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동선(蔡東鮮, 독일어식 표기: Dongsun Tschae, 1901. 6. 11 벌교 - 1953. 2. 2. 부산)
채동선
바이올리스트 겸 작곡가. 전남 보성(벌교)의 부호였던 채중현(蔡重鉉)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좋은 가정 환경 덕에 그는 당시로서는 비교적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채동선은 1915년에 순천 공립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경기고등보통학교(경기고등학교의 전신)를 진학하여 1919년까지 수학하였다. 그는 고등학교에 다닐 때에 홍난파의 바이올린 연주를 들은 후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홍난파에게 바이올린을 1년 정도 배운 후 그는 삼일운동에 참가한 일로 학교를 그만 두었다.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한편으로 와세다 대학에서 영문학을 배우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多忠朝에게 4년 동안 바이올린을 배웠다. 대학 졸업 후에는 영문학과 경제학을 배우기 위해 미국 유학을 의도했지만 곧 포기했고, 공부방향을 음악으로 잡고 유학 대상국도 독일로 바꾸었다(독일 유학: 1924). 1925년까지 1년간 그는 베를린의 슈테른 음악원(Sternsches Konservatorium der Musik)에서 리하르트 하르처(Richard Hartzer)에게 바이올린을, 부전공으로 클라테(Wilhelm Klatte)에게 작곡을 배웠다. (슈테른 음악원은 바이올리스트 슈테른'Julius Stern'에 의해 1852년에 설립된 학교로서 후에 제국 수도 음악원Konservatorium der Reichshauptstadt', 시립 음악원'Städtisches Konservatorium' 등의 이름으로 바뀌었다가 1966년 음악대학'Hochschule für Musik'으로, 현재는 종합예술대학'Universität der Künste'이 되었다.)
귀국한 최동선은 1926년 이후 연주활동을 벌이면서 학교(연희전문)에서 음악을 가르쳤다. 그는 1929년부터 1939년까지 모두 네 차례의 바이올린 독주회를 개최하였다. 1930년 동생 채선엽(蔡善葉, 당시 이화여전 학생, 후에 같은 학교 성악 교수)과 동기생이었던 이소란(李小蘭)과 결혼했다. 결혼 이후 그는 작곡활동에 열심을 내었다. 1930년대?-45년에는 <채동선 현악사중주단>을 만들어 이영세(李永世), 나운영(羅運榮), 윤낙순(尹樂淳) 등과 함께 연주활동을 하였다는 기록이 있지만 그 활동이 어느 정도였는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일제 말기에 그는 일제와 타협을 거부하였다. 창씨개명을 거부하였고 대학 강의를 중단한 후 화훼 농사를 하며 생활했다. 해방이 되자 그의 음악도 되살아났다. 그는 애국적인 곡들을 작곡하고 오케스트라와 합창을 위한 한국민요 편곡에 정력을 쏟았다. 음악인들을 결집하여 <고려음악협회>를 창설하여 회장으로 일했고(1945), <고려합창단>을 조직하기도 하였다(1948). 또한 <한국문필가협회> 부회장(1947), <고려작곡가협회> 회장(1947), 서울특별시 문화위원(1947), 문교부 예술위원(1949), 국립극장 운영위원(1950), 국악원이사(1950), 예술원 위원(1952) 등으로 사회참여에도 열심이었다. 50년대 초반 경기여고, 서울대 상과대학, 숙명여대에서 독일어와 영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1953년 부산 피난지에서 막노동의 힘든 생활 가운데 복막염을 얻어 죽게된다. 1979년 정부로부터 은관 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채동선은 많은 작품을 남긴 작곡가는 아니다. 독일 유학 후 그는 한국에 돌아와 몇 개의 기악작품을 발표하였다. 이 작품들은 출판된 일이 없이 아직도 필사본 상태로 남아 있다. 또한 작곡가의 독특한 점이 있다고 생각하기 어렵다. 그 이유는 이 곡들이 전고전주의 음악이나 가벼운 모차르트를 연상하게 하기 때문이다. 삼화음의 음들을 따라가는 방식의 선율 진행, 비음계음이 거의 사용되지 않는 손쉬운 진행을 보이는 성부들, 고전음악의 전형적 꾸밈음들을 사용하는 것들이 그것이다. 1937년의 작품인 『현악4중주 제1번』(G 단조), 그리고 미완성으로 남은 『현악4중주 제2번』(G장조)을 썼는데, 이는 습작이라는 일면도 있지만, 당시 한국의 연주 수준도 고려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럼에도 이 현악사중주는 당시 한국에서 거의 작곡되지 않는 새로운 장르로의 진입을 의미했다. 『Concert für Streichorchester in Klassischer Form』(Op. 9)도 음악적으로 현악사중주 곡들과 거의 비슷한 성격의 곡이다.
그가 한국민요의 채집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은 일제 말경으로 짐작되며, 그 작업이 해방 이후까지 지속된다. 그의 채보는 상당히 정확한 것이었다. 그는 한국 음악의 장단을 먼저 파악하여 그 바탕 위에 채보하여 당시와 해방 후에 있었던 -장단을 고려하지 않는 다른 작곡가들의- 채보보다 본래의 한국음악과 더 가까운 모습을 보여준다. 『별유천지(別有天地)』, 『추월강산(秋月江山)』, 『흥타령』, 『둥가타령』, 『진국명산(鎭國名山)』, 『승평만세지곡(昇平萬歲之曲)』 (與民樂), 『농부가(農夫歌)』 『기생점고(妓生點考』, 『오리정(五里亭)에서』, 『일절통곡(一切痛哭)』, 『적성가(赤城歌)』, 『신당 춘향(新堂 春香)을 부름』과 같은 민요, 판소리, 궁중음악들은 결코 채보가 용이하지 않는 종류의 것들이었다. 이러한 채보는 단순히 전통음악을 보존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 곡들을 상당 부분 합창곡으로 또는 관현악곡으로 편곡하였다. 그가 채보한 음악 중에는 판소리 『춘향가』의 여러 부분들이 들어 있다. 그는 이 곡들을 임방울과 이화중선의 음반을 토대로 채보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들의 이름이 채보용 악보에 적혀 있기 때문이다. 채동선이 채보한 초고들에는 위에 적힌 곡들 이외의 것들도 있다. 이러한 예로 "금준미주는 천인혈이요" 하는 『일필휘지』 노래와 같은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채보하는 도중에 그는 선율 밑에 화음을 붙여둔 것을 볼 수 있다.
일필휘지가
이런 정황으로 볼 때에 그는 『춘향가』 전곡을 채보하여 거기에 화성을 붙이려는 계획을 갖고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한국 전통음악에 그가 붙인 화성들은 전통적 서양음악의 방식이다. 따라서 그는 아직 한국 선율에 맞는 한국식의 화성을 생각하지 못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는 당대의 다른 작곡가들과 비교하면 어느 누구보다도 한국 전통음악을 가까이했고, 또 익숙했다고 할 수 있다.
채동선이 일반 한국인들에게까지 기억될 수 있는 사람이 된 그의 가곡 때문이다. 특히 『고향』(정지용 시)의 덕이다(이 곡은 시인 정지용에 대한 해금조치가 내려지는 1980년대 말까지 이은상 작사 <그리워>, 박화목 작사 <망향>으로 바뀌어 불렸다). 이 곡은 당시의 작곡가들, 예를 들어 홍난파나 현재명과 같은 불과 한두 페이지 짜리의 가곡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그 길이도 그러하지만 부정형한 가사를 선택한 것과 그것을 음악으로 만드는 방법이 그 때까지의 것과는 달랐다. 그의 가곡들은 거의 일관작곡된 방식의 것이었다. 그리고 장절가곡에서처럼 흔히 나타나는 반복적 선율도 흔히 볼 수 없다. 『고향』에서는 첫 부분의 선율이 마지막 부분에서 "풀피리 소리 아니 나고"와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의 가사를 반복되기는 한다. 하지만 그 이외에는 반복 없이 줄기차게 단조의 음계를 "돌아다니는" 성격을 보여준다. 즉 선율이 음계에 주어진 성격을 이용하는 것이다. 전주가 끝나고 1옥타브로 도약(미-미)하고, 짧은 첫 간주가 끝나고 1옥타브로 도약하는 것(솔-솔)이 곡의 상승적인 작용을 하게 한다. 크게 솟구쳤다가 점차로 떨어져 내려오는 선율의 움직임은 고향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과 실망을 말하는 가사와 잘 맞는다. 음절수가 일정하지 않는 가사들은 대체로 두 마디 단위로 정리되지만 , 한번 예외적으로 3마디 단위가 된다("머언 하늘만 떠도는 구름"). 따라서 그의 음악은 매우 파격적인 성격의 것은 아니다. 단지 불규칙한 음절수를 두 마디 단위에 맞추면서 규칙적인 음절수를 가진 가사를 사용한 음악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는데, 두 마디 안에서의 음절 배열의 불규칙성이 리듬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다른 가곡들도 거의 같은 성향을 보인다. 하지만 일정한 곳에서 숨쉬기 좋은 『고향』의 선율과는 달리 프레이즈와 프레이즈가 밀착되는 경향을 보인다.
자필악보 '고향'
반면에 그의 애국적 칸타타들은 오히려 더 쉬운 노래와 같은 틀을 바탕으로 하여 거기에 약간의 변주적 요소들을 첨가시켜 음악을 꾸려간다. 그리고 마지막 곡 「뱃노래」는 전통음악적 성격의 뱃노래로 구성되어 있다. 칸타타 『조국』은 행진곡 풍의 음악이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진다. 이것 역시 가벼운 변주를 통해 약간씩 모습을 바꾸며 음악을 꾸민다.
채동선의 음악은 불과 세 살 위의 홍난파 음악과 비교하면 더 발전된 모습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홍난파와 마찬가지로 그 역시 우선적으로 바이올리니스트였다. 따라서 그도 많은 작품활동을 하지 못했다. 그는 당시의 작곡가들 중에는 가장 기대할만한 사람이었으나 그의 이른 죽음은 그를 한국음악사의 아쉬운 부분으로 남게 하였다.
출판된 악보와 자필본
『채동선 독창곡 작품 제5번』 '향수', '구천', 공묵제, 소화 12년(1937) 『채동선 독창곡 작품 제7번』 '다른 하늘'(정지용), '또 하나 다른 태양'(정지용), 공묵제, 소화 12년(1937) 『三一節의 노래』, 혼성합창과 피아노 반주를 위한 곡 (자필본의 복사), 채동선(작사), 연대 미상. 『선열추모가(先烈追慕歌)』, 혼성 4부합창, 조지훈(작사), 韓國義士團(발행), 1947. 『개천절(開天節)』, 혼성 4부합창, 채동선(작사), 興樂院(발행), 1947. 『한글노래』, 자필본, 성악 1성부와 피아노 반주 붙음, 이극노(李克魯) 작사로 되어 있고. 가사는 아직 기입하지 못한 상태. 『독립축전곡(獨立祝典曲)』, 채동선(작시) 大管絃樂 伴奏 付 混聲合唱曲, 蔡東鮮 採譜編曲, (자필본 총보), 하나의 겉장의 묶인 이 악보는 "吹奏樂伴奏"용과 관현악 용의 두가지 편성이 있다. 『현악 4중주 제1번』. G단조, Op. 3 자필본. 악보의 끝에 23 Mai[5월] 1937이라는 기록이 있음. 『Concert für Streichorchester in Klassischer Form』, Op. 9 (1940년 추정), (자필본 복사). 『진도 아리랑』, 大管絃樂 伴奏 付 混聲合唱曲, 蔡東鮮 採譜編曲, (자필본 총보) 『도라지타령』, 大管絃樂 伴奏 付 混聲合唱曲, 蔡東鮮 採譜編曲, (자필본 총보) 『뱃노래』, 大管絃樂 伴奏 付 混聲合唱曲, 蔡東鮮 採譜編曲, (자필본 총보) 『조국(祖國)』, 연대 미상의 자필본 총보, 이 곡은 「대한만세」, 「민족의 기원」, 「광복행진곡」, 「개선합창곡」으로 짜여짐. 최동선이 만든 것이라기 보다는 후에 어떤 연주단체에서 지휘자 용 정도로 만든 것으로 보임. 이 곡은 이미 발표된 다음의 혼성4부 합창곡들을 바탕으로 관현악 반주를 붙여 만든 것이다. 「조선만세」 (서곡) Op. 11/1, 「조선진혼곡」 Op.11/2, 「개선합창곡」 Op. 11/3, 「건국행진곡」 Op. 11/4, 「선열추모가」(조지훈 시).
『채동선 가곡집』(편찬대표: 박태현), 세광 출판사, 1964. 『정지용 시 채동선 작곡 독창곡집』, (정지용 악보 전시회의 팜플렛), 객석, 1988. 『그리워』 채동선 작품집 , 수문당, 1980. 『한강』 채동선 합창곡집 칸타타 (편: 채동선 기념사업회), 세광출판사, 1983. 칸타타 『한강』은 한강수, 불멸의 노래, Waltz and Barcarolle의 3곡으로 되어 있으면 이 악보는 피아노 반주만 제공되고 있음. 이 책에는 칸타타 피아노 반주 붙은 칸타타 『조국』도 실려 있다. 『고향』채동선 작품집 제2집 , 수문당, 1993. 이 작품집에는 채동선의 작은 성악곡 대부분이 원래의 가사 그대로 실려 있다.
작품들
가곡 『향수』 Op. 5/1, 정지용 시. 『압천』 Op. 5/2, 정지용 시. 『고향』 Op. 6/1, 정지용 시. 『산엣색씨, 들녘사내』 Op. 6/2, 정지용 시. 『다른 하늘』 Op. 7/1, 정지용 시. 독창용과 혼성 4부합창용이 있다. 『 하나 다른 태양』Op. 7/2, 정지용 시, 한 때 「또 다른 나의 세계」(시: 모윤숙」로 통용됨. 『바다』 Op. 8/1, 정지용 시, 한 때 「갈매기」(시: 이은상)로 통용됨. 『풍랑몽』 Op. 10/1, 정지용 시, 한 때 「동해」(시: 이은상)로 통용됨. 『내 마음은』, 김동명 시. 『그 창가에』, 모윤숙 시. 『낙화암』 Op. 10/2. 정지용 시, 한 때 「내 조국」(시: 이은상)으로 통용됨. 『새벽별 잊고』 Op. 10/3, 김상용 시. 『모란』 Op. 10/4, 김영랑 시. 『진주』, 한용운 시.(4부합창)
애국적 노래
『한글 노래』 (이극로 시) 『한건님』 『입성가(入城歌)』 『三一節의 노래』. 『우리 태극기』(혼성 4부합창) 『태극기 노래』(앞의 것과 같은 음악이지만 관현악으로 편곡) 『선열추모가(先烈追慕歌)』 『개천절(開天節)』 『독립축전곡(獨立祝典曲)』 『무궁화노래』(혼성 4부합창)
기악곡
1. 현악 4중주 제1번. G단조, Op. 3 자필본. 악보의 끝에 23 Mai 1937이라는 기록이 있음. 2. 현악 4중주 제2번 G장조(미완성) 3. 바이올린 독주곡 <카프리스(Caprice)> (바이올린 환상곡 라단조) (1939) 4. 현악 조곡 5. Concert für Streichorchester in Klassischer Form, Op. 9 (1940년 추정).
칸타타
『조국(祖國)』, 해방 직후에 쓰여진 것. 『한강』, 해방 직후에 쓰여진 것.
한국민요 편곡
『진국명산(鎭國名山)』, 피아노 반주, 1949. 『둥가타령』, "남한산성 올라가"로 시작하는 노래, 혼성 4부합창으로 편곡하고 피아노 반주를 붙임. 1948. 『흥타령』, 혼성 4부합창으로 편곡하고 피아노 반주를 붙임, 1948. 『새야새야 파랑새야』(독창). 『새야새야 파랑새야』(혼성 4부합창). 『서울 아리랑』(혼성 4부합창) 『진도아리랑』(혼성 4부합창) 『도라지타령』(혼성 4부합창) 『진도 아리랑』, (혼성 4부합창 관현악 반주). 『도라지타령』, (혼성 4부합창 관현악 반주). 『뱃노래』, (혼성 4부합창, 관현악 반주). 6. 『육자백이』 7. 『천봉만악(千峰萬岳)』 피아노 반주. 8. 『진국명산』 피아노 반주. 9. 『산령산(山靈山)』 10. 『중령산(中靈山)』 11. 『군악령산(軍樂靈山)』 『군악(軍樂)』
⊙ 국악채보
『별유천지(別有天地)』 『추월강산(秋月江山)』 『홍타령』 『기생점고(妓生點考)』 『승평만세지곡(昇平萬歲之曲)』 (여민락) 『농부가(農夫歌)』 『오리정(五里亭)』 『일절통곡(一切痛哭)』 『적성가(赤城歌)』 『신당 춘향(新堂 春香)을 부름』
등록일자: 2004-01-17 홍정수
이 항목은 김용환 교수(한세대)의 도움으로 많은 악보와 자필본을 얻어 집필한 것이다. 김교수에게 감사한다. 아직 확인되지 않은 부분이 적지 않고, 연구되지 않은 면들이 많지만 우선 임시적으로 정리해본 것이다.
자료출처/음악이좋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