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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5.18 구속부상자회 光州市지부 원문보기 글쓴이: 푸른오월
광주양서협동조합
장두석(현 (사)한민족생활문화연구회 이사장)
황일봉(현 광주광역시 남구청장)
김현주(현 5.18구속부상자회 광주시지부 사무차장)
광주양서협동조합 태동
1970년대, 유신시대로 접어들면서 장두석 선생은 신협도지부 임원, 가톨릭농민회 간부로 활동하면서 긴급조치위반, 민청학련, 시국사건 등으로 감옥에 들어간 동지들에게 책을 넣어주는 운동과 더불어 농민운동을 전개했다. 그 과정에서 구금과 투옥의 길을 걷게 되었다.
77년경 장두석 선생은 협동교육연구원에서 김승호, 김형기 장상순을 만나게 되는데 국민의 의식을 깨우치기 위해 일종의 소비자 협동조합인 양서조합이라는 걸 생각하게 되었다.
또한, 그 시절 광화문 대포 집에서 박현채 선생, 전철환 선생과 술을 나누면서 유신독재 타도와 민주화, 통일운동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눈 뒤 서울 마포구 상수동에 있는 박현채 선생 집에 가 하룻밤 묵은 적이 있다. 당시 박 현채 선생은 청년학도들에게 좋은 책을 보급해 주는 역할의 중요성을 누차 강조했다.
장두석 선생 지론에 의하면 우리는 무지하기 때문에 불의를 당하고, 무지하기 때문에 병들고, 가난하고, 더 빨리 죽는다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이미 생이지지(生而知之)를 통해 인간사와 사물의 이치, 그 갈 길을 터득한 장두석 선생은 그 무지를 깨뜨릴 수 있는 도구가 바로 '양서(良書)'라는 것을 알고 평소 엄청난 양의 독서를 했다.
유신독재정권의 폭압이 극에 달했던 1978년, 장두석은 서경원(전 국회의원), 최성호와 함께 당시 농민회 교육국장 이었던 이강을 도피시키기 위해 한센촌으로 내려가던 도중 교통사고를 당해 중상을 입고 김명철 내과에 입원했다. 황일봉과 문병란 선생이 찾아간 것을 계기로 장두석은 황일봉에게 “원주, 서울, 대구 등과 협력해서 양서조합을 만들어보자”고 제안했다.
1978년 6월 27일 '교육지표' 사건이 터진 이후 삼봉조합 선생님들과 대학교수들도 중․고등학생, 대학생들에게 좋은 책을 읽혀 독서지도와 의식화에 중점을 두고 민주화운동의 뿌리를 튼튼히 해야 된다는 의견이 제시되고 있었다.
그 무렵 장두석 선생은 앞서 얘기한 신협·농민운동은 물론 또 하나의 단체에 가입, 열심히 활동하였다. 엠네스티(국제사면위원회) 운동을 하게 된 것이다. 긴급조치 위반자가 대추나무에 연 걸리듯이 줄을 서던 암울한 1970년대 후반에 그는 사회 인권운동 차원에서 엠네스티에 가입, 이른바 '재야운동'에 뛰어든 것이다. 이 활동은 5월 광주항쟁 때까지 이어져 장 선생은 다른 수많은 엠네스티 회원들과 함께 상무대 감옥으로 끌려간다. 물론 장 선생은 소위 불온서적 운운하는 책들을 만들고 대여해주었다는 죄목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
78년 3월경 양서조합은 장두석 선생 집에서 문을 열게 되었다.
장두석 선생 집이다보니 아는사람만 오게되는 한계가 있었고 장소도 협소하여 더 많은 불특정 다수들을 만나기 위해 다른 장소를 물색하던 중 YWCA 이애신 총무의 배려로 1층 휴게실에 책을 진열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었기에 78년 11월 아래와 같이 11명의 임직원 구성을 하게 되었다.
이 사 장 : 안진오 교수(당시 전남대 해직)
부이사장 : 이일행(법률사무소 재직)
이 사 : 정규완 신부
한모길 목사
문병란 시인
윤영규 선생 (당시 광주여상고 재직)
박석무 선생 (당시 대동고 재직)
박행삼 선생 (당시 대동고 재직)
이사 겸 집행위원장 : 장두석 (당시 신협 및 가톨릭농민회 임원)
감 사 : 이성학 장로(당시 기독교 인권위원회 위원장)
임추섭 (당시 중앙여고 교사)
총 무 : 황일봉
간 사 : 김현주
휴게실 한 공간에 마련하였기에 YWCA를 드나들던 많은 사람들이 양서를 접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나 산만한 분위기였다.
그래서 79년 4월 보증금 없이 임대료 240,000으로 2층에 독자적인 공간을 마련하였다.
당시 1인 식사대가 700~800원이고 국수가 300원 하던 때였으니 월세는 큰 액수였으리라. 그런데 당시 한 백반식당에서 식사를 무료로 제공해준 고마운 분도 있었다.
임원진은 아니었지만 이방기, 김정수, 송기숙 등 20명의 전남대 교수들, 권광식, 김제안 등 25명의 조선대 교수들, 윤광장, 정해직, 김준태 선생, 위인백(변호사 사무실 재직), 최병인(전남매일 기자) 등등 광주의 많은 재야인사들이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민주화를 일궈내기 위해 운영하는 사무실은 양서조합이 거의 유일했고, 그만큼 양서조합은 군사독재정권에 의해 초토화되다시피 했던 사회운동세력을 결집하고 재건하는 토대가 되었으며, 좋은 책을 읽혀 독서지도와 의식화에 중점을 두고 민주화운동의 뿌리를 튼튼히 할 수있는 건강한 민중의식을 일깨우는 본산이 되었다.
물심양면으로 많은 분들이 도움을 주셨다. 장두석 선생이 신협 및 가톨릭농민회 임원이였기에 시내 여러 신협의 임원들과 재야 어른들의 재정 뒷받침으로 커다란 힘이 되었다.
비품 즙기를 관광호텔에서 얻게 해준 황석영(작가), 심상우(전남매일 사장), 정구선(삼보증권 사장), 이성학 장로, 이일행(법률사무소), 박상구(삼양타이어), 대인시장 상인들, 조명제(신협도지부 회장), 전계량(계림신협 상무), 박남훈(북동신협 전무), 김춘동(북동신협 이사장), 김홍용(방립신협 상무), 서경자(남광신협 이사장), 정은수(광천신협 이사장), 김재균(흥민신협 이사), YWCA의 많은 임직원들이셨던 이애신 총무, 간사인 양경자(임채정 母), 고정희, 정유아, 이윤정, 이애라(당시 Y신협 상무), 양현숙 등등 많은 분들의 협력을 받았다.
독재정권의 눈엣가시 양서조합
양서조합은 유신말기 합법적인 공간이 극히 좁아진 70년대 후반의 억압적 상황에서 선진적인 활동공간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당시 광주YWCA 2층에 있었던 양서조합은 각종 시국강연회를 주최하고, 구속자를 위한 기도회도 열고, 대학생들이 모여 시국을 토론하는 그야말로 ‘민주화의 요람’이었다.
유신을 반대하는 것이 곧 죽음을 의미했던 시대에 여러 민주화세력을 모으면서 YWCA 소강당에서 시민을 대상으로 하는 시국강연회와 구속된 인사들을 위한 기도회를 개최하였다.
황일봉은 광주시내 구두닦이와 넝마주이를 교육시켰고, 시민의식을 일깨우는 좋은 책의 보급운동을 하는 양서협동조합을 펼친다는 것은 목숨을 건 투쟁과도 같은 것이었다.
YWCA 2층에 있었던 사무실에는 깨어있는 시민의식을 가진 고등학생, 대학생, 교사, 회사원, 노동자, 농민, 빈민 등이 몰려들었고, 1,400여명이 조합원(가입비 10,000원, 학생은 가입비 없었음)으로 가입해 활동하면서 유신독재철폐와 민주화를 위해 투쟁했다. 엠네스티와 기독교 인권위원회도 같은 공간을 쓰면서 민주주의와 인권의 개선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사무실에는 당시 정부당국이 정한 이른바 ‘금서’(판매금지도서)인 타오르는 이란, 유한계급론, 들어라 양키들아!, 민중교육론, 해방전후사의 인식 등이 즐비하였고, 외눈박이를 강요하는 독재정권에 맞서 많은 사람들을 비판적 지성으로 이끌어 내었다.
그 활동은 유신정권에는 눈엣가시와도 같은 존재였고, 때문에 양서조합운동이 순조로울리 만무했다. 문을 연 이후 한시도 감시와 탄압에서 자유로운 적이 없었지만 시민들에게 야만적인 군사독재가 지배하는 시국을 토론할 수 있도록 장을 열어주었고, 학생운동, 민주화운동세력, 노동조합, 농민운동 단체들의 회의장이 되었으며, 유신독재를 타도하는 견인차 역할을 다했다.
박철웅 측근들의 방해로 조선대가 학보신문을 발행하지 못하자 발행을 도와주었고, 김재규의 최후진술 등 수많은 유인물이 양서조합을 통해 배포돠었으며, 박석무선생의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출판기념회와 문병란선생의 저서 벼들의 속삭임, 호롱불의 역사 등을 군사독재정권의 탄압속에서도 발간, 배포하였다.
양서조합을 대표한 강연 중 노동자 농민 강연은 문병란 선생이 주로 많이 했고, 박현채 선생을 비롯하여 각계 저명한 분들이 강연을 했는데, 당시 교육청에서는 학교에 공문을 보내 학생들이 양서조합의 강연회에 가지 못하도록 지침을 내리기도 하였다. 우스개 소리로 강연이 있을때는 교사, 교수들은 일명 간수(학생을 지키는 간수라 칭함) 역할을 자청하기도 했다.
알아야 당당하게 살 수 있고, 알아야 건강하게 살 수 있고, 알아야 바른 길을 갈 수 있다는 장두석 선생의 신념이 조그마한 결실을 맺어 광주의 많은 젊은이들이 양서조합을 즐겨 찾게 되었다.
YWCA에 사무실이 있고부터는 대학생 및 고등학생들이 회원으로 가입하기 시작했다. 양협에 참여한 교사들은 각 고등학교에 독서회를 조직했다.
당시 대동고에 재직중인 박석무, 윤광장, 박행삼, 중앙여고 재직중인 임추섭, 송문재, 정규철, 광주여상 재직중인 윤영규, 전남고 재직중인 김준태 등 소속된 고등학교의 움직임이 활발했다.
독서회를 통해 학생들을 양협에서 대여한 양서를 읽고 독후감을 발표하는 활동을 함으로써 의식의 지평을 넓혀갔다.
대동고에서는 양서조합에 출입하던 학생들(김향득, 김효석, 박병인)이 학내에다 '독서회'라는 서클을 만들기도 했다. 사레지오, 중앙여고 등도 시도했으나 방학 동안만 잠깐 공부를 할 수 있었지 대동고처럼 활성화되지 못했다.
회원들은 또한 김상윤이 운영하는 ‘녹두서점’이나 윤한봉 등 민청세력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현대사회문제연구소‘도 이용했다.
이처럼 양서조합은 수많은 사람의 노력으로 성장해나갔으며, 의식 있는 각계각층의 사람들에게 민주화 운동을 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고, 단위별로 결집시켜 역량 있는 운동세력으로 만들어 배출하고자 했던 저수지 같은 곳이었다.
양서조합 활동에 남다른 도움을 준 박현채선생!
그때의 양서는 사회과학서적이 주종을 이루었으며, 대부분 판매가 금지되었다. 이런 책을 발간하는 대표적인 출판사들로서는 한길사, 광민사, 돌베개, 한마당, 청사, 일월서각 등등을 꼽을 수 있다.
이 때문에 책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이 어려움을 해결해준 사람이 바로 박현채 선생이었다. 박현채 선생은 각 출판사를 직접 방문하기도 하고, 연락해서 구하기 어려운 책들, 예를 들면 유한계급론, 알제리 혁명사, 한국노동문제의 구조, 들어라 양키들아 등 수많은 사회과학 서적들을 손쉽게 구해주었다.
한번은 ‘대화’지가 판매금지 되었을 때 이것을 구입하기를 원하자 박현채 선생이 직접 크리스챤 아카데미 부원장을 만나 담판을 짓고 창고 문을 열게 해서 50상자 분량의 책을 구해준 일화도 있다. 광주양서조합이 있게 한 숨은 공로자가 바로 박현채 선생이다. 박현채 선생은 그 뒤로도 광주양서조합이 성장하는 데 보이지 않는 곳에서 힘을 써주었다.
박현채 선생은 이렇게 물심양면으로 돕다 1979년에 감옥에 들어가 80년 초에 나왔는데, 그때 장두석 선생은 박현채 선생을 비롯한 임동규, 지정관 동지들의 옥바라지를 지극정성으로 했다. 동시에 당시 남민전사건이 일어나 조직성원들을 위해 변호사선임, 서명운동 등 구명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자신의 일이 아닌 힘들고 어려운 일도 자신의 일처럼 성심성의껏 해준 선생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시하는 것은 사람으로서 해야 할 최소한의 도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까리따스 수녀들은 정부가 압수하려는 ‘금서’들을 가톨릭센타내에 있는 서원에 많은 금서들을 감춰주어 조금씩 꺼내서 보급 해갔을 수 있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기증도 많이 받아냈고 녹두서점이 있어 일부 출판사는 녹두서점 소개로 책을 구입하기도 하면서 상호 유기적인 보완관계가 되기도 했다.
80년 새 학기가 시작되면서 학교 측에서는 독서회를 좋지 않게 보고 관련 학생들(매일 양협을 들렸던 학생들)을 징계하려 들었다. 여러 선생님들은 학교 측에서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독서회 같은 조직을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학생들이 스스로 좋은 책을 읽겠다는데 징계가 웬 말이냐고 선생님들이 그 문제를 반대하고 나서기도 했다.
장두석 선생은 실무책임자로서 조합운영의 중심에 서서 거침없이 일을 해 나가셨다. 당시 광주경찰서가 100m도 안 되는 지척에 있었지만 선생님이 어찌나 무서운지 당시 이형기형사, 나재봉 형사, 김용재 정보계장, 윤순동 정보과장 등 담당 형사들은 양서조합 사무실에 들어오지 못했고, 주변도로에서 계속 감시, 체크만 하고 있었다.
그 무렵 수원양협에 관여하신 고정석이 자주 들렸었다.
광주는 1980년 3월부터 신군부세력을 규탄하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집회 및 시위가 연일 계속되었다.
80.5.17~27 박현채 선생 강의를 마지막으로
80년 5월 17일, ‘한국경제의 오늘과 내일’이라는 박현채 선생의 강연이 있었다.
이날의 연사는 다름 아닌 박현채 교수였다. 강연은 YWCA 1층 대강당에서 열렸는데 입추의 여지없이 시민, 학생들로 꽉꽉 들어찼다. 당시 광주시민들의 민주화 열기를 반영하는 듯했다. 특히 고등학생들도 많이 모였는데 학교 측의 방해공작에도 굴하지 않고 모인 것을 보면 당시 고등학생들의 선진적인 의식도 엿볼 수 있다.
강연회를 무사히 마치고 자주 이용하는 식당으로 가서 뒤풀이 행사를 가졌다. 자정이 지날 무렵, 라디오에서 이상한 방송이 흘러나왔다. ‘전국에 비상계엄령 확대 실시’라는 내용이었다. 이 소식을 접한 박현채 교수는 대뜸 “낌새가 이상하다. 뭔가 일이 일어날 것이다. 앞으로 서로 연락하지 말고 뿔뿔이 흩어져 지내자”는 말과 함께 “문병란 선생을 잘 모시고 공부하라”고 황일봉에게 당부하면서 헤어졌다.
80.5.17일 자정을 기해 많은 운동권 젊은이들이 예비 검속되어 끌려갔다.
18일 일요일 아침, 광주시내는 계엄령철폐를 외치는 시위가 전대 앞에서 부터 시작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시위가 시내로 번져 나오자 배치되었던 군인들의 가혹한 행위가 있었으며 우리 양서협동조합은 도청과 가까운 거리인 한 중심부에 있었기에 그 잔혹한 장면들을 볼 수 있었다.
양서조합에 어른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어 앞으로 벌어질 상황에 대한 말들을 주고받았는데 갑자기 금남로에서 함성소리가 들려와 사무실에 계신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이 뛰어나갔다. 광주은행본점 사거리에서 시위가 벌어지고 있었다.
어르신들은 공수부대원들에게 대항할 막강한 조직이 없음을 못내 아쉬워했다. 갑작스런 사태를 맞아 이를 수습할 만한 조직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기껏해야 개별적인 움직임밖에 할 수 없는 상황을 안타까워하면서도 갑자기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었다.
5월 19일 월요일은 모든 직장이 정상출근을 했다. 오전 10시쯤 공수부대원이 YWCA 1층에 있는 신협 사무실로 들어가 용모가 학생처럼 보이는 박용준 군의 소지품을 검사했다. 박용준이 대학생이 아니라는 것을 파악한 후 공수부대원이 곧바로 2층으로 올라와 양서조합 총무로 있는 황일봉을 현관으로 끌어내어 긴 몽둥이로 내리치려고 했다. 그때 YWCA신협의 책임자인 김영철(정신착란으로 1989년 별세), 황일봉의 여동생 황수진 직원이 동료직원이라며 데려왔다.
황일봉을 때리려 할 때 옆 건물 무등고시 학원에서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는 청년들이 "야! 그러지 마라"고 야유를 보내자 공수부대원 몇 명이 무등고시 학원 맨 위층에 올라가 학생들에게 긴 몽둥이를 마구 휘둘렀다. 밖에 있던 40여 명의 공수부대원이 무등고시학원의 셔터문을 겨우 빠져나갈 수 있을 정도만 올려놓고 청년들을 기어 나오게 하더니만 몽둥이로 머리, 어깨, 허리 등 온몸을 사정없이 두들겨 팼다. 계속해서 군화발로 짓밟고 몽둥이로 무차별 난타하여 청년들은 거의 반죽음 상태였다. 이루 말할 수 없이 무자비했다. 우리들은 창문으로 내다보며 공수부대원의 만행에 치를 떨었다. YWCA신협의 박용준(1980.5.27 새벽 YWCA 건물에서 총격전으로 사망)이 "이 개만도 못한 놈들, 총만 있다면 모두 쏘아 죽여 버리겠다"고 소리쳤다. 우리 모두 같은 심정이었다. 공수부대원들은 청년들을 군용 트럭에 싣고 어디론가 끌고 갔다.
사무실에서 보던 어른들 몇 분과 YWCA 조아라회장, 이애신총무가 끌려간 젊은이들을 구하고자 항의도 했으나 안하무인였으며 이들에게 역부족이였다.
5․18민주화운동 전개과정에서 본 것처럼 상황이 악화되자 어른들이 주요장부(화원명부 및 장부)를 치우도록 해서 김현주 집으로 옮겼다.
양서조합 명단은 광주 모든 민주인사들의 명부라 할 수 있고 그것이 들통나면 광주의 민중인사들은 거덜날 판국이었기 때문이다.
격전지였던 도청과 YWCA!
양서협동조합 사무실은 YWCA 건물에 있고 도청과 지척 간에 있는 지리적인 위치로 항쟁 내내 시민대책위원회의 선전물(투사회보 등)을 만드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5.27일 계엄군에 의해 진압된 후, 당시 보안대에서 나온 이들이 장두석 선생의 집을 짓밟고 “빨갱이 장두석을 찾아내라”고 협박하며 을러대는 통에 사모님이 뇌진탕으로 쓰러지고 아들은 연행되는 아수라장이 연출되기도 하였다.
광주항쟁의 전모에 대해서는 이제 사람들이 웬만큼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 몸서리쳐졌던 때 보안대 지하실에서 시인 문병란 선생(조선대 교수)과 장두석 선생이 함께 대질신문을 받던 일화는 언제 들어도 감동적이다.
광주항쟁 중에 끌려간 사람들은 일단 화정동 소재의 보안대에서 갖은 고초를 당한 후 곧바로 상무대 감옥으로 이송되었다. 장두석 선생과 문병란 선생이 상무대로 넘겨지기 전, 보안대 지하실에서 나란히 대질신문을 받던 중의 이야기다.
"우리 선생님을 때리지 마시오. 내가 더 건강하고 몸도 좋으니, 앞으로는 차라리 나를 때리시오. 이 사람은 보다시피 선비 같은 사람이라 어디 때릴 곳도 없지 않소. 그러니 차라리 나를…."
수사관을 향하여 장 선생은 그렇게 빌고 빌었다. 그 덕분에 문병란 선생은 대질신문을 받을 때 계엄부대 수사관들의 몽둥이세례를 면했다고 한다. 반면 장두석 선생은 실로 모진 고초를 받았다.
예로부터 이야기되듯이, 감옥에 같이 가면 그 사람의 진면목을 알게 된다고 한다. 장두석 선생은 역시 평소 그 자태대로 품위를 잃지 않고, 오히려 항쟁동지들을 위로하고, 간수들(군인) 몰래 교육을 시키기도 했다. 하루도 아닌 몇 달의 긴 세월을 감옥살이에서 시달리면, 사람들이 의지가 약해져서 줏대 없이 이리저리 흔들리게 되고, 밥 한 숟갈이라도 더 먹으려고 서로 아등바등하게 마련인데, 장 선생은 그런 모습을 보면 준엄하게, 때론 따스한 마음으로 나무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언제 어디서나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살아왔기에 그의 오늘이 더욱 소중하고 빛나는 것인지 모른다.
김현주의 집은 더 큰 아수라장이 되었었다. 큰오빠 김상윤은 예비 검속되었고 제대한지 1달도 안되는 셋째오빠 김상집은 5월 항쟁 내내 주도적으로 녹두서점과 도청, 시내 곳곳에서 일을 했었기에 27일 새벽 도망갈 시간도 없이 녹두서점에서 큰올케 정현애, 올케여동생 정현순 등 3명이 연행되어 모두 4명이 연행된 상황이었다.
광주 상황은 아주 험악한 상태라 다른 곳에 부탁 보관하기도 힘들어 집에 있는 금서와 함께 옮긴 장부를 불태워버렸던 것이다.
5.27일 도청이 계엄군에 의해 진압된 뒤 김현주는 사무실이 궁금해 가볼려고 했으나 항쟁 주력지로서 통행이 허용되지 않았다. 연행당한 회원, 피신한 회원, 사망한 회원 등 회원 100% 전부 5.18관련자가 되어 있는 상황 이였다.
YWCA 2층에 있는 사무실이 온전할 리 없었다. 10여일이 지난 후 통행을 허용하여 그 곳에 갔었다.
핏자국을 제거하고 총알을 수거하기에 걸렸던 시간이였을까, 곳곳에 보이는 희미한 자국들, 사면에 총탄자국이 보였고 진열된 책에도 뻥 뚫린 총탄 자국이 곳곳에 보였으며 총알은 전부 수거되었던 것이다.
5월27일 새벽, 계엄군과 교전하며 신협 실무자 박용준 회원이 사망한 곳이기에 많은 책과 자료들이 계엄군들에게 빼앗겨 불살라지는 비극을 맞이하며 그 역사적 소명을 마치게 되었다.
김현주는 26일 녹두서점과는 많이 떨어진 산수동 집으로 들어갔었기에 또한 가족들이 4명이나 연행되어서 바로 연행은 되지 않았다.
다만 6월말, 양서협동조합 회원들 중 연행되지 않고 피신했던 어른들을 찾으려고 녹두서점 문을 열고 있던 김현주는 보안대에 끌려가 며칠동안 곤욕을 치뤘다.
그때는 가족들이 전부 연행된 상황이였기에 녹두서점 문을 열고 있었고 그 험악한 시절이었지만 간혹 사람들이 책을 사는 척 하면서 연락과 소식을 주고받았고 도청을 감수하고 눈치로서 전화연락을 받긴 했었다.
불행 중 다행일까 5․18 항쟁 중 무슨 일을 했는지 묻지 않고 피신한 어른들의 평소 언행과 행적만 물었기에 보안대에 있는 동안 모르쇠로 자술서를 쓸 수밖에 없었고 다행히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후 광주양서협동조합은 강제로 폐쇄되어버렸다. 막 꽃을 피우려고 멍울졌던 꾳나무 들이 5․18이라는 거대한 물결에 휩쓸려 뿌리 채 뽑혀져 버렸기에 다시 조직을 재건할 수 없었다. 양협은 임대료를 5월 한 달만 내지 않고 깨끗이 정리 되었다.
81년 5월 양협과 녹두서점 거래 잔금을 해결키 위해 장두석 선생과 김현주는 서울에 갔다. 녹두서점은 김상윤이 계속 복역 중이었고 경영도 어려워졌기 때문이었다. 여러 출판사를 다니면서 100%결제가 어려웠기에 20~30%선에서 정리를 마쳤다.
동유럽 사회주의권이 망하고, 함께 운동했던 많은 사람들이 절망하고 좌절하며 각기 제 갈길로 흩어졌던 지난 90년대에도, 살아난 자는 영령들에 대한 죄책감으로 개개인이 각자 자기 영역에서 민주회복을 위해서 열심히 투쟁하며 살아왔었다.
끝으로 양서협동조합에 몸담았던 사람으로서 많은 아쉬움이 남아있다.
하나, 광주YWCA가 유동으로 이전하며 이 역사적인 건물이 헐리고 새 건물이 들어서면서 항쟁의 유적지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둘, 5․18이라는 거대한 물결 앞에 광주시민 중 양협을 아는 사람은 극히 일부였기에 부산에서 의뢰가 있기까지 당시 상황을 기록해 놓지 못했고, 장부도 없애버려 세세한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셋, 그 후에라도 재정비 조직해 지금까지 지속할 필요가 있었다는 점이다. 참여정부가 들어서면서 민주화가 어느 정도 안착되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 깡그리 무너지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 과거 우리들의 노력이 물거품 되어 한없이 통분함을 느낀다.
끝으로 참혹함을 겪은 5·18 당시 광주 대동고 학생이였고 양서회원이었던 3명의 ‘화려한 휴가’ 관람 후 회고담을 덧붙입니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울컥하더니 상영 내내 눈물이 쏟아지더라구. 난 원래 악몽 때문에 5·18 관련 영화나 드라마는 안 봤는데 27년이 지나도 소용이 없다는 걸 알았어.”(김효석)
“난 시위대에 섞여 있던 이준기가 죽는 장면에서 영진이 생각나더라.”(정대철)
“영화 내용이 다 우리 이야기야. 아니 광주시민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이야기지.”(김향득)
한국현대사에 깊은 상흔을 남긴 1980년 5월 광주민주화항쟁. 당시 광주 대동고 3학년에 재학 중이던 배꼽친구 셋이 8월 8일(2007년) 한 자리에 모였다. 광주SUN 대표 김효석씨(45)와 오월의빛(광주민주화항쟁을 소개하는 단체) 이사 김향득씨(44), 교육공무원 정대철씨(45)다.
이날 광주 무등극장에서 광주민주화항쟁을 정면으로 다룬 영화 ‘화려한 휴가’를 관람하고 극장문을 나서는 이들의 눈은 붉게 충혈돼 있다. 누구보다 1980년 5월을 처절하게 경험한 이들이기 때문이다.
특히 김효석씨와 김향득씨는 광주항쟁 당시 고등학생의 몸으로 5월 27일 도청과 YWCA에서 시민군이 최후를 맞을 때 그곳에 있던 인물이다. 두 사람은 이날 함께 체포돼 상무대 헌병 영창에 구속됐으며 특히 김효석씨는 학교까지 그만둬야 했다. 이후 다른 시국사건으로 수배생활을 한 김효석씨를 숨겨준 인물이 2학년 때 같은 반 친구인 정대철씨다. 세 사람은 영화를 관람한 후 충장로의 한 주점에서 소줏잔을 기울이며 27년 전을 회고했다. 학창시절은 그들에게 배꼽잡고 웃을 수 있는 추억 대신 가슴 먹먹한 통증을 남겼다. 처연한 이야기꽃을 피우는 동안 어느 새 사위는 어두워졌다.
김효석: 원래 우리 대동고 애들이 반골의식이 강했잖아. 1979년부터 우리가 주도해 보충수업비 반환 및 두발자유화 시위를 했으니까.
김향득: 난 그때 행동발달사항이 모두 ‘다’였어. 2학년 때부터 저항의 몸짓으로 보충수업비 안 내고 머리 길게 기르고 다녔으니까.
김효석: 우리 대동고 학생들이 의식화가 빨리 된 데는 1979년 고2 문과반 영어를 가르친 박석무(현 단국대 이사장) 선생님의 영향이 컸어. 선생님은 수업시간에 영어를 가르치기보다 정세나 유신독재의 부정부패와 같은 사회부조리에 대해 알려주셨으니까. 비밀리에 영자 시사주간지 ‘타임(TIME)’반도 만들어 정권이 잘라버린 객관적 보도를 읽게 하셨지. 당시 사춘기로 정의감에 불타 있던 우리들은 선생님의 말씀을 스폰지처럼 흡수했고….
정대철: 오늘 영화 보니까 촬영은 광주일고를 배경으로 한 것 같은데 이야기는 딱 대동고더라. 그때를 생각하면 참… 난 너희도 알다시피 집이 광산이어서 버스를 갈아타고 등교를 하려는데 벌써 시내 곳곳에 공수부대가 배치돼 있었어. 버스가 신호대기에 걸려 멈췄을 때 창밖을 내다보다 대검 꽂은 총을 든 공수부대원 한 명과 눈이 마주쳤지 뭐야. 그 눈매가 몹시 섬뜩했어. 겨우 학교에 도착하니 무기한 휴교령이 내려졌더군. 그 길로 돌아와 광산에 있다가 21일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어 마을 형님과 걸어서 광주 아세아극장까지 갔지.
김향득: 12㎞나 되는 거리를 걸어 왔다구?
정대철: 응. 하지만 형님과 도청 쪽을 향해 발걸음을 떼자마자 ‘탕’ 하는 총소리가 들렸어. 더럭 겁이 나 그 길로 집까지 뛰다시피하며 걸어간 것 같아. 3시간 걸릴 거리인데 2시간 만에 도착했으니까. 그러니까 난 1980년 5월 항쟁 때 별로 기여한 게 없어.
김효석: 네가 왜 한 일이 없어? 너 많이 힘들어했잖아. 그런데 아까 대철이도 말했지만, 영화에서 5월 21일에 도청 앞에서 이준기가 죽는 상황은 영진이(전영진) 사망 상황과 같아. 영진이는 도청 바로 옆 노동청 앞에서 얼굴에 총 맞아 죽었잖아. 당시 난 발포현장에서 몇십 m 안 떨어진 가톨릭센터 앞에 있었어. 기둥 뒤에 몸을 숨겼는데 총알들이 기둥을 스치더라고. 그리고 영화에서 마지막 장면은 5월 항쟁 지도부 대변인이었던 상원이 형(윤상원)과 기순이 누나(박기순)의 1982년 영혼결혼식을 그린 거더라.
김향득: 맞아. 영화에서는 복합적으로 인물들을 대입시킨 거 같아. 지금 인터넷에서는 영화의 실존인물이 누구냐는 공방이 있던데 우린 다 알잖아. 영화에서 미국 함대가 부산항에 도착했다며 시민군들이 좋아하니까 안성기가 그러잖아. 미국은 절대 돕지 않을 것이라고. 그것도 상원 선배가 한 말이었어. 영화에 나오는 김상경과 안성기 캐릭터는 상원 선배를 모델로 한 것 같아.
김효석: 그런데 이준기가 애들 몰고 학교 문을 막 나서려고 할 때 선생님이 뺨을 때리며 만류한 장면 있잖아? 실제는 당시 교무과장 선생님이 우리 앞에 드러누워 “나를 밟고 가라”고 하셨지. 그런데 영화에서는 그 선생님이 나중엔 아이들 얼굴에 치약을 발라주며 함께 시위대에 합류하고 학생을 살리기 위해 자기 몸을 던지는 것으로 묘사되더군. 하지만 그런 선생님은 없었어. 마지막 날까지 도청과 YWCA에 남은 시민군 중 교수나 교사와 같은 소위 지식인은 단 한 명도 없었지. 물론 데모할 때 치약을 이용한 것도 우리가 대학 들어가고 난 후의 얘기야.
정대철: 너랑 향득이는 그날 거기에 있었잖아?
김효석: 27일에 난 YWCA 현관에 카빈소총 두 자루를 들고 서 있었어. 교련을 배운데다 예비역 중대장 출신이 총 쏘는 법을 가르치고 자리 배치까지 했잖아.
김향득: 난 식당에 배치됐어.
김효석: 27일 어디선가 총소리와 탱크 구르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다시 조용해지는 거야. 상황 파악을 위해 옥상에 오르다 2~3층 사이 계단에서 창밖 무등산을 바라보며 앉아 있는 용준이형(박용준)과 마주쳤어. 그때 형이 그러더군. “효석아. 내일 또 이 아침을 맞을 수 있을까?” 어쨌든 옥상에 올라가 보니 대학생 하나가 탱크를 향해 총을 쏘고 있었어. 상황 파악이 된 난 얼른 1층 현관으로 내려갔는데 느닷없이 3명의 그림자가 우체통 뒤로 몸을 숨기는 거야. 그때 그쪽에서 “이런 개새끼” 하는 소리와 함께 총성이 울렸어. 내가 급히 2층으로 올라가 양서조합의 문을 열었는데 순간 ‘펑’ 하며 폭탄이 터지더군. 우리에게 총 쏘는 법을 가르쳐준 예비역 중대장 출신이 그 자리에서 사망했고 여기저기서 총탄이 정신없이 쏟아졌어.
김향득: 그때 밖에서는 “폭도 여러분, 무기를 버리고 나오면 살려주겠다”는 소리가 울렸잖아. 얼마 후에 살아남은 사람은 모두 끌려갔고.
김효석: 난 살인 혐의로 수사를 받았어. 그날 우체통 뒤에 있던 공수부대원 가운데 중사 한 명이 당시 2층에 있던 예비역 중대장 출신이 쏜 총탄에 맞아 사망한 거야. 경찰은 이 사건을 마무리해야 해니까 나를 가해자로 몰고 갔지. 조서를 보니 내가 현관에서 그에게 총을 쏜 걸로 돼 있더라고. 손을 뒤로 묶고 비명을 막기 위해 걸레를 입에 물게 한 뒤 두들겨 팼지만 난 끝까지 버텼어. 결국 ‘총을 들고 있었지만 쏘았는지 안 쏘았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 것으로 마무리됐어. 근데 우리 그때 참 많이 두들겨 맞았어. 고문도 지능적으로 당했고.
김향득: 그래도 넌 손가락 고문 안 당했잖아. 난 볼펜 한 자루를 다섯 손가락 사이에 가로로 어긋나게 끼운 채 형사들이 발로 무지막지하게 밟았어.
김효석: 맞아. 근데 그때 너의 모습을 회상하면 난 지금도 웃음이 나와. 형사 한 사람이 27일 잡혀온 시민군들을 쭉 불러놓은 상태에서 너한테 “볼펜, 이리 나와!” 했잖아. 그 즉시 넌 앞으로 나서며 “네! 볼펜 김향득입니다” 했고. 형사가 “노래 잘하냐”니까 니가 “아주 잘합니다” 하더니, 니가 애국가를 아주 우렁차게 불러댔잖아. 그것도 1절부터 4절까지. 그때 형사들도 웃고 잔뜩 구타당한 상태에서 떨고 있던 우리들도 고개를 푹 숙인 채 키득거렸어. 돌이켜 보면 서글픈 일인데… 자식. 그러고 보면 향득이 넌 고등학교 때 별명이 ‘엉뚱이’였잖아.
정대철: 평소 엉뚱한 질문을 많이 하고, 비 오면 학교에 전화해서 “선생님 날씨가 너무 좋아 학교 안 갑니다” 했다며?
김향득: 그랬지.(웃음)
김효석: 난 당시 이쑤시개로 고문당했다.
정대철: 이쑤시개로? 어떻게?
김효석: 하도 맞아 얼굴이고 몸이고 퉁퉁 부은 상태에서 더 때리면 피부가 터질 것 같으니까 형사가 이쑤시개로 부은 피부를 콕콕 찌르더라고. 차라리 맞는 게 더 낫더라. 근데 그때 부산사람이던 이름 모를 수사관이 난 지금도 고마워. 원래 살인범으로 몰려 현장검증을 가야 하는데 그해 광주에 비가 억수로 쏟아졌잖아. 사흘 내리 폭우가 쏟아져 현장검증을 못 나갔는데 일주일 후 호명해 나갔더니 그 사이 수사관이 바뀌었더라고. 부산사람인 그 수사관이 첨엔 날 살살 달래더니 나중에 “그래 고등학생인 네가 무슨 살인을 했겠냐”면서 조서에 총을 쏘았는지 안 쏘았는지 기억이 안 나는 것으로 마무리해 지장을 찍게 했던 거야.
김향득: 난 너한테 항상 미안해. 같이 했는데 넌 삼청교육대에다 학교까지 못 나가고. 난 7월 3일 석방됐고 12일 학교에 돌아갔는데 분위기가 이상했어. 아무도 나한테 말을 붙이지 않았거든. 또 나와 말을 한 아이는 바로 교무실로 불려갔어. 참 답답하더라.
정대철: 선생님들이야 위에서 어떤 지시를 받아서 그랬을 거야. 하지만 아이들은 아마도 같이 싸우지 못한 죄책감, 미안함 때문에 그런 거야. 대학입시 준비도 해야 했고.
김효석: 그래도 친구들밖에 없더라. 너네 기억나? 난 학교에 못 나가 검정고시를 준비하면서 종종 너네 만나 하야비치(소주의 일본말)와 캡틴큐 마셨던 거. 너넨 교복, 난 사복 입은 채로 술 마시고 엉엉 울곤 했잖아. 그리고 졸업식은 내 생애 정말 감동적이었어. 졸업식을 앞두고 김희갑(현 총리실 정무수석)이 나더러 졸업식에 오라고 하더라고. 친구들이 기다린다고. 갔더니 식이 끝난 후 3학년 2반 교실에서 담임선생님이 “네가 여기 뭣 하러 왔냐”고 하더군. 그때 희갑이가 교단에 서서 한 말이 잊혀지지 않아. 희갑이는 “우리 친구 효석이가 오늘 비록 졸업장을 받지는 못했지만 우리가 효석이에게 졸업장을 주는 심정으로 효석이의 이야기를 들어보자”고 했어. 눈물이 나더라. 그날 희갑이를 비롯한 반 친구들은 제일극장 골목 소줏집에서 내 졸업파티를 열어줬지.
김향득: 그래. 우리는 한 마음이었어.
정대철: 우린 영원한 친구지.
김효석: 그런데 난 가끔 생각해. 1980년 5월이 없었다면 내 인생이 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고. 그 후 내 삶은 끊임없이 뭔가를 돌파하고 만들어내야 하는 형태였고 그렇게 20여 년이 훌쩍 지났어. 성공한 삶을 사는 친구들을 볼 때마다 난 주변부 삶을 살아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1980년이 없었으면 난 어쩌면 예술가가 됐을지 몰라.
첫댓글 썩어 없어진 줄로만 알았던 밀알들이 면면히 싹을 틔우고, 그 밀알들의 고난의 세월이 되풀이 되고 있는 이 현실을 어찌 하오리까? 헤매이다 겨우 길을 찾아 발검음이 가벼워 지려는데 또다른 복병이 도사리고 음흉한 웃음을 흘리고 있을 줄이야..ㅠㅠ 끝까지 살아남아 처절했던 역사의 현장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후손들에게 제대로 물려줘야 하겠다는 다짐을 해봅니다. 저도 제가 아는 만큼 겪었던 진실들을 기록 하겠습니다. 님, 눈물겹도록 고맙습니다.
지나님도 그시절의 소회를 한번 올려주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