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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레짓는여인 |
성호 이익의 여성관은 과연 어떠하였을까? 실학이란 당시 시대적 한계를 극복하고 백성의 실제적 삶에 도움을 주는 학문이기에 우리는 실학의 진보 가치로 평가하기도 한다. 이런 측면에서 실학자들의 인식과 행동은 오늘날 시각에서 보면 당대
사회의 진보적 인사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조선시대 남녀 차별이 확고히 존재하였던 사회에서 실학자들은 여성에 대해 기존의 양반사대부들이 가진 남녀차별의 한계를 극복할 것이라는 막연한 판단을 하게 된다.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성호 이익은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그의 문집인 성호사설을 분석한 결과 그런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성호는 남녀차별에 대한 확고한 인식을 하고 있었다. 앞서 이야기처럼 우리가 성호가 실학자이기에 근대적 사고를 하고 여성 문제에 대해 당시의 주자 성리학자들과 다른 열려 있는 사고를 하고 있었으리라 생각하면 그것은 어쩌면 오산이다. 어쩌면 오늘날 남녀평등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우리들의 눈에 보면 성호의 여성관은 당대 주류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가 너무 성호를 대한 진보적 인사로 규정하려고 하는 욕심에서 나온 것이지 모르겠다.
성호는 여성관의 한 사례를 보자. 그는 남녀가 한 공간에 같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世不同席)이 골수에 박힌 것이다. 남녀가 가까이 있어 점차 친숙해지면 서로 희롱하고 스스럼없는 사이에 정이 통하게 됨을 막을 수 없게 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성호는 곡례(曲禮)를 인용하며 “여자가 시집을 가고 나서는 큰일이 있지 않으면 친정에 가지 않는다.” 하였고 “이미 시집갔다가 돌아오면, 형제도 함께 앉지 않는다.” 라며 남성과 여성의 차별을 두었다. 하다못해
결혼한 누이까지도 오빠나 남동생
과도 함께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는 아마도 너무나 도덕적인 사고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고 본다. 그래서 그는 남자들과 가까이에서 스스럼없이 노는 기녀들에 대한 좋지 않은 인식을 하고 있었다.
성호의 여성관에 대해 또 다른 것은 바로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이혼하는 것에 대해서는 올바르지 않은 행동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성호 이익이 존경했던
정자(程子)가 이 점에 대한 생각이 확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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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하진묘역 |
자 한번 우리가 생각해보자! 가난한 부부가 있다. 남편이 가정을 책임질 수 없는 무능한 사람이다. 그래서 부인의 친정 부모가 아내를 이혼시키고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남자와
재혼을 시키려 한다. 이 이야기는 요즘 방송에서 나오는
사랑과 전쟁의 한 대목 같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인간세상에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언제든지 나오는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무능한 남편과 아내가 이혼하고 새로운 남자를 만나는 것이 옳은 일인가 그른 일인가?
요즘 현대사회에서 이 문제는 옳다 그르다를 이야기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런 일로 이혼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지사가 되어 버린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근대 사회에서 이러한 문제는 상당히 심각한 문제일 수 있다. 정자의 견해와
달리 성리학을 완성한 주자(朱子)는 뜻밖에 이 문제에 대하여 아내가 이혼하고 다른 남자와 결혼하는 것에 충분히 공감을 하고 있다. 다만, 그 아내가 다른 남자와 정분이 났는데 이를 경제적 어려움을 핑계를 대고 이혼하려고 하는 것이 아닌지 그 내막만 살펴보면 된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이익은 주자어류(주자어류)에 나오는 주자의 이야기가 분명히 오류가 있는 것 같다고 하였다. 믿지 않으려는 마음이 강했던 것이다.
그래서 성호는 정자(程子)의 “굶어 죽는 일은 극히 작고 절개를 잃는 일은 극히 크다.” 여성관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고 이를 강조하였다. 자연스럽게 그의 세 번째 여성관은 남편이 죽어도 절대 개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대목은 오늘날 우리를 실망시키기에 충분하다. 성호의 후대 실학자들 대부분이 청상과부의 개가를 적극적으로 허용하여야 한다고 하였는데 그는 이점에 대해서 타협이 없다.
그는 아무리 빈궁(貧窮)하고 외로운 청상과부라도 개가(改嫁)를 해서는 안 될 것인데, 하물며 남편이 살아 있는 아내가 집을 떠나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만일 스스로 생활을 영위할 수 없다는 이유로만 다른 남자를 구한다면 이는 돈 있는 남편만을 생각하고 저 자신의 명분은 돌아보지 않는 것이니, 이런 무리는 관청에서 엄중하게 처단하여 다시는 이런 간사한 행위가 싹트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러면서 경제적 문제로 여성이 이혼하는 것을 허용해주고 있는 현실에 대해 개탄을 하였다.
그의 여성관은 한마디로 군주와 신하의 관계처럼 지아비와 아내의 관계가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인식했다. 성호는 중국의 학자 왕촉(王?)의 이야기를 거론하며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않는다.” 하였는데, 이는 신하와 부인의 의리를 같은 것이라 본 것이다. 즉 신하가 임금이 올바르지 않아 조정을 떠나도 다른 임금을 섬기지 않는 것이 충신이듯, 여자는 지아비가 일찍 죽었다 하더라도 아내는 당연히 생존했을 때와 똑같이 살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성호가 왜 이러한 여성관을 가지게 되었을까? 다른 모든 부분에서 개혁적인 사고를 하고 있던 그가 왜 여성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이렇게 도덕적 잣대를 가지고 여성들에게 희생을 강요하였을까?
그것은 단연코 성호의 어머니 때문이었다. 성호의 어머니 안동권씨는 남편 이하진의 유배로 평안도 운산으로 함께 떠나야 했다. 운산에 가서 성호를
임신하고 그곳에서 나았다. 그리고 남편이 이하진이 2살 된 어린 성호를 둔 채 세상을 뜨는 바람에 졸지에 과부가 되고 말았다. 일찍 과부가 된 성호의 어머니는 배다른 자식들을 거느리면서 양반가의 아내로 올바른 행실과 아들 성호를 키우는 데 온 힘을 다하였다. 그래서 성호의 여인관의 모델은 바로 그의 어머니였다.
당시 양반가를 비롯하여 온 나라에서 남성과 여성들의 간통 문제가 빈번하였다. 그의 성호사설에도 남녀 간의 성적(性的) 문제에 대한 글이 ‘인사문(人事文)’에 자주 나오는 것이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성호는 남녀 간의 문제가 남자들의 색욕에도 존재하지만, 여성들의 음심(淫心) 또한 중요한 요소로 생각하였다. 성호는 여인들의 복식이 소매가 짧고
허리가 잘록한 것을 아주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 즉 신윤복의
그림에 나오는 여인의 그러한 복식을 아주 싫어하였다. 그런 복식이 남성으로 하여금 색욕을 일으켜 사회가 부도덕한 사회로 나갈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인들이 철저하게 몸을 가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여성들이 도덕적으로 완벽한 존재가 되고자 노력해야 하며, 이를 위해 아예 남녀가 같이 있어서도 안 되고, 가까운 친척 사이에 결혼해서도 안 되며, 여자가 재가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의 어머니가 그렇게 살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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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혜원 신윤복 '전모를 쓴 여인' |
그런 측면에서 과부의 존재가 평가 절하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당시 사회에서 과부의 아들을 사귀지 말라고 하였다. 이는 과부라는 존재에 대한 폄하 때문이다. 과부는 자신들의 색욕을 위해 다른 남자와 정을 통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행실을 잃은 여인이기에 그의 자식들 또한 올바른 이성과 학식을 가지지 않은 인간들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부의 아들이 올바른 행동을 한 이후에 그와 사귀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성호는 이에 대해서 절대적으로 옳은 말이 아니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본인이 과부의 아들이지만 올바르게
성장하였기 때문이다. 본인의 배다른 형이었던 이잠 역시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과부인 계모 밑에서 성장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부에 대한 편견을 깨고 사회 구성의 한 일원으로 인식할 수 있었다. 다만, 과부들이 정당한 평가를 받으려고 스스로 자신의 욕망을 자제하고 도덕적 행동을 하기를 바란 것이다.
성호의 집안은 대대로 새로 시집오는 신부에게 집안의 가장이 “효도와 공경은 가르치지 않아도 알아야 할 것이고, 내 말은 세 마디에 그치니, 근면하고 검소하고 남녀 사이에 분별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성호가 이를 따라했음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성호는 여기에 덧붙여 “근면하면 궁핍하지 않고 검소하면 절약할 것이며, 옛날에 자식을 가르치되 7세가 되면 비로소, “남녀가 자리를 같이하지 않는다.”고 했으니, 규문에서 엄격히 지킬 것은 이 세 가지에 지나지 않는다.“라며 자신의 며느리에게 이야기하였다.
조금은 아쉽지만, 성호는 여인들의
공부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성호의 말을 들어보자! “글을 읽고 의리를 강론하는 것은 남자가 할 일이요, 부녀자는 정서에 따라 조석으로 의복ㆍ
음식을 공양하는 일과 제사와 빈객을 받드는 절차가 있으니, 어느 사이에 서적을 읽을 수 있겠는가? 부녀자로서 고금의 역사를 통달하고 예의를 논설하는 자가 있으나 반드시 몸소 실천하지 못하고 폐단만 많은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성호의 이런 생각은 여인들이 똑똑한 것을 바라지 않는 것이 아니라 누에치고 길쌈하며 가정을 위해 일하는 것이 먼저라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그렇지만, 성호보다 35년 늦게 태어난 실학자 서명응이 손자 며느리 빙허각 이씨를 직접 가르친 일과 비교하면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결국, 성호의 여성관은 매우 도덕적이다. 그의 여성관이 시대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 당대 모든 사람들의 여성관이 그러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기득권층과 제도의 개혁을 통해 백성의 생산기반의
정비 등으로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것에 주력하였다. 그러면 백성의 지위와 경제력이 향상될 것이고, 이는 자연스럽게 고대 하은주 시대의 공동체 문화를 회복할 수 있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러면 여성들의 문제도 함께 해결될 것이라 밑은 것이다. 아니면 여성들의 근면함으로 가정을 지키게 하려 했는지 모른다. 이는 그만큼 남성들을 신뢰하지 못해서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