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시인을 주목한다(열린시조 1998년)
권갑하 작품평
긴장된 삶과 현실인식의 다양성
이 재 창 (시인)
"열린시조의 이 시인을 주목한다"란은 21세기를 눈앞에 둔 상황에서 앞으로 우리 현대시조를 이끌어 갈 역량있는 시조시인을 조명하고 발굴한다는 차원에서 볼 때 뜻깊은 기획물 이다. 이제까지 이달균 홍성운 강현덕시인을 타잡지와는 조금 다른 모습으로 조명한 <열린시조>의 기획은 아무나 무작정 게재하는 타 잡지의 편집방식과는 변별력을 가진다. 이것은 현대사회의 농촌처럼 노령화 되어가는 시조문단의 풍토를 개선하고 시대적 현실인식과 자유시와 견주어도 결코 뒤지지 않는 현대적 감각의 시조를 창출하여 일천년의 전통을 지닌 우리시의 자리를 되찾고자 하는 <열린시조>의 편집의도와도 일맥상통한다. 외국에서 들어온 자유시가 터줏대감격인 원주민을 몰아내고 버젓이 주인 행세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시조시인들의 나태와 무지, 시대적 감각과 현실인식의 수용등 현대적 감각의 시적 형상화 과정의 노력 없이 왜곡된 전통답습으로만 명맥을 유지하는 데에만 급급 했기 때문에 주인 행세도 못하고 내몰린 자식처럼 집 밖에서 구경이나 하는 변두리의 문학으로 전락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독자가 없는 문학은 있으나 마나 한 장르나 다름 아니다. 독자의 인식과 시인의 인식이 서로 상통하지 못할 때 문학적 감동은 있을 수 없다. 그러한 작품을 읽을 우매한 독자도 없다. 이젠 우리 시조단도 개혁을 할 때가 아닐까.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전분야가 고리타분한 과거의 습성과 제도와 인식을 버리고 있다. 그리고 살아 남기 위한 개혁을 하고 있다. 우리 시조문단도 이젠 남의 탓만을 할 때가 아니다. 스스로 살아 남기 위한 엄청난 노력과 자구책이 필요하다. <열린시조>는 자유시나 소설 등의 장르처럼 현대시조문단의 자생력을 키우는데 앞으로 커다란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권갑하 시인은 갇힘의 자유성과 갇힘의 다양성을 아는 시인이다. 앞에서 잠깐 이야기 한 왜곡된 전통답습을 단호히 경계하며 `닫히어 역동적인 시'의 참열림을 견지하는 뚝심있는 시인으로 생각된다. `체험적 시론'에서 밝혔듯이 그의 시조는 현대시조에 있어서 미래주의의 새로운 시도로 실험적 경향을 띤다. 현대시조의 발전에 커다란 장애 요인으로 작용하는 전통왜곡은 과감히 거부하고 있으나 동시에 90년대 시인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구체성의 관념은 앞으로 극복해야 할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현재의 시조단을 뛰어 넘어서려는 그의 시도는 아직까지 시조단의 많은 부분을 치지하고 있는 자연주의적 서경과 음풍농월에 가까운 시조와 말장난에 다름아닌 미학적 부류의 언어시조의 생산을 부인하기 위해 수행하는 치열하고 격렬하기까지 한 시정신이 곳곳에서 돋보인다.
그의 시를 한번 보자.
군자교 지나 길은 인질로 잡혔다 / 끝은 보이지 않고 되돌아갈 수도 없는 / 문명에 지 친 하루가 빽밀러 속에 갇혀 있다. / 지급기한 다 넘긴 주머니속 어음장처럼 / 자꾸 눈에 밟히는 새우잠 자는 들꽃들 / 미풍이 지날때마다 강도 비늘 벗는다. / 벌써 몇 시간째 차 선을 앞다투지만 / 가 닿을 꿈의 자리는 가드레일처럼 구겨져 / 중량천 검은 가슴 위로 맥없이 떠내려 간다. / 가장 늦은 귀가에도 가장 먼저 아침을 여는 / 온몸에 바퀴자국 어 지러운 젊은 가장이여 / 별은 왜 눈을 감아야만 보이는 것일까. / 우회를 꿈꾸기에는 너 무 멀리 와 버린 / 핸드폰 밧데리마저 깜박대는 월릉교 부근 / 그리운 불빛 하나 둘 문을 걸어 잠근다.
<우회를 꿈꾸며>-동부간선도로에서 전문
워드프로세서 커서가 하릴없이 숨차다 / 튕겨지듯 집을 나선 나의 하루는 / 한뼘 반 괄 호속에서 쓰고 다투고 돈을 센다. / 강은 오늘도 녹조와 적조를 되풀이하고 / 그리운 사 람은 내게서 너무 멀리 있다 / 오오랜 병 끝에 바라보는 한폭 담채화처럼. / 하루가 쓰레 기통에 가득 쌓이는 저녁답 / 조금씩 흔들리는 것들이 아름답다 / 서랍 속 꿈마저 짐 되 는 괄호 속의 하루.
<괄호 속의 하루> 전문
참으로 치열하고 긴장된 현실인식과 삶의 정신이 현대시조라는 일정한 양식을 지키면서도 그 틀에 얽매이지 않고 내용과 조화를 이룬 그의 시들을 보면서, 기존의 관행과 어법을 다소 변화 내지는 파괴를 주는-이제까지 그의 시들이 보여 주었던 것처럼-항상 새롭게 우리 시조의 형식과 문체를 현대적 감각에 맞게 변용하는 솜씨가 대단하다. 여지껏 무시되어 왔거나 혹은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다양한 경향성, 또는 리듬의 해체와 같은 자유주의적 어구가 독특하다.
대부분의 근로자들은 생활의 여유를 가지지 못한다. 기름냄새 땀냄새 나는 공장의 노동자이건 네타이를 매고 펜대를 굴리는 사무직 근로자이건 간에 모두 그들의 하루는 문명의 빽밀러에 인질로 갇힌 삶의 연속이다. 부도난 어음장처럼 구겨진 생활의 저편에서 진정 우리들의 꿈의 자리는 있는 것인지, 가장 늦은 귀가에도 가장 먼저 아침을 열면서 이제까지 살아온 서울의 문명적 광기와 욕망 앞에 이제는 직업을 바꾸기에는 이미 때가 늦어버린 월릉교 부근 또는 현대사회의 이율배반성의 논리를 직설과 비유를 반반씩 어무려 보여주고 있다.그 어떤 치유책에 대한 희망도 없이 거의 일방적이고 본능적으로 자신의 삶의 고통을 토로하는 것은 바로 현대문명의 요새인 세속도시가 거대한 원형 감옥이 되어 자신과 그의 가족을 속박하고 있다는 자의식에 스스로 함몰되어 있지 않나 하는 느낌이 든다. 한뼘 반 괄호속에서 사는 사람들, 만나고 싶은 사람도 만나지 못하는 삶의 진흙탕, 결국은 빽밀러에 갇히듯 서랍속의 꿈도 짐이 될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의 문명속에서 개인의 욕망은 이성의 실현이라는 본래의 활자적인 사명감을 벗어던지고 그 문명의 폐악한 독소로 버려진 자신의 고통과 비애까지도 철저히 즐길 수 밖에 없는 섬뜩함을 전달해 준다.
이와같이 권갑하의 시는 치열한 삶 속에서 긴장된 내용과 형식의 조화로 어느정도 현대시조로서의 또다른 가능성을 보여준 중량급 신인이다. 한마디로 내용이 뚜렷하고 구체적이다. 90년대 시인들의 대체로 공통된 경향이다. 그러나, 그들의 문제점으로 지적되는 것은 시조가 어렵고 무겁다는 점이다. 독자에게 쉽게 읽혀질 수 있는 현대적 감각에 맞는 작품이야말로 쉽게 쓰여진 시라는 사실을 알아 두어야 할 것이다. 어설픈 비유는 말 그대로 어설픈 작품이 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이십일세기를 눈앞에 둔 마당에 90년대 시인들의 다양한 시적 경향성과 변화된 자유주의적 어구들은 우리의 문화유산 제1호인 시조의 전망을 밝게 해줄 수밖에 없다. 주인 없는 집에 손님이 주인 노릇을 하는 그러한 문학사적 아이러니는 우리 젊은 세대들이 숙명적으로 해결해야할 과제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