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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경기북부횃불회 원문보기 글쓴이: 손민준목사
번호 |
구 절 |
제 목 |
옛 계명 |
새 계명 |
성격 |
1 |
21-26 |
살인에 관하여 |
살인하지 말라 |
화내지 말라 / 빨리 화해하라 |
심화 |
2 |
27-30 |
간음에 관하여 |
간음하지 말라 |
눈으로 보고 음욕도 품지 말라 |
심화 |
3 |
31-32 |
이혼에 대하여 |
이혼증서를 주면 이혼 가능 |
음행한 이유없이 이혼 불가 |
폐지 |
4 |
33-37 |
맹세에 대하여 |
헛 맹세하지 말고 맹세한 것은 지키라 |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 |
폐지 |
5 |
38-42 |
보복에 대하여 |
보복 가능 (눈에는 눈, 이에는 이) |
속옷까지 주라 / 아예 10리까지 가라 꾸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
대체 |
6 |
43-48 |
원수사랑에 대하여 |
원수를 미워하라 |
원수를 사랑하라 |
대체 |
결론 |
48 |
하늘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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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6가지 주제를 시작할 때마다 “(옛 사람에게 말한 바)…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표현 혹은 이와 유사한 표현이 반복된다(5:21, 27, 31, 33, 38, 43). 이것은 옛 계명, 즉 구약 시대에 모세를 통해 주어진 십계명이나 기타 다른 계명을 폐지하거나 예수님이 새롭게 가르쳐주신 계명으로 대체하는 예수님의 권위를 강조한다.
▪ 예3) 마태복음 6:1-18은 구제, 기도, 금식이라는 당시 유대교에서 말하는 의로움의 3대 요소에 대해 예수님이 새롭게 해석하신 것을 보여준다. 1절은 2-18절의 주제를 요약한 문장(programmatic statement)이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1절에서 ‘너희 의를 행한다’는 것은 구제, 기도, 금식을 행한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이것을 행하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의로운 것임을 인정하셨다. 다만 예수님이 경계하신 것은 이런 의를 사람에게 보이려고 행하지 말라는 것이다. 만약 그럴 경우 하늘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게 될 것이다. 2-18절은 구제, 기도, 금식과 관련하여 바로 이점을 같은 표현을 반복함으로써 강조한다.
2. 인접 본문에서 같은 어휘가 반복되는 경우
▪마가복음 1장 4절에 따르면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ba,ptisma metanoi,aj)를 ‘전파한다’(khru,ssein). 마찬가지로 예수님 역시 ‘회개하고’(metanoei/te) 복음을 믿으라는 내용으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한다’(khru,sswn. 1:14-15). 또 1장 38, 39절에 따르면 예수님은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신다((khru,ssw).’
38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khru,xw)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39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그들의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khru,sswn) 또 귀신들을 내쫓으시더라 (막 1:38-39)
이렇게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사역을 묘사함에 있어서 동일한 어휘가 두 인물에 대해 사용되고 있는 것은 이 두 인물의 사역(하나님 나라의 사역)이 연속되고 있다는 것, 또 세례 요한이 예수님의 사역을 예시하는 자(foreshadower)라는 것을 보여준다. 나아가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제자들의 사역과 운명을 예시하는 자로 나타난다.
① 세례 요한처럼, 예수님처럼 예수님의 제자들은 ‘회개하라’(metanoei/te)고 ‘전파한다’(6:12).
② 저자는 세례 요한이 ‘잡힌 후’ 예수님이 갈릴리에 와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했다고 말한다(1:14). 세례 요한의 체포를 묘사하는 단어인 헬라어 ‘파라디도나이’(paradido,nai)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수난과 관련하여서도 사용된다.
먼저, 예수님에 대해 사용된 경우를 보자. 마가복음 3:19에 따르면 가륫 유다를 이렇게 소개한다. “또 가룟 유다니 이는 예수를 판 자더라.” 여기서 사용된 ‘팔다’라는 단어는 세례 요한이 ‘잡히다’라고 할 때 사용된 헬라어와 동일하다. 이 단어는 14:10-11에서 다시 유다와 관련하여 사용된다.
10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가 예수를 넘겨 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가매 11 그들이 듣고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약속하니 유다가 예수를 어떻게 넘겨 줄까 하고 그 기회를 찾더라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에서, 그리고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유다사 예수님을 ‘팔 것’에 대해 수 차례 예언하셨다.
(막 14:18) 다 앉아 먹을 때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 하신대
(막 14:21)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자기에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하시니라
(막 14:41-44) 41 세 번째 오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 되었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42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44 예수를 파는 자가 이미 그들과 군호를 짜 이르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아 단단히 끌어 가라 하였는지라
이렇게 성경은 가룟 유다를 예수님을 판 사람, 예수님을 넘겨 준 사람으로 줄곧 묘사하고 있다. 가룟 유다의 배반은 예수님을 파는 것이었다. 판다는 것이 무엇인가? 자신의 욕심(돈을 얻고자 하는 욕심)을 위해 예수님을 적에게 넘겨준 것이다.
또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겨줄 때도 이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막 15:1) 새벽에 대제사장들이 즉시 장로들과 서기관들 곧 온 공회와 더불어 의논하고 예수를 결박하여 끌고 가서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
(막 15:15)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그 밖에 예수님은 당신이 당할 고난을 예언하실 때도 이 단어를 사용하셨다(9:31; 10:33).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더라(막 9:31)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겠고(막 10:33)
뿐만 아니라 ‘넘겨주다’라는 이 단어는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해서도 적용되고 있다.
9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사람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너희를 회당에서 매질하겠으며 나로 말미암아 너희가 권력자들과 임금들 앞에 서리니 이는 그들에게 증거가 되려 함이라 10 또 복음이 먼저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 것이니라 [11] 사람들이 너희를 끌어다가 넘겨 줄 때에 무슨 말을 할까 미리 염려하지 말고 무엇이든지 그 때에 너희에게 주시는 그 말을 하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성령이시니라(막 13:9-11)
이상에서 볼 수 있듯이 세례요한 - 예수님 - 예수님의 제자는 ‘회개’를 전파하는 동일한 사역을 감당한다. 하나님 나라는 회개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또한 이 세 인물은 복음을 전하다 체포된다. 고난을 당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교회의 네 가지 속성(하나의, 거룩한, 보편적, 사도적 교회) 가운데 하나인 사도적 교회란 바로 이것을 말한다. 교회는 복음을 전해야 한다. 그러다가 예수님처럼, 제자들처럼 고난을 당하고 넘겨질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사도적 교회의 모습이다.
3. 한 책에서 특정 표현이 반복되는 경우
1) 마태복음에서는 종말론적 심판을 뜻하는 다음과 같은 표현이 반복되고 있다.
마 8:12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마 22:13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마 24:51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마 25: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라는 표현의 반복은 종말에 있을 심판의 엄중함을 보여준다.
마태복음은 다른 어떤 복음서보다 심판을 강조한다. 공관복음서에서 “심판(하다)”라는 단어가
모두 16회 사용되고 있는데, 그 중에서 마태가 12회 사용하고 있다.
또 마태복음에는 심판을 강조하는 비유, 예를 들어서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13:24-30),
“좋은 고기와 쓸모없는 고기의 비유”(13:47-50), 24:36 이하 및 25장에 나오는 세 가지 비유(
열처녀의 비유, 달란트의 비유, 최후의 심판 비유) 등이 나온다.
2) 사도행전에 나오는 ‘담대히’
사도행전은 사도들과 제자들이 성령충만하여 박해 속에서도 ‘담대히’ 복음을 전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담대히’로 번역된 헬라어 ‘파레시아’(parrhsi,a)는 사도행전에서 4회 나오며(2:29; 4:13, 29, 31; 28:31), 동사형 ‘파레시아조마이’(parrhsia,zomai)는 7회 사용되고 있다(9:27, 28[개역개정성경으로는 29절]; 13:46; 14:3; 18:26; 19:8; 26:26). 또 ‘싸르세오’(qarse,w 23:11)와 ‘싸르소스’(qa,rsoj 28:15)도 ‘담대하다’와 ‘담대함’이란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들 단어는 주로 초대 교인들과 바울이 복음을 두려움 없이 확신에 차서 전하는 모습을 묘사할 때 사용되고 있다.
먼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 있던 앉은뱅이 거지를 일으켜 세우는 이적을 행하고, 복음을 선포하자 남자만 오천 명이 주님을 믿게 되었다. 그러자 대제사장과 종교지도자들은 그를 체포하여 심문한다. 베드로는 위세등등한 종교지도자들 앞에서도 ‘담대하게’(4:13) 말씀을 전한다. 베드로가 어떤 사람이었는가? 종교 지도자는커녕 대제사장의 여종 앞에서 예수님을 3번이나 부인하였던 베드로였다. 그가 이렇게 변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성령충만하여 담대해졌기 때문이다.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4:8). 베드로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교인들 역시 담대했다. 대제사장과 장로들의 위협앞에서 예루살렘 초대 교인들이 기도하자 그들은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다(4:29, 31).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 회심한 바울은 담대히 예수의 이름을 말하였다(9:27-28. 개역개정은 29절). 바울과 바나바는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복음을 전할 때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비방하였지만, 그들은 담대히 말씀을 전했다(13:46). 이고니온에서도(14:3), 에베소에서도(19:8), 심지어 죄인의 몸으로 아그립바 왕에서도 (26:26) 바울은 담대히 복음을 전했다. 또한 사도행전이 바울이 로마에서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는 것으로 끝맺고 있다(28:30-31)는 것은 성령으로 충만한 자는 어떤 환란과 환경 속에서도 담대히 복음을 전할 수 있음을 가르쳐준다.
3) 사도행전에 나오는 ‘굳건하게 하다’
바울은 선교사요 또한 목회자였다. 그는 복음을 한 번 전하고 그치지 않고, 다시 찾아와 자신이 전한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은 성도들을 격려하고 ‘굳건하게 했다.’ 이 점을 사도행전은 ‘에피스테리조’(evpisthri,zw)라는 헬라어를 반복해서 사용하여 나타내고 있다.
▪1차 선교여행 때 바울과 바나바는 자신들이 선교한 각 성을 다시 돌아가 성도들을 ‘굳게’ 했다(14: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There they strengthened the souls of the disciples and encouraged them to continue in the faith, saying, “It is through many persecutions that we must enter the kingdom of God.” 영어 성경은 NRSV).
▪2차 선교여행 때.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2차 선교여행을 떠났는데, 그 경로는 <수리아→길리기아(다소. 바울의 고향)→더베→루스드라>였다. 바울이 이곳을 방문한 목적은 그곳에 있는 성도들을 방문하여 믿음을 ‘굳게’ 하는 것이었다(행 15:41).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He went through Syria and Cilicia, strengthening the churches).(영어 성경은 NRSV)
▪3차 선교여행 때
바울 일행이 3차 선교여행을 한 목적도 갈라디아와 브루기아에 있는 성도들을 ‘굳게’ 하는 것이었다(18:23).
얼마 있다가 떠나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땅을 차례로 다니며 모든 제자를 굳건하게 하니라
(After spending some time there he departed and went from place to place through the region of Galatia and Phrygia, strengthening all the disciples.)(영어 성경은 NRSV)
▪기타
예루살렘 교회에서 파송한 유다와 실라는 수리아 안디옥 교인들을 여러 말로 권면하며 그들을 ‘굳게’ 했다(evpesth,rixan. 15:32).
유다와 실라도 선지자라 여러 말로 형제를 권면하여 굳게 하고(Judas and Silas, who were themselves prophets, said much to encourage and strengthen the believers).(영어 성경은 NRSV)
우리는 이상에서 지속적인 보살핌을 통해 믿음이 굳건히 서도록 하는 것은 복음을 듣지 못한 곳에 가서 선교하는 것만큼 중요하다는 것, 목회란 성도들을 찾아가 믿음에 굳건히 서도록 격려하고 힘을 주는 것이라는 교훈을 배울 수 있다.
4. 인클루시오(Inclusio)
인클루시오란 동일한 혹은 유사한 단어나 구절이 문단 처음과 마지막에 위치하여 그 문단 전체를 하나로 묶는 문학기법이다. 인클루시오를 이루는 동일 단어는 그 문단의 주제가 무엇인지 시사한다.
※ 영화: 박하사탕과 관상
1) 마태복음의 처음과 마지막: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 1:23)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20)
cf. 마 18: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2) 마태복음의 처음, 중간, 마지막: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마 3:17) 하늘의 소리(= 하나님)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마 16:16) 제자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 27:54) 로마 백부장(= 이방인)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3) 사도행전의 처음과 마지막: ‘하나님 나라’
▪ 1:3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 28:31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사도행전에서 바울이 전한 메시지의 키워드가 ‘하나님의 나라’라는 사실은 여러 차례 등장한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강론하며 권면”(행 19:8)했고, 또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과 헤어질 때도 바울은 자신이 3년 동안 전한 메시지를 하나님 나라 전파라고 말했다(행 20:25, “보라 내가 여러분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또 빌립이 사마리아에 가서 전한 메시지도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행 8:12)이었다.
4) 막 12:24-27 예수님이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인들을 책망하신 말씀
[24]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ouv plana/sqe)
[25]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26]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을 말할진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27]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polu. plana/sqe) 하시니라
5) 예수의 소년기 시절 이야기(2:41-51)
40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sofi,a)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 |
> 예수님이 12살 때 성전에 가셔서 놀라운 지혜를 드러내 보이신 이야기 <
“듣는 자가 다 그 지혜(su,nesij)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47절)
52 예수는 지혜(sofi,a)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
위에서 볼 수 있듯이 41-51절 앞뒤에 있는 40, 52절이 41-51절을 감싸고 있으면서(inclusio)
예수님의 지혜의 성장을 언급하고 있다. 또한 누가복음 2:40과 52절 사이에 기록된 소년 예수님에
관한 일화는 예수님이 성전에 있는 선생들과 문답을 하셨어도 전혀 꿀리지 않고, 오히려 그 지혜로
성전의 선생들, 곧 유대 종교지도자들을 압도했음을 보도하고 있다.
그러면 이 이야기를 통해 저자는 단순히 예수님의 탁월한 지혜를 강조하고 잇는 것일까?
아니다. 예수님의 지혜에 관한 이같은 강조는 구약적인 배경에서 볼 때,
예수님이 메시야임을 암시한다. 이사야 11:1-2는 메시야에 대해 이렇게 예언하고 있다:
1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2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pneu/ma sofi,aj kai. sune,sewj)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성경에 단 한 차례 나오는 예수님의 소년 시절 이야기는 예수님이 바로 이사야가 예언한 지혜의 영
으로 충만한 메시야이심을 드러내 보이는데 그 목적이 있다.
※ 또 예수님이 놀라운 지혜로 종교 지도자들을 압도한 것은 나중에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성전의 종교지도자들과 논쟁하고, 여기서 승리할 것(19:45-21:38)을 예시한다(foreshadow).
※ 사도행전에 나오는 일곱 집사 가운데 하나인 스데반도 ‘지혜와 성령’이 충만했다.
(행 6:3)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행 6:10)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
스데반과 논쟁을 벌인 사람들은 그를 이길 수 없었다.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누가복음 21:15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이미 제자들에게 이렇게 약속하셨다.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변과 지혜(sofi,a)를 너희에게 주리라(눅 21:15)
그렇다면 지혜의 영으로 충만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지혜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고, 그 지혜가 성령을 통해서 스데반에게 주어진 것이다. 이렇게 스데반은 성령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행할 뿐만 아니라 지혜로 복음을 변증하고, 대적자들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이다.
문학기법 2: 비교와 대조
비교(비슷한 것/사람)와 대조(반대되는 것/사람)는 특정 주제를 부각시키고 강조하기 위해 사용되는 전형적인 문학기법이다. 앞에서 본 동의어적 병행법도 일종의 비교요, 반의어적 병행법은 대조기법이다. 본 강의는 어휘의 대조는 시간관계상 생략하고 인물의 대조에 집중하고자 한다. 복음서에는 여러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 인물들은 서로 유사점을 가지고 있어 비교되거나, 반대로 서로 대조되기도 한다. 인물 상호간에 비교 혹은 대조는 유사한 어휘나 주제가 반복되는지를 보고 판단할 수 있다.
1. 마태복음의 심판 사상과 인물간의 대조
마태복음은 대조되는 인물들을 제시하는데 다른 복음서보다 뛰어나다. 몇 가지 사례를 보자.
1) 동방박사와 헤롯왕(2:1-12)
동방박사는 이방인이지만 예수님을 메시야로 경배한 사람인 반면에, 헤롯왕은 유대인이었지만 메시야 예수님을 죽이려는 자였다. 비록 겉으로는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8절)고 말하지만 말이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에는 모세 유형론이 나타나 있는데, 흥미로운 사실은 모세의 경우 이집트가 박해자이고 이스라엘이 그 피해자였다면, 예수님의 경우 이스라엘이 박해자이고, 이집트는 피난처로 나타나고 있다. 마태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은 “새로운 모세이고 동시에 반전(反轉)된 모세다.” 이것은 마태복음이 구원 보편주의를 지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2) 믿음이 큰 자(이방인)와 믿음이 적은 제자들
마태복음에서 이방인은 ‘믿음이 큰 자’로 제시되고, 제자들은 ‘믿음이 적은 자’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서 8장 5-13절에 따르면 중풍병에 걸린 하인을 위해 예수님께 간구한 백부장은 예수님으로부터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10절)는 칭찬을 들었다. 이방인 백부장의 믿음이 이스라엘의 어떤 사람의 믿음보다 뛰어나다는 것이다. 게다가 예수님은 마지막 날에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12절)는 심판의 말씀을 하신다. 이 말씀은 마태복음에 나오는 전형적인 심판의 말씀이다. 여기서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란 이방인들을 가리키며, “나라의 본 자손들”이란 이스라엘 사람을 말한다. 로마백부장처럼 믿음을 가진 이방인들은 천국 잔치에 참여하게 될 것이지만, 예수님을 거부하는 자들은 바깥 어두운 데로 추방당할 것이다.
예수님으로부터 믿음이 크다고 칭찬을 들은 또 다른 한 명이 있다. 가나안 여자다. 가나안 여인의 믿음에 대해서는 놀라셨다는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예수님은 ‘오 여자여’(+W gu,nai)라고 감탄하셨다(15:28). 개역개정성경이 감탄사 ‘오’를 생략한 것은 실수다. 이 감탄사는 예수님이 가나안 여인으로부터 받은 감동을 전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백부장과 이 여인은 공통점이 많다(즉 이 둘은 비교되고 있다).
첫째, 두 사람 모두 이방인이고, 자기 자식이 심한 병에 들렸거나 귀신이 들렸다(“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둘째, 이 둘은 예수님을 ‘주여’라고 부른다. 예수님의 주님 되심을 인정했다는 뜻이다. 특히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주님으로 부른다(22, 25, 27절. 27절의 ‘주인들의 상’에서 주인 역시 ‘퀴리오스’인데, 이 단어 역시 예수님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으며. 그렇다면 총 4번이다).
셋째, 예수님이 이 두 사람의 소원을 허락해주시자 즉시 자녀가 치유되었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즉시 하인이 나으니라”(8:13)/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이 두 이방인과는 대조적으로 제자들은 ‘믿음이 적은 자들’(ovligo,pistoi. 6:30; 8:26; 14:31; 16:8; 17:20) 이다. 이들은 아예 예수님을 거부하는 불신앙(avpisti,a. 13:58; 17:17)은 아니지만,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그 분이 어떤 능력을 갖고 계신지를 제대로 알지 못하여 어려움이 찾아오면 두려워하고 염려하는 신앙이다.
3) 마태복음의 심판사상과 대조 기법
마태복음에는 종말의 심판에 관한 내용이 많다. 공관복음서에서 “심판(하다)”라는 단어는 16회 사용되고 있는데, 마태가 12회 사용하고 있다. 심판이란 구원 받을 자와 멸망할 자로 구분하는 작업이다. 따라서 명확한 대조가 이뤄질 수 밖에 없다.
예를 들자면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 좁은 문과 넓은 문, 알곡과 가라지, 좋은 물고기와 못된 물고기 등. 특히 25장에서는 세 개의 심판에 관한 비유가 연달아 나오는데, 이 비유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명확하게 대조가 되고 있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미련한 다섯 처녀, ‘착하고 충성된 자’로 칭찬을 받은 다섯 달란트 받은 자 및 두 달란트 받은 자와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는 꾸지람을 들은 한 달란트 받은 종이 대조가 되고 있다. 그리고 최후의 심판에서 양처럼 오른 편에 서서 영생에 들어가는 의인들과 염소처럼 왼편에 서서 영벌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역시 극명하게 대조 되고 있다.
※ 우리는 열 처녀의 비유와 마태복음 7장 21-27절 사이의 유사성에 주목해야 한다. 먼저, 미련한 다섯 처녀가 문이 닫힌 후에 신랑에게 “주여 주여”라고 부른 것은 마태복음 7장 21-22절에 나오는 “주여 주여”와 일치한다. 둘째, 신랑이 미련한 다섯 처녀에게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고 말한 것처럼, 주님도 “주여 주여” 말하는 자들과 주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한 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7:23)고 말하였다.
셋째, 10명의 처녀가 슬기로운 자와 미련한 자로 구분된 것처럼, 7장 24절 이하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로 구분하였다.
이와 같은 유사성은 기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단서를 제공해준다. 7장 21-22절은 그저 “주여 주여”라고 부르는 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가 들어간다고 말한다. 하늘 아버지의 뜻이란 예수님에 의해 새롭게 해석된 율법(5-7장)을 실천하는 것이며, 그런 사람이 지혜로운 자(7:24-27)이다. 그렇다면 미련한 다섯 처녀가 기름을 충분히 준비하지 못한 것은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늘 아버지의 뜻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 삭개오(눅 19:1-10)와 부자 관원(눅 18:18-30)
이 두 인물의 공통점은 부자라는 점이다. 그러나 두 인물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대조된다.
첫째, 부자관원은 어려서부터 십계명을 지킬 만큼 경건한 사람이었지만(18:20-21), 삭개오는 사람들로부터 ‘죄인’이라고 비난받았다(19:7).
둘째, 부자관원은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 주라”(18:22)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했다. 그러나 삭개오는 예수님의 초청을 받은 후 자발적으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19:8)라고 선포한다. 이에 예수님은 삭개오를 향해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19:9)고 말씀하셨다. 반면에 예수님은 “재물이 있는 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18:24-25)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부자였던 삭개오는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려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일을 해낸 사람이다. 그는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가 된 것이다.
삭개오가 이런 대단한 일을 해낼 수 있었던 이유는 예수님이 먼저 그에게 사랑을 보이셨기 때문임을 기억해야 한다. 삭개오는 예수님이 여리고에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서 예수님이 보고 싶어졌다(3절). 예수님을 보고 싶은 마음,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싶어하는 마음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었다. 만약 그저 호기심에 불과했다면, 삭개오가 사람들 때문에 예수님을 볼 수 없게 되었을 때에 그는 발길을 돌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 장애물에 굴하지 않았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보기 위해 앞으로 달려갔다(4절). 그리고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갔다. 삭개오에게는 예수님을 보고자 하는 열정이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을 보고 싶은 열정에 응답하여 예수님도 삭개오를 바라보셨다(5절). 예수님을 보고자 하는 열망을 가진 자, 예수님은 이런 사람을 지금도 바라보고 계시다.
그리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5절). 아무도 자기 집을 찾아오지 않았을 삭개오에게 예수님의 이 말씀은 사랑의 음성으로 들렸을 것이다. 이 사랑이 삭개오를 변화시켰던 것이다. 예수님은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는 것을 말씀하셨지만, “무릇 사람의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18:27)는 말씀도 하셨다. 그렇다면 부자 삭개오의 회심과 결단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예수님이 사랑으로 삭개오에게 다가 가셨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2) 삭개오와 회개에 합당한 열매(눅 3:7-13): 삭개오가 죄인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 이유
삭개오 이야기는 주제적으로 눅 3:7-13과도 관련된다. 두 본문에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공통된 어휘가 사용되고 있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라는 주제가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선구자인 세례 요한이 했던 사역은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는 일이었다(눅 3:3). 요한의 사역은 당시 사람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마가복음에 따르면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그에게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세례를 받았다(막 1:5). 세례는 세례 받는 자의 회개와 하나님의 죄 용서를 보여주는 신앙 행위였다. 그것은 주의 길을 준비하는 일이었다(눅 3:4). 그렇다면 세례 요한은 마땅히 세례를 받기 위해 나온 사람들을 반겨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요한은 그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심한 욕을 퍼부었다. 도대체 이런 황당한 경우가 다 있을까? 세례를 받으러 나온 사람들을 향한 세례 요한의 독설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7절) 그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기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도대체 어떤 작자가 그 진노를 피할 수 있는 방책이 있다고, 그 방책은 요한에게 가서 세례를 받는 것이라고 말했냐는 뜻이다. 만약 내가 요한으로부터 이런 소리를 들었다면 절대로 요한에게 세례를 받지 않았을 것 같다.
그러면 왜 요한은 이런 독설을 퍼부었을까? 이 문제를 알기 위해서는 세례를 받기 위해 나온 사람들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본문을 통해 확인해 보아야 한다. 8절에 따르면 이들은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속으로 말하는 사람들이다. 다른 식으로 표현하면 이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믿었다. 이 말은 이들이 혈통적으로 유대인들임을 뜻한다. 이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그 후손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셨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 자부심 때문에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놓치고 있었다. 세례 요한이 통렬히 지적한 것은 바로 그들이 망각한 한 가지 사실이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혈통이 단순히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이유 한 가지만으로 자신들이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면제받을 수 있다고, 즉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이 보기에는 그렇지 않았다. 세례 요한은 비장한 목소리로 말한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8절)는 그의 비장함을 보여준다. 요한은 하나님께서는 생명이 없는 이 돌들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노라고 선포한다. 유대인들이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혈통은 하나님 앞에서는 무의미 하다는 것이다. 자 그렇다면 그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무엇인가?
세례 요한은 진정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기 위해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8절)를 맺어야 한다고 요한은 소리 높여 주장한다. 그저 ‘회개’가 아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지금 요한으로부터 신랄한 비판을 듣고 있는 무리들은 ‘세례를 받기 위해서’ 요한을 찾아왔다. 요한이 베푼 세례는 ‘죄사함을 받게 하는 세례’였다. 이들은 요한의 세례를 거부한 채 자신들은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기 때문에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 무리들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세례를 통해 죄사함을 받고 싶어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요한에게 있어서 세례는 단순히 입술로만 죄를 고백하는 자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종교의식이 아니었다. 세례가 죄사함을 받게 한다면 그것은 세례라는 의식을 통해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다시는 죄악된 삶을 살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겠다는 결단과 실천을 전제로 한 것이다. 진정한 회개는 그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삶을 사는 것이다. 만약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않는다면 아무리 세례를 받아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 ‘독사의 자식들’이며, 장차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것이다. 아니 이미 하나님의 심판은 시작되었다.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여있다. 열매를 맺지 않으면 찍혀 불에 던져질 것이다!
삭개오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음으로써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 대표적인 인물이다(눅 19:1-10). ‘삭개오’는 그 이름의 뜻(‘깨끗한’, ‘순결한’)과는 달리 탐욕스럽고, 부정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는 ‘세리장’이요 부자였다. 삭개오는 사람들로부터 ‘죄인’으로 불리며 조롱받았다. 당시 세리들은 동족을 착취하여 배를 불렸고, 로마에게 봉사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에 매국노라고 불리웠다. 이러한 윤리, 도덕적인 이유 뿐 만이 아니라 세리들은 정결법상으로도 ‘더러운 죄인’ 이었다. 왜냐하면 이들은 직업상 이방인들과 많이 접촉해야 했고, 로마황제의 상이 새겨진 돈을 날마다 다루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당시 사람들에게, 특별히 율법에 엄격했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경멸을 당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또 삭개오는 특별히 키가 작았는데, 주후 1세기의 사람들은 키가 작은 사람들이 소심하고, 탐욕스럽다고 생각했다. 신체적인 왜소함은 웃음거리였다. 어쩌면 삭개오는 작은 키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사람들의 놀림감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또 그것은 삭개오의 열등의식을 부추겼고, 그의 열등의식은 사람들에 대한 적대심으로 나타났을 수도 있다. 그는 세리장이라는 힘을 이용하여 사람들을 착취한 것은 아닐까? 예수님이 삭개오를 부르자,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7절)라고 수군거린 것은 이런 배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삭개오를 향해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고 선포하시고, 그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불러주셨다(9절). 사람들에게 ‘죄인’으로 불리운 삭개오가 구원받은 백성을 뜻하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삭개오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었기 때문이다. 삭개오는 자신에게 사랑을 보여준 예수님께 자신의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줄 것이고,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다면 네 갑절이나 갚겠노라고 다짐했다. 지금까지 삭개오에게 있어서 유일한 삶의 목적이었을 그 재산의 절반을 내놓은 것이다. 당시 유대교에서 자신의 재산의 20%만 내놓아도 관대한 사람으로 인정되었다. 그런데 삭개오는 50%를 내놓겠다는 것이다. 또 그는 과거의 잘못에 대해 입술로만 고백하지 않고 네 배나 갚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였다. 구약의 율법에 따르면(레 5:16; 민 5:7) 착취한 것에 20%만 더 주면 해결되었다. 삭개오는 네 배로 갚겠다고 했으니, 이러한 삭개오의 의지는 그가 철저히 과거의 삶으로부터 돌이켰음을 보여준다. 앞서 세례 요한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삶을 실천하기 위해 세리에게는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3:13)고 주문했다. 삭개오는 부과된 것 이외의 것을 거둔 죄에 대해 철저히 회개한 것이다.
3) 야이로와 혈루증 여인(막 5:21-43)
마가복음 5장 21절에서 43절은 외곽에(21-24, 35-43절) 야이로 이야기가 진행되고, 내부에는(25-34절) 12년 동안 혈루증 앓던 여인 이야기가 진행되는 구조로 되어 있다. 이 두 인물은 서로 대조가 되는데, 혈루증 앓던 여인은 여자이고, 야이로는 남자였다. 그 여인은 무명의 부정한 여자에 불과했지만, 야이로는 거룩한 회당을 관장하는 회당장으로서 사회적 지위에 있어서 그녀와 많은 차이가 있었다. 그 여인은 병을 치료하느라 재산도 다 잃었지만, 야이로는 전문적으로 곡하는 자들을 부를 만큼 부유하였고, 가정도 있었다. 그러나 여인과 야이로는 대조되지만, ‘믿음으로’ 치유를 받고 자기 딸이 다시 살아나는 은혜를 경험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다. 물론 세밀히 살펴보면 여인의 믿음과 야이로의 믿음은 다르다. 혈루증을 앓던 여인은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고 믿었다. 예수님이 나를 돌아다 보고, 나를 직접 만져주고, 요란한 절차를 거쳐야만 내 병이 낫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병이 나을 것이라고 믿었다. 이 믿음은 바로 예수님에 대한 절대 신뢰였다. 마가복음에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이 칭찬을 들은 사람은 이 여인과 소경 바디매오 뿐이었다(막 10:52 참조).
그곳에 있던 제자들과 다른 무리들은 이런 믿음이 없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는 예수님의 물음에 제자들이 한 대답을 보라.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에워싸 밀고 있는데, 예수님의 옷에 누군가의 손이 닿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인데, 그 일이 뭐 대수로운 일이냐고, 예수님이 너무 민감하신 것(?) 아니냐고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제자들은 대답했다. 제자들도 예수님의 능력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는 정도로는 예수님의 능력이 나갈리 없다고 생각했다. 이점이 바로 그 여인과 제자들의 차이요, 예수님이 그 여인의 믿음을 칭찬한 이유다.
야이로는 어떠했나?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눈앞이 캄캄해졌을 것이다. 게다가 그의 좌절을 더욱 부추기듯, 딸의 사망 소식을 전한 자들이 말한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이제 예수님이 와도 소용이 없습니다. 괜히 번거롭게 하지말고, 빨리 가서 장례 준비나 합시다. 이런 이야기 였다. 그 때 예수님이 말씀하신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예수님은 두려워하고 있는 야이로를 위로하신다. 그리고 나를 찾아왔을 때 가졌던 그 믿음을 계속 가지라고 격려하신다. 자, 이제 야이로는 선택의 기로에 서있다. 명백한 현실에 기초한 자기 집 사람들의 말을 들을 것인가, 아니면 어찌 보면 불가능한 것 같은 예수님의 약속을 계속 믿을 것인가? 야이로는 순간 깊은 고민에 빠졌을 것이다. 성경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야이로가 어떻게 대답했는지 전해주고 있지 않다. 그러나 비록 귀신이 들린 아들을 둔 아비처럼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막 9:24)라고 말한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이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야이로의 집으로 갈 때 그만 두시라고 제지하지 않은 것은 적어도 예수님에게 마지막 희망을 걸어 보았다고 할 수 있다.
4) 예수에게 향유를 부은 여인(막 14:3-9)과 막 12장 41-44절에 등장하는 한 과부의 유사점(비교)
① 이 두 인물은 무명의 여인이다.
② 예수님은 이 두 여인에 대해 말씀하실 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12:43; 14:9)로
시작하신다. 이 표현은 예수님이 중요한 교훈을 주실 때 사용하는 어법이다(3:28; 8:12;
9:1; 9:41; 10:15, 29; 11:23; 13:30; 14:18).
③ 과부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12:44)을 헌금한 것처럼, 향유 부은 여인 역시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14:8. 개역성경은 “저가 힘을 다하여”로 번역)을 예수께 드렸다.
④ 과부가 자기의 모든 생활비(12:44)를 바친 행위는 예수가 자기 목숨을 내어주는 행위
(10:45)를 상징한다면(생활비를 의미하는 헬라어 ‘비오스’는 ‘생명’이란 뜻도 가지고 있다),
한 무명의 여인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다 바쳐서(14:8)
예수에게 향유를 부은 것은 예수의 장사를 예비한 것이다(14:8).
⑤ 이 두 여인은 비록 그 액수에 있어서는 서로 대조가 되지만(두 렙돈과 300데나리온.
두 렙돈=한 고드란트는 64분의 1 데나리온이다. 과부가 낸 두 렙돈은 향유부은 여인이 쓴
향유의 19,200분의 1이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다 바치는 헌신의 행위에 있어서는
일치한다.
이와 같이 이 두 여인에 관한 이야기는 어휘적으로 병행할 뿐만 아니라,
특히 예수의 죽음과 헌신의 주제에 있어서 상응한다.
이 두 여인을 통해 마가는 ‘제자란 모든 것을 헌신하는 자’라는 것을 강조한다.
5) 향유 부은 여인과 두 그룹의 남성들의 대조(14장 1-11절)
14:1-11은 세 개의 이야기가 연속되고 있는데, 아래 그림처럼 샌드위치 구조를 이루고 있다.
특히 예수에게 향유를 부은 여인은 샌드위치 구조에 의해 앞뒤에 등장하는 남성들(종교 지도
자들과 유다)과 다음과 같은 면에서 대조되고 있다:
① 향유를 부은 여인은 여자이지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가룟 유다는 남성이다.
② 여인은 이름도 밝혀지지 않은 사람이지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종교 지도자들이며,
가룟 유다는 12제자 중의 하나이다.
③ 여인은 예수에게 향유를 부음으로써 예수의 죽음을 예비하였고, 또 예수가 죽음을 통해
메시야가 될 것을 암시한 반면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흉계로 예수를 죽이려고 하였으
며(14:1), 12제자 중에 하나인 유다는 예수를 팔려고 대제사장들을 찾아가고 있다.
④ 1-2절과 10-11절의 장소적 배경과 3-9절의 장소적 배경이 대조를 이루고 있다.
비록 본문에 명시되어 있지 않으나, 1-2절과 10-11절의 배경은 성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이곳에서는 예수를 죽일 음모가 진행되고 있다.
반면에 3-9절은 예루살렘 밖에 있는 베다니에 위치한 ‘집’이다.
뿐만 아니라 제의적으로 부정한 문둥병자의 집이다.
이곳에서는 예수의 식탁교제가 베풀어지고, 예수님이 메시야임을 상징하는 의식이 거행된다.
여인이 예수님의 머리에 부음으로써, 예수님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즉 메시야가 된 것이다.
이렇게 거룩한 성전에서는 예수님을 살해할 음모가 꾸며지고 있고, 부정한 문둥병자의 집에서는
메시야 도유식이 거행되고 있는 것이다.
※ 마가복음에서 ‘집’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치유가 일어나는 장소요, 제자들이 깨달음을 얻는 곳이다.
- 예수님은 시몬의 집에서 시몬의 장모와 가버나움 동네 각색 병자들을 고치셨다(1:29-34).
- 예수님은 가버나움의 어느 집에서 도를 말씀하셨으며, 중풍병자를 고치셨다(2:1-12).
예수님은 회당장 야이로의 집에서 죽은 야이로의 딸을 살리셨다(5:38-43).
예수님은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제자들이 깨닫지 못하자, 집에서 가르치셨다(7:17-23).
예수님이 수로보니게 여인의 귀신 들린 딸을 치유하신 장소도 집에서다. 한편 제자들과는 달리 수로보니게 여인은 예수님의 빵에 대한 말씀을 깨닫고 잘 대답한다(7:24-30).
예수님이 귀신 들린 아이를 고치신 후 제자들이 자신들은 왜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느냐고 물었을 때 그 이유를 가르쳐 주신 곳도 집이다(9:28-29).
예수님이 누가 크냐 쟁론하는 제자들에게 섬김에 대해 가르치신 곳도 집이다(9:33-37).
예수님은 집에서 이혼에 관한 제자들의 질문에 대해 대답해 주셨다(10:10-12).
예수님의 메시야 도유식이 이뤄진 곳도 집이다(14:3-9).
예수님의 유월절 만찬도 어떤 집의 큰 다락방에서 이뤄졌다(14:12-26).
⑤ 예수는 여인을 칭찬하였으나(14:6, 8, 9), 대제사장들과 서기관에 대해서는 앞서 멸망을 선언했다
(12:9; 13:2).
이러한 대조 기법을 통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불신과 적대,
그리고 가룟 유다의 배신 행위가 부각되고 있다.
또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같이 사회적 지위가 높은 종교 지도자들, 또 예수의 12제자로
서 특권을 누렸던 유다는 오히려 예수를 죽이는 자로 나타나고,
무명의 한 여인은 자기의 모든 것을 헌신하는 자, 또 예수의 죽음을 예비하는 자로 묘사되고
있는 것은, 예수의 참된 제자란 지위(종교 지도자 혹은 제자)와 관계되지 않고,
예수가 죽음을 통해 메시야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고 행하는 자(3:35)라는
제자도의 주제를 강조한다.
샌드위치 구조란 한 이야기 중간에 다른 이야기가 삽입된 구조(ABA)를 말한다.
샌드위치 구조에서는 외곽 이야기가 내부 이야기에 의해 흐름이 중단되고,
또 각자 독립적으로 진행되지만, 그러나 서로 상응 혹은 대조됨으로써 한 쪽 이야기가
다른 쪽 이야기를 해석하는 단서를 제공하게 된다.
6) 고넬료와 루디아
루디아는 고넬료와 많은 점에서 닮았다. 비록 여자와 남자(그것도 군인)라는 차이가 있기고, 또 루디아는 이방지역인 빌립보에 살았고, 고넬료는 팔레스틴 안에 거주한 이방인이라는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이들은 이방인으로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다. 또 고넬료가 구제와 기도에 힘썼던 것처럼, 루디아 역시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고넬료에게 베드로를, 루디아에게는 바울을 보내셔서 말씀을 듣게 하시고 예수님을 영접하게 하셨다.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가기 전에 환상을 본 것이나, 바울이 마게도냐로 오기 전에 환상을 본 것도 일치한다. 또한 고넬료와 루디아는 각기 자기 집안 사람들도 예수 믿게 하고 세례를 받도록 한 것 역시 일치한다.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며칠 더 유한 것이나 바울이 이방여인 루디아의 집에 머문 것도 같다.
이렇게 고넬료와 루디아 두 사람이 많은 공통점을 가진 것으로 제시되고 있는데, 사도행전의 저자는 자신이 기록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여자들을 소개할 때 아래와 같이 거의 언제나 남자와 쌍을 이루어 소개하고 있다.
- 시므온과 안나
- 나아만 장군(4:25-26)과 사렙다의 과부(4:27)
- 바리새인 시몬과 죄인인 한 여자(7:36-50)
- 안식일에 고침 받은 손 마른 남자(6:6-11)와 안식일에 고침 받은 18년 동안 귀신들려
꼬부라진 여자(13:10-17)
- 겨자씨 비유에 나오는 남자(13:19)와 누룩의 비유에 나오는 여자(13:20-21)
- 한 마리 양을 잃어버린 목자(15:3-7)와 한 드라크마를 잃어버린 여자(15:8-10)
- 잠자다가 데려감을 당하거나 버려둠을 당하는 두 남자(17:34)와
맷돌을 갈다가 데려감을 당하거나 버려둠을 당한 두 여자(17:35)
-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18:1-8).
이런 사실은 주님은 남자가 여자건, 어디에 살든지 관계없이 당신을 공경하는 사람을 축복하셔서 그 사람과 집안 사람이 구원을 얻게 하심을 보여준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다.
34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35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행 10:34-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