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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중국 선종사
5. 선종의 전등상승傳燈相承
1) 선종 초기 전등傳燈
불교는 진한, 후한, 삼국시대와 남북조시대를 걸쳐 점차적으로 들어와 번역, 격의, 연구단계를 거쳐 점차 확산 보급되다가, 수·당 이후로는 그간의 불전에 대한 교판이 성행하고 바야흐로 종파불교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종파불교시대는 어떤 이념을 가진 인물을 중심으로 새로운 교리나 규범을 만들고 이어 그 전통을 계속 계승해 나가는 시대였다. 선종 역시 종파불교 시대에 등장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중국 선종은 보리달마(菩提達磨, ? ~528)를 초조初祖로 하여 신광혜가(神光慧可, 487~593), 감지승찬(鑑智僧璨, ? ∼606), 대의도신(大醫道信, 580∼651), 오조홍인(五祖弘忍, 大滿弘忍, 602(601)~674), 육조혜능(六祖慧能, 大鑑慧能, 638~713)으로 이어졌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소위 선종의 핵심이라는 초기 선종의 ‘전등상승傳燈相承’의 계보는 오랜 세월 우여곡절을 겪으며 완성된 것으로 논란의 여지가 있다. 육조혜능 이후 선종 각파의 지난至難한 투쟁의 결과로 만들어진 것이지 실재와는 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각파의 계보확립을 위해 필요에 따라 편집되기도 하고 왜곡되기도 하면서 정리된 것이다.
중국에 선禪이 소개된 이래 기주 쌍봉산과 강서, 호남 등 지방의 산사山寺에서 두타행을 하던 수행자들 사이에서 새로운 대중적 불교운동이 일어난다. 이들은 중국의 실용주의에 힘입어 교리보다는 선과 염불이라는 실천적 수행을 하게 되는데, 점점 사람들에게 호응을 받게 되었고, 그들에게 동조하는 사람들을 규합糾合하여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이렇게 선종은 장안과 낙양을 근거로 경론을 주석하던 교학중심의 도시가 아닌 주변 변방에서 일어난다. 오늘날 선원의 효시가 되는 동산법문東山法門으로 가시화되면서 부터는 더욱 더 확고하게 그 터를 닦게 된다.
동산법문의 완성자인 홍인의 문하에는 뛰어난 제자들이 모여들었다.『능가사자기』에는 신수神秀와 자주資州의 지선智詵, 백송산白松山의 유주부劉主簿, 화주莘州의 혜장惠藏, 수부隨州의 현약玄約, 숭산嵩山의 노안老安, 누주潞州의 법여法如, 소주韶州의 혜능惠能, 그리고 고려 승려인 양주揚州의 지덕智德, 월주越州의 의방義方 등이 거론되고 있다.
그중 신수를 필두로 하는 북종, 혜능을 내세우는 남종, 자주지선資州智先, 처적處寂, 정중무상淨衆無相으로 이어지는 정중종淨衆宗 등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모두 활발하게 활동하였지만 정중종 계열은 사라지고 선종을 리드했던 계파는 신수의 북종과 혜능의 남종이다.
선종 초기에는 북종의 신수가 뛰어났다. 낙양과 장안을 중심으로 한 양대 수도의 법주法主로, 세 황제의 국사國師로 활약하며 그 명성을 떨친다. 그러나 안녹산의 난(755-763) 이 일어나고 수도가 혼란해지자 그 세력은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이를 계기로 지방에서 수행생활을 하던 그때까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남종의 활약이 두드러지게 된다.
안녹산의 난과 대규모의 회창폐불(會昌廢佛, 845-847), 그리고 연이어 일어난 황소의 난(875-884)은 도시 지역에서 번창하던 북종에게는 치명타가 되었다. 귀족불교 세력이 약화되면서 결과적으로 지방에서 서민불교를 지향하던 남종에게는 그 빈자리를 차지할 절호의 기회가 제공되었던 것이다. 그런 재난의 혼란 속에도 건재하던 남종의 육조혜능 계열은 이후 난이 사그라지면서 변방이던 남방을 벗어나 도시로 진출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던 것이다.
2) 산악불교山岳佛敎 vs. 도시불교都市佛敎
선종, 특히 나중에 주도권을 잡은 남종은, 처음에는 산 속에서 자급자족하며 수행 생활을 하였다. 뒤에는 수도에 진출하여 중앙귀족 및 국가권력과 결연結緣하게 되면서 세력을 떨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선종도 도교와 같이 산에서 태어났지만, 산중불교山中佛敎에서 대중불교大衆佛敎로 들어오게 되었으며, 산악불교山岳佛敎에서 도시불교都市佛敎로 진화하게 된 것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산문을 중심으로 발전한 신라의 산악불교가 고려에 오면 도시불교화 하는 과정도 이와 같다고 하겠다.
중국불교사는 이처럼 산에서 성장한 산악불교와 도시에서 발전한 도시불교의 대립과 교체로 그려 볼 수 있다. 말하자면 중국불교사는 이러한 이중구조의 긴장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대체로 역사의 표면에 드러나는 것은 도시불교이다. 기록으로서 후대에 흔적을 남기는 것이 역사의 요건임은 이미 되풀이해서 말했다.
그러나 도시불교가 번성하다가 쇠퇴하는 기간은 정치상황에 좌우되는 까닭에 비교적 짧았으며, 그때마다 새롭게 불교가 산에서 내려와 도시화되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는 산악불교의 성격을 지닌 선종도 시대가 바뀔 때마다 도시와 산악을 오르내리다가 교학을 중시하는 다른 종파의 쇠퇴를 틈타 전형적인 도시불교로서 중국 전역에 퍼져 나가 커다란 세력을 떨치게 되었던 것이다. (沖本克己 지음, 佐藤繁樹 옮김,『새롭게 쓴 선종사』pp. 130~131.)
선종은 그 세력을 커지자 그들의 위치가 확고히 하기 위한 장치를 모색하기 시작한다. 자파의 내력을 기술한 역사서를 편찬하기 시작한 것이다. 자파의 정통성을 확립하는 동시에 왕실과 중앙 귀족들, 그리고 대중에게 어필하기 위한 목적이었다고 하겠다. 이때 등장하는 책이 북종 계열의『전법보기傳法寶紀』『능가사자기』와 남종계열의『보리달마남종정시비론菩提達摩南宗定是非論』『조계대사별전曹溪大師傳』『단경壇經』등이다.
북종선의 전성기에 간행된『전법보기』에는 숭산 소림사의 법여(法如, 638-689)를 오조홍인 문하에 두었고, 법여에서 신수로 법통이 이어졌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능가불인법지楞伽佛人法志의 저자인 현색玄賾과 그의 제자 정각(淨覺, 683~750)이 지은『능가사자기에는 구나바드라 삼장三藏을 초조로 하여, 2조 보리달마菩提達摩 - 3조 혜가 - 4조 승찬 - 5조 도신 - 6조 홍인 - 7조 신수神秀 - 8조 보적普寂 · 경현敬賢 · 의복義福 · 혜복惠福 등으로 전승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북종의 입장에서 쓰인 이들 선종서는 당 측천무후(則天武后, 624~705) 때, 무후의 부름을 받아 입궐하여 목욕 한 것으로 유명한 북종 계열의 신수나 숭산혜안(崇山慧安 또는 老安, 582~709), 그리고 현색의 “입내설법入內說法”이후 제작된 것이다. 어쩌면 세력이 커지면서 자연스레 이루어진 일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들의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한 수단으로 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안사의 난을 전후해서 하택신회(荷澤神會, 684~758)와 남양혜충南陽慧忠, 사공산본정司空山本淨 등의 입내설법이 있고나서, 신회 또한『보리달마남종정시비론』『조계대사전』『단경』등을 제작한다. 기존 북종 신수계열의『전법보기의 전승계보를 부정하기 위한 수단으로 제작한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북종 신수계에 대항하여 혜능을 달마계 선종 제 6조로 내세우기 위한 포석으로 만들어진 선적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먼저 중국에서 형성되었고 전개되었던 선종에서는 그 권위와 정통성을 멀리 인도에서까지 찾으려는 노력의 일환으로서 {達摩多羅禪經}과 {付法藏因緣傳}을 비롯한 소위 禪經에다 그 근거를 두고 몇 가지 법맥의 유형을 만들어갔다. 따라서 인도의 석가모니에게 정법안장의 근원을 두고 그 법맥을 계승했다는 전등계보가 형성되었다. 이로써 인도선법에 대한 傳燈付法說의 조사는「달마다라선경」의 9조사설로부터 비롯하여「부법장인연전」의 23조사 혹은 24조사설로 발전되고, 이것이「摩訶止觀」으로 수용되었으며, 다시「左溪大師碑」에서 29조사설로 확대되었다.
다음으로 북종선의 전등계보로서는 기존의 인도와 관련된 전등계보를 계승하여 {楞伽經}의 전수자들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는 점이 돋보인다. 그 계보는 {달마다라선경}(411) → {부법장인연전}(472) → {法如禪師碑文}(689) → {능가불인법지}(?) → {傳法寶紀}(712-713) → {楞伽師資記}(713-716)이다.
다음으로 남종선의 전등계보로서는 荷澤神會의 노력에 힘입어 남종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북종의 전등계보를 발판으로 활용하여 그 위에 남종의 전등계보를 완성하였다. 그 계보는 {달마다라선경}(411) → {부법장인연전}(472) → {전법보기}의 비판으로 등장한 {菩提達摩南宗定是非論}(732) → {좌계대사비}(754) → {능가사자기}의 비판으로 등장한 {曆代法寶記}(774) → {曹溪大師傳}(781) → 돈황본 {壇經}(780-800) → {寶林傳}(801)이다. (김호귀,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HK연구교수,「선종의 법맥의식과 전등사서의 형성」.)
신회는 당 개원開元 20년(732)『보리달마남종정시비론』을 쓰고, 활대滑臺 대운사大雲寺에서 무차대회(활대滑臺의 종론宗論)를 여는 등, 그때까지 미미하던 나무꾼 출신 혜능이 달마의 법을 이은 적통임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혜능은 즉각적인 깨달음, 즉 ‘돈오頓悟’를 얻어 홍인의 정계正系이자 적통이며, 신수는 단지 방계傍系라는 것이다. 그리고 달마의 법을 이은 정통6조임을 증명하기 위한 수단으로 ‘달마의 가사를 혜능이 소장하고 있다’는 소위 “전의설傳衣說”을 퍼뜨린다. 이로서 혜능은 즉각적인 깨달음인 돈오頓悟를, 신수는 거기에 못 미치는 단계적인 깨달음인 점오漸悟를 얻었다고 주장하는 “남돈북점南頓北漸”으로 굳어지게 되는 틀을 구축해 나갔던 것이다. 그리고 기존 선종의 소의경전인『능가경』을 북종선의 것이라고 하면서 남종선은 이와 차별화하는『금강경』을 소의경전으로 한다.
한편 또 하나의 삼각 꼭짓점을 차지하고 있던 중국 서쪽지방인 사천 무주無住계 보당종의 경우, 신회가 주장한 남종의 입장에 일정부분 동조하면서도 남종을 뛰어넘기 위한 수단으로『역대법보기曆代法寶記』를 발간한다. 이 책에서 이들은 홍인으로부터 자주지선資州智詵 → 처적處寂 → 정중무상으로 이어지는 법맥을 주장하고 있다. 남종의『능가사자기』에 대항하여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북종 계열의『전법보기』나『능가사자기』에서 남종 계열의『보림전』에 이르는 초기 선종사의 중간에 이『역대법보기』가 자리한다고 하겠다. 이 문헌에는 자주지선의 입내설법과 함께 또 다른 전의상속설傳衣相續說설이 제기되었다.
역시 서쪽에 해당하는 금릉金陵 우두산牛頭山(지금의 중국 신강성新疆省) 우두종牛頭宗에서는 남종과 북종이 나타나기 이전으로 계보를 끌어올려 4조 도신 하에 5조 법융을 초조로 함으로써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신흥 선종이 남·북 두 종파로 갈라지고 돈·정 두 종지로 성토되면서 양파의 각종 저술에서도 서로 색치를 달리하는 그림자가 짙게 깔려 있었다. 그런 가운데서 성립된『역대법보기』는 남종도 북종도 아니면서 독자적 노선을 지향하는 무주無住의 법맥유래와 그 어록집이다. 말하자면 이 책은 남·북 양종 사이의 지렛대 구실을 하면서 무주의 독립 법맥을 내세우는 한편, 그 종지에서는 그래도 북종보다는 남종에 팔이 굽는 편이다. (柳田聖山 著 / 楊氣峰 譯,『초기선종사 II』「역대법보기』 p. 13.)
북종선北宗禪과 남종선南宗禪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육조단경』에 적혀있는 신수神秀와 혜능慧能의 게송이다. 신수는 “몸은 보리의 나무요[身是菩提樹], 마음은 밝은 거울과 같으니[心如明鏡臺],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時時勤拂拭], 티끌과 먼지 묻지 않게 하라[莫使有塵埃]”고 읊었다. 혜능은 “보리는 본래 나무가 없고[菩提本無樹], 밝은 거울 또한 받침대가 없네[明鏡亦無臺], 부처의 성품은 항상 깨끗하니[佛性常淸淨(혹은 本來無一物)], 어느 곳에 티끌과 먼지가 있으리오[何處有塵埃]”라고 읊었다고 전한다.
북종의 대표 격인 신수의 게송은 점수선을 표현한 것으로 치부되고 있고, 남종의 거두인 혜능의 게송은 돈오선을 표현한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북종선은 점수선이고, 남종선은 돈오선이라는 것은 남종선이 선종의 중심으로 자리 잡은 이후 성립된 것이다. 둘은 모두 오조홍인五祖弘忍 문하에서 배출되었으며, 신수는 당시 주류의 위치에 있었던 장안과 낙양 등 북방에서 활약하였고, 혜능은 당시 정치 상황에 영향을 덜 받던 강남江南 등 남방에서 활동하였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신회는 무차대회를 여는 등 육조현창운동六祖顯彰運動을 벌여 신수의 북종선을 누르고 혜능의 남종선을 선양宣揚하였다. 결국 혜능이 돈오선이라는 주장은 신회의 육조현창운동에 의해 확립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신회는 달마선 7조의 지위를 얻게 되었지만, 신회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하택종은 서서히 약해지다 그 맥이 끊어지고 만다. 이는 마조도일(馬祖道一, 709~788)의 등장과 연관이 있다.
마조의 제자인 장경회휘(章敬懷暉, 754~815), 흥선유관(興善惟寬, 755~817), 아호대의(鵝湖大義, 746~818) 등의 입내설법과 마조의 문하에서 서당지장(西堂智藏, 735~814), 남전보원(南泉普願, 748~834), 백장회해(百丈懷海, 749~814), 대매법상(大梅法常, 752~839) 등 걸출한 인물들이 등장하면서 하택종은 빛을 잃고 그 맥이 끊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선종은 이제 육조혜능 → 남악회양 → 마조도일로 이어지는 남종선南宗禪 계열중 하나인 마조계 홍주종洪州宗의 법통설로 귀결되게 되었다. 마조선의 핵심인 대기대용大機大用의 평상심은 생활선을 수행하던 선장들에 의해 체계적으로 확립되었고, 서천西天 동토東土의 전등계보설인『보림전』에 이르러 완성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과정들을 거쳐 형성된 것이 선종의 족보인 전등상승傳燈相承 계보설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현재의 법통설이다.
정치적인 이유가 크지만 권투로 치면 헝그리 정신이 충만한 주변 세력이 싸움에서 살아남아 중앙으로 진출하였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산 속에서 수행하던 산중 불교가 도시 불교가 혼란을 겪을 때마다 흘러 들어가 그 자리를 대체하며 자연스레 세력을 형성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초기 선종사는 이렇게 헤게모니를 쥔 세력과 주변 세력이 엎치락뒤치락 주도권을 놓고 싸움을 벌인 형상이라고 할 수 있다.
3) 계보의 완성, 전등록傳燈錄
이러한 선종 전등계보설의 종합편 격인 대표적 사서史書가『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이다. ‘경덕景德’은 남송南宋의 연호로, 편찬자인 도원道原이 경덕 원년(1004년)에 송 진종眞宗에게 바쳐졌기 때문에 얻어진 이름이다. 줄여서『전등록傳燈錄』이라고도 하는 이 책은, 과거 7불에서부터 천축의 28조, 그리고 초조 보리달마와 그 후대로 이어지는 중국과 한국의 선장禪匠들을 1세부터 52세까지 나열하고 있는 인물대사전이다. 총 1,727명이 실려 있는데, 729명은 이름만이 기록되어 있고 998명은 행적, 법어, 게송, 전법 등 그의 어록까지 수록하고 있다. 선종 5가7종의 선맥禪脈들을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는 전등사서傳燈史書이지만, 사실과는 거리가 있는 의도적인 편집이라는 불명예도 동시에 안고 있는 선적이다.
『전등록』은 과거 7불 ⟶ 천축의 28조 ⟶ 진단의 초조 보리달마와 그 후대로 이어지는 인도와 중국의 두 나라와 드물게 등장하는 우리나라 중국 유학승 등 선문의 선장들을, 전등상승의 차례에 따라 열거하고, 다시 각 조사와 선사의 속성, 속가, 가계, 출생지, 수행의 경력, 주석한 곳, 입적한 연대, 세수, 시호 등을 밝혀 史傳的 기술을 하고 있다.
특히 『전등록』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의도적인 편집에 의해 선맥을 확립하였다는 것이다. 즉, 2권에서는 인도의 7불과 28조의 상승설을 기술하고, 3권에서는 보리달마를 진단의 초조로 기술하여 중국을 잇게 해서 달마를 중국 선종의 초조로 삼음으로써 중국의 선종이 인도의 7불이래 면면히 사자상승한 불교로서의 권위를 확립한 것이다. 오늘날 많은 학자들은 이 같은 인도의 7불과 28조 상승설이 중국에 있어서 선종의 자리가 굳혀지는 8 ~ 9세기에 의도적으로 형성되었으며, 이로 인해 달마로부터 선이 전해졌다고 하는 주장이 생겨났다고 말한다. (김월운 옮김,『傳燈錄』, )
『전등록』은『낙양가람기洛陽伽藍記(547년)』『續고승전(645년)』『전법보기傳法寶紀(712년경)』『능가사자기楞伽師資紀(713-716년경)』『역대법보기歷代法寶記(774년경)』『보림전寶林傳(801년)』, 그리고『조당집祖堂集(952년)』등 종래의 전등사들을 모두 종합 정리하고 있다. 그러므로 일부 과장된 부분이나 오류에도 불구하고 그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현사사비(玄沙師備, 835~908), 임제종의 창시자 임제의현(臨濟義玄, ~867)의 제자 관계지한(灌谿志閑, ?~895) 등『조당집』이후의 선사들도 포함하고 있어 자료적 측면에도 기여하는바 크다. 특히 우리가 흔히 쓰는 “1,700 공안公案”이라는 말이 이 책에 등장하는 1,727명의 인물들로부터 비롯되었을 만큼 선불교 전통의 기반이 되었다. 이후 등장하는 전등사서들은 모두『전등록』의 영향을 받았다.
<전등록>에 이어 송대(宋代)에 와서 많은 전등서들이 편찬되었는데 이준욱(李遵勖)이 1036년에 편찬한 <천성광등록(天聖廣燈錄)>, 불국유백(佛國惟白)이 1101년에 편찬한 <건중정국속등록(建重靖國續燈錄)>, 오명(悟明)이 1183년에 편찬한 <연등회요(聯燈會要)>, 정수(正受)가 1201~1204년에 편찬한 <가태보등록(嘉泰普燈錄)>, 그리고 이 다섯 가지를 모아 내용을 요약 정리한 혜명(慧明)이 편찬한 <오등회원(五燈會元)>이 있다. 이 중 5대사서는 모두 30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오등회원>은 20권으로 되어 있다. (지안스님/조계종 고시위원장,〈53〉과거 칠불〈七佛〉부터 조사들 행적·법어·게송 기술, 선종사 전법 내력 밝힌 <전등록>〈傳燈錄〉, [불교신문2998호/2014년4월2일자].)
한편, 이와 같은 선종역사서나 조사어록의 출현은 당시 유행하던 위경僞經, 즉 부처님이 설한 것처럼 위조된 경전이 사라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조사의 지위가 부처와 동등해지면서 조사어록 또한 부처님 경전과 비슷한 지위를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부처가 인간의 지위로 내려옴으로써 조사들의 일상적인 대화나 일화들이 그대로 부처님의 경전의 지위를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누구나 자신의 주장을 당당하게 펼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부처님의 권위를 빌릴 필요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일반 사람들의 수행을 독려하는 계기가 되었음은 물론, 경전에 대한 훈고주석에서 벗어나 곧바로 경전의 정신을 일상생활 속에 실현하게 되는 단초가 되었다. 중국인의 실용주의적이고 실천적인 성향을 그대로 드러낸 사건으로 9세기 초에는 조사선祖師禪으로 발전한다.
부연하자면 선종의 족보인 전등상승 계보설은 9세기 초 선종의 제 6조 혜능의 법손인 마조도일과 그의 문하 제자들의 활약에 의해 완성되었다. 즉 신라 출신의 정중 무상의 고리를 제외하면, 달마, 혜가로부터 비롯된 중국 선종은 초기의 능가종, 동산법문, 북종선과 남종선의 시대를 거쳐, 9세기에 이르러 강서江西의 마조와 호남湖南의 석두, 그리고 그들 문하에서 배출된 뛰어난 선승들에 의해 조사선으로 발전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6 세기 초 인도승 보리달마로 시작된 선종은, 달마라는 교조敎祖의 상속자라고 주장하는 여러 그룹들이 서로 논쟁하고 투쟁하면서 발전한다. 약 300여 년간 선종 각 파는 자파의 전법상승계보와 선사상을 내세우며 사운 결과 성립된 것이 전등상승의 계보설이다. 근년에 와서 둔황에서 새로이 문헌들이 발견되고『전등록』이전의 자료까지 발굴되면서 학문적으로는 더욱 풍부해졌다. 학자들은 이를 참고로 하여 초기 선종사를 폭넓게 재구성하고 있는 중이다.
4) 분등선分燈禪
보리달마, 신광혜가로부터 시작된 중국 선종은 능가종, 동산법문, 북종선, 남종선 등으로 퍼져나가면서 그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그리고 무수히 많은 선장들이 배출되었다. 그중 중국 선종의 초조로 추앙받고 있는 이는 6조 혜능이다. 그는 홍인의 제자로 동산법문 교단에서 그리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했지만, 그의 문하에서 영가현각(永嘉玄覺, 647~713), 남악회양(南岳懷讓, 677~744), 청원행사(靑原行思, ?~740), 하택신회(荷澤神會, 685~760), 그리고 남양혜충(南陽慧忠, ? ~775) 등 뛰어난 제자들을 배출되면서 남종선의 거두가 되었다.
특히 남악의 문하에서 마조도일(馬祖道一, 709~788)이, 청원의 문하에서는 석두희천(石頭希遷, 700~790)이 그 세력을 떨치면서 중국 선종의 주류로 등극하였다. 남악과 청원 역시 처음에는 혜능과 마찬가지로 무명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들 문하에서 마조와 석두 등 걸출한 인물이 배출되면서, 혜능 사후 사상적 측면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던 신회와 그를 따르던 하택종을 능가하며 불교계를 장악하게 된다.
강서江西에서는 마조가 홍주종을, 호남湖南에서는 석두가 석두종을 일으켜 세우게 되는데, 남악-마조 계열에서 임제종臨濟宗, 위앙종潙仰宗이, 청원-석두 계열에서는 조동종曹洞宗, 운문종雲門宗, 법안종法眼宗이 나오면서 중국 불교계를 평정하게 된다. 바야흐로 당唐말 오대五代에 걸친 약 250여 년간 선의 황금시대의 문을 열게 되었던 것이다. 현재 우리가 보는 중국 선종의 모습이 이때 결정되었고, 중국 선종, 아니 현재 동양 3국의 불교를 대표하게 되었다.
마조나 석두는 기존의 대승불교가 갖고 있던 복잡한 논리나 사상, 이른바 이론 불교의 틀에서 벗어나 ‘불립문자, 교외별전’을 주창하며 대중을 이끌었다. 교학적이고 추상적인 불교에서 벗어나 현실 속에서, 지금 이 자리에서의 즉각적인 깨달음을 내세웠던 것이다. 기존 불교에서 행해지던 형이상학적 이론 논쟁, 삼매三昧니 습선習禪이니 하는 신비적 요소, 복을 비는 기복 신앙 등을 뭉뚱그려, 이 자리에서 즉시 깨닫는다는 돈오사상으로 통일한다. 당시 성행하던 정토사상조차 뛰어 넘는 새로운 불교 수행 패러다임을 제시한 것이다.
선이 스스로를 변호하고 정당화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던 것은 <대승의 난만한 형이상학>과 <말류의 기복적 정토의식>이었다. 전자에 나타난 대결의식은 다음과 같은 캐치프레이즈에 잘 나타나 있다. “경전과 문자에 의지하지 아니하고(不立文字 敎外別傳), 마음의 본질을 곧바로 드러내어(直指人心), 궁극적인 열반을 열겠다(見性成佛).” 이에 비해 후자에 대한 선의 비판적 태도는 아무래도 덜 알려져 있다. 선의 정신을 간명하게 정식화한 <돈오점수(頓悟漸修)>는 특히나 정토의 의타(依他) 불교를 의식하고 제창한 것이다. (한형조 지음,『무문관, 혹은 “너는 누구냐?”』 pp. 131~132.)
5) 근본 불교로의 회귀回歸
인도에서는 속세를 떠나 숲속 나무 밑에서 행해지던 수행이, 불교가 종교화하고 대중화하면서 소위 대승불교를 거쳐 확산되고 전파된다. 그리고 이론불교 시대를 지나 중국 선종에 이르러 다시 산에서 선을 수행하는 근본불교시대로 회귀하는 경향을 보인다. 중국에 선禪이 전래되고 대중들에게 퍼지고 중국 내 존재하던 선법과 만나면서 교학 중심의 불교가 다시 중국인의 생활종교로 되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불교 수행이 인간의 일상생활 가운데로 들어오고 출가수행자가 승원에 거주하는 생활 불교로 돌아왔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인도의 초기 불교와 상통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선 수행자들은 기존의 전통적인 율원律院에서 새롭게 제정된 선원청규禪苑淸規에 의한 수행생활을 하게 되었다. 종래의 전통적인 왕실 및 귀족사회의 형식적인 의례나 권위주의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그 들의 후원을 받지 않는 일일부작一日不作 일일불식一日不食의 자급자족 형태의 선농禪農을 병행하는 선원을 건립하게 된 것이다. 인도에서 탄생한 명상법이 중국으로 들어와 습선習禪의 과정을 거쳐 현실적인 생활선生活禪이 되었고, 일반 대중에게도 가능한 조사선祖師禪이 된 것이다.
초기 불교와 같이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갔다고 하면 지나친 것일까? 적어도 싯다르타가 추구하던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로 되돌아간 것은 분명하다.
개인적인 수행에 몰두하던 소승불교는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 성불成佛까지 늦추는 보살菩薩(bodhisattva) 정신을 기치로 한 대승불교로 되었다. 그러나 깨달음의 세계를 현실과 분리시키지 않고 일상생활 속에서 구현하는 방법을 선종은 제시한 것이다. 다시 대승불교 정신을 녹여 내면서도 선을 수행하는 새로운 소승불교, 선불교로 돌아왔다고 볼 수 있다. 불교에서 깨달음에 이르고자 하는 사람이 반드시 닦아야 하는 계정혜戒定慧 삼학이 하나로 통합되어 새로운 수행 전통인 간명한 선 하나로 통합된 것이다. (가마다 시게오 ․ 기노 가즈요시 지음, 양기봉 옮김,『현대인과 禪』 pp. 135~136.)
이것은 실로 일종의 종교혁명이자 인간성 해방을 위한 문화 혁신 운동으로, 그 유례가 없던 불교의 종교개혁宗敎改革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소승이 대승으로 되면서 번창하다가 새로운 형태의 불교, 리모델링된 대승불교인 선불교로 된 것이다. 중세 기독교의 속박에서 벗어나 개인과 개성의 해방을 외쳤던 “르네상스Renaissance”를 연상시킨다. 서양에서는 500여년이 지나서야 일어난 종교개혁운동을 일찍이 성취하였던 것이다.
김용옥 선생은 마태오, 마르코, 누가 등 공관복음서共觀福音書와 요한복음서가 등장하면서 종교화된 기독교를 대승기독교로 칭하면서, 20세기 중반 1945년 12월 새로 발견된 도마복음서가 초기 기독교의 모습을 보여 주는 소승기독교라고 비유하였다.
연대기적으로 보면 예수가 살았던 시대 소승불교 형태의 소승기독교가 마가, 마태, 누가, 요한복음으로 정리 되고 대중화되면서 현재의 기독교 형태, 즉 대승기독교로 발전하였다는 것이다.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희생한 것을 아는 순간이 불교에서의 돈오이고, 이런 돈오적 발상이 대승기독교 운동의 원점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이 기독교 운동이 로마 기독교를 멸망시키는 위대한 공동체 운동으로 발현되었다는 것이다. 창조로부터 종말론의 멸망으로 간다는 직선적인 시간관이 예수로부터 거부 되었고, 예수는 남녀 분화 이전 인간의 원초성으로 돌아가라고 주장하였다.
도올 김용옥 선생은 기존 기독교가 갖는 모순에 고민하다가 도마복음이 발견되면서 4복음서 이전의 기독교를 알게 되었고 거기서 해답을 찾았다. 공관 복음서가 ‘나를 따르라!’, ‘나의 제자가 되라!’, ‘나를 믿어라!’ 라고 하였다면 도마복음서는 계속해서 ‘깨쳐라!’ ‘네 속에서 하느님을 찾아라!’ 라고 하고 있다. 새로운 예수, 역사적 예수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도올은 도마복음을 통해서 역사적 예수의 상을 철저히 규명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기독교 성서이야기, 도마복음강해> 및『도올의 도마복음한글역주 1~3 』참조)
These are the secret sayings that the living Jesus spoke and Didymos Judas Thomas recorded. 이것들은 살아계신 예수께서 이르셨던 비밀의 말씀들이며 디두모라하는 유다 도마가 기록한 것이라.
1 And he said, "Whoever discovers the interpretation of these sayings will not taste death." 그리고 그가 말씀하신지라. "누구든지 이 말씀들의 뜻을 깨닫는 자는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2 Jesus said, "Those who seek should not stop seeking until they find. When they find, they will be disturbed. When they are disturbed, they will marvel, and will reign over all. [And after they have reigned they will rest.]" 예수께서 말씀하시니라. "찾는 자들은 발견할 때까지 찾기를 멈추지 말 것이라. 그들이 찾은 즉 근심하게 될 것이요, 근심한 즉 놀랄 것이며 또 모든 것 위에 군림하리라. 그리고 군림한 후에 그들이 쉬리라."
종교에는 심층적인 부분과 표층적인 부분이 공존하는데, 종교들 끼리 비교하면 표층적인 부분은 서로 상통하는 부분이 있고 심층적인 부분 역시 서로 통하는데, 도마복음이 심층적인 부분에 해당한다. 이 부분이 불교의 심층적인 부분과 공통적인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소승불교가 대승불교로 대중불교로 들어선 것이 다시 소승형태의 선불교, ‘생활선生活禪’으로 다시 전환되었다고 볼 수 있다.
지금까지의 기독교는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죽일 수 있는 사회적 실천은 외면한 채, 기독론이나 종말론이 결합된 추상적 교리만을 신봉하면서 2,000년 동안 온갖 죄악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십자가를 지는 대신 십자가를 팔거나 타고 가는 기독교였다는 것이다. 도마 복음이 발견되면서 다시 원래의 기독교를 회복하고, 소승기독교로 돌아갈 수 있는 단초를 찾은 것일까? 예수의 원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