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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인가? 2
우리는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라는 예수의 말씀을 깊이 생각해 보는 과정에서 계명에 따라 우리가 사랑해야 할 이웃은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이 세 부류의 이웃은 서로 다른 이웃이기에, 또 사랑해야 할 당사자인 나 자신과 세 가지 방식으로 관계되어 있기에, 그들을 사랑하는 것 역시 세 가지 의미를 갖는 사랑일 수밖에 없다.
이 세 가지 사랑은 어떻게 다르며 그 결과는 또 각각 어떻게 나타나게 될까?
우리는 이 세 가지 사랑을 하나씩 검토해볼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하나씩 검토한다고 해서 ‘상상적인 것’(상상계)과 ‘상징적인 것’(상징계) 그리고 실재가 각각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이 세 차원은 보로메오의 띠처럼 서로가 서로를 결속하는 방식으로 연결되어 인간의 정신이라는 독특한 공간을 구성한다. 셋 중 하나가 풀리면 나머지 둘 역시 해체된다. 그러므로 이 세차원은 단계가 아니다.
먼저 ‘상상적인’ 이웃을 사랑하는 것에 대하여 생각해보자. 우리는 ‘상상적인’ 이웃을 세 종류로 분류해 보았다. 나보다 ‘결여된’ 사람, 나와 비슷한 ‘동료 인간’ 그리고 구체적인 인간이지만 나와 무관하여 나를 투사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이를 라캉주의적인 개념으로 표현하면 각각 상징적인 상상계, 상상적인 상상계 그리고 실재적인 상상계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상상계와 상징계 그리고 실재가 각각 상상적인 차원과 상징적인 차원 그리고 실재의 차원을 갖는다는 것을 암시한다. 예를 들어 지젝은 실재를 이러한 이 세 차원으로 구분하여 기독교의 ‘삼위일체’라는 개념에 대한 설명을 시도하기도 한다. 주제에서 벗어나지만 라캉주의가 기독교를 이해하는 방식의 맛을 보기 위해 이를 검토해 보자.
만일 라캉이 주장하듯이 하느님들이 실재(The Real)라면, 기독교의 삼위일체 역시 이러한 실재의 삼위일체라는 렌즈를 통하여 독해되어야 한다: 성부는 폭력적인 원초적 사물이라는 “실재적 실재”이며, 성자는 순수한 외양의 “상상적 실재”, 즉 그의 참혹한 육신을 통해서 숭고가 빛을 발하는 “무에 가까운”(almost nothing) 존재이고, 성령은 믿는 이들의 공동체라는 “상징적 실재”이다. (On Belief, 2001, 82-3.)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언술이지만 간단히 언급해보자. 성부 하느님은 ‘폭력적인 원초적 사물’이라는 말은 이사야 예언자의 하느님 체험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사야는 성전에서 하느님의 임재를 경험하면서 이렇게 부르짖는다. “재앙이 나에게 닥치겠구나! 이제 나는 죽게 되었구나!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인데, 입술이 부정한 백성 가운데 살고 있으면서, 왕이신 만군의 주님을 만나 뵙다니!”(6: 5) 하느님은 한 인간의 죽음의 공포 속에서 경험된다. 그 이유는 그의 임재가 인간이 스스로 믿고 의지하고 있는 존재의 지반 그 자체를 허물어뜨리는 것으로 체험되기 때문이다. 기존의 언어는 하느님의 현현 앞에서 완전히 무기력해진다. 이사야가 예언자가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경험, 즉 기존의 담론체계가 산산이 흩어져버려 전혀 새로운 언어를 말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체험 때문이다. 성부 하느님이 폭력적인 이유는 그가 담론으로 구축된 기존의 세계를 가차 없이 해체하기 때문이며, 그가 원초적인 이유는 세계에 관해 전혀 다른 언어를 강요한다는 점 때문이다. 그리고 하느님은 기존의 언어로는 사물 혹은 물 자체이다. 다시 말해서 기존의 언어가 그 대상에 접근하려는 노력을 언제나 실패로 되돌리는 존재이다.
성자 하느님이 ‘무에 가까운’ 상상적인 실재라는 말은 좀 더 심오하다. 기독교의 혁명성은 십자가에 달린 참혹한 인간에게서 하느님을 발견한다는 점이다. 십자가에 달린 인간은 로마체제에 의해 ‘비인간’으로 선언된 존재이다. 그는 존재해서는 안 되는, 존재하지 않는 인간으로서 죽임을 당한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십자가에 달린 자에서 하느님을 보는가? 이것이 상상적인 차원의 신비이다. 엄밀하게 말해서 기독교인들은 환영을 보는 것이다. 그들은 참혹한 인간을 하느님으로 오해하고 있다. 그는 인간일 뿐, 그것도 비참한 인간일 뿐 하느님이 아니다. 그러나 신앙이라는 환영 속에서 그는 하느님이다. 다시 말해서 기독교인들은 어느 순간에 십자가에 달린 비참한 인간을 하느님으로 보겠다고 선택한 자들이다. 그래서 어떤 일이 발생하는가? 당대의 신 로마황제가 그 광휘를 박탈당하고 한갓 인간으로 보이는 시야가 열린다. 지젝은 이를 실재의 환영(illusion of the real)이라고 표현한다. 그것은 현실을 무너뜨리는 실재적 힘을 가진 환영이다.
마지막으로 성령은 “믿는 이들의 공동체라는 상징적 실재”이다. 신자들의 공동체는 교회이다. 교회 공동체는 외부자의 시선에서 볼 때 ‘대체 왜 저 사람들이 저렇게 모이는 지’를 알 수 없는 집단이다. ‘저렇게 모여서 하는 일들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의문스러운 집단들이다. 그들이 하는 일이라곤 현실적으로 ‘쓰 잘 데기 없는’ 짓들일 뿐이다. 성령은 이러한 비현실적 행위의 공간으로서 교회를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힘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교회는 주어진 사회에 자신의 유용성을 증명하기 위해 애를 쓴다. 그들은 하느님의 시선이 아니라 주어진 사회의 헤게모니 앞에서 묘기를 부린다. 이것이 현대 기독교의 비극이다.
다시 본론으로 되돌아가자.
세 종류의 상상적인 이웃들 중에서 나와 무관한 사람을 논외로 한다면, 나보다 결여된 이웃과 나와 비슷한 이웃이 남는다. 우리는 나와 비슷한 이웃에게 자연스럽게 자신을 투사하게 된다. 그들은 나의 ‘거울’이다. 여기에서 라캉의 ‘거울단계’이론을 언급하지 않고 넘어갈 수는 없을 것이다. ‘거울’은 매우 예술적인 단어이다.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는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누이를 노래한다. 바울은 ‘사랑장’이라고 알려진 유명한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12)고 주장한다. 이 구절은 잉그마르 베리만의 영화 <거울을 통해 어렴풋이>(1961)의 주제가 되었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는 영화 <거울>(1975)에서 과거와 현재라는 전혀 다른 시간을 서로의 거울 이미지처럼 묘사하고 있다. 동화 『백설공주』에서 악한 여왕의 거울은 진리의 주체로 등장한다. 거울이 그처럼 예술적인 은유로 사용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거울이 인간 주체의 공간을 구성하는 하나의 축인 ‘상상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거울 속에 비친 이미지가 ‘나’라고 오해한다. 왜 오해일까? 거울은 좌우가 바뀌어 있을 뿐 아니라 2차원의 공간이며 나의 앞모습만을 보인다. 나는 어느 미술전시회에서 충격적인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전시회장의 중앙에는 마치 간이화장실 같은 설치물이 있었다. 여기에 속을 들여다보기 쉽게 동그란 구멍이 뚫려있었다. 자연스럽게 화장실을 훔쳐보는 자세로 구멍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안에는 컴컴한 공간 속에 작은 모니터가 하나 있었다. 모니터 화면을 보니 어떤 중년의 남자가 화장실을 훔쳐보는 뒷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나는 아주 잠시 동안 그 모니터 화면 속의 남자가 바로 나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나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비루하고 누추해보였기 때문이다.
라캉의 ‘거울단계’는 그가 상상계와 상징계라는 개념을 구체화기 이전에 제안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거울단계’에서 이 두 차원이 상호작용하여 발생하는 정신의 역학을 이해할 수 있다. 라캉은 발드윈이라는 심리학자가 6-18개월의 아이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자극하고 환호성으로 반응한다고 주장한 점에 착안하여 자신의 이론을 전개한다. 아이는 거울을 통해서 최초로 자신을 경험하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아이가 자신으로 경험하는 이미지가 그의 외부에 있는 거울상이라는 점이다. 사실 이 시기의 아이는 스스로 몸을 가누지 못하며 자신의 신체에 대한 총체적인 감각을 갖지 못한다. 아이는 자신과 외부세계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유아는 수많은 감각들로 자극받기는 하지만 그것들이 자신에게서 오는지 아니면 자신 밖의 외부에서 오는지를 구별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유아에게 장기에서 오는 감각, 손이나 다리 그 밖의 신체의 여러 기관에서 오는 자극들은 결코 통일된 방식으로 경험되지 않을 것이다. 그 의미는 무엇인가? 이 시기의 유아는 자신의 신체에 대한 통일된 관념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이다. 자신과 외부에 대한 구별 자체가 없기 때문에 예를 들어 발에서 오는 감각을 느꼈다고 하더라도 그 감각의 출처가 자기 몸인지 아니면 외부의 어떤 것인지를 구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기 혹은 자아의식이 없는 것이다. 이것이 문자 그대로 ‘몰아일체’(沒我一體)나 무아(無我)의 상태가 아닐까?
이러한 상태의 유아에게 거울상은 자신이외의 모든 것과 뚜렷이 구별되는 자율적인 통일된 자아상을 제시한다. 그야말로 자아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하지만 이러한 자아상은 실제의 그 자신이 아닌바 자신에 대한 선취 혹은 이상화의 이미지일 뿐이다. 그것은 외부의 이미지이다. 거울 이미지가 분열된 상태의 어떤 존재를 하나로 통일된 존재로 구성한다는 의미에서 라캉은 거울이미지가 ‘정형외과적 기능’을 한다고 말한다. 유아는 이러한 정형외과적 과정을 통해 통합된 자신의 이미지에 만족한다. 이러한 만족은 오해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즉 욕망의 만족은 타자를 자신으로 오해하는 또는 상상하는 상상계 안에서만 가능하다.
‘거울단계’에서 라캉이 주목하는 또 하나의 양상은 아이가 거울 속의 이미지를 보며 환호성을 지르는 순간 제삼자를 바라본다는 점이다. 즉 아이는 제삼자의 인정을 요구한다. “저것을 나라고 생각해도 되나요?” 아이를 안고 있는 어머니나 아버지의 흐뭇한 미소, 이것이 없다면 아이는 확신하지 못하고 자아에 대한 불안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상상적인 만족은 상징계의 인정 안에서만 가능하다.
나와 비슷한 이웃은 나의 거울이미지라고 할 때, 우리가 그들에게서 어떤 공통성을 발견하고 친밀함이나 경쟁심을 느끼는 이유는 그들에게서 스스로 만족하는 자신의 이미지를 발견하기가 용이하기 때문이다.
오늘의 참고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또한 너희가 너희 형제자매들에게만 인사를 하면서 지내면, 남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냐? 이방 사람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마태 5:47-48)라고 말씀하는데, 이는 정확히 상상적인 사랑에 대한 언급이라고 할 수 있다. 프로이트는 이러한 사랑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만일 그가 중요한 점에서 나와 비슷하여, 내가 그 안에서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있다면, 그는 사랑할만한 가치가 있다.
프로이트의 말은 상상적인 이웃을 사랑하는 일은 결국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이 ‘자기’라는 말은 ‘자아’라는 말과 동일한 의미이다. 한 때 연인 사이에서 서로를 지칭하는 용어로 ‘자기’라는 말을 쓰는 것이 유행이었던 적이 있었다. “자기는 자기가 사랑하는 자기가 자기라고 생각해 아니면 자기의 자기라고 생각해?” 이런 말장난은 연인 사이의 사랑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연인간의 사랑은 결국 자기애라는 의미이다. 또 그것이 자기애이기 때문에 언제나 사랑하는 대상의 정체가 불분명한 상태에 대한 불안을 보여주고 있다. 결혼하고 3년이 지나면 신혼의 달콤함은 끝이라고 한다. 이를 생물학적으로 설명하는 사람이 적지 않지만, 평생을 해로하는 동물들도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동물들도 권태기가 있을까? 그보다는 ‘욕망’의 문제로 설명하는 것이 훨씬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3년은 비교적 제정신을 가진 사람들에게 ‘자기가 자기’라는 오해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는 한계 지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시점부터 부부간의 사랑은 성격을 달리해야 할 것이다.
예수는 이러한 ‘상상적인 이웃’에 대한 사랑, 곧 자기애를 금하지 않는다. 또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고 부정하지도 않는다. 이러한 사랑에 대한 예수의 입장은 그것이 하도 당연하고 또 쉬우며 게다가 즐겁기까지 한 것이어서 신앙적으로 왈가왈부할 가치를 갖는 사랑은 아니라는 것으로 보인다. 기독교 신앙에서 신앙의 문제는 하느님 앞에 선 참인간의 문제 그 자체이므로, 신앙적 가치를 갖지 않는 사랑이란 참인간의 문제와는 무관한 사랑이라는 점은 유의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는 나와 비슷한 타자에 대한 사랑에 대해 말해왔지만, 나보다 결여된 이웃에 대한 사랑은 어떤 것일까? 예수는 이러한 상상적인 이웃에 대한 사랑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가졌을까? 나보다 결여된 이웃에 대한 사랑은 나와 비슷한 이웃에 대한 사랑보다는 그렇게 자연스럽고 용이하지는 않을 것이다. 따라서 당연히 노력이 필요하다.
조용필이 ‘한오백년’이라는 노래에서 단장의 절규로 외치는 노랫말을 기억해보자. “한 많은 이 세상 냉정한 세상, 동정심 없어서 나는 못 살겠네.” 동정심은 영어로 ‘sympathy’이다. ‘sym' ‘같은’ ‘공동의’, 'pathos' ‘마음’ ‘감정’이라는 뜻이다. 즉 나와 결여된 이웃과의 정서적인 교감, 나아가 사랑하는 관계에 이르기 위해서는 동정심이라는 좀 더 특수한 감정이 필요하다. 동정심은 나와 비슷하지 않은 존재를 나와 비슷한 존재로 보는 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나보다 결여된 이웃에 대한 사랑 역시 동일성의 감각이 관건이다. 물론 이러한 감각을 갖기 위해서는 일정한 정도의 교양이 요구된다. 그것은 물론 ‘만인은 평등하다’는 이념을 감정적인 차원까지 소화할 수 있는 수준의 교양이다. ‘결여된’ 이웃에 대한 사랑은 일정한 수준의 교양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상상적인 이웃’에 대한 사랑과 ‘대타자로서의 이웃’에 대한 사랑 사이에 걸쳐있는 사랑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상징계적 수준의 존재에게 가능한 사랑이다.
민중신학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해석하는 초점을 선한 사마리아 사람에서 강도만난 사람 사람에게 돌린다. 서남동 선생은 강도만난 사람이 예수이며 우리가 사랑해야 할 이웃이라고 봄으로써, 7,80년대 한국 기독교인의 참여 윤리를 강조하였다. 기독교인이라면 무릇 예수를 사랑하듯이 고통 받는 이웃인 민중의 상황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곧 신앙인이 사랑해야 할 대상을 나와 비슷한 이웃에서 결여된 이웃에게 돌리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서남동 선생의 성서 읽기는 착한 사람인 사마리아 사람과 동일시하는 읽기보다 좀 더 도덕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지난 시간에 ‘결여된 이웃’에 대한 사랑이 그리 어렵지 않은 것은 자기애적인 쾌락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즉 약자에 대한 사랑은 자신을 희생자로,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타인을 위해 뭔가 희생할 것이 있는 ‘가진 자’로 위치지어 준다. 그러므로 이러한 민중신학적 해석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 관한 기독교적 해석의 수준에 이르지는 못하였다고 주장해야 한다. 여기에는 자신의 뒷모습을 인정하지 못하는 오만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는 7,80년 대 민중신학의 한계일 뿐 아니라 7,80년대 한국 사회운동 전반의 한계이기도 하였다. 이에 관해서는 ‘실재로서의 이웃’에 대한 사랑에 대해 말할 때 충분히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을 것이다.
‘상상적인 이웃’에 대한 사랑은 자기애, 곧 자아에 대한 사랑이라고 하였다. 그렇게 본다면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도 이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달리 말한다면,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도 남이라는 것이다. 결국 인간이 자신이라고 여기는 어떤 존재는 사실 자신이 아니므로 인간의 자기 인식은 언제나 오인(誤認)이라는 말이다. 라캉에 따르면 우리는 나를 나라고 잘못 알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나를 가장하는 나에게 속고 있다. 우리는 크게 실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왜 이러한 태도, 곧 ‘상상적인 이웃’에 대한 사랑을 금하지 않았을까? 이는 예수의 실수가 아닐까? 물론 예수는 이를 비판적인 뉘앙스를 가지고 말씀한다. “세리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이방 사람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이 말씀은 곧 그런 사랑은 개나 소나 다 하는 사랑이라는 말씀이다. 하지만 거기까지이다. 예수는 이런 사랑이라도 결코 금하지 않는다. 사실 자기애는 인간 정신에 구성적인 요소이기 때문에 금한다고 해서 결코 사라질 수 없다.
여기에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역설이 있다. 만약 (내가) 내가 아닌 나를 나라고 오해하지 않는다면 ‘나’라는 존재는 존재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비록 내가 아닐지라도 나를 비추는 것처럼 보이는 어떤 이미지와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는다면, 나의 의식은 근거지를 잃고 사라지고 말 것이다. 내가 누군가를 나라고 오인하기 때문에 나는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불가피한 모순에 대해 라캉은 대안 없는 선택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선택은 칼을 들이대며 “죽을래 돈 내놓을래?”라며 선택 아닌 선택을 강요하는 강도 앞에서 우리가 행해야 하는 어쩔 수 없는 선택과 같은 것이다. 죽는다면 돈도 없다. 하지만 돈을 빼앗긴다면 목숨은 건질 수 있다. 모든 인간은 자아의 역사 초기에 이와 같이 대책없는 강도를 만나는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다. 아니 바로 이러한 트라우마 때문에 인간은 비로소 자아로서 탄생한다. 이러한 비유는 내가 나로 존재하기 위해서 무엇인가 빼앗긴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일단 그것을 진정한 나, 존재로서의 나라고 지칭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참된 것을 빼앗기고 헛것을 얻은 것이다. 하지만 일단 그렇다고 생각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비극적인가? 인간의 운명이 억울한가? 억울할 것 없다. 인간 이외의 존재자들은 아무 것도 빼앗기지 않는다. 그것들은 아무 것도 빼앗기지 않음으로써 자기의식을 갖지 못한다. 즉 진정한 자기로 존재하되 자기의식이 없는 것이다. 그들은 불교의 용어로 “무념무상”의 해탈의 경지에 있다. 하지만 이것이야 말로 모든 것을 빼앗긴 선택이 아닌가? 자아가 없으니 무언가를 가졌다고 기뻐할 만한 주체도 없다. “공즉시색, 색즉시공”의 진리는 “무념무상” 그 자체에서는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즉 색이 있어야 공도 의미가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비록 미망의 세계이지만, 구체적인 현상계가 있어야 참과 진리의 세계가 의미를 갖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도 “무념무상”은 도달해야 할 지점이지 출발점이 아니다.
따라서 라캉은 “속지 않는 자는 잘못하는 것이다”고 말한다. 만일 우리가 속지 않는다면 의식을 갖는 자로 존재할 수 없다. 오인하지 않으면 ‘나’도 없으며 따라서 ‘주체’의 가능성도 없다. 우리는 비록 분열되고 깨진 존재이나 일단 자기의식을 갖는 자로 존재해야 하였다. 그래야 자신에 관한 기만을 깨뜨리고 진리를 향한 여정을 시작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기만을 깨는 진리를 향한 여정, 이것이 인간의 삶이다. 오인을 통해 비로소 모든 것이 존재하기 시작한다. 거기에는 고통과 슬픔과 절망과 두려움도 있지만, 온갖 아름다움과 기쁨과 사랑과 우리가 꿈꾸는 그 모든 것들이 여기에 있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속음으로써,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속기를 선택함으로써 우리에게 열린 것이다.
그러므로 ‘상상적인 이웃’, 곧 자기 이미지에 대한 사랑은 필연적이다. 우리는 나 아닌 나를 나로 오인하고 사랑해야 나로서 존재할 수 있다. 다만 거기에 머문다면 우리 삶은 한갓 미망일 따름이다.
인간은 단순한 생물 이상의 존재가 되고자 헛것을 자기 자신으로 사랑하는 모험을 감행하였다. 우리는 이러한 모험을 최초의 창조, 곧 “무로부터의 창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근거도 없이 출현하였다. ‘상상적인 이웃’에 대한 사랑은 생물학적 존재에서 인간적인 존재로의 차원 이동을 위한 동력이었다. 하지만 거기에 붙박여 있으면 안 된다. 이 세계는 미망의 세계, 사랑과 증오가 널뛰기 하는 폭력과 정념만으로 가득 찬 세계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삶의 길과 목표 그리고 목적을 지시하는 진리를 찾을 수 없다. 이제 다른 차원으로의 또 한 번의 비약을 위해 ‘상상적인 이웃’에 대한 사랑 즉 ‘자기 사랑’을 가벼이 여길 줄 알아야 한다. 우리에게 열릴 또 하나의 새로운 세계는 기왕에 우리에게 열린 이 세계를 철저하게 부정하는 세계는 아니다. 우리는 이 세계에 어떤 질서를 부여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만든 질서에 예속되어 다시 한 번 더 좌절할 것이다. 이 세계에 성서적인 이름을 붙인다면 바로 ‘율법의 세계’가 될 것이다. 우리는 이 세계에서 ‘자아 이상’을 사랑할 것이며, 이러한 이상에 대한 사랑은 내가 극복하고자하는 이 세계를 다시 강화하는 이율배반의 과정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몸서리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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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수요일에 올려야 할 글을 목요일에 그것도 응교보다 늦게 올렸네요. 써 놓은 글이지만 수정보완하는 일도 장난은 아니네요.
혁현아! 수고가 많아..너의 부부의 글을 매주 접하는 행복을 주어 늘 고맙다..
정목사님, 어제 누군가 이 글을 읽고 평생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하느님'이라는 존재에 대해, '교회'라는 실체에 대해 새롭게 생각하게 되었다는 말을 제게 전하더군요. 정혁현 목사의 전도 방식은 아주 교묘하다고요. 무서운 목사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