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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전1리 법전2리 풍정1리 풍정2리 척곡1리 척곡2리 소천1리 소천2리 눌산1리 눌산2리
어지1리 어지2리 소지리
법전1리
버제이 버지이 법전 (法田,法典) :
옛날 이곳에 법흥사라는 절이 있었고 그 앞에 큰 밭이 있었다. 그 밭에 마을이 생겼다고 해서 法田(법전)이라 하며, 또는 法典(법전)이라고도 한다. 법전에는晉州姜氏(진주강씨)가 많이 살고있는 집성촌 마을이다. 버전이라는 명칭도 있는데 법전리에서 3백 수십년간 세거하는 진주강씨네를 버전이 강씨라하여 버전이라고도 한다. 법전리에는 법전면의 중심소재지로서 봉화읍과 소천,현동을 연결하는 국도 36번이 통과하며 폭 5,6m의 하천이 소재지의 남향쪽으로 흐르고 있으며 행정기관, 학교등이 집중된 지역이다.
용동(龍洞) 밀김이(密金이) :
법전면 소재지에서 북서쪽에 있는 마을로서 처음에는 산세가 龍穴(용혈)이라는 구멍이 있어서 밑구무라고 한것이 密金(밀김)이로 변천하여 불리어 오다가 해방을 지나면서 용동이란 지명으로 불리어 지고 있으며, 또는 마을 앞산 지형이 용머리처럼 생겼다고 하여 용동이라고도 한다.
음지말 음지마을 순흥법전 (順興法田) :
법전리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로 법전리 가운데 폭이 5,6m쯤 되는 조그만 개울을 두고 조선시대에 개울의 오른쪽은 순흥땅이었고 왼쪽은 안동땅으로 경계를 갈라 이 지명을 순흥법전이라고 부르기도하고, 음지마을이라고 부르기도한다. 이 지역에는 潛隱(잠은) 姜恰(강흡)의 후손들이 세거하면서 대과급제자 13명을 배출하였으며 후손 柳下(류하) 姜泰重(강태중)은 1858년 철종9년에 법천 강윤과 법천의 두 동생인 첨지 중추부사 강완(姜浣)과 참봉 강한(姜澣) 3형제분의 유덕을 기려 재실을 건립하고 추사 김정희가 쓴 경체정의 현액을 걸어 지금도 법전리 137번지에 남아있다.
서멍이 서망이 서망(西望) :
조선시대 임금이 徵服潛行(징복잠행) 행차 하다가 이곳의 농사 형편을 보고 매우 걱정했다고 하며, 이 곳에 모내기만 하면 전국이 풍년인줄 알고 안심했다고 한다. 이곳에 백성들이 성은에 감격하여 서쪽에 있는 대궐을 바라본다고 하여 西望(서망)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지금은 정부에서 지원하는 소형기계 관정 개발로 농수 문제는 전혀 없으며 본마을 앞에 영동선을 연결하는 법전역이 있어 역직원들을 위한 역관사 2동에 4가구가 살수 있도록 건물이 있으며 지금은 1가구가 살고 있다. 36번국도가 포장되기 전에는 열차 이용 손님이 많아 역전 앞으로 가게도 5가구 정도 있어 주민들 경제에 큰 보탬이 되었으며 지금은 거주민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법전2리
모랫골 (沙洞) :
산이 헐벗고 모래가 많아서 유래된 지명이며, 지금은 조림으로 모래산이 별로 없고 산에는 나무가 많은 편이다. 이 지역은 한마을이 5리 정도의 큰골을 이루고 있어 아랫모래골, 윗모래골로 부르고 있으며 모랫골 입구에 서낭당이 2개 있는데 마을 입구의 북향으로 오른편에 있는 당은 일반적인 당이고, 왼편에 있는 당은 삼신당으로 매년 음력 정월 14일 밤이면 풍년 농사의 기원과 마을의 안녕을 위해 동리에서 유사(재간,축간 당주)를 정하여 당제를 올리고 있다.
사랭이 새랭이 사령(沙嶺) :
모래골의 북향 방향으로 2km 위쪽에 속해 있으며 마을 주위의 산이 마사토의 산으로형성되어 있으며 이 마을이 개의 형상을 하고있고 주위의 산 8개봉이 개(犬)의 유두를 상징하고 있어 옛부터 이 마을은 8호 이상이 거주를 못한다고 하여왔으며 현재 7가구가 살고 있다. 이 지역의 특산물로는 사령뒷산이 송이가 자라기에 알맞은 형태를 갖추고 있어 매년 4-5톤 정도의 송이를 채취하여 가구당 4,5백만원의 농외소득을 안겨주고 있다.
붓둔 북둔(北屯) 부둔(浮屯) :
마을의 양쪽에 베틀 같은 산이 있고 가운데 북처럼 생긴 산이 있어서 유래된 동명이며 마을에 둔덕이 많아 교통이 불편한 오지부락이다. 이 마을에는 수년 전부터 마을 입구에 성황당을 모셔 놓고 매년 제사를 올렸으나 10여 년부터 성황당을 철거하고 제를 올리지 않다가 근래에 들어 다시 음력정월 14일 제를 올리고 있다. 그 주위에는 수령 약 150년 되는 노목 한 그루가 있으며 (보호수 읍면나무 11-29-4-2호 지정) 그 이후 심겨진 배나무 1그루, 소나무 1그루가 함께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고 있다.
풍정1리
갈뱅이 갈방 (葛芳) :
산줄기에 칡꽃이 많이 핀다는 갈방산 중턱 해발 600m지점에 있는 마을이며 풍정리 가운데 밑에 가장 북쪽에 위치하고 갈방산 밑에 있는 마을이라고 하여 갈방이라고 하며 25가구가 살고 있다. 1940년대에 다덕광산이 번창할 때 외지서 이주해온 주민들이 마을을 형성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명창골 :
산세가 아래명동은 月(월)자이고, 웃명동은 日(일)자의 형국같이 생겨서명동(明洞)또는 명창골이라고 하며, 조선 숙종 때 李時善(이시선)이라는 선비가 정자를 짓고 정자 앞에 연못과 큰 소나무가 있어 정자 이름을 松月(송월)제라 했으며 明月淸風(명월청풍)이라는 데서 明淸洞(명청동)이라 이름이 불려졌는데 지금은 명창골이라고 한다.
불미골 :
명창골 북쪽으로 산등하나를 사이에 둔 마을로 풀피형상으로 되어있어 풀피야(冶)를 따서 야동 또는 불미골 이라고 한다.
시드물 풍정 :
460여년 전 3개군(순흥땅,안동땅,봉화땅) 지경에 우물이 있고 우물 옆에 단풍나무가 있었는데 단풍나무 풍자를 따고 우물정자를 따서 풍정(楓井)이라고 하며 지금도 우물뚜껑에 큰 글자로 풍정이라는 글자가 남아있다.(전 711-2번지) 또한, 마을 앞 냇가에 맑은 우물이 있고 우물 부근에 큰 신나무가 있다고 해서 시드물 또는 풍정이라고 부르며 본래 이 마을은 안동군에 소속되어 있었으나 1895년대 봉화군에 편입되고1914년 법전면에 편입되었다.
사택 :
사택이 생기기 전까지는 단지골이라고 불리어 졌으나 1935년경 일본인들이 다덕광산을 개발하면서 지금의 자리에 사택 43동과 목욕탕 1개소, 야구장 1개의 시설을 설치하였다. 그 시기의 광맥은 금, 은 등이 생산되었으며 광부 600명과 일본인 100명 정도 광산 개발에 종사하였다고 한다. 해방이 되면서 광산이 폐광되고 광부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지금까지 사택에 거주한 사람이 풍정리 정태진씨가 있었으나 93년도 사망으로 당시 거주자는 없다.
풍정2리
돌다리 석교(石橋) :
옛날 비가 많이 와서 마을 앞 냇물이 불어나 마을 사람들이 건너지 못하자 홍장군이라는 힘센 장사가 큰 돌을 혼자 들어 다리를 놓았다고해서 돌다리라 불렀다. 일설에 의하면 마귀할매가 돌을 이고와서 다리를 놓았다고 한다. 1984년경에 돌다리 위에 시멘트 다리를 붙혀 넓히고 난 후부터 동네 주민들의 이야기가 "과부가 많이 생긴다"는 건의가 있어 시멘트 다리를 다시 철거하였다.
노리미 노림(魯林) :
산등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안노리미 밖노리미로 불리고 있는 마을로 1620년대에 鄭彦燮(정언섭)이란 사람이 개척하여 자신의 호인 內隱(내은)이란 內字(내자)에 乙字(을자)를 붙여 內乙里(내을리)라 하였으나 1700년경 蠶溪(잠계) 姜斗(강두)라는 사람이 이곳에 와 살면서 노리미라고 불렀다 한다.
심새 심수(尋水) :
시든물에서 동쪽으로 약 1.5km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이 마을은 원래 식수가 없어 냇물을 식수로 사용하였으나 여러 가지 질병에 걸리므로 식수를 찾기위해 여러 곳을 파보았으나 우물을 찾지 못했다. 어느날 마을 한구석에 큰 향나무 밑을 살펴보니 물기가 있어 파 보았더니 맑은 물이 솟아 우물을 사용한 후부터 마을 이름을 심수라고 불렀으나 지금은 심새로 더 알려져 있다.
엉고개 아현(牙峴) :
500여년 전 봉화금씨가 와서 살면서 奄峴(엄현)이라 불렀으나 어린아이들이 원인을 알 수 없는 질병으로 자주 죽게되자 牙峴(아현)으로 고쳐 불렀다 한다. 현재 봉성면과 재를 하나 사이에 두고 경계를 이루며 아랫마을 웃마을로 나눠 불리운다.
척곡1리
양지마을 새마,큰말 신기(新基) 양촌(陽村) :
1600년대 都事(도사) 姜胤祖(강윤조)의 아들중 형 恰(흡)이 음달에 거주하고 동생 格(격)이 이곳에 거주하여 새로이 마을을 형성하였다 하여 새마로 불리었으나 지형적으로 양달에 위치하여 陽忖(양촌)이라하고 건너마을 형이 살던곳은 음지마로 불리우고 있으며 현재 진주강씨의 종택이 있다.
결문골 결망골 명동(明洞) 검문골 :
이 마을은 명호면 도촌리와 접경으로 물이 단아하고 들이 한건하여 乾明洞(건명동)이라 불리었으나 현재는 거문골로 불리우고 있으며 아래마을은 아래거문골 윗마을은 윗거문골로 갈라져 불리우며 주로 密陽朴氏(밀양박씨) 宜寧余氏(의령여씨)가 이루며 살고 있다. 이 마을 뒷산 형국이 거미 형국을 닮아 거미골이라고도 전해지며 지금의 거문골 정미소에서 10m 남향으로 내려가면 논 옆에 우물이 있었는데 극심한 가뭄이 닥쳐와도 식수에는 지장이 없을 정도로 물이 풍부하고 물맛이 좋아 이 마을의 근원이 되었으며 지금은 아랫 거문골로 이어지는 농로 확장으로 묻혀 버렸다.
척곡2리
중간들 :
小澗(소간)이 갈방산 북쪽에서 발원하여 마을을 안고 흘러 낙동강상에 들어가니춘양에서 10리, 방전에서 10리, 명호에서 10리 상하십리라 이를 두고 중간들이라 전하여지고 있다.
삼의실 삼위실 :
버드나무골 위쪽에 있는 마을로 다실권씨(권석충)의 묘, 전주이씨(이시황)의 묘, 진주강씨(강찬)의 묘소가 있는데 그 첫번째 묘소가 이 마을 뒷산에 있고 두번째 묘소가 장고개에 있고 마지막분의 묘소가 버드나무골에 있다하여 이 지명을 삼의실이라 불리어지고 있다 한다.
멋 질 :
옛날에 맛좋은 과실과 작은절이 있어 맛절로 부르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언어의 순화로 멋질로 부르고 있으며, 현재는 웃멋질과 아래멋질로 나뉘어 부르고 있다. 이 마을 앞에는 매년 음력 정월 14일에 마을 주민의 안녕과 내년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기 위하여 당제를 올릴 수 있도록 조그마한 당사와 100년 이상된 소나무 3-4그루가 있다. 이 마을의 중간들에서 동.남향 방향으로 약 1Km에 위치한 중산간 농촌지역으로 주재배 작목은 고추이며 주위 산들이 우렁차고 따뜻하여 송이 생산의 적지로 알려져 이곳 주민의 농가소득원으로 년간 50만원이상의 소득을 올리고 있다.
재챙이 자천(紫泉) :
삼의실에서 북서쪽의 마을로 소지리 수청거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재챙이라고 불렀으나 약 120년전 붉은 샘물이 솟는다 하여 자천이라고도 불리어 지고 있다. 이 마을은 계단식 농경지가 많고 주위 산들로 둘러쌓여 교통이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지역 특성을 살리는 "한약우" 단지를 조성하여 3-4개월령의 우량 한우 송아지에게 한약제인 당귀, 길경, 작약, 백출, 약쑥등을 사양기준에 따라 급여하는 기술을 후원 받아 일반 한우보다 더 맛있는 고기와 불포화지방산이 25%가 높은 고급육을 생산하고 있다.
소천1리
옥천 옥천터 :
소천에서 개울건너 북동쪽에 위치한 마을인데 조선 영조때 右副承旨(우부승지) 조덕린이 이곳에 와서 운곡천의 맑은 물을 보고 자신의 호를 玉川(옥천)이라고 하고 이것을 유래로 김환(金煥)이 마을을 개척하면서부터 마을 이름을 옥천이라 하였고 옛날 유교정신과 전통가옥인 古家(고가)가 잔존하고 있는 마을이다. 마을 뒤로는 玉川峰(옥천봉)이란 산이 있고 앞으로는 雲谷川(운곡천)이라는 大川(대천) 끼고 있다.
오미 오산리 (梧山里) :
옥천터 북서쪽에 있는 마을인데 조선 영조때 참판 權斗錐(권두추)가 동생에게 형의 자리를 양보하고 이곳으로와 정착하여 梧味(오미)라 하였다. 일설에 의하면 마을 뒷산이 금가마귀가 나래를 편 형상이어서 烏山(오산)으로 불렀으나 지금은 梧山(오산)으로 부르고 있다.
평지마 평밭 평촌(坪村) :
조래(拙川<졸천>)동쪽에 있는 마을인데 이곳의 지형이 비교적 평탄하다고 하여 평촌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명호면 삼동리와 경계를 이루는 지역으로 마을입구 어풍대가 위치하고 있었다.
소천2리
어은골 어은동 엉골 :
막골 남쪽에 있는 마을로서 조선 숙종 때 대 문장가인 李光庭(이광정)이 1939년에 이 마을에 정착하여 漁隱亭(어은정)을 짓고 그 정자 이름을 따서 어은동이라 하였으며 현재 정자는 없어지고 沈香台(심향태)라하여 정자가 섰던 자리만 남아있다.
일설에 의하면 마을 앞터가 고기가 숨은 모양과 같아서 漁隱洞(어은동)이라 불린다는 이야기도 있다.
사미정 :
소천리 남쪽에 있는 마을로 조선 영조 때 右副承旨(우부승지) 조덕인이 1727년 지은 정자 이름을 따서 四未亭(사미정)이라고 불렀으며 사미정 앞을 흐르는 운곡천과 널직한 반석, 절벽이 한 폭의 그림처럼 어울려 오가는 사람들의 휴식처가 되고 있다.
조래 졸천(拙川) :
조래 또는 졸천이라고도 하고 원래 안동부에 딸린 召羅部曲(소라부곡)이였으며. 일설에 소라왕이 도읍을 정했던 곳이라 전한다.
가무 감의 :
소천 남서쪽에 있는 마을인데 마을 뒤에 해발 539m의 감의봉 이름을 따서 감의라고 불리운다. 감의봉은 결혼 신부를 태우는 가마의 위쪽 촉다리와 같이 산의 형세를 하고있어 감의봉이라고도 한다.
눌산1리
눌미 눌매 눌산(訥山) :
옛날에는 눌뫼라고 불렀는데 눌미로 바꾸어 불리우고 있으며 감보게 사람에게 지배를 당하고 눌렸다하여 눌산이라는 설도 있으며 감보가 上訥(상눌) 거리늘미가下訥(하눌)이라고도 한다.
정수암(靜水岩) 정삼 :
눌미에서 동북쪽으로 300m 지점에 위치하며 옛날에 靜水庵(정수암)이라는 암자가 있었다 하여 정수암이라 하다 정삼이라 불리우고 있다.
멀곡 원곡(遠谷) :
눌미에서 남동쪽으로 산을 넘어 4km 정도 떨어진 낙동강 상류 강변 마을로 눌미에서 멀리 있다하여 멀골이라는 말도 있으며 멀골 뒷산에 月岩山(월암산)이며 그 아래 마을을 舞月谷(무월곡)이라 부르다가 멀골로 불렀다는 설도 있다. 낙동강변 맑은 물과 기암괴석, 소나무 숲으로 경관이 아름답다.
고눌미 골눌미 고눌산(古訥山) :
눌미에서 북서쪽으로 600m 떨어진 마을로 골이 졌다고 고눌미라 하며 마을앞 동구에 서낭당이 있는데 300여년 묵은 버드나무 1그루와 100년 정도 묵은 무프레나무 2그루가 있는데 전자의 나무는 수해등으로 고사된 상태에 있다. 이 마을에서는 농사의 풍년과 동네의 안녕을 기원하는 토속신앙으로 매년 음력 정월 14일에 마을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유사를 정하여 당고사를 지내고 있다. 또한 일설에 의하면 谷訥(곡눌)골에 위치해 있다고 곡눌이라고도 한다.
새터 신기(新基) :
눌산1리 들어오는 고개넘어 첫 마을로 감보개 마을에 사람이 자리를 잡고 살다가 차츰 이 고을로 새로운 터전을 잡았다하여 新基(신기)라 하였으며 우리말로 "새터"라고 한다. 이 마을 입구에 120년 전에 택호 김다말댁이라는 자가 심었다는 당수나무(소나무) 2그루가 있으며 매년 음력 정월 14일에 농사의 풍년과 마을 주민의 안녕을 기원하는 당제를 올리고 있다.
두천(杜川) 농천(聾川) 마그내 :
늘미에서 산을 넘어 남동쪽 2km의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옛날에는 聾川(농천)이라 했는데, 향기로운 물이 흐른다고 杜川(두천)이라 하였다. 그리고 ?마그내는 내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 한다.
갈골 (葛谷) :
멀골에서 낙동강 상류 400m지점에 위치하며 石門(석문)이 있고 葛馬飮水(갈마음수) 명지가 있었다는 설이 있지만 아직까지 찾을 수 없다.
눌산2리
부트네 부천(扶川) :
1.부용꽃이 피는 못이 있어 芙塘谷(부당곡)이라 한다. 池(지)
2.삼동과 동으로 가는 길목에서 양쪽 지역이 너무 높아 부축해준 부락이라서 扶川(부천)이라 하기도 한다. 山(산)
방고개 방현 (芳峴) :
고려시대 방고개촌이 있었으나 1782년 경주최씨 전성기에 최진사의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고개마루에서 백일장을 개최하였으며, 여기에 뽑힌 선비가 과거에 급제하고 돌아올 때 알리는 소리가 고개마루까지 들렸다하여 芳峴(방현)이라 한다.
마너무(梅山) :
1796년 陳(진)이라는 선비가 마을을 개척하였는데 마을산이 말등같이 생겼다하여 마너무라하고 입구 좌측에 당이 위치한다. 옛날에는 명호 삼동 사람들이 소천 현동을 가자면 3고개를 지나야 하는데 첫번째 고개가 장고개고 두번째 고개가 마너무 왼쪽의 문고개가 있고 세번째 고개가 마너무 오른쪽의 수리고개를 넘나들었다.
어지1리
녹동(鹿洞) 노룻골 :
어르말 남쪽에 있는 마을인데 고려시대 春陽縣(춘양현) 獐峴村(장현촌)에 속하였던 것을 1723년 祭訪(제방) 李濟兼(이제겸)이 마을을 개척하면서 華獐洞(화장동)을 주자의 白鹿洞天(백록동천)이란 문장을 따서 녹동으로 개칭하였고 지금은 그 후손인 眞城李氏(진성이씨) 들이 많이 살고 있다. 일설에 의하면 마을 북쪽에 산 양호와 남쪽에 산 음호가 서로 마주보고 있는 형세이고 범의 양식이 노루이므로 노루골이라 전해온다. 춘양에서 소천방면으로 36번 국도가 개설되기 전에는 마을 2km전방 암벽에 백록동천이란 암각이 새겨져 있었다하나 도로 개설로 손실되고 없다.
목비골 :
노룻골 북쪽에 위치한 골짜기 마을로서 임진왜란 때 柳宗介(류종개)장수가 왜군들이 목을 벤 골짜기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은 각 성씨 서너집이 산비탈 밭과 논농사로 생계를 꾸려가고 있다. 본 마을 앞에는 36번 국도가 지나가고 있으며 영동선을 연결하는 녹동역이 자리잡고 있어 눌산 지역과 소천리 주민들의 교통중심지로 이용되고 있으며 녹동역을 주위로 200여년 묵은 느티나무 2그루가 서있고 여름이면 인근농가에서 법전 복수박을 생산 판매할 수 있는 원두막 시설이 함께 어우러져 지나가는 여행객들의 쉼터로 활용되고 있다.
새마을 :
우르실 북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 어구에 세 갈래 길이 있고 또 마을 앞에 급경사로 된 좁은 川(천)이 흐른다하여 삼노루재 주변 골짜기에 화전민이 산재하여 있었으나, 해방후 빨치산이 양민을 학살하고 강제징용하여 국민을 불안하게 하여 정부에서 노루재 주변의 주민을 골짜기에 정착하도록 집 3채에 5가구 13명이 이곳에 이주해 새로 형성된 마을이라 하여 새마을로 지명되고 있다.
어지2리
어름말 어지(於旨) 어로동 어동(魚洞) :
1606년경 영양남씨가 개척하여 노모에게 항상 물고기를 잡아 봉양하였다 하여 어로동(魚老洞)으로 불리운다.
맛질 미곡리(味谷里) 마질리(馬叱里) :
어르말 서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서 조선시대 때 울진에서 춘양으로 통하는길목으로 주막이 있었는데 행인들로부터 음식맛이 좋다하여 맛질, 미곡(味谷)이라고 불리게 되었다한다.
소지리
소주골(小池) :
소주골(小池<소지>)이란 이름은 마을을 개척할 당시 연화지(蓮花池)란 작은못이 있어 소지(小池)라고도 한다. 소주골 입구에 들어서면 약 200년 묵은 소나무가 마을전체의 관문 역활을 하고 있으며 당초에는 버드나무와 함께 당제를 올리는 장소로 이용되었는데 40년 전에 이 마을 주민이 버드나무를 베어버리자 소년참상이 있었다하며 그 이후 당제에 불을 질러 없어지고 소나무만 남아있다.
수청거리 유교리 (酉橋里) :
수청거리는 100여년 전 나환자가 모여 살던 곳으로 당시 주변에 버드나무가 자연적으로 넘어져 다리를 놓았다고하여 柳橋(유교)라고 하였으나 지금은 酉橋(유교)로 통용되고 있으며 춘양에서 법전으로 오는 관문이라하여 수청거리라 한다. 현재 도로상에 늘어선 원두막이 있어 도로 이용자들을 상대로한 복수박 수입으로 농가소득 증대에 한 몫을 하고있는 곳 중에 한 지역이다. 또한, 현재 도로변 옆에 느티나무로 꾸며진 소공원이 있는데 마을주민과 도로통행인들의 쉼터로 제공되고 있다.
고누골 (古老里) :
마을 어귀에 북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서 고바우라는 동명으로 불리었다는설도 있고 130세된 노인이 살았다고 하여 고로리라고 했다고 하나 바위는 찾을 길이 없다. 이 마을 북쪽 방향으로 큰 산 밑에 박씨성, 지씨성을 가진자들이 가장먼저 자리잡았다고 하며 지금은 두 성씨는 전혀없고 단양지씨 묘소만 마을 북쪽에 남아있다. 이 마을 주민들은 매년 음력정월 14일에 주민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당제를 올리고 있다. 이 지역은 중산간 지대로 산이 울창하여 자연송이 자라기에 알맞은 조건을 갖추어 많은 양의 송이가 생산되어 농가의 부소득원으로 호당 100만원 이상의 소득을 올리고있다.
새마을 신촌(新村) 거릿말 :
새마을은 소주골거리에 위치한 마을로 1948년 새로 생겼다고 하여 새마을 또는 신촌이라고도 하며 소주골로 들어가는 입구에 위치하고 있어 거릿마을이라고도 한다. 이 마을은 여름철이며 36번 국도를 이용하는 여행객들에게 인근 농가에서 생산한 법전 "복수박"을 판매 및 자연송이 채취로 농가 소득을 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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