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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사업가이면서 문화재 수집에 평생 열정을 쏟았던 동원 이홍근 선생(1900~1980)의 소장품을 조사하던 최순우 국립중앙박물관장은 《표암선생유적(豹庵先生遺蹟)》이라는 화첩을 본 순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신선한 근대감각이 느껴지는 혁명적인 표현법으로 송도의 명승을 그린 16장의 진경(眞景)산수화가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최 관장은 이 화첩을 《송도기행첩(松都紀行帖)》이라는 이름으로 학계에 소개하고, 1973년 《한국미술이천년전》을 통해 처음 일반에 공개했다. 그중 영통동 입구의 거대한 바위들을 그린 〈영통동구(靈通洞口)〉는 서양화법을 구사한 대표적인 그림으로 국사교과서에 실리며 조선후기 '실학'을 상징하는 명화로 유명해졌다. 1980년 동원 선생의 유지(遺志)에 따라 5000여점의 유물이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되자 이 그림들은 영원히 국민의 것이 되었다.
이 화첩은 표암 강세황(姜世晃·1713~1791)이 개성유수 오수채의 초청으로 1757년 송도를 유람할 때 선물로 그려주어 해주 오씨 집안에서 전해져왔다. 표암의 절친한 벗인 허필에 의하면, 당시는 《무서첩(無暑帖·더위를 없애는 화첩)》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7월의 무더위를 피해 송도 부근의 산과 계곡을 유람하며 시원한 명승을 상쾌한 필치로 그렸기 때문일 것이다.
유람 순으로 그려나간 화첩은 〈송도전경(全景)〉이 맨 앞에 나온다. 남문 누각에서 조망한 송악산과 시가지를 한눈에 잡아냈다. 대로가 점점 좁아지는 초점 투시법을 구사해 더욱 현장감이 느껴진다. 7면의 〈영통동구〉는 오관산의 영통동 계곡에 들어서는 순간 사람을 압도하는 장관을 서양화풍의 명암법을 활용해 그린 것이다. 표암은 당시의 놀라운 감동까지 생생하게 써놓았다. "영통동 입구에 어지럽게 널려 있는 바위들은 크고 웅장해 크기가 집채만 하고 푸른 이끼가 덮여 있어 보자마자 놀라 눈이 휘둥그레진다." 화첩은 성거산의 〈박연폭포〉를 지나 천마산의 〈태안창〉 일대에서 끝나는데, 참신한 발상과 신선한 감각은 물론 혁신적인 서양화법이 넘쳐나서 회화사적으로 매우 주목되는 작품이다.
표암은 어떻게 250년 전에 이렇게 서양화풍이 구사된 참신한 진경산수화를 그릴 수 있었을까?
18세기는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와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에서 보듯 자존적인 주체의식이 강했고, 중국과 서양까지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국제적인 개방성으로 인해 수준 높은 고유문화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당시는 웬만한 대갓집 대청마다 으레 서양화가 걸려 있었을 정도로 국제적인 분위기가 강했기 때문에 《송도기행첩》에 서양화법이 구사된 것은 놀랄만한 일도 아니었다.
표암은 겸재의 창조적 성과를 이론화하고 국제화시켜 단원에게 가르쳐주고 스스로 혁신적인 진경 풍속을 많이 남긴 18세기의 대표적인 문인화가이자 예원(藝苑)의 총수였다.
조선일보 2009.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