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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시간 |
지 명 |
고 도(m) |
특 기 사 항 |
비 고 |
09시 55분 |
숭례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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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대문/ 집에서 출발할때 보이던 안개가 모두 걷히고 맑은날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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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시 30분 |
돈의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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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 강북 삼성병원앞 옛 돈의문 자리임을 알려주는 안내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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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시 45분 |
홍난파 공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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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난파 공원안에 잘 보존되어있는 홍난파 생가 |
10분 휴식 |
11시 50분 |
인왕산 |
338 |
삼각점/ 정상엔 이 일대의 산행인들로 인산인해 |
15분 휴식 |
12시 35분 |
창의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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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소문/ 주민등록증을 제시하고 출입증을 받아서 통과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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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시 10분 |
북악산 |
342 |
정상표지석/ 종로구 일대의 시원한 조망 |
10분 휴식 |
14시 05분 |
숙정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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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대문/ 음기가 통과한다고 문을 닫아 놓았다는 숙정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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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시 15분 |
서울과학고앞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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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화동 서울과학고앞에서 에이원님과 조우/ 점심식사 |
40분 휴식 |
16시 05분 |
혜화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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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소문/ 낙산까지 성곽을 따라 진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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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시 25분 |
낙산 |
125 |
낙산공원/ 주인과 산책중인 거대한 흰 개 한마리 |
10분 휴식 |
16시 50분 |
흥인지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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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문/ 청계천의 시원하고 맑은 물이 흐르는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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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시 20분 |
광희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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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소문/ 성곽 발굴조사가 진행중인 옛 동대문 운동장 터 |
10분 휴식 |
18시 15분 |
국립극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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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국장에서부터 남산타워까지 도로를 따라서 진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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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시 45분 |
남산 |
262 |
남산 타워에 도착하니 어두워지기 시작 |
15분 휴식 |
19시 20분 |
숭례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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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대문/ 어둠이 깃든 남대문에 도착하여 서울성곽일주를 완료 |
□ 서울성곽 개요
서울성곽(城郭) 사적 제10호
조선시대 서울방위를 위하여 둘러쌌던 성곽이며, 조선시대에는 한성(漢城)으로불렸다.
1392년 개성의 수궁창(壽昌宮)에서 조선왕조를 개국한 태조는
즉위한지 한달도 못되어 한양 천도계획을 명하고
한양 천도 후 일차적으로 궁궐과 종묘를 먼저 지은 다음
태조4년(1395) 9월 도성축조도감을 설치하고 정도전에게 명하여 성터를 살피게 하였다.
정도전은 백악(白岳), 인왕(仁王), 목멱(木覓), 낙산(駱山)에 올라 실측하여
네곳의 산을 연결하는 5만 9,500척(18.2km)의 성터를 결정하였다.
1396년(태조 5년) 음력 1월 9일 기공식을 올리고
춘추 2회에 걸쳐 전국에서 징발한 장정 19만 7천 4백여 명을 동원,
전후 98일 만에 북악산, 낙산, 남산, 인왕산을 따라 성의 축조를 완료하였다.
성의 길이는 9천 9백 70보(步:1보는 6자)이며 높이는 40자 2치로서 성을 97구(區)로 나누어
구마다 천자문에 따른 번호를 하늘 천(天) 자부터 조상할 조(弔) 자까지 붙였다.
성곽의 관문으로 숙청문(북대문), 흥인지문(동대문), 돈의문(서대문), 숭례문(남대문)의 4대문과
홍화문(동소문), 광희문(남소문), 창의문(북소문), 소덕문(서소문)의 4소문을 합해 8문을 완성하였다.
그 후 세종은 1422년(세종 4년)에 토성이었던 서울성곽을 전면 석성으로 쌓는 대대적인 보수확장공사를
1422년(세종 4년) 1월 겨울 농한기에 32만명의 인부와 2200명의 기술인을 동원하여 완공하였다.
당시 서울인구가 10만명인 것을 생각하면 엄청난 공사였고, 사망자만 872명에 달했다.
이것이 지금의 서울성곽의 골격으로
숙종30년(1704년)까지 260년간 부분정인 보수만 있었을뿐 붕괴는 없었다.본래 서울성곽은 도성을 방어할 목적으로 쌓았지만 정작 임진왜란때는 제 구실을하지 못했다.
1704년(숙종30년) 숙종은 서울성곽을 대대적으로 정비하고 북한산성까지 쌓으며 방어체제를 정비하였다.
그 후 1899년 서대문과 청량리사이에 전차선로를 공사하면서
동대문과 서대문 부근의 성곽일부가 헐려나갔고,
이듬해는 용산과 종로 사이에 전차선로공사로 남대문 부근을 철거하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의 도시계획과 한국전쟁으로 성문과 성벽이 많이 부서졌다.
오늘날에는 18.2km중 산지성곽 10.5km만 남게되었다.현재 삼청동, 성북동, 장충동 일대에 성벽이 남아있고, 성문은 현재 흥인지문, 광희문, 창의문, 숙정문, 혜화문이 남아있다.
내사산(內四山)
서울성곽(城郭)
서울성곽 일주 경로
시대별로 축조방식이 변화해온 모습
서울성곽의 8성문(4대문과 4소문)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도읍으로 정한 한양에는 4곳의 대문과 4곳의 소문이있었다.
4곳의 대문은 유교의 오상(五常)인 인의예지신(仁義禮知信)에 의해
동쪽에 흥인지문(興仁之門), 서쪽에 돈의문(敦義門),
남쪽에 숭례문(崇禮門), 북쪽에 숙정문(肅靖門)을 두었다.
4곳의 소문은 동쪽에 혜화문(惠化門), 서쪽에 소의문(昭義門),
남쪽에 광희문(光熙門), 북쪽에 창의문(彰義門)을 두었다.
그리고 중앙에 해당되는 곳에 보신각(普信閣)을 두어 도읍의 기본을 갖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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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위 |
문 이름 |
문화가치 |
위 치 |
용 도 |
내 용 |
4
대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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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
흥인지문(동대문) |
보물1호 |
종로6가69 |
동쪽의 관문 |
기가약해 왜구 침입이 잦아서 산맥의 뜻인 지(之) 자를사용함 |
서 |
돈의문(서대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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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구 신문로2가 |
중국과의 관문 |
일제때 철거 | |
남 |
숭례문(남대문) |
국보1호 |
남대문로4가29 |
한양의 관문 |
관악산의 불기운을 막기 위해 현판을 세로로 설치 최근에 화재로 소실되어 복원중 | |
북 |
숙정문(북대문) |
사적10호 |
삼청동산2-1 |
평상시 닫힘 |
문을 열어놓으면 음기가 침범한다하여 풍기문란 으로 폐쇄/ 1976년 문루가 복원되었다 | |
4
소
문 |
동북 |
혜화문(동소문) |
성북구 동소문동 |
양주, 포천의 관문 |
일제때 철거 후 1994년 복원 | |
남동 |
광희문(남소문) |
중구 광희동 |
시신을 성밖으로 내 보내던 통로 |
1975년 복원 | ||
서남 |
소의문(서소문) |
중구 서소문 |
일제때 철거 | |||
서북 |
창의문(북소문) |
종로구 청운동 |
북대문 역활 |
1958년 보수 |
4대문(大門)
1. 흥인지문(興仁之門)
인(仁)은 동쪽에 해당되므로 문의 이름에 '인(仁)'이 붙었다.
종로6가 69번지에 위치한 도성의 동대문인 흥인지문, 보물 제1호
다른 문의 이름들과는 다르게 이름이 네자인 것은
동쪽의 산인 타락산이 산의 지세가 약해 산의 기운을 돋우기 위해 '지(之)'자를 더 했다고한다.
다른 4대문과는 다르게 성문에 옹성을 둔 것이 이러한 이유 때문이라고한다.
2. 돈의문(敦義門)
돈의문은 일명 서대문(西大門)이라 하며 한양 도성의 서쪽에 위치한 대문이다.
의(義)'는 서쪽에 해당되므로 문의
한양 도성의 4대문들 중 가장 많은 수난사를 가진 문이다.
처음에는 돈의문이라고 이름지었는데 태종 13년(1413)에 풍수설을 받아들여
돈의문을 폐쇄하고 새로 문을 내고 이름을 서전문(西箭門)이라고 불렀다.
세종 4년(1422)도성을 새로 고칠때 서전문을 헐어 버리고
지금의 종로구 신문로2가 서대문 마루턱에새 문을 세웠는데 이름을 다시 돈의문으로 부르게 되었다.
세종 이후 돈의문이 새로 지은 문이라고 하여 새문, 혹은 신문(新門)이라 부르게 되고,
지금의 '신문로'라는 지명도 여기에서 유래된 것이다.
1915년 일제의 도시계획에 의해 철거되어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3. 숭례문(崇禮門)
국보1호로 남대문로 4가 29에 위치한 한양의 관문으로 도성의 남대문이다.
현재 남아있는 우리나라 성문 건물로서는 가장 규모가 크다.
숭례문의 현판은 태종의 큰 아들 양녕대군의 글씨로도 유명하다.
숭례문의 현판은 다른 대문들과는 달리 세로로 서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렇게 만든 이유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숭례문의 이름에 들어있는 '예(禮)'는 오행 중에서 '화(火)'에 해당되는데,
얼마전 방화로 인해 우리 국민들을 가슴 아프게 했던 일이있어
이래저래 불과는 특별한 인연이 있는 대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숭례문이 국보 1호가 된 것에 대해서 여러가지 이야기가 많았다.
'훈민정음'과 같은 자랑스런 문화재가 있음에도 성문을 국보 1호로 지정한 이유 때문이었다.
어떤 이들은 우리 나라의 국보가 처음 지정된 것이 일제 때인데,
일제가 과거 임진왜란 때 고니시군이 한양에 처음 입성한 것이 숭례문이었기 때문에
이것을 1호로 지정했다는 설도 있으나,
옛 한양의 대문 중에서도 남대문인 숭례문이 정문이었기 때문일 것이라는 설이 더 힘을 얻고있다.
석축의 양측에는 원래 성벽이 연결되어 있었으나 1908년 일본의 황태자가 조선을 방문할때,
성문의 아래쪽을 지나치기 싫다고 하여, 길을 내기 위하여 헐어내 없어졌다.
4. 숙정문(肅靖門)
삼청동 산2-1에 위치한 한양 도성의 북대문이다.
숙정문은 숙청문(肅淸門)이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도성의 북대문인 숙정문, 음기가 강한 북쪽에 있다고 해서 항상 닫아 두었다고 전한다.
태조 4년(서기1395)에 처음 건립되었으나 태종 13년(서기1413)에
다른길이 없어 서울에 들어오는 데에는 동소문(혜화문)을 거치는 것이
더욱 빠르고 편리하므로이용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러므로 이 문을 폐쇄하여도 아무런 지장이 없어서 영구히 닫아 두었다.
다만 가뭄이 심할 때에 이 문을 열고 숭례문을 닫는 풍속이 있었다.
이것은 북은 음이고 남은 양인 까닭에 가뭄 때 양을 억제하고 음을 돋우는 음양오행 사상에서 나온것이다.
또한 숙정문을 열어놓으면 장안의 여자가 음란해지므로 항상 문을 닫았다는 속설도 전하는데,
그것은 숙청문이 여자의 방위인 북쪽에 있기 때문이다.
숙정문은 다른 대문들과는 규모 면에 있어 그 크기가 현저히작다.
항상 닫혀있어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숙정문을 대신하여 창의문을 북문이라고 부르기도 했다고한다.
1976년 대통령의 명으로 북악산 일대의 성곽을 복원할때 함께 복원되었다.
4소문(小門)
1. 혜화문(惠化門)
성북구 동소문동에 위치한 동소문으로 본래의 이름은 '홍화문(弘化門)'이었다고 하는데,
창경궁이 세워지면서 창경궁 동문의 이름을 '홍화문(弘化門)이라고 짓는 바람에
중종 6년(1511)에 혜화문으로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고한다.
도성의 동소문이었던 혜화문, 1970년대 후반에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북대문인 숙정문이 항상 닫혀 있다보니 동소문인 혜화문이 북대문의 역할까지 맡아했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통행하던 문이었다고한다.
일제 강점기인 1928년에 도시 계획이라는 명목 아래 헐려 없어진것을
1970년대 후반, 서울 도성 복원 사업 때 다시 복원되었다.
2. 광희문(光熙門)
중구 광희동에 위치한 한양 도성의 남소문이다.
수구문이라고도 불렀으며 도성에서 죽은 사람들의 운구 행렬이
이 문을 통해 성 밖으로 나갔다고 해서 시구문(屍柩門)이라고도 불렀다.
한양 도성의 남소문이었던 광희문, 사방으로 길이 뻗친 가운데에 서 있어 애처롭다.
1915년에 자연 붕괴되어 아래 부분의 석물 부분만 남아있었는데, 1975년 현재와 같이 복원되었다.
3. 소의문(昭義門)
중구 서소문에 위치한 서소문으로 소덕문이라고도 불렸다고한다
한양 도성의 서소문이었던 소의문,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지금의 서소문동 큰 길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으며, 광희문(光熙門)과 함께
시신을 성 밖으로 운반하던 통로로 사용되었고, 궁궐에서 죄를 지은 사람들이
이 문을 통해 도성 밖으로 쫓겨났다고 한다.
1914년 일제의 도시계획에 의해 부근의 성곽과 함께 완전히 철거되었고
지금은 사진을 통해서만 그 모습을 대강 알 수 있을 뿐이다.
4. 창의문(彰義門)
고양군, 양주군 방면으로 통하는 문이 었으며,
한양 도성의 북소문이으로 창의문, 자하문이라고도 불리우고 있다.
태종 16년(서기1416년)에 이 길로 통행하면 왕조에 불리하다는 풍수지리설에 의해 문을 닫았다가,
중종 원년(서기1506년)에 다시 문을 열어 통행을 하였다고 한다.
인조반정(서기1623년)때는 세검정에서 모의했던 반정군들이 이 문을 부수고 궁 안으로 들어가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왕위에 앉혔다고 전한다.
창의문의 서쪽 벽에는 인조반정때 공을 세운 공신들의 이름을 새긴 현판이 걸려있다.
□ 산행사진
흥인지문(興仁之門)
현존하는 서울성곽 5성문중 가장 멋진 동대문의 근엄한 모습
오늘 서울성곽일주 출발지 숭례문
안타깝게도 얼마전 방화로 소실되어 복원공사중인 국보1호 남대문
남대문초등학교의 옛터
배재공원
이 근처 어딘가에 존재했던 소의문(서소문)터를 찾아보았으나 찾을수가 없었다
정동극장앞을 지나고...
이곳이 소실된 돈의문(서대문)의 옛자리임을 알려주는 강북 삼성병원앞의 안내판
강북 삼성병원
서울특별시 교육청
서대문일대의 옛 성곽의 흔적이 남아있는 모습
홍난파공원내에 잘 보존되어있는 홍난파 가옥
집안에 들어가보니 관리인은 없지만 깨끗하게 잘 정돈이되어있다
성곽의 흔적이 간간히 보이고...
드디어 주택가를 벗어나 성곽 탐방로에 올라서서 지난 7월 5일 금남정맥 산행이후
근 두달반만에 지금 인왕산의 산자락을 바라보니 감개무량하다
이 철문 앞에서 전경들이 출입을 통제하고있다.
여기서부터 인왕산 6부능선까지 성곽 복원공사 관계로 우측 500미터 우회하여 진입해야한다
우회도중 만난 비들기 한 마리
능선 좌측으로 보이는 안산의 모습
인왕산 오름길
바위를 파서 계단을 만들었다
정상전 헬기장에서 바라본 인왕산
정상 직전 다정하게 모이를 찾고있는 비들기 한쌍
인왕산 정상
인왕산에서 바라본 북악산의 모습으로 우측 아래로 경복궁과 청와대가 보인다
새로 잘 복원된 인왕산 성곽
앞쪽 인왕산으로 이어지는 서울성곽
시대별 성벽축조 상태를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 창의문 내려서기 전의 성벽
창의문앞에 설치되어있는 청계천 발원지를 알리는 표지석
지난 1968년 1.21사태때 순직한 고 최규식경부관 동상
고양과 양주일대의 통행로였던 창의문
창의문위 문루를 받치고있는 8팔각형의 완벽한 주춧돌
북악산으로 이어지는 서울성곽
북악산 정상
1.21사태 소나무
청운대
잘 보존된 성벽
이곳 경계부대에서 세운듯한 장승 "철통경계 대장군" "부대관리 여장군"
곡장
숙정문
말바위 전망대
이곳을 조금 지나서 삼청공원 방향으로 잠시 알바
알바를하는 바람에 여기까지 올라와주신 에이원님 반가웠습니다
서울과학고 근처의 한 식당에서 에이원님과 점심식사와 막걸리 한잔을 기울이고...
혜화동의 어느집인데 성벽에다 축대를 쌓고 집을 지었다
혜화문 근처의 잘 보존되어있는 성곽
혜화문(동소문)
1970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잘 복원되었다
아래부분의 원형위에 잘 복원한 혜화문 근처의 성곽
여기서부터 낙산쪽으로 성곽 아래의 탐방로를 공사하고있다
이 암문을 통과하여 낙산으로 올라서고...
낙산공원에 주인과같이 올라온 한 살 배기 거대한 백구
낙산정상의 낙산공원
성곽 탐방로가 잘 정돈되어있는 모습
오늘 주택가에서 이정표가 되어준 "서울성곽종주코스" 표지기
흥인지문(동대문)
현존하는 5성문중 가장 멋진 모습의 흥인지문
맑은 물이 흐르는 청계천
물가로 내려가 보니 바닥에 물고기가 많이 놀고있다
광희문(남소문)
오늘 서울성곽일주의 8성문중 마지막 성문
장충동 근처의 잘 보존되어있는 성곽
한국자유총연맹
이곳으로 내려서기전에 성곽을 우회하여 국립극장까지 진행
국립극장
여기서부터 남산타워까지 도로를 따라 진행
도로가 성곽을 힁단하는 곳으로 성곽 능선이 중구와 용산구의 경계선이다.
어둠이 서서히 깃들어있는 남산타워
무원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