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건강이 예전 같지 않으시다는 전갈을 받고 어머니를 찾아뵈었다.
한달 전에 어머니를 뵈었을 때보다 눈에 띄게 야윈 모습으로 변하셨다.
어머니는 몸은 병들었어도 정신만은 차려야 치매에 걸리지 않는다고 하시며 열 손가락 폈다 오므렸다
六十甲子를 짚으시고, 말을 하지 않으면 벙어리가 될지도 모른다고 천장과 벽을 상대로 독백을 하시며,
효자손으로 느린 장단을 맞춰가며 구성진 정선아리랑을 흥얼거리곤 하셨다.
정신을 잃어 자리에 누워
험한 꼴을 자식에게 보여주지 않고 저 세상으로 가야 하신다며
늘 노래하듯 말씀하셨다.
운동 삼아 한다고 하시며 속옷도 늘 당신이 빨아 입으셨다.
어머니가 그렇게 안간힘을 쓰실 때마다 올케언니를 많이 원망했었다.
'엄마랑 말동무 좀 해드리면 얼마나 좋을까? 엄마의 속옷 좀 빨아드리면 좀 좋을까?
어머니가 얼마나 외로우시면 천장과 벽을 보고 혼자 노래를 부르시고 독백을 하실까?'
그런 말들이 입 속에서만 빙빙 돌았지 차마 입 밖으로 내 뱉지 못하고 늘 서운한 마음으로
친정 집 대문을 나서곤 했었다.
내가 어머니를 찾은 날은 만사가 귀찮다고 자리에 누우셔서 일어나 앉지도 않으시고
잠만 주무시다가 식사 때야 겨우 일어나셔서 진지를 드셨다.
아침 밥상머리에서 어머니는 식사도중 재채기를 하셨다.
어머니의 입안에서 씹다만 음식물들이 파편이 되어 반찬마다 날아가 박혔다.
전에 못 보던 어머니의 식사하시는 모습을 뵈니 가슴이 저려왔다.
어머니의 그런 모습이 내가 실수를 저지른 양 큰 올케 언니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언니는 가제수건으로 엄마의 입을 훔치며 어머니에게 마치 어린아이 달래듯 말을 했다.
"천천히 드시라니까 ... 급히 드시니 사례가 들리시지... 때마다 이러시는걸... "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하는 언니의 손놀림이 익숙했다.
순간 친구가 하던 말이 떠올라 언니에게 다음부터는 어머니 진지 상을 따로 차려드리라고 했다.
시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친구네 집을 방문해서 식사를 한 적이 있었다.
친구는 물김치를 한 그릇에 떠놓지 않고 간장 종지만 한 그릇에 각자 하나씩 떠놓았다.
그 것은 시어머니의 숟가락을 같이 담그는 게 싫어서 시어머니만 따로 떠 드릴 수가 없어
식구가 모두 국물이 있는 찬은 각자 떠놓는다고 했다.
효부로 소문난 친구도 시어머니의 입으로 들어간 밥숟가락을 반찬 그릇에 닿는 게 싫어
그렇게 하는데 우리 언니는 효부라고 소문난 사람도 아니다.
오히려 다섯 시누이들이 어머니에게 친절하지 못하다고 불평만 하던 언니다.
그런데 아침 밥상머리에서 언니가 어머니에게 하는 모습을 보고 평소에 언니에게 욕심을 부렸던
내가 몹시 부끄러웠다.
나는 딸이라도 어머니의 입안에 든 음식물이 튀긴 반찬들에 젓가락이 가지 않았다.
비위가 약한 나는 식사를 마치지 못하고 수저를 내려놓았다.
그러나 올케언니와 큰오빠는 아무렇지도 않게 식사를 잘도 하신다.
어머니는 정신이 많이 흐려지셨고 몸의 모든 제어기능이 떨어지셨다.
재채기를 해도 입을 막을 줄 모르시고 식사 도중에도 부룽부룽 가스를 내뿜으셨다.
거기다가 간간이 트림까지 하셨다. 나는 딸인데도 이렇게 속이 거북한데 올케언니는 오죽할까 싶어
친구이야기를 해주면서 어머니 진지 상을 따로 봐 드리라고 했다.
올케 언니는 그렇게는 안 한다고
했다.
같이 데리고 살고 있는 며느리에게도 단단히 일러두었다고 했다.
만약에 할머니하고 밥을 같이 먹는 걸 싫어하면 그 날은 분가하는 날이라고 엄포를 놓았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질부도 할머니와의 요란스런 밥상 앞에서 밥 한 그릇을 뚝딱해치우고 직장으로 출근을 했다.
올케언니는 어머니가 혼자 진지 드시는 모습을 측은해서 못 본다고 했다.
아니 그런 상상은 해보지도 않았단다. 지금 어머니 모습이 늙은 후의 우리네 모습이라고 생각하면
차마 그렇게 못한다고 했다.
점심에도 언니가 밥 생각이 없을 때 어머니 혼자 진지 상을 차려드리고 싶어도 어머니의
밥상 앞에 혼자 앉아 계신 모습이 측은해서 밥을 안 먹어도 어머니 진지 상 앞에 마주앉아 있는다고
했다.
매일 방안에 혼자 계신데 진지까지 혼자 드시게 하는 것은 자식된 도리가 아니라고 했다.
평소에 말수가 적은 올케언니가 오늘따라 많은 말로 오히려 나를 위로하려 애를 썼다.
맏며느리인 나는 항상 언니 편에서 이해를 많이 했다고는 해도 언니가 어머니를 이렇게 극진히 모시고
어머니를 생각하고 있는 줄 몰랐다.
깔끔하시기로 유별난 어머니시지만 병이 모든 걸 앗아갔다.
어머니의 모습은 나날이 쇠잔해 가셨다.
어머니의 야위어 가는 모습을 뵈니 자꾸 목이었인다.
올케 언니에게 가졌던 미안한 마음은 눈물이 되고 고마운 마음은 콧물이 되어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
나는 어머니의 진지 드시는 밥상 앞에서 목놓아 울어버린 불효여식이 되고 말았다.
어머니를 찾아 뵙고 온지 겨우 일주일만에 어머니는 87세의 생을 마감하시고 꽃이 피는 따뜻한 봄날,
꽃향기에 실려 영원한 봄나들이를 가셨다.
이 세상에서 8년 동안 봄나들이 한번 제대로 못 하셨던 어머니는 화창한 날 봄나들이를 가시고 싶어
그렇게 빨리 가실 채비를 서두르셨는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8년간 중풍을 앓고 계셨음에도 자식들에게 신세지는 일은 없어야 하신다는 말씀을 늘 하셨다.
어머니는 어머니의 의지대로 그렇게 자식들에게 대소변 한번 받을 기회도 주시지 않고 가셨다.
가시던 날도 불편하신 몸으로 아침에 손수 세수까지 하셨다.
아침진지 차려서 방으로 들어가 보니 벌써 이승 떠나실 채비를 하고 계셨던 것이다.
오랜만에 어머니를 찾은 딸년은 일주일을 참지 못하고 진지 상을 따로 차려드리라는 말을 했으니
얼마나 불효 막심한 일인가. 그러나 어머니는 나의 속마음을 알고 계셨으리라.
병환 중이신 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올케 언니에게 미안해서 이 딸이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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