芙蓉契紀蹟碑
芙蓉契는 지난 數 百年間 太平한 時代에는 鄕村의 敎化와 地方行政의 發展에 크게 寄與하였으며 壬辰外亂과 丙子胡亂 等 國家의 危亂때 마다 義兵을 組織하여 危亂으로부터 나라를 求하고 節義를 지켰으며 近現代 그 後孫들에게 이어져 舊韓末 小白山 等地에서 義兵抗爭의 불길로 올랐으며 日帝 植民通治下에서는 獨立運動을 主導的으로 이끌었으며 解放 後 韓國戰爭의 廢墟에서 祖國 近代化에 앞장서 오는 等 先祖들의 선비 精神을 이어 오고 있다.
一九六九年 <崇禎 元年 丙子 八月 初六日 芙蓉契 五十五賢 題名錄>이 芙蓉契의 後孫家 古文書에서 發見된 後 一九七十年 陰曆 八月 六日 後孫 等 이 先賢들의 遺德을 追慕하고 後孫家의 親睦을 圖謀하기 위하여 續契하여 一九九六年 八月 六日 龜城公園 頂上에 雄壯한 <芙蓉契紀念碑>를 建立하고 盛大한 除幕式을 擧行한 후 每年 陰曆 八月 六日에 追慕 行事를 擧行해 오고 있다.
하지만 紀念碑가 風雨로 인한 磨耗와 毁損 等으로 保全이 어렵게 되어 이를 永久 保存하기 위하여 碑閣의 建立을 위해 數年間 刻苦의 努力을 기울인 바 二千十四年 榮州市 定住圈 事業으로 公園造成이 이루어질 때 이곳이 옛 芙蓉臺 터전임을 적극 考證하고 請願하여 公園이 芙蓉公園으로 命名되었고 紀念碑가 세워진 敷地가 山林廳 國有地로 山林廳으로부터 賃貸나 賣却이 불가함을 通報 받고 龜城公園 또한 文化財 發掘地域으로 指定되어 建築許可가 불가함으로 金宙榮 前 榮州市長의 積極的인 協助로 紀念碑를 옛 芙蓉臺가 자리잡고 있던 芙蓉公園 內로 移建하여 碑閣을 建立하게 되었다.
碑閣 建立을 위하여 芙蓉契 後孫代表者會議를 수차례 開催하고 自體 資金을 出捐하자는데 뜻을 모으고 各 門中當 壹百萬원씩을 出捐하였다. 또한 補助金 確保를 위해 芙蓉契 後孫들이 二千十五年 十一月 慶北道廳을 訪問하여 金寬容 道知事에게 協助를 求하는 等 努力을 傾注하여 道費 貳億원을 確保하고 張彧鉉 榮州市長의 觀心과 協助로 榮州市 豫算 貳億원을 追加 確保하여 總 四億원의 豫算이 確保되었다.
二千十六年 五月 四日 碑閣 上樑式을 奉行하고 같은 해 八月 六日 榮州市 榮州洞 山 二十-四番地에서 기념식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 由緖깊은 芙蓉臺에 芙蓉契紀念碑가 移建될 수 있었던 것은 芙蓉契 後孫들의 先祖들에 대한 恭敬과 德行 그리고 선비 精神을 繼承하고자 하는 精誠어린 誠力과 熱情이 한곳에 모아져 成就될 수 있었다. 특히 조승목 前 都有司, 이형호 前 總務有司, 박유서 ∙ 금춘 前 監事의 勞苦가 있었다.
二千十六年 十一月 六日
김태환 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