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종 (文宗)
만약 문종이 오래 살았다면 ?
문종은 1415년 태어나 세종 즉위 3년에 세자로 책봉되니 그의 나이 8세이었고, 그 후 29년 동안 왕세자로 머물러 있었다. 그는 어릴 때 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과학,기계에도 관심이 많아 측우기 제작에 직접 참여하였고, 천문,역법(曆法), 산술에도 뛰어났을 뿐 아니라 서예에도 능하였다.
학문에 밝고 어떤 분야에도 통달하였으며, 마음이 너그럽고 자상하여 거동이 침착, 신중하여 남에게 비난받는 일이 없었다. 언론을 활성화시켜 6품 이하의 신하에도 윤대를 허락하여, 낮은 신하의 말도 항상 경청하려는 聖君의 자질이 뛰어났다.
역사에 假定은 없지만, 만약 문종이 오래 살았다면 세종의 치적을 뛰어넘는 큰 업적을 남겼을 것이다. 훈민정음 창제에 그의 역할이 절반이라고 할 만큼 공이 대단하였고, 5년간의 섭정을 통하여 준비된 왕이었으며, 실제 世宗 말기의 정치적 치적은 사실 世子의 업적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역사에 가정 (假定)은 없지만
病弱한 효자, 문종
각종 질환으로 병상에 누운 것은 1436년(세종 18년)이었다. 이때 문종, 이향(李珦)의 나이 23살. 더 이상 건강에 자신이 없는 세종은 왕세자에게 서무 결재권을 넘겨 주기 시작하여, 세자는 결국 29살 때 부터 거의 전권을 물려 받는다. 그러나 그 후 세자도 건강이 나빠져 왕과 세자가 함께 병석에 누워 있는 날이 많아지고, 세자의 건강을 염려한 세종은 세자의 일을 대신하여 주기도 한다.
그는 역사상 효성이 가장 지극한 왕으로 꼽히고 있다. 그는 어머니 소현왕후가 병을 앓자 10여일을 먹지도,자지도 않고 버텼다고 실록은 전한다. 그리고 세종의 임종을 맞이하여 눈물이 홍수처럼 흘러 소매가 다 젖은 채로 조선의 5대 왕으로 즉위식을 치른다.
1450년 2월 世宗이 죽자 文宗은 5년의 섭정을 끝내고 마침내 왕으로 등극하였지만, 세종 후기부터 아버지와 함께 병석에 누어 지낸 날이 많은 원래 病弱한 왕이었다. 그는 즉위 후에 유연함과 강인함을 곁들인 여러 정책을 시행하였지만, 악화되어 있던 건강으로 큰 뜻을 펼칠 기회도 없이 재위기간 불과 2년3개월에 세상을 떠났다.
우선 그는 각종 편찬사업을 전게하는데...이는 역사와 兵法을 정리하여 사회 기반을 정착시키고, 제도를 확립하여고 했음을 의미한다. 東國兵鑑, 고려사, 고려사절요,대학연의주석 등을 편찬하게 하였다. 그리고 여러 학문에 능한 문종은 특히 兵書에 관심이 많아 한국과 중국의 여러 병서와 진법(陣法)을 종합하여, 진법구서를 직접 저술하기도 하였다.
등극 후 북방이 다시 시끄러워지자 文宗은 김종서를 다시 평안,함경도 관찰사로 보내어 안정시키고, 김종서는 노구를 이끌고 1년 여의 기간 동안 군사 전반을 점검하고 대비책을 마련하였다.
문종 화차 (火車)
문종실록 6권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 화차(火車)의 제도는 수레 위에 가자(가자)를 만들어 그 안에 중신기전(中神機箭) 100개 혹은 사전총통(四箭銃筒) 50개를 설치하고, 심지에 불을 붙여 차례로 발사하는 것이다.
크기와 무게는 평탄한 곳에서는 두사람이 끌면 수월하고, 아주 험준한 곳에서는 두 명이 끌고 두 명이 밀어야 했으며, 그 중간쯤인 곳에서는 두 명이 끌고, 한 명이 밀면 되는 정도이었다. 그 제도는 모두 임금이 가르쳐 준 것이었다 "
고려말 최무선, 최해산에 의하여 발명된 주화(走火 ..달리는 화살)를 文宗은 이를 더욱 발전시켜 당시로서는 가공할만한 화차를 만들었는데, 이를 문종화차(文宗火車)라고 한다. 그 설계도가 現存한다. 당시 유럽에서는 마차에서 활을 쏘는 수준이었지만, 조선시대의 화차 특히 문종화차는 자동발사기 수준이었다.
사전총통(四箭銃筒) 탑재형 문종화차는 50개의 총통이 각각 세전(細箭..가는 화살) 4발씩을 동시 발사하는 체제로 되어 있어서, 거의 연발 산탄총에 가까운 무기이었다.
문종실록에는 모화관에서 실시한 시험발사가 성공적으로 끝났음을 말해주는 기록이 있으며, 화차 1대의 위력은 화통수 10명에 해당하는 효능이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 권율장군이 행주산서의 대첩을 이끈 후 " 오늘 내가 이긴 것은 실은 문종 임금의 화차 덕분이다 "라고 말하였다.
측우기(測雨器)는 장영실이 아니라 文宗이 발명
세종실록 92권 (1441년 5월28일)에는 세계 최초로 발명된 우량계(雨量計) 관련 기록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 近年以來, 世子憂旱, 每當雨後, 入土分數, 掘地見之, 然未可的知分數, 故鑄銅爲器, 置於宮中, 以驗雨水盛器分數 "
즉, 근년 이래로 세자가 가뭄을 근심하여 비가 올 때 마다 비 온 뒤에 땅을 파서 젖어 들어간 깊이를 재었으나, 정확하게 푼수를 알 수 없었으므로, 구리로 주조한 기구를 궁중에 설치하고, 여기에 고인 빗물의 푼수를 조사하였다..........
문종의 친필 글씨
수양대군이 단종의 아버지 文宗도 죽였다(1) ?
세종은 조선최초로 長子承繼의 원칙을 지켰다. 文宗이 첫째, 首陽大君이 둘째, 安平大君이 셋째아들이었다. 그러나 이 사실은 결과적으로 세종의 실수이었다.
세종 아들들의 비극은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이 왕위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세종은 일찍이 맏아들인 이향(李珦. 문종)을 세자로 책봉하였으나, 수양대군은 결코 왕위에 대한 욕심을 포기하지 않았다. 수양은 그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우선 風水地理를 이용하였는데, 풍수란 풍수를 믿는 사람에게는 실현가능한 미래로 여겨진다.
세종23년 현덕왕후 권씨가 단종을 낳은 후, 3일만에 산후통으로 죽는다. 세종은 당대 제일의 풍수가 최양선에게 장지(葬地)의 선정을 맡겼는데, 왠일인지 바닷가 안산으로 결정한다. 이 무렵 전농사(全農寺 ..제사에 쓸 곡식을 보관하는 관청)에 목효지(睦孝智)라는 노비가 있었는데, 한 눈이 멀었으나 풍수에 능하였는데, 세종에게 상소를 올려 장지문제를 제기하였다.
세종실록 23년 8월25일 ... 그 산은 내룡(來龍)이 약하고, 길 때문에 끊어진 곳이 10여 군데나 됩니다...내룡이 악(惡)하고,약(弱)하면 낳은 아이가 녹아 버립니다... 장자,장손이 일찍 죽는 악지(惡地)이오니 다른 길지로 이장해야 합니다.....그리고 폐허가 된 읍터나 장터는 묘자리로 금기사항인데, 안산 古邑을 결정한 것 역시 옳지 않습니다....
이에 세종은 재조사를 지시하지만 여기에 수양대군도 참여시키는 실수를 저질렀다. 수양대군은 원래 자리를 고수하였으나 목효지가 주장하여 장혈(葬穴 ..시신이 놓이는 곳)의 위치만 바꾸게 되는 것이다. 수양대군과 風水家 최양선이 미리 결탁했는지는 모르지만, 목효지의 예언은 그대로 적중하고 만다. 수양대군은 목효지의 처벌을 주장하지만, 세종은 오히려 그를 노비 신분에서 풀어주어 풍수공부에 전념케 하였다.
단종의 생모 현덕왕후 무덤(昭陵)의 옛터
수양대군이 단종에 사약을 내릴 때,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가 꿈에 나타나 수양을 꾸짖고 얼굴에 침을 뱉고 사라졌다. 그리고 이내 世祖의 아들이 죽고, 세조 자신 원인 모를 피부병에 걸리게 되었다.
이는 현덕왕후의 보복이라고 여긴 세조는 수양대군은 현덕왕후의 무덤을 파헤쳐 그 관(棺)을 바닷가에 쳐 넣으라 명하였다. 이는 실록의 기록이며 지금의 안산시 목내동에 있다. 이후 50여년이 지난 1513년 中宗의 지시로 그 유골을 찾아 이 곳 현릉에 다시 묻혔다.
수양대군과 文宗의 葬地 결정 그리고 목효지(睦孝智)
문종이 병약하여 즉위 2년 만에 죽어, 이 때 文宗의 葬地 결정을 수양대군이 주도하여 결정하는데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의 경우와 똑 같은 일이 벌어진다. 수양대군은 이 곳 현릉(顯陵)자리를 문종의 장지(葬地)로 결정하였다.
이 때 또 목효지(睦孝智)가 문제를 제기였다. 목효지는 수양대군의 방해를 피하여, 어린 단종에게 작은 쪽지를 전하는 데 성공하는데, 이 쪽지에는 아버지 文宗의 장지로 결정된 곳이 " 정룡(正龍), 정혈(正穴)이 아닙니다 " 라고 씌여 있었다. 長子,長孫이 잘못되는 자리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일개 노비 출신 풍수가가 왕의 숙부인 수양대군을 이길 수는 없었다.
수양대군은 " 목효지는 한 눈이 멀었으니 지리가(地理家 ..풍수지리가)에서 꺼리는 자 "라고 공격하였고, 葬地는수양대군의 주장대로 이 곳 현릉으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실제 땅을 9척쯤 파니 물이 솟아나는 惡地이었다. 묵효지의 말이 맞았으므로, 목효지가 제안한 마전현(麻田縣) 북쪽이나, 장단현(長湍縣) 북쪽을 검토해야 했으나, 단종실록의 기록처럼 " 세조(수양대군)이 손수 장서(葬書)를 쥐고 혼자 可否를 결정했다 "고 기록한 것처럼 수양대군은 원래의 자리의 옆자리로 결정하였다.
이 곳이 바로 동구릉 안의 현릉(顯陵)인 것이다. 수양대군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1455년 11월 목효지를 교수형에 처해 죽이는데, 죄목은 그저 천기누설죄 이었다. 그로부터 300년이 훨씬 지난 1791년 正祖가 목효지의 억울함을 풀어주어 신원(伸怨)되었다.
목효지의 말대로 문종은 代가 끊겼고, 수양대군은 단종만 죽인 것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인 문종도 죽였다. 풍수지리로... 거기에 수양대군은 문종을 죽인 또 다른 혐의가 있는 것이다.
수양대군이 端宗의 아버지 文宗도 죽였다 (2) ?
요즈음의 한의학자들은 새로운 주장을 하고 있다. 수양대군은 단종만 죽인 것이 아니라 단종의 아버지 문종(文宗)도 죽인 것이라고...
문종의 일찍 죽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종기(腫氣)이었다. 그러나 당시 의관(醫官) 전순의(全循義)는 종기에 害로운 처방만을 내리고, 종기에 치명적인 꿩고기만 날마다 처방하였다고 한다. 평소 몸이 약하여 문종이 일찍 죽는다고 해도 이상할 일은 없었다.
이를 노린 수양대군의 사주를 받은 의관 전순의(全循義)가 이에 동조하였다는 추측이 가능한 것은,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른 후 수양대군과 전순의의 행적에서 짐작할 수 있다.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른 후, 별다른 공로도 없는 전순의가 일등공신으로 책봉이 되며, 그 후에도 전순의는 승승장구 벼슬이 정2품에 이른다. 천민(賤民)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원래 왕이 죽으면 그 왕을 치료하던 의관은 탄핵되어 강등되거나 사형되는 것이 원칙이었는데..
문종이 죽고, 전순의(全循義)에 대한 탄핵 상소(上訴)가 연일 뒤따라도 世祖는 이를 모두 모른 척한다. 오히려 벼슬을 높혀 주고, 死六臣의 재산을 몰수하여 전순의에게 준다.
文宗 .... 세종의 실책 그리고 단종애사의 출발
대통령의 건강은 국가기밀로 취급되고 있다. 그것은 바로 국가의 안위나 경쟁력과 직결되기 때문이었다. 문종은 세종대왕의 맏아들로써 그가 왕위에 오르게 되는 사건은 조선시대에 있어 매우 뜻깊은 사건이었다. 태조 이성계 이래 왜곡되어 왔던 적장자(嫡長子) 승계 원칙을 준수하였다는 사실의 의미는 후일의 여러 피비린내 나는 사건,사화를 보면 자명해진다.
준비된 왕
거기에 문종은 유교사회의 군주가 갖추어야 할 덕목을 두루 갖춘 천부적인 자질과 그리고 세종 말년 8년 동안의 섭정을 통하여 충분한 수업기간을 가질 수 있었던 준비된 왕이었다. 세종 말년 8년의 섭정기간과 재위 2년여 동안 보여주었던 文宗의 통치는 바로 유교적 정치이념에 근거한 위민(爲民)의 정치이었다. 그의 이념과 실천은 세종의 뒤를 이어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끌어 갈 훌륭한 재목이었으며 이는 조선의 크나큰 행운이었다.
그러나 세종의 실책
그러나 결과적으로 문종의 등극은 세종의 실책이었다. 한 나라 왕의 건강은 매우 공적(公的)인 것임을 세종은 간과하였던 것이다. 우선 문종 스스로 강한 신체적 에너지가 결여된 까닭에 왕권이 위축되었으며, 상대적으로 신권(臣權)이 강화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世宗이 이루어 냈던 王權과 臣權의 조화가 허물어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문종의 병약은 왕실 종친들의 발언권이 강해지는 후유증도 낳았다. 안평대군, 수양대군의 포기없는 왕권에 대한 집착도 바로 문종의 병약으로 취약해진 왕권의 빈틈을 노린 것이었다.
왕권이 위축됨에 따라 상대적으로 臣權이 일방적으로 강화되는 것도 문제이었는데, 왕실종친들의 강화된 입지는 신권(臣權) 특히 언론(言論)의 독주를 야기하는데, 古今을 불문하고 언론은 양날의 칼날을 갖고 있는 것이다. 필효한 기능이지만, 분별없는 언론은 세상을 혼탁하게 하고, 신권은 탄핵을 남발하여 국가통치의 에너지를 소모시키는 것이다.
결국 문종은 자신의 재위기간뿐만 아니라 아들인 단종의 왕권도 지켜주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이는 찬란하였던 세종시대의 종언을 의미하며, 곧 이어 왕자들의 권력을 향한 지속적인 도전으로 계유정란의 피바람이 불게 된다.
왕비(王妃)가 없었던, 문종의 여복(女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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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김규봉 ... 사는 이야기 원문보기 글쓴이: 非山非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