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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6~28장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으심 그리고 부활에 대한 기록입니다. 26장 1~5절을 보겠습니다.
1 예수께서 이 모든 말씀을 마치셨을 때에, 자기의 제자들에게 이르시기를
2 "너희가 아는 대로,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인데, 인자가 넘겨져서, 십자가에 달릴 것이다" 하셨다.
3 그 즈음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가야바라는 대제사장의 관저에 모여서,
4 흉계를 꾸며서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였다.
5 그러나 그들은 "백성 가운데서 소동이 일어날지도 모르니, 명절에는 하지 맙시다" 하고 말하였다.
유월절 직전에 유대지도자들이 음모를 꾸미는 것으로 예수님의 수난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 예수님 자신이 스스로 고난당할 것을 예고하셨노라고 본문은 말합니다. 어쩔 수 없이 당한 죽음이 아니라 예정된 죽음이며, 예수님 스스로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신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 신학자들은 이 기록을 ‘수난사건’이라고 하지 않고 ‘수난사화’라고 말합니다. 전해 오는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현대 신학자들이 예수님의 수난과 죽으심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기록된 그대로 모두 사실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본문은 한 여자가 값진 향유 한 옥합을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다는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제자들이 이것을 보고 분개하면서, 왜 이 비싼 향유를 이렇게 허비하느냐고, 이 향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는 것이 좋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여인이 아름다운 일을 했다고 말씀하시며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주십니다. 11~13절을 보겠습니다.
11 가난한 사람들은 늘 너희와 함께 있지만, 나는 늘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
12 이 여자가 내 몸에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치르려고 한 것이다.
13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온 세상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자가 한 일도 전해져서, 그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
경제성을 생각한다면 제자들의 말이 맞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의 행위에는 경제성만으로 따질 수 없는 깊은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장례를 치르려고 한 행위이기 때문이라고 본문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희생을 기리고, 그 의미를 찾고, 그 희생에 동참하는 것이라는 뜻이 되겠습니다. 이어지는 본문 14~16절을 보겠습니다.
14 그 때에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가룟 유다라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묻기를
15 "내가 예수를 넘겨 주면, 내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 하였다. 그들은 유다에게 은돈 서른 닢을 셈하여 주었다.
16 그 때부터 유다는 예수를 넘겨 주려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가룟 유다가 돈을 받고 예수를 넘겨주려 했답니다. 돈 욕심 때문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기엔 돈의 금액이 너무 적습니다. 가룟 유다는 아마도 젤롯당원이었을 것이며, 예수님의 가르침에 동의할 수 없었기에 예수님을 배반했을 것이라고 보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젤롯당은 로마제국과 싸워 유다의 독립을 쟁취하려는 과격한 행동주의 집단이었습니다. 나쁘게 말하면 테러리스트들이고 좋게 말하면 독립운동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온건한 자기희생적 가르침에 동의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본문 20~25절을 보겠습니다.
20 저녁때가 되어서,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와 함께 식탁에 앉아 계셨다.
21 그들이 먹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넘겨 줄 것이다."
22 그들은 몹시 근심이 되어, 저마다 "주님, 나는 아니지요?" 하고 말하기 시작하였다.
23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나와 함께 이 대접에 손을 담근 사람이, 나를 넘겨 줄 것이다.
24 인자는 자기를 두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떠나가지만, 인자를 넘겨 주는 그 사람은 화가 있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기에게 좋았을 것이다."
25 그 때에 예수를 넘겨 줄 유다가 "선생님, 나입니까?" 하고 물으니, 예수께서 그에게 "네가 말하였다"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월절 음식을 나누시는 것에 대한 기록입니다. 접시에 손을 담근다는 것은 접시에 담긴 소스에 빵을 찍어먹는 걸 말하는 것인데, 유다가 예수님과 동시에 빵을 소스에 찍었던 것 같습니다.
이 본문을 대하면서 좀 불편한 느낌을 받은 분도 계실 것 같습니다. 누군가 자기를 배반할 거라고 굳이 제자들 앞에서 밝히는 것이나,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보이신 언행이라고 보기에는 실망스러운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이 본문은 기록자가 예수님의 입을 빌어서 한 말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제가 이런 의심을 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기록자가 ‘예수를 넘겨줄 유다가’ 라고,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먼저 언급하기 때문입니다.
이 본문은 서기 70년에 유대독립전쟁이 실패로 돌아간 후에, 예수공동체는 무력으로 뜻을 이루는 집단이 아니라 사랑과 평화로, 그리고 인내와 용서함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신앙공동체로 그 정체성을 명확히 정했기에, 무력을 통한 해방을 꿈꾸었던 사람들을 정죄한 흔적으로 보는 신학자들이 많습니다.
이어지는 본문은 마지막 만찬에 대한 기록입니다. 26~28절을 보겠습니다.
26 그들이 먹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빵을 들어서 축복하신 다음에,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고 말씀하셨다. "받아서 먹어라. 이것은 내 몸이다."
27 또 잔을 들어서 감사를 드리신 다음에, 그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모두 이 잔을 마셔라.
28 이것은 많은 사람에게 죄를 사하여 주려고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다.
이 본문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과 한 몸을 이룬다는 것과, 예수님의 희생이 많은 사람의 죄를 용서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모든 그리스도 교회는 이 본문에 의거하여 성찬식을 거행합니다. 성찬예식을 통해서 죄의 용서를 받고,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룬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본문은 예수께서 베드로가 부인할 것을 예고하시는 기록입니다. 31~35절을 보겠습니다.
31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오늘 밤에, 너희가 모두 나를 버릴 것이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내가 목자를 칠 것이니, 양 떼가 흩어질 것이다' 하였다.
32 그러나 내가 살아난 뒤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갈 것이다."
33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였다. "모두가 주님을 버릴지라도, 나는 절대로 버리지 않겠습니다."
34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오늘 밤에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35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였다. "내가 선생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을지라도, 절대로 선생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다른 제자들도 모두 그렇게 말하였다.
너무나 잘 알려진 내용이지만, 내용의 사실성에 대해 의심하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본문이 기록된 70~80년대의 상황에서 흔들리는 신도들을 위로하기 위해 설정된 이야기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도 저렇게 실수할 때가 있었으니, 나도 실수 좀 했다고 주저앉지 말고, 용기를 내서 다시 일어서야지’ 하고 생각할 수 있게 된다면, 베드로에게는 명예롭지 못한 기록이지만 당시 신도들에게는 큰 용기를 주는 말씀입니다. 이어지는 본문 36~46절을 보겠습니다.
36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고 하는 곳에 가서, 그들에게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하는 동안에, 너희는 여기에 앉아 있어라" 하시고
37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서, 근심하며 괴로워하셨다.
38 그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에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어라."
39 예수께서는 조금 더 나아가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기도하셨다. "나의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40 그리고 제자들에게 와서 보시니, 그들은 자고 있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이렇게 너희는 한 시간도 나와 함께 깨어 있을 수 없느냐?
41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서 기도해라. 마음은 원하지만, 육신이 약하구나!"
42 예수께서 다시 두 번째로 가서, 기도하셨다. "나의 아버지, 내가 마시지 않고서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는 것이면,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43 예수께서 다시 와서 보시니, 그들은 자고 있었다. 그들은 너무 졸려서 눈을 뜰 수 없었던 것이다.
44 예수께서는 그들을 그대로 두고 다시 가서, 같은 말씀을 다시 하시면서, 세 번째로 기도하셨다.
45 그리고 제자들에게 와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남은 시간을 자고 쉬어라. 보아라, 때가 가까이 왔다. 인자가 죄인들의 손에 넘어간다.
46 일어나서 가자. 보아라, 나를 넘겨 줄 자가 가까이 왔다."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장면입니다. 이 본문은 제가 기독교에 입문한 초창기에 깊은 영향을 받았던 말씀입니다. 기적을 행하시는 능력의 예수님보다 때로는 이렇게 흔들리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더욱 큰 위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사실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예수께서 기도하실 때 제자들이 모두 잠들어 있었다는 기록 자체가 본문의 사실성을 의심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본문은 예수께서 잡히신 일에 대한 기록입니다. 가룟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을 데리고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유다가 예수께 입을 맞추는 것을 신호로 유대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체포합니다. 이후의 기록 가운데 51~52절을 보겠습니다.
51 그 때에 예수의 일행 가운데 한 사람이 손을 들어 자기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내리쳐서, 그 귀를 잘랐다.
52 그 때에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 칼을 쓰는 사람은 모두 칼로 망한다.
예수의 일행 가운데 한 사람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잘랐다고 본문은 말합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누가복음에는 칼을 내리친 사람이 ‘예수의 일행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는 베드로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같은 사건에 대한 기록이 서로 다를 때 학자들은 시기적으로 앞선 기록과 덜 극적이고 감동이 적은 기록이 사실에 가깝다고 말합니다. 베드로를 특정한 요한복음의 기록보다 공관복음서의 기록들이 사실에 가깝다는 얘기가 되겠습니다.
예수님은 칼을 휘두른 제자에게 “칼을 쓰는 사람은 모두 칼로 망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 기록은 서기 30년대 초에 예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이 아니라, 서기 70~80년대의 초대교회지도자들이 예수님의 입을 빌어서 말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권력자나 침략자가 쓰는 칼 뿐 아니라 악한 세력에 무력으로 저항하는 것까지 부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예수께서 친히 하신 말씀으로, 그래서 만고불변의 진리로 받아들여야 한다면, 안중근 의사의 의거는 테러라고 말하는 일본 극우학자들의 해석이 옳다고 볼 수 있고, 일제시대에 무력으로 일본제국에 저항했던 우리의 독립운동도 모두 부정될 수 있습니다. 부당한 세력에 맞서 칼로, 총으로, 즉 무력으로 저항했기 때문입니다.
1909년에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는 토마스라는 세례명까지 받은 천주교인이었습니다. 당시 조선천주교회의 수장이었던 프랑스인 뮈텔주교는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의거가 아니라 살인행위이며, 천주교의 가르침에 어긋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김수환 추기경은 1993년에 안중근 의사 추모미사를 집전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일제 치하에서, 교회가 안 의사 의거에 대한 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여러 잘못을 범한 것에 대해 연대 책임을 느낍니다. 의거는, 일제의 무력 침략 앞에 독립전쟁을 수행하는 행위였으므로 정당방위이며 의거로 보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어지는 본문에는 예수께서 종교지도자들에게 심문을 받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59~64절을 보겠습니다.
59 대제사장들과 온 의회가 예수를 사형에 처하려고, 그를 고소할 거짓 증거를 찾고 있었다.
60 많은 사람이 나서서 거짓으로 증언하였으나, 쓸 만한 증거는 얻지 못하였다. 그런데 마침내 두 사람이 나서서
61 말하기를 "이 사람이 하나님의 성전을 허물고, 사흘 만에 세울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였다.
62 그러자, 대제사장이 일어서서, 예수께 말하였다. "이 사람들이 그대에게 불리하게 증언하는 데도, 아무 답변도 하지 않소?"
63 그러나 예수께서는 잠자코 계셨다. 그래서 대제사장이 예수께 말하였다. "내가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고 그대에게 명령하니 대답하시오. 그대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요?"
64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당신이 말하였소. 내가 당신들에게 다시 말하오. 이제로부터 당신들은, 인자가 권능의 보좌 오른쪽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보게 될 것이오."
재판이 열리고, 증인들의 증언이 이어지는 가운데, 예수님이 하나님의 성전을 허물고 사흘 만에 세울 수 있다고 말했다는 증인들의 말을 본문이 먼저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본문이 말하는 성전은 예수님의 몸을 상징하는 것이고, 성전을 허문다는 것은 예수님이 죽으신다는 것이고, 사흘 만에 세운다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말하는 것이라는 해석에 보수적인 신학자들은 물론이고 진보적인 신학자들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정말로 이 말씀을 하셨을 가능성보다는, 일세기 후반 초대교회의 해석으로 보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대제사장이 예수님에게 불리한 증언에 대해 변호할 것이 있으면 하라고 기회를 주자,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실 것이라는 말씀에 이어 하늘 구름을 타고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노라고 본문은 말합니다. 복음서 기자는 자신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말, 그래서 꼭 하고 싶은 말을 이렇게 증인들의 증언과 예수님의 말씀, 그리고 대제사장의 반응 안에 담아내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고백하는 사도신경은 복음서 기자의 이런 의도를 정확히 담아냈습니다.
26장의 마지막 부분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69~75절을 보겠습니다.
69 베드로가 뜰 안 바깥쪽에 앉아 있었는데, 한 하녀가 그에게 다가와서 말하기를 "당신도 저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다닌 사람이지요?" 하였다.
70 베드로는 여러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말하기를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하였다.
71 그런데 베드로가 대문 있는 데로 나갔을 때에, 다른 하녀가 그를 보고, 거기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다니던 사람입니다" 하였다.
72 그러자 베드로는 맹세하고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 하고 다시 부인하였다.
73 조금 뒤에 거기에 서 있는 사람들이 다가와서 베드로에게 말하였다. "당신은 틀림없이 그들과 한패요. 당신의 말씨를 보니 확실하오."
74 그 때에 베드로는 저주하고 맹세하면서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곧 닭이 울었다.
75 베드로는 "닭이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신 예수의 말씀이 생각나서, 바깥으로 나가서 몹시 울었다.
베드로는 자기를 알아보는 사람이 계속 나타나 곤란한 질문을 하자 세 차례나 예수님을 부정했는데, 첫 번째는 그냥 모른다고 했고, 두 번째는 맹세하며 부정했고, 세 번째는 저주하고 맹세하면서 부정했답니다. 그리고 닭이 울자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바깥으로 나가 몹시 울었노라고 본문은 말합니다. 복음서 기자는 이 이야기를 통해 기록 당시의 초대교회 신자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시오. 인간이란 존재가 이렇게 연약한 것이오. 극한 상황에 처하자, 베드로 사도조차 이렇게 비굴한 모습을 보이고 있으니 말이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가짐을 단단히 하고, 어떤 시험과 환난이 와도 예수님을 부인해서는 안 될 것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