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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일본 불교사
8. 일본 선종사 개관槪觀
불교 전래 초기 승려들은 국가에 속한 관승官僧의 신분으로 민간을 위한 포교활동은 할 수 없었다. 그러나 12세기 말이 되면 사적으로 득도한 ‘사도승’, 관승으로부터 이탈한 ‘둔세승’ 등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개인 구제에 나서는 둔세승들은 수행과 이타행利他行, 두 개를 동시에 실천하기위해 관승의 세계로부터 이탈을 감행하였던 것이다. 이들은 재가신자들까지를 포함한 둔세승 교단을 형성하였는데, 관승이 백의白衣를 입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흑의黑衣를 입었다.
그래서 이들 둘을 ‘흑백양주黑白兩住’라고 부르기도 하였는데, 나라奈良 고후쿠지[興福寺], 도다이지[東大寺] 등 다수의 흑백양주 사원이 등장하였다. 이들이 가마쿠라 신불교의 성립을 촉발觸發한 장본인들이다. 이 시기에 가장 주목할 것은 선불교가 중국으로부터 유입되어 새로운 바람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선불교는 일본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며 가마쿠라와 무로마치 시대를 통하여 급성장, 정토교와 더불어 오늘날 일본 불교의 주류를 차지하고 있다.
1) 선종禪宗의 전래傳來
선종禪宗은 1130년경이 되어서야 널리 알려졌지만, 이 보다 먼저 나라奈良나 헤이안[平安] 시대에도 교종과 더불어 이미 일본에 들어와 있었다. 먼저 당에 유학한 백제계 도래인 출신 도쇼[道昭, 629~700]는 653년경에 중국으로 건너가, 법상종法相宗의 기초를 닦은 현장玄藏의 문하에서 8년 동안 수학하고, 661년 귀국하여 유식학唯識學을 강의하면서도 좌선坐禪에 진력盡力하였다.
간고지[元興寺] 내에 선원禪院을 세워 제자들을 가르쳤으며, 전국을 다니며 우물을 파고 다리를 놓는 등 사회사업에도 참여하였다. 그가 죽은 후 그의 유언에 따라 화장火葬되었는데, 이는 일본에 있어 인도불교의 풍습을 따른 최초의 사건이었다.
사이초[最澄, 767~822]는 천태종天台宗과 함께 우두법융(牛頭法融, 594~657)의 우두선牛頭禪도 들여왔다. 그러나 이 무렵 선종은 이른바 천태종 천태지의(天台智顗, 538~597)의 지관좌선법止觀坐禪法으로, 주력과 염불, 그리고 좌선坐禪이 함께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선종으로써 독립된 형태의 수행은 아니었다.
한편 중국 선승의 도래渡來도 이루어져 736년 도선(道璿, 702~760)이 인도의 승려 보디세나[菩提僊那]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와 대안사大安寺와 서당원西唐院에서 계율을 강의하고, 처음으로 신수의 북종선北宗禪을 전하였다. 마조도일의 법을 이은 염관제안(塩官齊安, ?~842)의 제자 안국의공安國義空도 승화承和 6년 839년 일본에 건너와 남종선南宗禪을 전한다. 그 뒤 천태종天台宗 승려 각아(覺阿, 1143~1182)가 송에 가서 임제종臨濟宗 양기파楊岐派의 불해혜원(佛海慧遠, 1103~1176)의 법을 전해받고 돌아와 예산사叡山寺에 머물며 선도禪道를 널리 전한다.
다이니치 노닌[大日能忍, ?~1196]은 스승에게 인가를 받지 않고 선법을 가르쳤는데, 사람들이 이를 인정하지 않자 자신의 제자를 송에 보내 서면으로 인가를 받는다. 노닌이 스스로 선을 수행하여 깨달은 경지를 임제종 대혜종고(大慧宗杲, 1089∼1163)의 제자 육왕산育王山 졸암덕광(拙菴德光, 1121–1203)에게 보냈고, 덕광德光이 이를 보고 인정한 것이다. 노닌은 이 사건으로 유명해져 일본달마종日本達磨宗을 개창開創하고 개조開祖가 되었다.
大日能忍은 본래 平氏 景淸의 숙부로 선에 대해 관심이 많아 攝州 水田縣에 三寶寺를 세우고 선법을 가르쳤다. 이미 이때는 가마꾸라 초기였으므로 입송자들에 의해 선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그가 입송하지 않고도 선을 스스로 행하였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스승도 없이 선을 가르치는데 대해서 비난하는 자들이 많았으므로 전통성을 인정받기 위해 1189년에 제자인 勝辨 ․ 鍊中을 송나라 育王山의 拙菴德光에게 보냈다. 그가 깨달은 경지의 게송을 보고 德光은 그의 법맥인 臨濟宗 大慧派의 법을 전하는 인가장과 법의 · 道號 ․ 自讚의 달마상을 보냈다. 이로 인해 그의 이름은 널리 알려졌으며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한보광韓普光 저著,『일본선日本禪의 역사歷史』 p. 75.)
이때는 아직 일본 불교계가 선禪을 잘 이해하지 못하던 시기였다. 교리에 의존하지 않는 선불교를 이해하려고 해도 교학수준도 높아져야하지만 불교사상이 무르익을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헤이안 시대 말기에도 송宋과의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중국으로부터 선종이 전해져 새바람을 불러일으키지만 본격적인 선종의 유입은 가마쿠라시대에나 이루어졌다. 다만 가마쿠라 신불교의 성립은 이들 고대 불교인의 사상적 배경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2) 임제종臨濟宗의 전래
일본 임제종臨濟宗의 개산조開山祖인 묘오앙 에이사이[明菴榮西, 1141~1215]는 히에이산[比叡山]에서 천태학을 배운 후 1168년 중국 송나라로 건너가 천태산天台山과 아육왕산阿育王山을 순례한 뒤 돌아온다. 그리고 1188년 인도를 순례하기 위해 다시 송에 가지만 국교 문제로 뜻을 이루지는 못하고, 천태산 만년사萬年寺에서 임제종 황룡파黃龍派 8대 적손嫡孫인 허암회창(虛庵懷敞, 1125~1195)의 법을 전수 받는다. 이때는 우리나라에서 신라 구산선문이 쇠퇴한 뒤 보조국사가 정혜쌍수의 선풍을 회복하는 시기로 임제종의 직접적인 접촉은 우리보다 빨랐다고 할 수 있다.
명암영서明菴榮西는 1191년 인가증을 받고 돌아와 가마쿠라에 쥬후쿠지[壽福寺]와 교토에 겐닌지[建仁寺]를 세우고 일본 최초의 임제종 교단을 수립, 임제선臨濟禪의 개조開祖가 된다. 영서는 처음 교토에서 선원청규를 실시하는 등 임제선臨濟禪을 알리려고 노력하였으나, 천태종의 저지운동에 부딪혀 가마쿠라로 쫓겨 오게 된 것이다. 당시 가마쿠라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 1147~1199]가 중앙귀족과 지방무사의 지지를 업고 정권을 장악, 1185년 가마쿠라에 막부정권을 수립한 뒤였다.
황실 중심의 천태종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던 가마쿠라 막부는 새로운 불교인 선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 임제선의 자기단련과 간결한 교리체계가 행동적인 무사계급에게 인기가 있었던 것은, 불립문자를 주장하는 선종의 가르침과 무사도가 상통하는 점도 있었고, 중앙귀족 문화에 열등감을 느끼고 있던 무사들이 선과 같이 들어온 차 문화 등에도 열광하였기 때문이었다.
영서는 원오극근圓悟克勤이 지은『벽암록碧巖錄』과 함께 원오극근 선사의 친필 ‘다선일미茶禪一味’의 묵적墨跡까지 함께 가지고 돌아와 다도茶道를 전파하였다. 장군 미나모토노 사네토모가 이틀간 취하여 깨어나지 못하자 차를 권하였다고 하는데, 1191년에는 일본의 ‘다경茶經’이라 할 수 있는『끽다양생기喫茶養生記』를 저술하여 일본 다도의 비조鼻祖로 받들어 지고 있다.
원오극근(圓悟克勤, 1063~1135) 선사는 20여 년간 협산사 주지로 있으면서 차와 선禪의 관계에 몰두하여 마침내 ‘다선일미茶禪一味’의 참뜻을 깨닫고는 그 자리에서 일필휘지하여 ‘다선일미’라는 네 글자를 썼다고 한다. 이로 인해 중국의 선풍은 크게 일어나게 되었다. 이 때 원오선사의 문하에 촉망받는 제자가 두 명 있었는데 바로 대혜종고(大慧宗杲, 1089~1163)선사와 호구소륭(虎丘紹隆, 1077~1136) 선사였다. 이 두 사람은 모두 어려서 출가하여 협산사에서 원오를 20여년이나 스승으로 모시며 정진하였다. 그 뒤, 남송南宋 소흥紹興 7년(1137년) 종고 선사는 승상 장준張浚의 추천으로 황명을 받들어 항주 여항의 경산사徑山寺의 주지가 되었으며 아울러 ‘다선일미’의 선풍을 크게 일으키게 된다. 종고선사가 경산사의 주지로 온 이듬해 여름에는 설법을 듣고자 참가하는 승속僧俗이 무려 1,700여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로 인해 수많은 승려와 신도들을 위한 각종의 다연茶宴이 베풀어지고, 이에 따라 ‘선원청규禪院淸規’를 바탕으로 한 각종의 사찰다례의 의식 등이 생겨나게 되었으며, 이로써 바로 그 유명한 <경산다연徑山茶宴>이 탄생하게 되었다. (다선일미(茶禪一味 · Same sense in tea & buddhism)는 선미禪味와 차미茶味는 동일한 종류의 흥취임을 가리킨다. 본래 송대 원오극근이 선수행을 하던 일본인 제자에게 써준 네 글자로 이루어진 진결로, 일본 나라奈良현의 다이도쿠지에 보관되었으며, 나중에 불교계와 민간에 널리 유행하는 말이 되었다. (중국차엽대사전, 중국 경공업출판사 (2001년 5월), 박정진의「다선일미 묵적은 한중일의 미스터리」에서 인용))
선은 또 차와 함께 일본인들의 기호에 맞아 떨어져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면서 건축과 회화, 시문詩文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한편 일본은 과거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지식이 풍부한 승려가 없으면 외교문서조차 작성할 수가 없어 막부와 자연스레 파트너십이 형성되었다.
선승禪僧은 종교적인 역할뿐 아니라 외국과의 교섭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여, 외교관과 흡사하였다는 점에도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선사禪寺에는 중국인 승려가 많아, 중국어에 능숙할 수 있었던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마츠오 겐지松尾剛次 지음, 김호성金浩星 옮김,『인물로 보는 일본 불교사』 p. 130.)
한편 당시 일본은 중국에 갖다오지 않으면 인정받지 못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영서의 제자 엔니 벤엔[圓爾辨圓, 1202~1280]도 입송入宋하여 임제종 양기파인 무준사범(無準師範, ?~1249)의 법을 받고 1241년 귀국한다. 그는 순수한 간화선보다는 염불, 참선, 천태, 밀교 등 겸수선兼修禪을 가르쳤다. 이는 아직 순수선純粹禪을 받아들일 토양이 부족한 당시 상황을 대변하고 있다고 하겠다. 변원辨圓은 일본 최초로 성일국사聖一國師라는 국사호를 받았으며 임제선이 번성하게 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일본에 순수한 임제선을 전파한 이는 1246년 일본에 건너온 중국 송宋의 선승 란케이 도류[蘭溪道隆, 1213~1278]다. 난계도륭蘭溪道隆에 이어 무가쿠 소겐[無學祖元, 1226~1286], 잇산 이치네이[一山一寧, 1247~1317] 등도 가마쿠라와 교토의 오산五山을 중심으로 활약하면서 선을 전한다. 특히 원元의 13차 사절使節로 1299년 일본에 온 보타선사補陀禅寺의 승려 일산일녕一山一寧은 무소오 소세끼[夢窓疎石, 1275~1351]의 스승으로 ‘오산문학五山文學’이 그의 문하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신치 가쿠신[心地覺心, 1207~1298]도 보살계를 받고 1249년 입송하는데, 무준사범無準師範에게 보내는 변원辨圓의 소개장을 가지고 갔으나 무준사범은 이미 입적한 후여서 그의 제자 치절도충(癡絶道沖, 1169~1250)에게 입문하여 선을 배운다. 선지식을 두루 참알하던 중, 1253년 무문혜개(無門慧開, 1183~1260)를 만나 문답하다가 대오하게 되는데(혜개는 당시 71세). 혜개로부터 인가를 받고 귀국길에 1228년 간행된 선종서『무문관無門關』을 들고 들어와 겸수선의 법등파法燈派를 일으킨다. 앞서 언급하였지만 이때는 이미『무문관』과 더불어 점검체계 또한 일부 일본에 전해졌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한편 변원辨圓의 법제자인 대명국사大明國師 무칸 후몬[無關普門, 1212~1291]은 남선사南禪寺를 개창하여 임제선의 위상을 한층 드높인다. 당시는 천태종에 영향으로 교토에 선찰을 건립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황실과 막부의 후원을 받으며 선종 사찰이 건립된 것이었다. 또 황실은 경제적인 후원 약속과 더불어 국적, 문벌, 법계에 관계없이 유능한 주지를 선출해 줄 것을 불교계에 당부하였는데, 이를 “십방주지찰제十方住持刹制”라고 한다. 이로서 남선사의 주지가 되는 것이 최고의 영광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이 시기 우리나라에도 최씨 무신정권武臣政權이 들어서지만 의종 24년(1170)부터 원종 11년(1270)까지 100년 간 지속된데 반해, 일본은 약간의 출입이 있었지만 명치유신 전까지 680년간 막부시대를 유지하게 된다. 이는 우리와 다르게 선불교의 지속적인 발전을 이루는 한 요인이 되었다. 우리나라는 고려 말 빈번했던 중국 선종과의 교류가 급격히 줄어들다 결국에는 단절되고 말았지만, 일본은 1185년 가마쿠라 시대 이후 계속해서 중국 선종이 유입되었다.
3) 임제종 대응파大應派
‘빗장이 없는 넓은 문’이라는 이름의 대명국사 보문普門의 조카이기도 한 난포 쇼묘[南浦紹明, 1235~1308]는 25세에 송에 가서 양기파인 허당지우(虛堂智愚, 1185∼1269)의 법을 받고 33세에 귀국하였다. 대응국사大應國師인 남포소명南浦紹明은 소후쿠지[崇福寺]의 개산조로, 소명紹明의 제자로는 대덕사大德寺를 개창한 대등국사大燈國師 슈호 묘초[宗峰妙超, 1282~1337]가 있다. 묘초妙超의 제자로는 묘신지[妙心寺]를 개창한 무상대사無相大師 간잔 에겐[關山慧玄, 1277~1360]이 있다.
이들 남포소명南浦紹明, 종봉묘초宗峰妙超, 관산혜현關山慧玄 3대를 응등관應燈關(大應·大燈·關山)이라고 하고 임제종 대응파大應派라고 부른다. 이 법맥은 일본 임제종의 중흥조인 하쿠인 에카쿠[白隱慧鶴, 1685~1768]를 거쳐 오늘날까지 유일하게 임제종의 정통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일본은 선종 초기 2차례에 걸친 몽골의 침입을 막아낼 정도로 선 수행력이 뛰어났으나, 에도막부시대 본말사제도本末寺制度, 단가제도檀家制度 등 사원제도로 인하여 부와 권력이 개입하게 되자 선이 점차 힘을 잃게 되었다. 다만 임제종 대응파大應派 계통인 대덕사파大德寺派와 묘심사파妙心寺派는 교토에 위치하면서도, 권력을 멀리하고 순수선을 지킨다.
24류의 일본의 임제선도, 오늘날 남아있는 것은 다만 ‘대응파大應派’라고 하는 하나의 유파뿐으로, 나머지는 모두 도쿠가와 시대에 없어져버리고 만 것이다. 어째서 그렇게 되었는가 하면, 대부분의 선승은 가마쿠라 ․ 무로마치시대에 막부의 두터운 외호를 받아, 송나라의 오산五山을 모방하여 개창된 이른바 ‘오산의 관사官寺’에 주지로써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선림의 생활이 점차로 문화적인 공간이 되어, 가장 중시되어야 할 좌선수행이 경시되어 선승으로써의 힘이 약해져갔기 때문이다. (니시무라 에신[서촌혜신西村惠信], 일본 하나조노대학 명예교수, 선문화연구소소장,「일본 간화선看話禪의 전통과 변용」(普照思想 제25집(2006.02), 보조사상연구원).)
이들은 황실이나 막부의 외호를 받는 오산파五山派에 속하기를 끝내 거부하여 이들을 ‘임하林下’라고 부른다. 특히 묘심사파는 오산五山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관세를 큰 수입원으로 하던 막부와는 관계가 좋지 않았다. 그러므로 해서 오에이[應永]의 난(1339년)을 계기로 일시적으로 사찰이 폐사되는 등 수난을 겪었으나, 그 순수성 때문에 지금은 임제종을 대표하는 총본사를 유치하고 있으며 전국에 3,600여개의 말사를 거느리고 있다.
대응파 대응大應국사(南浦紹明, 1235-1308)의 선종은, 대등大燈국사(宗峰妙超, 1282-1337), 무상無相대사(關山慧玄, 1277-1360)의 계보로 확실히 전수되어, 후에 도쿠가와 시대 중기에 이 대응파에서 백은혜학(白隱慧鶴, 1685-1768)이 나와 독특한 공안선을 확립하고, 이것이 오늘날의 일본 임제선이 되어 발전한 것이다.
이 묘심사妙心寺를 기점으로 하는 일파는 ‘응등관(應燈關의 一流)’이라고 불리어, 오산의 관사로써의 대우를 받는 일 없이, ‘산린파山隣派’로써 고담청빈枯淡淸貧의 생활에 만족하며, 오로지 좌선수행에 매진하였기 때문에, 반대로 그 명맥을 잇는 것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계통에서, 생각지도 않게 ‘5백년에 한 번 나올까말까 한 인물’로 불리며, ‘일본 임제선 중흥의 시조’로 추앙받는 백은혜학白隱慧鶴이 나온 것이다. (니시무라 에신[서촌혜신西村惠信], 일본 하나조노대학 명예교수, 선문화연구소소장,「일본 간화선看話禪의 전통과 변용」(普照思想 제25집(2006.02), 보조사상연구원).)
4) 백은선白隱禪의 이해
일본은 송대 간화선이 전파된 이후 이를 꾸준히 발전시켜 나가는데, 성일국사 원이변원圓爾辨圓은『성일국사어록聖一國師語錄』에서 선의 종지를 ‘불조佛祖가 출현하신 이래, 이치理致가 있고, 기관機關이 있으며, 향상向上이 있고 향하向下가 있다.’고 하면서 공안수행의 단계를 다음과 같이 상정하였다.
卽下에 佛祖의 理致, 機關을 넘자. 이른바 부처님의 理致를 넘고, 가시나무 숲을 통과하고, 祖師의 機關을 넘어서, 銀山鐵壁을 투과해야 비로소 向上의 本分이 있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나까지마 시로 Shiron Nakajima 中島志郞, 하나조노대花園大學,「일본 공안선 백은선의 원리와 구조」(2011 제2회 간화선 국제학술대회 Day 2 <간화선, 그 원리와 구조>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종학연구소) p. 79.)
다음 세대에 해당하는 대응국사 남포소명南浦紹明은『대응국사법어大應國師法語』에서 이들 이치, 기관, 향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선의 종지에는 세 가지 뜻이 있으니, 이른바 理致, 機關, 向上이다. 처음 理致라고 하는 것은 제불諸佛의 설법과 함께 祖師가 말씀하는 心性 등 道理의 말이다. 다음 機關이라는 것은 제불 조사가 참된 자비를 베풀고 코를 잡고, 눈을 깜빡이며 바로 말하기를 ‘진흙 소가 하늘로 날고, 石馬가 물에 들어간다’ 등의 의미이다. 최후의 向上이란, 佛祖의 直說, 諸法의 진실한 모습 등…, 곧 ‘하늘이 하늘이며, 땅이 땅이며, 산이 산이며, 물이 물이며, 눈은 옆이며 코는 수직 등의 주된 뜻이 그것이다. (니시무라 에신[서촌혜신西村惠信], 일본 하나조노대학 명예교수, 선문화연구소소장,「일본 간화선看話禪의 전통과 변용」(普照思想 제25집(2006.02), 보조사상연구원).)
몽창소석夢窓疎石도 그의『몽중문답夢中問答』에서 ‘도리道理나 자의字義를 다 해서 이름 붙여진 법문法門은 없다. 그러나 방편의 가르침으로 종지를 내 세울 적에 자의字義, 도리道理를 통해서 학자를 격려하는 법문을 이치理致’라고 하면서 ‘방할(棒喝)을 쓰거나 혹은 의리義理에 상관하지 않는 화두를 보이는 것을 기관機關이라 한다.’고 정의하였다. 그러면서 ‘모두 소옥小玉을 가지고 노는 것과 같은 수단’이라고 하면서, 마조, 백장보다 이전은 이치理致를 말하면서 아주 적게 기관機關을 말하였는데, 마조, 백장 이후에는 많은 사람이 기관機關을 말하면서 아주 조금 이치理致를 말한다고 하였다.
이들은 공안公案으로서 채용되었던 고칙 공안들을 크게 나누어, 불조가 설법한 말에서의 의미를 추구하는 것[理致]과 견성 오도한 조사들의 일상의 작용에 의미를 추구하는 것[機關], 그리고 그들을 해결한 다음 현실생활의 가운데에서 법을 보는 것[向上] 등 세 종류로 구분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세 가지는 理致(體)에서 機關(用)으로, 理致. 機關에서 向上으로라고 하는 단계적인 발전을 상정했던 공안 수행의 체계이다. 宋代禪에서 이러한 말의 근거를 찾는 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세 단계의 명확한 체계로서 이해된다는 것은 일본선의 독자적인 발전이었다.
앞의 大應국사 ‘三門의 체계’를 받고, 다음 大燈국사에게는『大燈百二十則』이라는 일본 독자의 公案集이 편집되었다. 그 후 京都 근세 임제종 각파 속에서 각종 공안집이 형성되었지만 에도시대가 되어서 그것들은『宗門葛藤集』에 집대성되어, 17세기 후반 元綠2년(1689)에 처음 간행되어 安政연간에 이르기까지 禪院의 공안 참구에 널리 이용되었다. (나까지마 시로 Shiron Nakajima 中島志郞, 하나조노대花園大學,「일본 공안선 백은선의 원리와 구조」(2011 제2회 간화선 국제학술대회 Day 2 <간화선, 그 원리와 구조>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종학연구소) p. 81.)
이 삼중三重 이론은 다음 백은에 이르러 일본 임제종 ‘오문五門’의 공안수행체계로 완성된다. 즉, 대응의 3문(理致, 機關, 向上)에 2문(言詮, 難透)를 가중하여 법신, 기관, 언전, 난투, 향상의 5문五門 체계를 확립하였다. 더욱이 최후 결전으로서 ‘말후末後의 뇌관牢關’까지 배치하였는데, 견성을 목적으로 한 수도修道와 견성후의 수도를 구분하여 명확하게 구분하는 등 체계화하였던 것이다. 백은은 에도시대 중기 임제종을 새로 고쳐 세우고, 간화선 공안 수행체계를 새롭게 정비하였다.
白隱은 이 세 종류의 공안군을 더욱 세분화하여, 간화수행을 한층 효과적으로 했던 것이다. 그는 大慧의 ‘정규안장삼백칙正規眼藏三百則’등에 보이는 고칙화두를, 선심의 심화에 있어서 효과 있도록 다시 배열하여, 그들 화두의 하나하나를 ‘본참本參의 화두’로서 단계적으로 참구되는 방법을 취했던 것이다. 오늘, 일본 임제선의 도장에서 행해지고 있는 ‘공안의 조사’도 이를 표방하여 아래와 같이 단계적으로 되어있다.
1. 법신法身…우주의 본체, 또는 진정한 실재라는 것은 무엇인가를 탐구하는 공안. 선종에서 말하는 ‘자기의 심성’이라든가 ‘본래 면목’이라는 것은 무엇인가를 확실히 하는 것이다.
2. 기관機關…‘법신’에서 얻어진 견해를, 어떻게 일상차별세계(日常差別世界の中)에서 활용해 나갈 것인가를 추구하는 공안이다.
3. 언전言詮…깨달음의 내용을 어떻게 말로 표현하는가를 배우기 위한 공안이다. 이에는 능가경楞伽經에서 말하는 ‘종통’과 ‘설통’의 두 종류가 있다. 또, ‘언전’의 공안에는 불조의 어떠한 말에도 헷갈리지 않는 눈의 힘을 기르는 것도 있다.
4. 난투難透…위인도생爲人度生하기 위해서 깨달음의 경애境涯를 연마하기 위한 공안이다. 大慧가 ‘큰 깨달음(大悟)은 18회, 작은 깨달음은 그 수를 알지 못한다.’라고 말한 그대로이다.
5. 향상向上…이미 얻은 깨달음의 경지를 모두 버리고(선에서는 ‘파가산택破家散宅’이라고 한다. 학인을 깨달음의 귀신 굴(鬼窟) 속으로부터 끌어내기 위한 공안이다. 이리하여 ‘깨달음의 끝(悟了)은 깨닫지 못함(未悟)과 같다’의 경지를 연마하게 되는 것이다.
6. 동상오위洞上五位…중국 조동선中國曹洞禪의 이론인 ‘편정오위偏正五位’를 이용하여, 지금까지의 깨달음의 내용을 이론적으로 점검하기 위한 공안이다.
7. 십중금계十重禁械…삼취정계三聚淨戒나 십중금계(선에서는,‘불심종정계佛心宗正戒’라든가 ‘무상심지대계無相心地大戒’등으로 말한다)를, 선의 입장으로부터 다시 검토하여, 일상생활 가운데서 어떻게 계戒를 지켜 나갈 것인가를 연마하는 공안이다.
8. 말후의 뇌관末後の牢關…이것에는 특별히 정해진 공안은 없고, 예를 들면 “‘임제록臨濟錄’을 한 글귀(句)로 말하라”는 등, 사가師家의 실내室內에 따라 각각 다르다. 수행과정에 대한 “최후의 일결一訣”을 확실히 하기 위한 공안이다. (니시무라 에신[서촌혜신西村惠信], 일본 하나조노대학 명예교수, 선문화연구소소장,「일본 간화선看話禪의 전통과 변용」(普照思想 제25집(2006.02), 보조사상연구원).)
정리하자면, 백은은 선의 수행과정에 있어 공안을 순서적으로 나열한 커리큘럼을 설치하고, 이에 따라 하나하나 계단階段를 올라 견성에 이르는 수행체계를 확립하였던 것이다. 이는 송대 조동종에서 ‘제자선梯子禪’으로 폄하되었던 수행체계였지만 그때까지 임제종에서 이심전심으로 전해지던 매우 합리적인 공안 수행법이라고 할 수 있다. 백은은 이를 보다 더 근세近世적으로 체계화하여 ‘근세 임제종 중흥조’라 불리게 되었다.
도쿠가와 시대 중기가 되면, 오산의 중림은 문화생활에 빠져, 선종의 법파를 이을 자가 없어져, 서로가 교체로 회장을 잇는 ‘연환 결제’라고 불리는 결제 안거를 개최하였지만, 그 지도자 측에 해당하는 종사가宗師家조차 부족하여, 어쩔 수 없이 관산파에서 사가를 초빙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됐다. 중세에는 오산의 관사였던 교토나 가마쿠라의 선종 사찰이 지금도 많은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지만, 그 경내의 한쪽 구석에 있는 전문도장의 사가는, 어느 한 곳 빠짐없이 白隠 밑의 공안선의 법계인 것은 정말로 얄궂은 사실이 아닐 수 없다. (니시무라 에신[서촌혜신西村惠信], 일본 하나조노대학 명예교수, 선문화연구소소장,「일본 간화선看話禪의 전통과 변용」(普照思想 제25집(2006.02), 보조사상연구원).)
.현재 일본 임제종 입실入室 및 승당陞堂 수행은 모두 백은의 공안선이다. 그러나 일본의 임제종 교단에는 전체를 총괄하는 하나의 본산은 없고, 14派의 대본산大本山이 있다. 역사의 과정에서 생겨난 선사禪寺가 각각의 문류門流를 형성하고, 그것이 본산本山이 되어 말사末寺 사원寺院들을 총괄하는 형식으로 일파를 형성하고 있다.
한국 등의 경우와 다르게, 수행자는 사가를 선택하여 특정의 승당에 입문하면, 마지막까지 그 한 명의 스승(참선의 스승이라고 부른다.) 밑에서 수행하며, ‘남순동청南詢東請’이라고 하는 떠돌며 행하는 수행은 하지 않는다. 오히려 각지의 승당에 출입하는 자는, ‘전석자轉錫者’라고 하여 수행승들 사이에서 비판받게 된다. 이점은 중국선의 정신을 잃은 일본임제선의 결점이 아닌가 생각한다. (니시무라 에신[서촌혜신西村惠信], 일본 하나조노대학 명예교수, 선문화연구소소장,「일본 간화선看話禪의 전통과 변용」(普照思想 제25집(2006.02), 보조사상연구원).)
종달 이희익 노사님은 이 계열의 묘심사파 법맥을 이으셨는데, 1925年 일본 임제종 묘심사파 경성별원京城別院에 출가하셨다. 노사님의 스승인 화산대의(華山大義, 1891.08.21.~1945.10.14.) 선사는 묘심사파 경성별원 주지였지만, 남선사파南禪寺派 관장管長을 지내기도 하였다.
5) 백은선白隱禪의 오문五門 공안公案
하나조노[花園]대학 나까지마 시로[中島志郞] 교수는 ‘법신法身’, ‘기관機關’, ‘언전言詮’, ‘난투難透’, ‘향상向上’의 5문 수행체계는 “입실참선入室參禪”의 극치라고 천명하고 있다. 공개할 수 없는 요소도 많고 체계도 비밀스러운 부분이 많다고 하면서도 각 항목에 대한 특징들을 정리하였는데, 필자가 선수행을 통해 체득한 경험에 비추어 풀어본다.
첫째, ‘법신法身(3문에서의 이치)’이란 진여眞如, 불성佛性을 의미한다. 보리달마의 확연무성廓然無聖이니 육조의 본래면목本來面目, 임제의 무위진인無位眞人 등도 여기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데, 이 단계는 견성見性의 단계로 수행자가 가지고 있던 기존의 지견知見들에서 벗어나는데 그 목적을 둔다. 대표적인 화두로는,『무문관無門關』「제01칙 조주구자趙州狗子」와「제23칙 불사선악不思善惡」「제37칙 정전백수庭前柏樹」등이 이에 속한다. 백은의 <척수지성隻手之聲>도 여기에 속하며, 나아가서는 선도회 “시작하는 사람들을 위한 화두들(이하 ‘시작하는 화두들’)”의 <서행답단유수성徐行踏斷流水聲>, <인종교상과人從橋上過 교류수불류橋流水不流> <남산절정척수南山絶頂隻手> 등도 이에 속한다고 하겠다.
둘째로 ‘기관機關’이란 기용機用, 작용作用의 뜻으로 ‘법신’에서 한 발 나아간 단계이다. 이론에 의지하지 않는 “방할棒喝” 등 조사들의 자재한 활동들이 거론될 수 있는데, 수행자를 가르치기 위한 지도자의 교묘한 수단이나 책략을 가리킨다. ‘법신’의 경계가 ‘평등관平等關’에 머물러 있어 소극적일 수 있기 때문에, 거기서 나와 일상의 “차별상差別相”으로 다시 돌아가는 단계이다.
‘기관’은 만법萬法과 원만하게 어울리는 오후수행의 단계로 “정념결정正念決定”인 ‘법신’에 이은 “정념상속正念相續”의 첫 단계로, 공안의 대부분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무문관』「제07칙 趙州洗鉢」「第47則 兜率三關」「권말의 황룡삼관黃龍三關」등이 여기에 속한다. 선도회 ‘시작하는 화두들’ 중에는 <동산수상행東山水上行> <날아가는 비행기를 멈춤[停飛! 飛行機]> <공수파서두空手把鋤頭> 등이 이에 속한다고 하겠다.
셋째, ‘언전言詮’이란 언구言句로서 종요宗要, 즉 종지宗旨의 긴요한 뜻, 또는 가르침의 요지를 표현한다는 의미로 쓰였다. 조주종심(趙州從諗, 778~897)과 운문문언(雲門文偃, 864~949)의 공안들이 대표적으로,『무문관』「제07칙 조주세발趙州洗鉢」「제21칙 운문시궐雲門屎橛」과「제17칙 국사삼환國師三喚」「제41칙 달마안심達磨安心」등이 여기에 속한다고 하고 있다. 선도회 ‘시작하는 화두들’ 중에는 <과거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인데[過去心不可得 現在心不家得 未來心不可得] 어느 心에 떡을 먹겠는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법은 모두 이 경에서 나옴[阿縟多羅三貘三提法 皆從此經出]> <응무소주應無所住 이생기심而生其心> 등을 들 수 있겠다.
넷째 ‘난투難透’란 문자 그대로 투과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난해難解의 화두들을 투과하여 경계를 심화시키기 위한 과정이다. 난투의 화두들은 평등과 차별을 넘어 깨달음과 일상이 하나로 되는 ‘일여一如’의 경계를 체득하기 위한 관문으로 보면 되겠다. 백은 선사는 ‘팔난투八難透’라고 해서 ‘8가지 뚫기 힘든 화두들’을 꼽았다.
문의 열쇠가 없다면 禪宗은 끊어진다. 목숨을 걸어서라도 모두 透過하자. 문의 열쇠가 없다면 禪이 아니다... 문의 열쇠를 열고 나오는데 잠깐이면 된다. 疎山壽塔, 牛過窓櫺, 乾峰三種, 犀牛의 扇子, 白雲未在, 南泉遷化, 倩女離魂, 婆子燒庵이다. 이것을 ‘法窟의 關鎖’라고 이름 붙이고, 또한 ‘奪命의 神符’라고도 한다. 이 하나하나 透過 후에 넓게 內典外典을 찾고, 무량한 法材를 모으고 三根機를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禪文化本12) (나까지마 시로 Shiron Nakajima 中島志郞, 하나조노대花園大學,「일본 공안선 백은선의 원리와 구조」(2011 제2회 간화선 국제학술대회 Day 2 <간화선, 그 원리와 구조>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종학연구소) p. 85.)
대표적인 공안으로는 ‘8난투’에 속하는『무문관』「제35칙 천녀이혼倩女離魂」과「제38칙 우과창령牛過窓櫺」등이 있고, 선도회 ‘시작하는 화두들’ 중에는 <종관사출비금적縱觀寫出飛禽跡> <회주우끽화懷州牛喫禾 익주마복창益州馬腹脹> <김공끽주이공취金公喫酒李公醉> <천길 속의 돌 자갈을 손에 물을 묻히지 않고 끄집어내는 솜씨!> <만산萬山에 눈이 가득 쌓였는데 한 봉우리孤峰만 왜 검은고[雪覆千山. 為甚麼孤峯不白]!> <지렁이를 두 토막으로 잘랐는데 어느 것이 진짜인고[蚯蚓兩斷 那箇是眞底]!> 등이 이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다섯째 ‘향상向上’은 수준이 이전보다 더 나아지거나 높아진 것을 의미한다. “철저히 깨달아서 언어절言語絶, 의로불급意路不及의 무일물無一物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으로 “모든 난관을 극복해 가는 단계”이다. 공안으로는『갈등집』「182. 백장재참百丈再參」에 나오는 <불자수기拂子堅起>’나『무문관』「제13칙 덕산탁발德山托鉢」에 나오는 ‘덕산의 말후구末後句’를 들 수 있다.
‘향상’이후의 수행으로는 ‘말후末後의 뇌관牢關’, ‘최후最後의 일결一訣’이라고 불리는 공부 단계를 두고 있는데, 이들에 대한 공안은 정해진 것은 없지만 수행에 있어 만전을 기하기 위해 묻는 “활구공안活句公安” 등이 이에 해당된다고 하고 있다. 선도회 영하산방에서 새로이 체계화한 ‘시작하는 화두들’과『무문관』재독 과정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한편 백은은 견성을 목적으로 한 수행과 견성후의 수행을 구분하였는데, 견성에 다다르는 지름길로 ‘법신法身’의 공안들을 배치하고[正念決定], 다음 ‘기관機關’, ‘언전言詮’, ‘난투難透’, ‘향상向上’ 등의 공안들을 배치하여 오후수행으로 삼았다[正念相續]. 이는 초심初心의 수행자들이 쉽게 수행에 돌입할 수 있도록 함과 동시에 적극적이고 주도적으로 수행에 전념하도록 하기 위한 설계다. 선적禪的인 인격 완성을 이루도록 체계화한 것이다. 물론 이는 애초 간화선이 만들어질 때부터 의도되었던 바이지만, 투과하는 화두 전체를 체계화하여 확실하게 드러내 보이므로 써 초심자로 하여금 접근하기 쉽도록 한 특징이 있다.
곧, 스승인 정수노인正受老人의 교시敎示(정념결정正念決定과 정념상속正念相續)를 이어서, 견성見性을 목적으로 했던 수도修道와 견성후見性後의 수도修道라는 명확한 방침이 자각되었다. ‘五門’ 體系로 말한다면 생사를 뛰어넘은 悟境에 다다르는 가장 지름길로서 ‘法身’의 공안들이 있고, ‘機關’ 이하를 ‘오후수행悟後修行’으로써 크게 둘로 나누었지만, 공안체계를 따라서 수행하는 것이며 선적禪的 인격이 최종적으로 완성된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나까지마 시로 Shiron Nakajima 中島志郞, 하나조노대花園大學,「일본 공안선 백은선의 원리와 구조」(2011 제2회 간화선 국제학술대회 Day 2 <간화선, 그 원리와 구조>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종학연구소) p. 81.) 여기서 정수노인正受(쇼쥬)老人은 백은혜학(慧鶴1685∼1768)의 스승인 도경혜단(道鏡慧端, 1640~1720) 을 가리킨다.
견성을 위한 ‘법신’의 화두와 비교하여 오후수행인 ‘기관’ 이후 화두는 ‘체體’와 ‘용用’의 관계라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지관止觀”이나 “정혜定慧”와도 비유될 수 있겠다. 다시 말해 ‘지止’수행을 닦아야만 마음에서 일어나는 번뇌를 쉴 수 있고[止是禪定之勝因], ‘관觀’ 수행을 하면 지혜가 이를 바탕으로 해서 일어나는[觀是智慧之由籍] 법이다. 이들 “지관쌍운止觀雙運”이나 선정禪定과 지혜智慧를 함께 닦는다는 “정혜쌍수定慧雙修”의 이분법의 논리에 맞추어 실재 수행에 있어서 투과하는 화두들을 둘로 구분하였던 것이다. 본래면목을 깨달음과 동시에 지혜를 갖춘다고 하는 매뉴얼에 따른 것이다. 물론 모든 화두가 두 종류로 명확하게 구분되지는 않을 것이다.
백은의 5문 체계를 선도회 수행체계나『무문관』공안 배치 순서에 비추어 보면, 실제 수행에 있어서는 이들 ‘법신’과 ‘기관’ 이후의 화두들을 교대로 배치하여 체와 용을 번갈아 가며 수행하도록 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수행체계에서는 법신을 앞에 두고 나머지를 뒤에 나열하여 선후先後를 구별하였지만, 실재 수행에 있어서는 원래 있던『무문관』에 따라 교대로 배치하므로 써 반복적인 수행이 된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반복을 통하여 경계를 심화되는 구조인 것이다.
금수산 영하산방에서는 초심자가 쉽게 의정疑情을 일으키게 하기위해 “시작하는 화두들”의 첫 번째 화두인 <무>자 대신 <척수지성>을 참구하게 하는데, 과정이 반복되므로 결과적으로는 어느 것을 처음 하던 별반 차이가 없게 되는 것이다. 대혜종고 선사는 “열여덟 번의 큰 깨달음과 무수히 많은 작은 깨달음을 얻었다[大悟十八回, 小梧不知其數]”고 하지 않았던가, 그만큼 깨달음이란 단번에 몰록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6) 조동종曹洞宗의 성립
조동종曹洞宗은 일본 선종의 하나로 임제종 · 황벽종과 함께 선종 3파를 이루고 있다. 개조인 도겐[希玄道元, 1200~1253]은 건보建寶 원년인 1213년 14세의 나이에 히에이산[比叡山]에서 계를 받고 천태학을 공부한다. 도원道元은 당시 히에이산 엔랴쿠지[延曆寺]의 주류 사상이었던 천태종天台宗 ‘천태본각사상天台本覺思想’에 의문을 품는다. 인간은 원래 깨달은 존재, 즉 본래부터 불성이 갖추어져 있다면 무엇 때문에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또 수행할 필요가 있을까라는 의문이었다.
그러다 15세인 건보 2년 1214년, 겐닌지[建仁寺] 천광千光선사로부터 처음으로 임제臨済의 종풍宗風을 듣고 명암영서의 제자가 된다. 영서의 입적(1215년 7월 5일 향년 75세) 후에는 영서의 법통法統을 이은 법사法嗣 묘젠[佛樹明全, 1184~1225] 문하에서 9년 동안 경經·율律·논論 삼장三藏과 현밀顯密(현교顯敎와 밀교密敎)을 두루 공부한다. 당시 건인사建仁寺는 영서가 구불교의 비판을 두려워해 천태, 진언, 선, 밀교를 겸수하고 있었다. 그래서 순수한 선종의 시작을 조동종 묵조선黙照禪을 전한 도원으로 보기도 한다.
일본 임제종의 시조로 일컬어지고 있는 明庵栄西(1141-1215)는, 구불교의 비판을 두려워하여 밀교를 함께 익혔기 때문에, 이것도 아직 순수한 선종이었다고는 할 수 없다. 순수한 선종의 시작은, 일본에 조동종(曹洞宗)의 묵조선(黙照禪)을 전한 希玄道元(1200-1253)을 효시로 해야 할 것이다. (니시무라 에신[서촌혜신西村惠信], 일본 하나조노대학 명예교수, 선문화연구소소장,「일본 간화선看話禪의 전통과 변용」(普照思想 제25집(2006.02), 보조사상연구원).)
도원은 24세 때인 1223년 명전明全과 더불어 입송하여 천동산天童山 경덕선사景德禪寺에서 임제종 대혜파인 무제료파(無際了波, 1149~1224)의 문하에 입문하여 선을 배운다. 이후 구도의 길에 올라 여러 곳을 순례하다 돌아오니 조동종 운거파雲居波 천동여정(天童如淨 혹은 長翁如淨, 1163~1228)이 무제료파無際了波의 뒤를 이어 경덕선사의 주지가 되어 있었다. 이에 여정如淨에게 입실을 허락 받고 더욱 철저히 수행하여 인가를 받는다. 인가 후에도 2년간 더 오후悟後 수행을 한 후, 1227년 27세의 나이로 귀국, 일본 조동종의 개조가 된다. 그러나 도원이 조동종의 개조가 된 것은 사후의 일로, 그는 초기 영서의 문하에서 임제선을 배웠고 송에 가서는 조동선도 수선하여 순수선을 주장하였지 종파에는 구애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원은 돌아와 건인사建仁寺에 머물면서 좌선이 가장 뛰어난 수행법이라는『보권좌선의普勸坐禪儀』를 저술한다. 그리고 이듬해인 1231년에는『판도화辦道話』를 찬술하여 겸수兼修를 부정하고 오로지 좌선만 하라는 ‘지관타좌只管打坐’와 수행과 깨달음이 하나라는 ‘수증일여修證一如’를 설파한다. 본래 부처이므로 다시 또 수행이 필요 없다는 천태본각사상에 대한 의문에 대한 답을 스스로 한 것이다. 즉, 수행이 성불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수행 자체가 바로 성불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전히 수행은 필요하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수행과 깨달음을 하나가 아닌 별개의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외도의 가르침이다. 불법에서는 수행과 깨달음이 하나라고 말하고 있다. 즉 수행이란 깨달음 분상의 수행이기 때문에 처음 발심이 곧 본래의 깨달음의 전체이다. 이러한 뜻에서 수행으로 정진해도 수행이외의 별다른 깨달음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수행하는 바로 그 자리에 깨달음이 있기 때문이다. 수행이 곧 깨달음이기 때문에 깨달음에는 끝이 없으며, 깨달음이 곧 수행이기 때문에 수행에도 시작이 없다. (한보광韓普光 저著,『일본선日本禪의 역사歷史』 pp. 110~111.)
그러므로 한 시간을 앉으면 한 시간 동안 부처를 닮아가고, 두 시간을 앉으면 두 시간 동안 부처가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평생 앉아 있을 수 있다면 평생 깨달음으로 살아간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좌선은 깨달음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깨달음의 현성現成, 즉 사실이 현재 이루어져 있는 것을 의미한다.
스승인 여정은 도원이 떠나올 때 “도시에 살지 말라. 군왕이나 대신에게 접근하지 말라. 심산유곡에 살면서 몇 사람이라도 좋으니 제자를 길러라.”라고 하였다고 한다. 도원의 순수선은 밀교와 선 등 겸수선이 유행하고 있던 당시에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런 연유 등으로 그는 교토를 떠나 에이헤이지[永平寺]로 들어가 칩거하며 후진 양성에 힘쓴다.
그곳에서 도원이 1239년부터 1243년 사이에 찬술한『정법안장正法眼藏』45권은 분량 면에서나 내용 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불후의 명작이다.『정법안장』에는 선뿐만 아니라 교학적인 측면이나 선종사원의 수행과 생활청규까지 언급하고 있는데, ‘흘러가는 물도 함부로 쓰지 마라’는 근검절약의 정신을 강조하며 청빈한 생활을 하였다. 영평사 시절 수행과 포교는 재가자의 교화보다는 출가 중심의 산중수행불교였으며, 출가하여 좌선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등 출가주의 경향을 보인다. 1244년 2월에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출가하지 않고 석가모니 부처님의 수행이나 깨달음에의 길을 올바르게 계승한 이는 이제껏 한 사람도 없었으며, 석가모니 부처님의 정법을 올바르게 전해 받은 예가 없다. 어떤 남자나 여자도 일반 재가자 그대로 수행하여 불도의 깊은 경지에 이르렀다는 선례가 없다. 올바른 깨달음을 얻은 이는 모두 출가한 사람뿐이다. 출가하지 않고서 어떻게 석가모니 부처님의 정법을 계승할 수 있겠는가? (마츠오 겐지松尾剛次 지음, 김호성金浩星 옮김,『인물로 보는 일본 불교사』 p. 108.)
일본 조동종은 도원의 순수선을 기반으로 발전하였으며, 일본 조동종의 태조라고 불리는 게이잔 죠킨[瑩山紹瑾, 1268~1325)에 이르러 도원선의 민중화를 이루고 교단을 중흥시킨다. 도원은 여성의 출가와 수계에 힘썼는데, 영산소근瑩山紹瑾도 여인구제에 앞장섰다. 소근紹瑾의 어머니 에칸니[懷觀尼]의 유언을 받들어 비구니 사찰도 여러 개 세운다. 소근紹瑾은 또 1321년 진원종의 율원인 제악사諸嶽寺의 주지 정현에게 영접되어, 이 절을 선원으로 바꾸고 이름을 쇼지지[總持寺]라고 고쳐 개산 첫 주지가 된다.
제악산諸嶽山 총지사總持寺는 무라마치 시대 도원의 영평사永平寺와 함께 조동종의 총본사가 되었으며, 출가자 중심의 영평사 세력을 압도하였을 뿐 아니라 조동종의 교세를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그 문하에서 많은 걸출한 승려들이 나와서 사원수 17,000여개에 이르는 일본 최대의 종파로 성장하였다.
선종은 무사들과 밀착하여 발전하였다. 임제종은 교토를 중심으로 막부의 신망과 외호로 전파되었고, 조동종은 지방의 무사들 사이에서 그 세력을 넓혀간다. 임제선은 장군을 정점으로 하는 중앙의 지배층에 세를 가진 반면, 조동선은 지방의 영주 층, 하급무사 그리고 농민 등 피지배층에 퍼져나가, ‘임제장군臨濟將軍, 조동사민曹洞士民’이란 말이 있을 정도였다.
오늘날에는 “인물人物의 임제, 조직組織의 조동”이란 말이 있는데, 임제종에서는 뛰어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어 그 맥을 잇고 있는데 반해 조동종에서는 조직을 통하여 교세를 확장하고 있다는 말이다. 사실 조동종은 도원이후 그와 비견 되는 제자들이 없어 그 명맥만을 유지하다가 요사이 교세를 다시 확장하고 있는데, 도원의 철저한 수행정신이 오늘날까지 빛을 발하고 있고 그가 만든 엄격한 ‘영평청규永平淸規’가 지금까지 지켜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호준 엮음,『일본의 십대선사』 p. 53.)
7) 일본 선종 24류流 , 46전傳
가마쿠라시대 이후 일본에 선이 전파된 횟수는 총 46회였고, 이중에 법맥이 이어져 일본에 뿌리내린 종파는 24개 파라고 한다. 이중 유학승에 의한 것이 11개 파이고, 도래승에 의한 것이 13개(임제종 10개, 조동종 3개) 파이다. 이들이 일본선의 골격을 형성하고 있어 선종의 기본적인 성격은 도래渡來불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일본의 임제선은 유학승에 의한 능동적인 선과 도래승에 의한 수동적인 선이 조화를 이루며 발전하였다고 할 수 있다. 전자는 겸수선兼修禪 후자는 순수선純粹禪의 성격을 띠고 있는데, 일본의 당시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고 하겠다. 이들은 서로 교류하면서 일본선의 황금기를 구가謳歌하였다.
가마쿠라시대부터 도쿠가와 초기에 걸쳐, 일본의 유학승과 중국 승려에 의해, 송 ․ 원 ․ 명에서 일본에 전해져 온 선종은, 46명의 선종 승려들에 의해 전해져, 이 중 사법嗣法의 제자가 생겨, 법손法孫이 유파를 형성한 것이 23유파가 있었기 때문에, 이것을 ‘24류, 46전’이라고 한다(도쿠가와 초기의 석반인자선술釋半人子選述『24류종원도기24流宗源圖記』에 기초). 이 46전의 선종 가운데, 希玄道元(1200-1253), 東明慧日(1272-1340), 東陵永璵(?-1365)이라는 조동선 사람을 제외하고, 다른 선승은 모두 임제선의 법맥을 잇는 사람들뿐이다. (니시무라 에신[서촌혜신西村惠信], 일본 하나조노대학 명예교수, 선문화연구소소장,「일본 간화선看話禪의 전통과 변용」(普照思想 제25집(2006.02), 보조사상연구원).)
일본에 도래승이 많이 유입되어 선종이 대량 전파 된 데는 정치적인 측면이 크다. 중국에 원나라가 들어설 때는 갈 곳이 없어진 남송의 승려들이 지리적으로 안전한 일본에 유입되었고, 명의 몰락과 더불어 명의 승려도 유입되었다. 그리고 조선의 개국과 더불어 숭유억불 정책이 가시화되자, 고려승과 불교의 인적 물적 자원들이 대거 일본으로 이동했다.
에도시대에는 명나라의 선승인 황벽의 제자 은원융기(隱元隆琦, 1592~1673)가 일본불교계의 간절한 청원을 받고 1654년 제자들을 이끌고 일본으로 건너온다. 은원은 1661년 일본 교토에 만복사를 창건하고 그곳을 ‘황벽산黃檗山 만복사萬福寺’라고 명명한 뒤 황벽종黃檗宗의 개조가 된다. 만복사는 황벽이 출가하고 자신이 수행했던 중국의 황벽산 만복선사萬福禪寺에서 가져온 이름으로, 은원은 같은 이름의 만복사를 창건하고 황벽산 만복사를 본산으로 하는 황벽종黃檗宗을 개산한 것이다. 그가 머물렀던 황벽산 만복사는 이후 중국 선승을 주지로 초청하는 관례를 오랫동안 유지하고 있으며 그때 이후로 일본에서 황벽종 승려들은 중국 의복과 의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8) 선의 영향과 오산문학
막부의 적극적인 선종 수용은 정치적으로도 나타나 일본은 2차례에 걸친 몽골의 침입을 선의 힘으로 물리치게 된다. 쇼군의 섭정이었던 호조 도키무네[北条時宗]는 일찍부터 중국 선사인 난계도륭蘭溪道隆과 대휴정념(大休正念, 1215~1289)을 초청하여 참선을 배웠고, 1282년에는 송의 선승인 무학조원無學祖元을 초빙, 엔가쿠지[円覺寺]를 건립하였다.
북조시종北条時宗은 중국 선사들로부터 원元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조언을 구하기도 하면서, 선 수행을 바탕으로 “주종관계를 맺지 않으면 일본을 공격하겠다.”는 원의 위협을 대담하게 물리치고, 해안에 성을 쌓는 등 몽골의 침략에 철저히 대비하여 몽고군을 두 번이나 막아내었다.
이를 두고 일본 학자 죽내도웅은 일본 선종사 뿐 아니라 삼국 선종사 전체로 보아도, 국가 비상시 선이 이토록 훌륭하게 발상된 경우는 유래가 없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물론 지리적인 이유가 컸겠지만, 일본 무인정권은 선을 바탕으로 총력을 기울여 몽고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반면, 우리나라는 삼별초만이 끝까지 몽고에 대항하였을 뿐 몽고침략을 교종인 팔만대장경의 주조로 대응한 측면이 있다.
그와 동시에, 원구元寇의 일본 침략이라는 국난에 직면해있던 가마쿠라막부의 쇼군들은, 엄격한 좌선수행에 의해 담력을 단련하고, 깨달음에 의해 망상을 불식하며, 무심無心하며 자유로운 삶의 방식을 취함으로써 ‘임제 쇼군’이라고 평가되는 강한 임제선을 스스로 실천했던 것이다. (니시무라 에신[서촌혜신西村惠信], 일본 하나조노대학 명예교수, 선문화연구소소장,「일본 간화선看話禪의 전통과 변용」(普照思想 제25집(2006.02), 보조사상연구원).)
중국 송대에는 사대부가 높은 문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선종사상 문헌 정리 및 주석 작업에 참여하기도 하고, 선림의 게송이나 어록들을 모아 책으로 엮어내기도 하였다. 이들 전통은 일본도 예외가 아니어서 일본에도 전해지는데, 일본 오산파 선승들을 주축으로 한 하나의 문학형태인 ‘오산문학五山文學’을 출현시킨 것이다.
차이라면 과거제가 없었던 일본은 선승들이 송대 사대부의 역할을 대신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면에서 선향이 물씬 배어나오는 문학을 탄생시키게 되는데, 이는 다방면으로 전파되어 문학, 예능, 수묵화, 건축, 정원, 다도, 화도 등 생활문화 전반에 영향을 주었다. 선을 바탕으로 한 고도의 정신문화는 고도의 생활문예로서 일본사회에 정착하였고 현대 일본을 대표하는 관광 상품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오산문학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대덕사 주지를 지내기도 한 잇큐 소준[一休宗純]이 있다. 그는 27세 때 스승으로부터 깨달음을 인가받았지만, 이미 형식화되어 버린 인가증을 태워버리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술과 고기를 먹고 여색을 즐기는 등 무애행을 실천하며 살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시인이면서 서도가이자 화가였던 그가 오산문학과 예술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였다. 그는 마치 오산문예의 대부와도 같은 존재로, 수많은 오산문학도들이 그의 주위에 모여들었고 다도, 문학 등 다양한 방면에 다양한 제자들을 두었다. 그는 자기보다 스물한 살이나 어린 정토진종의 렌뇨[蓮如]와 교분이 두터웠는데, 그와의 다음 일화는 그가 얼마나 재기발랄한 서민의 친구였나를 잘 보여주고 있다.
한번은 또 어떤 사람이 한 화가로부터 말을 그린 그림을 받아서 잇큐에게 찬讚을 청했다. 그러자 잇큐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말인 것 같다.” 라고 써 주었다. 그 사람은 어안이 벙벙해졌다가 화를 내고 돌아갔는데, 그것을 다시 렌뇨에게 가지고 가서 어떻게든 잘 고쳐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랬더니 렌뇨는 잇큐의 글 다음에 역시 망설이지 않고, “그런 것 같다.” 라고 썼다. 그 사람은 마침내 말문이 막혀 버렸다. 그러나 그 그림은 점점 유명해져 나중에는 천하의 명보名寶가 되었다. (이호준 엮음,『일본의 십대선사』 p. 106.)
9) 일본 불교의 근대화
근세에 들어 서구열강에 유약하게 대응한 막부가 무너지고 명치明治천황의 시대가 도래 하는데, 막부 시대가 열리면서 발전하였던 선종은 막부와 더불어 추락의 길을 걷는다. 명치明治 원년인 1868년 3월 17일, 반막부 세력이 왕정복고王政復古를 선언하면서 신불분리神佛分離를 법제화하였으며, 28일에는 신사에서 불상이나 불교적인 요소들을 추방하였다. 신도를 국교화하고 천황을 신격화하면서 일본 선종 사원은 폐불훼석으로 30% 이상 파괴되었다. 사원 토지를 환수還收하고 승려들을 환속還俗시키는 그야말로 대법난을 겪게 된 것이다.
명치 5년인 1872년에는 승려의 결혼, 유발 등을 자유화하는 포고가 있었고, 이를 계기로 재가불교로서의 근대불교가 시작되었다. 우리가 일본불교하면 대처를 연상하는데 이는 명치이후에 생긴 변화이다. 명치 이전에는 일련종 등 일부를 제외하면 기본적으로 일본불교도 한국불교와 마찬가지로 비구들의 불교였다.
한편 일본 불교계는 이러한 위기에 대처하여 승려들의 잘못된 폐단과 구습을 쇄신하자는 불교부흥운동이 일어나고, 그 일환의 하나로 체재정비와 교육기관의 설립 등 근대화를 추구해 나간다. 서유럽의 근대적 불교 연구 방법이 도입되어 산스크리트, 팔리어, 티베트어 불전과 불교사 연구가 이루어지고, 종문宗門학교의 건설이 추진되었다.
참고로 에도시대 이후 종학宗學불교의 발달을 바탕으로 각 종파가 세운 4년제 대학은 10여개가 넘고 2년제 단기대학도 상당한 숫자에 이르고 있다. 불교학자의 숫자도 늘어나 대학의 강사급 이상으로 구성된 인도학 · 불교학회 회원은 3천 명에 육박하고 있다. 조동종에서는 1876년에 설립된 도쿄의 청송사靑松寺 소재 전문학교를 1905년 조동종대학으로 만들었고, 임제종에서는 1903년 설립된 화원학림花園學林이 1911년 임제종 대학(현재 화원대학花園大學)으로 되면서 서양의 인문과학처럼 선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한보광韓普光 저著,『일본선日本禪의 역사歷史』 p. 304.)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일본이 기회 있을 때 마다『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을 보내줄 것을 요청하는 기록들이 보이는데, 근대에 들어와서 일본은 팔만대장경을 저본底本으로『축쇄장경縮刷藏經』을 간행하였고, 이어 대정大正연간에는 거의 모든 경전들을 망라한『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脩大藏經』을 펴낸다.
그 뿐만 아니라 1935년부터 1941년 사이에는 팔리어 경전을 일본어로 번역한『남전대장경南傳大藏經』도 간행하였다. 경전 간행뿐만 아니라 불교 연구도 활발하게 이루어져, 석지현 스님이『벽암록』해설서를 쓰면서 ‘주석서는 중국과 우리나라에는 거의 없고 일본에만 집중적으로 있는데 50종이 넘는다.’고 하였을 정도다. 명치 이후 아카데미즘을 도입한 일본은 지금은 자타가 공인하는 불교 종주국이 되었다.
몇 년 전 KBS에서는 중국 남종선의 원천을 제공한 정중무상에 대한 프로「禪의 황금시대를 열다, 신라승 무상」을 방영하여, 마조도일이 무상 선사의 제자라는 설과 무상 선사가 중국의 오백 나한에 올라있다는 사실들을 소개하였다. 오백나한 중에 우리에게 익숙한 고승인 지장, 혜능 등은 보이지 않는데, 달마 대사와 무상 선사만이 오백 나한의 반열에 올라 있다는 것은 놀라운 사건이다.
전등을 중시하는 선종의 전통에 따라 선종사를 다시 써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또한 돈황 문서 속에서『무상어록無相語錄』이 발견된 1930년대부터 중국의 석학 호적胡適과 일본 동경대 교수였던 야마구찌[山口瑞鳳] 등 외국 학자들 사이에 이루어진 연구에서 비롯되었다. 근래 들어 우리나라 불교 연구는 일본에서 나온 책이나 논문 소개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0) 일본 선불교의 세계진출
일본 불교가 처음 서구에 알려진 것은 1870년대 일본 노동자의 미국 유입으로부터다. 이민이 늘어나면서 미국 내 사찰은 하나의 사회단체 역할을 하게 되는데, 최초로 불교 전도가 본격화 된 것은 진종 본원사로 1889년 하와이에 ‘불교전도본원佛敎傳道本院’을 설치하면서 부터다.
그러나 미주에서의 불교사상, 신행 불교전도의 결정적인 역할을 처음으로 수행한 종파는 임제종이다. 1893년 열린 시카고 <세계만국박람회World Fair>와 함께 개최된「세계종교의회World Parliament of Religions」에서 이루어지는데, 그 회의에 일본 대표로 참석한 임제종 묘심사파 선승 샤쿠 쇼엔[釋宗演, 1859~1919]과 그를 수행한 스즈키 다이세츠[鈴木大拙, 1870~1966]의 활약 때문이었다.
이들은 이 종교의회에서 폴 케이러스(Paul Carus, 1852~1919)를 만나게 되는데, 이 만남이 일본 불교의 미주 진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샤쿠 쇼엔은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포교의 흐름을 역전시키려고 하였고, 폴 케이러스는 이에 적합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폴 케이러스는 불교에 흥미를 갖고 “오픈코트 Open Court”라는 출판사를 만든다. 그리고 쇼엔에게 불교 관련된 출판 사업을 계속하고 싶으니 한문과 영어에 통달한 불교 학자를 보내달라고 부탁하였다. 그 때 쇼엔이 추천한 인물이 스즈키 다이세츠였다. 케이러스는 그의 도움으로『부처님의 복음 The gospel of Buddha』이라는 책을 출판하였는데, 이 책은 일본의 자긍심을 높이고 일본 불교의 보편성을 세계에 표방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 책은 또한 서구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였을 뿐 아니라, 일본어를 비롯한 동양의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서양을 통한 동양불교의 이해의 전형이 되었다. 폴 케이러스의 서구적 불교학의 전환과 쇼엔의 대승 불교의 서구 전파 의도가 맞아 떨어진 것이다. 이를 계기로 일본은 불교 전반에 있어 해외 진출을 이룰 수 있게 되었으며, 오늘날까지 많은 서구인들은 불교 하면 먼저 일본의 선[Zen]을 떠올리게 되었다. 이는 전적으로 스즈키 다이세츠의 업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세기 이래 서구의 주된 관심은, 동남아시아의 상좌부불교(上座部佛敎 = 小乘)든가, 내지 티벳이나 몽고의 라마교에 향하여졌지만 최근에는 동아시아, 특히 일본의 불교가 주목받고 있다. 그 이유는 다른 지역에 있어서의 불교는 모두가 이 종교의 한쪽 면만을 전하고 있는데 반하여 일본에서는 불교의 거의 모든 면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위에 근대화한 일본에 옛 종교가 현재 생생히 살아 있다는 점이 서구인에게 있어서는 매력을 주고 있는 것이리라, 이렇게 하여 지금은 일본불교가 세계의 주목을 끌고 있는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 (도변조굉渡辺照宏(와다나베 쇼오꼬오) 저著, 이영자李永子 역譯,『일본불교日本佛敎』 pp. 18~19.)
일본 선불교가 유럽에 끼친 영향은 실로 엄청나다고 할 수 있는데, 특히 기독교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1929년 독일인 예수회 라잘레(Hugo Enomiya-LaSalle) 신부가 일본에 와서 선을 배우면서 “크리스천 선”이란 새로운 분야가 생겨나게 되었다.
오늘날 크리스천 선원은 독일, 네델란드, 프랑스 등 여러 곳에 있다. 카톨릭과 불교의 공통점이라면 세속과 떨어져 존재하는 수도원 또는 승원을 설립하여 그 안에서 주로 수행을 한다는 것이다. 1978년부터는 서로의 수도 전통을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하여 카톨릭교도는 절을 방문하여 일정기간 체재하고 또 불교도는 카톨릭수도원을 방문하여 몇 달간 체재하며 상대방의 수행방식에 자신을 몰입해보기도 하고 있다. 절에서 한동안 체재한 후의 소감을 한 베네딕트 수사는 이렇게 말했다.
“수도로 인해 우리가 다다르는 것은 우주적 원형이다. 모든 종교의 수도자는 다자신의 인격의 하나됨과 근원으로 돌아간 단순함을 얻고자 한다. ... 이제 우리 수사들이 절을 떠나며 생각하니 이전에 헤어졌었던 형제들을 그동안 다시 만나 함께 지냈음을 깨닫게 되었다.” (진우기, 인터넷 불교대학 기획실장,「독일불교의 그 시작과 현재」.)
1960년대 초 제2회 바티칸 공의회에서 ‘관용의 원칙’을 채택한 이후, 다른 종교의 것이라도 자신들의 종교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도입해 쓰도록 허용하고 있다. 현재 많은 카톨릭 수도원에 선방을 차려놓고 있는 실정이다. 수도원 안에 선방을 차리고 명상을 정기적으로 하는 신부로는 1990년 사망한 라잘레 신부 외에도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 1915~1968) 신부가 유명하다.
라잘레 신부는 1978년 삼보교단三寶敎團에서 야마다 노사에게 선사 인가를 받는다. 삼보교단에는 불교를 가르쳐도 좋다고 허가한 그리스도교도가 총 12명이며 이 중 노사의 자격을 받은 사람은 라잘레 독일 신부를 비롯한, 야게르 독일 신부, 매키네즈 캐나다 수녀, 리엑 독일 수녀 등 총 4명이다. 야마다 선사는 비구계를 받은 적이 없고, 동경에서 보건소장이라는 공직을 가지고 있으면서 수행을 계속한 사람으로, 자신이 재가수행자였기 때문에 재가자를 가르치는데 힘을 쏟았다.
노사가 된 조앤 리액 수녀는 매리놀 수도회의 수녀였지만, 지금은 독일에서 법회를 하고 시애틀에 삼보 승가도 세웠다. 또 예수회 신부였던 루벤 하비토는 76년 사미계를 받고 동경대에서 박사학위를 한 후 미국 텍사스주 마리아 캐논 선원을 설립하고 좌선을 지도하고 있다. 숭산 노사님이 가끔씩 미국 켄터키 주에 있는 겟세마네 수도원에서 법회를 가진 배경에는 이런 바탕이 있었던 것이다. 성철스님과 왜관 베네딕토 수도원의 진토마스 신부와의 인연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마음을 닦아야 된다는 것, 여기에 대해서는 예수교나 다른 종교인들도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가톨릭 수도원 중에서 가장 큰 것이 왜관에 있는데 그 수도원의 독일인 원장이 나한테서 화두를 배운지 10여년이 지났습니다. 그 동안에도 종종 왔는데 화두 공부는 해볼수록 좋다는 것입니다. 그가 처음 와서 화두를 배운다고 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당신네들 천주교에서는 바이블 이외에는 무엇으로써 교리의 依支로 삼습니까?”
“토마스 아퀴나스(T. Aquinas)의 神學大典입니다.”
“그렇지요. 그런데 아퀴나스는 그 책이 거의 완성되었을 때 자기 마음 가운데 큰 변동이 일어나서 그 책에서 완전히 손을 떼어버렸는데, 처음에는 금덩어리인줄 알았는데 나중에 썩은 지푸라기인 줄 알고 차버린 그 책에 매달리지 말고, 그토록 심경 변화된 그 마음자리, 그것을 한번 알아보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화두를 부지런히 부지런히 익히면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불교를 믿지 않는 다른 종교인들도 화두를 배워서 실제로 참선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불교를 믿는다고 하면 마음 닦는 근본 공부인 禪이란 것을 알아서 실천해야 합니다. (성철스님,「참선하는 법」(辛酉法語 1981년 음 6월 15일).)
현재 서구 구라파에는 수많은 불교단체와 선종 종단들이 활약하고 있는데, 1990년대 후반 구라파 국가들의 불교 현실을 말해주는 선도회 서명원 신부의 논문을 보면, 그중 선종에 관련하여 가장 큰 규모의 세 교단을 소개하고 있다. 이중 삼보교단이 단연 주의를 끈다.
이 세 교단들 가운데 첫째는 曹洞宗의 Kōdō Sawaki(1880-1965)의 제자인 Taisen Deshimaru(1914-1982)가 창설한 것이다. 그는 1967년도에 파리에 도착하여 많은 제자들을 길러내어 1970년도에 Association Zen Internationale(AZI-國際 禪 協會,)의 前身인 Association Zen d'Europe(유럽 선 협회)를 창설했다. 1979년도에는 la Gendronnière (Loir-et-Cher)라는 넓은 땅을 확보하여 歐羅巴에 첫 번째 寺刹을 건립하였다. 그의 제자들은 수천 명에 이르며 歐羅巴의 도처에서 백여 개의 禪院을 설립하였다. 지금 AZI는 전 세계에 200여 개의 禪院을 가지고 있다.
둘째는 일본에서 소수교단인 臨濟宗과 曹洞宗의 法脈을 이어받은 Harada Dauin Sogaku(1871-1961)의 제자 Hakuun Yasutani (1885-1973)가 창설한 가마쿠라학파에서 기인한 三寶敎團이다. 이 교단은 다른 교단들에 비해 두드러지는 두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西洋 사람들에게 佛敎에 改宗할 것을 처음부터 요구하지 않았으며, 불자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看話禪 修行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다고 주장해 왔다. 둘째는 이렇게 누구나 쉽게 看話禪 修行에 접근할 수 있기 때문에, 일본에서 포교활동을 했던 개신교 목사, 가톨릭교 신부와 수녀뿐만 아니라, 유대교 랍비와 일반인들도 이것을 배워 歐羅巴나 아메리카 등의 자기 고국으로 돌아가 三寶敎團의 分派를 설립하였다.
셋째는 1970년도에 틱낫한 스님(1920- )이 전파한 베트남식 大乘佛敎의 禪修行(Thiên)이다. 그는 西洋 곳곳에 禪修行 모임을 시작한 이후 1982년도에 프랑스 Village des Pruniers(Dordogne)에서 사회 참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禪修行 모임, l'Ordre de l'Inter-Être(相關的 存在會)의 중심지를 만들어 歐羅巴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현재 歐羅巴에 있는 위 세 가지 傳統에서는 修行者 숫자가 거의 동일하다(대략 3만 명 정도). 그러나 오직 일본에서 온 三寶敎團만이 대략 1만 5천명에 이르는 많은 사람들에게 看話禪 修行을 가르치고 있다. 물론 이 看話禪 修行을 가르치는 다른 宗團들(일본의 臨濟宗이나 韓國의 숭산法脈 등)이 있기는 하지만, 三寶敎團에 비한다면 데시마루와 틱낫한이 창설한 수도 단체와 마찬가지로, 看話禪 修行者의 수가 적어서 언급하지 않기로 하겠다. (Philippe Cornu가 다음의 책에서 소수 교단들에 대해 간단하게 언급하고 있다. Dictionnaire encyclopédique du bouddhisme, Paris, Seuil, 2001, p. 409.)
11) 선도회의 오늘
지금까지 한국과 일본 선종사를 대략 살펴보았는데, 중국 선종형성기에 신라 승들의 활약이 돋보이기는 하지만 결국 한국 선종이나 일본 선종이나 모두 중국 선종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한국 조계종이 중국 선종의 일파인 임제종에서 비롯되었지만 중국 임제종이라고 하지 않듯, 선도회 간화선이 일본 임제종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일본선은 아니다. 결국 “검은 고양이면 어떻고 흰 고양이면 어떤가,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처음 시작으로 다시 돌아왔다.
부연하자면 선도회 간화선은 가까이는 일본 임제종 수행체계를 가져왔고, 멀리는 중국 당 송대 확립된 임제종 수행체계에서 비롯되었다. 거기에 일찍이 일본 임제종 수행체계를 접한 숭산 노사님이 그 수행체계를 응용하여 평상심시도의 화두 경계를 확립하셨고, 그 ‘실용’의 경계가 접목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선도회는 임제종 간화선 수행체계를 충실히 이행하면서도 화두 경계에 있어서는 법경 법사님 대에 이르러 숭산 노사님의 화두 경계까지를 수용, 화두 경계의 지평을 넓혔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