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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보다 진실한 해결 철학자 도올 김용옥
나는 지금 한의과대학생이다. 대학생이라면 모름지기 공부를 하여야 한다. 그런데 나는 공부를 할 수가 없다. 왜냐? 11개나 되는 한의과대학이 모두 들끓고 있기 때문이다. 교수, 학생 할것없이 모두 격분속에 호곡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사회에선 아무도 이 사정을 알아주지 않는다. 그래서 더더욱 벙어리 냉가슴! 하늘을 치고 땅을 치고, 소돔의 멸망을 예언하는 자들의 울부짖음같다.
"요즈음 살맛 나."
"왜?"
"엊그제까지도 테레비에 대통령 얼굴만 나오면 죽일놈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최소한 그런 감정은 없어. 대통령 욕 안 해도 매일매일 살 수 있다는게 참 이상해.' 한국역사의 억압의 도를 측정하는데 가장 정확한 바로메타가 된다 할 전라도에서 살고 있는 내가 주변에서 정직하게 들을 수 있는 이야기들이다. 한국사회도 이쯤 되었으면 어찌되었든 합리화의 길로, 좋은 길로 가고 있는 것이다. 잘하는 것은 잘한다고 해줘야지 인색할 필요있나? 신한국 파이팅!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런 합리화의 와중속에서 유독 내가 속해있는 한의학계는 불합리의 미궁으로 빠져만 들어가고 있는 것같다. 구한국의 재앙을 한몸에 껴안은 듯, 쯧쯧쯧.
뭐가 문제냐? 아주 쉽게 생각해보자! 국민여러분들은 누구든지 동네 방방곡곡에 약국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잘 알 것이다. 약국에는 흰 까운을 입은 약사가 있다. 그들로부터 여러분들은 박카스나 아스피린이나 무슨 마이신을 살 것이다. 그런데, 그런데, 그 약국에가서 약학대학을 나오신 어여쁜 아가씨에게, 옛날 뇌리끼리한 온돌장판위에 놓여있던 판도라상자같은 것이 수십개 꽂혀있는 약장에서 곰방대 구수한 할아버지가 지어주시던 창호지첩약을 지어받는다? 뭐가 이상해! 모든게 다 현대화되는 판에. 농촌에서도 컴퓨터때리고 있다고. 문제는 이 서양의 약리를 배우신 약사님들께서 '한약제조'가 약사의 고유권한임을 포고하고 전면전을 선포한 것이다. 그것도 단순한 한약의 판매가 아닌, 처방, 조제, 판매, 그리고 약재의 유통업부까지 한약에 관한 모든 것이 서양약사들의 고유권한임을 전면적으로 주장하고 나온 것이다. 6공말기의 권력누수현사이었다. 안필준보사부장관은 퇴임 이틀전 강력한 약사님들의 등살에 못이겨 도장을 찍어버리고 말았다. '약국에서 재래식 한약장외의 약장을 두어 이를 깨끗이 관리하여야 한다'라는 약사법 제11조 1항 7호를 삭제시키는 시행규칙이 3월 5일 관보에 공고되었고 그것은 4월 5일부로 집행에 들어간다. 4월 5일 이전 저지를 위해 나의 전국 2천여 학우들은 총파업에 들어갔다.
한의사들은 지금 약사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페니실린을 달라든가 주사기를 달라든가 마약을 달라든가, 아무것도 요구한 것이 없다. 그런데 약사님들은 한의사의 모든 것을 앗아 갈려고 한다. 한의학이 정규대학의 체제속에 6년제 메디칼스쿨로서 자리잡고 있는 것은 전세계를 통틀어 우리나라 하나뿐이다. 이것은 매우 자랑스러운 일이다.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통해 한의학을 아예 없애버렸다. 그리고 서의의 동호인모임으로 만들어 버렸다. 중국의 경우도 한의학이 대단히 흥성하는 듯이 보이지만 그것은 사회주의 의료복지정책의 보편적 조달을 위한 수단으로 의타적으로 급조된 것이며 교육기관도 '중의학원'이라하여 독립되어있을 뿐이다. 우리가 애써 이룩해온 독자적 장점을 살려나가도 모자라는 판에 죽이려 한다. 국가가 면허를 준 8천여명의 한의사가 엄존하고 4천여명의 한의과대학생이 모두 드높은 카트라인을 통과한 이땅의 수재들이다. 이들은 갑자기 닭 쫓던 개 되어버렸다. 멍하니 하늘을 쳐다본다. 푸른하늘 마저 검게 물들어 버리고있는 것이다.
'한방은 경험방일 뿐이며 그때 그때의 환자의 체질과 상태에 따라 증감이 있을 뿐이다. 학이라는 문자가 있다고 해서 모두 학문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한의학은 수학적으로 입증될 수 없어 학문으로 인정될 수 없다. 한의사들은 약사가 한방에 관한 모든 지식을 갖추어야 한다고 하지만 한약취급의 상당수는 민간요법에서 볼 수 있는 것이며 한약의 방제에 학문적 특수기술을 요하는 것이 없다. 약사야말로 한약을 개선하여 소위 한약의 과학화의 기수가 될 수 있다.' 이것이 헌법재판소에 제출한 대한약사회의 공식주장이다.
'우리약사들은 한의사들이 우리가 한약을 다루는 것이 범법인냥 시민들을 오도시키는 불법행위에 비분강개한다. 전통의학이라는 미명아래 한약의 과학적 발전을 저해하는 그들의 아집과 전근대적 행위를 규탄한다. 대한약사회는 질병을 치료하는 한약을 전문직능인인 약사들로부터 탈취하고자하는 한의사들의 음해에 적극 대처해야 한다.' 이것은 지난 3월 15일에 나온 서울특별시약사회의 결의문이다. 적반하장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아무리 언어가 무기력한 시대라하지만 좀 너무하지 않는가?
뭐가 정말 문제인가? 한의사나 약사나 말할때는 '국민보건의료' 운운하지만 사실 이것은 쌩거짓말이다. 현대자본주의사회의 집단행동의 궁극적 모티브는 결국 권력투쟁일 뿐이요 쉬운말로 이권싸움일 뿐이다. 그런데 철학을 하는 내가, 그리고 속말로 이미 기득권자라면 기득권자인 내가 어느 한편의 이권을 대변하고자하는 생각은 추호도 있을 수 없다.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진리며 정도며 정직이다. 그리고 우리가 만들어가고자 하는 역사의 바른 논리며 사회의 바른 모습이다. 약사법개정이라는 이러한 상황은 우리사회가 왕정에서 민주로 변용하는 과정에서 국가권력체제속에 들어 있지 않았던 제반 사회적 행위들이 체제를 빌리지 않고서는 힘을 발휘할 수 없는 사태로 진입하게 됨에 따라 그 유리한 체제 속의 고지를 점령하려는 관계 그룹간의 치열한 전쟁의 한 패턴이며 이것은 한의학의 사회적 진화가 매우 후진한 현실과 관련이 깊다. 허나 한의학도들의 입장에선 남들이 다 멸시해온 전통을 버겹게 지켜 여기까지라도 끌고왔는데, 이제 피어날만하니깐 그 열매를 여기저기서 따잡수시려는 얌체족속들에 대한 서운함 밖에는 남는게 없다. 되는 푸줏깐에 쇠파리 꼬여드는 것이다. 허나 한의사들의 가장 큰 실수는 한의사와는 별도로 존립해오던 전통적 약종상(한약업사)의 제도를 종료시켰다는데 있다. 그들만 살려놓았어도(소위 건재약방들) 오늘같이 약사들에게 당하지는 않는다. 줄 것을 주면서 자기것을 지켰어야 하는데 자기관계의 것은 모두 독식하기만 하려는 우를 범한 비젼없는 한의학계의 정책에도 그 원인이 있는 것이다. 어찌 치과의사들이 치기공사제도를 없애버리는 어리석은 짓을 하겠는가?
나는 참으로 한의학을 사랑하고 이해하며 배우고, 한약을 통해 국민건강에 이바지하고 싶어하는 많은 훌륭한 약사친구들을 알고 있다. 이들의 갈망을 제도적으로 충족시키는 길은 없을까? 물론 약학대학에서 본초 필수 2학점 한과목 땄다는 것을 근거로 한의과대학 6년과정의 결실과 권위를 송두리채 강탈하려하는 약사법개정이 그 바른길이 될 수는 없다. 나 도올을 쳐다 보아라! 인간에게 침한번 놓는 과학적-기철학적 실험을 해보고 싶어서 이 기나긴 6년이란 세월의 하숙방생활을 감내하며 하루하루 눈물겹게 살고 있는 이 노학생의 모습을 보아라! 그래도 우리가 만들고자 하는 사회는 최소한의 양식이 지켜지는 정도는 있어야하지 않을까?
해결은 간단하다! 의과대학에 약학대학이 있듯이, 한의과대학에 한약학대학이 신설되어야 한다. 이러한 나의 생각이 한의사들에게 모두 동의되는 것은 아니지만, 한약학대학을 현 약학대학이 주도하여 설립한다해도 그것을 반대할 명분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현재 존립하는 4년제 한약재료학과에 일정자격을 부여해주어 한약학대학으로 발전시켜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한약사중에서 한약업에 종사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한약학대학에 편입하거나 특수대학원코스(2년제 이상)를 만들어 한약을 다룰 수 있는 당당한 코스를 열어주어야 한다.
한의사들도 전문의제도의 도입운운하는 한심한 발상(한의학이 이비인후과, 산부인과, 침구과등 등의 전문의제도로 찢겨버리는 발상은 한의학의 총체적 본질을 왜곡하는 것이며 그렇다면 약진분리를 주장하는 약사들의 논리에 대응할 하등의 근거도 있을 수 없다)에서 헤어나, 이권에 눈이 멀어있는 약사들과 대적치말고, 한의학 그자체의 발전이라는 보편적 이상을 위해 누구와도 협렵해가면서 자기의 권익을 수호하는 원대하고 일관된 비젼을 확립해야 할 것이다. 허나 이번의 변칙적 약사법개정 시행규칙안은 철회되어야 마땅하다는 것은 일반 국민들은 물론 약업에 종사하시는 훌륭하신 분들의 상식에 속하는 일일 것이다. 약사법개정 시행규칙은 철회되어야 한다.
이 글은 12매로 축약되어 뒤늦게야 1993년 4월 11일'일요일' 제5면에 특별기고로 '한국일보'에 실렸다. 이것은 약사법개정문제에 관한 최초의 신문논설이다. 마지막 부문 '현약사중에서 한약업에 종사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한약학대학에 편입하거나'의 '현약사중에서'가 '한약사중에서'로 '한국일보'에 오기되었음을 밝힌다.
나는 정우열선생님의 병리학강의가 끝나기 전에 선생님이 계신 자리에서 학우들을 향해 또박또박 한줄한줄 이 글을 읽었다. 학우들은 숙연하게 그리고 격앙된 얼굴로 깊은 감동의 인상을 지으며 나의 목소리를 따라왔다. 모두 울먹이고픈 심정에 가슴을 저미는 그런 침통한 분위기였다.
사실 한의과대학의 존립 그자체를 거부하고 한의학이라는 것이 이땅에서 말살되기를 원하는 사단법인 대한약사회 소속 4만회원일동(1993년 3월 31일, '동아일보'제3면 하단 전면광고 내용에 정확히 의거)의 서슬퍼런 8만개의 눈동자가 감시의 빛을 번뜩이고 있는 이런 마당에 '너와 나의 한의학'이라는 한의과대학생들의 레포트를 펴낸다는 것은 자살행위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여기에 실린 글들을 통해 한의과대학생들의 실태를 파악할수 있을 것이며, 한의과대학체제와 한의학이라는 학문의 부실한 모습을 만천하에 공개하는 공격의 무기로 여겨지는 글들을 얼마든지 설득력있게 인용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의 그러한 노력에 동조하고자 한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그러한 노력에 아랑곳없이 우리 자신의 진실을 되새겨보고자 한다. 우선 나는 학생들 레포트에서 공통으로 발견되는 그들의 상념의 오류를 하나 지적하고자 한다.
학생들은 천편일률적으로 다음과 같은 명제를 아무런 반추나 부담이 없이 뇌까리고 있다: '한의학은 철학이다.' 그들이 어디서 이런 말을 주서듣게 되었는지, 어느 교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는지(나는 강의시간에 어느 교수님으로부터도 이와같은 얘기를 들은적이 없다), 도대체 불가사의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천편일률적으로 이러한 명제에 대하여 하등의 회의나 부담감이 없이, 그것이 마치 만고불변의 진리인냥 자신있게 뇌까리고 있는 것이다. 사실 나는 그들이 진정
무엇을 방황하고 있고 무엇을 고민하고 있는지, 도대체 방황과 고민의 대상이 무엇인지, 다시 말해서, 고민이나 방황의 대상에 대한 정확한 정체를 논하기에 앞서, 도대체 고민을 하는 방법, 방황을 하는 방법이나 알고 있는지, 깊은 연민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고민이 고민할 가치가 없는 고민에서 우러나온 것이라면 그 고민은 고민이라 말할 수 조차 없는 것이다.
한의학이 되었던, 한의학이 되었던, 서양의학이 되었던, 아프리카의 학이 되었던, 의학의 일차적 존립의의(raison dette)는 인간을 질병으로부터 구원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거부할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질병이 과연 무엇이냐? 라는 정의(definition)와 관련된 논란을 여기 나열할 필요도 없이, 질병은 건강(Health)과 대비되는 사태이며, 건강이라는 개념이 상대적으로 규정키 어려운 것임에 반하여 질병이라는 것은 불균형이나 파괴나 고통을 수반하는 너무도 명백한 사실(fact)임에 틀림이 없다. 인간세에 의학이 존립하는 이유는 원시사회로부터 21세기에 이르기까지 바로 이 명백한 사실을 경감이나 제거를 위한 것이었고, 따라서 그 이유야말로 의학의 공시적 구조(the synchronic structure of medicine)를 이루는 것이다. 그런데 학생들 말대로, 한의학이 철학이라고 한다면, 한의학이야말로 철학으로써 인간의 질병을 구원하는 학문이 될 것이며, 그렇다면 한의학은 인간의 질병에 대한 심리적 치료(mental therapy)이상의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할 것이다. (어떤 학생들은 심지어 그렇게 믿고 있다.) 한의학이 다루는 영역의 본질은 정신적 고통의 경감이 될 것이며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기위해서 철학을 이해해야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약물까지도 그러한 정신적 영역의 작용을 그 궁극적 소이연으로 생각하는 학생도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불가피하게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한의학은 종교다. 그리고 한의사는 목사다. 옛날에는 목사도 침도 놓고 약도 주고 다했으니까. 사실 요즈음의 현대사회에서도 상당수의 사람들이 교회에 가는 원인은 병적인 것이다. 병원으로 가기에는 너무 돈도 많이 들고 또 병자취급 받는 것이 싫어 교회를 택한다. 교회에 가면 예수가 있고 사랑이 있고 헌신이 있고 인간들과의 만남이 있고 협동이 있으며 정신적 지주가 될 수 있는 목사가 있다. 그래서 그들의 병이 낫는 것이다. 그런데 한의사들은 교회에 가기를 싫어하거나 교회에 가도 잘 낫지 않는 사람들을, 헌금대신 치료비로, 안수대신 침으로, 기도대신 문진이나 진맥으로, 성령대신 첩약으로, '성경'대신 '내경'으로 해결해주는 사람들인 것이다. 그래서 목사들이 신학을 공부해야 하듯이 한의사들은 동양철학을 공부해야 '물리가 트고 명의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참으로 한심한 개소리다! 만약 한의학이 철학이라고 한다면 이미 철학에서 일가를 이룬 내가 무엇때문에 이제와서 이 고생을 하며 한의학을 배운다고 하면서 처량한 솜니별곡을 노래하고 있겠는가?
나는 말한다: '한의학은 철학이 아니다.' 한의학은 철학일수 없으며, 철학이 되어서는 아니되는 것이다. 학생들이 한의학은 철학이라고 말하는 그 주장의 이면에는, 한의학이라는 것을 생각할 적에 도무지 주관적이고 손에 잡히지 않는 어떠한 애매모호한 부분을 우선 '철학'이라는 말의 소쿠리에다 담아 놓으면 안심이 되고 무엇보다도 남보기에 그럴듯하게 보인다고하는 도피심리(escapism)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말을 하는 자들에게 있어서 철학이란 신비적인 그 무엇이며, 대개 '주역'이라든가, 무슨 '운기'니 '천인상응'이니 '대우주-소우주'니 '음양오행'이니 하는 따위의 어휘로 도배질이 되는 그 무엇이다. 도무지 '철학'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에 대한 아무런 정의나 반추를 내포하지 않은 언구호설(아가리만 믿고 아무렇게나 싸지름)인 것이다.
나의 이러한 매설에 또다시 당혹스러움을 면치 못할 어여쁜 학생들을 위하여 내 이 문제에 대하여 두번 다시 이론의 여지가 있을 수 없는 단언을 내리고자 한다. 이것은 우리나라 한의학계가 철학과 과학의 관계에 대하여 확연한 인식을 가질 수 있을 정도로 이론적으로 정돈이 되어 있지 못한 불행한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다.
철학이란 어떠한 경우에도 어떤 '것'이 아니다. 철학은 것이 아니라, 그 '것'을 인식하는 '방법'일 뿐이다. 따라서 철학은 실체가 없다. 실체가 없기 �문에만 철학은 철학일 수 있고 따라서 만학의 제왕의 자리를 구축해올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세칭 말하는 모든 과학은 그 과학을 탄생시킨 세계관이나 가치관과 유리되어 생각될 수 없으며, 그러한 세계관이나 가치관을 지배하는 것은 바로 그 세계나 가치를 인식하는 '인식의 원리'인 것이다. 따라서 과학이란 그 과학이 소속해 있는 세계의 인식의 원리와 유리되어서 생각되어질 수 없다. 근세과학이라고 하는 것이 매우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진리를 말하는 듯 하지만, 그 절대성이나 객관성을 창출하고 있는 것은 바로 우리가 그것을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듯이 보이게 만드는 가치관 속에서 생각하고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대상의 세계의 인식의 기초로서 계량적이고 수량적인 것을 절대시하는 그러한 인식론을 떠나서는 현대과학의 절대성은 절대 도출되지 않는다. 그런 계량적인 것과는 전혀 다른 어떤 감성적 인식 위에서 우주를 해석하고 문명을 건설한 어떤 외계인이 있고 그가 우리와 소통 가능한 언어수단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그는 스티브 호킹박사가 하는 말을 정교하지만 매우 원시적이고 유치한 그러면서도 황당한 운기정도로나 인식할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서 과학에 있어서 조차도 절대적 진리란 있을 수 없으며 오직 현상을 해석하는 확실한 방편(certain means)만 있을 뿐이며, 이 확실한 방편조차도 인식의 확충이나 전환으로 인하여 시대적으로 계속 변하게 마련인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한의학은 철학이다'라는 말과 오히려 같은 말을 내가 하고 있지 않냐고 반문하는 학생이 있겠지만, 물론 그렇지 않다. 내 말을 지긋히 듣고 섬세하고 정확하게 이해해주기 바란다.
'한의학은 철학이다'라는 명제의 최대의 오류는 그 의미맥락속에서 철학을 실체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칸트의 철학은 뉴톤의 세계관에 인식론적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철학이다. 여러분들은 칸트의 대표적 저작이라고 불리우는 '순수이성비판'이라는 책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순수이성'(Pure Reason)이라는 말은 그 실내용에 있어서 개념적 오성(Understanding)을 가리키는 것으로 , 이 오성이라 함은 중세기 스콜라철학의 계보를 빌리자면 인텔렉투스(intellectus)와 구분되는 라티오(ratio)를 의미한다. 라티오란 인간의 '계산하는 능력' '개념을 통한 추리능력'을 말하는 것으로 그것은 양적인식과 관련되어 있다. '비판'이란 칸트의 말을 빌리면 '독단'(볼프가 그 대표)과 '회의'(데이비드 흄이 그 대표)라는 양 극단과 대비되는 개방적 방법론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순수이성비판이란, 중세기적 기독교종교문명속에서 은총이나 계시에 의해 이해되었던 자연에 항거하여 자연을 수학이라는 이성적 법칙에 의하여 이해하려고 했던 갈릴레오, 뉴톤의 학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인간의 인식능력인 '순수이성'을 '비판적으로' 검토함으로써 그 이성이 저질러 왔던 오류를 광정하고 또 그러한 한계의 지적을 통해 그 이성의 정당성을 입증하고, 따라서 그러한 이성의 기초위에 서있는 과학의 정당성을 입증하려는 노력에서 12년동안(1769-1781) 숙고한 끝에 내놓은 역작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러한 문제를 얘기해 볼 수 있다: 뉴톤이 칸트를 낳았는가? 칸트가 뉴톤을 낳았는가? 물론 칸트철학에 대한 역사적 사실은 뉴톤이 칸트를 낳은 셈이 되지만, 다시 말해서 과학이 철학을 탄생시킨 셈이지만, 이 양자간의 문제는 결코 일방적으로 결정이 될 수 없는, 동시적이고도 역동적인 복합성의 문제라 해야할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철학은 과학을 탄생시키고 그것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는 인식론적 배경을 형성한다는 사실이다. 뉴톤이 탄생되기까지는 뉴톤이 바라보는 세계를 정당화시키는 어떤 인식의 회전이 선행하였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한 인식의 회전은 하나의 시대정신(Paradigm 혹은 Zeitgeist)으로서 과학적 발전과 함께 면면히 흘러갈 것이다. 그러다가 그러한 시대정신을 명료하게 인식론적으로 체계화시키는 작업을 감행하는 천재가 태어난다. 이러한 천재를 우리는 그 시대의 '사상가'니 혹은 '철학자'니 하는 말로써 묘사하게 되는 것이다.
인체를 인식하는 방법, 즉 그 개념적 틀이, 체액(humor: blood, bile, phlegm)인 시대에는 체액병리(humoral pathology)이상의 질병관이 생겨날 수가 없다. 신체의 이상과 정상이라고 하는 개념이 모두 정체적(holistic)인 체액의 균형과 불균형에 의하여 밖에는 설명될 길이 없는 것이다. 그러다가 중세기문명이 사라센의 과학문명에 의하여 그 틈을 내기 시작하면서, 알데롯토(Taddeo Di Alderotto), 루시(Mendino De Lucci), 베니베니(Antonia Benivieni, 1440-1502), 그리고 근세의학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베살리우스(Andreas Vesalius, 1514-1564)에 의하여 소위 해부학(anatomy)이라는 학문방법이 새롭게 정착되고, 이러한 새로운 방법에 따라 장기의 물리적 구조에 대한 확연한 인식이 성립하면서, 그 유명한 모르가니(Giovanni Battista Morgagni, 1682-1771)의 병리해부에 의한 장기 병리학(organ pathology)이 성립하게 되는 것이다. 그 뒤로 인체를 바라보는 인식의 체계가 조직이 될 때는 병리학도 조직병리학(histopathology)이 될 것이니, 프랑스인 삐샤(Xavier Bichat, 1771-1802)의 '해부학총론'(Anatomie, ge'ne'rale, 1801)을 호례로 들 수 있을 것이다. 또 인체를 바라보는 인식의 단위가 세포가 될 때는 월효(Rudolf Virchow, 1821-1902)의 세포병리학(cellular pathology)이 탄생할 것이고, 루스카(Ernst Ruska, 1906-1988)가 전자현미경을 발명함에 따라 세포의 인식이 정밀해지면서 세포내 병리학(subcellular patholgy), 즉 소기관 병리학(organelle pathology)이나 분자생물학적 병리학이 발전하게 된다. 최근 에이즈라는 고약한 병때문에 면역학의 눈부신 발전을 가져왔고, 또 면역기전에 의한 새로운 인체인식구조가 등장하게 되니깐, 병리도 자연 면역학적 병리학(immunological pathology)이 탄생하게 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귀결이라 할 수 있다. 이와같이 질병의 정의 그 자체가 곧 그 질병이 발생하고 있는 '몸'에 대한 우리의 인식의 체계, 그리고 그 인식의 체계의 변천에 따라 결정되고 있다는 중요한 사실을 우리는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 우리가 질문해야 할 것은 오늘 우리가 병리학시간에 배우고 있는 세포병리가 반드시 조직병리를 부정함으로써만 가능한 것인가? 조직병리는 또 다시 장기병리를 부정하는 것일까? 또 장기병리는 체액병리의 모든 진리를 죄악으로, 위선으로 간주해버리고 말것인가? 체액에서 장기로, 장기에서 조직으로, 조직에서 세포로, 세포에서 세포내 분자단위로 소위 '발전'했다고 하는 서양병리학사의 과정은 어쩌면 인체의 인식의 단위의 단순한 소규모화의 과정일지도 모른다. 그 인식의 단위가 거시적인데서 미시적인데로 나아갈 과정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이유를 들라면 아마 나는 다음의 두가지를 생각할 것이다. 첫째는 그 발전과정이 전에 인식하지 못했던 새로운 것을 발견해나간 과정이었기 때문에 재미있었을 것이고, 둘째는 그러한 소규모화가 병변에 대한 규정의 정밀도를 높였다는 생각일 것이다. 허나 나는 다시 묻겠다. 과연 정밀해졌는가? 물론, 정밀해진 측면은 부인못한 사실일 것이다. 허나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을 되새겨야 할 것이다. 과연 정밀성의 제고가 곧 인간을 질병에서 구원한다함을 의미할 것인가? 화이트헤드는 '생각들의 모험'(Adventures of Ideas)이라는 명저속에서 진리(Truth)를 말함에 있어,앙리뽀인까레(HenriPoincare)의 말을 빌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정밀성의 제고가 과학의 발전을 저해할 수도 있다.' 진리를 안다는 것은 무조건 좋은 것이라는 생각 자체가 하나의 반추되지않은 도덕적 오류일 수도 있다. 진리도 운대가 맞아 떨어져야 진리다.(The Truth must be seasonable.)
병리의 이해가 반드시 그 시대시대에 있어서 그 이해를 가능케 하고 있는 인식의 구조가 있듯이, 물론 한의학이라는 언어에도 반드시 그 언어를 지배하는 인식의 구조가 있게 마련이다. 그것이 세포나 조직이나 'DNA'나 T-cell', "B-cell"과 같은 어휘가 아니라 음양이니 오행이니 기니 하는 말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그 병리를 정당화시키고 있는 어떤 인식의 구조를 반영하고 있음에는 하등의 차이가 없다. 그리고 인간의 몸의 병변에 대하여 똑같이 기능적일 수가 있다. 그러면 우리는 학생들이 말한 '한의학은 철학이다'라는 명제를 다음과 같이 재구성(reformulation)할 수 있을 것이다: '한의학은 철학이 아니다. 철학이라고 하는 것은 한의학의 언어를 구성하는 개념들을 지배하는 인식의 구조를 반영할 뿐이다.' 이렇게 재구성된 나의 말을 놓고 혹자는 그 말이 맨 그 말이 아니냐? 라고 반문할지도 모르지만, 한의학이 철학이라는 말과, 한의학에 있어서 철학은 그 인식론적 배경일 뿐이라는 말의 차이는 엄청난 것이다.
의학의 일차적 소이연은 질병의 치료다. 다시 말해서 그 인식론적 바탕을 안다는 것이 곧 질병의 치료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서 인식론적 바탕에 대한 아무런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해도 그가 만약 환자를 치료하는데 놀라운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고 하면 그는 명의라 할 수 있다. 명의의 기준은 철학이 아니라 의학이요, 의학이란 질병의 치료다. 꿩잡는 것이 매일뿐이다.
허나 이 말에는 곧 의학에 있어서 철학적 인식이 필요없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단지 음양이나 오행이니 하는 것을 인식의 바탕으로서가 아니라 지식의 내용으로서 생각하는 그 수많은 한의학도들의 용렬성을 개탄할 뿐인 것이다.
내가 생각컨대 한의학이 철학이라고 생각하는 학도들의 상념의 기초를 이루는 것은 현재 한의과대학의 커리규럼이 의학과 의학사가 전도되어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서양의과대학에도 물론 '의학사'(History of Medicine)라는 과목이 있다. 허나 이것은 단지 한 과목, 교양으로서 그리고 재미로서 가르치는 것이며, 그 의학사의 내용이 곧 그들의 의학적 지식을 구성하지 않는다. 더구나 의학사에서 나열하고 있는 과거 의서들의 세밀한 연구에 6년이라는 세월을 소비하는 그런 짓을 하지는 않는다. 예를들면 의학의 기초로서 레닌저의 '프린시플스 어브 바이오케미스트리'를 탐독할 지언정, 방대한 히포크라테스전집을 희랍어로 탐독하지는 않는다. 물론 이런 것을 하는 것은 의학사 학자들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나 그나마 이런 학자들은 전세계적으로 희귀한 것으로 나는 알고 있다. 허나 실제로 한의과대학 커리큐럼은 의학 그 자체의 공부과정이라고 말하기 보다는 의학사의 연구과정이라고 말하는 것이 보다 정확한 표현이 될 것이다. 결국 한의과대학은 의사를 기르는 것이 아니라 의학사 학자들을 기르고 있다고 말해도 과히 빗나간 말은 아닐 것이다. 그들이 6년동안 한의학에 관하여 배우는 모든 내용이 실제로 한문으로 쓰여진 고의경. 의서가 거의 전부라는 사실에 비추어 본다면 아무도 나의 말을 결코 부정할 수 만은 없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아직도 '황제내경'이라고 불리우는, 한대에 성립했다고 믿고 있는 책에서 인용만 하면 그 인용문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논거가 되며, 아무도 그 '내경'의 명제가 과연 얼마나 의미론적으로 타당한 것인지, 그리고 그 논리적 근거가 과연 실증적으로 검증될 수 있는 것인지를 따지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한의학은 '내경'의 도그마를 신봉하는 '내경종교학'인 것이다.
그래서 서양의학을 하는 개명한 사람들은 한의학은 근대적 실증적 방법이 도입되기 전단계로서의 중세기적 즉 전근대적 사이비과학(pseudo-science)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의학에는 서양의학과 동양의학의 공간적 구분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근대의학과 전근대의학의 시간적 구분이 있을 뿐인데 한의학은 근대화과정을 거치지 못한 전근대의학(pre-moden medicine)의 단계에 머물러 있는, 아직 진화가 되지 못한 단계의 의학일 뿐이다 라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서양의사들의 주장을 논박할 생각이 없다. 그러한 주장이 분명 의미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그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보지 못하고 있는 많은 다른 측면을 나는 한의학에서 발견하고 있는 사람이긴 하지만-, 허나 명백한 것은 서양의학에서는 과거의 의학에 비해 명백한 패러다임쉬프트가 일어났는데 반해, 동양의학에서는 그러한 획기적 패러다임쉬프트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다시말해서 DNA의 헬릭스 구조나 리보좀을 말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히포크라테스가 말하는 휴머(체액)가 전혀 불필요한 것이 되어버렸지마는, 오늘 한의원을 개원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아직도 삼초다 하는 말들이 유용한 패러다임으로서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패러다임의 지속을 전근대성으로 보아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러한 고집속에 정당한 이유가 내재하고 있는 것인지, 바로 그것이 문제일 것이다. 내가 한의학은 철학이 아니다 라는 것을 역설한 것이다. 그대들이 나처럼 아무리 철학을 마스타한들 그대들의 고민은 풀릴 길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대들의 고민과 방황의 정체는 무엇일까?
우리가 무엇을 고민할 때, 고민 그 자체가 사이비라면 우리는 허망한 결론에 이르고 만다. 우선 한의학도들이 한의과대학에서 고민하고 있는 문제의 성격이 대부분 사이비적인 것이다. 그들의 문제는 단지 의학과 의학사의 혼동에서 유래되는 것이며, 그들의 이러한 혼동은 기개가 '문헌비평'(Text Criticism)이라는 학문적 방법에 의하여 거의 완벽하게 해결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말하는 문헌비평이란 1) 판본학 2) 주석학 3) 해석학 이라는 세분야로 구성된 것인데, 불행하게도 우리나라 한의학계는 이러한 분야에 있어서 엄밀한 훈련을 거친 학자를 단 한사람도 배출시키지 못했을 뿐아니라, 근본적으로 문헌비평의 엄밀성과 포괄성에 대한 인식조차가 결여되어 있는 것 같다. 혹자는 나는 한문을 똑똑히 새겨 읽는 것이 장끼라고 자부할지는 모르겠으나 '문헌비평'이란 그와같이 '옥편'찾아서 훈달어 한문 똑똑히 읽는다고 해결되는 그런 차원의 학문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한의과대학에는 지금 문헌비평이 결여된 의사학만 있을 뿐이며 진정한 의미에서의 '임상학체계'(Systematic Clinical Medicine)가 부재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문헌학을 한의학의 통시적 구조(diachronic structure)이며 임상학을 한의학의 공시적 구조(synchronic structure)라고 한다면 이 양자가 모두 제대로 가르쳐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즉 한국의 한의학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문헌학의 단계에도, 또 동시에 진정한 의미에서의 임상학의 단계에도 진화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문헌학이란 무엇인가? 내가 말하는 문헌비평이란 무엇인가? 불행하게도 지금 나는 지면과 시간의 제약때문에 이를 소상히 밝힐 수는 없다. 허나 소략한 대로 한 예를 들어보자! '황제내경'이라는 문헌은 원래 단일한 저자의 작품이 아니기 때문에 너무도 많은 논란이 예상됨으로, 단일한 저자의 작품이라고 일컬어지는 '상한론'의 예를 한번 둘어보자! 우리는 '상한론'이라는 현존하는 책이 동한말 장소의 태수, 장중경의 저작이라고 알고 있다. 문헌학의 과제는 이러한 말이 과연 어떠한 문헌의 근거위에서 말하여 진 것인가를 추적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현존하는 '상한론'송본에 수록된 '상한졸병론집'이라는 제목이 붙은 서문에 저자인듯이 보이는 사람의 자신의 말로서 다음과 같은 말이 전하고 있다: '나의 종가일족이 원래 많아 이백여명이나 되었었는데 건안 기년(AD 196)이래 십년도 못되어 사망한 자가 삼분의 이나 되었다. 그 열중에 일곱은 모두 상한열병으로 죽은 것이었다.' (서종족소다, 향여이백. 건안기년이래, 유미십권, 기사망자, 삼분유이, 상한십거기칠.) 우리는 이 말에 근거하여 '상한론'의 저자는 2세기 말에 실존하였던 인물이며 당시 프로렌스 복카치오의 '데카메론'(Decameron)의 상황을 연상하는 어떤 열성전염병에 의하여 많은 사람이 대거로 쓰러지자, 그것을 구하려는 휴매니스트적 동기에서 고훈을 동구하고 중방을 전채하여 기존 의서를 참조하여 이 책 '상한잡병론'을 지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허나 이러한 판단의 근거가 될 수 있는 이 '상한졸병논집'이라는 문장은 원래 장중경이라는 사람의 원문이 아니라 후대에 날조된 문장이라는 설이 강력할 뿐만 아니라, 동일한 문장내에서 전혀 다른 문체와 내용이 겹치는 등 그 신빙성이 확보되지 않는다. ('사과반의'라는 구절 이전과 이후로 그 내용이나 문체가 달라 동일인의 문장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서문에서는 주어가 일인칭의 '서'로만 되어 있을 뿐, 그 '서'가 누구인지를 밝히는 정보가 일체 없다. 단지 그 생존연대를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 생존연대는 후한말에서 삼국시대에 걸쳐 활약한 명의, 화타의 시대와 겹치는데 ,화타의 경우 '후한서'에도 '삼국지'에도 그 전이 나오고 있으나, 화타보다 훨씬 의학적으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할 명의 장중경의 전은 어느 정사에도 비치는 바가 없다. 그렇다면 과연 장소의 태수, 장중경이라는 말은 어디서 나온 것인가? 그것은 치평 이년(1065), 한종의 성지를 봉하여 교정 의서국의 고보형. 손기. 임의 등이 간행한 송판 '상한론'의 '상한논서'에 처음 등장하는 것이다: '장중경은 '한서'에 전이 없다. 그런데 그 전기자료가 '명의록'에 보인다. 거기에 말하기를 그는 남양의 사람이며, 명은 기로 중경이라함은 그 서다. 효렴에 천거되었고 관은 장소태수에 이르렀다. 처음에 그 의술을 같은 군에 사는 장백조에게서 배웠다. 당시의 사람들이 이르기를 앎과 씀새의 감미로움이 그 스승을 뛰어넘는다고 하였다.'(장중경, 한서무전. 견명의록원. 남양인, 명기, 중경급기한야. 거효렴, 관지장소태수, 시수술어동군장백조. 시인언, 식용감미과기사.) 허나 이 고보형등이 의거하였다고 하는 '명의록'이라는 책은 현존하지 않으며 일체 그 정체를 알 수가 없다. 그리고 남양사람으로서 장기라는 인물을 아무리 역사자료에서 뒤져보아도 그런 인물이 발견되니 않는다. '후한서' '헌제기'에 남양의 태수에 장자라는 자가 있어 오의 손기에게 살해되었다고 쓰여져 있지만 장자와 장기는 동일인물이 아니다. 진의 황보밀이 쓴 '갑을경'의 '서'에 중경과 건안의 문인 왕찬(중선)과의 일화가 실려있으나 그 중경이 '상한론'의 저자라는 보장이 없으며 그 '서'조차도 황보밀자신의 문장으로 볼 수 없다는 설이 유력하다. 그리고 매득자는 '중국의학사약'에서, 남양인으로서 장소태수를 지낸 장양이라는 사람이 있었지만 생몰년대가 맞지않음을 들어 동일인물로 추정될 근거가 없음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동한말(200년전후)에 실존했다고 하는 어느 인물에 관한 기록을 약 8세기 반이 지난 후에야, 그것도 믿을 수 없는 서문에 의거하여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쉽게 단안할 수가 있다: 장중경이라는 인물은 완전한 가공의 인물이다.
그러나 우리가 장중경이라는 역사적 인물의 실존성을 '상한론'의 저자로서 확보할 수 없다해도, 동한말에 엑스라는 인물이 있었고 그 엑스라는 인물은 당시에 유행하던 장질부사와 같은 전염성유행병에 시달리는 인간의 참혹한 상황을 경험하고 '내경'의 원리적이고 연역적인 그리고 경락위주의 관념적 질서에서 탈피하여, 외사에 중상한 급박한 증후군을 제거하는 매우 구체적이고 귀납적인 약물학적 치료의학의 체계를 수립할려고 하였다 라고하는 역사적 가설조차를 부인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단지 그 가설의 주체가 장중경이냐 또 오늘 우리가 볼 수 있는 '상한론'의 체계가 과연 동한시대의 그것이냐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론 장중경이라는 인물의 기록도 장중경의 저작도 아무것도 현존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판본학의 제일과제는 우리에게 주어진 텍스트의 소급가능한 물리적 원본을 추적하는 길이다. 예를 들면 장사에 장중경지묘라는 비석이 세워진 확실한 고분이 있고, 고분을 파보았더니 그 속에서 '상한졸병론'이라는 황서가 나왔고, 그 황서의 내용을 해독해 본 즉 오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상한론'의 문안과 완전히 일치한다고 한다면 판본학의 문제는 더 이상 거론될 것이 없다. 거론될 것이 있다해도 그것은 확고한 기준위에서 전개될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고문헌의 경우 이렇게 행복한 상황은 거의 전무하다.
우리가 '장중경'이라는 암호의 약속으로서 지칭하고 있는 동한말의 엑스가 있다고 하자! 이 장중경이라는 엑스는 우리가 생각하듯이 '상한론'을 쓰지 않았다. 내가 지금 이 책을 쓰듯이 중경이 저술을 한 것이 아니다. 그가 한 작업은 상한(한에 상한다는 뜻으로, 한은 외사를 말하며 상은 적중의 중과 같은 뜻으로 '얻어 맞는다'는 뜻이다. 대개 장티프스, 디프테리아, 인프루엔자, 마라리아와 같은 열성전염병이었을 것이다)에 관한 기존의 처방들을 수집하고 또 그러한 처방에 해당되는 증상들에 관해 단편적으로 기록해두는 작업에 그쳤던 것이다. 지금의 '상한론'만 잘 들여다 보아도 그것이 어떤 체계적 저작이 아니며 한 건 한 건의 독립된 편린의 몽따쥬와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때때로 연결성이 희박하거나 혹은 중복되거나 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상한론'의 원본은 물리적 형태는 황서계열이 아니라 죽간계열이었을 것이다. 허나 실제로 중경이라는 역사적 인물(historical Chang Chung-ching)이 과연 무엇을 했는지 그 정체를 알 수 있는 근거는 아무것도 없다. 이 중경의 작업을 최초로 서적의 형태로 만든 사람, 중경이라는 명의가 남긴 단편들을 수집하여 어떤 체계속에 묶어 그 차서를 정하고 자신의 생각으로 가감을 하여 책으로 펴낸 사람이 바로 왕숙화라고 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한의대학생들은 '상한론'의편찬자로서 왕숙화라는 이름을 외워야 하고 그것을 답안지에 써야 점수를 맞는다. 그럼 왕숙화가 선차했다는 '상한론'이 현존하는가? 그런 책이 과연 있었는가? 왕숙화라는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죄송스럽게도 우리는 왕숙화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 수 없으며 더구나 왕숙화가 편찬했다고 하는 '상한론'은 인류역사상 아무도 그것을 본 자가 없다. 그럼 도대체 그런 말은 어디서 생긴 것일까?
왕숙화에 관한 전기자료는 거의 전무하다. 단지 지금 '맥경'이라는 책이 현존하고 있는데 그 '맥경'의 저자로서 그에 대하여 몇마디 얘기들이 후대에 기술되고 있을 뿐이다. 허나 이 '맥경'이라는 책이 고경이라는 실증은 거의 없으며, 그 내용이 대부분 우리가 볼 수 있는 '소문', '난경', '영구', '상한론', '금궤요약'의 인용으로 구성된 것이며, 우리가 지금 이 책들의 성립연대에 관한 신빙성을 인정할 수 없다면, '맥경'자체가 후대의 사람이, 후세에 성립한 의경들을 여기저기 베껴 날조한 책임이 분명해진다. '맥경'의 저자로서의 왕숙화의 실존성은 신빙근거가 없다. (대부분의 제대로 아는 의사학학자들은 이러한 생각에 일치된 견해를 가지고 있다.) 허나 '맥경'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촌구맥삼법의 기본적 방법을 확립한 저술로서, 그리고 문헌적으로 삼맥부위와 내부세기와의 관계를 최로로 언급한 저술로서 그 의학사적 가치는 살아있다.
보통 왕숙화는 고평의 사람으로 명을 희라 하고 숙화는 자며 서진의 태의령을 지냈다고 말하여 지고 있다. 허나 매득도는 '사략'에서 숙화가 서진의 태의령일 수 없으며 혼의 태의령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목로'라는 연호의 고증으로서 문제를 추적). 그렇다면 왕숙화의 활약시기는 대강 삼세기전반이 되며, 그렇다면 대략 엑스의 중경이 '상한론'을 쓴 것을 건안세기(196)후 10년 이후로 계산해야 하니깐 빨라야 206년으로 추정한다면 그 후 약 50년후에 왕숙화라는 태의령이 중경이 상한에 관하여 남긴 고귀한 자료가 유실되는 것이 아까워 정리했다고 상상해볼 수 있다. 허나 숙화가 정리한 '상한'은 아무 곳에도 없다. 그런데 왜들 숙화와 '상한'을 꼭같이 들먹이는가? 그 근거는 황보밀의 '황제삼부침염갑을경' '서'에 나오는 단 한줄의 언급에 의존하고 있을 쭌이다: '중경이 이윤이 지은 '탕액'을 널리 논구하여 열몇권에 그것을 묶어냈는데, 그 방을 써보면 효험이 많았다. 요즈음 사람으로 태의령인 왕숙화가 중경이 남긴 논을 순서를 매겨 새로 저술을 했는데 그 논의가 매우 정밀하다. 실제 임상에 적용하여 시술하여도 모두 무리가 없다. (중경론광이윤탕액위십수권, 용지다험. 근대태의령 왕숙화선차중경유론심정, 배가시용. '유' 원작 '선', 거정통본개. '배가' 원작 '시사', 거정통본개.) '갑을경'의 저자 황보밀은 비교적 생평이 확실한 사람으로 건안이십년(215)에 태어나 태강삼년(282)에 죽었다. 그러므로 황보밀은 왕숙화를 가리켜 '근대'(요즈음 사람으로)라는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숙화가 보밀보다 앞서는 것은 분명 하지만 거의 동시대의 사람들임을 알 수가 있다. 그래서 밀은 리가 건안년간에 활약했던 주경이라는 어느 명의의 탕액에 관한 처방을 선차했다는 소문을 들었을 것이다.
이 '갑을경'이라는 문헌과 그 '서'자체가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밀의 참저서냐 아니냐하는 문제가 또 논란에 걸려 있지만 이 '서'의 진실성을 받아들인다면 사실 우리는 '상한론'에 관한 최초의 언급을 이 밀의 '서'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물론 송판본에 붙어 있는 '상한졸병론집'보다 훨씬 더 진실한 기록으로 보아야 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이 최초의 언급속에는 일체 '상한론'이라는 서명이나 '상한'이라는 어휘자체가 부재하다는 것이다. 단지 중경이 이윤의 '탕액'을 논광하여 십수권을 지었다는 것이 서술적으로 기술되고 있을 뿐이며 또 숙화의 선차의 대상으로서 언급된 것도 중경의 '유론'이라는 말 뿐이다. 숙화에 대하여서는 '심정'등의 표현으로 뭔가 확실한 듯이 말하고 있지만 중경에 대해서는 '십수권'이니 하는 불확실한 표현으로 쓰고 있을 뿐 그가 어떤 확실한 저술을 하였다는 표현이 없다. 그리고 이윤의 '탕액' 운운하는 것을 보면 중경에 대한 인상은 처음부터, 후대에서 말하는 '태양 - 양명 - 소양 - 태음 - 소음 - 궐음'등의 이론적 체계라가 보다는 순수한 탕약중심의 처방에 관한 것이었으며, 그것이 언급된 맥락이나 이유도 실제 크리닉칼 닥터의 입장에서 써보니 효험이 놀랍더라는 어떤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임상적 가치의 맥락이었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허나 이 '중경탕액처방집'에 관한 3세기(수진시대)의 논의는 단지 몇줄의 서지학적 근거에 매달려 있을 뿐 그 실상을 알 수 있는 서물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중국의 과거의 책을 조사해 볼려면 그 과거의 진본은 구하기 어렵다해도 정사에 반드시 '예문지'나 '경잡지'라고 하는 도서목록일람표가 붙어있기 때문에 판본학을 하는 사람들은 이 도서목록을 평생토록 보고 또 본다. 도서이름과 저자, 그리고 반드시 써있는 권수나 편수만 가지고도 무궁한 추측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중국역사에 '상한론'이라는 이름의 서물이 등장하는 최초의 진실한 사실은 '신당서' '예문지'이전의 기록에서는 어디에서도 그 원정한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렇다면 당대에 '상한졸병론'이라는 책이 이미 존재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으니 그것은 그렇지 않다. '신당서'는 오대 후진의 재상 검국등이 감수하여 편찬한 '구당서'의 부족함을 보완하기 위하여, 송 인종의 명으로 구양수, 송기등의 학자들이 봉칙하여 택한 것으로 그 저성연대가 1060년이며, 이 '신당서' '예문지'는 1060년까지의 정보를 기준으로 하고 있음으로 당대의 현황을 아는데로 정확한 기준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신당서' '예문지'가 쓰여진 바로 이 때는 송대의 그 유명한 교정의서국이 성립 (가우 2년, 1057년)한 이후다. 따라서 후에 논술하겠지만 '신당지'의 '상한졸병론'십권은 고보형. 임의등이 교정한 바로 송본(십권: 소위 '상한론졸병론집'에서 말하는 '상한잡병론'합십육권에서 잡병에 헤딩되는 '금궤요약방론'이 빠졌다고 하는 본)을 정확히 지칭하고 있는 것임이 드러난다. 그리고 당대의 정황을 가장 정확하게 수록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그 정밀도가 높이 평가되는 '수서' '경잡지' ('수서'는 당대에 성립한 것이다. 위징이 봉칙 택한 것이나 지는 장손무기의 택으로 656년에 완성된 것이다)에는 '상한론'이라는 말은 전혀 보이지 않고, '장중경방십오권, 중경, 후한인. 량유황소약방이십오권, 망.'이라는 말만 보인다. 이 '수지'의 언급은 바로 밀의 '서'에서 우리가 추측한 내용과 일치한다는 점에서 우리의 주목을 끈다. 즉 송대이전에 존재한 '상한론'의 프로토타입은 오늘의 '상한론'이 아니라 장중경이라는 사람의 이름을 빌린 일종의 처방집이었을 뿐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량나라때에도 이십오권으로 된 '황소약방'이라는 유사한 처방집이 만들어졌었는데 없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황소약방'은 그 이름으로 보아 지금의 상한방과는 다른 계통의, 즉 '황제소문경'에 의거한 다른 계통의 약방을 모은 처방집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유실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황소약방'이 망했다고 한 것과 대비하여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면 '수서'의 시대에는 오십권으로 된 '장중경방'이라는 책이 확실히 실존하고 있었다는 실증이다. 그리고 후진에 성립한 '구당서' '경잡지'당대의 정황을 보다 리얼하게 전달)에는 '장중경약방십오권, 왕숙화택'으로 되어있는, 여기서 말하는 '장중경약방'이라는 책은 권 수가 같은 것으로 보아 '장중경방'과 동일한 책으로 간주된다. '방'이라는 말에 보다 확실한 성격을 부여하기위해서는 그 뒤에 어느 누가 사갈하는 과정에서 '약'이라는 말을 덧붙였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수서'의 시대에서 '구당서'의 시대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방'이 '약방'으로 되는 일반적인 어휘의 변천이 일어난 시대적 상황의 반영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것은, '수지'의 '장중경방' 십오권의 경우는 '중경, 후한인'이라고만 하여 이 책 중의 고유명사를 해석한 형식으로 중경을 말하였을 뿐 그 저자를 밝히지는 않고 있으나('수지'에 '맥경'십권, 왕숙화택'이 실려있다. 그 '택'을 확실히 밝히고 있는 것으로 보아 '중경, 후한인'이라고 한 것은 저자를 밝히는 것으로 간주할 수 없다. 그리고 '장중경방'을 왕숙화의 택으로 명기함이 없다) '구당지'에는 '장중경약방' 십오권이 '왕숙화택'임을 확실히 밝히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더욱 재미있는 것은 '신당지'에 가면 그 책명이 아예 '왕숙화장중경약방' 십오권이 되어버린다. 그 변천과정을 일목요연하게 도식화하여 보면:
도서목록카드집 -> 카드에 정리된 정확한 내용
'수서' '경잡지' 656년성, 장손무기등택 -> 장중경방십오권 중경, 후한인. 량유황소 약방이십오권, 망.
'구당서' '경잡지' 945년성, 검국. 장소원등택 -> 장중경약방십오권 왕숙화택.
'신당서' '예문지' 1060년성, 구양수. 송기등택 -> 왕숙화장중경약방십오권, 우상한졸병론십권.
'장중경방'(수) -> '장중경약방'(구당) -> '왕숙화장중경약방'(신당)으로 그 명칭이 변천해간 이 책의 역사속에 숨어 있는 많은 비밀들을 다 밝힐 수는 없으나, 이 세 책은 분명 동일한 책이며, 중경과 관련하여 최초의 확실한 언급이라 할 수 있는 황보밀의 '갑을경서'에 기재되고 있는 '중경의 탕액처방이 다험하다, 왕숙화가 중경의 유론을 선차한 것이 심정하다' 등등의 언급내용과 확실한 연계선상에 서있는 것임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조차 그 실존성이 역사적으로 확실하지 않다. 당나라때의 명의며 진인이라 할 수 있는 손사양이 중국최초의 임상백과전서라 할 수 있는 '보은 천금요방'(약칭'천금요방' 혹은 '천금방')을 썼을 때(손사양의 태년이 영부원년(682)이 확실함으로, '비급천금요방'이 성립한 시기는 대강 '수지'가 성립한 시기와 비슷한 시기로 추정된다) 그 방대한 자료와 처방을 섭렵하고 있으면서도, ''중경요방'을 강남제사들이 비장만 하고 있어 전하지 않음'을 개탄하고 그 책을 구해보지 못한 서운함을 토로하고 있다. 손사양과 같이 황제들의 추앙을 받은 대의도 중경의 요방을 구해볼 수 없었던 것이다. (같은 당대의서인 '천금익방'과 '외대비요'속에 수록되어 있는 중경상한관계자료는 '상한론'의 당대고본의 모습과 이본들을 추적하는데 상당히 좋은 자료이지만 이야기가 너무 복잡해지므로 생략한다.)
중국의잡사에 있어서 가장 획기적인 대사건은 뭐니뭐니해도 송대 인종의 칙명으로 (경재가우중, 인종념성조지유사, 장추간지, 내소통지기학자, 비지시정. '중황보주황제내경소문서'에서 인용) 가우2년(1057)에 교정의서국을 설립하여 고보형, 손기, 임의 등 우수한 학자들로 하여금 기존의 스러져가는 의서들을 정리하여 출간케한 사건이다. '소문', '영구', '맥경', '갑을경', '상한론', '금궤요약방론', '금궤옥함경', '신농본초경', '소씨병원후론', '상한론', '비급천금요방', '천금익방', '외대비요방'등 오늘 우리가 의경이라 부르는 현존 고서들이 도무지 이들의 손을 안거치고 탄생된 것이 드물다. 이들 때문에 그나마 스러져 없어질지도 모르는 의서들이 수집되어 오늘 우리에게 전하여지고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고마움을 표현해야겠지만, 돌이키건대 그것은 다행인 동시에 불행이요, 천행인 동시에 재앙이요, 축복인 동시에 저주였다. 교정의서국이라는 말에서 우리에게 가장 걸리는 말은 바로 '교정'이라는 바로 이 두 단어다. 이들이 생각하는 '교정'이라는 개념이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교정'이라는 개념과 전혀 다르다. 이들에게는 우선 '지적소유권'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어느 한 주제에 관한 여러 판본을 모아 마음대로 뜯어고치고 마음대로 순서를 고치고 마음대로 가감하여 하여튼 자기들이 생각하기에 가장 읽기좋고 가장 말끔한 형태로 다듬어 놓는다는 것이 그들의 '교정'의 생각이었으며, 그들이 '교정'의 자료로서 사용한 원서나 자료를 정확히 원모습대로 밝히는 짓을 하지않았을 뿐만아니라, 교정에 사용된 모든 책들을 상재후에는 무가치하다고 생각되어 다 없애버린 것이다. 그것은 오로지 교정을 위해서만 필요했던 자료일뿐 교정본이 탄생되면 그것들은 무가치한 것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오늘날 출판사에서 책출간후에는 수고를 무가치하다고 내버리는 짓보다도 더 무자비한 짓들을 그들은 서슴치 않고 감행했던 것이다. 사실 오늘 우리가 말하는 고의경은 이들 송대교정의서국의 교정을 거친 것이 대부분이며, 일단 교정을 거친 의서는 그 진실성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 한의학도는 철저히 깨달아야 한다. 이 '깨달음'이 없는 한 한의학이라는 학문의 엄밀성은 앞으로도 영원히 기대할 수가 없다. 그들이 말하는 '교정'이란 �로는 '날조'였으며, 때로는 임의적 '조작' '개작'이었다. 오늘날에 있어서도 나는 이런 경험을 한다. 출판사에 내 원고를 갖다주면 그 출판사에서 교정을 본다고 하는 아가씨가 수고스럽게 내 글을 고쳐놓는다. 그런데 그 아가씨가 고쳐놓는 부분은 자기에게 이해가 안되기 때문이거나, 또는 자기 개인의 성견에 안맞는다거나, 혹은 저자의 원칙이 이 세상에서 통용되는 원칙과 안맞을 적에 무반성적으로 세상의 원칙을 택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기 �문에 저지르는 짓들이다. 그런데 이런 짓들이 때론 교정자의 지식이나 식견이 필자보다 높을 때는 참 고마울 때도 없지 않지만, 출판사의 아가씨들과 나와의 관계처럼 그들의 지적수준이나 문장의 원칙에 대한 이해가 비교되기 어려운 상황에서 경험되는 것은 거개가 개악일 뿐이며 원저자의 의도를 왜곡시키는 경우뿐이다.나는 살아있기 때문에 항의할 수도 있다. 허나 죽은 자들은 교정의서국에 항의할 수도 없는 것이다. 고보형, 보기, 임의 등의 사람들은 국자감의 박사이거나 직밀각의 각신으로 고명한 석학들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앞에 말했듯이 이들에게는 지적소유권(authorship)의 개념이 없었고 더구나 고서의 진본을 '있는 그대로' 남겨야 한다는 사명감 같은 것이 전무했다. 그리고 때때로 그들에게 '이해안된다'고 하는 부분이 역사적 언어습관의 변천때문이거나 혹은 그들의 이해부족으로 인한 것일때 그것은 완벽한 '왜곡'이 되어 버린다. 다시 말해서 있는 그대로 남겨두었더라면 비록 그들에게 이해가 안되었더라도 후대의 석학들에게 해독될 수 있는 여지도 많은 것이다. 그리고 일단 그들이 잘못 고쳐 놓은 것에 대하여 일관된 원칙이 수립되면 불행하게도 그 원칙에 걸리는 모든 부분이 왜곡을 당하게 될 것이다. 교정에 있어서는 이 '일관성'(consistency)이라는 개념이 매우 중요한 것이지만, 이 일관성이 판본학에 있어서는 저주의 원칙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즉 일관성때문에 고서의 다양한 진면목(variety)이 상실되는 불행한 결과가 초래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여러 판본이나 다양한 자료를 모아 한 체계로 정비하여 단일 서적으로 꾸밀 경우, 원래 관계없는 단편들이 마치 일관된 일인의 흐름속에 있는 것인냥 꾸미는 작업이 이루어 진다. 근본적으로 자체맥락이 다른 조각들이 자기들과는 맞지 않는 맥락속에서 일관성이라는 미명아래 은폐되고 마는 것이다. 우리가 현재 알고있는 '상한론'이라는 텍스트는 이러한 일관성속에 은폐된 조각의 모습을 하고 있는 난본(corrupted text)이라는 사실을 우리 한의학도는 알아차릴줄을 알아야하는 것이다.
단언컨대 사실 여러분들이 알고있는 그 권위로운 바이블 '황제내경'이라는 텍스트는 그것이 '소문'이든 '영구'이든지를 막론하고, 순엉터리 텍스트다. 엉터리도 이만저만한 엉터리 텍스트가 아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6년동안 '황제내경'의 권위를 옥황상제 모시는 것보다 더 모시게되는 경험을 하게될 것이다. 그것이 송대의 교정의서국에서 완전히 날조되고 조작된 텍스트라는 것을 모르고(왕빙의 일차적 조작에 가세하여 더 엄청난 조작이 자행되었다.) 그것이 마치 한대의 고경인냥 공부하게 될 것이다. 그대들은 '내경'이라는 텍스트의 역사적 변천과정에 대한 치밀한 논고나 강술을 접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우리나라 한의학계는 한의학을 성립시킨 원전에 대하여 문헌학적 분석의 매스를 가할 수 있는 단 한명의 책임있는 학자가 없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허술한 중국학자들의 논의를 베낀 엉성한 몇마디만을 배우게 될 것이다. 이러한 것이 새삼 문제가 되어야만 하는 가장 큰 이유는 한의과대학의 교수님들이 한결같이 '황제내경'으로부터 뭣 한줄이라도 인용할때면 그것이 곧 선태시대나 한대의 사상이나 그 시대의 언어를 반영하고 있는 것처럼 모든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우리 한의학계의 불행이요, 한의학이라는 학문의 발전을 저해하는 가장 원초적인 오류다. 다시 말해서 송대에 날조된 언어를 한대의 언어나 사상으로 강의한다는 것, 따라서 한대의 사상의 진면목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게 되어버린다는 것, 따라서 역사적으로 인체의 이해가 어떻게 변천해 왔느냐 하는 것을 모르게 된다는 것, 따라서 모든 한의학의 텍스트를 바라보는 역사적 시각이 생겨나지 않는다는 것, 따라서 경락이든 음양이든 혈명이든 병명이든 병변이든 약방이든 모든 것이 살아꿈틀거리는 역동성을 상실한 채 절대적·종교적 진리처럼 사판화해버리고 만다는 것, 따라서 우리는 우수한 학생들의 분석적 두뇌가 개발이 되지않고 점점 공부를 하면 할수록 아편을 잡순 멍청이처럼 히멀건한 동태눈깔만 껌벅이게 되고 만다는 것, 바로 이런 것들이 우리 한의과대학의 교육의 실태요, 학생들의 불만과 방황, 좌절과 고민의 실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고민은 결국 단순한 정보의 저질성에 기인하는, 고민다운 고민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를 가지고 얘기해 둔다.
따라서 의경판본학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은 교정의서국의 교정을 거치지 않은 판본을 구하는 것이다. 교정의서국의 교정이라는 저주를 거치지 않고 살아남은 그 이전의 텍스트가 있을 땐 그것은 교정의서국 이후에 성립한 텍스트를 형량하는 아주 훌륭한 기준이 된다. 이런 맥락에서 가장 소중한 텍스트가 바로 양상선의 '태소'다! 이 문제에 관한 기나긴 논의는 본제에서 벗어남으로 소상히 밝힐 수는 없으나, 양상선은 당초의 사람으로 그 전기자료는 일체 구해볼 수가 없으나, '태소'의 저성연대는 667-683년 사이로 확실하게 추정된다. 교정의서국 작업을 약 2백년 앞서는 텍스트다. 그런데 이 '태소'는 '소문'과 '영구' 2서의 내용을 아울러 편집하여 그에 대한 자신의 주해를 가한 것인데, 그것이 당대에 새로 편찬된 것이라는 사실로 미루어 '태소'조차 한대의 진면목을 말하는 근거로서 삼기는 어려운 것이나, 우리가 지금 알고있는 교정의서국본의 '내경'텍스트가 얼마나 심하게 조작된 것인가 하는 것을 현존하는 '태소'텍스트하고 비교해보아도 쉽게 알 수 있는 것이다. '태소'는 쉽게 사 볼 수 있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내가 과문한 탓인지는 몰라도 한의과대학생들이 이 '태소'에 의거하여 '내경'을 분석하는 엄밀한 작업을 하는 것을 본적이 없다. 그만큼 판본학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태소'는 중국에서는 송대까지 있다가 유실되어버린 것이나, 헤이안(평안)시대때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 결권이 있는 상태로 경도의 진언종 어실파 총본산인 인화사에 현재 이 시간까지 물리적으로 보존되어 있다. 이 판본의 존재는 에도(강호) 말기에나 알려져 광서중엽(19세기 말)에 양성오라는 중국인이 그 잔본을 가져다 중국에 소개함으로써 세상에 널리 알려진 귀중한 판본이며, 그것이 교정의서국의 작업을 거치지 않은 유일한 고경이라는 사실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근자에는 고고학적 발굴이 활발히 진행됨에 따라 판본학적으로 말하자면 기적적인 사실들이 속출하고 또 이러한 사실들은 한대의서와 의경의 진면목을 알 수 있는 너무도 엄청난 일차자료를 제공하게 되었다. 그중 가장 획기적인 사건은 1973년 바로 장중경이락 태수를 했다는 장사의 마왕뛔이(마왕퇴) 분묘군 중 제3분묘에서 발굴된 대량의 황서중에 7편의 의서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 마왕뛔이의 주인은 차후 이창의 아들인데 한문제십이년(168 BC)에 매장된 것임으로, 거기서 나온 의서는 최소한 기원전 168년 이전의 것이다. 마왕뛔이 의서로 '오십이병방', '각속원식기편', '양생방', '족비십이맥구경', '음양십일맥염경', '맥법''음양맥사후'의 칠편과 황서 '도인도'가 연구팀에 의하여 발표되었는데 이중 '족비십이맥염경'이하 4편은 놀라웁게도 우리가 지금 볼 수 있는 '태소'와 교정의서국이후의 '내경'텍스트의 몇 논문의 직접적인 조형이 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우리는 현재 11세기에 성립한 문헌을 자그만치 1300년이나 거슬러 올라가 그 물리적 원형을 직접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들 문헌들(마왕퇴 문헌-'태소'-송판'내경')의 비교연구를 해보면 우리나라의 한의학도들이 알고있는 한의학의 상식이 얼마나 허망하게 붕괴되는가 하는 것을 내가 여기서 새삼 말할 수 있는 계제가 아니다. 도무지 그러한 사실이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하고 또 일말의 관심조차 없는 사람들, 기껏해야 아무것이나 손에 든 한문이라고 생긴 종이 쪼가리만 있으면, 그리고 그것하나 낑낑대고 독해만 하면 뭐 대단한 벼슬이라도 한 것처럼 생각하고, 주변의 사람들에게 내가 과연 무엇을 말할 수 있겠는가? 우리 한의학계의 교수님들은 너무 일찍 애늙은이 노릇을 하려는데 그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뿐인가? 마왕퇴문헌외로도 한대의 처방으로서 거정한간, 유사대간, 그리고 감연정무위계의 성외, 시연유록의 간난파에서 발굴된 한묘의 목관중에서 1972년 11월에 출토된 대량의 목간과 목독, 연구자들에 의해 '무멸한대의간'이라고 불리우는 자료들이 한대의 의약에 관한 직접적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는 이러한 놀라운 사실들이 우리나라 한의학도들에게 전혀 소개가 되고있지도 않고 관심의 대상이 되지도 않고 있다는 사실이 나에게 놀랍고 놀라울 뿐이다. 도대체 이러한 엄청난 자료들에 대한 연구가 없이 '의학입문'이나 '동의보감'을 돌돌 외워본들 그것을 지배하고 있는 한의학의 인식구조나 패러다임의 이해가 생길 수가 있는 것일까? 그러한 고경의 보상에 대한 인식이 없이 어떻게 새로운 패러다임을 새롭게 구축해나갈 수 있을 것인가? 고를 가지고써 고를 파할 줄 알아야만 신이 생기는 것이다. '온고이지신'이란 고로 복하라는 헛말이 아닌 것이다. 또 이러한 한간외로도 교정의서국의 작업이전의 작품으로서 실크로드에서 발견된 돈황의문헌들이 상존한다는 사실도 아울러 기억해 주었으면 한다.
우리가 흔히 '상한론'을 얘기할 때에 기준으로 삼는 '물리적 근거'가 되는 최초의 판본은 교정의서국에서 고보형, 손기, 임의 등이 편찬한 것으로 그 정확한 이름은 '상한졸병론'이며, 권수는 십권이며, 그 저성연대는 치평2년(1065)이며, 그것이 정확하게 '신당서' '예문지'의 '상한졸병론십권'을 가리킨다는 것은 전술한 바와 같다. 이를 '교정국본'이라고 하자.
많은 사람들 이 '상한론'이라는 책명에 관하여 혼동을 하고 있고, 그 완전한 이름은 '상한잡병론'이며 '상한졸병론'이란 잡의 와전으로 생겨난 (잡자에서 새진변이 빠져 신이 졸로 된 것이라고) 오명이라고 알고 있으나, 이것은 전혀 사실무근한 것이다. 이것은 교정국본에 붙은 '상한졸병론집'이라는 서문의 내용중에서 '위상한잡병론합십육권'이라는 한 구절이 있어 이에 근거하여 원래 중경이 지은 것은 '상한잡병론'십육권이라 주장하는 것인데, 후술하겠지만 당평고래에는 그 구절조차 '위상한졸병론'으로만 되어 있을뿐 합십육권이라는 말도 없고 '잡'으로 되어 있지도 않다. '상한잡병론십육권'에 관한 추측은 모두가 낭설이다. 많은 사람들이 '상한잡병론'이라는 말은 상한과 잡병의 합성어이며, '합십육권'이라 하는 말은 '상한'십권과 '잡병'육권을 합친 것이며, 이 '잡병'에 해당되는 부분이 바로 '금궤요약방론'(이것도 고보형, 손기, 임의 등이 편찬한 것, 치평3년, 1066년 간)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것도 교정국사람들이 그렇게 추정해서 말해 놓은 것에근거하여 하는 말일뿐 아무런 확실한 근거가 없다. ('요약'은 상중하 삼권일 뿐이다). 다시 말해서 '상한'을 '잡병'과 대비시켜 쓰는 용법의 역사적 정당성이 문헌학적으로 송대이전에 성립하지 않는다. 흔히 말하기를 '잡병'이란 상한(전염성 급성 외감열병)처럼 육경의 전변이라는 체계적 단계로 밟지 않는 잡스러운 병이라는 뜻으로 외감열병의 개념으로 포착되지 않는 일반 내과병을 가리키는 것으로 말하여지며 그것의 대표로서 '금궤요약'을 꼽고 있으나, 기실은 잡병이라는 개념이 선행하여 '금궤요약'이 성립한 것이 아니라, 교정국본 '금궤요약'이 성립하고나서 비로소 잡병이라는 개념이 성립한 것이며 '상한잡병론'이라는 말의 하등의 역사적 정당성이 없다. '상한론'의 원래 이름은 '신당지'가 말하듯이 '상한졸병론'일 뿐이며 '잡병'운운케 된 것은 '졸'자의 뜻을 제대로 새기지 못한 무식한 자들의 단순한 오류에서 기인된 것일 뿐이다. '졸'이란, '졸도'(갑자기 쓰러진다)라는 용례에서 볼 수 있듯이 '갑자기'의 의미이며 '졸병'이란 '갑자기 생기는 병'즉 급성병을 의미하는 것이다. 상한과 졸병은 대비되는 두 카테고리가 아니라 상한이 곧 졸병임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이와 관련하여 졸의 의미를 '장수가 졸병을 거느린다. 인솔한다'의 의미로 새롭게 새겨, '상한졸병론'의 의미를 상한이라는 장수에 해당되는 병과 그것에 부수되어 따라붙는 잡졸과 같은 중풍등 기타 일군의 병상을 순서좋게 정리·배열하여 그 진단과 치료를 논한 서물의 의미라고 단정한 오오쯔카 케이세쯔(대가경절)의 설도 실내용과 관련하여 타당성이 있다는 것을 아울러 말해둔다.
하여튼 교정국사람들이 '상한졸병론'십권을 1065년에 펴낸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지만, 이 '상한졸병'이전에 장중경의 '상한론'이라는 서물이 있었다는 근거를 전혀 찾을 수 없다. 물론 왕대의 '외대밀요'나 손사요의 '천금요방'이나 '천금익방'중에 나오는 '상한'에 관한 토의와 처방에 비추어, 그리고 거슬러 올라가서는 마왕퇴문헌인 '호십이병방'(이것도 처방집). 그리고 앞서 언급한 '무위한대의간'(이 속에 이미 '상한'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등에 비추어 오늘 교정국본을 성립시킬 수 있었던 근거가 되는 자료들은 송대이전에 충분히 축적되어 있었다고 해도, 그 정확한 근거가 되는 원본은 발견될 수가 없다. 이러한 정황에 관하여 고보형등저 자신은 '송태조 한보년간에(968-975) 전도사 고계충이라는 사람이 일찌기 이 '상한론'을 편록하여 진상하였으나 그 문리가 어긋나고 착오가 많아 바르게 잡아놓은 것이 되지 못한다'(한보중, 절도사고계충, 증편록진상, 기문리열적, 미진고정.)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그들이 직접 근거로 삼은 듯이 보이는 이 고려충본이 과연 어떤 것이었는지 역사적으로 상고할 길이 없다.
'예문지'에 의거하여 생각해보면 역시 그들이 가장 직접적으로 의존한 자료는 '왕숙화장중경약방'이라는 책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이 '약방'이 '상한졸병론'으로 흡수되면서 '약방'은 사라지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신당지'에 '약방'십오권과 '상한졸병론'십권을 완전히 독립된 것으로 독립시켜 병렬시키지 않고, '우'라는 접속사로 연결시켜 '논'을 '방'에다 부속시킨 것이 그러한 심증을 굳혀주게 한다. '지'가 성립한 것은 1060년이요, '논'이 성립한 것은 그 5년 후인 1065년의 사건이다. 그러니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방'에 대한 정보가 동시에 구양수등의 귀에 들어왔을 것이고 그래서 그들은 그 양자의 관계를 '우'라는 글자로 연결시켜 말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다시 말해서 '왕숙화장중경약방'과 '상한졸병론'은 외면적으로 한글자도 겹치지 않는 독립된 것처럼 보임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우'로 연결한 것은 이 양자가 완전히 동계열의 서적임을 예시한 것이다. 동 '지'내에서 '빙경십권우이권'과 같은 용례와 같이 같은 내용의 다른 판본에 '우'라는 접속사를 쓰고 있는 것이다.
자아! 이제 우리는 1065년에 성립한 '상한졸병론'이라는 서물에까지 논의가 내려오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 교정국본은 물리적으로 현존하는가? 우리는 그 책을 북경도서관이나 어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것을 두눈으로 볼 수 있는가? 우리가 확실히 알아야만 할 사실을 고보형들이 새롭게 편한 이 '상한졸병론'이라는 송대의 교정국본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럼 도대체 송대교정국에서 '상한졸병론'이라는 책을 펴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그 책이 없는데? 나는 분명히 말한다:송대 교정국본 '상한론'은 이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송대교정국본의 정확한 정체도 우리는 확인할 길이 없다. 교정서국의 존재는 송대에 발흥한 목판인쇄술문화의 일반역사정황의 맥락에서 이해되는 것을 물론이지만 교정국본은 결코 많은 부수를 찍은 것도 아니고 몇몇 사람들이 나눠 가졌을 것이나 불행하게도 전란을 겪는 과정에서 이미 대부분 유실되었고 하나도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원본이 없다.
우리가 이 교정국본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길은 오직 명나라 때의 '상한론'연구가로서 말년에 이십년가의 상한에 관한 주를 모아 직접 판각해낸 '집주상한론'의 저자 조개미의 복각본을 통해서일 뿐이다. ('집주상한론론'조차도 지금 유실되어 전하지 않는다.) 우리가 소위 '송본'이라고 하는 것은 북송교정의서국 각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명말의 조개미의 복각본을 말하는 것이며, 그 복각본이 성립한 연대는 만역 27년, 그러니까 1599년이다. 이 카이메이(계미)의 복각본이야말로 우리가 '상한론'에 관하여 알 수 있는 최고의 확실한 판본인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정밀한 연구에 비추어 볼 때 이 카이메이의 복각본조차, 바로 송판 교정국본과 정확하게는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물론 교정국본 자체가 존재하지 않음으로 이는 타 판본과의 비교에 의한 추측일 뿐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판본학적으로 볼 때에 '상한론'이라는 책은 실존가능한 추정연대(AD 200년 경)와 실증가능한 기준연대 사이의 거리가 꼭 1400년이나 되는 것이니 이 14세기의 갭을 생각치 아니하고 '상한론'이라는 책을 한대의 의서로서 강의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하는 것은 참으로 더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다. 14세기 동안 실증가능한 물증리라고는 아무 것도 없으며 그동안 전해 내려오는 방식이 요즈음과 같은 보편적 '출판' 행위가 아니라 개별적인 수소 (손으로 써서 배낌)행위 였다는 것을 생각할 때 '상한' 한대원본의 재구성을 둘러싼 여러 가설은 무궁무진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조개미 복각본은 단행본으로서가 아니라 그가 간각한 '중경전서'속에 수입되어 있으며, 그것은 현재 북경도서관, 구본의 내각문고등지에 몇 부가 보존되어 있다.
헌데 조개미시절에만해도 소위 교정국본을 구해보기는 매우 어려웠다.그가 '상한론'에 관해서 제일 먼저 손에 쥔 것은 다름아닌 성무기의 '주해상한론'십권 이었다. 조씨는 이'성무기'의'주해상한론'을 먼저, 그러니까 1599년 이전 어느 시점에, 간행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나중에 그는 송교정국본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조개미는 일생을 통하여 '상한론'을 세번 간행했는데, 그 제1차가 성무기의'주해상한론'이고 제2차가 교정국본에 기초한 송본'상한졸병론'이며, 제3차가 자신의 저술이라 할 수 있는 '집주상한론'이다. 간행년도는 제2차, 1599년만 확실히 알 수있다. 하여튼 우리덕분에'상한'에 관한 확실한 진적을 확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성무기는 지금 산동성 요성현으로 되어 있는 요섭의 사람으로, 바로 교정국본이 간행되던 해인 북송의 치평년간(1064-1067)에 태어났으나, 정강(1126)의 변이후에는(남송이 성립한 사건) 그 땅이 금나라에 속하게 되었으므로 금인이 되었다. 정륭 내자(1156)에 이르도록 90여세를 살았다고 한다. 그의 생평사에 관하여는 '의림요전'에 '가세유의, 성식명민, 기문해박'(집안이 대대로 학자출신의 의사들이었으며 그 성품과 견식이 명료하고 민첩하였다. 무엇을 기억하고 묻고하는 것이 자세하고 넓었다)이라는 몇마디외로는 아무것도 알 수 있는 자료가 없다. 그의 이름에 관해서는 사람들이 무이(무이, 우이)라 하기도 하고 무기(무기, 우지)라 부르기도 하는데, 왕제천교정본에 쓰여진대로 무이라 해주어어야 옳을 것이다.
무이는 교정국본이 간행되던 해즈음에 태어났으니까 그 살아있을 동안에, 집안이 유의였고 하니깐, 바로 교정국본을 얻어 볼 수가 있었을 것이다. 교정국본이 세상에 '상한졸병론'의 이름으로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지만 당시 사람들은 그 교정국본을 있는 그대로 읽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난삽한 내용에 족보가 다른 많은 다양한 편린들이 한코에 꿰어져 있을 뿐아니라 맥이니 경락이니 운기니 그리고 토하, 발한에 관한 여러가지 문제가 뒤엉켜 있는 텍스트인데다가 일체의 주석이 없고 고보형등은 몇자 안되는 매우 인색한 서문만을 붙여 놓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성씨는 이 '상한론'을 해석하는 작업을 벌리게 되었다. 그의 주석은 1144년경에 완성된 것으로 사료되는데(성무이와 동시대인으로서 역시 '상한'에 오십여년간이나 미쳐있었던 사람인 엄기지라는 사람이 서를 쓴 것이 갑자 즉 1144년 이었다. 이 사실로 미루어 말한 것이다) 허나 성씨의 생전에는 출판의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 유고를 왕정이라는 사람이 얻어 금·대정 12년 (1172)에 이를 출판하였으니 이것이 '상한졸병론'에 관한 인류의 최초의 주해서인 것이다. 이 성무이의 주해서에 관한 것은 바로 내가 말하는 문헌비평의 제2분과인 '주석학'(exegetics)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내가 또 주석학이라는 분야로 붓을 옮기게 되면 독자들은 또 다시 끔찍하리만큼 길고 지루한 장광설을 들어야 할 것임으로 여기서 생략하고자 한다. 허나 그 요점만을 말하자면 판본학은 원래의 텍스트의 물리적 정황, 즉 그 역사적 성립과정(출판사)을 밝힘으로써 텍스트의 원형에 접근하거나 그 사라진 원형을 복원하고자 노력하지만, 주석학은 그러한 역사적 '오리진'(기원, 근원)에 대한 관심보다는 주어지 텍스트의 역사적·상대적 성격에 더 관심을 갖는다. 어떠한 텍스트든지, 그 텍스트가 일단 성립하면 그 성립한 텍스트에 대한 역사적(시대정신적)이해가 성립하게 마련인데, 그 역사적 이해는 그 텍스트에 대하여 시대적으로 변천해가는 인식의 구조를 반영하는 것이며, 이러한 인식의 구조는 대개 주해, 주소라는 형태로 결집되게 마련이다. 주어진 텍스트를 이해한 자기의 구조를 써놓은 것을 '주석'이라고 한다. 주석자 본인은 항상 자신의 주석이 그 원래의 텍스트의 '원의'를 반영한다고 자부하지만, 그것은 여하한 경우에도 원의일 수가 없으며 그들이 말하는 원의는 그들이 이해한 역사적 해석의 구조일 뿐이다.
성무이의 '주해상한론'은 역사적으로 여러 판본이 있으나, 금나라때 간행된 것은 전하여 지는 것이 없고, 현재 가장 흔히 우리가 '주해상한론'으로서 접할 수 있는 것은, 1545년 가정24년에 간행된 명나라의 주제천이 교정을 가한 판본이다. 지금 중국고전에 관하여 선본으로서 가장 쉽게 얻을 수 있는 판본은 상해항분루에 소장되어 있던 것을 상무인서관에서 1922년에 펴낸 사부홍간본인데, 이 사부홍간정편전집 속에 수록되어 있는 것은 '주해상한론'십권이며, 이것이 바로 주제천의 교정본이다. 물론 주제천의 교정본은 조개미판본을 약 반세기 앞서는 것이다.
그러니깐 우리는 성무이가 '주해상한론'조차도 완벽한 원래의 모습은 알길이 없다. 그럼 성무이가 '주해상한론'에서 주해의 대상으로서 써놓고 있는 '상한론'텍스트와 원래 성무이가 구해보았을 교정국본은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많은 사람이 성무이는 송판 '상한졸병론'을 주해한 것임으로 주해를 제외한 나머지 원텍스트는 송판(교정국판)과 다름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그렇지 않다. 모든 주해자들은 자기의 주해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원텍스트를 개정하거나 가감하거나, 순서를 뒤바꾸거나, 심지어 자기의 생각을 원문인 것처럼 날조해 집어넣거나 하는 것을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지적소유권이 없었음은 물론 판본학에 대한 인식이 근본적으로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최근까지의 주해사의 공통된 현상이다. 왕필이 '주역'이나 '노자도덕경'에 대하여 한 짓도 자기의 주해의 구조나 의미체계에 따라 원문 그자체를 바꾸고 체제를 새롭게 개편했던 것이다. 성무이도 예외가 아니었다. 지금 성본에는 머리에 '연기도설'일권이 붙어있고 각권미에는 '역음'이 붙어 있는데 이것은 성씨기 증입한 것이다. 그리고 송본의 각권중에 중출하는 처방을 모두 삭제해버렸고, 송본에는 정문속에 들어가 있던 25개의 가멸방을 삭제해 버리고 제십권의 미에다 다시 모아 놓았고, 송본의 제팔·제구·제십권중의 '가' '불가'중에 중출하는 조문을 전부 상제해버고, 송본에 있던 소위 왕숙화씨의 교어라고 하는 것도 제거했으며, 임의등씨의 교주부분도 제거해 버렸다.
허나 중요한 것은 이러한 것이 아니다. 바로 성주는 '상한론'에 대한 우리의 이해의 틀을 결정해버리는 중대한 오류를 본의아니게 저질러 버린 것이다. 이것은 '노자도덕경'의 이해가 왕필주의 이해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과 동일한 문제이다. 왕필의 경우는 혼진현학이라고 하는 소위 삼현학의 틀에 의하여 노자를 해석한 것이며, 또 그 양자간에 어느 정도 이해의 틀의 공통분모를 허락할 수도 있지만, 그리고 또 왕필의 경우 텍스트자체의 변화가 '도덕경'에서 '도덕경'으로 라는 체제의 변화는 있을지언정(즉 '도덕'과 '도덕'의 순서의 변화가 발생), 그 내용자체의 엉터리(textual corruption)는 최소한에 머무르는 것이지만, 성무이의 경우는 그 이해의 틀이나 텍스트 그자체의 오류의 폭이 도저히 용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혹자는 왕숙화를 가리켜 중경의 역신이라 했는데 사실 중경도 역사적 실존인물이 아닌며 숙화도 실존 인물이 아니고 보면, 픽션과 픽션에 대한 얘기는 구름잡는 허언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중경의 역신은 숙화가 아니라 성무이이다!
이가 살았던 시대는 주자학이 성립할 무렵이며(이가 주희보다 약 반세기 앞선다)소위 신유학이라고 하는 새로운 도덕형이상학이 성립할 시기며, 이러한 이론적 경향과 더불어 의학에 있어서도 심각한 이론적 탐구가 성행키 시작한 초인의 시기였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속에서 이는 보다 이론적이고 보다 사변적이고 보다 체계적이고 보다 형이상학적인 어떠한 의학체계를 갈구하였고, 이런 자들의 구미에 예외없이 걸리든 것이 '운기'와 '상한'이었다.
'주해상한론'에 대한 최초의 저자라 할 수 있는 이와 동시대인인 암기지가 그 '서'에서 말하기를: '우개인 '내경', 방견중설, 방법지변, 모불윤당.' (성무이의 주해는 '내경'을 주안점으로 삼고 제반 관계된 모든 설을 보조로 삼아 끌어들였기 때문에 112방과 397법을 변론하는 있어서 타당치 아니한 것이 없다)라고 하여 이의 '상한'이해가 '내경'에 기초한 것임을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다. 또 성주를 직접 지칭하는 것은 아니라해도 청대의 종합의서인 '의종금감'의 권일에 '정정중경전서상한론주'의 첫머리에 ''상한론'후한장기소저, 발명'내경'오지자야.'('상한론'은 후한의 장 지가 지은 것이다. '내경'의 깊은 뜻을 밝히고 펼쳐낸 것이다)라는 말을 서슴치않고 하고 있는 것도, 이 모두가 성무이기 '상한'에 대한 이해의 최초의 틀을 '내경'에서 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상한'에 대한 이러한 오류적 인식을 가져도 무방하도록 이미 이에게 주어진 교정국본텍스트가 엉터리텍스트였고, 당·송대의 아주 사변적인, '상한'의 본지와 전혀 무관한 단편들을 그럴듯하게 꿰맞춘 사이비텍스트였던 것이다. 이는 그것을 가릴 수 있을 만큼 지적 능력도 없었고 또 그 근거가 될만한 텍스트를 가지고 있지도 못했던 것같고, 무엇보다도 그의 사변적 관심자체가 송대의 오류적 텍스트의 체제와 부합되는 것이었다. 이의 관심은 어떻게 말안되는 것을 말되게 만드느냐는 것이었고, 서로 상관없는 편린들을 어떻게 서로 유기적 통일을 이루고 있는 듯이 보이게 만드느냐는 것이었고, 또 그렇게 해서 아주 그럴듯한 상한의 거대한 형이상학적 건축물을 건조하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솔직히 말해서 성무이의 주를 읽고 앉아있자면 구역질이 난다. 그것은 터무니 없는 위선이요, 중경의 본지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자신의 편견이요 그가 속한 시대정신(Neo-Confucian paradigm)의 반영일 뿐이다.
내경도 내경나름이요, 상한도 상한나름일텐데, 즉 '내경'에도 '내경'나름대로의 해석의 여지는 많은 것이요, '상한'에도 '상한'나름대로의 해석의 여지는 무궁할 것일진대, 도올선생은 너무도 자기 주관이 강하고 독단이 심해, 성무이와 같은 대가, 상한의 종주라 할 수 있는 금대의 대가를 그렇게 무자비하게 칠 수 있는가? 바로 여기에 내가 말하는 문헌비평의 제3분과인 '해석학'(hermeneutics)이 등장하는 것이다.
주석학(exegetics)은 시대적으로 변천한 주해의 연구를 통해 시대정신의 상대성을 규명할 뿐아니라 오늘 내가 이 텍스트를 다시 주해한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에 관련된 많은 구체적 기술을 습득하는 학문분야이지만 해석학(hermenutics)은 주석전체보다도 텍스트의 개념, 즉 언어, 어휘를 지배하는 인식의 구조(epistemolodgical framework)를 밝히는 것이다. 그것은 역사적 상대성보다는 인식적 보편성을 추구하며, 어느 주어진 시점에 있어서의 개념의 의미구조의 보편성을 추구한다. 주석학은 한마디로 통시적 학문(diachronic science)이라고 한다면 해석학은 공시적 학문(synchronic science)인 것이다. 우리가 의경을 접할 때 그 의경은 우리에게 단순한 종이쪽지와 말장난이라는 언어형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 의경이 쓰여진 시대의 인식을 반영하는 개념으로서 나타난다. 우리는 그 개념을 통해 그 인식의 구조를 '해석'(interpretation)해내야 하는 것이다. 어느 병명이 '내경'에 수록되어 있다고 하자! 그리고 마침 그 병명이 우리가 알고 있는 현대병명과 같은 언어형상을 하고 있다고 하자. 허나 우리는 이 병명이 동일하다고 해서 그것이 같은 병이라고 말할 수는 물론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 언어(병명)를 지배하는 각각의 인식구조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비록 같은 언어일지언정 다른 개념이며 따라서 해석의 구조(the structure of interpretation)가 달라져야 하는 것이다. 더더욱이 병에는 패션이라는 것이 있다. 패션이 옷에만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인간의 몸이 앓는 병도 계절적인 유행이 있을뿐 아니라 시대적 유행이 있는 것이다. 즉 '내경'시대에 사람들이 앓았던 병의 패션과 우리시대의 사람들이 앓는 병의 패션이 같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도 나이브한 오류에 속한다. 내 어릴때만 해도 치과 의사들에게 가장 큰 문제는 충치였다. 허나 요즈음은 충치보다는 잇빨병의 패션이 풍치로 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학문도 충치학문에서 풍자학문(petiodontology)으로 그 첨단성이 옮아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 어릴때는 에이즈라는 병이 없었다. 허나 요즈음 사는 사람들은 모두 에이즈공포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학문적으로는 면역학이 발전하고, 도덕적으로는 성모랄이 바뀌어가고 사회적으로는 '웅진여성'이 문을 닫는 해프닝이 생겨난다. 질병변천사, 질병의 패션은 이와같이 그 시대의 인식구조 전체와 관련되고 있다. 심지어 코호(Robert Koch, 1843-1910)가 결핵균을 발견한것은 당시 결핵으로 시달리던 공장노동자들의 계급구조적인 책임소재를 은폐하기 위하여, 지배계급에 의하여 조장된 연구결과라는 좌파이론까지도 있다. 즉 결핵에 시달리게되는 산업구조의 문제점의 책임성을 모두 결핵균(tubetcle bacillus)에게 돌려 은폐시키려는 음모의 일환이라는 분석인 것이다. 이와같이 질병사를 둘러싼 문제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곧 100주년을 맞게되는 갑오동학혁명도 콜레라라는 '괴질'의 질병사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다.
'내경'을 가지고 '상한'을 해석한다는 것이 그 가능성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인식의 구조를 가지고, 일자가 타자를 왜곡하고 혼동시키는 위험성에 대한 경고를 말하려는 것이다. 재미있게도 조선의 의학사는 '내경'중심이며, '상한'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런데 반대로 일본의 의학사는거의 '상한'일변도라고 할 만큼 철저하게 상한중심일 뿐 '내경'이라는 사변적 언어가 가지고 있는 횡설수설에 대해 큰 관심이 없다. 이것은 강력한 주리론전통을 고수하는 정통주자학의 조선사상사와 주자학을 배격하는 고학(코가쿠)중심의 에도사상사와의 구조적 차이와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이며, 일본 '상한'의 대가들 명고옥현학(1625-1696), 후등양산, 춘천수덕, 송원일한제, 산협동양, 길익동동등이 모두 고학의 영향권에서 태어난 고방파들이라는 사실도 주목할만한 것이다. 춘천수덕은 경도의 거유 이토오 진사이(이승인제, 1627-1705)의 직전 문인이며 산협동양(1705-62)도 고문낙학의 테두라 할 수 있는 강호의 거유 오규우 소라이(적생조왕, 1666-1728)의 문인인 야마가타 슈우난(1687-1752)의 문우다. 이것은 곧 한국인이 원리적인 것을 좋아하는데 반해 일본인이 상황적인 것을 좋아하고, 한국인이 추상적인 것을 좋아하는데 일본인이 구체적인 것을 좋아하고, 한국인이 이념적인 것을 좋아하는데 반해 일본인이 즉물적인 것을 좋아하는 어떤 민족적 아키타입의 성향과도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인의 '상한'이해도 '내경'적이며, 원리적이고 추상적이고 이념적인 것을 좋아해서, 성무이의 주해를 아무런 저항없이 그대로 받아들인다. '내경'은 신유학의 패러다임의 언어를 빌리자면 주해의 보루요, '상한'은 주기의 보루인 것이다. (물론 실제적으로 이렇게 완연히 이분화되지는 않는다.)
중경이 살았던 동한말의 시대상은 그 유명한 조조(155-220)의 삼자 보식(192-232)이 '설역기'에서 읊어 말한대로 '가가유강시지통 실실유호읍지애'(집집마다 나자빠진 시체의 고통이 있고 방방마다 울며불며 흐느끼는 아픔이 있다)라고 표현한 그러한 처절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중경이라는 엑스가 있었다고 한다면 그는 '내경'이고 뭐이고 명문삼초고 금목수화토고 도무지 사변적인 체계를 논할 그런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중경에 대한 최초의 언급이랄 수 있는 동시대의 보밀이 지적한대로, 그것은 탕액의 약방이었을 뿐이며, 효험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다급한 문제상황에서 출발한 것이었을 것이다. 현 '상한론'의 체계가 태양-양명-소양-태음-소음-궐음이라는 어떤 증치의 규합개념(organizing conceps)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어떤 구체적 증상에 앞선 사변적 인체의 체계에서 연역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상한'에 대한 모독이요 모멸이요 몰이해일 뿐이다. 다시 말해서 성무이의 주해가 저지르고 있는 가장 커다란 오류는 상한의 병증의 규합개념으로서 태양-양명 운운한 것을 오행과 장상개념에 기초한 수족삼양삼음의 십이경락체계와의 관련속에서 그 유기적 통일체계를 구축할려고 했을 뿐아니라 그것을 심지어 운기라는 천지운행법칙체계의 도식적 이해와 결부시켜 이해할려고 했다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넌센스다! '상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현대의학적 병리개념으로 말한다면 질병(disease)이 아니라 질환(illness)이다. 질환이라는 것은 환자의 병변을 규정하는 어떤 '개념'(명사)이 아니라 그 개념을 성립가능케하는 과정(process)이며 타각적 증후며 자각적 증상이다. 맥이 부하며, 골치가 아프고(두통) 목덜미가 뻣뻣하며(정강) 열은 나는데 찬 것은 싫어한다(악한), 그러한 구체적 증상을 우리는 '태양병'이라고 할 뿐이다. 태양이라는 말(개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상한'의 첫구절이 말해주는대로 태양의 병됨, 즉 '태양지위병'이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한 증상을 보다 세분화하여 '중풍'이니 '상한'이니 '온병'이니 하고 나눈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데 따라서 구체적 처방을 제시한 것이다. 그러므로 상한고방의 원래 취지는 경락의 장부에서 도출되는 기의 흐름에 따라 장상론적으로 질병을 규정한 것이 아니라 외야의 침입경로에 따라 병변이 진행되는 과정을 논한 것이며 그것은 구체적 장상과 결부된다기 보다는 전체적 체형론에 따라 생각해본것이며(holistic morphology) 그 병변의 전변은 전체적 면역기능의 항진과 약화, 그리고 어떤 사의 추세와 성질에 따라 단계적으로 논의된 것이다.
나는 요번 학기 들어 나의 동급반학생들에게 '상한론'을 강의하기 시작했다. 우리 커리큘럼이 '상한'이 기초가 되어야 할 많은 과목(진단학, 병리학 등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전혀 '상한론'이라는 서적을 접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우리끼리 자습을 해서라도 그 갭을 메꾸자하고 금요일 아침시간이 비는 것을 틈타, 학생들을 좀 일찍 나오라하고 매주 금요일 아침 8시 반부터 10시반까지 사부업간본 '주해상한론'을 텍스트로 하여 나는 학기초부터 강의를 시작했던 것이다(물론 비공식 자습강의다). 사실 내가 여태까지 '상한론'에 대하여 말한것은 학기초 3주에 걸쳐 6시간 강의했던 내용을 옮겨놓은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내가 '상한'은 '내경'에 의하여 해석될 수 없으며 '상한'과 '내경'은 근본적 다른 두개의 독립된 패러다임이다. 아마도 '내경'은 한초에 북방에서 성립한 사변적이고 연역적인 패러다임인데 반하여 '상한'은 한말에 남방에서 성립한 증후론적이고 귀납적인 패러다임일지도 모른다 라고 말하자 '상한'에 대하여 좀 안다고 하는 학생이, 질문을 하기를 텍스트를 원문 그 자체에 태양병이 '내경'에서 말하는 족태양방광경과 관계되는 것이라고 그 구체적 연계를 직접 말하고 있는데 어떻게 양자의 관계를 단절시킬 수 있겠는가? 참으로 똑똑한 질문이렸다.
중국에서 통용되고 있는 '상한론' 일련번호 제8조에:
8. 태양병, 두통지칠일이상자유자, 이행기경진경야, 약속작재경자, 침족양명, 사경부전칙유
(도올역) 태양병은 머리가 아픈 증상이 7일간 계속되다가 7일이 넘어가면 스스로 낫게 되는데 그것은 경락을 모두 돌아 다 소진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다시 발작하여 다시 경을 돌라고 할때에는 족양명위경에 침을 놓아라 그리하여 그경에 전하지 않게하면 곧 낫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성무이가 주를 단것을 보면:
상한자 일일지육일, 전삼양삼음경진, 지칠일상유. 경왈, 칠일태양병쇠, 두통소유. 저칠일불유. 칙태양지야재전양명, 침족양명, 위영면탈지. 사경부전, 칙유.
(도올역) 한에 상하게 되면 첫날로부터 엿새째이르기까지 3양경·3음경을 모두 다 돌아 끝내게 된다. 그러니 이레째 이르게 되면 당연히 낫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경'에 말하기를 이레째는 태양병이 쇠퇴하여 두통이 슬그머니 사라진다고 한 것이다. 만약 이레째도 낫지 않으면 태양경의 시기가 다시 양명경으로 전한 것을 의미함으로 족양명위경을 침을 놓아, 그 사기를 맞이하여 빼앗아 버리는 것이다. 그렇게해서 양명경에 전하지 못하게 하면 곧 병은 낫게되는 것이다.
과연 이래도 '상한'이 말하는 태양병이 '내경'이 말하는 태양경락과 관계없다고 말하실 수 있겠나이까? 과연 도올선생님은 이 똑똑한 학생님의 질문에 뭐라 답하시겠나이까? 아멘! 나무아미타불!
바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한의학은 계속 불필요한 논쟁 속으로 휘말려 들어가게 되고 어느 장단에 춤을 추어야 할지 그 명료한 판단기준이 서지 않음으로 불행하게도 모호하기만 한 가운데, 국가시험을 치루고 면허증을 딴다. 여기에 바로 우리가 여태까지 논의해왔던 문헌비평의 진가가 발휘되는 것이다. 여기에 동원되어야 할 것은 판본학·주석학·해석학에 관한 우리의 모든 지식을 종합적으로 발동시키는 것이다. 판본학의 문제가 어떻게 주석학과 해석학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가? 그렇게 됨으로써 어떻게 우리의 지식이 명료해질 수 있는가? 바로 이러한 문제가 문헌비평의 진가를 결정하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지식이 기초하고 있는 판본의 정당성을 회의해보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성무이의 주해의 기준이 되고 있는 것은 송판교정국본이다. 그렇다면 '내경'에 대해 '탱소'가 있듯이, 교정의서국의 교정을 거치지 않은 송대 이전의 판본은 과연 구해볼 수 있는가? 이러한 일말의 희망에 서광을 비추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이 바로 '당평고본'이라는 엄청난 이벤트인 것이다. 이 판본은 1936년 사계의 권위인 오오쯔카 케이세쯔(대총경절)가 세상에 알림으로써 세계적인 주목을 끌게 되었는데, 그 판본이 당평본이라 불리우는 이유는 이 '당평상한론'이라고 제한 상하이책의 전사본의 말미에 일본의 편작이라고 불리우는 단파진충의 저명이 붙은 당평삼년이월십칠일이라는 오서가 붙어있기 때문이다. 당평삼년은 1060년이며 일본의 헤이안(평안)시대며 우리나라 고려시대 중엽초기에 해당된다(문종조). 그리고 이외로도 '화기씨고본상한론'이라는 제가 붙은 다른 전갈본도 발견되었는데 그 표지만 다를뿐 내용은 완벽하게 동일한 것이다. 화기씨란 화기사성을 가리키며 그 총서의 연대는 정화 2년(1346)이다. 1060년이라는 해는 바로 교정의서국에서 '상한론'이 발간된 것보다 5년이 앞서는 것이며, 물론 그 5년이 앞선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은 일본평안시대때 이미 송본과는 무관하게 그 이전시대에 유입되어 들어온 고본일 것이며, 더더욱 결정적 사실은 교정의서국의 교정이라는 '저주'를 거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물론 현존하는 당평본 (내가 다녔던 동경대학이 자리잡고 있는 혼고 '본향'의 고서점에서 발견됨)은 수사본이며 전갈한 것이래서 고본의 형태는 계속 유지해왔을지언정 그 물리적 판본연대가 그리 높이 올라가지는 않는 것 같다(이 문제에 관한 확연한 고증이 없다). 그래서 이판본을 놓고 강호시대의 위작이라고 하는 각종의 논거도 만만치 않다. 그러나 위서의 근거로 제시되는 것이 단파아충의 오서와 관련된 것이 많고, 또 고증자의 대부분이 한방에 전문식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함부로 그들의 논리를 따라갈 수는 없다. 이것을 단순히 위서로 간주하기에는 교정의서국 이전의 (상한)본에 관한 너무도 많은 결정적 단서를 제공하고 있어서 단순한 후대의 날조로 돌릴 수 없는 정당성을 이 판본은 확보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우리나라에서 이 강판본과 같은 체제의 (상한론)판본이 발견되기라도 한다면 그것은 사계의 혁명적 사건이 될 것이다. 모든 고서나 손사본에 대해서는 그 정확한 판본을 식별할 줄 아는 식견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껍데기만 보고 그냥 (상한론)이라고 쓰여져 있다고 해서 이따위 것은 지금 활자로 된 보기좋은 책이 얼마든지 있다고 하고 팽개칠 것이 아니라 모든 고서는 판본적 가치가 있다는 것을 독자들이 알아 주었으면 한다. 우리나라 민간에 많은 고의서들이 아직도 사장되고 있을텐데(서지학자들의 눈이 의서쪽까지 삐치지는 못하고 있다) 독자중에서 내 글을 읽은 사람들로서 집안이나 연줄로 고의서가 있는 사람들은 반드시 그 판본을 헤아릴 능력이 없을 때는 나에게 가지고 와서 감별을 받아도 좋다. 만약 우리나라 의서가운데 송판본 이전의 고본형태를 보존하고 있는 판본이 나온다면 그것은 세계적인 보물이 될 것이다(나자신은 골동품소장을 증오하는 사람이니 얼마든지 가져와도 빼앗길 염려는 없다. 물론 우리집엔 현재 골동품이 전무하다. 유일한 골동품이 내 대가리다).
나는 강판본의 사진판을 사부총간본 (주해상한론)과 비교해보면서 그 면밀한 검토를 해본 결과, 강판본이 정확하게 어느 시대의 어느 계열의 작품인지는, 아직 나의 (상한)연구의 심도가 그에 미치지 못해 판정을 내릴 수는 없어도, 그것은 도저히 강호시대의 위작일 수는 없으며 분명 교정국의 저주를 거치지 않는 어느 고본계열의 완전한 잔존태임이 분명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 강판본은 우리가 알고 있는 (상한론)의 상식을 너무도 여지없이 깨어버린다.
아까 학생이 제기한 문제는 강판본에서 쉽사리 풀려버린다. 즉 그 구절이 강판본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상한)고본의 원문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후대에 (상한)을 읽는 사람들이 첨가한 자기류의 주석에 불과한 것임을 명백하게 밝혀놓고 있다. 예를 들면 그 문제가 되는 유명한 (상한졸병론집)이라는 서문에서 '사과반의'구문이전과 이후의 문제도 강판본에는 그 이후가 그 이전문장에 대해 첨가한 주로서 처리가 되고 있다. 그리고 후대의 삽입으로 정론이 모아지고 있는 (변맥법)(평맥법)이편이 강판본에는 아예 없으며, '진무탕'이 '현무탕'으로 되어 있고(물론 진무가 아니라 현무가 맞다. 북방의 수호신이 현무며, 현을 진으로 바꾼 것은 송의 선조의 휘를 피한 것이다), '사역탕', '사역산'이 모두 '회역탕', '회역산'으로 되어 있다(물론 '사역'은 사지의 궐역을 회복시킨다는 의미의 '회역'을 자양때문에 착오한 결과임이 분명하다). 이런 것만 봐도 강판본의 진가는 너무도 명명백백한 것이다.
아까 학생이 제기한 문구 자체가 (상한) 원텍스트가 아니라는 사실을 제쳐놓고라도, 그 문구에 대한 성주를 분석해 보면 성기이라는 사람이 얼마나 머리가 흐리멍텅한 사람인가를 잘 알 수 있다. 원문에 '태양병, 두통지칠목이상자유자, 이행기경진고야'라고 한 구문에서 '행기경'의 '기경'은, 전경의 순서를 가지고 말한다면 태양경일 수 밖에 없다. '칠목이상'이라고 말한 것이 꼭 3양3음의 6경락을 돌았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보장은 아무 것도 없다. 태양병은 태양경을 돌게 마련이고 태양경을 7일이상 돌면 다 돈다는 얘기가 된다면, 이 '태양경을 돈다'는 얘기가 지금의 경락유주개념에서 말하는 점경, 순경, 통경운운하는 법칙을 따라 돈다는 것을 의미했다는 보장이 전혀 없는 것이다. 만약 '태양'이 족태양방광경이든 수태양소장경이든지 간에 이를 현재 말하는 '태양경'으로 해석한다면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유주순서로 보더라도 태양경에서 양명경으로 전경한다면 어폐가 있다. 그렇게 될려면 한참을 건너 뛰어야 할 것이다. 족양명위경으로 전달되는 것은 수양명대장경 아니면 수태음폐경이 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 논의되어야 할 핵심적 문제는 텍스트에서 말하는 '태양병'이라는 말과 '행기경'이라는 말의 진정한 관계며, '기경'이 꼭 '태양경'을 말한다고 할 수 있는 보장이 없으며, 더더욱 '태양경'이 지금 우리가 생각한다는 '족태양방광경'을 정확하게 지칭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아무런 근거도 없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족태양방광경'의 유주가 바로 독맥 우방으로 등뒤를 타고 가고 있는 사실에 비추어, 형태학적으로 말할때도 외사가 제일 먼저 접근하기 쉬운, 더군다나 엎드려 논.밭일을 하는 과거 농부(서민)들에게 있어서는 등뒤야말로 가장 열사와 관계되어 직접 노출되는 곳(족태양방광경이 흐르는 자리)이라는 점에서 그 막연한 형태학적 논의로서 '태양경'을 상정할 수는 있으나, 그 이상의 논의는 (상한)원문의 고의에 의거하여(지금 이 교정본텍스트의 진실성을 받아들이는 가설위에서라도) 왈가왈부 할 수가 없다.
성무이는 '침일이상'을 첫째날부터 여섯때날까지 하루에 하나씩 '3양3음'6경락을 돌고나서 제7일째라고 해설했는데 이것은 참으로 웃기는 해설이라 아니할 수 없다(이런 생각이 어불성설임은 이미 청대의 사금(원백)이 논파한 바와 같다). 만약 성씨의 말대로라면 3양3음 6경맥을 다 돌았으면 그 다음에 올 때는 또다시 태양경으로 돌아올 것이지 어찌 '양명으로 전한다'함이 있을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왜 하필 6경맥만을 얘기하고 수족12경맥은 말하지 않는 것일까?
이러한 번쇄한 논의를 아무리 얘기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결국 우리가 알아야할 것은 성기이가 이해하고 있는 그 인식의 틀이 (상한)의 고의원들과 다른데서 생기는 것이다. (상한)의 고의는 중후론적(symptomatological)인데 반해서 성주의 의각은 도식론적(schematological)이라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무엇이든지 어떤 연역적 도식(schema)을 벌리지 아니하고서는 한마디도 못하는 것이 성기이의 기본입장이며 이것은 매우 극단적 송유의 병폐를 나타내는 것이다. 허나 우리나라의 의가들의 생각의 틀은 애강 성기이의 아류로 보면 족하다. 그리고 더우기 그 다음에 나오는 제9조, '태양병, 욕해시, 종사지말상'따위의 운기론적 언급에 이르게되면 더더욱 신이나서 춤을 추게되고 벼라별 도표들을 다 그리게 되는 것이다. 참으로 한심한 추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한 운기적 도식은 (상한)과 거기가 멀다. 물론 원텍스트에 그 따위 말들이 들어가 있지 않음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상한)의 기본적 단지 상한(한사에 얻어 맞았다)이라는 협의의 열성을 치료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그러니까 사실 (수지)나 (당지)에서 말하는 '장중경엽방'이라는 명칭이 그 원제목으로서 더 타당한 것이다) 결국 인체의 질환을 입망의 원칙에 의해서 볼려고 했다는데 그 위다상이 있는 것이다. 입망(물론 이말도 후대에 정리된 개념)이란 음양, 표리, 한렬, 허실의 매우 단순한 형태학적 원리(morphological principle)다. 그리고 그에 따라 약방의 원리는 하 3법이다.
우리나라 의가중에서 (상한)을 제대로 읽은 자는 동무 이제마(1837-1900) 일인이 있을 뿐이다. 우리나라의 용렬한 후학들이 이제마의 본의를 헤아리지 못하고 이제마의 사상이 말하는 장상을 오행개념에 배속새켜 운운하나 그것은 이제마의 본지와 크게 어긋나는 것이다. 동무의 근본취지는 오직 음양에 있을 뿐이요, 오행을 취한 바가 없다. 그리고 관념적인 경락을 말한것이 아니라 실제의 중후론적 신체의 형태(Morphology of Mom)만을 말한 것이요, 그가 말하는 사상약방도 결국 음양 승강을 기본으로 한 것이다. 이것은 오로지 (상한)을 제대로 읽는 자만이 말할 수 있는 것이니 나 도올은 동무의 혜안에 찬탄을 금치않을 수 없다. 허나 동무론은 본지에서 벗어남으로 더 이상 논의할 생각이 없다.
내가 여기 역설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나라 한의학계를 둘러싸고 있는 정보의 저질성이다. 학생들의 고민과 방황이 바로 이러한 정보의 저질성에 기인하는 것이며,정보가 정확하지 않을 때는 애매하니깐 모두 본의 아니게 신비주의(myscicism)로 흘러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곤 말한다. 한의학은 철학이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상한론)에 관해서도 학생들이 가장 많이 읽는 책은 채인식선생의 (상한론역전)이라는 책이지만, 이 책은 판본학적 고려가 전혀 결여되어 있을 뿐 아니라, 해석학적 성찰이나 엄밀성이 부족하다. 그냥 한문만 해석해놓고 약간의 주석학을 덧붙인 것일뿐인데 그것조차 매우 부정확한 것이다. 학생들에게는 그러한 책조차 번역되어 있어 우리말로 읽을 수 있다는 것이 고마울 뿐이다. 허나 그정도의 수준의 책을 보고 (상한론)을 운운하는 것은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 그렇다고 중국사람들이 근자에 펴낸 책들도 그리 대단한 것이 없다. 마마후후(마마후후=두리뭉실 적당주의)로 말하자면 중국사람이나 한국사람이나 사촌지간이니깐.
우리는 한의학계의 선대의 업적을 조금도 폄하해서는 안된다. 그들이 살았던 불운한 시절, 그렇게 엉성하게 살았어도 모든것이 굴러갈 수 있도록 사회분위기가 진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나마 그들이 이룩한 업적은 우리의 발전의 밑거름으로서 그 가치를 충분히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저지른 짓 가운데서 파렴치한 짓들,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짓들, 우리의 가치관을 흐리게 만드는 짓들, 이런 짓들의 인속성을 용서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그 고리를 끊어야 하는 것이다.
지금 나는 살아계신 여러 선생님들의 명예를 훼손시키는 포문을 열기는 싫다. 우선 그런짓을 하면 내 학점에 지장이 있을 것이고, 내 졸업에 지장이 있을 것이고, 좁고 좁은 동네에서 내가 발붙일 곳은 없어져 버리고 말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허나 손을 가슴에 얹고 한번 이 후학의 말을 상고해 보시는 것도 멀게 내다볼 때는 해가 됨이 없을 것이다.
우리한의학계에 쏟아져 나오고 있는 우리말로 된 거의 모든 텍스트가 백퍼센트 최근 중국의학계에서 쏟아져나온 책들을 베낀 것이다. 물론 해적판들도 많이 나오고 있지만, 정말 몇명의 한의학도가 그것을 정확한 중국말로 읽고 해독하는지는 의문스럽다. 그런데 이 '베꼈다'하는 문제는 문화의 이동이라는 측면에서 하등의 나쁜 것이 아니며 모택동석권이후 중국의학계의 놀라운 문헌학적 발전의 업적을 흡수하는 방편으로서 많은 교수님들의 수고스러운 업적을 우리는 높게 치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베끼는'데도 도리(right moral)가 있고 도덕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한의학계의 일부 교수님들 그리고 석학님들은 이러한 기초적 도리나 도덕을 좀 결여하고 계신 듯 하다.
'베끼는 것'을 우리는 '번역'(translation)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 번역이라는 것은 반드시 저자(author)가 있고 역자(trasnstor)가 있어야 한다는 것은 국민학교일학년이라도 다 아는 일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한의학계의 텍스트는 대개가 저자도 없고 역자도 없다. 이것은 정말 불가사의한 일이다. 다시 말해서 베끼긴 베낀 것인데 어디서 누구의 것을 베꼈는지, 그리고 어디까지가 남의 것이며 어디까지가 내 말인지, 이런것들이 도무지 구분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한의학계의 대가들의 책일 수록 대강 이러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이 만들어 낸 말이 아무개 '편저'라는 말과 이 지구상에 족보가 없는 '편저'이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여기저기 중국책에서 따다 번역을 해서 모자이크 모양으로 주어 모아놓았다는 얘기인데, 이러한 편역의 경우도 반드시 원저의 부분을 정확히 밝히고 번역자의 이름을 밝히고, 그것을 다시 에디팅한 사람의 이름을 밝히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중국과 우리나라가 최근까지 정식수교가 없었기 때문에 그런 짓들이 법적으로 묵인될 수 있을지 모르나, 세계에 통용되는 저작권법이나 지적소유권의 법률상식으로 말하자면 우리나라 한의학계의 거의 모든 텍스트가 위법적인 책들이다. 왜 같은 고생을 하고 그렇게 떳떳치 못한 위법적 행동을 하는가? 이것은 우리 한의학계를 지배하는 출판업자들의 무자비한 상식과도 연계되어 있는 폐해지마는 그런 짓들은 묵인해온 우리 한의학도들에게 그 일차적 책임이 있는 것이다.
중국사람들의 학문적 업적을 베껴내면서 왜 중국사람 저자(author)의 이름을 밝히지 않거나, 기껏해야 밑이 구려 서문에다가 몇줄 써놓고는 표지에는 밝히지 않는 그런짓을 하는가? 일본사람들의 저작이나 서양사람의 저작일 경우는 대부분 일반상식을 따라가면서, 왜 유독 중국책을 베끼는데는 동초서초하면서 원저자를 흐리는가? 이런짓을 하는 모든자들은 아무리 겉표지에 '지음'이라 하지 않고 '편저'니하는 애매한 소리를 했다해도, 그것은 엄밀하게 말해서 표절(plaiarism)로 간주될수 밖에 없다. 이 표절은 스구학계나 일본은 물론 한국의 일반학계에서도 발각이 될 적이는 교수로서의 자격을 박탈당하는 불명예스러운 죄에 해당되는 것이다.
이러한 표절적인 저작행위가 우리나라 한의학계에 미치는 고질적 병폐는 언어의 책임소재가 불분명하다는 것이며 따라서 학문의 엄밀성이 축적되어나갈 수 있는 기본적인 룰(rule)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의학계의 출판문화가 내가 말하는 이 한마디만 수정을 해도 한의학은 곧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될 것이다. 사실 이것은 상식에 속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더더욱 비상식적인 사실은, 젊은 학자, 젊은 교수들이 자기들의 선배교수들이 한 짓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젊은 학도들일 수록 더욱 열심히 '표절장사'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고득도의 '중국의학사략'(태원: 유서인민출판사, 1979)은 분명 가득도라는 단일 인물의 스칼라십에 의한 단독저술이다. 즉 그에게 지적소유권이 인정되는 그의 연구의 결과로 세상에 떳떳이 나온 현재로서 가장 널리 읽히고 있는 중국의학사책이다. 이 책이 우리말로 번역될 때는 분명히 '가득도저, 아무개역'으로 나와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소위 '편저자'의 변은 그 내용만으로는 부실함으로 그외의 여러가지 자료를 보완하여 좋은 책을 만들고 학생들에 편의를 제공하기 위하여 적당히 짬뽕한 편역저술을 했다고 말하고 있다(이 경우 편역에 참고된 서목을 서문에 밝히었고 또 그 전체모습이 당시의 한의학계 수준으로 매우 성실한 노력의 결과라는 점이 인정됨으로 나는 이 행위를 표절로서 간주하지 않는다. 단지 그런 발상이 후학들에게 파급되는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으로 그칠뿐이다. 특정인데 대한 비방의사가 전혀 없음을 밝혀둔다). 허나 이것은 사계의 리더십을 장악하고 있는 책임있는 권위자라며는 삼가해야할 잘못된 발상의 소산이다. 우선 가득도의 '사략'부분의 번역을 엄밀히 살펴보면 정확성이 매우 부족하며 기호의 일관된 약속도 결여되고 있다. 그렇다면 기타 추가된 부분들이 얼마나 정확하게 번역된 것인지, 그리고 타 저술의 경우 한국말로 이미 번역된 것을 옮긴 것도, 허가없이 마음대로 인용될 수 있는 것인지, 나는 도무지 의문이 가는 점이 한둘이 아니다. 솔직히 말해서 그 편저자는 이름만 도둑질 해서 걸었을 뿐 그 실제작업은 밑에 있는 조교나 대학원생들이 한짓이라는데 본질적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번역짬뽕행위의 가장 고질적 병폐는 정보의 정확성을 일일이 대조해 볼 수 있는 정확한 기준이 독자들에게 제공되지 않는다. 가득도의 '중국의학사략'이 우선 완벽한 원문 그대로 정확하고 정밀하고 정직하게 우리말로 번역되어 있다면, 우선 독자들은 '번역의 수준'을 가늠질 할 수 있을 것을 정확히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곧 가득도를 통하여 중국 의학계의 의학사서술 수준(the standard of medical historiography in China)을 정확히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한 평가가 학생들에게 주어지게 될 때만이 비로소, 학생들 사이에선 아! 번역이 개판이라든가, 번역이 잘못되어 잘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많으니 졸업하면 내가 후학들을 위하여 보다 정확한 번역을 해야겠다는 등의 생각을 하게 될 것이며, 또는 번역의 문제를 떠나 가득도라는 중국학자의 중국의학사사락이 마음에 안든다든가, 그 서술내용의 정보수준이 박약하다든가, 그러니 '사고전서'를 다 읽어서라도 가득도보다는 더 훌륭한 의학사가가 되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일어날 수 있게 될 것이다.
허나 지금 우리나라에서 통용되고 있고 한의과대학의 모든 학생들이 배우고 있는 모든 '중국의학사'나 '한의학원론'이 이러한 생각을 가질 수 없도록, 즉 학문발전의 기틀이 될 수 있는 책임있는 기준을 세울 수 없도록 만들어져 있다. 이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사실 대학교에서 공부한다는 행위는 기초적 입문텍스트 한권의 명저로 끝나는 것이며 대학생활이란 그것을 세분하여 배우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철학과에서 4년을 공부한다는 의미는 버트란드 럿셀의 '서양철학사'나 램브리히트의 '서양철학사' 한권을 개론적으로 배우고 그 다음에는 그것과 일관된 내용을 지니는 작가들의 생각을 각론적으로 배워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생물과 4년도 킴볼의 '바이올로지'한권을 정확히 배우는 과정이라 말하여도 어폐가 없을 것이며, 서의과대학 6년이래야 몇권의 해부학, 생기학, 병리학교재를 일관된 학문적 방법과 인식위에서 세밀하게 배우는 행위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 한의학계에는 이런 기본적 텍스트가 없을 뿐 아니라 현주소를 도무지 알수 없는 유령같은 정보만 떠돌아 다니고 있다. 젊은 교수님들! 지금부터라도 정확히 자기실력으로 자기책을 펴내는 작업을 하시든가, 번역할 때는 반드시 원저자를 밝히는 책만을 내십시요, 뭐- 그런게 어렵습니까? 여태까지 선배교수들이 원저자를 밝히지 않았던 이유는 남의 책을 베꼈다고 하면 자기 권위가 떨어지는 것으로 알았고, 또 중국백화나 한문에 자신이 없어, 또 한글의 실력이 부족하여 자기번역의 정확한 실상이 공개되는 것이 두려웠던 까닭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행위를 불법이라거나 학자의 양심에 어긋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없었던 시대의 소산이었다. 허지만 지금도 실력있는 젊은 교수들이 출판업자들과 짜고 과거 선학들의 타성을 되풀이하고 있다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보기 딱한 노릇이다.!
그리고 한의학관계 출판문화에 대해 한마디만 첨가하자면 경악스러운 수준의 오식의 방치다. 도무지 책임있는 교정과정이 없는 것같다. 한자, 한문이 유독 많을 수 밖에 없는 한의학교재에 튀어나오는 한자의 오식은 현재 내가 경험하는 우리나라 학계의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수준의 열악한 정황이다. 일례를 들면 전국한의과대학의 통합교재로 나온 '학' 상, 하권이 매 페이지마다 옛날 우리집 풍성한 앞냇길에서 그물에 붕어 건졌던 것보다도 더 두루룩 오식을 건져낼 수 있다. 매시간 수업을 받는 것이 오식건져내는 재미로 앉아있다고나 할까? 그런데 학생들은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그러한 것이 분노의 대상이 되기보다는 적응의 대상으로 알고 있는 것 같다. 학문이 어디서부터 고쳐져야 하고, 학문이 어떻게 발전하는 것인지, 도무지 도무지 그 길을 모르고 가는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수학의 길을 거치고 나면 자신도 모르게 오식투성이의 엉성한 인간이 되어버리고 말았다는 사실도 알아차릴 수 없게 되는 것 같다. 매주 엄청난 정보를 담아나오는 '타임'지가 단 한 자의 오식을 발견할 수 있는가? 문화가 무엇인가를 한번 생각해보자? 학문이 과연 어떤 것인지를 같이 생각해 보자! 우리의 혼란이 과연 어디서부터 오는 것인지 한번 생각해보자!
우리나라 한의학계의 치부를 드러내는 표절문화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시중에 돌아다니고 있는 우리나라의 대표적 의서라 할 수 있는 허준의 '동의보감'국역본의 예이다. 현재 시중에서 살 수 있는 '동의보감' 국역본은 남산당에서 발간한 것으로 원본과 곡역증보판 두책이 한 상자속에 들어가 있는 큰 책인데, 그 초판 발행일이 1966년 8월로 되어 있다. 허나 그 초판이라는 것은 원래 풍년사라는 곳에서 원문, 번역문 단권으로 발간한 것은 1969년 8월의 일인 것같다. 그런데 남산당에서는 증보판이라하고 많은 수정을 가한 것처럼 이야기 하고 있지만 풍년사본과 남산당본을 비교해보면 완전히 동일한 지평으로 찍어낸 동판인쇄물임이 확연히 드러난다. 동판에다가 한두글자 오려낸 수정 '쏘강'을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같은 지형인 이상 '증보판'이라 함은 거짓말에 속하는 것이다. 허나 그런 것은 중요한 얘기가 아니다. 현존하는 남산당판이 되었든, 풍년사판이 되었든 그 겉표지에 보면 허준원저로 되어있고 책임감수라하여 한의학계의 기라성같은 네분 선생님의 이름이 책임감수라는 명목아래 나열되어 있다:김영훈, 신활구, 김재성, 배원식. 나는 이 네분 선생님들이 과연 이책을 펴내는데 어떠한 수고를 하셨는지에 관해서는 시비를 삼을 생각이 없다. 단지 그 분들의 양심에 호소할 뿐이다. 가장 결정적 사실은 허준원저와 책임감수라는 말만 있을 뿐 역자의 이름이 없는 것이다. 이것은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우리나라의 대표 의서라고 하는 '동의보감'이 최초로 우리말로 번역된 계기는 어떻게 이루어진 것인가?
풍년사에서 간행한 '동의보감'(1966년판)의 머리에 보면, 겅희대학교의과대학장 박홍렬, 대한한의사협회회장 이범성, 대한약사회회장 조성호, 그리고 풍년사 사장 홍종하의 추천사와 머리말이 써있는데, 그 내용에 일체 그 역자에 관한 얘기가 없으며, 박홍렬학장은 '홍종하사장이 웅지를 가지고 오랜 세월에 거액을 들여 국역에 착수하여 완성을 보게되엇다'는 등의 책임질수 없는 허황된 말을 하고 있다. 참으로 서글픈 일이다! 이 개명한 세상에 거짓말은 있을 수 없다. 출판의 역사란 뒤져보면 그 정확한 물증이 밝혀지는 것이다.
조선문명고금의 거족적 자랑이라고 할 수 있는 '동의보감'은 불행하게도 지금의 통용언어와는 다른 한문으로 쓰여진 책이다. 그래서 국민의료와 직접 연결되는 소중한 자산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을 수 잇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 '동의보감'을 우리말로 옮겨 후학들이 알아볼 수 있도록 그 웅혼한 뜻을 세운 사람은 우리에게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초야의 선비며 이당 김의 적통을 이은 화백이다.
감히 의종의 성서의 '동의보감'을 번역한다는 것은 마치 모기가 산을 지고 바다를 건너는 것과 같은 외람된 일인줄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차제에 졸렬하고 소루하나마 정성을 다하여 이 책을 번역해 내기만 한다면 원문을 해독하기 곤란한 학구제현에게 모래더미 속에서 사금을 줍는 것과 같은 아쉬운 방편이 다소나마 있을 것이요, 또 이것을 토대로 하고 나아가서는 자극을 받아서 좀더 잘된 번역이 나올 동기가 된다면 나의 이 우거가 노상 헛된 것이 아니라는 망상이 시작하여서 거의 만용에 가까운 집필의 결심을 해 본것이다.
세상에 첫선을 뵌 '동의보감' 첫머리에 나오는 이 구절의 주인은 운전 허민선생이다. 허민은 1911년 11월 29일(음)경상남도 합천군 가회면 득촌리에서 허용표의 4남1녀중의 첫아들로 태어났다. 그 조부가 (영규집)이라는 문집을 남긴 사실이 말해주듯이 학문이 깊었던 집안이래서 5, 6세때부터 영남의 산저의 금황의 문하로 들어가 한학의 수업을 받아 12세에는 사서삼경을 소독하여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신문화에 대한 동경이 강해 득촌에서는 최초로 머리를 잘랐고 1920년에 창간된 '개벽'을 구독해보기도 했다고 한다. 14세때 해주 정씨 수근이라는 규수를 맞아 결혼하였는데 그 장인이 바로 '동의보감'에 정통한 인물이었던 것같고 '동의보감'에 눈을 뜨게 된 것도 바로 진주 근처 까꼬실마을에 대대로 살아왔던 만석꾼인 장인 덕분이었던 것 같다. 그뒤 허민은 서울에 올라가 이당 김은호의 문하에 들어가 20세에는 선전에 입선한다. 그 후로 그는 후소회의 멤버로 활약하였고, 운보 김기창, 내고 박생광, 소정 변관식, 벽산 정대기, 청남 오제봉등의 서화가, 그리고 최범술, 김단부, 김법린과 같은 지사와 깊은 교우관계를 가졌다. 그의 화풍은 화조유수를 주제로 삼은 것이 주이지만 운포의 초기그림에서 보여지는 것과 같은 정교한 신선도나 인물도, 그리고 대담한 풍속도도 있으며 특히 한학의 달인이었던 그의 초서는 천하의 일품이다. 허나 그의 일생을 결정지운 사건은 당대의 모든 깨인 지식인이 그러했듯이 좌익사상에 탐닉하게 된 것이었으며 해방후 그는 남로당의 거물급 중책을 맡았다가 서대문에 수감되는 신세가 되었고 6 25때 인민군에 의하여 출옥되지 않았더라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을 것이라고 주변의 사람들은 말한다. 허나 그는 그뒤로 계속 좌익이라는 딱지때문에 세상에 자신을 드러낼수 없는 사람을 살게되었고 그것이 바로 서화와 한적의 국역사업에 그를 몰두하게 만든 끊임없는 계기를 만들어준 것 같다.
운전 허민은 6 25직후 지금 내가 살고있는 이리 남중동으로 도망와 그곳에 손수 흙을 이겨 토담집을 짓고 4년이나 살았다. 다시 쫓기게 된 그는 밀양, 대구를 거쳐 결국 부산 수정동 판잣촌에 정착하게 된다. 그가 '동의보감'을 국역해야겠다고 결심을 한 것은 순수한 한학자로서의, 한문이 낯설어져 가기만 하는 후학을 위한 문화적 사명감이외의 어떤 동기도 찾아볼 수 없다. 1961년에 착수하여 1964년에 완성했는데, 그 원고정리를 도왔던 딸 허혜수(4녀1남중 막내딸, 1944년생)를 나의 제사 김현박사의 소개로 만난 적이 있다. 그는 탈고된 '동의보감'을 아무도 출판시켜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부산 동광동에 있었던 국제출판사에서 자비로 상, 중, 하 세권으로 출판했는데 출혈이 커서 그나마 영도에 마련했던 2층집을 빚으로 날려야만 했다. '동의보감'의 국역판 출판소식을 들은 당시 한의학을 강습했던 대구의 동양종합통신대학은 그 지형을 사다가 바로 그해 1964년 11월 30일에 동양종합통신대학교육부발행으로 상, 중, 하세권으로 출판했다(발생인:박중갑). 나는 이 동양종합통신대학교육부발생의 세권짜리 (상역동의보감)이라는 책을 소장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분명하게 '허매역'으로 못박혀 있다. 지금 이 동양본(동양종합통신대학발생본)을 풍년사=남산당본과 비교해 보면 후자가 새로 제판된 것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동양본의 번역을 거의 그대로 옮기되 약간의 수사적인 표현만을 바꾼 것이다. 동양본을 풍년사에서 사가 다시 제판하는 과정에서 역자의 이름을 빼버린 것이다. 어찌 판권을 샀다하는 것이 그 역자의 이름마저 사버릴 수가 있단 말인가? 그리고 어찌 역자가 엄존하는데 역자의 이름없이 엉터리 감수자의 이름만 나돌아 다니는가? 오늘날의 눈으로 볼때 허민선생의 번역은 부정확한 곳이 적지않으며 그 표현도 어눌한 곳이 눈에 띄나(물론 남산당본도 그 폐습을 그대로 답습) 어찌되었던 실상 원전만을 놓고 초역한다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그 공은 청사에 기리 남은 대업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름이 사라녀, 애통해하는 유족의 서글픔이라도 진실을 밝히는 우리 한의학도들은 달래주어야 할 것이 아닌가? 현 남산당'동의보감'본에 운전 허민선생의 이름이 역자로서 회복되어야 한다(가족들은 풍년사 최초의 판본에는 허민이 역자로 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그 초판본을 나는 확인하지 못했다). 그리고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 한의학도들은 '동의보감'의 저자 허준이라는 이름과 함께 그 보감의 최초의 국역자로서의 운전 허민의 이름을 같이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훗날에 '동의보감'의 위대한 새 번역이 나올때 허민선생의 업적을 충분히 평가해야 할 것이다.
허민은 그후로도 '열하일기'를 완역했다. 그리고 1967년 8월 9일 저녁 5시 25분 부산 당평동4가 59번지에서 57세로 일기로 영면했다. 그의 머리맡에는 빈 소주병 하나와 이연의 '의학입문' 번역원고가 쌓여 있었다. 그리고 그리다 만 화조도 한폭만 서글프게 뒹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