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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기는 목욕탕을 개조한 한 대안공간의 재개관 기념전으로 '때를 벗기다'라는 주제로 전시를 열었다. 거기에 출품한 작품으로 3개의 모니터에 문자와 영상이 번갈아 가면서 나타나 '오션타올'이라는 때수건을 이야기하고 있다. 실제 작가가 힘들이지 않고도 때가 벗겨지는 이 때밀이 타올에 매료되어, 주변사람들에게 막 수다스럽게 권하고 싶은 거다. 작가인 동시에 소비자인 나는 이 때밀이 타올에 대해 소비자의 자격으로서 특정업체와 이해관계 없이 수다를 떤다. 내가 직접 목이 아프게 떠들 필요없이 모니터가 대신 장점과 단점에 대해 수다를 떤다. 임남진의 작품들은 몽환적이고 서정적인 분위기를 짙게 풍긴다. 「섬-몽환」, 「섬-月亮代表我的心」같은 작품을 보면 예술작업의 고독과 사람 사이에서의 쓸쓸함이 너울거리는 파도에 뚝뚝 묻어나는 것만 같다. 그의 고독은 화구들을 풀어놓은 작업실 바닥의 바다에서 종이배를 띄워놓고 그 속에 웅크리고 앉은 작가의 모습에서 절정에 달한다.(「섬-cryingroom Ⅰ」) 물감튜브에는 색 이름 대신 '침묵', '은밀한 공포', '고독의 광기', '불안한 비밀' 등 내밀한 감정의 키워드들이 새겨져 있다. 진시영은 회화를 떠나 영상에 주목함으로써 움직임과 시간의 흐름, 변화의 과정을 포착하게 된다. 영상이 투사되는 프레임은 화면 속 영상의 움직임을 조각적 형태로 가시화하는데 관심을 두고 있다. 화면 속 영상의 움직임은 조각적 형태로 반영하고, 화면 속 파도는 굽이치는 프레임을 넘어 넘실거린다. 'Tide'를 넘어 'Wave'로 나아간 진시영의 바다는 대상과 전자매체의 구별, 자연과 재현된 가상의 간극을 넘어 양쪽 세계를 유연하게 넘나든다. 산업화된 영상의 시대에 그의 바다는 스스로 빛나는 바다이며, 어디서든 빛나는 영상으로 존재하고자 한다. 임선이 작품에선 작가만의 특이한 색깔을 느낄 수 있다. 화려하지도 세련되지도 않지만 익숙함과 편안함을 느끼는 바로 그녀를 닮은 듯하다. 자연을 택한 소재, 무색, 질리지 않는 반복성, 하지만 섬세함, 바로 그 모든 조건이 그녀의 작품에 묻어 있기 때문이다. 극도로 절제되고, 그녀의 내면 깊은 곳의 심리적 갈등을 순화하여 표출하고 있다. 섬처럼 혼자 망망대해에 떠있듯이, 정체성 찾기와 심리적 갈등이 간헐적으로 드러나고, 이러한 상황을 작품을 통해 타인과 소통하는 듯하다.
정선택의 사진작업은 미국 문화 속 정형성과 진부한 의식에 대한 유쾌하고 하이테크한 패러디이다. 단순하고 정교하게 제작된 영화 세트와도 같은 배경 속에서 작가는 스스로 주인공이 되어 고의적인 타인으로 분하며 그러한 변장을 통해 미국인들의 시선 속에 스테레오 타입화된 동양인이나 흑인, 남부 백인 등의 모습을 연출한다. 인위적으로 조작된 배경과 과장된 상황의 자기 연출을 통한 정체성 게임은 타인이나 타문화에 대한 모욕적 정형화에 익숙한 우리 모두에 대한 고발이다. 신성환은 비디오와 사진/평면으로 구성된 매체로서의 형식을 통해 초현실적이고 신화적인 내용으로 형식 안에 또 다른 자의적 해석이 가능한 중첩된 이미지를 그려낸다. 여기서 매체로서 중요한 역할로는 '기억'을 입증하는 일상의 행위를 메를로 퐁티의 '체현된(embodiment) 시각'으로 압축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김도희 착시는 진실이 아니지만, 지각의 한계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특유의 리얼리티를 지니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김도희의「미친 나무」와 「월광」은 이 지극히 기계적인 움직임들을 미친 듯 흔들리는 나무나 섬뜩하게 회전하는 보름달로 인식하는 우리의 경험을 낯설게 만들고 있다. 착시원리를 통해 시간성과 착시현상에 기만 당하는 지각의 한계를 드러냄으로써, 우리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스스로를 타자화시켜 경험 그 자체의 허구성을 드러내고 이에 맹렬하게 저항하도록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창훈의 최근에 진행하고 있는 사진연작 시리즈는 우리가 흔히 경험할 수 있는 주변의 거리풍경을 촬영한 후 타인과의 관계를 상징화하는 요소로써의 창문과 입구들을 지우는 것인데, 이 작업의 아이디어와 시작은 본인이 타지에서 경험한 소통의 문제나 작가로서 살아가며 느끼는 고립감에 대한 표현 욕구에서 출발하였으며 이는 사회가 더욱 도시화, 문명화 되면서 심화된 개인주의에 의한 각 인간 개체들 간의 단절과 소외의 문제들로 확대표현 된다.
이예린은 실제와 허구,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것과 믿을 수 없는 것 사이를 탐험하는 이미지를 창출한다. 그녀는 우리가 실제적으로 지각하고 있는 많은 이미지에 의문을 던짐으로, 한 번 더 표출한다. 어쩌면, 이예린은 17세기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의 중요한, 천재 악마의 가설을 효과적으로 소생시키는 듯하다. 천재 악마는 우리가 인식하거나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에 대해 반고의적으로 우리를 속일 수 있다. 이 악마 가설의 영향력은 이예린이 상상하는 것과 매우 비슷하다. 우리가 보고 믿는 것은 사실상 환상에 불과하다. 이인희는 자신의 흔적 테두리 안에서 사물의 틈새를 바라보는 남다른 시각을 갖고 있다. 실체의 의미가 상실되었거나, 혹은 생명의 흔적이 사라진 물고기비늘을 손수 닦고, 말리고 그것을 자신의 주변에 버려지거나 관심 밖으로 밀려난 사물(구두, 접시, 모자, 콜라병 등)등의 표피에 다시 이식하듯 붙이기도 하고 지점토로 만든 물고기 몸에 비늘을 붙여나간다. 그리고 반대편에 있는 다른 공간의 영상과 사진이 작은 창을 통해 현재 공간으로 흠수되면서 시공간의 경계를 무너뜨리기도 한다. 여기서 작가가 각기 다른 이미지를 전치하고 재생하는 '손질된 일상'을 통해 대상의 본질을 찾아가는 과정을 엿볼 수 있는데 그것은 인간의 욕구충족에 의해 활용되었다가 더 이상의 가치의 미를 상실한 대상을 원래 있던 자리로 되돌려 놓는 위문공연과 같은 행위이다. 최성훈의 작품 Apt를 처음 관람하는 관객들은 시각적인 현장감과 존재론적인 표현법에 즉시 매료될 것이다. 여러가지 크기의 LCD 모니터를 이용한 비디오 작업의 시리즈로 구성되었으며, 돋보기를 동원하여 감상하는 작품들은 아주 흥미로운 질문을 제시하고 있다. 그 중 탐구해야 할 첫번째 포인트는 Apt의 주제이다. 창문을 통해 보여지는,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아파트 건물의 밤 도시풍경 안에 펼쳐진다. 사람들은 서로 대화를 나누거나 책을 읽거나 혹은 TV를 보고 있다. 거주공간의 밤 풍경과 화려한 다색의 폭발들이 LCD모니터들과 그것의 바깥세상을 분리하는 스크린 상에서 형식적이고 개념적으로 결합하게 된다. 로와정의 작품에서는 주로 '관계', '사이'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 중 객체와 객체가 대면하고, 나아가 그들이 서로를 이해해나가는 과정에 주목하고 있다. 이 과정을 통해 어떠한 해답이나 특정한 결과를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 자체에 무게를 두고 작업을 하고 있다. 이는 '관계'에서의 완벽한 상호 이해에 대한 회의적인 입장을 얘기함과 동시에, 그 관계를 바라보며 섣부른 판단을 내리는 익숙하고 주관적인 시선의 오류를 비판하기 위해서다. 어떠한 '관계'나 '사이' 에서는 결론을 내리기 힘들거나 규명하기가 힘든 사건들이 끊임없이 이어지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모든 사건들이 일종의 패턴을 가지고 있다고 착각을 한다. 즉 '관계'나 '사이'에서 발생하는 미세한 흐름, 과정은 무시되어 그로 말미암아 그 진의의 파악이란 매우 힘들어 진다. 로와정은 작품을 통하여 이러한 일방적이고 폭력적인 익숙함을 의도적으로 방해하며, 그것에 대해 환기시키며 여러 가지 해석의 가능성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와 같이 관계 자체를 그 관계의 주변 상황이 다양한 해석을 만들어낼 수 있는 어떠한 지점에 가져다 놓는 것이다.
송성진은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의 양면성을 두 작품으로 드러내고자 한다. 상남 시장은 소비의 핵인 도심의 유흥가 및 아파트를 재현함으로서 우리의 삶을 돌아보도록 한다. 화려한 도시의 밤과 황량한 낮의 분위기를 재현하여 도시의 이중적 의미를 느끼도록 하며 과도한 광고기호로 둘러싸인 도시를 재현함으로써 실제는 사라지고 기호만이 떠도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이면을 드러내고 있다. 용호농장은 예전의 풍경이라 여겨지는 도시의 이미지이자 빽빽이 치솟은 아파트 군들 사이로 지금도 상존하며 마주치는 현실인 풍경이다. 그 속에는 과거의 기억의 풍경과 다양한 삶의 음영에 대한 풍부한 상상적 시선이 상존한다. 시간(조명)을 통한 밤과 낮의 교차는 관람자 개인만의 풍경으로 존재 할 것이다. 과거의 공간의 무차별의 해체는 결국 도시의 형태뿐만 아니라 기억의 형태와 인식의 형태까지 파괴해 가고 있다. 상남 시장과 용호농장의 풍경은 현재와 과거의 풍경을 대조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나 그것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를 재현하고 있는 풍경들이다. 이인미는 건축사진을 시작한 첫 번째 이유가 사진을 찍을 대상과는 한마디의 인사조차 하지 않아도 된다는 편안한 외로움 때문이라고 한다. 이인미는 사진과 마주할 그 누군가는 늘 지니던 가슴을 잠시 내려놓고 멍 하니 사진 속 조각난 한 순간을 바라 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그러다 움찔 멋쩍은 웃음 한번 짓고 다시 일상으로 되돌아 갈 수 있길 희망하는 것이다. 임영선은 아이들, 그리고 아이들의 주변에 펼쳐진 풍경은 분명 이방인의 눈에 비친 그것이다. 작가는 자신이 외부인의 시선으로 아이들을 본다는 것을 굳이 감추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쩌면 이방인이기에 작가는, 우리 관객들은, 이 풍경 속에서 오히려 매일 매일의 고단함이나 단조로움 사이로 열려서 빛을 내는 작은 틈새를 발견할 수 있고, 그 시선을 되돌려 받아 완성된 아이들의 풍경은 희망으로 채색될 수 있는지도 모른다. 맑은 눈으로 정면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이 단지 캄보디아나 몽골이나 중국 같은 특정한 나라의 이국적 풍경에만 머물지 않고 우리 삶의 모습으로 되살아나는 것은 서로를 거울처럼 비추는 이런 독특한 교차효과 때문이기도 한 것이다. 서로 다른 두 개의 현실이 만나면 그것들은 완전히 포개질 수가 없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 틈새에서 우리는 일상이나 현실 같은 이름 속에 완전히 용해될 수 없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설렘이나 빛남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안태영은 할머니께서 생전에 계실 땐 느끼지 못했던 추억들이 돌아가신 후 생생하게 혹은 어렴풋이 기억하게 하는데 그 중에 가장 잊혀 지지 않는 것이 어릴 적 할머니께서 여러 가지 색깔의 왕사탕을 새하얀 무명 손수건에 곱게 싸서 손자에게 가만히 펼쳐 보이시며 “먹어 보렴” 하시던 것이다. 그럴 때 마다 작가는 여러 개의 사탕들을 색깔 별로 하나씩 하나씩 오랜 시간에 걸쳐 입 속에서 녹여 먹었다. 본인은 그때의 추억을 고스란히 작품에 담아보고자 의도하였고 이를 형상화 하였다. 사탕 중 에서 몇 개는 많이 빨아먹고 몇 개는 먹다만 채로 침이 고인상태 그대로 놓아두었다가 한참 후 에 그걸 다시 입 속 가득 이리 저리 굴리던 그때의 달콤함을 그대로 작품에 담고자 하였다.
박상호는 우리가 "실재라고 인식하는 것"과 "실재"가 조화롭게 인식 되어 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제시한다. 하지만 그의 작업들은 착시를 목적으로 한 수단이 아니며 기술적으로 뛰어나게 마무리되고 표현력이 강한 미학적으로 질이 높은 예술작업이다. 이것은 전시된 수정 채색된 사진들과 설치작업뿐만 아니라 그의 영상작업과 조각 작업에도 유효하다. 이러한 다양한 표현양식에도 불구하고 그의 주제는 사라지지 않으며, 그의 작업은 언제나 "인식"과 "시점" 그리고 "공간감의 긴장" 속 에서 표현되며 특히 삼차원적 분석에서의 큰 효과를 목표로 한다. 박용선의 작업은 사물이나 현상에 대한 그의 단상들이며, 기록들이다. 그는 작품을 이루는 방식에 대해서 작품이 작가의 손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그 형식은 최소한의 관여로 구성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일상 속에서 발견된 사물이나 자연물, 혹은 현상들을 있는 그대로의 형태에 가깝게 제시하는 작업을 한다. 그의 말대로 그의 작업은 '창조'라기보다는 '발견'에 가깝다고 하겠다. 김상연의 작업은 일상에서 만나는 평범한 사물을 그림의 소재로 끌어 들인다. 일상 속에 늘 존재해온 사물이지만 그 사물이 객관화되고 단일화되어 하나의 의미체로 변형되어, 전혀 일상적이지 않으며 습관적이지 않게 나에게 다가온다. 이것은 실체 속에 상상을 불어넣는 일이다. 곧 하나의 객체인 사물에 나의 기운을 불어넣어 그림 속의 형상인 사물을 생동하게 한다. 하여 관람객에게 새롭게 바라봄을 제시한다. 일상적인 너무나 일상적인 사물이 새로운 충격으로 관람객 앞에 놓여 있는 것이다. 늘 바쁘게 살아가고 지루하게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일상 속에서 만나는 사물들을 새롭게 바라보게 한다는 것은 그 사물을 바라봄으로써, 살아있는 내 존재에 삶의 깊은 성찰의 기운을 불어넣는 일일 것이다. 정광희는 '아는 것 잊어버리기'를 관심의 대상으로 특히 이런 정보의 홍수 속에 살아가는 현대인이 지식을 병적으로 필요로 하는 현상을 보면서 무의식적인 내면을 존중하고자 한다. 인터넷의 빠른 보급과 광범위한 매스미디어의 정보 전달로 인한 전세계는 공간적 인식의 범위가 축소되었고 직. 간접적으로 서로의 다양한 삶의 형태를 이해하고 상호 소통의 원활함으로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그 정보의 양은 기하급수적인 증가를 나타내면서 여러 면에서 사람들은 그 정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지나친 의존도를 보이기도 하고 좋은 작용을 저해하는 것으로 쏟아지는 모르는 것에 허전함을 넘어 정보의 공해에 해당되는지도 모를 지경에 이르렀다. 뿐만 아니라 신종언어가 만들어지고 유행의 변화의 주기도 짧아만 감으로서 속도와의 전쟁을 치르기도 한다. 때론 그 정보 바다 위에는 인간의 필요에 의해 금방 제조되어진 정보와 그 정보를 밀쳐 없애려는 해법의 정보가 자리하기도 한다. 하나라도 더 집어 넣어야 하는 지식의 범람의 이 시대의 지식인이 확보해야 할 첨단병기를 장착해야 되는 것처럼 의무가 되어 버렸다. 이것이 무한 경쟁의 각축장인 것이다. 정광희는 예술은 경쟁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일 뿐이다. 김무준에게 건축은 신비로운 소문, 신화 같은 것이었다. 알바로 시자(Alvaro Siza)의 슬픔이여 안녕(Bonjour Tristesse)이란 작품에는 어떤 낙서화가가 알바로 시자 작품의 큰 특징인 창문주변을 빙 둘러가며 Bonjour Tristesse라고 썼는데, 마치 알바로 시자의 건축물을 통해 모든 슬픔이 사라지는 것 같다고 말하는 것 같다. 건축이란 그 존재만으로 위로가 되고 우리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 그 동안 국내의 건축가분들이 고군분투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아티스트로서 건축에 대한 입장을 표명하고 싶은 열정이 이제야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건축쇼에 전시된 작품들은 모두 실제 건축물에 속해있거나 해당 건축물의 가장 큰 특징이 되는 지붕, 단면, 창의 형태 등을 빌려와 아크릴에 도장칠을 하여 제작한 오브제들이다. 전 세계 건축가들이 고민하고 또 고민했을 작품의 얼굴들이다. ■ 아르코미술관
Vol.20091223a | 제1회 아르코지역네트워크-2009 작가-중심 네트워크: DECENTERED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