁은 공간이고, 소호는 파티오만큼 넓은 장소를 확보하고 있다. 인테리어도 '아로마'는 아기자기한 소녀 취향이라면 '소호'는 귀족의 서재와 같은 분위기랄까, 엔틱풍의 가구와 인테리어로 꾸며져 있다.
가 보신 분들이나 가실 분들, 리피니언에 리뷰를 남겨주시기 바란다.
이상 비밀의 정원 카페 6인방의 커피나 음식 값은 비싼 편이다. 그 점은 씁쓸하지 않을 수 없으나, 그 만큼 정원을 볼 수 있다는 메리트가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쩌랴, 저 비밀의 정원을 볼 수 있는 곳은 이 여섯곳의 카페가 유일한 것을.
햇살과 명징한 초록, 그리고 부지불식간에 찾아오는 단풍을 도심 한 복판에서 맘껏 즐길 수 있는 비밀의 정원. 명동을 지날 때마다 생각나고 발길이 향하게 되는 건 사실이다.
가본 적 없는 분이라면 한 번쯤.
이 계절이 가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