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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이 맺히는 제법 쌀쌀한 날씨였다. 모두는 퇴근을 하지 못한 채 중대 내무반과 각각 배정받은 경계초소에 혹은 평소 창장이 애호하는 간이 골프장의 새파란 잔디밭 위에 쪼그려 앉은 채 긴장된 눈빛으로 대기하고 있었다.
부산 전역에 걸쳐 ‘야간 독수리 훈련’이 시작되고 있었다. 성중사는 밤이 되자 한 마리 이리처럼 변해 병사들 앞에서 겁을 주고 있었다. 정문 위병소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잔디밭에 모여앉은 병사들은 모두 완전군장을 하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옆에서 시동을 건 채 대기하고 있는 군용트럭을 타고 정문 밖으로 출동할 것처럼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았다. 성중사는 그런 분위기를 십분 활용, 병사들이 평소 그에 대해 품고 있는 반감이나 저항심등을 이번 기회에 모조리 사그라뜨릴 양으로 험악한 음성과 행동으로 전체를 압도하고 있었다.
“이것은 물론 훈련에 불과하다. 그러나 단순하게 훈련이라고만 할 수 없다는 데 이번 훈련의 의미가 숨어있다. 작년에 이 훈련 도중 해운대에 있는 모 부대에서 자동화기, 여러분은 잘 알지 모르겠다만 크레모아가 순식간에 가동되어 당시 해안 초소에 근무하던 경계병 일부가 심각한 부상을 당했다는 것은 여기 있는 여러분 혹은 일부는 잘 기억하리라 생각한다. 아시다시피 이 훈련은 매년 이맘 때 있는 것으로 후방 부대, 즉 부산의 지원부대에서 매년 유일하게 치르는 야간 군사훈련이다. 즉 우리 부대뿐만 아니라 부산 전역에 산재해 있는 각종 지역의 각 맡은 부대 역할을 가지고 모의 훈련을 실시하는데 알다시피 실전을 방불케 하는 것으로 훈련이 끝나고 나면 각 예하부대의 평가가 나오게 된다. 우리 부대는 다행히 후방에 위치한 보급부대로서 여러분들이 평소 근무하는 본관 뒤편의 거대한 여러 개의 창고를 야간에도 변함없이 근무하면서 경계근무를 평소와 달리 해달라는 것이다. 작년에는 사령부에서 파견된 변복 차림의 일부 군인들이 우리 앞에 세워져 있는 4m짜리 담벽을 넘어 창고로 침입, 일부 군수물자를 빼돌리려다 사전에 경계병에게 발각되어, 체포된 일이 있었다. 아주 양호한 대비로 당시 병사는 그 때의 공과로 일주일간 특박을 받았었다. 이번 훈련에도 대한민국 육군 중사로서 너희들에게 당부하지만 우리 부대에 불미스러운 침투 사건이 벌어져 부대 명예에 먹칠을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알겠나?”
“예.”
일장 연설을 마친 성중사는 본관을 한 번 힐끔 쳐다보고 위병소를 다시 돌아보고 나서 허리 옆에 찬 권총집 위로 손을 얹은 채 대열의 옆으로 어기적거리며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누군가 어서 한 명 걸려주기를 바라는 것 같은 야릇한 걸음걸이였다.
부대 내부는 모든 조명을 소등하고 어둠 속에 조용히 엎드린 채 등을 조금씩 움직이며 소리나지 않게 숨을 쉬며 기다리는 한 마리 짐승같았다. 모두는 짐승처럼 눈만 밝힌 채 호흡을 안으로만 들이쉬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서서히 뱉어지는 뜨거운 콧김이 서로에게 전달되며 긴장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서라!”
“뭐야?”
사병식당에서 관사로 가는 초소에서 들려왔다. 놀란 성중사가 고개를 홱하니 위병소로 돌렸다.
“누군가 담을 넘었답니다.”
“야, 5분 대기조 출동시켜. 어서 연락해.”
“예, 알겠습니다.”
“모두들 잘 들어라. 여기 대기하고 있는 우리 병력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부대 밖으로 출동하도록 되어 있다. 모두 정신 바짝 차리고 대기해야 한다. 알겠나?”
“예, 알겠습니다.”
일부 흥분한 음성이 무전기를 통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야, 뭐야?”
5분 대기조 담당 장교였다. “관사 쪽으로 뛰어가서 저희들이 뒤쫓고 있는 중입니다.” “그쪽 경계 초소에 얼른 연락해.”
아직 붙잡지 못한 모양이었다.
“와, 간 큰 놈이네.”
“잡히면 어찌되는데?”
“잡히면 영창가는거지.”
위병소 옆 골프 연습장에서 대기중이던 우리들은 긴장이 다소 풀리면서 자연스레 관심이 그쪽으로 쏠렸다. 위병소 무전기에서 고함치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으로 보아 담을 넘어 들어온 사람을 여전히 찾지 못한 것 같다.
‘탕!탕!’
“이게 웬 소리야?”
“뭐꼬?”
본관 이 층의 회의실에 갑자기 불이 켜졌다. 그리고 위병소로 성중사에게 연락이 왔다. 다급하게 전화를 받은 성중사는 우리들이 앉아 있는 곳으로 급히 달려왔다.
“1중대와 경비중대 병력만 남고 방위중대와 수송중대는 모두 일어서. 관사쪽으로 이동한다. 야, 모두 차에 올라 타.”
누군가 부대 안으로 진입한 것에 대해 재미있는 장난쯤으로 넘기려던 우리는 일순 긴장했다. 이미 소총에는 잠금장치가 된 채 각각 탄알이 세 발씩 지급된 상태였다. 성중사는 서두르기 시작했다.
군용 트럭에 시동을 걸고 막 출발하려 하자 경비중대 중대장이 달려왔다. 그는 이 부대 안에 있는 유일한 사관학교 출신 장교인데, 그 화려한 이력에도 불구하고 누구에게도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불만과 주눅이 든 표정으로 늘 언행이 어눌했다.
총소리가 난 곳까지는 차로 채 오 분도 걸리지 않았다. 관사를 약 백오십 미터 앞두고 오분 대기조는 누구의 지시를 받은 건지 각자의 위치에서 대기 자세로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됐어?”
“방금 연락드린 그대롭니다. 총을 쏘았는데 그 이후로 움직임이 관측되지 않고 있습니다.”
“야, 모두들 내려. 성중사는 이 병력을 데리고 그대로 언덕을 타고 관사 뒤쪽으로 돌아서 나오세요. 난 이 병력으로 성중사가 반대쪽에서 나올 때까지 계속 기다리겠습니다.”
술살로 몸이 굳은 성중사였지만 이때만큼은 어지간했다. 우리는 이곳 내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성중사를 따라 급경사진 언덕을 기다시피하며 기어 올라갔다. 훈련소에서 사격을 해보고 그 사이 사격장에가서 사격 훈련을 해 본 게 모두였다. 총을 잡을 새가 없었다. 총은 묵직했다. 비록 현역들에게 지급된 날씬한 M16 소총이 아닌 구식 캘빈 소총이었지만 그래도 손에 한 자루의 총을, 그것도 탄환이 든 총을 들고 걸어가니 기분이 묘했다.
이 총으로 누군가를, 아니 정확히 말하면 적을 잡으러 간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아직 정체를 알 수는 없지만 부대를 침입한 이상 사정을 봐 줄 여지는 없다. 그러나 걸어가면서 생각했지만 부대 담을 넘은 사람의 숫자였다. 그것에 대해서는 우리를 인솔하는 성중사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아니, 혹시 모르는 건지도 모르겠다.
어색하고 서투르기는 우리와 같이 경사진 언덕을 헐떡거리며 넘어가는 수송중대 현역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 또한 늘 얼굴이고 작업복에 시커먼 오일이 얼룩처럼 번진 채 차량 기계들이나 닦을 줄 알았지 언제 총을 들고 훈련다운 훈련 한 번 제대로 받은 적이 없는 한심한 군인이었다.
십 분에 걸쳐 언덕을 넘어 급경사를 그대로 타고 조심스럽게 내려가니 평상시 수요일 오전이면 훈련받으러 오던 훈련 장소가 공터처럼 훤하게 보이고 오른쪽으로 관사로 가는 길이 보였다.
“모두 잘 들어. 정신 바짝 차리고 따라 와. 우리가 지금 잡으러 가는 놈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려진 것은 없다. 그러니 발소리를 모두 죽이고 전진해.”
“혹시 중간에 불쑥 튀어 나오면 어떻게 합니까?”
“쏴 버려.”
관사의 불빛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곳에는 창장과 부인만 산다고 들었는데 그쪽으로 난 후문으로 부인은 외출하고 없는 모양이었다.
‘탕!탕!’
“야, 모두들 앞으로 뛰어.”
다급해진 총소리는 이 일대의 정적을 삽시간에 깨뜨려 버렸다. 우리는 잠잠하던 귀가 뻥 뚫려진 것처럼 뭔가 환하게 앞이 보이는 것처럼 총을 쥔 손에 힘을 준 채 앞으로 서둘러 달리기 시작했다.
관사를 도는데 가뿐 숨을 쉬는 소리와 함께 맞은 편 오분 대기조에서 고함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쪽으로 갔어. 포위해서 잡아라.”
이젠 사정없이 외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담을 끼고 나무 사이로 누군가 절룩거리며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마치 술에 취한 사람처럼 보였다. 간혹 우리가 퇴근하고 난 저녁이면 하릴없는 술꾼들이 담을 타고 넘어오는 일이 종종 없잖아 있었는데 아마 그 부류중 하나인 것 같다. 그렇다고 우리는 경계심을 풀 수는 없었다. 고양이처럼 총을 손에 꽉 쥔 채 앞을 노려보고 있는 성중사가 아직 긴장을 풀지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참을 응시하고 있던 성중사는 이제 감이 온다는 듯 슬며시 뒤를 돌아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 때였다.
'야, 잡았다.'
저쪽에서 사로잡았다는 소리가 힘차게 들려왔다. 그는 독수리 훈련에 아무 것도 모른 채 뛰어든 첫번째 희생자가 되었다. 그는 곧 바로 위병소 옆에 대기중인 헌병대로 넘겨졌다.
시간은 자정을 넘어가고 있었다. 조금 전 연병장에서 대기를 마친 우리는 중대 내무반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뒤 곧바로 평소 근무 중인 사무실로 올라가도록 지시를 받았다.
사무실에서는 평일과 같은 근무 형태를 취하고 있었으나 반은 이미 자리를 뜬 채 각자가 미리 확보해 놓은 아지트로 가서 보이지 않았다. 사무실은 빛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육중한 커튼을 내리친 채 형광등을 밝혀 놓고 있었는데 남은 대부분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나는 평소 일이 없을 때면 시간을 보내기 위해 책상 서랍 속에 가져다 놓은 문고판 조그만 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방위병 근무를 하며 유일하게 위로를 받는 시간이기도 하다. 대낮 같으면 이것은 쉬이 용납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 저녁은 모두가 사무실에 있기 싫어하고 얼른 훈련이 끝나기를 바라는 때문인지 사무실에서 책을 읽는 나에게 관심을 기울일 여력이 없는 것 같다.
시간 보내기에는 읽어서 쉽고 재미있는 책이 그저 그만이다. 포우의 추리 소설이 그런 면에서는 단연코 좋았다. 부대 내에서 마음이 착 가라앉는 어두운 내용의 책은 근무 분위기를 더욱 힘들게 할 뿐 아니라 때론 울적하게도 만들어 들고다닐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면 읽어서 안 되는 금서가 자연스럽게 짜여졌다.
'야, 구, 구일병.'
미식의 소리에는 언제나 초점이 없었다.
'잠시 내, 내 따라 온나.'
영묵은 이미 미식의 이야기를 들었는지 문 근처에서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미식이 앞서간 곳은 창장실 바로 옆에 있는 회의실로 들어가는 조그만 방이었다. 들어서자 주위를 한 번 조심스럽게 둘러본 미식은 얼른 문을 안에서 잠궈버렸다.
'혹시 주임상사가 올 지 모, 모르니까. 자, 우리 담배나 한 대 피우면서 좀 쉬자. 어차피 군무원들도 다 창고로 들어가 카, 카드하면서 노는데 우리라고 이렇게 가만히 사무실 지키며 있, 있을 필요는 없지.'
'맞소. 미식 선배 말이 맞소. 자, 피우자.'
담배는 언제나 영묵의 몫이었다. 미식과 난 원래 담배 체질은 아니었다. 평소 묻는 말 외에는 거의 말이 없는 영묵은 담배를 많이 피웠다.
'회의실에 혹시 누가 있는 거 아닙니까. 무슨 냄새가 나는데?'
얼른 담배를 끈 미식은 회의실 안으로 조심스럽게 문을 디밀었다. 과연 누군가 있었다.
'누구요?'
'나야, 김일병.'
'아니, 박병장님. 여기 왜, 왠 일이십니까?'
'그래, 왜, 놀랬어?'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박병장은 제대를 한 달 남짓 남겨 놓은 고참 병장이다. 본관에서도 가장 오래 근무했는데 별로 눈에 잘 띄지 않아 언제나 있는 듯 없는 듯 했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늘 상냥한 이웃집 아저씨같이 우리에게 부담이 없었다.
'담배 피우러 왔어?'
'예, 그렇습니다.'
'내가 자리 비워줄까?'
'아닙니다. 괜히 쉬시는 줄 모르고 저희가 들어와서...'
제대 후를 걱정하는 것 같았다. 그는 서울 출신으로 지금같이 생활하면 사회에 나가서도 문제가 없을 것 같은 데 요즘 들어 걱정을 많이 하는 얼굴로 그나마 잘 보이지 않으니 무슨 생각을 하는지조차 잘 알 수는 없었지만 약간 고즈넉한 표정이 그것을 걱정하고 있음에 틀림이 없었다.
'하긴 나도 마, 마찬가지다. 지금이 오히려 좋을 지 모, 모르지. 히히, 이렇게 담배나 피우고, 이, 이것도 이제 조금만 지나면 고생 끝인데, 막상 그 때를 생각하면 박병장처럼 걱, 걱정이 앞서니.'
제대 후를 걱정하는 사람은 박병장뿐만이 아니었다. 지금 내무반에서 잠시 쉬고 있는 동료들 중에는 그런 사람이 부지기수다. 그래서 그런지 그들은 영내 생활보다는 언제나 부대 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랬다. 그들에게는 영내의 부당한 취급이나 대우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어차피 집 근처이고 잠시 다녀가는 곳인 줄 뻔히 아는 그들로서는 영내 생활은 사실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무의미하고 무료한 시간일 뿐이었다. 차라리 악착같이 돈 버는 때보다 못한 것이었다. 이 기간은 그들에게는 죽은 시간이었다. 그들로 봐서도 철저히 밑바닥의 시간이었고, 기억에도 남기고 싶지 않는, 부정의 시간이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서 모든 게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죽은 시간이 다 지나간 다음에 오는 시간은 그들에게 무엇일지 답이 명확하게 없는 것이다.
그것은 그러면 활기차고 즐거운-가끔 힘이 들때면 그 시간을 기대하기도 하는데-살아 있는, 그들 말대로 자신들 마음대로 생각할 수 있고 행동할 수 있는 세상이 오는 건가, 그것에 대해서 그들로서는 쉽게 그렇다고 단정을 내리며 기다리지만 내가 볼 때 그것은 아니었다.
.. 차광용 두꺼운 커튼을 살짝 들어 밖을 내다보니 맞은편 신발공장에서는 야간 작업을 하느라 공장 내부의 불빛이 새벽임에도 훤하게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 위로 거대한 굴뚝에서는 매캐한 냄새가 배어있는 흰 연기가 잔뜩 흐린 우중충한 하늘로 꾸역꾸역 솟아오르고 있다. 날이 밝으면 비가 내릴 모양이다.
누군가는 항상 잠들지 않는다. 경계 근무를 서기 위해서 밤새 교대근무를 통해 공백을 두지않는 것처럼 밖에서도, 세상 속에서는 누군가 항상 잠들지 않고 어두운 밤을 지켰기 때문에 밤새 곤하게 잠든 영혼들은 또 하루를 맞이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사실이다.
언제부터인가 내 인생의 주인은 내가 아닌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다. 그렇지 않으면 어째서 생각대로 세상은 돌아가지 않으며 내 앞으로 진행될 인생에 대해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자신만만한 어떤 경우에 조차도 흔히 망쳐버리는 결과를 가질 때가 빈번하지 않은가.
군대는 그런 생각과는 사실 관계가 무관한 것처럼 보인다.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관찰을 통한 생각을 허용하지 않는다. 생각을 해도 소용이 없다. 보아주는 사람도, 들어줄 사람도 없고 결코 어떤 생각도 반영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저 생각이 없는, 마치 속 빈 강정처럼 항상 명령만, 지시만 기다리고 그런 테두리 안에서 안도감을 느끼며 살기를 군대라는 특수조직은 은연중에, 아니 군대는 아주 단순하기 때문에 숨기는 것이 없으니, 아주 직설적으로 가르친다. 시간이 흐를수록 무기력한 자신을 발견하게 되고 결국 나는 아무 의미없는 인간이고 모자에, 팔 옆에 붙인 계급장으로 모든 것이 결정되고 판단되어지고 행동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배우고 장차 사회에 이렇게 적응하기 위해 군대에 들어왔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가끔 든다. 개개인의 인격과 개성이 철저히 무시되고 조직에 적응시키는 훈련을, 이런 야간 훈련을 통해 적응시키기 위한 것인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누가 이렇게 적응하라고 나를 군대에 보냈는가. 나는 군대에 오지 않을 생각은 해 보지 않았는가.
왜 나는 군대에 오지 않을 생각을 한 번도 해 보지 않았을까. 왜 반드시 군대에 가는 것으로만 알았을까. 새벽으로 접어들자 생각이 점차 명확해진다.
책상 서랍 속에 넣어 두었던 책을 꺼내 다시 읽는다. 잠이 조금씩 쏟아지지만 마땅히 잘만한 곳이 없다. 중대 내무반은 스팀이 들어오지 않고 낮에만 생활하는 곳이라 모포도 지급되지 않아 추워서 깊이 잠들 수가 없다. 대신 거의 텅 비다시피한 사무실에서 가급적 창쪽으로 몸을 편안히 기댄 채 책을 느긋한 마음으로 읽기로 한다.
기독교에 대한 지식은 없지만 중학교 다니던 시절 재단이 미션스쿨이라 성경을 정규 시간표에 편성하여 공부한 적이 있는데 이 책을 읽다보니 바벨탑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파리의 한 여관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을 다루는 이 단편은 국제 도시인 파리의 한 여관에 온갖 주변국에서 몰려온 사람들이 같이 거주하다 어느 사람이 살해되고, 이 사건을 추적 중인 경찰은 살해 당시의 정황에 비추어 들려온 여러 가지 외국 언어에 대해 해결의 실마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추적한다. 바벨탑은 원래 하나의 언어로 살던 인간들이 서로 힘을 합하여 신의 영역에 도전하다 화를 입고 그 후로 서로 의사소통이 되지 않도록 언어가 분리되기 시작했다는 짤막한 이야기이다.
스팀이 어느새 들어오기 시작했나 보았다. 등이 따뜻하면서 꾸벅꾸벅 졸았던 모양이다.
'야, 구일병. 내 자지 좀 빨아줄래?'
군기 잡힌 신병처럼 깜짝 놀라며 눈이 번쩍 뜨졌는데 사무실 안은 그새 웃음바다가 되어버렸다. 영묵은 갑자기 신들린 사람처럼 목젖이 늘어지게 웃어 젖히고 있었다. 김상호씨는 여전히 뻔뻔스러운 얼굴로 어리둥절한 채 자세를 바로 하고 있는 나를 향해 흉물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고 있다.
창 밖은 어느새 훤히 밝아 있었다. 경쾌한 군가가 방송실로부터 흘러나오며 근처 일대를 들썩거렸다. 군가에 맞추어 부산 각지에서 오는 출근 버스가 속속 들어오고 있다. 밤새 무슨 일이 없었는지 살피듯 내리는 울긋불긋한 군무원들의 아직 잠이 들깬 부스스한 모습들이 하나 둘 버스를 내려 본관 쪽으로 올라오고 있다.
우리는 퇴근을 서두르기 시작했다. 훈련기간 중에는 주, 야간 별도로 편성되어 있다. 지금 퇴근하면 우리는 하루를 꼬박 쉬고 내일 아침 일찍 부대로 들어와야 한다. 마치 주말을 맞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부대를 빠져나가는 우리는 모두 신이 났다. 누군가 열을 바로 지어가라는 잔소리도 필요없이 얼른 부대를 빠져나가고 싶은 마음에 우리는 중대를 벗어나면서 열이 자동적으로 정렬되었고, 정문이 다가올수록 군가를 부르는 목청에는 힘이 넘쳐나고 있었다.
보람찬 하루 해를 끝마치고서 두 다리 쭈욱 펴며....
군가를 부르는 소리가 시원찮으면 정문을 나갈 수가 없다. 모두 그 자리에서 오리걸음으로 중대로 돌아가서 기합을 좀 받고 다시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모두는 부대를 나가 오늘 하루를 보람차게 휴식하고 싶어 못 견디는 애들처럼 큰 소리로 군가를 불렀다. 평소와 다르게 발을 내딛는 박자도, 구령도 모두 잘 맞아 떨어진다.
'야, 그 맨 앞에 있는 놈, 목소리 자꾸 깔래?'
맨 뒷줄에 선 고참들의 가시 돋힌 소리도 정문이 다가오자 새어나오기 시작한다. '야, 팔 바짝바짝 들고 고개 들어.'
정문을 지키는 경계병들의 험악한 눈초리가 지나가는 우리 대오를 훑는다. 모두 바짝 긴장하며 정문을 통과한다. 정문에서 보이지 않는 거리까지 원래는 대오를 형성해서 가야하지만 우리는 이미 익혀온 습관대로 바로 앞에 놓인 철길을 지나자 말자 웃음을 지으며 요란스럽게 뿔뿔히 흩어진다. 공장으로 출근하는 여공들과 순식간에 섞인 채 만 하루만에 우리는 다시 자유인으로 돌아간다.
밤새 근무를 한 탓에 피곤함이 온 몸에 배어 있었다. 대개 한 주를 마감하는 일요일이 그러하듯 하루종일 누워 자 볼까 생각을 했지만, 얼마 전 지방에서 돌아온 형이 방을 차지하고 갈 곳이 마땅하게 없는 사람처럼 차지하고 있어서 그것도 뜻대로 되지 않을 것 같았다.
들어서자 난 형에게 비록 날씨가 궂어 별로겠지만 정구를 치러 가자고 했고, 마침 하루를 보낼 생각에 갑갑해하던 형은 그러한 나의 제안에 선뜻 따라나섰다. 가는 길에 보이는 은행나무의 노란 빛깔이 선명하게 눈길을 잡아끌었다. 도로 길가는 온통 노란색으로 덮인 것 같았다. 우리는 자전거 페달을 힘차게 밟으며 집에서 한시간 거리인 김해 공항으로 달렸다.
낙동강의 물은 햇볕이 뜨거운 여름 한 철을 제외하면 푸른 코발트색 빛깔을 구경하기가 힘들었다. 비까지 내리는 강은 짙누런 빛깔로 마치 검은 괴물이 꾸불텅거리며 거대한 몸집의 위용을 과시하며 내려오는 것 같았다. 다리를 지나며 내려다 본 강은 그래서 두렵기까지 했다.
공항 이정표가 보이는 도로로 접어들자 가을은 이곳에서 절정을 이루는 듯 붉은 단풍나무와 노란 은행나무가 자리를 바꿔가며 눈을 현혹시켰다. 이런 때는 환한 가을 햇빛보다는 차분하게 가라 앉은 듯한 잿빛 도로와 원색만 남아 도로를 뒹구는 각종 색의 나무 이파리들이 더욱 강렬해 보였고 어제 저녁의 피로를 묵지근하게 풀어주었다.
오랜만에 자전거를 타는 형도 기분이 좋은지 집을 나설 때와는 달리 안경을 머리로 올린 채 불어오는 바람에 얼굴 표정을 자유자재로 바꾸며 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는 가끔 제각각 콧노래도 흥얼거리며 오늘따라 지나가는 차들이 별로 보이지 않는 도로를 마음껏 질주하기도 하고, 그러다 지치면 느긋한 자세로 중간에 쉬기도 하고, 비록 비를 맞고는 있었지만 눈매가 점점 시원해지는 것이 나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가지게 해주었다.
가끔 마을 버스를 기다리는 젊은 아가씨가 길가에 서있으면 우리는 즐거운 마음으로 추파를 던지기도 했는데, 샐죽하니 얼굴을 돌리는 모습이 우리를 더욱 신나게 했다.
정구장은 공항 비행장 내에 있었다. 비는 이제 그쳐 있어 정구를 치기에는 그지없이 좋았다. 그리고 우리는 벌써 얼마간 땀을 흘렸고, 몸은 곧바로 정구를 치기에 충분할 정도로 풀려있었다.
'한 시간 정도면 될 것 같다. 어떻게 할래?'
'그렇게 하지 뭐.'
서브가 원하는 제자리를 찾기까지 약간 시간이 걸려서 그렇지 우리는 자라면서 자주 같이 운동을 하며 놀았던 것처럼 승부에 점차 집착을 보이며 게임에 몰두했다. 코트는 두 개였는데 날씨 때문에 이용자가 우리 외에는 없었다. 형은 스포츠광이자 늘 치열한 승부사였다. 그것은 하잘 것 없을 것 같은 정구시합에서도 그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퇴근해서 보면 늘 무료하고 졸린 듯한 눈이었는데 공을 바라보는 눈빛은 어느새 얼굴의 윤곽을 뚜렷하게 드러내며 빈틈이 없어 보였다. 공이 날아가 꽂힐 방향을 거의 놓치지 않았다. 그런데 대개 빈틈이 없어 보이고 날카로운 시각을 가진 사람들의 대부분이 그러한 것처럼 형은 체격이 전반적으로 왜소한 편이었다. 그래서 근력이 비록 약하긴 했지만 한 게임 내내 제 페이스를 유지하는 데는 충분해 보였다.
'실력이 그새 많이 늘었다.'
'그래봐야 나도 오랜만에 코트에 나온 건데 뭐.'
정구를 마친 시간은 오후 두 시였다. 비는 이미 그쳐 있었다. 관광을 하러 들어온 일본인들을 태운 버스가 창 앞 유리에 행선지를 밝힌 채 빠져나가며 우리를 유심히 내다보았다. 우리는 이제 노곤한 피로에 몸이 늘어지며 자전거를 끌며 걸어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어머니한테 간단한 요기라도 챙겨달라고 할 걸 그랬네.'
'가끔 이렇게 지칠 정도로 땀을 흘려주는 것도 괜찮아.'
'어제는 어떻데?'
'이것도 훈련이라고 바짝 신경이 쓰이는 게 새벽쯤에는 꾸벅꾸벅 졸리더라.'
'그래도 행복한 방위다. 그 정도면.'
'얼른 마쳤으면 좋겠다. 오히려 마음을 완전히 영내에 두고 생활하는 사병들보다 우리가 훨씬 못해. 다른 사람들은 집에서 해주는 따끈한 밥을 먹고, 잠도 자고, 부대만 나서면 하고싶은 대로 마음껏 할 수 있으니 좋겠다 하지만 꼭 그런 것도 아이다. 오히려 정신적으로 심적으로 부담이 더 크다. 그렇지 않겠나? 마음의 긴장은 영내에서도 군기라는 이름으로 생명처럼 붙들고 있어야 하는 건데 영내만 나서면 굴뚝에서 연기가 빠져나가듯 술술 풀려 버리니 이미 놓쳐 사라진
긴장상태를 다시 갖춘다는 게 날마다 아침이면 부대로 들어가는 버스 속에서 잘드러나지. 차라리 영내에 있는 게 날마다 돼지사육 되는 것처럼 미련해보일 지는 몰라도 당분간은 편해. '
'그런 점도 있구나.'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할 건데?'
'글쎄, 뭔가 해야 할 것 같은데 뾰족한 수가 안보이니. 그런데 어제 저녁에 괴상한 전화가 한 통 와서 아직도 찝찝하다.'
'무슨 내용인데?'
'일전에 말한 전에 있던 현장에서 생긴 사고 건이지 뭐. 조사할 게 있으니 그곳 현장으로 다시 좀 오라고 하더라.'
'마음에 걸리는 게 있나?'
'없지만 석연치 않다. 어디까지 수사를 할 건지 알 수가 없으니. 내가 가봐야 정황설명 정도 밖에 되지가 않을낀데.'
우리는 다시 낙동강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런데 강물은 아까 꿈틀거리던 괴물에서 잔잔한 고기 비늘같이 미풍에 몸을 움츠린 채 가녀리게 흔들리는 수줍은 새색시처럼 보였다.
저녁을 먹고 나자 형은 그동안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뭔가를 덤덤한 어조로 꺼내놓았다.
'저, 올라가야할 것 같습니더. 가서 그동안 있었던 일을 마무리해야 할 것 같습니더.'
'와, 무슨 일인데?'
별말없이 같이 저녁을 드시던 어머니께서 조용히 되물었다.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질 않습니더.'
'전에 아무 일 없다고 안했나?'
'그런데 아무래도 자살한 그 친구가 계속 마음에 걸립니더.'
'돈 조금 받았다면서?'
'돈 받았디가?'
어머니의 그 말에 갑자기 방안이 어두워진 것 같았다.
'세상에 가장 조심해야할 기 돈이다. 그것도 내가 번 돈이 아니라 나와 관계없는 사람이 주는 돈이라면 더욱 그렇다. 세상에 그냥 주어지는 것은 없는 법이니까.'
그날 밤 내내 형은 잠이 들지 못했다.
형의 어두운 얼굴을 보고 집을 나선 난 부대에 들어가고 싶지가 않았다. 이미 계절은 수려한 가을을 도로변에 노랗게 물들이고 있었다. 훈련은 오늘이 마지막 날이다. 왠지 난 국방색 시간이 좀체로 움직이지 않는 정지되고 무료한 세계로 걸어들어 가야 한다는 압박감으로 도통 발걸음이 내딛어지지 않았다.
갑자기 아무 차나 집어타고 가까운 기차역이나 고속버스 터미널로 향해 어딘론가 불쑥 떠나고 싶었다. 버스를 내려 부대로 들어가는 도로 입구에 다다랐을 때였다. 왠 여자가 밤새 공장에서 일하고 퇴근하는 길인지 마치 나를 보고 반갑게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눈은 피곤이 살짝 덮인 채 잘 닦아놓은 거울처럼 반질거렸고, 힘든 일을 해서 그런지 치아는 누렇게 변색되어 있어 별로 예쁘지 않았다. 물론 그녀는 나를 보고 미소를 지은 것이 아니었다.
거울처럼 반질거리는 그녀의 눈. 어째 반갑게 짓는 미소가 해맑지 못하고 술집에 근무하는 여자처럼 구역질이 느껴지는 것인가.
거울은 반사다. 있는 그대로를 보여줄 뿐 전혀 투영을 하지 않는다. 결코 타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타인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수용하지 않는 인간은 대개 투쟁적이다. 싸움닭처럼 상대방을, 세상을 이기려고만 들뿐 이해하려고 하거나 담아두질 못한다. 자신밖에 모른다. 혹은 자신과 동일시하는 어떤 현실이나 개념밖에 모른다. 그래서 얼굴에 잔뜩 반가운 웃음을 담고 있지만 내부는 도무지 알 길이 없다. 집안으로 들어가다 말고 나오는 격이다. 그나마 쫓겨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다.
공장에서 일하는 여자들은 담배도 한다던데. 설마 담배를 피워서 치아가 누런 것은 아니겠지. 공장앞 도로로 퇴근길을 재촉하는 여공들로 왁자지껄한게 거대한 굴뚝으로 꾸역꾸역 솟아나오는 검은 연기만큼 아침을 무겁게 한다.
'줄서서 들어와. 야, 그기 기다려. 혼자 들어오지 말고.'
하루만에 복귀하는 부대인데도 말투에 묻어나오는 짜증에 그만 지고만다. 그나마 흐려있던 표정들이 위병소 입구에서부터 잔뜩 구겨진다.
'야, 절마 저거, 아침부터 와 저라노?'
'밤새 부대 안에 무슨 일 생긴 것 아이가.'
'마, 군소리말고 빨리빨리 줄부터 서라.'
모두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한다. 들고있는 도시락에 형상이 갑자기 추레해진 모습으로 전락한 우리들은 저자세로 얼른 돌이킨 채 늘 하듯이 비굴한 표정의 가면을 호주머니에서 얼른 빼서 쓰듯 허둥거린다.
'영묵이하고 너, 중대 인사계한테 가봐라. 호출이다.'
'무슨 일인데?'
'너거들 임마, 잘하면 영창이다. 얼른 내려가봐라.'
불쑥 전역병 교육대 내무반 일이 떠올랐다. 대충 차려입은 군복으로 뛰듯이 내려간 아래층 행정반에는 지난 밤 근무조 확인과 퇴근 준비를 시키느라 어수선하기만 할 뿐 조그만 체격에 새까만 얼굴의 인사계는 보이지 않았다.
'구형식이, 김영묵이 왔나. 이리로 들어와.'
얼마전 부임한 젊은 중대장이다. 눈매가 얇아 남자치고는 얍삭빠르게 생겼다.
'얼른 전역병 교육대 내무반으로 내려가 봐. 계속 연락이 오잖아. 무슨 일인지는 나중에 보고해도 돼. 얼른 내려가 봐.'
소란스러운 행정반을 벗어나 구르듯 달려가보니 우리를 발견한 성중사가 내무반 입구에서 냅다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얼른 내무반 문 열고 개인 모포하고 식기들을 지급해. 밤새 해안 초소에서 훈련에 참가하고 들어왔어. 얼른 아침 먹이고 재워야 돼. 빨리 열어.'
성질 급한 성중사는 교육 여건이 준비되어 있지않아 교육생들로부터 눈총을 받자 벌써 불난듯 길길이 뛰어다녔다.
내무반을 열고 교육생들에게 우선 개인 모포 3장과 베개, 식기, 개인용 수저 등을 하나하나 지급하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배급이 이루어지자 영묵은 내무반 주변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수송중대 대윈들이 내무반이 비워진 틈을 비집고 들어와 휴게실처럼 담배를 피우며 지저분하게 어질러 놓았기 때문이었다. 그 틈에 난 교육장으로 달려가서 강단과 바닥을 청소하고 교육에 필요한 물품을 얻으러 사무실로 서둘러 올라갔다. 어느새 군복 상의와 모자는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배문자씨 얼굴이 와 저렇노? 어제 바깥 양반이 딴 구멍 쑤신 거 아이가? 눈두덩이 시퍼래서 왔네?'
아니나 다를까 사무실에 들어서면서 보니 배문자씨의 쑥인 모습으로 눈두덩이 퍼렇게 부어있던 것이 생각났다. 앞에 앉은 양수국씨는 어쩔줄 몰라 하다가 놓여난 사람처럼 통쾌하게 웃고 있었다.
'이래서 난 시집가는게 싫다니까.'
약간 사시인 양수국씨는 조그만 안경너머로 그렇게 한참을 웃었다. 그녀는 노처녀였다.
앞에 앉은 동갑내기의 그녀가 평소 자신을 평가절하하는 시선이 싫었던가 보았다. 그리고 이 여자는 이런 일이 아니면 웃을 일이 없는가 보았다. 목젖까지 보이며 마음껏 웃어 젖힌다. 덩달아 주변에 있던 군무원들도 해롱거린다. 얼른 생각난듯 사무실에 온 용건을 말했다.
'교육대에 필요한 사무용품을 좀 주십시오.'
그녀는 사무용품을 꺼내러 한쪽 구석에 놓인 캐비넷으로 걸어갔다. 작은 키로 까치발을 한 채 자신의 키보다 높은 곳에 놓인 물품 상자를 꺼내려 바둥거린다.
조금전 나를 보며 웃어젖힐 때 감전되었음에 틀림없다. 난 주춤주춤 그녀의 등뒤로 다가가고 있었다. 그녀의 가는 허리와 작지만 소담스러운 둔부가 흐릿하게 느껴졌다. 난 급히 그녀의 등뒤로 다가가 하마터면 그녀의 머리 뒤로 떨어질 뻔한 사무용품 상자를 급히 받쳐들었다. 그녀의 가느다란, 그러나 체온이 실려 희미하게 꿈틀거리는 숨결이 코앞으로 순식간에 다가왔다.
'아!'
짧은 호흡이었다. 그녀의 가느다란 짧은 비명이 마치 사무실 안에 있는 군무원 모두에게 알려져 한꺼번에 나를 주시하는 것처럼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
얼른 몸을 뒤로 빼자 그녀는 금방 사무적인 말투로 돌아간다.
'이거면 돼요?'
또 다시 땀이 흘러내린다. 그러나 잠시 아찔한 탓에 닦을 생각을 하지 못한다. 그녀의 까만 눈에 안개같은 흐릿함이 역시 배어있음을 보았다. 난 오늘 처음 여자를 느낀 남자같다. 물품을 전해주고 제자리로 돌아가는 그녀는 당당했다.
위병소쪽으로 군악대가 들어오는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교육생 입과식을 하기 위함이다. 독수리 훈련이 끝나며 평온을 되찾는 영내에 군악대의 요란한 악기 연주 소리가 퍼져나가면서 온통 뒤범벅이 된다.
교육 준비를 하느라 이리저리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었지만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마치 군기가 다빠진 것처럼 영내의 일상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안과 밖의 경계가 없어진듯-사실, 이런 분위기가 방위병들에게는 제일 힘들다-편안해지자 자연스레 난 바람난 풍선처럼 하늘로 하늘로 허우적거리며 올라가기 시작했다. 한숨을 쉬며 허공을 쳐다보는 시간이 점차 늘어가는 것이었다.
그것은 가을을 비로소 느끼는 남자의 자연스러움이기도 하다. 바야흐로 가을의 훈련이 끝나자 영내의 모든 남자들은 군대 사회 특유의 단순함과 쾌활함으로 사람에서 수컷으로 변신해서, 독특한 행위를 자아내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너무도 당연한 듯이 보여 누구하나 시비를 걸거나 딴죽을 거는 사람이 없었다.
지나가는 여군무원들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보내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예의가 되었고, 가끔 꽃이 아름답게 핀 화단에서는 살며시 손을 잡기도 하는 등 애정표현이 갈수록 농도가 더해가는 것이 마치 그들만의 한 철인 것처럼 보여 이런 일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처럼 되어 있는 우리 방위병들에게 그들은 좋은 눈요기감이 되었다.
'좋은 시절이다. 일반 행정과에 가시나 하나 새로 왔던데 참, 이쁘데.'
'내가 지금 방위만 받고 있지 않았어도 틀림없이 내 것으로 만들어 볼낀데.'
'말마라. 영내 안이니까 봐주지. 저런 것도 얼굴이라고 밖에서는 알아주지도 않는다. 너무 기죽지마라.'
그 와중에 허전함이 더해간 것임에 틀림없다. 어느 순간부터 아리기 시작한 가슴 한구석이 이제는 어디서나 쓸쓸함을 느끼기 시작해 누군가에게 이런 내마음을 알리는 편지라도 쓰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을 지경까지 이르렀다.
서서히 내 마음은 이런 와중을 타고 학교 다니던 시절 아련한 기억의 분위기 속으로 급히 내달리고 있었다. 안타깝고 아련했던 그 기억을 불러들이지 않고는, 그 분위기 속으로 침잠하지 않고서는 서서히 가라앉는 이 시간들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그날 밤 난 드디어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다 쓰고난 다음 보내고 안보내고의 갈등은 아예 접어둔 채 였다.
보고싶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너는 여전히 내 주변에 머물러 있다. 바쁜 한동안에는 그런 사실을 몰랐는데, 어느 날 허겁지겁 점심을 먹으며 밖을 쳐다보는데 네 생각으로 갑자기 가슴이 아리더니 그 이후부터 줄곧 넌 느껴지기 시작했고, 지금껏 계속 같이 하고 있다.
넌 알고 있었니?
군에 오기 전 늘 네 주변에 머물렀음을. 난 항상 너를 의식하며 마치 네가 내 옆에 있는 것처럼 마음 졸이며 지낸 것을. 생각만 해도 늘 가슴이 아련하게 조여오던 너에게 난 단 한 번도 당당하게 너에 대한 나의 마음을 밝혀보지 못했다.
난 알고 있었다.
가끔 둘만 있을 시간을 만들 수 있어서 그윽한 눈길로 너를 들여다 볼 때면 비록 마주쳐다 보지는 않았지만 딴 곳을 응시하는 너의 눈 속에 내가 들어 있음을. 그래서 오히려 난 더욱 흥분하고 기뻤다.
나의 이런 애틋한 마음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사실 난 지금 내가 왜 이러는 지도 알 수가 없다. 한번 만나줄 수 없겠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