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매일 기획특집
이재창 시인, 남도문학 현장을 가다 (5) - 강인한 시인
‘대운동회의 만세소리’ 지금도 들리는 듯...
종교와 같은 문학수업 목숨 걸고 작품 습작
정갈한 詩語의 함축성…한국 제일의 모더니즘 시인
현대적 감각과 절묘하게 통합된 전통적 서정 일품
2002. 12.26(목) 14:06
“내 죽은 뒤에도 나는 내 시를 걱정하리라. 그런 치기 만만하던 시절이 새삼 그리워진다.”
강인한(본명 강동길)시인(58)의 젊은시절 습작기는 문학과 생사고락을 같이한 투철하고 처절한 자신과의 싸움의 연속이었다. 그것은 그에게 하나의 종교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가 일찍이 아버지를 여읜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지만 크게 뒤틀리지 않고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문학이라는 종교의 힘이 컸다고 말한다. 그래서 '목숨을 걸고' 문학 수업을 닦는 것이 결국 자기 구원의 길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다. 글을 쓰면서 스스로의 몸가짐을 돌아보고 구부러진 길과 곧은 길을 판단할 수 있는 눈이 생겼다고 회상한다.
그는 우리의 현대사를 한눈에 보고 겪어온 그 중심에 있는 시인이다. 그가 태어난 일제강점기 말기부터 6.25, 그리고 5.16과 군사독재시대를 지나 5.18광주민중항쟁까지 그의 시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렇다고 그가 완전히 민중운동에 전력한 민중시인이라고는 보지 않는다. 그것보다는 차라리 모더니즘에 가까운 시인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의 시는 한 마디로 정갈한 시어의 함축성과 그 함축성이 뿜어내는 감동을 독자에게 선사한다. 또한 그가 습작기에 매료당했던 서구의 모더니즘은 그의 나이 60이 다되도록 시의 근저에 뚜렷하게 자리잡고 있다.
모더니즘적 시의 경향은 그의 외모나 성품에서도 드러난다. 이만재(카피라이터)씨는 그를 가리켜 “키는 170센티나 됨직한데 체중은 예나 지금이나 45킬로그램 안팎이다. 체중 미달로 군대에서 받아주질 않았기 때문에 대학을 나오자마자 시작한 고등학교 국어 교사를 지금까지 17년째 하고 있다. 어떤 얼굴로 하고 있느냐 하면 늘 봐도, ‘미소 짓는 사슴’이다. 시인이라는 뿔을 달고 있어서일까… 나는 단 한번도 강인한의 화내는 얼굴이나 짜증 내는 얼굴을 본 적이 없다. 그는 사슴이다. 정갈한 동물.
예술하는 사람이 흔히 지니기 쉬운 치기스런 특권의식과는 아예 거리가 먼 사람, 가난한 이들이 흔히 지니기 쉬운 타협과 우를 넘어서 있는 사람, 친구들은 모두 서울에 살고 형제들은 모두 미국 이민을 떠나는데도 김포 공항 송영대에서 고작 하는 말 "나는 이 세상에서 대한민국 전라도가 제일 좋은 땅 겉이여!"라고 중얼거리는 사람.
단돈 천원도 외상이나 빚이 없는 사람, 단돈 만원도 비축을 해두지 않은 사람, 이 사람이 우리의 강인한이다. 제 것 아닌 것에는 곁눈 한 번 주는 법이 없이, 제 말 아닌 남의 말은 모두 귀모아 미소로 들어주고, 끝끝내 제 작은 영토 안에 비통하리만치 아름다운 침묵의 얘기들을 노적봉의 불꽃으로 화려히도 태우며 사는 사람, 이 사람이 우리의 시인 강인한“이라고 말한다.
그의 섬세하고 정갈한 성격을 특징지울 수 있는 글이다.
필자는 고교졸업 이후부터 강인한 시인을 먼발치에서부터 보아왔다. 필자의 치기어린 문학적 끼도 대단해었지만 그는 항상 조용한 선비처럼 느껴져 좀처럼 접근하기 어려운 선배님이었다.
그러면 그의 작품 속으로 들어가 보자.
강인한의 ‘전라도여, 전라도여’는 그 제목이 시사하는 것처럼 전라도민들의 삶의 역사 속에 엉켜 있는, 심층에 내재되어 있는 피부로 느끼고, 생각하고, 마음으로 느낀 ‘정과 감각’의 시적 표출이다.
“이 나라의 가장 후진 사람들의 눈물이/모여 흐르는 곳/백 년을 질척이는 갯땅이여, 오 갯땅이여./무너질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은/이 땅에서/나는 차라리 무너지고 싶구나./아편꽃 빠알갛게 타는 백제의 해를 보며/황해로 지는 해를 보며/오월에 나는 무너지고 싶구나.//할머니는/정화수를 떠놓고 신새벽에 빌었지./구리 궤짝 속에 엽전 꾸러미 시퍼렇게 녹이 슬도록/빌고 빌었지./갑오년 난리 속을 뛰쳐나간/할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지./고부 두승에 봉화가 오르고/갈재 갓바우에 봉화가 오르고/무돌에도 계룡에도 봉화가 오르고/휘황히 빛나는 함성 소리에 귀가 먹어/할머니는 귀머거리가 되었지./황토마루 슬픈 파랑새 울음/할머니는 이냥도 귀머거리./새야 새야/울지 마라.(‘전라도여, 전라도여’ 중에서)
위의 시는 ‘전라도여, 전라도여’의 두 번째 부분이다. 전라도는 역사적으로 늘 불이익과 희생을 강요당한 농촌 현실 속에서의 억압과 수탈의 삶을 상징한다. 그래서 ‘이 나라의 가장 후진 사람들의 눈물이/모여 흐르는 곳’이고, ‘백 년을 질척이는 갯땅’이다.
이러한 수난의 삶이 멀리로는 백제 시대까지, 가까이로는 ‘갑오년 난리 속을 뛰쳐나간 할아버지’를 오매불망 기다리며 신새벽마다 정화수를 떠놓고 기원하는 할머니의 모습을 통하여 그것이 간접적으로 3대에 걸친 것임을 보여준다. 할머니는 ‘고부 두승에 봉화가 오르고/ 무돌에도 계룡에도 봉화가 오를’때 귀머거리가 되어 ‘이냥도 귀머거리’인 불구의 삶을 살고 있다. 그 훼손된 삶이 빚어내는 설움은 ‘황토마루 슬픈 파랑새 울음’이라는 객관적 상관물로 전이돼 표출되고 있다.
시인 강인한의 제1시집 ‘異常氣候’(1966)와 제2시집 ‘불꽃’(1974)은 기본적으로 뜨거운 청춘의 기록이다. 이들 시집은 안으로 뭉쳐진 기(氣)를 직관적 열망으로 토해내는 방황하는 젊은 영혼을 엿볼 수 있는 작품들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제3시집 ‘全羅道 詩人’(1982)과 제4시집 ‘우리나라 날씨’(1986), 제5시집 ‘칼레의 시민들’(1992) 등에 이르면 심미적 이성에 의한 섬세한 절제 속에서도 민족 현실의 모순을 열정적으로 노래한 작품들이 주류를 이룬다.
물론 현대적 감각과 절묘하게 통합된 전통적 서정을 곳곳에 숨기고 있는 것이 이들 시집이기도 하다. 제7시집 ‘황홀한 물살’(1999)은 다름 아닌 이러한 작품들을 중점적으로 모아놓은 시집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全羅道 詩人’, ‘우리나라 날씨’, ‘칼레의 시민들’ 등의 시집에서 가장 먼저 찾아볼 수 있는 것은 당대의 민족 현실에 대한 절실한 심미적 반성과 고통이다. 우선 ‘全羅道 詩人’에 실려 있는 장시 ‘전라도여, 전라도여’만 하더라도 "억눌리고 짓밟힌 삶을 살아온 보편적 다수의 한과 노여움과 시름의 정서가 깊이 무르녹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전셋방을 얻으러/몸뻬 입은 여편네가 소개쟁이를 따라 나선/신개발지구 배추밭 샛길은 질척이고/살얼음 끼인 미나리깡을 돌자/염소 울음 소리가/찬밥 덩이처럼 시리다./건너편 아파트 신축 공사장 주변엔/죽창 같은 삼각 깃발이/음산한 겨울 바람을 날리고,/새로 낸 소방도로의 한쪽에 비켜 앉아/무심히 철근을 끊는 인부가 둘./멀리 보이는 산자락에/버짐 피듯 눈발이 흩어져 있다.”(‘변두리에서 1’ 전문)
1980년 봄에 발표된 이 시는 민중들의 서럽고 시린 삶을 구체적인 일상의 풍경을 통해 즉물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 시가 감동의 밀도를 높일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 세 부류의 인물 형상을 작품의 핵심 요소로 포착하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몸뻬 입은 여편네, 소개쟁이, 철근을 끊는 인부 등이 다름 아닌 그들이다. 흔히 민중이라고 불리고 있는 이들 인물 형상은 신개발지구인 도시 변두리를 구체적인 삶의 공간으로 선택함으로써 보편적인 의미를 획득하고 있다. 현실이 함유하고 있는 민중적 삶의 단면을 전형적 풍광으로 압축해냄으로써 화자의 심미적 반성을 담아내고 있는 셈이다.
그의 시에 있어서의 이러한 방향 전환은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을 겪게 되면서 좀더 확실한 밀도를 획득한다. 물론 그가 이들 작품에서 언어예술로서의 시 일반이 지니고 있는 심미성 자체까지 포기했던 것은 아니다.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된 사회 상황을 노래한 작품 중에도 수많은 역사적 인유와 알레고리를 응용해 시적 품격을 잃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1980년 5월 광주사람들은 모두 '칼레의 시민들'이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 수는 있으되, 외부로 사실을 말할 수 없는 절박한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그 때 그는 자신의 "일기나 시가 전혀 타의에 의해 없어져 버릴는지도 모른다"는 극도의 절망감 속에서도 쓴 것 외에는 뾰족한 수가 없었다. 살아서 괴로운 나날을 보내던 그는 마침내 "사회 속에서 첨예하게 반응하여 구체적인 삶의 표정을 진실하게 표현"할 수 있기를 기도하면서, ‘광주, 1980년 5월의 꽃’을 쓴다.
“허공에 높이 떠 있습니다/내려갈 길도, 빠져나갈 길도/흔적 없이 사라진 뒤/소문에 갇힌 섬입니다./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한 주일만에 나선 오후의 외출에서/꽃상자 속에 담긴 꽃들을 만났습니다/서양에서 들여온 키 작은 꽃들/가혹한 슬픔을 향하여/벌거벗은 울음빛으로 피어 있었습니다/말 못하는 벙어리 시늉으로 피어 있었습니다.”(‘팬지꽃’ 전문)
이 작품은 때마침 청탁을 받았던 ‘현대시학’에 발표될 예정이었으나 전봉건 주간은 "시기가 좋지 않으니, 이 시는 잘 간직하고 있는 편이 좋으리라"는 사신과 함께 반송했다. 그 뒤 제목을 ‘팬지꽃’ 바꾸고 ‘월간문학’에 탈없이 발표되었다. 이 사실은 한때 자행되었던 권위주의적 권력의 유치한 검열제도의 실상을 반증해 준다. 이 작품은 권력욕에 눈 먼 한 떼의 정신착란자들이 자행했던 병정놀이의 경과를 알레고리로 보여주고 있다.
그는 70년대의 불의와 왜곡된 시대 상황에서 내 시의 어쩔 수 없는 에너지가 되었고, 거기에 어떤 설명을 부연하고 싶지는 않다고 말한다. 그것은 80년대까지도 이어졌고, 그렇다고 소리 높여 민중시를 쓴 건 아니다. 또한 그렇게 의식한 적도 없고, 의식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시 스스로의 길을 구속하리라는 생각에서였다고 말한다. 시가 스스로의 길을 갈 수 있도록 나는 나의 언어를 조종할 뿐. 그러면서도 나는 비교적 보수적인 태도를 잊지 않고 있었다는 점이다. 시가 지나치게 신기에 빠지거나 전위를 앞세운 황당한 실험형식의 자기도취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는 힘주어 말한다. “나에게 있어서 시는 내 개인적인 삶의 신념이다.”라고.
시는 내 삶의 신념…대학시절 전국백일장 석권
'대운동회의 만세소리'로 등단
강인한은 1944년 전북 정읍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시절 세계명작소설들을 탐독하며 문학가의 꿈을 키웠다. 중학교 시절엔 그림에 소질이 있다는 미술선생님의 권유로 미술반에 들어가 활동하기도 했다. 하지만 글과 그림대회에서 입상하기도 했다.
전주고교 1학년때 숙제로 써낸 단편소설이 교지에 실린 것이 계기가 되어 문예반 지도교사인 신석정 시인을 극적으로 만나게 된다. 시화전, 학보, 교지발행 등을 하면서 문예반에 적극 참여하면서 교내 문학서클인 ‘맥랑시대’동인활동을 하게 된다. 고교 3학년때 성균관대에서 주최한 전국 고교생 백일장대회에서 전국의 내노라하는 학생들을 제치고 시부에서 장원, 처음으로 전국무대에 얼굴을 내밀었다.
1962년 전북대 국문과에 입학하면서 그는 문학에 인생과 목숨을 거는 문학공부를 시작한다. 대학 4년내에 신춘문예와 ‘사상계‘에 투고하면서 그는 수많은 전국 백일장에서 시와 소설부문을 휩쓸다시피 했다.
그가 그토록 원하던 신춘문예 당선 통지서를 받은 것은 대학 4학년때이다. 동아일보에 투고한 시 ‘1965’가 당선됐다고 통지서를 받았으나 사흘뒤에 다시 취소통를 받은 것이다. 그 작품이 전북대학신문에 발표된 시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대학졸업후 호남중고등학교 부임 후 196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대운동회의 만세소리’가 영광의 당선을 안았다. 그리고 문공부 신인예술상 문학부문에서 시조 ‘임진강’ 수석 당선돼 시와 시조의 등단과정을 거쳤다. 하지만 그는 시와 시조 두 장르 모두 작품발표를 해오다가 79년 이후 시조의 길은 접고 시에 전력투구 하나의 길을 걷게 된다.
그에게 있어 주목할 만한 것은 그가 72년 동양방송 건전가요 가사에 응모해 ‘하얀조가비’ ‘등불’ 등 여러편이 가요로 작곡돼 한시대를 풍미했다는 사실이다. 기성세대들에게는 지금도 박인희의 그 노래들은 잊을 수 없다.
그후 77년 지금까지 근무중인 광주의 살레시오고등학교로 직장을 옮겨 광주의 대표적 시 동인회 ‘원탁시’와 ‘목요시’에 가입하면서 본격적인 광주에서의 문학활동을 시작했다.
글 ; 이재창 편집부국장
사진 ; 오종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