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조선 전기 경상북도 영천 지역의 효자.
[가계]
청주 양씨는 중국에서 계출(系出)된 성씨이며 시조는 양기(楊起)이다. 공민왕(恭愍王)이 북경에 머무르다가 왕위에 오르기 위하여 고려 충정왕(忠定王) 3년(1351)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와 같이 귀국할 때 노빈도령(魯嬪都令)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체찰사(軆察使) 노국삼명사신(魯國三命使臣)으로 고려로 들어왔다. 후에 고려에 귀화하니 벽상삼한창국공신(壁上三韓昌國功臣) 상당백(上黨伯)에 봉하고 해주(海州)와 송화(松禾)를 식읍(食邑)으로 하사하였으나 사양하여 받지 않자 다시 청백리(淸白吏)를 봉하였으며, 사후 시호를 충헌(忠憲)이라 내렸으니, 공의 증조가 된다.
조부는 광정대부도첨의찬성사(匡靖大夫都僉議贊成事)의 벼슬을 하고, 서평군(西平君)과 청백리(淸白吏)에 봉해진 양지수(楊之壽)이며, 아버지는 보국대부행호조전서(輔國大夫行戶曹典書)의 벼슬을 하고, 안악군(安岳君)과 청백리(淸白吏)에 봉해지고 시호 경안(景安)을 받은 양천진(楊天震)이다.
어머니는 정경부인(貞敬夫人) 보성 선씨(寶城宣氏)로 밀직부사(密直府使) 천주(天柱)의 따님이다.
부인은 정부인(貞夫人) 경주 김씨로 이조판서 을초(乙軺)의 따님이니 바로 경주 김씨 영천 입향조인 김자양(金自養)의 누이이며, 슬하에 4남 5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병사(兵使) 양계원(楊繼元)과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양계동(楊繼童), 대제학(大提學) 양계종(楊繼宗), 생원(生員) 양계남(楊繼男)이며, 사위는 김명도(金明道), 정문비(鄭文備), 이숭례(李崇禮), 이효손(李孝孫), 이기(李基)이다.
공의 후손들은 경주 일대에 세거해 살고 있다.
[활동 사항]
태종 때 만호(萬戶)를 제수 받고 통정대부 동래진병마사(東萊鎭兵馬使) 및 경상 ․ 강원관찰사를 지냈으며 호조판서를 증직 받았으며, 단종이 손위(遜位)할 때 종질녀인 혜빈(惠嬪)이 선왕의 유언을 들어 옥새(玉璽)를 내놓지 않음으로 해서 3모자가 동시에 화를 입자 공도 3년간 연일(延日)로 귀양갔다가 돌아올 때 더 이상 부귀에 뜻이 없다고 하면서 소식과 교제를 끊고 영천으로 돌아오니 그의 호를 귀암(歸庵)이라 부르게 되었다.
또한 어릴 때부터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부모가 병이 나면 이른 새벽부터 밤까지 옆에서 돌보면서 잠시도 떠나지 않았으며 장성해서는 아침저녁으로 정해진 시간에 더욱더 독실하고 돈독하게 살피었다. 나갈 때는 반드시 고하고 돌아올 때 역시 규칙을 어기지 않았다. 음식을 드릴 때는 반드시 손수 맛을 보고 드렸으니 그 정성이 지극하였다. 일찍이 모친이 병에 들자 백방으로 약을 구하여 간호를 하였으나 백약이 무효했으므로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피를 뽑아 수혈하여 수년간 생명을 연장시켰으며, 돌아가시자 시묘 3년을 마치니 그 효행이 널리 세상에 알려졌다.
이에 북안면 송포리에 정려각을 세웠는데 묘소와 함께 군사시설에 수용됨으로써 현재는 명주리로 옮겨 세웠다. 정려비명은 훈수(塤叟) 정만양(鄭萬陽)이 지었으며, 공의 묘소 또한 이장을 하여 효자각 뒤쪽에 자리하고 있다.
[묘소]
묘소는 영천시 북안면(北安面) 명주리(明珠里)에 있다.
[상훈과 추모]
영천시 북안면(北安面) 명주리(明珠里)에 정려각(旌閭閣)이 있다.
[참고 문헌]
『영양지(永陽誌)』
『골벌(骨伐) 7집』
『청주양씨족보(淸州楊氏族譜)』
첫댓글 여기 올리는 효열 자료는 나중에 인터넷 서비스 할 자료입니다.. 혹 틀린 부분 없는 지 봐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