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전세계 수많은 사람들이 블로그와 페이스북에 자신의 생활 경험과 생각을 글로 올리고 사람들과 나누고 있다. 만약 누군가가 그러한 형식의 문학장르를 최초로 창조했다면, 그건 바로 5백년 전에 살았던 몽테뉴일 것이다. 우리에게 몽테뉴 ‘수상록’으로 알려진 그의 ‘에쎄(essais)'는 딱딱하고 관념적인 철학책이 아니라, 삶의 다양한 주제에 대해 쓴 107편의 글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는 바로 몽테뉴의 삶에 관한 책이다.
■ 즐겁게 어울리고 더불어 살아라
몽테뉴는 1500년대에 프랑스 보르도의 시골 귀족이었다. 그의 솔직한 글은 인생을 사랑하는 쾌활한 성품과 우리의 불완전함까지 껴안는 지혜가 담겨 있다. 우선, 몽테뉴는 느긋함과 붙임성이 행복의 필수요소라고 말한다. 친절함, 눈웃음, 악수, 호의는 동정심이나 자기희생 같은 거창한 것들보다 문화에 훨씬 더 많이 이바지했다는 것이다. 몽테뉴는 언제나 친절한 호의를 베풀었다. 남들이 삼엄한 경비를 세울 때, 몽테뉴는 자신의 영지를 개방하고 문지기 한 사람만 두었다. 그것도 문을 지키기보다는 누구에게나 너그럽게 문을 열어주는 역할이었다. 그의 집에는 곡예사, 무용수, 사육사 등 전국을 유랑하면서 생계를 꾸려가는 떠돌이들이 자주 찾아왔고, 몽테뉴는 이들을 너그럽게 맞아주었다. 물론, 때때로 위험한 자들의 침입을 받기도 했지만, 그는 일평생 이 개방원칙을 지켰으며 이를 통해 다른 사람들과 자유롭고 솔직하게 소통할 수 있었다.
■ 평범하고 불완전하게...
몽테뉴의 이런 인간적인 면모는 독서습관에서도 나타난다. 아무리 책을 열심히 읽어도 읽은 내용을 금세 잊어버린다고 고백한 것인데, 이런 모습, 참 친근하게 느껴진다. 우리도 늘 느끼는 바이니까 말이다. 몽테뉴는 스스로를 게으르고 머리 회전이 느리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배운 것을 될 수 있으면 잊어버려라.”라고 말한다. 배운 걸 기억하려 필사적으로 애쓰고 잊어버리는 걸 죄악시하면 배움의 즐거움이 사라져버리고 고행이 되니까 말이다. 대신, 자유롭고 지혜롭게 생각하면 된다는 것이다.
모든 일에 초연하면서 자신의 한계를 솔직하게 인정하는 이런 태도는 오히려 상대의 신뢰를 얻는다. 나이가 든다고 저절로 지혜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몽테뉴는 “늙으면 어리석은 자존심에 빠지고, 따분한 수다나 떨고, 쉽게 발끈하고,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성격으로 변하고, 터무니없이 재산에 대해 걱정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한계를 느낄 때 역설적으로 일종의 지혜를 얻는다”고 말한다. 결국 사는 법을 배운다는 건 이렇게 결점을 지닌 채 살아가고 결점도 기꺼이 받아들인다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투박하게, 온건하고 겸손하고 다소 흐리멍덩하게 사는 게 더 낫다고 이 책은 말하고 있다.
■ 나만의 뒷방을 마련하라
몽테뉴는 중년 이후 자신의 매력이 감퇴한 것을 한탄하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거부당하는 것도 우울하지만, 더 서글픈 것은 불쌍하게 보여서 받아주는 것이다”
일평생 이성에 관심을 가졌지만, 동시에 자기만의 공간과 고독의 시간을 확보했다. “아내와 자녀, 물건, 건강이 있어야 하지만, 거기에 너무 집착해선 안 된다. 완벽한 자유를 위한 자기만의 뒷방을 마련해두고, 거기서 진정한 자유, 은둔처, 고독을 확보해야 한다. 여기서는 마치 아내가 없는 것처럼, 자녀가 없는 것처럼, 재산이 없는 것처럼, 시종이나 하인이 없는 것처럼 자기 자신과 대화를 나누며 웃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이다.
■ 사랑과 상실을 이겨내는 힘
몽테뉴는 자기보다 두 살 많은 라 보에시의 글을 읽고 그와 깊은 우정에 빠져든다.라 보에시가 젊은 나이에 페스트로 숨을 거둘 때 몽테뉴는 며칠씩 임종을 지켰고, 이후 한동안 슬픔에 잠겨 지낸다. 하지만 살았을 때 결점이 있는 친구였던 그는 죽은 후에는 몽테뉴의 이상적인 주체로 바뀌었다. 고대로마의 철학자 세네카는 “존경할 만한 사람을 발견하면 그 사람이 늘 지켜보고 있다고 상상함으로써 가치관의 수준을 높이라”고 가르쳤다. 몽테뉴는 라 보에시가 “죽었지만 완전히 살아있는 모습으로 내 안에 자리잡고 있다’”면서, 그와의 교류, 죽음을 글로 씀으로써 상실의 충격에서 벗어나, 그의 죽음을 극복할 수 있었다. 아모르 파티(amor fati), 즉 운명에 대한 사랑으로 이를 받아들이는 법을 배운 것이다.
■ 죽음을 걱정하지 마라
이와 같은 맥락으로 몽테뉴는 죽음도 자연스럽게 받아들며 죽음을 걱정하지 말라고 한다. 친한 친구와 남동생, 자녀들의 연이은 죽음을 겪으며 몽테뉴도 죽음에 대한 강박과 공포심을 갖게 된다. 그러다 30대에 말을 타고 숲길을 달리다 사고를 당해 거의 죽을 뻔했던 몽테뉴는 이런 죽음의 실습을 통해, 죽음을 앞둔 내면이 평온함을 깨닫는다.
“내 생명이 입술 끝에 간신히 매달려 있는 것 같았다. 점점 나른해지는 기분을 즐기면서 자아를 해방시키려했다. 잠에 빠져드는 것처럼 달콤한 느낌마저 뒤섞여 있었다.”고 그 경험을 글로 쓴다. 몽테뉴가 좋아했던 스토아 철학자들은 죽음을 자주 연습하면, 죽음이 실제로 닥치더라도 놀라지 않으리라고 말했다. 그러나 몽테뉴는 이 의견에 반기를 들었다. “그 무엇도 걱정하지 마라. 그때가 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자연이 소상하게 그리고 완벽하게 일러줄 것이다. 자연이 그 일을 처리할테니, 죽음을 고민하지 마라”...
■ 인생, 그 자체가 해답이다
몽테뉴가 중시한 것은 삶 그 자체였다. 불완전한 현재의 삶을 풍부하게 체험하려 했던 것이다. 그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물음에 최종적이며 최상의 해답을 내놓는다.
“인생은 그 자체의 목표이자 목적이다.”라고 말이다. 목적을 위해 삶을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해 보이는 우리의 삶 그 자체가 목적이 되도록, 매 순간을 느끼면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