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위기간 : 서기917년7월~924년8월, 7년1개월 하였다. 신덕왕(神德王)의 맏아들 태자이며 이름 승영(昇英). 어머니는 헌강왕(憲康王)의 딸님인 *의성왕후[(義成王后, 또는 자성(資成), 의성(懿成), 효자왕후(孝資王后)], 할아버지는 *선성대왕[(宣聖大王)또는 선성대군(宣成大王)]으로 추봉(推捧)된 *예겸[(乂謙) 또는 예겸(銳謙)]이다. 그러나 설(說)에는 예겸(銳謙)은 신덕왕(神德王)의 의부(義父)이고 친 할아버지는 흥렴대왕(興廉大王)으로 추봉(推捧)된 *각간[(角干 : 신라 때 17관등급 가운데 첫째 등급. 자색 관복을 입었다. 진골만이 오를 수 있었다.)] 문원(文元)이라고도 전한다. 후량(後梁) 말제(末帝) 정명(貞明) 3년 정축(丁丑)에 즉위(卽位) 왕비(王妃)는 석씨(昔氏)로 모두 9명의 아들을 두 셨다. 후삼국(後三國)이 정립(鼎立)하여 패권(覇權)을 다투던 때에 왕위에 올라, 기울어가는 국운을 건지려고 후당(後唐)에 조공을 바치며 구원을 청하였으나 실패했다. 경명왕(景明王) 때에는 신라(新羅)의 국운이 기울어가고 있었다. 실제 신라왕실(新羅王室)은 왕경(王京)인 경주(慶州)를 중심으로하는 주변지역을 다스리는데 불과하였고 나머지는 국토는 궁예(弓裔)와 견훤(甄萱) 등에게 지방세력에게 빼앗겨 갔다. 즉위918년에 일어난 현승(玄昇)의 반란으로 신라(新羅)의 운명은 더욱 재촉하게 되었다. 태봉(泰封)의 궁예(弓裔)가 인심을 잃어 왕건(王建)이 추대되고 궁예(弓裔)는도망가다가 피살
되었다. 왕건은 연호(年號)를 천수(天授) 원년(元年)이라 칭(稱)하였고 3년(919년)에는 고려(高麗)의 태조(太祖) 왕건(王建)이 수도(首都)를 송악(松岳)으로 옮겼다. 4년(920년)에 경명왕은 고려 태조 왕건과 사신을 교환하고 우호(友好)를 닦았다. 이 해 10월에 견훤(甄萱)이 보병(步兵)과기병(騎兵) 1만을 거느리고 *대야성[(大耶城:지금의 합천)]을 공격하자, 경명왕(景明王)은 아찬(阿飡) 김률(金律)을 고려(高麗)로 보내어 왕건(王建)에게 군사 원조를 요청하자, 왕건이 부장(部將)을 시켜 구원하도록 명령하였다. 그 뒤 왕건과 견훤이 패권을 다투게 되었으나, 이들의 패권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것은 이들과 신라 왕실과의 연결이었다. 따라서 안동이나 합천 지역에서 이들의 패권(覇權)다툼이 치열하였으나 싸움은 결국 해상권을장악한 왕건(王建)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921년 정월 김률(金律)이 경명왕에게 고하기를 "고려 태조 왕건이 말하기를 신라에는 세 가지 보물 장륙존상(丈六尊像), *구층탑[(九層塔), 황룡사(皇龍寺)], 성대(聖帶)가 이라고 하면서 상(像)과 탑(塔)은 지금도 남아있는 줄 알지만 성대(聖帶)도 지금까지 있느냐"고 하여서나 신(臣)은 대답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야기하자, 경명왕 역시 군신(群臣)들에게 물으니 아는 자가 없었다. 그 때 황룡사에 나이 90세가 넘은 스님이 말하기를 "이전에 들으니 보대(寶帶)는 진평왕(眞平王)의 것으로 지금 *남고[(南庫 : 형조의 공천 대장을 보관하던 창고]에 보존(保存)되어 있습니다."하여 경명왕이 창고를 살펴보게 하였으나 볼 수 없어서나 다음 날 재계제사(齋戒祭祀)한 후에야 그것을 보게 되었다. 그 띠[보대(寶帶)]는 금옥(金玉)으로 장식되어 있어고 길이가 매우 길어 보통 사람들은 두룰 수가 없었다고 한다. 924년에 왕이 돌아가시니 시호(諡號)를 경명(景明)이라 칭하고 황복사(黃福寺) 북쪽에 장사하였는데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사신을 보내어 조문(弔問)하였다. 또한, 경명왕(景明王) 때에는 여러 가지 변괴(變怪)가 있었다고 말하는데『919년 사천왕사벽화(四天王寺壁畵)에개가 울었고』『927년황룡사탑(皇龍寺塔)의 그림자가 사지(舍知) 금모(今毛)의 집 뜰에 열흘이나 머물렀으며』『사천왕사오방신(五方神)의 활 줄이 모두 끊어지고 벽화의 개가 뜰로쫓아 나왔다는 기록들이 그것이다.』이러한 설화기사의 이면을 생각해볼 때, 당시 신라의 국운이 기울어져가는 불안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재위 8년 후당(後唐) 장종(莊宗) 동광(同光) 2년 갑신(甲申)에 훙서(薨逝) 황복사(黃福寺) 북쪽에 장사(葬事)지냈다. 왕능(王陵)은 국도의 남쪽 15리 지점에배일산(拜日山)에 묘좌([卯坐]했다. 이 곳 경주 남산 서쪽 기슭에 동서로 3개의 왕릉이 나란히 있어 붙여진 이름이 배리 삼릉(拜理
三陵)으로서 밑으로부터 신라 8대 아달라왕,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 박씨 3왕의 무덤이라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