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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편 * 원효와 설총의 이두 * 원효의 어머니는 큰 밤나무골을 지나다가 산기가 있어 밤나무 밑에서 원효를 낳았다. 어려서부터 총명한 그는 밤을 먹으며 건강하게 자랐고 일찍이 화랑이 되어 그 명성이 매우 높았다. 그가 28세가 되던 해에는 선덕여왕의 협력으로 황룡사에 9층탑이 건립되었고, 자장율사로부터 호국신앙에 대한 깊은 감화를 입었다. 선덕여왕이 죽고 진덕여왕이 즉위한 이듬해, 31세가 된 원효는 스스로 삭발을 하고 중이 되어 자신의 집을 절로 고쳐 초개사(初開寺)라 불렀다. 그는 자장율사로부터 문수보살을 친견하는 대도(大道)를 배웠기 때문에 스승을 찾지 않고 스스로 눈을 떠서 문수보살을 친견했던 것이다. 그 절을 관리하던 사람이 종에게 저녁 한 끼니로 밤 두개씩을 주었는데, 그 종은 적다고 관가에 호소하게 되었다. 관리가 이상하게 여겨 그 밤을 가져오게 했더니 한 개가 얼마나 컸던지 거의 바리때에 가득 찰 정도였다. "절의 모든 사람들은 하나씩만 먹는데 일을 한다고 두 개씩을 주었다 하나, 그 양이 충분하므로 종에게도 하나씩만 주도록 하라." 관리의 판결이 내리자 그 소문이 신라 장안에 퍼져서 그 마을을 밤나무골이라 하여 율곡(栗谷)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먼훗날 조선조의 유학자 이이(李珥)가 그의 호를 율곡이라 지어 원효의 사상을 실천하려고도 했었다. 원효가 입산한 지 2년 후에는 진덕여왕이 당나라의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당을 황제국으로 추앙하는 속국임을 선언했다. 그만큼 정세는 불안했고 국력은 쇄잔해갔다. 그가 39세가 되던 해에 당나라에서는 천하의 여걸인 측천무후가 정권을 장악하여 세계통일을 계획했고, 43세가 되던 해에는 이윽고 나당연합군에 의해서 백제가 멸망되었다. 신라 무열왕 김춘추는 말했다. "원효대사와 의상대사는 우리나라의 미래를 지켜갈 위인이니, 당나라에 유학하여 중국불교를 배워 돌아오도록 하오. 곧 삼국이 통일 될 것인데 민족정신을 통일하려면 정신의 지도자가 있어야 할 것이오." 단기 2994년(서기 661) 신유년, 백제부흥운동이 일어나고 고구려 정벌로 나라가 혼란한 봄날이었다. 44세인 원효와 36세인 의상은 10여년 전 당 유학을 하려다가 실패했기 때문에 다시 당 유학길에 올랐다. 그러나 원효는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신라가 우리를 보내는 것일까? 아니면 당이 우리를 부르는 것일까? 지혜로운 원효는 신라의 앞날이 걸려 걸을 수가 없었다. 이미 백제는 멸망되었고, 다시 당군과 신라의 김유신 군이 합세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킬 것이다. 그리고 나면 당나라는 수나라가 못한 침략을 성공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서 할 일이 무엇인가. 틀림없이 삼국의 불교를 중국불교에 연결지어 문화지배를 시도하리라. 그렇다면 나의 유학길은 당 식민문화의 고리를 만들기 위해 가는 것이 아니던가? 그는 어둠 속에서 바가지에 담긴 물을 맛있게 먹었다. 이튿날 아침에 그 바가지가 해골임을 알고 심한 구토를 일으키며 말했다. "진리는 결코 밖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서 찾아야 하느니, 나는 이미 문수보살을 친견하여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도리를 알았으니 귀국하기로 하겠네." 원효의 견성을 부럽게 생각한 의상은 분심이 생겨 혼자서 당 유학길을 재촉했다. 그리고 대국의 문화와 불교를 빨리 접촉해 보고 싶었다. 돌아온 원효는 노래를 지어 부르고 다녔다.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빌려 주겠는가? 내게 준다면 하늘을 받칠 기둥을 찍으리라!" 그말을 전해 들은 태종 무열왕은 가슴이 철커덩 내려앉았다. 필시 역사의 경영권을 달라는 뜻이렷다. 만약 민족 자존심이 강한 원효가 재상이 된다면 신라는 당과의 전쟁을 면치 못하리라. 삼국전쟁은 이미 저질러 놓은 일이고, 신라는 당과의 유대를 유지하여 전쟁을 피하는 것이 상책이 아니던가. 무열왕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무릎을 탁! 쳤다. 둘째 공주가 전쟁으로 부마를 여의고 홀로 남아 고독하지 않던가. 평상시 부터 요석공주(瑤石公主)는 원효를 흠모하지 않았던가. "원효대사는 필시 귀부인을 얻어 아들 낳기를 바라는 듯하도다. 나라에 큰 현인이 태어난다면 이 또한 경사가 아니런가!" 원효가 다리를 지나려는데 임금의 칙사가 일부러 밀어서 물에 빠뜨렸다. "죄송합니다. 이리 오십시오." 그들은 원효의 옷을 말릴 수 있는 요석궁으로 안내했다. 아- 이것이 자루 없는 도끼던가? 민족이 멸망되고 나라의 장래가 암담한데 겨우 여기에다 자루를 박으란 말인가? 원효는 그날밤 자신의 높은 뜻이 통하지 않음에 서글펐다. 그래서 실컷 취하고 마음껏 도끼자루를 박아댔다. "나는 파계했다. 나는 소성거사(小性居士)다." 그해 무열왕이 죽고 문무왕이 즉위했다. 아니나다를까 무열왕이 죽은 지 2년이 되자 당은 신라를 '계림도독부'라 칭하고 문무왕을 계림주(鷄林州)의 대도독(大都督)에 임명하므로써, 신라를 당나라의 한 주(州)로 못박아 버렸다. 전쟁을 치르지 않고도 신라를 먹어 버린 것이었다. 나라를 잃은 원효는 거지 옷으로 갈아입고 신라 전역을 누비며 각설(覺說)이 타령을 하고 다녔다. 얼빠진 자들에게 다시 얼을 집어 넣기 위해 얼씨를 심어 주기 위해 '얼씨구씨구 들어간다'를 부르며 백성의 가슴에 민족혼을 심고 다녔다. 그가 51세가 되던 해에는 마지막으로 고구려가 멸망되었다. 신라 문무왕은 단기 3001년(무진년) 11월 6일에 선조묘에 나아가 삼국이 통일되었음을 고하였다. 같은 날 원효는 땅을 치며 통곡을 했다. 이 날이 올 것을 알고 중국 문화에 대항하기 위해 해동불교(海東佛敎)를 창설하여 민족종교를 선양하려 했건만 파계승이 되어 역사의 밖으로 밀려나야 했었다. 신라는 이겼으나 고구려와 백제는 어디로 갔는가? 당의 계림주 도독이 감히 신라의 선조묘에 나아가 삼국통일을 고하다니……. 이런 역사 왜곡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마침내 중국은 수나라의 수모를 씻은 것이 아니던가. 원효가 53세가 되던 해, 그러니까 삼국이 다 멸하여 전쟁이 끝난 지 2년 뒤에 당나라로 유학갔던 의상대사가 45세의 성숙한 모습으로 귀국했다. 그것은 당나라 불교의 새로운 역사가 우리 대륙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그의 귀국은 당나라 불교를 신라에 번지게 하는 신호탄이 되었다. 당 화엄종의 대를 이어 귀국한 그의 제자들은 불교 연원을 중국에 대는 재치를 발휘했고, 의상에게 줄대기 바빴다. 의상 대사는 51세에 부석사를 창건하고, 52세에 법계도(法界圖)를 완성하여 그 실력을 과시했고, 53세엔 범어사를 창건함으로써 신라불교의 주역으로 부상되었다. 국왕이 고승(高僧) 100명을 초청하여 벌이는 인왕경대회(仁王經大會)인 백고좌(百 高座)에 원효는 낄 수가 없었다. 승려들이 이구동성으로 원효는 중이 아니라고 힐난했다. 그는 파계승이요, 거사나 다름없는 거지며, 막행막식으로 승려의 권위를 상실한 자이니 백고좌에 초청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원효는 살아서 백 명의 승려 중에도 끼지 못하는 서러움을 감당해야만 했다. 불교를 가장 깊이 알고, 나라의 장래를 대비하려던 보살인데도 형식과 권위만을 내세운 중국불교의 고승들에게 밀려 설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 일이 있은 뒤 얼마 후에 왕후가 종기를 앓게 되었는데 별 약을 다 써보고 별 의사를 다 불러 보고 별 도사를 다 초청해 보아도 효험이 없었다. 명산대찰을 찾아가 기도를 하고 설법을 들어도 별 수가 없었다. 임금은 신하를 당나라로 보내어 약과 의사를 구하기로 했는데, 그들이 바다를 가는 중에 한 노인을 만나 용궁으로 가게 되었다. 용왕이 그들에게 말했다. "우리 용궁엔 일찍부터 금강삼매경이 전해오는데 시각(始覺)과 본각(本覺)으로 되어 있느니라. 원만하게 열린 보살행을 설명해 주는 불경인데, 이 경을 줄 것이니 잘 유통 하라. 그리하면 병이 나으리라." "신라에는 아직 금강삼매경이 없는데 어느 법사에게 맡겨야 하오리까?" "대안(大安)을 시켜 흩어진 종이의 차례를 맞추고 원효에게 청하여 소(疎)를 짓게 하면 왕비의 병이 나으리라." 사신들이 돌아와 흩어진 종이 뭉치를 내놓자, 어느 법사도 그 순서를 알지 못했다. 용왕이 말한대로 대안이 간추려 원효에게 주었다. "이 경은 본각(本覺)과 시각(始覺)의 두 각을 종(宗)으로 삼고 있으니, 나에게 뿔 달린 탈 것을 마련해 주고 책상을 가져다가 두 뿔 사이에 걸쳐 놓고 그 위에 붓을 놓으라." 원효는 내내 소달구지를 타고 다니며 다섯 권의 금강삼매경소를 지었다. "미친놈이로고! 경건한 경전을 소달구지를 타고 속세를 누비며 소를 짓다니?" "임금님께서 날짜를 정하여 황룡사에서 법회를 연다고 합니다. 왕가와 신하는 물론 고승들까지도 참석하라는 어명이 있었다고 합니다." "미친 게야. 세상이 모두 미쳤어!" 그런데 그를 시기하던 무리가 다섯 권의 강론집을 훔쳐가 버렸다. 원효는 하는 수 없이 사흘을 연기받고 새로이 논술하여 세 권으로 완성했으니 이것이 바로 원효대사의 《금강삼매론》3권인 것이다. 원효의 말은 이미 원효에 막히지 않았다. 자신에 걸림이 없는데 어느 존재가 있어 막히겠는가. 그 위엄과 해박한 경계에 모두 빠져 헤어날 수가 없었다. 아, 이것이 불교인가? 이것이 깨우침이며,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보살행인가? 그동안의 가치관을 쓸어 버리고 새롭고도 쉬운 진리를 펼쳐 보였다. 그때서야 원효가 대중을 향해 말했다. "옛날 백 개의 서까래를 구할 때에는 참여할 수가 없었는데, 오늘 아침 하나의 대들보를 가로지름에 있어서는 오직 나만이 할 수 있구나!" 그 말을 들은 고승대덕들이 얼굴을 숙이고 부끄러운 낯으로 엎드려 참회를 했다. 이 책은 중국에 전달되어 교재로 삼게 되었고, 나라에서도 원효의 저술이 나올 때마다 앞을 다투어 읽게 되었다. 원효대사가 많은 저서를 남겨 후학들의 이정표로 남겨 놓은 70세로 죽은 뒤 원효대사의 아들인 설총(薛聰0은 모든 문화가 당나라식으로 변질되고 오직 중국의 한자만이 성행되자 그동안 써오던 우리의 고유한 문자를 정리하여 스스로 사용함 으로써 민족혼을 지키려고 했다. 그 여파가 고려에 이어졌는데 삼국사기에서는, 신라 삼대 문장인 강수(强首), 최치원(崔致遠), 설총을 말하매 '설총은 우리말(方言)로 사서오경을 읽고 후생을 훈도하였다'라고 기록했다. 그 예지가 이어져서 세종대왕 때에 우리글로 창안되었으니, 우리글의 시조는 이두를 정립한 바로 설총인 것이다. 그는 신문왕과 마주앉아 얘기를 나누었는데, 이것이 유일하게 남은 설총의 글로 화왕계(花王戒)라 하는 것이다. 옛날 화왕(花王)인 모란이 처음 왔을 때 동산에 심었더니 봄날 고운 꽃으로 피어 났는데 그 용모가 특출한지라, 원근의 아름다운 꽃들이 달려와 문안을 올렸다. "저는 눈처럼 흰 모래알을 밟고, 거울같이 맑은 바다를 대하고, 봄비에 목욕하며 때를 씻고, 맑은 바람을 상쾌하게 맞으며 뜻대로 사는 장미라 합니다. 임금님의 아름다운 덕망을 듣고 꼭 향기로운 장막 안에서 베개를 같이할까 하오니 임금님께서는 저를 받아 주소서!" 이때 또 한 장부가 베옷을 허리띠에 졸라매고 흰머리에 지팡이를 짚고, 비틀거리며 말했다. "저는 길가에 살면서, 아래로는 아득한 들의 경치를 굽어보고, 위로는 우뚝 솟아 삐쭉삐쭉한 산의 경치를 바라보고 사는 할미꽃이라 합니다. 긴히 말씀드릴 것은 임금님의 좌우에서 온갖 물건을 비록 넉넉하게 마련하여 준다고 하더라도 제가 할 바는 이렇습니다. 좋은 음식으로써 배부르게 하고, 좋은 차와 술로써 정신을 깨끗이 하고, 좋은 약을 가득 간직하여 원기를 돌게 하고, 온갖 독소를 없애 버리겠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실과 삼이 있으나 그령풀을 버리지 아니하여, 덜어졌을 때 대용하는 대궤를 한다고 하는데 그렇게 하시겠는지요?" "두 꽃을 보았는데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리랴. 할미꽃의 말이 역시 도리가 있으나, 또한 아름다운 장미꽃은 얻기가 쉽지 않으니, 참으로 선택하기가 어렵도다." 임금의 말을 들은 할미꽃이 다시 말했다. "저는 화왕이 총명하시어 올바른 도리를 알리라 여겨 왔습니다. 대개 임금이 간사하고 요망한 사람을 가까이 하지 않으면, 바르고 곧은 사람을 얻게 됩니다." 화왕인 모란은 말했다. "나의 잘못이로다." 설총의《화왕계》는 당시 신문왕을 풍자하여 간하였다는 풍자로서 삼국사기의 설총열전에 실려 있다. 죽은 뒤에도 계속 숭앙되어 오다가 고려 현종 13년(서기 1022) 정월에는 홍유후(弘儒候)라는 시호를 추증받았으며 문묘(文廟)에 신라의 두 현인(賢人)이라 하여 최치원과 함께 모셔졌으며, 경주 서악서원(西嶽書院)에 제향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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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볼링, 독서, 음악감상 원문보기 글쓴이: hawk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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