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 회진마을/
‘湖南第一名會津’… 630년 역사 백호 임제의 고향
통일신라시대 국제무역항 풍호나루와 영모정엔 詩心 가득
2016. 03.17(목) 12:16 | |
| 나주임씨 대종가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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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임씨의 본향 회진으로 향하면서 ‘송도삼절’황진이(생몰연대 미상)를 떠올리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단순히 백호(白湖) 임제(林悌, 1549~1587)가 황진이의 무덤에 가서 읊었다는 ‘청초 우거진 골에…’시 때문만이 아니다.
공교롭게도 황진이는 화담 서경덕(1489~1546)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발길이 닿았던 곳을 두루 찾아다닌 적이 있다. 금강산, 속리산, 묘향산에도 들렀다.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이는 세상에서 한 번도 품어보지 못한 남성, 영원한 스승의 잔영을 찾기 위한 몸부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서경덕의 유문(遺文)들을 모두 읽고 익혔다고 한다. 금강산에 갈 때는 여승이 쓰는 송라(松蘿)를 쓰고 갈포 저고리에 베치마를 입고 대나무 지팡이를 짚고 뒤를 따랐다.《어우야담》
황진이의 발걸음은 조선시대 관아였던 나주 금성관에도 닿았다. 나주목사와 많은 인사들이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그녀는 해진 옷차림으로 잔칫마루에 올라가 앉아 태연하게 이(蝨)를 잡았다. 사람들이 내어쫓기 위해 자리 값을 하라고 으르자 서슴없이 가야금을 뜯으며 노래를 불렀다. 자리에 있던 기생들은 기가 죽어 풀이 꺾이고 좌중들은 눈이 휘둥그레지고 어찌할 줄 몰랐다.
그녀는 이렇게 세월을 보내다가 세상을 떠났다. 황진이가 나주 관아에 들렀을 때가 언제쯤이나 될까? 황진이의 생몰연대가 확인되지 않아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여러 문헌을 살펴보면 대략 1550년대 중반이고 이 무렵의 백호의 나이는 대여섯 살에 불과해 관아소식을 몰랐을 것이다.
황진이의 생몰연대는 1506~1567년이라는 설도 있고 1510년~1540년이라는 설도 있다. 또 서화담보다 31살이 어리다는 기록에 근거하여 1520년에 태어났다고 하기도 하고 여기에 임백호와 같은 나이(39세)에 사망했다는 기록에 근거하여 1559년 사망설도 있다. 여기서 1540년 사망설은 서화담보다 일찍 죽었다는 얘기로 사실과 전혀 다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근거하면 생몰연대는 미상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황진이가 임종을 앞두고 집안사람에게 일렀다는 말, 즉 물곡사(勿哭辭)가 떠오른다.
“내가 죽어도 곡을 하지 말고 상여가 나갈 적에는 장구를 두드리고 음악을 울려 인도해 달라.”《성옹지소록》. 물곡이란 곡(哭)을 하지 말라는 말이다. 끝까지 한사람의 예인으로 ‘시시한 세상’에 미련 같은 것을 갖지 않고 떠날 수 있었던 것은 학문이 크게 깊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죽으면서 길가에 묘를 써달라고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가족들은 유언을 따르지 않고 무덤을 썼다고 전한다. 그녀의 무덤은 정확이 알려진 곳은 없다. 다만 현재 알려진 바로는 장단군 입우물재의 길가(황해남도)에 있고 북한에서는 2005년부터 관광객을 위해 박연폭포 언저리와 황진이묘를 새롭게 정비하고 단장했다고 알려진다.
황진이의 물곡(勿哭)을 대하면서 백호가 남긴 그 유명한 물곡사(勿哭辭) 한 수를 읊어본다.
| 임제의 물곡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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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夷八蠻 皆呼稱帝(사이팔만 개호칭제)
唯獨朝鮮 入主中國(유독조선 입주중국)
我生何爲 我死何爲 勿哭(아생하위 아사하위 물곡)
사방의 나라마다 모두 황제라 부르는데
오직 우리만 자주독립을 못하고
속국노릇을 하고 있는 이 욕된 처지에서 살면 무엇하고
죽는다 한들 무엇이 아까우랴. 곡하지 말라.
‘곡하지 말라’는 당부는 다르지만 죽음 앞에서 초연했던 두 사람의 기개를 보면서 저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백호 임제의 묘소가 있는 신걸산 계단을 오르면서 시대를 앞서갔던 두 사람의 삶이 새삼 부럽다. 신걸산은 나주임씨 세장산으로 10세 임봉(林鳳) 이하 15세 임붕(林鵬) 등 후손의 묘가 곳곳에 자리잡고 있다.
나주임씨 대종종 도유사 임정길씨는 “물곡시 한편만 보더라도 백호선생이 얼마나 담백하고 단호한 분임을 알게 된다.”면서 “후손의 한 사람으로서 늘 이 시를 되새기며 살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임제의 묘소가 있는 신걸산에 올라 남쪽을 바라보면 구진포구와 영산강이 한눈에 들어온다. 4대강 사업으로 구진포구를 휘감아 도는 물줄기가 도도하다. 광주~목포간 도로에서 구진포 삼거리로 좌회전하여 강변도로를 따라 우측으로 2,3분 달리면 ‘호남제일의 승경’이라는 회진마을에 이른다. 호남제일의 승경이라는 말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일본에 주자학을 전한 수은 강항(姜沆, 1567년~1618년)이 그의 문집에서‘승경이 호우(湖右)에서 제일이다’한데서 연유한다.
실제로 마을 입구에 있는 영모정(永慕亭) 초입에는‘제일명한회진(湖南第一名遽會津)’이라는 석비가 세워져 있다. 회진이 호남 제일의 마을이라는 뜻이다. 영모정은 조선 중종 15년(1520년) 귀래정 임붕이 건립한 정자다. 그의 호를 따서 귀래당이라고 명명하였다가 명종 10년(1556년) 아들 임복이 중건하면서 선친을 길이 사모하는 곳이라 하여 영모정으로 바꿨다. 현재의 건물은 여러차례 중수를 거쳐 1982년에 다시 중건된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온돌방 1칸, 누마루 2칸으로 되어 있는 정자건물이다.
영모정에는 정자를 중심으로 주위에 세수 400여년이 넘는 팽나무와 느티나무 향나무가 자리를 잡고 있어 과연 호남 제1의 정자다운 풍모가 느껴진다. 바로 이 정자에서 조선시대 명문장가로 이름난 백호 임제를 비롯해 개(愷) 서(繪) 선() 순(恂) 환(飢) 탁(限) 등 임붕의 17명의 손자들이 공부하고 시를 짓던 곳이다. 현재는 나주임씨 대종중 종회소로 사용되고 있다. 바로 이곳에 물곡비가 세워져 세상을 풍미했던 사나이의 기개를 보게 한다. 정자 앞 쪽 팽나무 노거수는 보호수로 지정돼 있다.
지금도 영모정에는 임복(林復)의 원운을 차운한 많은 편액이 걸려 있고 우리나라 보물 1879호인‘희경루 방회도(동국대 박물관 소장)’의 복사본이 걸려 있다. 이 그림은 1567년(명종 22)에 있었던 희경루에서의 방회장면을 그린 계회도(契會圖)이다. 1546년(명종1) 증광시의 동기생들이 광주의 누정(樓亭)인 희경루에서 20년만인 1567년에 다시 만난 것을 기념하여 그 감회를 간직하기 위해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이 그림 속에 바로 회진 출신인 임복 (임붕의 2자, 1556년 영모정 창건)이 들어 있기 때문에 여기에 걸린 것이다.
| 강건너에서 본 영모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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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계에서는 ‘희경루방회도’가 전라도 광주 지역의 화사(畵師)가 그렸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또 지방화단에서 그려진 채색계회도라는 점에서 의의를 찾는다.
영모정에 올라 영산강을 바라보니 2월의 끝, 바람이 차다.‘언 가슴 불을 지피며 서리 속에 핀다.’는 매화송이도 아직은 철이 일러 피어나지 못했고 지난겨울을 버티어 온 동백꽃만 유난히 붉다. 영모정 바로 아래 영산강 나루가 풍호(楓湖)나루다. 이곳이 회진의 풍호마을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며 포구였기에 풍포(楓浦)로도 불렸다. 당은포(경기도 화성)와 함께 통일신라시대 국제항으로 중국과의 교역이 이뤄졌던 곳이다. 당시 충청도 당은포구는 서해북로, 회진에서 출발하는 풍호나루는 서해남로로 당나라를 오가는 해상교통의 중심지로였다. 풍호나루는 지난 1970년대까지도 흔적이 확연히 남아 있었다. 그러나 4대강 사업으로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돼 현재 그 자리에는 풍호나루의 유래를 새긴 비가 세워져 그날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나주임씨 후손인 임경렬 나주문화원장은 “여러 자료에도 나타나 있지만 영모정은 우리지역 정자의 으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넓이도 넓이려니와 영산강 풍호나루(楓浦) 언덕 위에 걸터앉아 세상을 논하고 시를 읊었던 선비들의 기개는 지금 시대에 생각해도 멋진 삶이다.”말한다. 임 원장은 몇 년 전 4대강사업이 진행되면서 풍호나루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이 안타까워 그 터에 익산청과 나주시의 협조를 받아'풍호나루 유래비'를 세우고 직접 글을 새겨놓았다.
3천여 평의 나주임씨 대종가
백호문학관·한국천연염색박물관 등
2천년 역사의 회진에는 영산강 유역 마한문화와 고분, 백제·통일신라시대의 회진토성·회진산성 그리고 임씨 대종가를 비롯해 선비문화의 상징적 공간인 정자와 망루 등이 산재해 있다. 근래 들어서도 백호문학관, 한국천연염색박물관, 복암리 고분전시관 등이 세워졌다. 회진토성은 현재 발굴이 끝나고 복원를 기다리는 중이다. 기오정은 임위(林)의 사위인 반남박씨 박세해가 처가 마을의 승경에 반해 지은 정자다. 회진 주변에는 영산강을 따라 장춘정, 소요정, 석관정, 창주정, 금사정 등의 정자가 이어지고 있어 이 일대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짐작 할 수 있다.
| 백호문학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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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진으로 가는 길은 광주~목포간 도로를 따라가다가 구진포 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영산강과 만나 우측으로 꺾어 돌면 된다. 또 하나는 다시면 소재지 입구에서 고구려 대학을 지나가는 산자락을 끼고 좌측으로 가는 길이 있는데 복암리 고분군, 고분전시관, 한국천연염색박물관을 지나 회진마을에 이르게 된다.
여기서 잠시 회진의 역사를 더듬어 보자.
회진은 견훤이 죽군성(회진성)을 본거지로 하여 그 세력을 백제의 고토에 떨치기 시작한 곳이다. 죽군성은 회진 내에 있는 토성으로 백제 후기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백제 때 두힐현(豆儷縣), 통일신라 때 회진현(서기 757년)으로 불렀고 회진현의 행정구역은 지금의 다시면과 문평면 일부를 관할했다. 치소는 회진성안에 약1,000여 년 동안 있었으며 조선조 초에 이르러 폐현되고 나주목 시랑면의 한 마을이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시랑, 수다, 죽포 등 3면을 통합하여 다시면이 되었고 신풍리라고 하다가 1997년 회진리로 개칭하였다.
회진은 원래 양씨. 조씨, 서씨, 임씨 등이 살았다. 현재는 나주 임씨가 대부분이며 일부 반남 박씨가 세거하여 살고 있다. 문암, 성치, 관음사골, 탑동, 동촌, 풍호, 누저동, 사직, 백하, 강정등, 샛터, 랑동 등 12촌을 통틀어 회진이라 부른다. 기오정기(寄傲亭記)에는 “신걸산은 중천에 솟았는데 주룡이 6,7리에 뻗어 나와 금강(영산강)으로부터 서쪽의 바다 한가운데로 조수가 들고 날고 상선과 어정(漁艇)이 왕래하니 회진(會津)이라” 하였다고 씌여 있다.
나주 임씨의 입향조는 9세 감무공 임탁(林卓)이다. 조선이 건국되었던 1392년 자녀들과 송도에서 옮겨온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두문동 72현 가운데 한 사람으로 불사이군(不事二君)의 뜻에 따라 ‘이곳으로 돌아와’ 본관으로 정하고 살았다.
입향조는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인 감무공 임탁
조선 건국이 1392년이니 600년이 넘었다. 당시 태조 이성계가 여러 차례 벼슬길에 나오도록 불렀으나 응하지 않고 은둔하며 지냈다. 나주로 돌아오는 길에는 두문동 72현 가운데 한사람으로 풍수지리에 정통한 이씨라는 사람이 동행했다고 한다. 임탁의 집터를 잡아주면서 “자손이 번성할 터와 당대에 재물을 쌓을 곳 중에서 택일하라”고 했는데 임탁이‘내가 벼슬을 버리고 왔는데 부귀영화가 무슨 필요가 있겠느냐며 자손이 번성할 터’를 지목했다. 이 곳이 현재의 나주임씨 대종가터로 풍수지리설에서 갈마음수(渴馬飮水), 즉 목마른 말이 물을 마시는 형국이라는 명당이다. 그래서인지 이 종가에서는 지금까지 600여 년 동안 한 대도 양자를 들이지 않고 적통으로만 혈맥이 이어지고 있다. 현재의 종손은 32세 임정렬 박사(41,수자원공사)가 대를 이어가고 있으며 종가는 31세 종부 이화주(70)여사가 지키고 있다.
이화주 종부는 “조상이 물려준 자랑스러운 유산을 더 잘 지키고 간직해야 하는데 마음뿐이어서 죄송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에 전해지고 있는 종가들 가운데서는 보존이 매우 잘 되고 있는 편이다.
임탁이 회진으로 내려온 뒤 3대(11·12·13세)는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임탁의 유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탁의 묘는 임을산(林乙山)에 자리하고 있는데 풍수지리학에서‘이불뫼’로 불리는 명당이다. 나주의 8명당 중 한 곳으로 금성읍지에 기록되어 있다. 이 묘 터에는 석순(石筍)이 죽순처럼 자라 자손이 크게 번성한 것 같다고 말한다.
| 김준호 작 '영모정과 풍호나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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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가의 풍교만 겨우 유지하던 임씨는 14세 임평(林枰)이 처음으로 무과에 올라 병마우후가 되었다. 그 아들 15세 귀래정 임붕(林鵬1486~1553)은 나주임씨 중흥조로 문과에 올라 경주부윤, 좌승지, 전라병마절도사, 광주목사 등을 지냈다. 청렴하면서 도학과 문장에 빼어났던 것으로 전한다. 임붕은 기묘사화 때 성균관 태학생 250여 명을 이끌고 궁궐로 나아가 정암 조광조를 소구한 기묘인으로 유명하다. 그는 가문을 일으킨 부친(평)의 유덕을 기려 가묘에 그 행적을 기록하고 위폐에 부조하라는‘장묘우문(藏廟宇文)’(1553년)을 지어 자손에게 가르쳤다. 지금까지 460여 년 동안 후손들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부조묘(不蔿廟)에 제사하고 있다.
임붕은 익(益) 복(復) 진(晉) 몽(蒙) 등 4남을 두었다. 장수현감을 지낸 익은 개(愷) 경(憬) 황(惶) 척(脂) 각(恪) 열(悅) 등 6남을, 승문원 정자를 지낸 복은 서(繪) 협(紘) 계(矜) 오(懊) 등 4남을 두었다. 4남 몽의 후손은 절(節) 유(愉)가 있다.
3남 진(晉)은 무과에 올라 오도병마절도사를 지냈고 청백리 정절집 2권을 하사받은 백호의 아버지다. 임제가 장남이고 둘째는 선(), 3남 순(恂), 4남 환(飢), 5남 탁(限)이다.
임진(林晉)은 장수로 수십 년간 있으면서 재화를 취하지 않아 영변과 탐라에 청백을 칭송하는 비가 세워졌다. 그의 시비가 구진포 삼거리에 있는 창계서원(創溪書院) 입구에 새겨져 있다.
‘활지어 팔에 걸고 칼 갈아 옆에 차고/
철옹성변에 통개 배고 누웠으니/
보완다 보괴라 소리에 잠못드러 하노라/
김종서의 ‘삭풍은 나무 끝에 불고 명월은 눈 속에 찬데…’와 이순신의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와 함께 조선시대 무장(武將)시조의 삼절로 불린다. 임진은 1526년에 출생한 사람이니 김종서(1383년~ 1453)보다는 늦고 이순신(1545~1598)보다는 빠르다.
백호의 5형제가 다 문장에 능했다고 전하는데 특히 임제의 문재(文才)는 가히 조선의 으뜸이었다. 1549년에 태어나 1587년 서른 아홉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비운의 문인이다. 자는 자순(子順), 호는 백호(白湖)·풍강(楓江)·소치(嘯癡)·벽산(碧山)·겸재(謙齋) 등을 썼다.
그는 어려서부터 자유분방해 스승이 따로 없이 자유롭게 지냈다. 20세가 넘어서야 성운(成運)에게 배웠다. 성운(成運, 1497~1579)은 16세기에 속리산 일대를 학문의 무대로 삼으면서 처사형 사림(士林)으로 남명 조식의 가장 가까운 벗이다.
임제는 청소년 시절 중부 임복(林復)의 영향을 받았다고 전한다. 22세 때 서울로 가는 길에 쓴 시가 성운에게 전해진 것이 계기가 되어 제자가 되었다. 이듬해 어머니를 여읜 뒤 술을 끊고 글공부에 정진했으며 ‘중용’을 수백 번 읽은 일은 너무도 유명하다. 28세 때 속리산을 떠나 생원·진사에 합격했다. 이듬해에 알성시에 급제한 뒤 흥양현감, 서북도병마평사, 관서도사, 예조정랑을 거쳐 홍문관지제교를 지냈다.
1583년 서북도병마평사(평안도도사)로 임명되어 부임하는 길에 황진이의 무덤을 찾아가 시조 한 수를 짓고 제사지냈던 일과 기생 한
우(寒雨)와 시조를 주고받은 일, 평양기생과 평양감사에 얽힌 일화도 유명하다. 또 충청도 감사의 아들에게 오줌을 신선이 준 불로주라고 먹인 일, 화전놀이 하는 사람들에게 시를 지어주고 같이 논일, 박팽년의 사당에 짚신을 신고 알현한 일 등 숱한 일화를 남긴 자유인이었다.
특히 그는 성격이 호방하고 얽매임을 싫어했고 관리들이 서로를 비방 질시하며 편을 가르는 현실에 깊은 환멸을 느꼈다고 한다. 관직에 떠난 뒤 이리저리 유람하다 고향인 회진에서 1587년(선조 20) 39세로 세상을 떠났다.
다음의 시가 황진이 무덤 앞에서 읊었다는 시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웠난다/
홍안을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난다/
잔(盞)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퍼하노라/
해동가요와 청구영언에 전하는 한우(寒羽)라는 기생과 주고받은 한우가(寒羽歌)는 이렇다.
‘북천(北天)이 맑다 하거늘 우장(雨裝)없이 길을 나서니/
산에는 눈이 오고 들에는 찬비 온다/
오늘은 찬비(寒雨) 맞았으니 얼어서 잘까 하노라’
기생의 이름이 한우인 것으로 비유하여 너와 함께 얼어서라도 같이 있고 싶다는 뜻을 전한다. 한우의 응수 또한 그만이다.
어이 얼어 자리 무슨 일로 얼어 자리/
원앙금 비취금을 어디 두고 얼어 자리/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녹아 잘까 하노라/
임제는 이밖에도 1천여 수의 시를 비롯해 제주도 여행기‘남명소승(南溟小乘)’의인화기법으로 당대를 풍자한‘수성지(愁城誌)’‘화사(花史)’‘원생몽유록(元生夢遊錄)’은 조선기행문학의 최고봉으로 손꼽힌다. 임백호집(林白湖集) 4집과 ‘부벽루상영록(浮碧樓觴詠錄)’을 남겼다. 백호집은 그의 사후 31년 뒤 4촌 동생인 임서가 황해도관찰사로 있을 때 목판 4권 2책을 발간해 오늘에 전한다.
‘부벽루상영록’은 1500년대 평양에 있던 부벽루의 아름다운 경치를 읊은 시문집이다. 평양에서 벼슬을 마치고 고향으로 내려가기 전 여러 선비들과 부벽루에 올라 지은 시들인데 임백호가 운을 떼면 참석자들이 운에 맞춰 시를 썼다. 당시에 목판본으로 간행된 바 있지만 우리나라에는 남아 있지 않아 안타까움이 있었다. 그러나 최근 일본의 임제 연구가 나가이 겐지 씨의 번역본이 발견돼 임씨 문중에서 한글로 번역작업을 마쳤다.
‘부벽루상영록’ 최근 한글로 번역 출간
일본에서는 동경대학 전신으로 에도시대 만들어진 창평판학문소(昌平坂學問所)에서 사무라이 교육용으로 출간해 사용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책에 실린 시들은 주로 진경산수를 읊고 있음이 특징이다. 일반적으로 한시가 ‘매난국죽’등의 사군자나 화조풍월, 산수를 읊는 반면, 평양 대동강 일대의 자연의 아름다움을 시로 풀어놓았음이 특징이다.
임제의 네 동생들도 이름이 났다. 선()은 진사에 합격했으며 시인으로 조선시대 유명한 시집인 기아(箕雅)에 올랐다. 순(恂)은 무과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선전관 종성판관 만포첨사 강계부사 남도병마절도사를 지낸 문무겸전의 장군이었다. 환(飢)은 임란당시 의병장 김천일 밑에서 종군하여 형제()가 양곡 수백 석을 이순신에게 군량미로 제공했으며 정유재란 때 의병장을 지냈다. 막내 탁(限)은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으나 시문에 뛰어났다고 전한다
이밖에도 나림 18세에서는 무안의 식영정 주인 임연(林繹), 9개군 수재 임타, 시호 충익 임담, 광해 폐모 시 헌의한 임축 등 걸출한 인물이 대를 이어 배출되었으며 임붕의 후손들은 대대로 43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한 것으로 전해진다.
임제의 외손자 미수(眉璟) 허목(許穆·1595~1682)은 유년시절을 이곳에서 보내고 나중에 영남학파를 대변하는 남인의 좌장으로 영의정이 되었다. 특히 서예에 밝았으며 보성출신으로 전예에 뛰어났던 효봉(曉峰) 허소(許炤, 1882-1942)는 허미수의 서첩을 보고 공부하여 ‘동방의 제일’이라는 칭찬을 받았다.
회진마을의 임제 생가 터에는 백호문학관이 지어져 있다. 16세기 조선의 탁월한 문장가였던 백호 임제 선생을 기리기 위한 기념관이라고 할 수 있다. 2013년 개관한 문학관에는 상설전시실, 기획전시실, 영상관, 수장고, 백호문학 카페 등이 개설돼 있다.
임백호가 항상 가지고 다녔던 거문고, 옥퉁소, 보검, 마상 등이 전시돼 있으며 임종 때 남겼다는 물곡사(勿哭辭), 시집간 지 얼마 되지 않은 딸의 죽음을 슬퍼하며 쓴 망녀전사 등의 대표작들을 해설과 함께 전시하고 있다. 또 임제의 가계도를 비롯해 형제들에 관한 이야기도 표로 그려 놓았다.
매일 오전9시~오후6시, 매주 월요일과 설 추석날은 쉰다.(문의: 061-335-5008)
구진포 삼거리에 있는 창계서원(創溪書院)은 창계 임영(林泳, 1649~1696)을 주벽으로 모시는 서원이다. 자는 덕함(德涵)이며 문과 급제 후 이조정랑, 검상, 부제학, 대사성, 대사헌을 지냈는데 송시열, 송준길을 사사한 기호학파다. 저서로 창계집이 있다. 창계집은 강화유수를 지낸 임정(林淨, 1654~1710)이 일찍 세상을 떠난 형 임영의 글을 모아 발간해 깊은 우애를 느낄 수 있다. 이곳에 있는 임정 초상화는 당대에 그려진 것으로 매우 역사가 깊다.
| 창계서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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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계서원은 회진 마을의 남산등에 1711년 지어졌으나 1767년 (영조 43년) 중건하여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1871년 훼철되었으며 그 터에 강학소인 영성각이 지어지고 2000년 유림과 후손들이 위패를 모시는 창계사를 새로 지었다. 임영 신도비, 매계 영당 등이 있으며 임진 장군의 시비가 이곳에 세워져 있다. 바로 뒤쪽 옛 국도 1호선 길가에 나림17세 습정공 임환의 작은 부인이었던 제주양씨의 열녀각이 세워져 있다. 학포 양팽손(1488~1545)의 증손녀로 정유재란 때 회진의 일가들이 배 2척으로 피난을 가다 왜적을 만나자 스스로 인질을 자처해 가족들을 구했다. 배가 시야에서 멀어지자 왜적선에서 영산강으로 몸을 던진 열녀로 나라에서 열녀각을 세워주었다. 근처에는 황해도관찰사를 지낸 임서의 신도비가 있다. 1835년에 세워진 비문은 유명한 청음 김상헌이 썼다. 임서는 정시문과에 급제해 공조와 예조, 병조 정랑, 황해도 감사 등을 역임했으며 이괄의 난 때 적을 토벌하고 군량을 보급하는 등 큰 공을 세웠다.
‘자손이 번성할 곳’에 잡았다는 곳이 나주임씨 대종가 터이다. 실제로 620년 동안 한 번도 양자를 들이지 않고 순수 종통을 이어왔다. 종택은 남도 특유의 일자형한옥이다. 사랑채가 대문 앞에 있으며 정원에는 이름 모를 나무들과 화초들이 무성하다. 신걸산을 배후에 두고 영산강을 앞에 둔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형국이다.
안채, 사랑채, 사당, 대문채, 부조묘, 부조묘 내삼문, 부조묘 외삼문, 본채와 부조묘를 연결하는 협문이 있고 본채, 사랑채, 부조묘 공간이 각각 담장으로 분리돼 크게 3개의 공간으로 이뤄졌다.
종가 안채는 1393년 임탁이 창건한 후 정유재란 때 전체가 소실돼 중건하였고 1900년 초엽에 화재로 인해 일부가 소실되어 부분 재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바로 이 집에서 귀래정 임붕, 혐감 임익, 승문원 정자 임복, 절도사 임진, 백호 임제, 강계부사 임순, 황해도감사 임서 등 걸직한 인물들이 태어나 자랐다. 취재를 동행한 임유택 전 광주학생회관 관장은 “나주 임씨에 대한 기록이 주로 임제 선생을 중심으로 쓰여지다 보니 훌륭한 업적이 묻힌 경우가 많다.”면서 앞으로 이에 대한 종중 차원의 재정리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현재 이 대종가를 지키고 있는 이화주씨는 한국화가다. 광주시전과 무등대전 한국화대전 등에서 여러 차례 특선해 추천작가에 이르렀고 광주와 서울, 일본에서도 전시회를 가진 바 있다. 종부는 틈나는 대로 풀을 메고 나무를 가꾸면서 종가의 전경을 화폭에 담아 걸어두었다. 제사 때마다 직접 그 많은 음식을 만들어 상에 올리고 ‘찾는 이 없는 종가’를 지켜가는 종부의 넉넉한 마음가짐에 머리가 숙여진다.
일제시대 항일운동단체 ‘회진개혁청년회’활동
회진마을은 일제시대(1934년) 민족의 자립정신과 봉건사상 일소, 문맹퇴치 등을 전개했던 회진개혁청년회(회장 임은택)가 활동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이름은 개혁청년회이지만 실질적으로는 항일운동단체다. 이 일로 13명이 체포돼 8명 옥고를 치르는 등 수난을 겪어야 했다. 여기에 참여한 사람들이 임용택(林瑢澤)을 비롯 종혁 희택 은택 우택 경택 광택 종국 유택 준택 종대 윤택 등 모두 회진 임씨 들이다.
회진 임씨의 근대 인물로는 임병직 초대외무장관, 임인채 국회의원, 임채정 국회의장, 임종기 국회의원, 임인규 국회의원, 임덕규 국회의원, 임인택 교통부장관, 임채민 보건복지부장관 등이며 문화예술계 임방울 명창, 임권택 감독, 경제계 인물로 임광행 보해양조 창업주, 교육계 임동오 중부대총장, 의료계 임채준·임채상·임종윤·임중규·임원섭 박사, 군출신으로는 임부택·임창규·임광택 장군 등이 있다.
◇ 민박 가능한 집
회진에서 민박이 가능한 집은 나주 임씨 대종가 한 집 뿐이다. 안채와 떨어져 있으며 종택 입구에 있는 사랑채에서 민박이 가능하다. 이 사랑채는 방이 모두 3개이다. 하나는 방 가운데 문을 올리면 하나가 되고 내리면 2개가 되는 방이고, 하나짜리는 별도로 되어 있다. 주방과 화장실, 사워실 등을 갖추고 있으며 전기보일러가 설치돼 한 겨울에도 민박이 가능하다. 사랑채 뜨락에는 자목련과 차나무, 헛개나무 등이 심어져 고즈넉함이 느껴진다. 방 하나에 10만원이며 전체를 쓰면 20만원이다. 찾는 사람이 많아 사전 예약은 필수이다. 인근에 그 유명한 구진포 장어집이 성업 중이어서 불편이 없다.
예약전화 : 010-4657-8479
◇ 주변 가볼만한 곳
▲ 한국천연염색박물관 = 나주시 다시면 백호로 379.
전화 : 061-335-0091
2006년 나주천연염색문화관으로 문을 열었으나 3년 뒤 한국천연염색박물관으로 이름을 바꿨다. 전시동과 연구동 체험실, 아트숍 등이 있다. 아트숍에서 나주지역 염색 전문가들이나 천연염색 업체의 제품을 구입할 수 있다.
| 한국천연염색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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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천연염색박물관에는 11개의 공방이 있으며 이곳에서 염색체험이 가능하다. 염색체험은 1인당 6,000원이며 지금까지 20,000여명이 이곳을 거쳐 갔다. 시기에 따라 주변 마을과 연계해 농사체험, 농촌문화체험도 즐길 수 있다. 다시에는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115호 염색장 정관채씨와 전수조교 윤대중씨가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윤대중씨는 염색장 구 윤병운씨의 아들이다. 이곳 다시는 옛날, 여름철 큰 비가 내리기만 하면 영산강이 범람해 벼농사를 지을 수 없어 대체작물로 심은 것이 쪽 풀이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쪽물을 들여 생업을 유지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오늘날 박물관이 생기고 무형문화재도 배출된 것이다.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 관람료 무료. 천연염색관 바로 뒷편 언덕에 멋진 전원주택단지가 들어설 예정이다.
▲ 죽산보 = 이명박 정부시절 4대강 사업으로 만들어진 보(洑)다. 전남 나주시 다시면 죽산리에 위치하고 있다. 죽산에서 왕곡까지의 보의 길이는 184m로 친환경 가동보로 4.5 ㎞의 옛 강을 복원해 수변생태공원을 만들었다. 전국 16개 보 가운데 유일하게 배가 다닐 수 있는 통선문을 가진 곳이기도 하며 소수력발전소와 어도가 개설돼 있다. 죽산보는 봄에는 왕벚나무 꽃길, 여름에는 은행나무와 층층나무가 유명하며 영산강 명소 다야들에는 갈대 창포 부들 달뿌리 등이 심어져 있다. 죽산보 공원 반대편에는 강변 모래밭에 대지예술공원이 있다.
| 죽산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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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산보가 만들어지면서 지난 77년 영산포에서 목포까지 마지막 배가 떠난 이후 34년 만에 뱃길이 복원되었다. 승천보에서 죽산보까지 24㎞이다. 자전거길이 만들어져 있고 길옆에 정자가 이어져 정자를 산책하는 즐거움도 있다. 죽산보에서 아래로 내려가면 영산강과 고막천이 만나는 곳에 석관정(石串亭)이 있다. 이 곳은 조선시대 신녕 현감을 지낸 이진충이 낙향하여 지은 정자로 7대손 이시창이 보수했고 1695년에 13세손이, 1870년 이춘헌이 중건했다. 1998년 석조건물로 개축했는데 나주제일경, 영산강제일경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나주 12경 가운데 하나다. 석관정 아래 이별바위 전쟁 때마다 장정들을 싣고 떠나 일제 강점기 때 징용가는 남편을 따라왔다가 영산가에 투신한 사람도 있는 슬픈 곳 이기도 하다. 영산강을 건너면 공산면 신곡리다. 사포에서 중천포를 지나온 배가 닿은 포구였다.
▲ 나주영상테마파크 = 나주시 공산면 덕음로 450
전화 : 061-335-7008
35주 연속 시청율 1위를 기록한 ‘주몽’의 촬영지이며 그 외에도 ‘일지매’ ‘바람의 나라’ ‘이산’ ‘태양사신기’ ‘전설의 고향’등을 촬영했던 현장이다. 45,000평의 부지에 웅장한 건물과 실내세트장 등 00여개의 크고 작은 건물이 지어져 있다. 특히 고구려 국내성에 오르면 영산강가에 조성된 10만여평의 다야뜰 생태공원이 펼쳐져 있으며 죽산보와 황포돛대가 지나는 장관을 바라볼 있다. 영상테마파크는 단순히 드라마테트장의 개념을 넘어 고구려 역사문화전시관, 전통복식체험, 활쏘기체험과 도자기 쪽물 한지 매듭 전통주 다양한 전통문화체험도 가능한다. 주막이나 숙박체험장, 영상세미나실 등의 편의시설도 갖추고 있다.
▲ 나주복암리 고분전시관 = 나주시 다시면 복암리 71
복암리 고분군을 1:1로 축소 재현한 전시관이다. 부지 4만 2211㎡, 건축면적 4030㎡, 지상 2층 규모다. 전시실, 영상체험관, 카페, 사무공간, 탁 트인 야외 공원, 대형 주차시설 등을 갖추고 있다. 전시관은 박물관과는 성격이 달라 출토유물은 전시되지 않는다. 대신 복암리 고분 발굴 상황과 옹관묘, 횡혈식 석실묘 등 다양한 묘제를 완벽하게 재현한 전시. 체험 공간으로 꾸며져 있다. 또 3호분에서 출토된 금동신발과 은제관식, 큰칼 등 주요 출토유물이 모형으로 전시된다.
한편, 복암리 고분은 지난 1996년부터 1998년 9월 까지 3단계에 걸쳐 발굴조사가 이뤄져 금동신발과 은제관식, 큰칼, 금귀고리 등 790점이 출토되었으며 국가사적 제404호로 지정됐다. 당시 국립문화재연구소와 전남대학교박물관 합동조사단은 고분군 내에서 옹관묘·횡혈식석실묘·수혈식석관묘횡구식석관묘·횡구식석실묘 등 7가지 형태의 묘제가 공존하는 총 41기의 매장시설을 확인한 바 있다.
◇ 가까운 맛집
▲ 문암가든 = 나주시 다시면 영산로 4844
전화 : 061-335-7679
광주에서 나주 맛재를 지나 구진포 삼거리가 나온다. 직진하면 다시를 거쳐 목포로 가고 좌회전하면 구진포구이고 U턴하여 다시 광주 쪽으로 차를 돌리면 오른쪽 옹구가게 옆에 문암가든이 있다. 주메뉴는 콩물국수와 청국장, 순두부찌개인데 특히 콩물국수를 파는 여름철에는 줄을 서야할 정도다. 겨울에는 과메기를 특식으로 제공한다. 이집 콩물국수가 인기를 끄는 것은 동네에서 직접 서리태를 사다가 즉석에서 맷돌에 갈아 내놓기 때문이다. 청국장은 담양에 농가에서 직접 띈 것을 계약주문하고 새우젓이나 멸치젓도 직접 농협에 사다가 담근다.
주방장격인 안주인의 친정어머니가 손맛이 대단했던 모양이다. 그 어머니가 해주던 맛을 기억하며 손님상에 내놓는데 많은 사람들의 입맛에 딱 맞다. 특히 김치가 일품이고 콩나물 숙주나물, 시금치나물, 콩자반, 묵은지, 간재미회 계절별 젓깔 등 그야말로 전라도맛집의 전형이다. 다른 것 없다. 김치 하나라도 ‘내 식구가 먹는다.’는 마음으로 담그다보니 성공한 식당이 되었다.
청국장찌개 순두부찌개 김치찌개 콩물국수는 7천원이고 애호박찌개, 생선찌개는 8천원, 제육볶음과 과메기는 한접시에 25.000원이다. 토종닭이나 오리탕도 예약하면 맛볼 수 있다. 한식
▲ 신흥장어 = 나주시 다시면 가운리 36번지
전화 : 061-335-9109
신흥장어구이는 옛 구진포 장어구이의 맛을 이어가는 전통식당이다. 1964년에 문을 열어 지금까지 반백년을 이어 왔다. 20대 중반에 식당을 시작한 할머니는 칠순을 넘겼지만 지금도 손맛의 책임자다. 운영은 며느리에게 맡겼다.영산강 하구언을 막기 전 구진포 장어는 고창 풍천장어와 함께 민물장어의 대표였다. 그래서 구진포에는 신흥장어 말고도 장어요리집이 여러 곳 있다. 그 가운데서도 신흥장어집이 유명한 것은 독특한 양념소스 때문이다. ‘며느리도 모른다’는 소스는 재래 간장과 한봉꿀, 물엿, 계피, 청주, 생강, 마늘 등을 잘 다져 장어 머리나 뼈를 과낸 물로 버무려 만든다. 특히 양넘구이는 초벌구이를 잘해야 하는데 처음에는 양념을 바르지 않고 구운 뒤 여기에 양념을 발라 부스러지지도 않고 타지도 않게 구워낸다.
여기에 2~3년 된 묵은지와 깻잎장아찌가 밑반찬으로 나오는데 고향집 어머니 손맛 그대로다. 장어구이는 1인분에 20,000원, 장어탕 8000원
글 지형원 (발행인) / 사진 임철진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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