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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북구편(城北區篇)
성북구는 북한산(北漢山) 도봉산(道峰山)의 남쪽 기슭에서부터 동남으로 평야가 펼쳐진 곳에 위치한 곳으로서 문자 그대로 한양성 북방 외곽(外廓)의 지역이다, 그래서 성(城) 북쪽에 있다하여 성북이라고 불르게 되었다, 조선 초기부터 한성부의 성저십리(城底十里)에 들어가므로 성 외 지역에 속했다, 동대문구에 편입되었으며, 1949년 8월 15일 고양군 숭인면의 일부를 편입하여 성북구가 분구(分區) 1호로 신설되었다, 1973년 7월 10일에는 성북구에서 도봉구가 나누어졌다,
@ 유래 동명 순서
(1) 1)안암동, @안감내의 유래 @안암동 일한신궁 봉경회 전말
2) 종암동 @ 북바위의 전설 @ 경성고등상업학교 종암동입지
3) 동선동 4)돈암동, @미아리고개
(2) 5)성북동, @ 성북동의 발자치 @ 선잠단의 유래 @ 외국인 대사관촌
6) 동소문동, @ 동활인서 자리 7)삼선동, @ 성곽의 공사 내역 @ 삼군부
총무당 8)보문동, @보문사 @ 동망봉
(3) 9)정릉동, @ 정릉동의 지형 @ 신덕왕후 정릉 @ 손가정터와 청수장
10) 길음동, 11) 하월곡동
(4) 12) 상월곡동 @ 마을의 수호신 선황단 나무 13)장위동, @ 김진홍가
@ 고양군 전설 14)석관동, @경종, 의릉과, 추존 문조의 연경묘
@ 7, 4 공동 선언장 @ 민간신앙 @ 한국예술 종합학교
☺ 성북구편(城北區篇)
성북구는 북한산(北漢山) 도봉산(道峰山)의 남쪽 기슭에서부터 동남으로 평야가 펼쳐진 곳에 위치한 곳으로서 문자 그대로 한양성 북방 외곽(外廓)의 지역이다, 그래서 성(城) 북쪽에 있다하여 성북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조선 초기부터 한성부의 성저십리(城底十里)(동쪽으로는 우이천과 중랑천까지, 남쪽으로는 한강변과 용산까지, 서쪽으로는 양화정과 망원동을 지나 덕수원까지. 북쪽으로는 북한산까지)에 들어가므로 성 외 지역에 속했다, 동대문구에 편입되었으며, 1949년 8월 15일 고양군 숭인면의 일부를 편입하여 성북구가 분구(分區) 1호로 신설되었다, 1973년 7월 10일에는 성북구에서 도봉구가 나누어졌다,
① 안암동(安岩洞), 종암동(鍾岩洞), 동선동(東仙洞) 돈암동(敦岩洞)
☞ 안암동이라는 동명 유래의 대하여 문헌(文獻)상으로는 기록(記錄)이 남아 전(傳)하지 않는다, 다만 이곳에 오래 살아온 노인(老人)들의 전하는 말로는 지금 안암동 3가 136의 1호에 있는 대광(大光) 아파트단지 가운데에 큰 바위가 있어 20명이 앉아 편하게 쉴 만하여 그 바위 이름을(앉을 바위)라 하였으며 그것을 한자(漢字)로 편안 안 (安)자와 바위 암 (岩)자를 옮겨 쓴 것이 안암이란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안암동은 조선 초부터 한성부에 속해 있었으며 조선말 고종(高宗)4년 (1867)에 발간된 육전조례에는 한성부 동부 숭신방 안암계로 되었고 갑오개혁(1895년)때에는 한성부 동서(東署) 숭신방 동문외계 궁리(宮里) 원리(園里) 부석리(剖石里)로 칭(稱)하였다, (*궁리는 세종대왕 5자 광평대군이 이성계의 7자 방번의 후사로 정하여 사당이 있었고, *원리는 이공대에 영명원(永明園) 정조대왕에 후궁 원빈홍씨 묘(墓)가 있었고, 부석리는 2가쪽 현재 삼성아파트 구둘장을 만든는 채석장(採石場)일명 덤바위 때문에) 부쳐진 이름이다
한일합방 후 일제는 (1911년 4월 1일) 한성부를 경성부로 개칭(改稱)하고 이때의 경기도 경성부 숭인면 안암리가 되었고 (1914년 4월 1)일에는 성(城) 외면 많은 지역을 경기도 고양군으로 편입하였다, 이때에 숭신면 일부 인창면 일부가(숭신면 숭(崇)자와 인창면 인(仁)자 첫 글자를 따서 숭인면이 신설되었음) 숭인면이 생기면서, 궁리, 원리, 부석리를 합하여 고양군 숭인면 안암리로 하였다,
1943년 경성부로 편입되면서 안암동부정회(安岩東部町會) 안암서부정회로 하였다가 광복 후 1946년 안암동을 1가~5가로 구분 하고 안암동부동회(安岩 東部洞會) 안암서부동회로 하였다가 1970년 5월 18일 서부동회로 합병(合倂)하면서 안암동이 되었다, 안암동 산 1번지에 개운사(開運寺) (“참고,,조선말 고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영도사의 도문스님 처소에서 자랐는데 왕위에 오른 다음 절 이름을 새롭게 연다는 뜻으로 개운사로 고쳤다는 것이다,) 가 자리 잡고 있다, 영도사(永導寺)라고 불렀던 이 절은 태조 5년 1396년 무학대사(無學大師)가 현재 이공대 자리에 창건한 것인데 정조(正祖)3년 (1779년 5월) 정조대왕의 후궁 원빈홍씨(元嬪洪氏)가 세상을 떠나자 능 영명원(永明園)을 조성하여 현 위치로 이전 한 것이다, 절 근방 보타사(普陀寺)에는 바위에 고려 말이나 조선초기의 조각한 것으로 유형문화재 제89호 관음보살(觀音菩薩)이 있다,
안암동 1번지에는 호랑이로 상징되는 고려대학교(高麗大學校)가 자리 잡고 있다, 사학(私學)의 명문인 고려대학교는 1905년 보성전문(普成專門)으로 출발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인걸(人傑)을 배출하였다, 1971년 12월에는 우석대학교 부속병원을 흡수하여 1991년 10월 8일 헤화병원(惠化病院)을 안암갬퍼스로 이전 하고 고려대학병원으로 고쳤다,
※ 안감내의 유래(由來)
전설(傳說)에 의하면 안암동을 안감내라고도 하였다, 옛날 채소(菜蔬)를 심어 문안에 갔다 파는 사람들이 많았다 안암동 남쪽에 안감내라는 개천이 흐르고 거기에 안감내라는 다리가 있다,(1997년 9월 1일에 안암동이 통폐합으로 인하여 현재는 용두동으로 편입) 옛날 이 동네에는 안감이라는 사람이 채소를 문안으로 가서 다 팔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동대문 밖 주막(酒幕)에서 돈이 없어 봉변을 당하는 것을 보고 술값을 주었는데 그 영감이 문안에 오거 던 꼭 우리 집을 찾아 달라고 하여 그 후 찾아가보니 큰 부자 집이였다,
영감이 반가이 맞으면서 주안상까지 차려 대접하고 전날에 고마웠다는 인사를 한 다음 나에게 베푼 은공(恩功)을 갚겠으니 소원(所願)이 있으면 말하라 하였다, 그러자 그까짓 것이 무슨 은공입니까 그러실 것 없습니다, 하였다, 영감은 소원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들어줄 터이니 말 해보라고 하였다,
안감이 사양(辭讓)을 해도 영감이 계속 다 그치니까 안감이 안암동은 서쪽으로는 성북동에서 흐르는 개천이 있고 동쪽으로는 (영도사 (永導寺) 이공대내에 있다가 1마장 위로 올라가 지금의 개운사)에서 흘러 안암동은 섬 같이 되서 사람들이 고생을 하고 있으니 이 개천에 다리 하나 놔 주었으면 한다고 하였다,
대부분 사람들은 소원이라면 자기의 이익추구(利益追求)에만 집착하는데 이 사람은 채소장수로서 동네일을 말하는데 감동(感動)하였던지 영감은 쾌히 승낙하고 동네 앞에 다리를 놓고 이 사람의 이름 안감을 따서 동네 다리이름은 안감내 다리 개천을 안감천이라고 부르도록 했다,
또한 다른 전설이 있다, 안암동에서 오래 사신 노인(1900년생) 홍광윤 공(公)께서 이야기에 따르면 안감내 다리는 신설동 한빛 길에서 용두2동과 경계에 다리가 안감내 다리인데 상감님이 선농단(先農壇), 동구능(東九陵)을 거등 할 때에 편안히 상감님이 쉬었다 가셨다 하여 안감내 다리라고도 한다,
※ 안암동 일한신궁봉경회(日韓神宮奉敬會) 전말(顚末)
안암동 124번지 어좌봉(御座峰)(이공대 후문쪽) 중심으로 일대를 한일신전(韓日神殿)을 설립 할 계획으로 보안림(保安林) 일부를 융희(隆熙) 3년(1910) 농상공부 대신(大臣) 정중응(鄭重應)가 농상공부 고시 제30호를 고시하면서 한성부, 답십리 안암리 민유삼림(民有森林) 면적(面積) 이반삼무이보(貳反參畝貳步){전답의 면적 단위 6척 사방을 步 100步를 무(畝)라함}해제 하였으나 자금사정으로 중단 되었다, 1937년 12월에 발간된 경성부시가지계획 풍치지구지정 자료조사서에 의하면 성북정, 돈암정, 안암정, 일대의 삼림(森林) 상태를 발표한 내용 중 안암정은 고목이 울창하여 백주(白晝)에 암흑(暗黑)을 이룬다고 하였으니 안암동은 얼마나 솔 나무가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45년 광복 전만 하여도 개운사 부근 산에는 소나무가 울창하였는데 전라도에서 이사 온 정씨란 분이 밤마다 나무를 도벌(盜伐)하여 얼마 남지를 않았는데 1950년 6, 25 사변이 나고 휴전 후에 보니 거의 없어지고 아가시 나무만 있었다, 1960년 때만 하여도 절 뒤 고대 기숙사 안이 여름이면 아이들이 물장난하고 아낙네들은 빨래를 하여 넓은 바위에다 빨래를 널어 말리던 곳이다,.
1941년 태평양전쟁당시에는 현재 개운산에 일본군 고사포 부대가 있었다, 부대로 가는 군사도로는 안암동 5가 127번지 이공대쪽에서 산 능선을 따라 병원옆(현재 개운산으로 올라가는 길)은 겨우 마차 1대가 지나갈 산 능선 길을 일군이 마차에다 군 장비를 실고 다니던 길이 였는데 지금은 이공대쪽은 학교 부지로 개운산쪽은 차가 다니는 길이 되고 산동네는 광복 후에는 무허가 집단촌 산동네를 이루더니 2002년에는 개발하여 삼선아파트가 들어섰다, 일반인이 통행하는 길은 인촌로가 개통하기 전에는 변전소 옆 전에는 말간과 승마장(현재는 이공대) 을 지나 동사무소로 넘어가는 길을 기도(祈禱)고개라고 하였는데 인촌로가 생기면서 이 길은 이공대 부지(敷地)로 되었다,
☞ 종암동의 유래(由來)는 종암로를 끼고 있는 종암동은 고려대학교옆 돌산이 종(鍾) 또는 북처럼 생긴 큰 바위가 있기 때문에 마을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또한 1950년 이전만 하여도 해창위(海昌尉)(부마의 벼슬이름)라고도 불리게 된 것은 조선 중기의 현종(顯宗)의 셋째 딸인 명안공주(明安公州)와 남편인 해창위 오태주(吳泰周)의 묘(墓)가 종암 여자중학교 부근(附近)에 있다하여 부근은 작은 해창위 또는 작은말 위 동네는 큰 해창위 또는 큰말이라고 불렸고, 종암 2동쪽에는 모래 말이라고 칭(稱)했다, 그 이유는 월곡동과 경계가 되는 정릉천의 물이 맑아 빨래터로 사용 되었는데 상류 쪽에서 내려오는 모래가 쌓여 정릉천 주변은 언제나 모래밭으로 변해 모래 말 혹은 모랫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또한 이곳의 모래는 양질의 모래여서 중앙산업(中央産業)에서 불록 하수관 전봇대 등을 만들었다,
종암동의 서쪽지역(종암제1동)은 일출봉(日出峰)과 채석장으로 사용한 진석산(陳石山)이 있고 그 밑에 주택가를 이루고 있다, 이 산은 광복 전까지 나무가 울창했으나 광복 후 월남민들이 정착하면서 벌목하고 6, 25동란 때 전투로 나무가 타버려 민등산이 되었다, 진석산은 진씨가 이 산을 소유하여 이름이 붙여졌는데 1960년경까지도 석질이 좋아 고급주택을 지을 때 이 돌을 사용하였고 국립박물관을 건축할 때도 일부 사용되었다, 또한 이 동네의 오래 사신 노인 정영민씨(1932)가 말하기를 동네 산신제는 개운산 육칠봉 아래 말 바위에다 2000년 때까지만 하여도 지내였는데 토끼만신이 돌아가시고 살아졌다고 한다,
종암중학교 자리는 광복 후 중앙산업이 건축자제 등을 생산하면서 뒤에 돌산을 채석장으로 사용하고 모래말(종암2동쪽)에서는 양질에 모래를 사용하였다, 민가에는 대복피혁공장을 비롯하여 가정집의 가죽공장이 서넛 개가 있었고, 유풍피혁공장이 있어 소가죽은 물론 개털 가죽도 만들어 군납용으로 만주로 납품을 하던 큰 공장이 있었는데 해방 후에도 운영하다가 1970년경 사라졌다, 1957년 한국에 최초로 이승만 대통령 당시 종암 아파트를 건립하여 대한민국 아파트 제1호였으나 1985년 철거하고 현재 선경아파트가 건축되었고, 이어서 개운산 밑으로 돈암동까지 아파트가 계속 건축 되어가고 있다,
종암동은 조선 초부터 한성부에 속했는데 조선말 고종(高宗) 4년(1867년)에 발간된 육전조례에 의하면 한성부 동부 숭신방(성외) 종암동계로 되었고 갑오개혁 때에는 한성부 동서(東署) 숭신방(성외) 동문외계 대종암 소종암으로 개편하더니 다시 1911년 4월 1일 경성부 숭신면 종암리로 하였다가 이어서 1936년 4월 1일 경성부를 확장하면서 종암정(鍾岩町)으로 개칭되었고 1943년 6월 1일 구제 실시 때 동대문구로 속하게 되었고 광복 후 1946년 10월 1일 종암동으로 바뀌고 1949년 8월 15일 성북구 신설(新設)로 성북구에 속했다,
※ 북바위의 전설
북바위 밑의 밭은 고암전(鼓岩田)으로서 기름져서 소출이 많이 나기로 유명한데 종암중학교 부근에 해당된다, 이 땅은 조선 초 박은(朴訔)(태종 때 우의정)에게 하사된 토지로 알려져 있다, 하루는 태종이 사복 차림으로 옛 친구이자 대신인 박은의 집을 찾아갔는데 마침 조밥식사를 하다가 재채기가 나서 곧 나와서 손님을 맞이하지 못하였다, 태종이 오랫동안 문 밖에 서 있다가 주인이 나오는 것을 보게 되니 자연 안색이 좋지 않았다, 주인인 박은이 송구스러워 하며 사실을 말하니 태종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경이 재상의 지위에 있으면서 조밥을 먹는다니 말이 되느냐 고 하며 사람을 시켜 안으로 들어가서 알아보게 하였는데 과연 사실이었다, 이에 태종은 감탄하며 특별히 명하여 동대문 밖의 고암전 부근에(우리말로 북바위) 몇 마지기를 주게 하였다,
북바위 밑은 근처에서 일을 하다가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지면 모두 이곳에 피신해 있다가 날이 개인 후에 다시 일을 계속 하는데 그러한 일이 있은 후에는 반드시 소나 돼지를 잡아서 북 바위에 제사를 드렸다, 만약 이 일을 하지 않으면 마을 전체가 몰 난리를 당한다는 말이 전해져 왔기 때문이다,
※ 경성고등상업학교의 종암동 입지
현재 사대부고 교사(校舍)자리는 종로구 명륜동에 위치하고 있던 경성고등상업학교가 종암동 19번지의 자리에 새 교사를 건설하여 이전한 것은 1936년이었다, 이 경성고등상업학교는 1943년 즉 태평양정쟁하에서 경성경제전문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리고 광복 후 미군정하였던 1946년 8월 22일에 공포된 (군정법령 제10호) 국립 서울대학교 설립에 관한 법령에 의하여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이 되었으며 학생과 교수의 수가 많아지면서 이 일 때의 지역개발에 기여한 바가 컸다, 그때까지 각처에 흩어져 있던 서울대학교의 단가대학을 묶어(문리대, 법대 동숭동, 공대 공릉동, 상대 종암동, 사범대 을지로5가, 농대 수원 치대 소공동) 관악산(冠岳山) 북록(北麓)에 거대한 캠퍼스를 지어 1975년 1월부터 신축 종합교사로 이사할 때 종암동의 상과대학도 관악산으로 이전해갔다,
개운산의 근린공원은 안암동 돈암동 종암동 경계(境界)인데 1977년에 고시하여 1983년에 시설(施設)을 구비하여 현재 공원으로 사용하고 있고, 2000년에 종암동(산 2~27)에 성북구의회 및 스포스 센터가 건립하여 사용하고 있다, 현재 종암동의 행정(行政)은 종암1, 2동에서 2007년 9월 서울시의 의해 종암으로 합병하였다,
☞ 동선동은 지하철 4호선 성신여대 입구역에서 북쪽의 아리랑고개길 좌우와 안암동 경계의 위치한 동선동은 1949년에 돈암동에서 분리될 때 동소문동과 삼천동(三仙洞)에서 각각 첫 글자를 따서 동명이 제정(制定)되었다, 동선동 지역은 동소문동 삼선동 지역과 같이 조선 초부터 한성부에 속 했으며 1894년 갑오개혁 때에 한성부 동서 숭신방(성외) 동문외계 돈암동이 였다,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돈암리로 하였다, 그 후 1936년 4월 1일 경성부 확장 때 경성부에 편입되어 돈암정이 되었고 1943년 6월 10일 구제 실시로 동대문구 돈암정이 되었다, 광복 후 1946년 8월15일 성북구의 신설로 성북구 돈암동으로 될 때 돈암동의 지역(地域)이 넓은 관계로 동소문동 삼선동 동선동 돈암동으로 분할하면서 돈선동이 되었다, 현재 동선동은 동선1동, 2동에서 2007년 9월 서울시 조례에 의해 동선동으로 합병하였다,
☞ 돈암동은 미아리(彌阿里)고개에 걸쳐서 고지대에 위치한 돈암동은 되너미 고개라 했는데 이 고개 이름을 한자로 옮기면 돈암현(敦岩峴)이므로 고개 이름에서 동명이 유래가 되었다, 되너미 고개는 병자호란(丙子胡亂)때 오랑캐 즉 되놈이 서울에 침입할 때 넘어왔다 되로 넘어 갔다하여 부른 명칭이며 또는 적유현(狄踰峴)이라고도 칭하였다,
※ 미아리고개는 성북구 돈암동에서 정릉천을 지나 의정부로 이어지는 고개를 미아리고개 또는 되너미 고개 돈암현이라 부른다, 미아리고개는 일제 때 이 부근 일 때가 조선인 전용 공동묘지 구역이었으므로 사람이 죽으면 상여가 고개를 넘어가게 되어 있어 다시는 돌아오지 못 한다는 뜻으로 미아리 고개라고 했다는 설(說)과 또는 미아 제7동의 원효가 이 지역 불당골에 세운 미아사라는 절이 있었으므로 절 이름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미아동 일부는 길음동으로 남고 1973년 7월 10일에 도봉구 미아동으로 편입 되어다가 1995년 3월 1일에 도봉구에서 강북구로 분구되었다,
또한 한(恨) 많은 미아리 고개를 낳기도 하였다, 1950년 6, 25 사변 때 인민군(人民軍)이 미아리 고개로 넘어 왔고 후퇴(後退) 할 때는 남한(南韓)의 많은 인사(人士)들을 돈암동 미아리 고개―우이동―의정부로 끌려 북(北)으로 갔다, 사변(事變)이 끝나기도 전인 1951~52년경에 반야월(半夜月)에 의해 작사(作詞)되고 이재호(李在鎬)에 의해 작곡(作曲)되었으며 가수 이해연이 불러 오늘 날에도 모든 국민의 심금(心琴)을 울리는『단장(斷腸)의 미아리 고개』라는 노래 말이 그 광경을 너무나 잘 표현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노래 말을 옮기면 아래와 같다,
(1) 미아리 눈물고개 임이 떠난 이별 고개, 화약연기 앞을 가려 눈 못 뜨고 헤매 일 때, 당신은 철사 줄로 두 손 꼭 꼭 묶인 채로,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맨발로 절면 절며 끌려가신 그 고개여 한 많은 미아리 고개
(2) 아빠를 기다리다 어린 것은 잠이 들고, 동지섣달 기나긴 밤 북풍한설
몰아칠 때, 당신은 감옥살이 그 얼마나 고생 하오 십년이 가도 백년이 가도
살아만 돌아오소 울고 넘던 그 고개여 한 많은 미아리 고개
돈암동은 조선 초부터 한성부에 속(屬)하였는데 조선말 갑오개혁 때 한성부 동부 숭신방(성외) 동대문외계 돈암리로 호칭했다, 한일합방 후 일제는 1911년 4월 1일 경기도 경성부 숭신면 돈암리로 하고 1914년 4월 1일 경성부 축소 때 경기도 고양군 숭이면 돈암리라 하였다, 1943년 6월 10일 구제 실시로 동대문구 돈암정이 되었다, 광복 후 1946년 8월 15일 성북구의 선설로 성북구 돈암동이 되었다,
※ 신흥사(新興寺)(돈암 2동 595)가 돈암동 서쪽 산기슭에 있다, 원래 이 절은 조선초에 덕수궁 부근에 세워져 있던 것을 정조 18년(1794) 9월에 이곳에 이전해 왔다, 원래는 흥천사(興天寺)로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의 명복(冥福)을 비는 원찰(願刹)이었다, 태조는 신덕왕후 강씨 소생 경순공주(慶順公主)가 왕자의 난으로 남편 이제(李 濟)가 살해되자 공주를 삭발시켜 흥천사의 중이 되게 했다는 것이다, 1865년 대원군이 이 절을 증축하고 절 이름을 흥천사로 고쳤으나 신흥사로 더 잘 알려져 1970년 때만 하여도 사찰(寺刹)보다는 그 밑의 연회장(宴會場)이 밀집해 있어 신흥사 연회장으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적조사(동암동 593)은 조선시대 후기 헌종 때에 지어진 흥천사의 부속암자로서 헤암 성혜스님이 창건하였다 초기에 독립된 사찰로 세워진 것이 아니어서 규모는 크지 않으며 전통적인 암자의 틀을 가지고 있다, 이곳에는 관음전, 동국선원, 법당등의 건물이 있으며 한국불교사에서 뚜렷한 업적을 남기 경산 스님(조계종 총무원장 동국대학교 제단 이사장 역임)의 마지막 수행 장소로서 사리탑과 비석이 세워져있다,
돈암동 606의 56에 산신당이 있다, 당의 구조는 벽돌로 쌓았으며 지붕은 슬래트로 덮었고 당의 둘레에는 왼새끼로 꼰 금줄이 쳐저 있다, 당의 크기는 매우 작은데 가로 2m, 세로 2,5m 정도 된다, 당 안에는 전면에 산신의 화상이 걸려 있고 제단(祭壇)이 마련되어 있다, 옛날에는 기와를 얹은 1칸 크기의 당이었다고 하나 퇴락해서 새로 지은 것으로 보인다, 당의 유래는 알 수 없다, 산을 끼고 있는 마을에는 대부분 산신당이 있었다고 볼 때 매우 오래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당에는 산신의 신상이 그려져 있다, 가운데에 붉은색 관복을 입고 수염과 눈썹이 흰 산신이 앉아 있다, 오른손에는 긴 지팡이를 짚고 있으며 왼손은 무릎을 위에 올려놓고 있다, 산신 앞에는 호랑이 한 마리가 그려져 있는데 산신 무릎 위에서 뛰어 내리는 형상이다, 산신의 뒤에는 거대한 고목이 그려져 있으며 오른쪽과 왼쪽에 각각 시중을 드는 동자인 듯한 인물이 한사람씩 앉아 있다, 오른쪽에 있는 사람은 붉은색 과일을 손에 받쳐 들고 산신 쪽을 향해 앉아 있다, 당 내의 제단에는 흰 종이로 덮었으며 제단 앞에는 작은 상(床)이 있고 약간의 향이 있으며 당 입구에는 불상이 놓여 있다, 제일은 음력 10월 1일다, 제주를 중심으로 마을 사람들이 제단에 모여 유례식(儒禮式)으로 치제한다,
② 성북동(城北洞) 동소문동(東小門洞) 삼선동(三仙洞) 보문동(普門洞)
☞ 성북동은 성(城) 북쪽에 있다하여 붙여진 성북동은 조선 초부터 한성부에 속했는데 갑오개혁(1894년)때 행정구역 개편으로 한성부 동서 숭신방(성외) 동소문외계 성북동이라 하였다, 그런데 한일합방 후 일제는 1911년 4월 1일 이곳을 경기도 경성부 숭신면 성북동으로 칭하였고 1914년 4월 1일 경성부를 축소함으로서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성북리로 되었다, 그 후 1936년 4월 1일 경성부 관할구역의 확장에 따라 경성부 성북정으로 되었으며 1943년 6월 10일 구제를 처음 실시함에 따라 동대문구에 속해였다, 광복이 되자 그 이듬해 1946년 8월 15일 성북구 신설로 성북구 성북동으로 되어 현재에 이르렷다,
※ 성북동의 발자취
혜화문(惠化門)을 나서서 왼쪽 일대의 계곡마을인 성북동은 옛 부터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수석(水石)이 어울린 산자수명(山紫水明)한 마을로 복숭아, 앵두나무가 많았다, 그래서 이 동(洞)의 자연촌락명으로 홍도동(紅桃洞) 도화동(桃花洞), 복사동이 남아있다, 조선후기 순조 때 지은 한경식략(漢京識略)에 보면 {맑은 계곡과 언덕을 끼고 사람들이 모여 사는데 복숭화를 심어 생업을 삼고 있다, 매년 늦은 봄이면 놀이를 나온 사람들과 차마가 두 줄을 지어 가득하게 산 계곡 사이를 매우고 깨끗한 초가집이 많다}라고 소개하고 서울 사람들은 봄이면 인왕산 아래 살구꽃 서대문 밖 서지(西池)의 연꽃 동대문 밖 수양버드 나무 꽃 세검정 부근의 수석(水石)등과 함께 성북동의 복숭화꽃 구경을 찾아 나섰다고 하였다,
북절골(北寺洞), 북저동(北渚洞) 도화동(桃花洞)등 옛 부터 많은 이름으로 불리었다, 이곳은 북절골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전에 절이 있었거나 먹을 재조하는 관아인 묵사(墨寺)가 있었던 데에서 명명된 것으로 추측되고 북창동(北倉洞)이라고 칭 하게 된 것은 조선시대 후기의 어영청의 북창이 성북동 260번지 수월암(水月庵)(성북동 274-2) 남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또 북저동은 동국여지비고 권2 한성부 명승조에 소개되어 있으나 그 유래는 알 수 없다,
성북동의 자연촌락명으로는 노구멧골 도둑굴 운수동(雲水洞) 논골 등이 있다, 노구멧골은 옛날 이 마을에 사는 한 여인이 집을 나간 남편을 위해 아침저녁으로 노구매(밥)를 떠놓고 산천신령에게 제사를 지냈더니 그 정성으로 결국 남편이 돌아와서 잘 살았기 때문에 붙여졌으며 도둑굴은 성북동의 북동쪽의 계곡이 깊고 지형이 험준하여 도둑이 은거하기가 용이하였으므로 불리었다, 그래서 조선후기에는 어영천의 북둔을 두어 군대를 주둔시켰고,
조정(朝廷)에서는 이곳에 백성들을 이주시켜 살게 하였으나 워낙 산 속이라 농토가 적고 시장이 멀어서 생활곤란으로 속속 떠나가자 영조 41년(1765년) 오흥부원군(鰲興府院君) 김한구(金漢耈)와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왕에게 건의하여 서울 각 시장에서 파는 포목의 표백(漂白) 즉 마전하는 권리를 이 곳 주민에게 주고 3년 뒤 영조 44년에는 창의문 밖에 사는 사람들에게 주었던 궁중에 바치는 메주 쑤는 권리를 일부 이 곳 주민들에게 주었다, 마전터는 성북동 122 - 7번지 일대를 말하며 이곳이 삼베를 표백해서 말리기 위해 널어놓은 모양새가 밭과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면 이러한 유래를 담고 있는 마전터 표석은 성북동 큰 도로변에 세워져 있다,
운수동은 성북동 60번지 부근의 마을로 바위에 각자(刻字)가 되어 있는데 이곳을 논골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어떤 사람이 깊은 산속인 이곳에 논다랑이를 조금 풀고 살았기 때문이다, 그 밖에 근래에 와서 붙여진 마을 이름으로는 성낙원(成樂院) 꿩의 바다마을도 있다, 성북동 2번지의 계곡을 끼고 있는 성락원은 4천300여평이 1992년 12월 24일자로 사적 제378호로 지정되었다, 조선말 철종 때(1849-1863) 이조판서 심상응(沈相應)의 별장이 던 것을 의친왕(義親王) 이강공(李堈公)이 별궁으로 쓰다가 그 아들 이건공(李鍵公)이 살았는데 그 후 심씨(沈氏) 후손들의 소유로 되었다, 이곳은 수련한 자연경관에 어울리게 한옥과 정자 석상들을 배치해 놓았으며 얼마 전까지 국내의 여성교육을 하던 예지원(禮智院)이 사용했다, 성낙원 서쪽 언덕의 3형제 우물이란 약수터가 있었던 곳에는 꿩의 바다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성북동 문화유적으로 북문(北門)은 처음에는 숙청문(肅淸門)이 였는데 중종 이후에는 숙정문(肅靖門)으로 기록되고 있다, 숙정문은 풍수지리상 경복궁의 양팔이 되는 창의문과 숙정문을 통행하는 것은 지맥(支脈)을 손상 시킨다는 상서(上書)가 있자 마침내 이 문을 폐쇄하고 길에 소나무를 심어 사람의 통행(通行)을 금지 하였다, 오주연문장전산고(五州衍文長箋散稿) 권6에 보면 한성의 숙정문을 한상 닫아두는 것은 이문을 열어 놓으면 장안(長安)의 부녀자가 음란(淫亂)해지므로 항상 문을 닫아 두었다는 속설(俗說)도 있다,
이것은 숙정문이 음방(陰方) “즉,, 여자의 방위(方位)에 있는 까닭에 이와 같은 이야기가 있었던 것이다, 결국 숙정문은 건립 된지 18년 후 태종 13년 (1413년)에 음양설(陰陽說)에 의해 폐문이 된 것이다, 또한 숙정문은 1968년 김신조 무장공비 침투사건 이후 군사보호시설로 지정되어 일반사람은 출입이 금지 되었다가 38년만이 2006년 4월부터 하루 4회, 회차당 100명식만을 제한하여 개방하고 있다, 숙정문은 삼청공원 위 성북구 성북동 소재이다,
조선시대 선조 때 이수광의 지봉류설(芝峰類說) 재이부(災異部)에보면 숙정문 밖 한 바위틈에서 액체가 흘러나오는데 맑을 때는 마치 막걸리 빛 같고 진할 때는 떡과 같아서 사람들이 다투어 먹는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숙정문 밖의 쌀바위(米岩) 전설이 남아있다, 이 전설에 의하면 옛날 하루 세 차례씩 1되가량의 쌀이 나왔는데 나무군 노인이 욕심이 생겨 이 바위에 지키고 앉아 쌀이 나오는 대로 자루에 담아 가득 채워 가지고 한 달 가량 계속 했더니 쌀 대신 끈적끈적한 물이 나왔다는 것이다,
※ 사적 83호 선잠단(先蠶壇)의 유래,
성북구 성북동 64의 1에는 누에치기를 장려하기 위한 선잠단이 위치해 있다, 선잠제는 고려시대 매년 봄 길한 뱀날 (사일(巳日)에 잠신(蠶神)인 서능씨(西陵氏)의 신위를 모시고 최초로 지낸 것으로 되어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농본(農本) 민생정책이 보다 강화되어 정종 2년 1400년 3월 처음 선잠제를 지냈으며, 태종 13년 (1413년 4월) 제사제도를 대사(大祀)(종묘 사직) 중사(中祀)(선잠 선종) 소사(小祀)(사한 마조)로 정하면서 선잠제는 중사로 하였다, 성종 2년 1471년 선잠단을 성북동에 다시 축소하고 성종 8년 1477년 창덕궁 후원에 채상단(彩桑壇)을 신축하여 왕비가 친잠례(親蠶禮)(누에치기)를 행하였으며 또한 성현의 “용제총화” 10권에 선잠제는 3월에 풍악을 써서 제사를 지낸다고 되어 있어 선잠제 거행 시 일무(佾舞)와 제례악(祭禮樂)이 있었음을 입증하고 있다, 대한제국 말인 순종 2년 1908년 7월 선잠단(先蠶壇) 신위를 선농단(先農壇) 신위와 함께 사직단(社稷壇)으로 옮겨 제향 후 중단 되었으며, 이후 선잠단의 모습은 알 수 없으나 1939년 10월 18일 보물 제17호로 지정되었다가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83호로 지정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고 선잠제가 중단 된지 85년 만에 1993 5월 16일 재현(再現)하여 매년 (음)3월에 선잠제를 거행하고 있다,
※ 성북구에는 사찰(寺刹)이 약 200여개에 달하는 절이 있는데 특히 북한산 밑에 성북동에 사찰이 많이 있다, 대표적인 것은 대처승(帶妻僧)의 태고종총무부(太古宗總務部)가 있고 비구니(比丘尼)의 조계종(曹溪宗)은 삼각산길상사가 있는데 길상사는 대원각(大園閣) 요정(料亭)이였는데 1987년 길상화(吉祥華) 김영한 보살이 법정(法頂) 스님께 대원각 대지 7,000평과 지상건물 40여동 부동산 전체를 사찰로 기증할 것을 제의 하여 1997년 5월 대원각 부동산 일체의 등기 이전을 완료함으로써 대한불교 조계종 제21교구 본사 송광사 서울 분원(分院)이 되었다, 행정은 성북 제1동 제2동에서 담당하고 있다,
※ 외국인 대사관촌은(성북2동 330번지 일 때) 부촌으로 잘 알려진 성북동은 대사관저가 밀집한 동네로도 유명하다 삼청터널을 지나 성북동 길로 가다보면 대사관저 표지판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대사관저 22곳 가운데 성북2동에만 10곳이 집중되어 있다, 일본, 독일, 노르웨이, 캐나다, 칠례, 호주, 알제리 등 6대주를 망라한다, 이중 독일관저는 땅만 1만2천여평에 달하는 대저택이고 일본, 호주 오스트리아관저도 규모가 큰 편에 속한다, 월래 이 일대는 북한산 줄기로 수목이 울창하고 바위가 늘어서있는 곳이어서 새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그래서 시인(詩人) 김광섭(金珖燮)은 이곳 풍경을 주제로 <성북동 비들기>라는 시를 짓기도 했다, 특히 이곳을 꿩의 바다마을 이라고도 부르는데 1960년대까지만 해도 꿩이 많이 서식했다고 해서 붙여진 별칭이다, 꿩의 바다마을에 대사관저가 들어서기 시작 한 것은 1970년 초로 도심에서 가깝고 전망과 주거환경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대사관 관저에서 내려다보는 서울 야경은 그야말로 일품이다,
☞ 동소문동은 한성대입구역부터 성신대입구역 사이의 동소문로 좌우에 위치(位置)한 동소문동은 1가(街)부터 7가까지 구분되어 있다, 동소문동이란 동명은 서울 성곽(城郭)의 4소문(小門)의 하나인 동소문(東小門)의 이름을 딴 것이다, ‘’속칭 혜화문(惠化門)이다, 동소문동은 조선 초부터 한성부에 속하였는데 조선말 갑오개혁 때에는 한성부 동부 숭신방(성외) 동대문외계 돈암리라고 칭하였다, 그런데 한일합방으로 일제가 1911년 4월 1일 한성부를 경성부로 개칭하고 경기도에 편입시켜 경기도 숭신면 돈암리 삼선평으로 칭하다가 1914년 4월 1일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돈암리로 하였다,
다시1936년 4월 1일 경성부 관할구역 확장에 따라 경성부에 편입되어 경성부 돈암정으로 되었으며 1943년 6월 10일 구제 실시에 따라 동대문구에 속했다, 다시 관복 후 1946년 10월 1일 일제식 동명을 고치면서 돈암정은 돈암동으로 되었다, 동암동지역은 매우 넓은데다가 광복 후에 인구가 집중되기 시작하여 분동(分洞)이 불가피(不可避)했다, 그리하여 1949년 8월 15일 동대문구에서 성북구가 분구될 때 동소문동은 법정동 1가부터 7가까지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 동활인서(東活人署)자리
동소문동 4가 103번지(전일 돈암동 421번지) 돈암장(敦岩莊)이 있는데 이곳은 조선시대에 동활인서(東活人署)가 자리했던 곳이다, 활인서는 서울 사람들 중의 질병에 걸린 빈민 특히 전염병에 걸린 환자들을 치료하던 국립의료기관이다, 조선시대에는 동, 서 두 곳에 활인서를 두었는데 이곳에 있던 동활인서는 조선 말기에 이르러 성동구 신당동 쪽으로 이전한 것으로 나타난다, 활인서의 기능을 보면 의원 외에 무당(巫堂)을 배치해서 도성내에 의지 할 곳이 없는 환자들을 약과 미음으로 구휼(救恤) 보호하게 했다, 전염병이 크게 돌면 활인서 주위에 병막(病幕)을 만들어 환자들을 수용했는데 무당을 전속으로 배치한 이유는 전염병 유행에 대한 역귀(疫鬼)의 퇴치술을 강구하게 하고 때로는 치료 이외의 구호사업도 겸하게 했다, 활인서는 역(驛) 원(院) 등과 함께 국가에서 직할(直轄)하늘 사회기관으로서 기민구호(飢民救護)에도 큰 구실을 했다, 이 활인서에는 한증탕(汗蒸湯) 시설을 갖추고 있어서 세종 때 기록에 땀내고 찜질하고 목욕하는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그 후 이곳은 일제 때 평산목장이 만들어져 젖소 등을 키우기도 했는데 이송래씨가 넓은 정원에 청기와의 한옥 집을 소유하고 있었던 것을 광복 직후 1945년 10월 16일에 귀국한 이승만이 조선호텔에서 여장을 풀었다가 이곳으로 옮겨 왔다 2년간 이곳에 머물던 이승만은 마포장으로 잠시 옮겼다가 이화장으로 간 뒤에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경무대(景武臺)(현 청와대)로 이전했다,
삼선중학교와 동소문동사무소 사이 언덕 위에는 청룡암(靑龍庵)(동소문동 1가 45번지)이 있다, 이 절은 원래 성북동 구준봉 아래에 있었는데 정부의 산지개간계획에 따라 절터를 매각하고 그 대금으로 1969년 5월 현 위치에 절을 세웠다, 옛 문헌에는 철종 때 영의정 김좌근(金左根)이 1853년에 창건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옛 부터 미륵석상(彌勒石像)이 노천(露天)에 있었으므로 미륵당이라고도 칭했다, 한편 동소문동 4가 북 쪽에 있는 치마바위는 옛날 삼선동 3가에 있는 옥녀봉(玉女峰)에서 옥녀가 세 신선과 함께 놀다가 치마를 벗어서 이 바위에 널었다고 해서 얻어진 이름이다,
한편 성북구청은 보문로변의 삼선동 5가 411번지에 자리 잡고 있지만 1950년 3월 30일에 성북구가 신설될 때 이곳 동소문동 3가 29번지의 3층 석조건물을(경기 학원 건너편)을 청사로 삼아 개청식(開廳式)을 가졌다 그 후 1957년에 현재 건물(삼선동)로 이전했다, 동서문동 1 - 7가까지의 지역은 성북구에서는 가장 번화가로 상가와 주택가로 이루어져 있다, 동소문로에는 지하철 4호선이 지나고 있지만 이 길에는 1968년 11월 29일까지 전차가 운행되기도 했다, 현재 동소문동 1가~4가 지역은 동소문동사무소, 동소문동 5가 지역은 삼선 제2동사무소, 동소문동 6가, 7가 지역은 동성동사무소에서 행정을 담당하고 있다,
☞ 삼선동은 성북천(城北川) 남서(南西)쪽의 서울 성곽을 끼고 있는 삼선동은 조선시대에 혜화문 밖의 동소문동, 동선동 일대의 평평한 들판을 삼선평(三仙坪)이라 칭했기 때문에 연유(緣由)된 이름인데 삼천평은 이 동네 남쪽에 있는 옥녀봉(玉女峰)에서 옥녀가 하늘에서 내려온 세신선(三神仙)과 놀았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한편 삼선평은 평평하고 넓어서 대한제국(大韓帝國)시대까지 을지로(乙支路) 6가의 훈련원(訓練院)과 함께 무장(武場)으로 살곶이(한자로 전관평(箭串坪 “해설,, (화살을 꽂는다)와 같이 열무장(閱武場)으로 쓰이기도 했다, 삼선동은 조선시대 초부터 한성부 동부 숭신방(성외)에 속해 있었으나 마을 명칭은 나타나지 않아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조선말 갑오개혁 1894년 때 기록에 보면 한성부 동부 숭신방(성외) 동대문외계 삼천평이라 했다, 그 뒤 한일합방으로 일제가 1911년 4월 1일 경기도 경성부 숭신면 삼선평이라 하고 1914년 4월 1일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동암리로 하였다,
1936년 4월 1일 일제가 경성부 구역을 확정할 때 경성부에 다시 편입되어 돈암정 이란 일본식 동명을 불렸다, 1943년 6월 10일 경성부에 구제를 실시함으로서 이동은 동대문구에 속하였다, 광복을 맞은 후 서울의 동(洞) 가(街)는 우리 고유(固有)의 명칭(名稱)으로 고쳐지게 되었으므로 1946년 10월 1일 돈암정은 돈암동으로 개칭되었고 1946년 8월 15일 성북구가 신설되기 이전인 같은 해 5월 13일에 법정동 삼선동 1, 2, 3, 4, 5가로 되었다, 행정동은 삼선1동, 2동에서 서울시 조례에 의해 2007년 9월에 삼선동으로 합병되었다,
※ 성곽(城郭) 공사내역 이 동의 서쪽과 남쪽의 경계를 이루는 서울 성곽은 사적 제10호로 총 연장 18,127m로서 북악산(北岳山) 인왕산(仁王山) 남산(南山) 낙산(駱山)을 잇고 있다 이 성곽은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천도한지 2년 뒤인 태조5년(1396) 1월 9일부터 2월 28일까지 49일간 118,070명을 동원하여 축조하였다, 이 때 ⅔ 이상은 토성(土城)으로 쌓았으므로 그 해 여름에 장마로 무너지자 태조는 2차로 9월 1일부터 49일간 79,400명을 동원해서 돌로 쌓고 8개의 문루(門樓)를 건축했다, 그 후 20년이 지나서 무너진 곳이 많게 되자 세종 4년(1422) 1월 15일부터 40일간 322,640명을 동원하여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했다, 이 당시 872명이 사망했는데 부상자 수효는 알 수 없다,
세종 때 축성된 도성은 모두 석성(石城)으로 자연석이 아닌 직사각형으로 다듬어 쌓은 것이 특색이며 태조 때보다 1척(尺)씩 높게 쌓은 외에 성첩(城牒)을 쌓아 군사들이 전투 때 이 성첩에 의지해 싸울 수 있도록 했다, 또 성 안팎에 15척(尺)의 도로를 내어 순찰에 편하도록 하였으므로 동성의 위용은 세종 때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또 도성의 관리를 위해 성문도감(城門都監)을 설치하고 우의정을 책임자로 8인의 실무진을 두어 10일마다 1번씩 도성 내외를 순찰하고 보고를 하게 했다,
임진왜란 후 숙종 30년(1704) 3월 25일부터 수축공사(修築工事)를 하다가 중지하고 이듬해 6월부터 시작하여 숙종 35년(1709)에 완료했다 숙종 때 수축된 도성의 특색은 상하 모두 약 2척의 방형(方形)이고 돌과 돌 사이의 간격이 없이 수직으로 쌓았는데 동대문, 백악(白岳) 동쪽 광희문(光熙門) 부근에서 많이 볼 수 있으며 섬선동에서도 간혹 불 수 있다, 그 후에도 이 성곽은 영조 때와 고종 때도 보수공사를 했지만 일제에 의하여 광무2년(1898) 10월부터 훼손되기 시작하여 1915년에 경성부구역 개수계획에 따라 많은 부분이 철거되었다 이에 1975년부터 서울시에서 서울성곽 복원계획을 세워 총연장 18,127m 중에서 멸실(滅失)된 6,703m 외에 복원 가능한 11,424m를 1979년까지 단계적으로 복원했다 앞으로도 계속 복원할 계획이다,
이 동의 남쪽 옥녀봉(玉女峰) 부근의 오뚝한 곳은 옛날 군인의 사형장으로 쓰였다고 구전되어 온다, 또 혜화문 밖에는 새의 피해(被害)를 막기 위해 혜화문 문루에 봉황(鳳凰)을 그렸다고 하는데 이에 따라 이곳에 봉황정이란 정자가 지어졌다고 하며 정자 이름을 따서{전 삼선 3동}을 봉황동이란 마을 이름도 있었다, 삼선교는 삼선평의 이름을 따서 성북천에 놓여 진 다리이름으로 동소문동과 성북동, 삼선동의 경계가 되는 동소문로에 놓여 진 다리와 그 남쪽에 인도교가 각각 콘크리트로 만들어져 있다 1960년 때만하여도 다리 밑에서 세탁하는 여인들의 모습 아이들이 수영하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일부가 복개되어 삼선시장과 상가아파트가 들어섰으나 2008까지 단계별로 복원 사업으로 삼선시장과 돈암시장 사이를 일부 옛 모습으로 복원(復元)하였다,
※ 삼군부 총무당(三軍府 總武當) 유형문화재 제37호
삼선동 1가의 사적으로는 한성여고 옆의 삼선공원(512-160)내에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37호로 지정된 삼군부 총무당 건물이 있다, 이 건물은 조선말 고종 3년 대원군이 군무를 통할하는 관아로서 비변사(備邊司) 대신 훈련도감의 신영(新營) 남영(南營) 마병소(馬兵所)를 설치하여 삼군부라 했다, 이 건물은 2년 뒤인 고종5년(1868)부터 현재 정부종합청사 자리에 삼군부가 사용하던 것을 고종19년(1882)에 폐지하고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과 통리군국사무아문(統理軍國事務衙門)의 청사로 쓰이다가 갑오개혁 후 시위대(侍衛隊)청사가 되었다, 한일합방 후 일제는 조선보병사령부로 사용하다가 1930년대에 3개 건물 중 통무당(統武堂)만을 이곳으로 옮기고 경기도 공무원연성장으로 사용했다, 6, 25동란 후에는 고아원과 서울시 직업훈련원으로 사용했다 그리고 청헌당(淸憲堂) 건물은 1967년에 공릉 육군사관학교 내로 이전 했다,
☞ 보문동은 안암동과 안감천(“즉,, 성북천)을 경계로 하고 있다, 1955년 이전에는 동대문구 신설동 이였는데 안감 천 서쪽지역 일대에 위치한 보문동 3가 168번지에 보문사(普門寺)의 이름을 딴 것이다, 조선 초부터 이곳은 한성부에 속했는데 고종 4년 1867년에 발간된 육전조례에 보면 한성부 동부 숭신방(성외) 신설계(新設契)로 친하였고 갑오개혁 때에는 한성부 동부 숭신방 동문외계 신설동이라고 했다, 한일합방 후 일제는 1911년 4월 1일 경기도 경성부 숭신면 신설계 탑동(塔洞)(탑동을 탑골 승방(僧房)이라고도 부른다,) 우선리(隅仙里)로 칭하다가 1914년 4월 1일 경기도 숭인면 신설리로 명명했다, 그 후 1936년 4월 1일 일제가 경성부 구역을 확정할 때 경성부에 편입되고 나서 고사남부정회(高砂南部町會)와 고사북부정회로 불렸을 것으로 보인다,
1943년 6월 10일 구제 실시로 동대문구에 속했다, 광복 후 1946년 10월 1일 신설정을 신설동으로 개칭되었다, 이어서 1955년 4월 18일 동제 실시 때 신설동에서 보문동으로 분리하여 보문 1동은 4, 5, 6, 7가 보문 2동은 1, 2, 3가로 구분하였는데 1975년 10월 1일 구동의 관할구역을 재편할 때 신설동 일부를 보문동 6가에 편입시키고 보문동 1가~7가를 성북구에 소속시켜 현재보문동에서 행정을 담당하고 있다,,
※ 보문사(普門寺) 보문동은 1955년 이후에 생긴 이름이다, 한일합방 후 1911년 육전조례에는 보문동이란 동명은 없고 경성부 숭신면 신설계 탑동(塔洞)과 우선리(隅仙里)로 칭하고 있다, 탑동이란 승방(僧房)에서 비구니(比丘尼)들이 거쳐하는 조용한 암자(庵子)인데 그 곳은 보문사 좌측의 미타사(彌陀寺)로 추측(推測)이 된다고도 하고 답골승방의 명칭은 보문사(普門寺)라고도 하며 보문사는 고려 예종(睿宗)10년 (1115년)에 담징(曇徵)이 창건하였다 이 절 경내(境內)에는 경주 석굴암을 모작(模作)한 굴이 있다, 1950년 이전만 하여도 사람들은 동네이름을 탑골승방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 동망봉(東望峰)의 유래는 조선시대 단종(端宗)이 어린 나이로 숙부(叔父)인 세조(世祖)에게 몰려 멀리 강원도(江原道) 영월(寧越)로 귀양 가 있을 때 단종왕비 송씨(宋氏)가 서쪽 산록 청룡사(정업원(淨業院)에 우거(寓居)하면서 매일 이 봉우리에 올라 동쪽으로 단종이 개신 영월을 바라보았다 하여 봉우리 이름을 동방봉이라 하였다, 영조47년(1771) 6월에 왕이 이곳에 거둥하여 친필로 쓴 <淨業院 舊基>(정업원 구기)라는 비를 세우고 바위에도 동망봉이라 3자(字)를 친필(親筆)로 써서 새기게 하였다고 한다,
동망봉 쉼터는 보문동과 종로구 숭인동사이 청룡사(靑龍寺) 앞에 우뚝 솟은 큰 봉우리가 있는데 이름 하여 동망봉이라고 한다, 2005년 6월 준공된 동방봉 쉼터는 운동과 휴식을 겸할 수 있도록 꾸며져 있다, 더욱이 종로구 숭인 4거리에서 성북구 보문 4거리를 잇는 동방터널까지 개통되어 한층 가까이 시민들에게 다가가고 있다,
③ 정릉동(貞陵洞) 길음동(吉音洞) 월곡동(月谷洞)
☞ 정릉동은 북한산(北漢山) 남장대(南將臺) 일대에 위치한 곳으로 이성계(李成桂)의 계비(繼妃) 강씨(康氏)의 정릉이 있으므로 동명이 유래되었다, 원래 정릉동의 처음 지명은 사을한리(沙乙閑里)를 한자음(漢字音)으로 줄여서 사아리(沙阿里)로 칭(稱)하기도 했다, 이곳은 조선 초부터 한성부에 속했던 것은 정릉동 408번지 청수장(淸水莊) 유원지(遊園地)입구에 성저오리(城底五里)(사적 제110호)가 세워져 있었음을 보아도 알 수 있다,(지금은 경복궁(景福宮) 근정전(勤政殿) 회낭(廻廊)에 옮겨져 있다) 조선말 고종4년 (1867년)에 발간된 육전조례에는 한성부 동부 숭인방(성외) 동소문외계로 나타나고 갑오개혁 때에는 한성부 동부 숭신방(성외) 동소문외계의 소정릉(小貞陵) 청수동(淸水洞) 손가정(孫哥亭) 지역으로 칭했다,
한일합방 후 일제는 1911년 4월 1일 경성부 숭신면 대정릉동 소정릉동 청수동 손가정으로 칭하고 이어서 1914년 4월 1일 경기도에 속하여 고양군 숭인면 정릉리로 되었다 그 후 1949년 8월 15일 분구하면서 동대문구에서 성북구 정릉동으로 고쳐졌다, 1975 10월 1일 정릉동 236의 235번지 동부지역을 동봉구(道峰區) 미아동에 편입하였다, 현재 정릉동의 행정(行政)은 정릉제1동 제2동 제3동 제4동에서 담당하고 있다,
※ 정릉동의 지형 청수장 유원지로 가는 보국로(輔國路)는 북한산으로 오르는 등산로인데 대성문, 보국문, 남장대를 지나 백운대(白雲臺)에 오르게 된다, 북한산은 백운대 인수봉(仁壽峰), 만경대(萬景臺)의 세 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으므로 혼이 삼각산(三角山)이라고 칭하며 서울의 주산으로 조종산(祖宗山)이라고도 하는데 숙종37년(1711)에 수도 방어를 위해 20여리의 북한산성을 쌓았다, 정릉북쪽(정릉산 87-16)은 역사적인 가치뿐 아니라 구민들의 휴식처로서도 손색이 없다, 능을 뒤로 하고 등산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나무와 바위 물이 어우러진 산책로가 펼쳐진다, 왼쪽으로는 바위에서 떨어지는 약수가 맑은 소리를 내며 흐른다, 건너편에는 환벽천(環壁泉)으로써 위장병과 피부병에 약효가 있다고 해서 유명한 정심약수(正心藥水)터가 있다 그 길 끝에는 대한궁도협회의 궁도장인 백운정이 그림처럼 자리 잡고 있다, 언덕 위 백운정에는 김충현이 쓴 편액이 걸려있다,
북악산 능선을 따라 자아문에서 정릉 아리랑고개의 이르는 도로를 성북구는 자연경관이 수련한 이곳을 주민들이 이용하며 건강을 달련하고 휴식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도로와 산을 따라 3,5km의 산책로를 조성했다, 산책로 곳곳에는 체력단련과 여유로운 휴식을 위한 팔각정, 운동시설 등을 마련했다, 주민들이 안전하게 산책할 수 있도록 가파르거나 계곡으로 이루어진 구간에는 나무로 된 안전 데크와 계단을 도로인접 구간에는 보행자 안전보조 시설을 설치했다, 북악스카이웨이 산책로를 따라 정상에 오르면 북악산, 남산, 한강, 서울을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을 만큼 자연경관이 수련하다, 주민들은 물론 외국인들에게도 손꼽히는 드라이브 코스로 인정받고 있다, 그리고 정릉 산 1-1번지 북한산에서 매년 음력 10월 초에 성북구민들의 평화와 안녕은 물론 국가의 발전도 함께 기원하는 산신제를 지내고 있다,
※ 신덕왕후 정릉(貞陵)은 기억 속에 잊혀다가 170년이 지난 선조(宣祖) 14년 (1581년)에 그 위치를 찾게 되어 능침(陵寢)을 수봉(修封)하고 한식(寒食)에 제사하는 것만으로 그쳤다, 이어서 현종(顯宗)10년 (1669년 11월 1일) 신덕왕후를 종묘(宗廟)에 배향(配享)하고 능의 면모를 갖추게 되니 260년 만에 예우(禮遇)를 갖추게 된 샘이다, 봉능설제(封陵設祭)하는 날 정릉 일대에 비가 흡족히 내리자 사람들은 이 비를 세원지우(洗寃之雨)(* 200여년 동안 쌓인 한을 씨서 주는 비)라 하였다,
※ 손가정터와 청수장의 유래
정릉천변 맑은 물에 고풍스런 한옥 손가정터(孫哥亭址)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는 손가정터는 정릉동 333번지 주변에 위치한 아름드리 한 그루 나무로 예의 그 위용을 가늠할 수 있게 한다, 정릉동은 서울의 북쪽 북한산 연봉 밑에 위치한 물 좋기로 소문난 계곡으로 예로부터, 묵객(墨客) 한량(閑良) 고관대작(高官大爵)들이 주로 찾던 유원지이다, 전망 좋은 계곡에는 정자가 많았는데 특히 정릉동 333번지 주변은 왕(王)씨와 손(孫)씨가 많이 살던 세거지(世居地)로서 두 집안은 서로 세력 과시하는 등 가문의 명성을 높이려는 경쟁의식이 크고 작은 일에 나타났다고 한다,
그 시기에 이 부근에 고풍스런 한옥이 있었는데 이를 정자집이라 불렸다, 그러나 조선중기부터 왕씨가 번영(繁榮)하여 왕가정으로 손씨가 번성(繁盛)할 때면 손가정으로 바뀌어 불렸다, 몇 년 전만해도 주변(周邊)에 말처럼 생긴 말 바위에 손가정이라는 각자(刻字)가 새겨져 있었으나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고로 손가정터 란 손씨네 집안이 득세(得勢)하던 시절의 집터라고 이해하면 무리가 없을 것이다,
청수장(淸水莊)이란 정릉계곡에서 흐르는 물이 맑아 청수동이란 마을 이름에서 붙여진 별장이다, 정릉유원지 깊숙한 곳에 위치한 청수장은 삼각산 남록(南麓)의 깊은 계곡의 맑은 물과 부근의 산수가 조화를 이룬 곳에 위치한 청수장은 장안의 부호(富豪)들이 즐겨 찾던 장소였다고 한다, 이는 일제시대 일본인의 별장으로 이용되어 오다가 해방이 되면서 민간인에게 넘어가고 6, 25 전쟁 때는 특수부대 훈련을 위한 강의실 및 숙소로 쓰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종전 후 요정 청수장 으로 탈바꿈하였고, 여러 사람의 손을 겨쳐 변모를 거듭하다가 1974년 이후에는 일반 음식점 및 여관으로 바뀌어 운영되는 등 격동의 우리 근대사와 그 궤를 같이해온 뜻 깊은 건물이기도 하다, 1983년 북한산이 국립공원 제15호로 지정되면서 청수장, 도 국립공원지역으로 편입되었다, 결국 1998년 이 건물의 역사성과 문화적 가치가 평가되어 국가에서 취득하였고 2000년에야 건물의 외형을 최대한 보존하는 방식으로 지상 2층 규모로 개축에 착수하여 2001년 6월 30일 지금의 북한산 국립공원 정릉 탐방 안내소로 문을 열었다,
정릉 초입 서쪽 산기슭에 높직이 동(東)을 바라보고 서있는 절이 봉국사(奉國寺)이다, 고려 말기 공민왕(恭愍王) 3년 1354년 나옹대사(懶翁大師)가 창건한 절이라고 전하며 처음에는 약사사(藥師寺)라 불렀다고 한다, 또한 경국사(慶國寺)는 봉국사의 북쪽 정릉천 옆 숲속에 자리 잡은 경국사는 고려 시대에 창건된 절로서 원래는 청암사(靑岩寺)라고 불렸던 곳이다,
(정릉의 수난기는 중구 정동의 기재하였음)
☞ 길음동은 삼양동(三陽洞) 좌우편에 위치한 곳이다, 정릉천의 골짝기가 길게 놓여 져 있으므로 기리목골이라 하던 것을 한자음으로 고쳐 쓴 것이다, 그리고 이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가 맑고 고와서 기분(氣分)이 맑아지므로 좋은 노래 소리가 들리는 동네라는 뜻에서 길음동이란 하였다는 것이다, 길음동은 조선 초부터 한성부에 속하였으며 고종4년 (1867년)에 편찬(編纂)된 육전조례에 의하면 한성부 동부 숭신방(성외) 미아리계로 속하였다, 갑오개혁 때에는 한성부 동부 숭신방(성외) 동소문외계 미아리로 칭하였다, 한일합방 후 일제는 (1911년 4월 1일) 경기도 경성부 숭신면 미아리로 칭하다가 1914년 4월 1일 경기도에 속하여 고양군 숭인면 미아리가 되었다,
광복 후 1949년 8월 15일 서울시 확장으로 편입되어 성북구 미아리로 불리우다가 1950년 3월 15일 미아동으로 개칭되었으며 숭인출장소에서 행정을 담당했다, 그 후 1959년 10월 10일 에는 전 미아 제1동 지역을 길음동으로 하였다 이때 길음동은 미아동 533의 1번지에 낙합교(落合橋)와 정릉천이 합류되는 지점을 기점으로 하여 미아동 567의 1호에 이르는 서부와 동(同) 지점으로부터 동 559의 2호를 경유하여 산 66번지에 이르는 세도로(細道路) 이남의 지역을 경계로 한 도로 동북방 및 미아동 낙합교로 부터 미아동 531번지의 구릉(丘陵) 이서지역(以西地域)의 전 미아 제1동 지역으로 정했다 그리고 1975년 10월 1일에 도봉구 미아동 일부가 길음동으로 편입되었다,
미아리 공동묘지(共同墓地)가 있었고 화장장(火葬場)도 미아리와 길음동 일부 쪽에 있었는데 1954년 12월 8일 이후 고양군 벽제면(碧帝面)으로 이장하고 이곳에 택지(宅地)를 조성해서 판자 집 철거민(撤去民)을 이주시키는 한편 일반에게도 분양(分讓)하였다, 현재 길음동의 행정은 길음1동, 2동, 3동에서 담당하였으나 2007년 9월 이후 1, 2동으로 통합하였다,,
☞ 하월곡동은 경희대학교 뒷산 천장산(天藏山) 서쪽의 장위동 길과 미아로 정릉천을 끼고 있는 하월곡동은 천장산의 모습(模襲)이 마치 반달처럼 생겼기 때문에 월곡이란 이름을 붙었다는 설(說)과 다른 하나는 조선 후기 미아삼거리에는 신근솔이라는 솔밭이 많아 풍치가 수려(秀麗)했기 때문에 당시 이곳에 주막(酒幕)이 밀집하여 지방에서 소를 몰고 서울로 들어 올 때에는 신근솔에서 숙박(宿泊)을 하고 소를 매어 놓았다가 장위동 노변 도살장(屠殺場)에서 소를 팔고 돌아가거나 소 장사들이 달밤에 도착하여 잔월(殘月) 아침에 흥정했기 때문에 월곡이라는 동명이 생겼다고 한다,
※ 이동의 사적(史蹟)으로는 애기능터와 귀인묘(貴人墓)가 있었다, 애기릉은 조선말 고종의 장남 완왕(完王)의 묘터로서 장자 묘지라고 칭하는데 송림(松林)이 우거지고 풍치(風致)가 뛰어났다, 고종 5년 1865년 영보당(永保堂) 귀인이씨(貴人李氏)에서 태어난 그는 완화군(完和君)으로 봉해졌다가 고종 17년에 12세로 세상을 떠나자, 현재 천장산 아래 동덕여자대학교 자리에 묘소를 만들었다가 1948년경 서오능(西五陵)으로 이장하고 고종의 후궁인 완왕의 생모(生母)인 귀인 이씨와 역시 후궁인 내안당(內安堂) 귀인이씨(貴人李氏), 복령당(福寧堂) 귀인 양(梁)씨의 묘소 터로서 애기능 남쪽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같은 해 서삼능(西三陵)의 귀인 숙의묘역(淑儀墓域)에 이장되었다,
월곡동은 조선 초에 한성부에 속했는데 영조27년(1751년)에 간행된 수성책전(守城冊全)중의 도성삼군분계총록(都城三軍分界總錄)에 동부 인창방 미아리계 내에 소속되어 다릭굴 또는 교곡(橋谷)(즉: 다릿꼴)이라 부르기도 했다, 그 뒤 갑오개혁 때에는 한성부 동서 인창방(성외) 동소문계의 월곡리로 되어있다, 한일합방이 강행된 뒤 이듬해인 1911년 4월 1일에는 월곡리를 경성부 인창면에 소속시켰다가 1914년 4월 1일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에 편입시키고 종전의 월곡상리 월곡하리를 병합(竝合)하여 월곡리로 하였다, 광복 후 1949년 8월 13일 서울시에 편입 되면서 성북구 상월곡리, 하월곡리로 칭하다가 1950년 3월 15일 법정동 하월곡동으로 개칭하며 숭인출장소에서 행정을 담당했다,
1970년 5월 18일 월곡동 사무소는 하월곡 제1동 제2동과 상월곡동 사무소 등의 3개로 나누웠다, 1975년 10월 1일 하월곡동의 일부를 도봉구 미아4동에 편입시켰고 1978년 10월 1일 50m 도로를 경계로 종암동 일부가 하월곡동에 편입 되었다, 이 당시 하월곡동 제1동사무소의 관할구역은 하월곡동 중 장월교에서 북상하여 62번지 앞 도로를 따라 하월곡동 산 2번지와 경계가 되는 도로 이서(以西)지역으로 정했다, 이어서 1973년 7월 1일 하월곡동 제3동사무소가 신설되었으며 1975년 10월 1일 하월곡동에서 제4동이 분동되었다, 법정동 하월곡동의 행정은 월곡1동 월곡2동 월곡3동 월곡4동 사무소에서 담당하다가 시 조례의 의거 2007년 9월에 월곡1동으로 통폐합하였다,
☞ 상월곡동(上月谷洞)은 동쪽 화랑로 양쪽에 위치한 상월곡동은 천장산의 모습이 마치 반달과 같다하여 그 산에 연해 있는 마을을 다릿굴(골)이라고 부르는데서 연유되었다, 이 중 높은 지대에 위치한 지역을 웃다릿골(상월곡동) 아래지역을 아랫다릿골(하월곡동)이라 불렀다, 상월곡동은 조선 영조 때까지는 한성부 동부 숭신방의 성외지역으로 있었는데 고종 4년(1867)에 발간된 육전조례에 의하면 한성부 동부 숭신방(성외)의 월곡리계로 되어있다, 갑오개혁 때에는 한성부 동서 인창방(성외) 동소문외계의 월곡상리로 되었는데 한일합방에 따라 일제는 1911년 4월 1일(경기도령 제3호) 경기도 경성부 인창면 상월곡리로 하고, 이어서 1914년 4월 1일 (경기도령 제1호)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월곡리로 하였다,
상월곡동은 법정동인 상월곡동 지역의 행정을 담당하고 있는 동장관할구역 명칭이다, 이 동은 1949년 8월 13일 서울시에 편입된 후 월곡동회로 호칭되었다가, 1950년 3월 15일(시조례 제10호) 법정동인 상월곡동으로 개칭했다, 상월곡동과 하월곡동은 월곡동희에서 행정을 담당하다가 인구 증가로 1970년 5월 18일(시조례 제613호)에 상월곡동사무소를 분동 하무로써 신설되었다, 그 후 1978년 10월 10일(시조례 제1286호) 50m 도로를 경계로 상월곡동 일부를 장위동에 편입시켜 축소되었다,
2002년 3월 개관한 성북정보도서관(상월곡동 24-348)은 도서관 디지털 컨텐츠를 통한 정보 서비스의 제공이라는 공공도서관의 기본적인 역할 외에도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과 교육시설을 마련해 놓아 관내 주민들의 높은 참여를 이끌어내고 있다, 정보도서관에는 월요일부터 주말까지 즐기고 공부할 것이 무궁무진하다, 6만여 권의 도서와 DVD, VOD 등 방대한 자료를 구비해놓고 있다, 어린이를 위한 꾸러기 열람실, 엄마사랑 열람실, 중학생 이상을 대상으로 한 네오간행물실, 북카페, 장해인 열람실 등을 따로 설치해 구민들의 선택의 폭을 넓혔다,
이 동은 경기도 편입되어 있을 당시까지는 주민들은 농업을 해서 생계를 유지하였는데 서울시에 편입되면서 인구가 늘기 시작하여 농토가 주택지로 바뀌고 1960년 이후에는 도심지의 철거민들이 집단 이주하여 변모했다, 상월곡동은 동대문 밖을 나와서 성북역을 거쳐 원산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옛날에는 아침 일찍 동대문을 나선 길손이 이 동의 있는 곳에 이르면 대개 점심때가 되므로 이들에게 식사를 제공하여 주는 주막이 많이 생겨났다, 경원선 철도가 부설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 동의 일대는 주막거리로서 옛 길손들의 애환을 그대로 담았던 곳이다, 다릿굴고개는 장위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하며 장위현(長位峴), 우장현(雨藏峴)이라고도 칭했고 또 밤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는 곳이라 해서 밤나무골 혹은 밤골이라고 부른다, 그 이웃에는 배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는 마을이라 해서 배나무골 배골(梨洞)이라는 마을의 이름이 붙여진 곳도 있으나 지금은 모두 주택지가 되어 배나무나 밤나무를 심었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 마을의 수호신 성황당나무
상월곡동사무소 바로 앞 화랑로 변에 서 있는 마른대미고개 성황당나무, 푸석산 표석은 누구나 쉽게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좋은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그 어떤 표석보다 옛 모습을 가늠하기조차 힘들 정도로 지형 자체가 많이 변해버린 곳이고도 했다, 사시사철 그 푸름을 드리우며 온 마을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주고 마을을 지켜 주던 커다란 소나무인 성황당나무가 서 있던 푸석산 마른대미고개는 쭉 뻗은 화랑로 때문에 그 곳이 옛날의 고개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평평한 곳이 되어 버렸다,
마른대미고개란 화랑로를 따라 상월곡동에서 장위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하는데, 이 고개를 넘으면 평지가 시작되므로 고개가 바로 끝난다는 뜻으로 바로대미고개 라 불렀고 그 음이 변하여 마른대미고개 로 되었다, 이 마루턱에 있던 마을의 수호신인 서낭님이 들어있는 커다난 소나무를 성황당나무라 하였고(일명 서낭나무) 이 나무는 동네의 재앙(災殃)을 막아주기도 하고 아들을 원하는 아낙의 소원을 이루게 하여 자식을 얻게도 해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기도 한다, 또 성황당 나무가 있는 고개 전체를 푸석산이라 하였는데 성황당 나무가 워낙 크고 사철 푸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법정동 상월곡동은 행정동 월곡2동에서 담당하고 있다,
④ 장위동(長位洞) 석관동(石串洞)
☞ 장위동은 우이천(牛耳川)의 서쪽과 서울 드림랜드 남쪽 일대의 위치한 장위동은 조선시대 초에도 장위리라 불리어 온 것으로 보아 고려조 때 명신이 이 마을에 있었기 때문에 그 때부터 붙여진 이름이 아닌 가 추측되기도 하고 또 하나는 마을 뒤에 장위산(獐位山)이 있으므로 이 산의 이름을 따서 장위동이 되었다는 추측을 하고 있다,
장위동은 조선 초부터 한성부에 속했는데 영조(英祖)27년 1751년에 간행된 수성책전중의 도성삼군문분계총록에 보면 한성부 동부 인창방(성외) 장위리계로 되었고 갑오개혁 때는 한성부 동서 인창방(성외) 동서문계로 되었다, 그 후 한일합방에 따라 일제는 1911년 4월 1일 경성부 인창면 장위리로 칭했으며 이어서 1914년 4월 1일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장위리가 되었다, 광복 후 1949년 8월 15일 서울시에 편입되면서 성북구의 신설로 이에 속하고 숭인며 출장소에서 행정을 담당하였다, 이듬에 1950년 3월 15일 장위리는 장위동으로 개칭되었다, 그 뒤 1978년 10월 10일에 50m 도로를 경계로 석광동 일부가 이 동네에 편입 확장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현재 장위동의 행정은 장위제1동 제2동 제3동에서 담당하고 있다,
※ 민속자료 제25호로 지정된 김진흥가(金鎭興家)(장위2동 76-56)가 있다,
이 집은 남영재(南寧齋)로 불리는데 조선말 순조의 셋째 부마인 남영재 윤의선(尹宜善)과 덕원공주가 거처해서 남영위궁(南寧尉宮)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건평 107평, 대지 759평의 이 주택은 고종2년(1865)에 지은 것으로 추정하는데 많은 부분이 개축 개수되었다, 이집은 유의선에 입양한 석촌(石村) 윤용구(尹容求)(1853~1939)가 대신을 내놓고 은거했으므로 잘 알려져 있다, 윤용구는 아호를 석촌, 해관(海觀)이라 하고 장위산인(獐位山人)이라 했으므로 장위동을 장위(藏位)라고 썼다, 이것은 윤판서가 모든 벼슬을 거절하고 은거했다는 뜻으로서 상통하는 점도 있긴 하지만 그것보다도 윤판서의 아호가 장위인 것 즉 장위라 쓴 것을 오식(誤識)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그 일화로는 남영재에 은거해 있을 때 현 장위동 91번지에 동구다리가 있었고 또 현 76번지에는 징검다리가 놓여 있었으며, 남영재 문밖에 큰 섬돌이 하나 있었는데 이 다리는 당시 관직의 고하에 따라 하마하는 곳이었다고 한다, 또 장위동 사람을 잡으려 왔을 경우나 죄인이 장위동으로 잠입했을 경우에도 윤판서의 허락 없이는 체포할 수 없었다 한다, 당시 장위동의 농토는 대부분 윤판서(석촌 윤용구(石村 尹容求)와 그 친척들의 땅이었는데 1960년경부터 윤씨가에서 매도(賣渡)하고 또 택지로 바뀌어 현재 주택이 밀집되어있으며 토착민들이 많은 편이다,
장위동 중 장위교를 기점으로 123번지에서 212번지에 이르는 구거(溝渠) 이북지역과 236번지 앞 도로를 경유 동방생명주택 조성지역(238번지 포함)을 옹하고 남하, 68번지 앞 도로에서 산 3의 북측 지적선과 연결되는 서북 지역으로 정했다, 원래 장위동 지역은 웃말 아래말 명더굴 간대마을, 활량리 등 5개의 자연 촌락이 합쳐진 것으로 장위 제1동의 옛 영광중학교 자리(장곡 초등학교 위치)에 명덕굴이 있었다, 명덕굴은 명덕(明德)고을의 와전된 말로 주민의 말에 의하면 장위산인 윤용구의 형이 이곳에 살았고 또 그 윗대부터 이 마을에 살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 동의 북쪽으로는 월계로가 지나고 동쪽으로는 돌곳이 길이 지나며 이두 길을 연결하는 장위동길이 있으므로 교통이 원활하다,
☺ 고양군의 전설(傳說)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장위동 사람들 사이에는 양주(楊洲)밥 먹고 고양(高陽)굿 한다는 말이 널리 유행(流行)되었는데 이 말은 농토는 양주군(楊洲郡)에 두었고 고양군(高陽郡)에서 거주하므로 식생활은 양주에 근거를 두고 있었는데서 생겼다 이와 같이 조선시대의 이 곳 주민들은 대부분 농민(農民)이였던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석관동(石串洞)쪽에 있는 의릉(懿陵)은 왕릉 문화유산의 기록을 보면 양주군(楊州郡) 중량포(中梁浦) 천장산(天藏山) 신좌인향(申坐寅向) 서남서에서 북북동 방향의 언덕 위에 두 봉분을 앞뒤로 놓은 동원상하봉(同原上下封)의 능이다 라는 기록을 보아도 양주군이 였던 것을 알 수 있다, 현재는 성북구로 되어있다,
(* 옛 지명에는 중량포(中梁浦)로 기재 되었으나 지금은 중랑구(中浪區)로 사용하고 있다,)
☞ 석관동은 화랑로(花郞路)를 끼고 있는 석관동은 마을 남쪽의 천장산 지맥(支脈)이 검정돌을 꽂아 놓은 “즉,, 수수팥떡이나 경단을 꽂이에 꿰어 놓은 것 같아 돌 곶이 마을이 되었다는 설과 이곳 지형이 곶이로 되었으므로 돌 곶이라 하였다는 설(說)이 있는데 돌 곶이 이름을 한자로 표기해서 석관동(石串洞)이라 붙인 것이다, 석관동은 앞의 장위동과 같이 조선 초부터 한성부에 속했으며 영조(英祖)27년 1751년에는 한성부 동부 인창방(성외) 장위리로 칭하다가 갑오개혁 때에는 한성부 동부 인창방(성외) 동소문외계 석관리로 되었다, 그 후 한일합방에 따라 일제가 1911년 4월 1일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석관리로 되었다,
광복 후 1949년 8월 13일 서울시에 편입되면서 성북구의 신설(新設)로 이에 속하고 숭인면 출장소에서 행정을 담당했다, 이듬해 1950년 3월 15일 석관리는 석관동으로 개칭되었다, 그 후 1975년 10월 1일 에 구 동의 관할구역 재편성이 있을 때 이문동(里門洞) 북쪽의 석관동 일부 지역이 동대문구 이문동에 편입되므로 축소되었다, 현재 석관동은 석관 제1동 제2동에서 담당하고 있다, 2007년 9월에 석관동을로 통폐합하였다,
※ 경종 의릉(懿陵)과, 추존(追尊) 문조의 연경묘(延慶墓)
석관동 산 1~5번지 천장산(天藏山)에는 사적(史蹟) 제204호로 지정(指定)된 의릉(懿陵)이 안전기획부가 터를 잡아 출입이 엄격히 금했던 곳이 1995년 안기부가 이전하여 나간 후 일부 훼손된 곳을 복원한 후 1996년에 개방되었다, 왕릉은 조선 20대 왕인 경종(景宗)과 계비 선의왕후(宣懿王后) 어(魚)씨의 능으로 쌍릉이다, (의릉의 특진은 좌우로 되지 않고 상하로 되었다, 이 같은 것은 풍수지리설의 영향으로 생기(生氣)가 왕성한 정혈(正穴)에서 벗어날 것을 우려하여 왕과 왕비릉을 좌우로 쓰지 않고 앞뒤로 놓아 양자 모두 정혈에 있게 한 것이다,) 경종은 숙종의 장자로 (張禧嬪)의 아들) 숙종 14년 당시 3세로 세자가 되었고 숙종 43년에 세자로 대리청정을 하기도 하였다,
숙종이 승하한 뒤 즉위하였으나 병약(病弱)하야 원년 8월에 이복동생 숙종의 4자 연잉군(延仍君)(후에 영조대왕)을 세제(世弟)로 봉하였으며 재위 4년 만에 37세를 일기로 승하 하였다, 계비 선의왕후는 함원부원군(咸原府院君) 어유구(魚有龜)의 딸로 숙종 44년 15세로 세자빈 이 되었고 경종 즉위와 함께 왕비로 진봉 되었으며 영조 8년에 26세로 소생 없이 타계하였다,
추숭(追崇)된 순조(純祖)의 아들 문조(文祖)의 능도 순조 31년 1831년 8월 4일에 이곳 의릉 좌강(左岡)에 모시고 연경묘(延慶墓)라 하다가 문조의 아들이 헌종(憲宗)으로 즉위(卽位)하자 원년에 추존하여 익종(翼宗)이라 하였으나 그 후 순조로 추숭(追崇)하고 수릉(綏陵)으로 높인 뒤 철종(哲宗) 6년 1855년에 양주군 구리면 인창리 동구릉(東九陵)으로 천봉(遷奉)하였다, 22살에 요절한 문조의 비해 신정익황후(神貞翼皇后) 풍양조씨(豊壤趙氏)는 83세까지 천수를 누리면 후기의 정국을 주무르던 여장부다,
경주김씨 정순왕후(貞純王后)(영조의 계비) 안동김씨 순원숙황후(純元肅皇后)(순조의 비) 풍양조씨 신정익황후(추숭 문조의 비) 영흥민씨 명성태황후(明成太皇后)(고종의 비)까지 조선 후기 역사는 이 네 명이 여인이 정국을 주도했다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듯하다, 현재 동구릉 가운데 길을 따라 건원릉 방향으로 걸어 들어가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게 문조와 신정익황후의 수릉이다
※ 7, 4 남북공동 선언장은 분단이래 남북 당국자간의 첫 대화로 역사에 기록된 7, 4 남북공동선언 발표가 있었던 장소(석관동 1 - 5 의릉내) 이 당시 서울 이문동 중앙정보부 종합청사 강당으로 무소불위(無所不爲) 권력의 상징으로 군림했던 중앙정보부 가운데에서도 가장 안쪽에 위치해 있다, 1962년 의릉 내에 중앙정보부가 들어서면서 일반인의 접근이 금지되었다가 43년만이 2005년 5월 1일 산책로와 함께 일반에 개방되었다, 원래 이 강당은 철거될 예정이었지만 1972년 이후 중앙정보부장이 7, 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한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 위해서 문화재 제92호로 지정하여 보존하고 있다,
※ 민간 신앙(信仰) 석관동 340번지에는 도당(都堂)이 있다, 원래 천장산에 있었으나 의릉이 들어오자 주민들이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함께 받들고 와서 현재 위치에 둔 것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약 5~6평의 당내에 화상(畵像) 또는 신주대신 항아리에 벼를 가득 넣고 짚으로 땋은 주저리로 덮었다, 즉 항아리를 주신으로 받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주신이 여신임을 알 수 있다,(남신인 경우에는 항아리 대신 목경(木莖)을 숭배한다) 또 벼를 넣은 것으로 보아 당시 이 마을의 주업은 농업으로써 풍농의 기원에 목적을 두었을 것이다, 언제부터 유래되었는지는 모르나 이 마을이 형성될 당시 수호신으로 숭배되어 왔고 또 숭배되어 오고 있음을 짐작케 한다,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도당(禱堂)신 양조 분이 있는데 현재 중화동 봉화산신은 도당 할아버지이며, 천장산신은 도당 할머니라고 전해지고 있으며 석관동에서는 도당 할머니신을 위한다고 한다, 왕릉이 들어오기 전에는 천장산 아래 있으면서 산신으로 받들다가 이주하면서 동신(洞神)으로 받든 것이라고 한다, 주신이 호칭은 도당 할머니라 부르며 축문의 표기는 토지지신으로 되어 있다, 특히 제수 중 쇠고기는 전부 꼬지에 꾄다, 즉 내장은 내장대로 껍질은 껍질대로 꾀어 짚으로 엮은 다음 제관 5명이 (집집마다,동신(洞神)을 신봉하는 집) 돌린다, 제비(祭費)는 도가에서 준비한 다음 제사가 끝나면 동민이 모여 경비 일체를 공동 부담한다,
반면 화랑로변의 이 동과 상월곡동 경계지역을 푸석골 또는 돌곶이말이라고 한다, 전에 성황당나무가 있는 고개를 푸석산이라 했기 때문 푸석골이라고 칭했던 것으로, 이 마을은 여흥(驪興)(지금의 경기도 여주) 민씨(閔氏)들의 집성마을로서 동네의 평안과 발전을 위해 푸석산에서 1년에 한 번씩은 산제(山祭)를 지내고, 3년에 한번 큰굿을 하였다, 그러나 6, 25동란 이후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점차 모여 살게 됨으로서 여주 민씨들의 집성촌락적인 성격도 차츰 퇴색되어졌고 산제나 동제의 풍속도 사라졌다,
※ 학국예술종합학교
이 동의 관내에는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석관동 261-1호) 1960년 5월 13일에 설립하였으나 1992년 10월 29일 서울시 금천구 시흥3동 산 24-17호로 이전하였고,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는 전문 예술인이 되기를 원하는 재능 있는 젊은이들에게 보다 수준 높고 체계적인 교육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문화관광부가 1993년 3월 국내 최초로 음악, 연극, 영상, 무용, 미술, 전통예술 등 6개 분야의 예술 실기를 전문적으로 교육하는 한국예술종합대학교의 문을 연 것이다,
이 동의 북쪽으로는 화랑로 남북으로는 이문로(시조사 - 외대 앞 석관초등학교) 한 철로가 지나고 있는데다가 남쪽과 북쪽 경계선 부근에 경원선 전철 신이문역과 석계역이 자리 잡고 있어서 교통이 편리하다, 신이문역 석계역 사이의 철로 동쪽에는 동원연탄, 삼표연탄, 삼천리연탄 정원연탄, 칠표연탄 등의 연탄 생상공장이 1962년부터 들어서 있었다, 이 공장에서는 하루 150만개를 생산해서 서울시내의 연타공급량의 2분의 1을 공급했으나 주택 난방 연료가 유류로 바뀌는데다가 이 공장에서 나오는 분진(粉塵)이 인근 주택가의 공해를 자아내어 민원이 일어나무로 점차 시외로 이전해 가고 16개소에서 7개소로 줄어들고 나머지도 1993년 모두 폐쇄되어 현재는 아파트가 들어서있다,
이 동의 서쪽을 흐르는 중랑천은 경기도 양주에서 발원하여 의정부시를 거쳐 화랑로에 놓인 월릉교 부근까지는 한내(한천(漢川)라고 칭하다가, 월릉교에서 우이천에서 흘러 청계천과 합류해서 한강으로 들어간다, 중랑천은 전에 송계천(松溪川) 또는 속계(涑溪)로 불리었는데 이는 송계원(松溪院)이 있었기 때문이며 중랑천이란 이름은 하류에 중량포(中梁浦)가 있었으므로 연유되었다,
석관1동 10번지 석관두산아파트 앞 중랑천을 따라 동부간선도로와 나란히 뻗은 중랑천 자전거도로는 마치 자동차와 경주하는 느낌이 든다, 한강 북변의 자전거도로 중에서 가장 길면서도 탄천처럼 험하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구간이 없어 안전한 것도 장점이다, 정평교~월릉교 사이 5km구간에는 유채꽃을 비롯해 여러 군데에 화단이 조성돼있어 꽃이 만발한 도로를 질주하는 낭만을 만끽할 수 있다, 특히 월릉교에서 석관동 19번지까지 성북구 자전거도로 구간에서는 자전거 외에도 인라인 스케이트 조깅을 항상 즐길 수 있다,
※(법정동은 30개동이 되나 일부는 한 동의 여러 가로 인하여 중복됨으로 유래동은 13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