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인 캠페인 – 28 days later 】
한창 유행하며 만들어진 좀비 영화의 하나로 「28일후(28 days later)」라는 영화가 있다. 좀비(Zombie)는 부활한 시체를 일컫는 말로 지능은 없고 인육을 먹고자 하는 특성을 가지며 좀비에게 물린 사람은 바로 좀비가 된다는 형식으로 많은 영화들이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있다.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으나 가까이에서 보면 빨간 눈을 갖고 일그러진 표정으로 사람에게 달려드는 모습으로서 인간다운 점은 하나도 없다고 볼 수 있다. 바이러스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좀비로 변해버린 것은 커다란 고통이라는 것이 충분히 전달되고 있다고 본다. 살기위해 주저 없이 아는 이를 또는 알게 되어 의지하게 된 이를 처단해야 한다는 것에 비장함이 돋보일 만큼, 좀비에게 쫓기며 결국엔 붙잡혀 물어 뜯겨지고 그렇게 물어 뜯겨진 사람이 곧바로 좀비가 되어서는 같이 도망을 치던 사람을 뒤쫓는 것이 반복인 것으로, 대부분의 영화에서는 좀비를 멋지게 물리치며 한 사람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며 구해주는 히어로가 있는 것이 특징이었다. 역시 ‘28일 후’라는 영화에도 인간다움이 전혀 없는 좀비가 가득한 도시에서 목숨을 부지한 생존자들이 서로를 의지하며 좀비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애쓰고 구출될 희망을 갖고 떠난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이 영화를 소개하는 이유에는 이 영화에서 인간에 의한 “강간”, “윤간”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황폐해진 도시에서 살아갈 이유보다 죽음의 공포가 너무나도 깊게 드리워져 하루하루가 버거운 상황에서 남자들이 똘똘 뭉치기 위해 찾아낸 희망이 바로 “여자”라는 내용이 있었다.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남성의 욕구는 발생되면 꼭 충족되어야 하는 것인가? 어떤 수단을 사용해서라도 충족 되어야만 하는가? 라는 생각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여성을 계획적으로 윤간하려던 그들을 좀비가 무참히 물어뜯을 때는 동정도 통쾌함도 느낄 수가 없었다. 다만 피해자의 입장에서 그들의 나약한 몸부림이 좀비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달성될 수 있다면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을 뿐이었다. 내용인 즉, 민간인 4명이 라디오에서 안내되고 있는 ‘보다 안전한 곳’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10대 소녀, 그녀의 아버지와 합류하게 된 젊은 남성 그리고 젊은 여성은 군인들이 안전을 보장한다는 그 곳으로 함께 가기로 뜻을 세웠다. 생각보다 쉽게 도착한 듯 보였다. 군인들은 그들에게 최적의 안전을 보장한다며 호의를 베풀었다. 지뢰가 박힌 초원과 높은 담벼락, 따뜻한 물 그리고 용감한 군인들이 있다며 안심을 시켰다. 이렇게 영화가 끝나는가 했다. 살짝 싱거운 좀비영화란 생각이 들었지만, 얼음 땡 놀이가 연상되는 좀비와의 구도는 확실했다. 그런데 갑자기 영화에서 더욱 긴장이 되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생존자의 아버지가 좀비로 감염되어 사살된 이후 슬퍼하는 딸과 젊은 여성에게 예쁘게 치장을 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같이 있던 젊은 남성은 사살의 위험에 놓여졌다. 당연히 그는 안 된다고 군인들을 향해 반항을 했으니 말이다. 무엇을 말인가? 무엇이 안 된다고 그 민간인 남성은 반항을 했던 것인가? 좀비로부터 해방이 되었다고 생각하기도 잠시, 안전하다고 안내 받은 그 참호에서 인간답게 생긴 사람들로부터 생명은 지킬 수 있다는 확신은 받았으나 성적자기결정권, 인격권은 훼손 될 수 있다는 통보를 그녀들이 받은 것이었다.
세상이 좀비로 망하는가 했는데 이는 사람으로 망조가 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너무하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피 한 방울로 감염된 사람을 순식간에 처단하는 것을 보면서도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어’라는 공감이 되었는데 이 상황은 “너무하다!! 너무해!! 잔인해!!!”라는 생각만이 지배적으로 들었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 ‘남성들의 욕구는 꼭 충족되어야만 하는가?’, ‘누가 욕구를 충족하며 살라고 가르쳤는가?’, 아니 ‘누가 욕구를 그런 식으로 충족하고 살라고 가르쳤는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누구의 잘못인가!! 그렇게 사는 놈, 그렇게 밖에 살줄 모르는 놈에 대해 누가 책임져야 하는가! 목숨을 앗아가는 좀비와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는 수치심을 주려는 사람과 누가 더 나쁜지 자로 꼭 재봐야 아는가! 사탕으로 아이들을 유인하여 사욕을 채우는 아동성폭력자와 다를 것이 뭐가 있는가. 그동안 배워온 논리대로 성폭력은 남녀 간의 차이의 문제가 아니라 힘의 불균형의 문제라는 것이 확 와 닿았다. 약자와 강자. 군인과 민간인, 총으로 위협하는 자와 위협당하는 자, 수십 명의 남성과 두 명의 여성, 수십 명의 같은 생각과 목적 그리고 단 한명의 다른 목적 다른 생각.
더 슬픈 것은 여성 자신들 만으로는 그 버거운 현실에서 벗어나오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단지 맞지 않기 위해 맞서는 것과 약을 먹고 죽을 생각을 하는 것이 전부였던 그녀들이었다. 이것마저도 제지당해 끌려가야 하는 현실만이 앞에 놓여 있었다. 그런 그녀들에게 희망이 있다면, 다른 생각을 가진 단 한 명의 남성이 그곳에 있다는 것이었다. 그로 인해 그녀들은 죽지도 성폭력 피해를 입지도 않았다. 단 한 명의 남성이 그 남자들이 미워서 방해(?)를 한 것인지, 그녀들이 좋아서 구하려 한 것인지, 이건 아니다 싶어서 영웅심이 생긴 것인지 구분을 해보고 싶지만, 그럴 수 없을 만큼 그 남성의 행동으로 인해 그녀들이 맞이한 안도가 우리에게도 찾아왔다. 군복과 총․칼이 안전을 보장하는 것에서 위협으로 변해 다가오는 현실에서, 무장한 수십 명의 군인들 눈빛아래 누가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좀비와 힘을 합쳐서(?) 한 남성이 그녀들을 구했다. 사람을 보면 달려드는 좀비와 약자를 보면 괴롭히려는 강자와 무슨 차이가 있는가?
잘못된 한 가지 목적으로 달려드는 사람에게서는 좀비에게서 느끼는 공포와 똑같은 공포가 엄습해 올거란 생각이 든다. 영화에서 그녀들을 때리고 복종하라고 하던 군복 입은 녀석이 좀비가 따라오니까 총알을 다 쓰고는 무서워서 구석에 숨었다. 결국엔 민간인 남성이 맨 몸으로 그녀들을 구출하러 오다가 마주치게 되니 군인은 혼자만 두고 가지 말라며 살려달라고 했다. 좀비가 쫓아오니 민간인도 뛰고 군복 입은 이들도 뛰었다. 그런데 좀비에게 민간인 남성은 잡히지 않았는데, 군복 입은 사람들은 잡혀서 무참히 물어 뜯겼다. 군복 입은 사람들은 다 죽었다. 민간인 세 명은 살아서 도망쳤다. 그냥 살려고 도망치면 죽는다. 누군가를 위해 살아야겠다고 생각하면 산다. 영화를 보니 그런 것 같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이 사회구조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자. 내가 살아주길 바라는 사람, 나를 살려주러 올 사람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내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가 다른 이의 삶도 윤택하게 하는 것이어야 함을 상기시키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행가래로 12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