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감상문
2021320030 컴퓨터학과 박찬우
괴물은 누구일까. 영화는 3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장은 엄마인 사오리의 관점에서, 두 번째 장은 호리 선생의 관점에서, 세 번째 장은 미나토의 시점에서 진행된다. 각 장을 지나며 나는 상황을 잘못 지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나와 사오리 또는 나와 호리 선생)는 어쩌면 괴물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아이들은 그들의 세계에서 행복하다. 그들의 미묘하고도 섬세한 시선을 알아채기에는 어른들은 괴물이다. 어른들이 악의 없이 한 행동들은 (예능 프로그램, 호리 선생의 “남자는 ~하다”, 아빠에 대한 추모) 아이들을 혼란스럽게 한다. 그것이 그저 ‘장난’이었을까. 세상이 그것을 당연하다고 말한다면 ‘나(미나토)’는 당연함과 대비되는 ‘괴물’이 되는걸까.
이러한 혼란은 비단 아이들의 몫이 아니다. 호리 선생 역시 그의 당연함과 세상의 당연함이 갈등을 빚는다. 다시 태어나지 못한 채 어른이 된 그는 세상의 당연함에 굴복하고 자기 자신을 잃는다. 사오리 역시 ‘싱글맘’이라는 사회의 꼬리표와 갈등한다. 바람 핀 남편을 원망하기 보단 자식에게 꼬리표를 붙이기 싫어 평범함을 아이에게 강요한다. 즉, 그들은 세상에게 굴복해버린 괴물인 것이다. 이미 괴물이 된 그들에게는 아이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들을 향한 시선에는 이미 그들의 생각과 의도가 내포한다. 이는 아이들의 솔직한 내면을 보는 것을 방해한다. 마치, 호리 선생과 사오리가 산사태에 넘어진 기차 창문을 아무리 닦아도 그 안이 보이지 않았던 것처럼.
‘다시 태어난걸까?’ 요리는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다시 태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죽은 고양이를 다시 태어나도록 묻어주고 불 태운다. 그러나 미나토는 이내 물을 부어 불을 꺼 버린다. 이 장면이 아이들이 세상과의 혼란을 마주하는 방법을 말해주는 것 같다. 요리는 그를 괴롭히는 세상에 힘 없이 맞지만, 다시 태어나 폭력이 가해지지 않는 세상이 되길 희망한다. 미나토는 혼란을 느끼면서도 자신에게 폭력을 가하는 세상에 반항하며 그 폭력을 극복하고자 한다.
그들이 원하는 세상은 어쩌면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세상일 것이다. 적어도 그 세상에서는 행복할 것이니. 다시 말해, 모두가 행복을 가질 수 있는 세상. 모두가 원하지만 닿을 수 없는 세상이 아닐까. 닿지 못하는 이유에는 행복의 추구가 항상 사회에 선(善)이 되지 않음도 이유가 될 것이다. 세상이 진정한 행복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한다면 유토피아가 실현될 수 있을까. 오히려 인간의 감정이 단편적으로 바뀌지 않을까. 다양한 감정을 가진다는 인간의 매력이 사라지지 않을까.
어쩌면 우리 사회는 모두가 행복해질 수 없기에 다수가 행복한 사회를 만들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다수가 된 조직은 이를 지키기 위해, 소수의 조직들은 자신이 다수가 되기 위해 힘을 모았을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정작 추구하려는 행복은 추구하지 않고 다수가 되는 것을 추구하게 된 현대 사회의 모순을 이 아이들은 전하려던 것이 아닐까. 요리가 말하듯이 우리 사회는 재탄생으로 위의 모순을 해결할 수 있을까. 아니면 미나토와 같이 모순되는 사회에 저항하여 모순을 해결할 수 있을까.
영화에서는 마지막 장면을 통해 어느 정도의 답을 주는 것이 아닌가 추측해볼 수 있다. 무너진 폐열차(무너진 세상)에서 빠져나온 아이들은 말한다.
“다시 태어난 건가?”
“그럴 일은 없는 것 같아”
“다행이다”
재탄생이 아니어도 모순된 세상은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고, 그 푸르른 곳에서 마음껏 행복을 외칠 수 있다고 말하는 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