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 미상
이백의 혼인상황은 어떠한가? 그는 결혼은 했었는가? 몇번이나 결혼했는가? 그의 처는 누구인가? 부부관계는 어떠했는가? 자식은 몇이나 낳았는가? 자식들의 상황은 어떤가? 이것들은 모두 이백의 사상이나 성격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그러나, 이에 관한 기록은 너무나 적다. 이백의 시가(詩歌)를 제외하고는 남은 글이 더욱 적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이백을 추앙하는 자 중에 위호(魏顥)라는 자가 쓴 <<이한림집서(李翰林集序)>>라는 글 중에 기록이 남아 있다. 위호는 위만(魏萬)이라고도 하는데, 이백을 여러달 쫓아다녔다. 이백이 그를 만난 후 앞날이 무궁무진하겠다고 칭찬해주고, 장래 크게 이름을 떨칠 거라고 말해주었으며, 이름을 날리게 되면 자신과 자신의 자녀들을 잊지 말아달라고 하였다. 나중에 위만은 과연 과거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다. 그가 이백을 위하여 편찬한 글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이)백은 허(許)씨를 취(娶)해서 딸을 하나 낳았고, 아들 하나는 명월노(明月奴)라고 한다. 딸은 시집갔으나 죽었다. 다시 유(劉)씨와 합(合)했다. 유씨와 헤러지고 다시 노(魯)의 한 부인과 합했고, 아들 파려(頗黎)를 낳았다. 마지막으로 종(宗)씨를 취했다."
위만은 이백과 동시대의 사람이고, 이백이 그에게 부탁해서 그를 위한 집자(集子)를 편찬하도록 했다. 이백에 대하여 다른 사람보다는 아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므로, 이 기록은 이백의 혼인과 자녀에 대한 권위있는 기록이 된다.
이 기록에서 우리는 여러가지 중요한 정보를 얻게 된다. 이백은 4번 결혼했는데, 두번은 정식이고 취(娶)라는 말을 썼다. 두번은 일반적인 동거이며 합(合)이라는 말을 썼다.
그렇지만, 위만의 글은 사람들을 오인하게 한다. 그의 말을 보면 우리는 이백이 부인을 "취"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이백의 두번에 걸친 정식혼인은 그가 "취"한 것이 아니라 "데릴사위로 들어간(贅, 入贅)" 것이다.
위만은 고의로 "데릴사위"라는 말을 피했고, 뭉뚱그려 "취"라고 한 것이다. 이것은 이백을 존경해서 그러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백은 자기의 글에서 이를 회피하지 않았다. 당당하게 자신은 데릴사위로 들어갔음을 밝혔다. 그가 안주의 배장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허상공의 집안에서 견초(見招)하여, 손녀를 처로 삼았고, 이 곳에서 쉬었으며..."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의 "견초"는 바로 "데릴사위로 들어갔다"는 뜻이다. 이백은 자신이 데릴사위라는 점에 대하여 아무런 심리적인 거리낌이 없었고, 이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백은 왜 이렇게 데릴사위가 된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크게 떠벌였을까?
이것은 아마도 그의 관념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가 보기에, 이건 뭐 중요한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는 그의 출신과 문화배경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백은 어려서부터 오랑캐들과 함께 살았으며, 중원문화의 이러한 풍속에 대하여 그다지 몸으로 느끼지는 못했을 것이다. 남녀혼인관계에서, 이백은 아주 개발적이고 현대적이고 평등했다. 그리고 이백은 머나먼 사천에서 중원지역으로 왔는데, 아는 친척도 없었다. 승진도 하고, 돈도 벌려면 이백은 기회만 되면 자신의 재능을 드러냈고, 그의 창생을 구원하고 사직을 안정시키려는 이상을 도모했다. 데릴사위래도 좋다. 어떻때는 이백은 아주 상황에 따라 잘 행동했고, 속되기도 하였다.
이백과 허씨는 개원15년(727년)에 안륙(安陸)에서 성혼한다. 결혼후, 이백은 한동안 상대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보낸다. 바로 그가 말했던 "안륙에서 술에 따져 10년을 보냈다"는 것이다. 둘은 10여년을 함께 했다. 이 십여년동안 그는 기본적으로 호북의 안륙에서 생활했다. 비록 많은 시간을 명산에 놀러가거나 했지만 자주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허씨아가씨는 재능도 있고 인물도 있었다. 문화수준이 높은 대갓집 규수였다. 결혼후 그들 부부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전해져 온다. 송장백의 <<유정시화>>에 의하면 한번은 이백이 <<장상사>>를 써서 부인에게 보여주었는데, 마지막 구절이 "불신첩단장, 귀래간취명경전(不信妾斷腸, 歸來看取明鏡前, 내가 장이 다 끊어진 것을 믿지 못하겠거든 돌아와 거울 앞을 보라)"이라고 되어 있었다. 그러자 허씨부인은 가볍게 웃으면서, 무측천의 시를 들어보았느냐 내가 외워보겠다고 하고는 "불신비래상하루, 개상간취석류군(不信比來常下淚, 開箱看取石榴裙, 내가 자주 눈물 흘리는 것을 믿지 못하겠으면, 상자를 열어 눈물자국으로 석류처럼 무늬가 진 치마를 보아라)"라고 하였다. 이백은 영 체면이 서지 않았다. 원래 부인의 앞에서 자기의 재능을 뽐내려고 했었는데, 오히려 자기가 다른 사람의 시를 모방한 흔적까지 들키고 말았다. 이러한 이야기로 볼 때 두 사람의 관계는 아주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허씨와의 사이에 일남일녀를 낳았다. 딸은 평양(平陽)이라고 하는데 출가후에 얼마되지 않아 죽었다. 아들은 "명월노(明月奴)"라고 하는데, 곽말약은 <<이백과두보>>라는 글에서 이 이름이 괴이하고 남자아이의 이름같지 않으며, 분명히 평양의 어릴때 이름일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위만의 글에서 글자가 중간에 빠진 것같다는 것이다. "허씨를 취했고, 일남, 일녀를 낳았으며, 딸은 명월노라한다" 이것은 주관적이 억측이다. 해석이 안된다고 글자가 빠졌다고 해버린 것이다. 사실, 서역인들의 이름짓는 방식은 한족들과 다르다. 이백은 "화교"인 셈이다. 그는 서역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러니 이름짓는 것도 역시 다를 수밖에 없다. 명월노의 뜻은 달처럼 빛나는 아이라는 뜻이다. 명월노의 이름은 백금(伯禽)이다. 그의 누나는 평양이다. 평양은 원래 한무제의 누나의 이름이고, 시집간 후에 과부가 되었으며, 나중에 대장군 위청에게 시집갔는데,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 추었다. 평양공주처럼 예쁘고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 추었을 것이다. 이것도 중원의 한족과 다른 점이다. 과부의 이름에 대하여도 그다지 거리낌이 없었다. 그의 작은 아들 이름인 파려도 역시 괴이하다. 사실 이것은 바로 "파리(玻璃, 유리)"라는 뜻이다. 아이가 수정처럼 밝다는 의미이다. 이름에서 보더라도 이백은 서역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을 알 수 있다.
허부인은 개략 개원28년(740년)에 죽었다. 당시 이백은 40세이고, 아직 남양에서 놀고 있었다.
이백의 마지막 처는 종(宗)씨인데, 그는 재상을 지냈던 종초객(宗楚客)의 손녀이다. 이 여인은 개략 이백이 50세쯤 되었을 때 결혼했고, 이백과 여러해를 함께 했다. 나중에 이백과 함께 여산에 올랐고, 이백이 감옥에 들어가거나 유배를 갈 때도 그녀는 집안 사람들과 함께 그를 구하기 위하여 힘썼다. 이백이 사면된 후, 아마도 다시 만났을 것이다. 나중에 이백은 다시 이광필의 군대를 따라가는데, 그 후에는 아마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이백은 첩을 두 명 두었다.
이백의 두 첩중에서 유씨는 부인의 도리를 잘 지키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이백은 화가나서 그녀를 욕하는 시를 지으니 제목이 <<설참시증우인>>이다. 여기서 그는 "그대 부인이 미쳐날뛰는 것은 참새가 짹짹거리는 것보다 못하고, 그대 부인이 음탕한 것은 참새가 아무렇게나 어울리는 것보다 못하다..."
이처럼 자기의 처를 욕하는 시를 지은 것도 중국의 시단에서 유일한 경우이다.
그러나, 남편으로서 이백은 스스로도 자신이 좋은 남편은 아니라고 고백한 바 있다. 그가 쓴 <<증내>>라는 시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삼백육십오일 매일 곤드레만드레 취해있다. 이백의 부인이 되느니 차라리 내시의 처가 되는 것이 낫겠다
이처럼 돈도 없고, 하루 종일 얼굴도 들이밀지 않는 이백과 결혼하여 산다는 것은 그 자체가 억울한 일이다. 게다가 욕까지 먹는다면 더욱 억울할 것이다.
그러나, 이백은 어떤 때는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서 그녀의 행위를 이해해주기도 하였다. 그가 쓴 <<거부음>>이라는 시에서는 여인의 입장이 되어 행위를 변명해주기도 하였다. "네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나도 떠날 권리가 있다"는 내용이다. 여기에서 볼 때, 이백에게는 남녀평등의 사고가 자리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여자에게도 자기의 욕구가 있는 것이며, 일방적으로 욕만 할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 놀라운 점은 이백은 스스로 반성하였다는 점이다.
억석초가군(憶昔初嫁君) 생각해보니, 처음 남편에게 시집올 때 소고방의상(小姑方倚床) 시누이는 어려서 겨우 침상에 기대어 서 있었네 금일첩사군(今日妾辭君) 오늘 내가 남편을 떠나게 되었는데 소고여첩장(小姑如妾長) 시누이가 벌써 자라 옛날 나만큼 되었네 회두어소고(回頭語小姑) 고개돌려 시누이에게 말하니 막가여형부(莫嫁如兄夫) 절대로 네 오빠같은 사람에게 시집가지 말거라
이백이 욕을 한 "거부"는 유씨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백이 산동에서 얻은 첩의 성은 무엇인지 지금은 아무런 기록이 없다. 이백에게 아들을 하나 나아주었는데 "파려"였다. 이는 순수하고 빛난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이 아들의 어릴 때 이름은 천연(天然)이다. 그가 자연스럽게 자라기를 바랐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백은 자기의 아들에게 이름을 지어줄 때 마치 시를 짓듯이 했다. 그의 싯구처럼 아주 개성이 뚜렸하다. 아쉽게도 이백은 오래지 않아 먼 길을 떠나고 가족과 떨어져 지내며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파려의 운명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하나의 수수께끼이다. |
출처: 중국,북경,장안가에서 원문보기 글쓴이: 중은우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