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은 1933년 전북 부안군 주산면 신기리 출생으로, 어렸을 때 기타를 잠깐 배운 적이 있는데 13살 때 장구를 알게 되면서부터는 다른 악기엔 일체 손을 대지 않고 오로지 장구에만 전념하였다. 이렇듯 풍물에 남다른 애착을 가졌던 선생님은 주위의 눈총 따윈 아랑곳하지 않았다. 17세에 부안에서 지금은 고인이신 이동원선생께 설장구를 배웠고 정읍, 김제, 부안을 중심으로 조직된 '정읍농악단'을 따라다니며 체계적으로 풍물을 배우게 되었다.
20세가 되어 익산시 평화동으로 이사를 했는데 당시 이곳은 풍물의 불모지였다. 이런 곳에서 동호인들을 찾기 위해 한달 정도 이곳 저곳 곳곳에 공고를 써 붙여 놓았더니 다행이도 12명이나 모였다. 이들은 모두 풍물에 대한 열정이 한결 같았다. 그렇게 모인 사람들과 낮에는 각자 생업에, 밤이면 밤마다 모여 산에 올라가 풍물을 쳤다고 한다. 그야말로 주경야독이었다. 처음엔 '농악계'란 동호단체를 이끌어가다 1953년에 '이리농악단'으로 개칭하였다.
"단체를 이끌다 보니 득(得)보다는 실(失)이 많더군요. 몇 번의 좌절을 맛보며 그만둘까하는 생각도 했어요. 그럴때마다 항상 곁에서 격려를 해준 집사람의 내조는 무엇보다도 큰 힘이 되었지요. 내가 힘들고 약해질 때는 더욱....." 실제로 그의 곁에서는 든든한 빽(?)이자 인생의 동반자였던 김길림 여사가 있었다.
힘든 살림을 도맡아 하면서도 힘들다는 내색 없이 한결같은 마음으로 그의 곁에서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아마 그녀의 격려는 '이리농악단'이라는 걸출한 풍물패를 탄생시킨 큰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1960년대는 상쇠 이수남, 설장구 김형순, 수징 백원기, 설벅구 김방현 등이 이리농악단을 이끌던 시절이었다. 당시의 활동은 여러곳에서 열린 풍물대회와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등에서 장원을 수상하면서 차곡차곡 결실을 맺어갔다. 1980년부터 5년 동안 실시된 문화재지정을 위한 문화재관리국의 조사끝에 이리농악은 1985년, 드디어 중요무형문화재 제11-다호로 지정을 받게 되었다.
이듬해인 86년 9월, 전북도립국악원이 개원 하면서 그의 무대는 전주로 옮겨지게 된다. 처음 국악원에 발을 디딜때는 2년만 하기로 마음먹고 다닌 게 12년이란 족적을 남기게 되었다. 그가 정년퇴직까지 도립국악원에 몸담은 경위 뒤에는 또다른 이유가 있었다.
"도립국악원 개원 당시 연수생 모집을 앞두고 사람들은 저마다 연수생 숫자가 200명이 넘으면 자기들 손에 장을 지진다고 했어요. 그 정도로 전통음악에 대한 관심이 황무지와 다름없었던거죠. 당시 국악원에 재직하던 교수들은 그런 장담에 오기가 발동했지요. 불철주야 연수생 모집에 매달린 결과, 모집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정원을 채운 것은 물론, 끝내는 정원이외에 100명을 초과로 접수해야할 형편이 되어버렸어요. 완전히 예상을 뛰어넘었지요. 그 중 풍물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상당수였고, 그들을 가르치는 보람도 있었어요. 그러다보니 차츰 교습방법도 체계가 잡혀갔고, 그때서야 비로소 국악의 저변확대에 보다 역점을 둬야 되지 않나 싶더군요.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해가 거듭할수록 늘어나니 말이죠. 2년만 한다는 것이 12년이 훌쩍 지나가버렸습니다" 도립국악원의 이야기를 해서일까? 선생님의 얼굴엔 어느새 만감이 교차하는 듯한 미소가 가득했다.
도립국악원을 퇴임하신 지도 어느덧 7개월이 흘렀다. 퇴임이후 선생님께선 오히려 더욱 왕성한 공연활동을 하고 계셨다. 올해의 굵직한 공연연보만 일견해도 서울 놀이마당의 문화재초청공연(4, 5월)참가를 비롯하여 남산 한옥마을 초청공연(6월)을 비롯해서 몇 주 전에는 대한민국국악제(7월8일)에서도 공연을 하셨다. 요즘에는 방학철인지라 대학가의 학생들이 우도가락풍물을 배우려 몰려온다고 한다.
"어제까지 발디딜 틈이 없었어요. 내일과 모래 또 한팀씩 오는데 여기에 오면 일주일씩 숙식을 하며 연수를 합니다. 그러다보면 그들도 내 자식처럼 느껴지곤 합니다." 방학기간 중에 이곳을 다녀간 대학가의 풍물팀은 올해만도 무려 40여팀이나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다가오는 10월에는 이곳에서 문화재보존회 단체발표가 계획되어 있다며 꼭 참관하러 오라는 말씀도 잊지 않았다. 영호남 친선교류차원에서 치러지는 발표에는 줄타기(중요무형문화재 제58호)보존회 조교인 김태균씨와 진도다시래기(중요무형문화재 제81호)팀, 고성오광대(중요무형문화재 제7호)팀들이 출연할 것이라 귀뜸해주셨다.
"어떤 음악이고 음악어법에 맞는 형식을 갖추고 있겠지만 특히 우리풍물은 무용, 음악, 연극을 두루 갖춘 종합예술입니다. 그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그야말로 정신과 혼이 다 깃들어 있음을 알 수 있죠. 그렇기 때문에 풍물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보다 널리 발전되고 보급되어야 합니다. 과거 어려울때도 그랬듯이 풍물은 우리민족을 하나로 단결케 하는 힘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풍물은 바로 소중한 문화예술의 유산임을 잊지 말고 후대에 길이 보존해야 할 것을 당부하고 싶습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우리를 하나로 뭉치게 하였던 매개체인 풍물. 그 중요성을 강조하신 선생님께선 무엇보다도 그 속에 담긴 정신을 이어받고자 하셨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시계의 시침이 오후 여섯시를 향하고 있었다. 여섯시가 되면 어김없이 이곳엔 학교선생님들이 온다고 한다. 선생님은 그들과 또 다시 한시간 동안 고군분투하며 우도가락을 탐구할 것이다.
손수 농사지어서 밥을 먹을 수 있고 전수관이란 배움터가 있어서 사람들에게 풍물을 알리는 일을 할 수 있다며 선생님께선 스스로 행복한 사람이라 하셨다. 마치 "강산에 터를 닦아 구목위소(構木爲巢)한 연후에 나물먹고 물마시고 팔베고 누웠으니 대장부 살림살이가 요만허면 넉넉헐꺼나"고 노래하는 <백구가>를 연상케 하는 자족(自足)의 말씀이다.
정각 여섯시, 우리는 전수관을 뒤로 한채 발길을 옮겼다. 뒷전에서 울리는 장구소리는 점점 멀어져 갔지만 선생님의 가르침은 커져만 갔다. 하늘을 뒤덮은 회색빛 구름 사이로 비추는 저녁 햇살이 밝기만 했다.
선생님은 1933년 전북 부안군 주산면 신기리 출생으로, 어렸을 때 기타를 잠깐 배운 적이 있는데 13살 때 장구를 알게 되면서부터는 다른 악기엔 일체 손을 대지 않고 오로지 장구에만 전념하였다. 이렇듯 풍물에 남다른 애착을 가졌던 선생님은 주위의 눈총 따윈 아랑곳하지 않았다. 17세에 부안에서 지금은 고인이신 이동원선생께 설장구를 배웠고 정읍, 김제, 부안을 중심으로 조직된 '정읍농악단'을 따라다니며 체계적으로 풍물을 배우게 되었다.
20세가 되어 익산시 평화동으로 이사를 했는데 당시 이곳은 풍물의 불모지였다. 이런 곳에서 동호인들을 찾기 위해 한달 정도 이곳 저곳 곳곳에 공고를 써 붙여 놓았더니 다행이도 12명이나 모였다. 이들은 모두 풍물에 대한 열정이 한결 같았다. 그렇게 모인 사람들과 낮에는 각자 생업에, 밤이면 밤마다 모여 산에 올라가 풍물을 쳤다고 한다. 그야말로 주경야독이었다. 처음엔 '농악계'란 동호단체를 이끌어가다 1953년에 '이리농악단'으로 개칭하였다.
"단체를 이끌다 보니 득(得)보다는 실(失)이 많더군요. 몇 번의 좌절을 맛보며 그만둘까하는 생각도 했어요. 그럴때마다 항상 곁에서 격려를 해준 집사람의 내조는 무엇보다도 큰 힘이 되었지요. 내가 힘들고 약해질 때는 더욱....." 실제로 그의 곁에서는 든든한 빽(?)이자 인생의 동반자였던 김길림 여사가 있었다.
힘든 살림을 도맡아 하면서도 힘들다는 내색 없이 한결같은 마음으로 그의 곁에서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아마 그녀의 격려는 '이리농악단'이라는 걸출한 풍물패를 탄생시킨 큰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1960년대는 상쇠 이수남, 설장구 김형순, 수징 백원기, 설벅구 김방현 등이 이리농악단을 이끌던 시절이었다. 당시의 활동은 여러곳에서 열린 풍물대회와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등에서 장원을 수상하면서 차곡차곡 결실을 맺어갔다. 1980년부터 5년 동안 실시된 문화재지정을 위한 문화재관리국의 조사끝에 이리농악은 1985년, 드디어 중요무형문화재 제11-다호로 지정을 받게 되었다.
이듬해인 86년 9월, 전북도립국악원이 개원 하면서 그의 무대는 전주로 옮겨지게 된다. 처음 국악원에 발을 디딜때는 2년만 하기로 마음먹고 다닌 게 12년이란 족적을 남기게 되었다. 그가 정년퇴직까지 도립국악원에 몸담은 경위 뒤에는 또다른 이유가 있었다.
"도립국악원 개원 당시 연수생 모집을 앞두고 사람들은 저마다 연수생 숫자가 200명이 넘으면 자기들 손에 장을 지진다고 했어요. 그 정도로 전통음악에 대한 관심이 황무지와 다름없었던거죠. 당시 국악원에 재직하던 교수들은 그런 장담에 오기가 발동했지요. 불철주야 연수생 모집에 매달린 결과, 모집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정원을 채운 것은 물론, 끝내는 정원이외에 100명을 초과로 접수해야할 형편이 되어버렸어요. 완전히 예상을 뛰어넘었지요. 그 중 풍물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상당수였고, 그들을 가르치는 보람도 있었어요. 그러다보니 차츰 교습방법도 체계가 잡혀갔고, 그때서야 비로소 국악의 저변확대에 보다 역점을 둬야 되지 않나 싶더군요.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해가 거듭할수록 늘어나니 말이죠. 2년만 한다는 것이 12년이 훌쩍 지나가버렸습니다" 도립국악원의 이야기를 해서일까? 선생님의 얼굴엔 어느새 만감이 교차하는 듯한 미소가 가득했다.
도립국악원을 퇴임하신 지도 어느덧 7개월이 흘렀다. 퇴임이후 선생님께선 오히려 더욱 왕성한 공연활동을 하고 계셨다. 올해의 굵직한 공연연보만 일견해도 서울 놀이마당의 문화재초청공연(4, 5월)참가를 비롯하여 남산 한옥마을 초청공연(6월)을 비롯해서 몇 주 전에는 대한민국국악제(7월8일)에서도 공연을 하셨다. 요즘에는 방학철인지라 대학가의 학생들이 우도가락풍물을 배우려 몰려온다고 한다.
"어제까지 발디딜 틈이 없었어요. 내일과 모래 또 한팀씩 오는데 여기에 오면 일주일씩 숙식을 하며 연수를 합니다. 그러다보면 그들도 내 자식처럼 느껴지곤 합니다." 방학기간 중에 이곳을 다녀간 대학가의 풍물팀은 올해만도 무려 40여팀이나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다가오는 10월에는 이곳에서 문화재보존회 단체발표가 계획되어 있다며 꼭 참관하러 오라는 말씀도 잊지 않았다. 영호남 친선교류차원에서 치러지는 발표에는 줄타기(중요무형문화재 제58호)보존회 조교인 김태균씨와 진도다시래기(중요무형문화재 제81호)팀, 고성오광대(중요무형문화재 제7호)팀들이 출연할 것이라 귀뜸해주셨다.
"어떤 음악이고 음악어법에 맞는 형식을 갖추고 있겠지만 특히 우리풍물은 무용, 음악, 연극을 두루 갖춘 종합예술입니다. 그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그야말로 정신과 혼이 다 깃들어 있음을 알 수 있죠. 그렇기 때문에 풍물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보다 널리 발전되고 보급되어야 합니다. 과거 어려울때도 그랬듯이 풍물은 우리민족을 하나로 단결케 하는 힘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풍물은 바로 소중한 문화예술의 유산임을 잊지 말고 후대에 길이 보존해야 할 것을 당부하고 싶습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우리를 하나로 뭉치게 하였던 매개체인 풍물. 그 중요성을 강조하신 선생님께선 무엇보다도 그 속에 담긴 정신을 이어받고자 하셨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시계의 시침이 오후 여섯시를 향하고 있었다. 여섯시가 되면 어김없이 이곳엔 학교선생님들이 온다고 한다. 선생님은 그들과 또 다시 한시간 동안 고군분투하며 우도가락을 탐구할 것이다.
손수 농사지어서 밥을 먹을 수 있고 전수관이란 배움터가 있어서 사람들에게 풍물을 알리는 일을 할 수 있다며 선생님께선 스스로 행복한 사람이라 하셨다. 마치 "강산에 터를 닦아 구목위소(構木爲巢)한 연후에 나물먹고 물마시고 팔베고 누웠으니 대장부 살림살이가 요만허면 넉넉헐꺼나"고 노래하는 <백구가>를 연상케 하는 자족(自足)의 말씀이다.
정각 여섯시, 우리는 전수관을 뒤로 한채 발길을 옮겼다. 뒷전에서 울리는 장구소리는 점점 멀어져 갔지만 선생님의 가르침은 커져만 갔다. 하늘을 뒤덮은 회색빛 구름 사이로 비추는 저녁 햇살이 밝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