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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막론 강의
성막의 기능
성막의 기능 출25:1-9
(요약) 성막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그러므로 성막의 기능이란 예수님의 은혜를 시사한다. 즉 성막은 죄인이 하나님과 만나는 곳이듯 예수 믿음으로 하나님을 만난다. 또 성막은 하나님이 누구신 줄 계시하듯 예수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드러내셨다. 또 성막으로 인도하셨듯 예수님 안에 있을 때 생명의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다. 또 성막은 하나님 중심의 삶을 보여주듯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시오 주이시다. 그리고 성막은 복음의 가장 좋은 모형이요, 하나님 앞에서 우리 신앙을 다시 점검케 한다.
(설교)
오늘은 여러분과 함께 성막을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첫 시간이니까 성막의 기능을 살펴보겠습니다. 성막의 기능은 한 마디로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앞으로도 계속하여 강조하는 말씀이 되겠지만 예수님을 빼놓고는 성막 설명은 되지 않습니다.
1. 성막은 예수님이 하나님을 만나는 길임을 보여줍니다.
출25:22에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그랬습니다. 하나님을 만나시고 싶습니까? 성막이란 본래의 단어는 ‘미쉬칸’으로 거처한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성막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성막이 무엇을 상징하고 그 안에 어떻게 들어가는가를 알면 하나님 만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성막이 누구를 상징합니까?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하나님께로 가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죠.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12).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곧 하나님을 만난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빌립이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하자 예수님께서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14:9)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 안에 아버지가 계시고 아버지 안에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담 이후 죄인된 인생 중에 그 모습 그대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담과 하와도 가죽옷을 입고 하나님을 만나고, 노아나 아브라함이나 야곱도 돌제단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모세 이후 사람들은 성막에서 하나님을 만난 것은 모두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만날 것을 시사함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성도는 벌써 하나님을 만난바 된 사람입니다. 더 깊이 더 온전히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2. 성막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계시해 줍니다.
왜 이 시대에 성막을 공부해야 하느냐 질문할지 모르지만 성막이 모두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히10:20에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했듯 휘장도 예수님, 제사장도 예수님, 제물도 예수님, 제단도 예수님, 구약의 모든 것이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요3:39에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라” 했듯이 성경 전체가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또 요4:46에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니라” 하셨듯 모세 오경의 율법이 다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그 안의 성막은 당연히 예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후 3장에서 구약의 가려진 수건을 벗고 예수를 보라고 역설했습니다. 아직도 가려진 수건 가지고 성경을 보면 안 됩니다. 아직도 안식교인들은 안식일이 예수 안의 참 안식을 가리키는 줄 모르고 안식일 지켜야 구원 받는다고 합니다. 성경을 들이 대면 꼭 그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복음의 신령한 해석을 해야 합니다. 아직도 안식일이 예수를 말씀하고 있는 것을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 골2:16에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막을 통해서 예수님을 배우게 됩니다.
3. 성막은 예수 안에서 성령의 인도 받음을 보여줍니다.
성막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한 곳이었습니다. 출40:34-38에 “그 후에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 구름이 성막 위에서 떠오를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 모든 행하는 길에 앞으로 발행하였고 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떠오르는 날까지 발행하지 아니하였으며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하는 길에서 친히 보았더라” 했습니다. 여러분 이 귀한 성령님이 어디에 계실까요? 롬8:1을 보면 그리스도 예수 안의 성령이라고 했습니다. 성령님은 어느 곳에나 계시지만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거기서 만나 주시고 거기서 인도해 주십니다. 성막이 성령으로 충만한 곳이듯이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성령으로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요1:16-17에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 있으면 생명이 성령께서 다 인도해 주십니다. 성령께서 우리 앞서 가시며 인도하셔요. 그래서 사랑하려고 애쓰기 전에 사랑의 물결로 인도하시고 절재하려고 하기 전에 절재의 마음이 작동하고 이것이 성령의 인도하심이에요. 앞으로 될 일도 성령께서 앞서서 역사해 주셔서 미리 보여주시고 준비시키게 하십니다. 그래서 구약 성도들이 성막 생활을 잘해야 했듯이 우리가 예수님을 잘 믿어야 합니다.
4. 성막은 예수님을 중심한 신앙생활 전체를 볼 수 있습니다.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성막 문에서 구원론을 봅니다. 번제단에서 죄론과 보혈론을 배웁니다. 등대에서 사명론을 배우고, 떡상에서 말씀과 축복론을 배우고, 분향단에서 기도론을 배우고, 법궤에서 부활론 천국론 계시론 삼위일체론을, 각종 기구에서 하나님 섬기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기타 다 열거할 수 없는 여러 진리가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생활 전체요, 성경 전체입니다. 그래서 성막 공부는 우리를 균형 잡힌 신앙생활로 인도해 줍니다. 식품에도 완전식품이 있듯이 성막만큼 모든 진리가 함축되어 있는 곳도 드뭅니다.
5. 성막은 예수 복음에 대한 가장 좋은 모형입니다.
성경에 모형론이 많이 있지요?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예수님 모형입니다. 또 홍해의 사건은 고전10장에 나오듯이 세례와 중생의 모형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범죄했을 때 구리뱀을 만들어 달았지요? 역시 십자가에 달리실 예수님에 대한 모형이었습니다. 라합의 붉은 줄도 예수님의 구원의 모형입니다. 혹은 도피성도 죄인의 도피처가 되시는 예수님의 모형입니다. 이 모형을 표상이라 혹은 예표라 이런 용어를 씁니다. 이처럼 성막은 그 구체적인 것 하나 하나가 예수님에 대한 모형입니다. 성막의 양이 예수님을 보여주는 모형입니다. 성막 안에서 제사함도 예수님이요, 성막 자체도 예수님에 대한 모형입니다. 그래서 성전의 주인은 예수요 성막의 주인도 예수요 그래서 성막을 보이는 복음이라 말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성찬식에서 떡과 잔이 예수님의 살과 피를 의미하는 보이는 복음임과도 같습니다.
6. 성막은 예수님 앞에서 우리 신앙을 다시 점검하게 합니다.
고후13:5에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했습니다. 이처럼 성막 문에서 나는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유일한 구주로 믿고 있는가를 점검합니다. 또 번제단에서 나의 죄는 무엇인가? 나의 죄를 예수님의 피로 속죄함 받은 것을 확실히 믿는가? 또 용서 받은 의인이라는 확신이 있는가를 점검받게 됩니다. 그리고 물두멍에서 나는 나이 마음을 얼마나 주의 말씀과 피로 씻어 성결한 생활을 하고 있는가? 또 촛대 앞에서 나는 얼마나 빛된 생활과 사명에 얼마나 충실하고 있는가? 또 떡상 앞에서 말씀 양식을 얼마나 먹고 있으며 헌신하고 있는가? 또 분향단 앞에서 기도 생활을 얼마나 잘 하고 있는가? 등등 자신의 신앙을 점검해 보게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의 50장이 성막론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성막에 대하여 많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뿐 아니라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중심이었고 동경의 대상이었습니다. 우리는 성막에서 예수님을 봅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며, 예수님이 누군지 잘 가르쳐 주며,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 받는 진리를 가르쳐 주며, 성령의 인도 받는 삶과 신앙생활 전체를 가르쳐 줍니다. 우리 모두 성막을 통해서 주님을 더 알고 잘 믿을 수 있도록 사모하시기를 바랍니다.
성막의 명칭 2007.12.26 16:31 | 성막론 | http://kr.blog.yahoo.com/jjss0815/4739
성막의 명칭 출25:8-9
지난 시간에 우리는 성막의 기능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오늘은 성막의 명칭입니다. 성막의 명칭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가령 여러분이 저를 부를 때는 목사이지만, 집에서는 가장이요, 남편이요, 아버지라고 불러지고, 제 부모님은 저를 아들이라 하고, 어릴 때 공부하던 아이들은 저를 친구라고 합니다. 이처럼 성막은 그 성막을 보는 방향에 따라 여러 가지가 됩니다.
1. 성막의 명칭은 장막입니다.
출25:9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대로 장막의 식양과 그 기구의 식양을 따라 지을지니라” 여기 장막이란 ‘오텔’이라 하여 텐트의 의미입니다. 이 명칭이 성경에 약 130회 나옵니다. 이 명칭은 일반적인 건축 양식에 따라 부른 것입니다. 이 장막은 짐승의 가죽으로 지어져 있어 하나님 거하시기에는 심히 누추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내가 거기 거하겠으니 장막을 지으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귀한 뜻이 있습니다. 그것은 장차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 것입니다. 우리 육신이 곧 장막입니다(고후5:1-4). 그러므로 성막의 명칭 하나까지도 다 의미가 있습니다. 나아가 또 장막이라 한 것은 우리의 몸을 성전 삼고 하나님께서 거하실 것을 시사합니다. 그래서 이 성막 자체가 바로 복음입니다.
2. 성막입니다.
출26:30 “너는 산에서 보인 식양대로 성막을 세울지니라” 원어로 ‘미쉬칸’인데 거처라는 뜻입니다. 성경에 약 100회가 나옵니다. 거처인데 왜 성막으로 번역했는가?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은 모두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에게는 주님이 계시기에 거룩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피 값으로 사서도 거룩하지만 하나님께서 임재하심으로 거룩해 집니다. 그러므로 거룩하려면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 심령이 하나님의 거처되기에 충분한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최소한 넓은 마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 넓은 마음은 내가 죽을 때 이루어집니다.
3. 회막입니다.
출29:43 “내 영광을 인하여 회막이 거룩하게 될지라” 회막이란 모이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12지파는 회막을 중심으로 모였고 회막을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거기서 회개하고 거기서 하나님을 만나고 거기서 사람을 만나고 거기서 제사하고 재판하였습니다. 그리고 제사장들은 회막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회중 가운데 함께 하셨습니다. 이것은 두세 사람이라도 함께 모인 곳에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하신 우리 주님을 예표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생활을 중심해서 살아야 합니다. 모든 행사의 날짜를 정할 때도 교회생활을 생각하며 잡아야 합니다. 이번에 가까운 교회 목사님 소천하실 때도 3일장을 치면 주일입니다. 그러나 2일장은 토요일에는 화장이 안 되기 때문에 4일장을 하여 월요일에 장례식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회막은 항상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 중심으로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라는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4. 증거막입니다.
민1:53 “레위인은 증거막에 대한 책임을 지킬지니라 하셨음이라” 왜 증거막입니까? 그 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전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과거에 하셨던 말씀도 잊지 않도록 지속적으로 증거했습니다. 그리고 재판 할 때 증인들이 거기 하나님 앞에서 선서하며 증거했습니다. 그리고 아론의 지팡이에 싹이 나듯 그 곳에서 하나님의 증거가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증거막입니다. 이처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증거하고 천국의 비밀을 증거하신 분이 누구십니까? 증거막 되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과 증거가 떠나서는 안 되고, 좀더 좁혀서 우리 심령도 성령의 증거가 사라져서는 안 됩니다. 눈에 뭐가 보이지 않을지라도 항상 믿어지고 항상 깨달아지고 항상 기억나는 것이 바로 성령의 증거입니다. 살후1:10에 “우리의 증거가 너희에게 믿어졌음이라” 했듯 믿어지는 것이 성령의 증거입니다. 여러분의 심령도 믿어지는 증거막이 되시기 바랍니다.
5. 성소라고 했습니다.
출25:8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 성소란 거룩한 성막이 있는 장소라는 뜻입니다. 호렙산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타나실 때 모세야 모세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하셨습니다. 바로 성막이 그런 곳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짐승의 피 즉 장차 예수 피 공로가 아니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께서 계시는 집임을 믿고 경외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거룩한 두려움과 떨림을 가지고 교만함과 세속의 신발을 다 벗어야 합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이러한 인식은 우리를 거룩하고 경건한 신앙으로 만들어줍니다.
6. 법막입니다.
대하24:6 “이스라엘의 회중이 법막을 위하여” 왜 성막을 법막이라고 했을까요? 이것은 하나님의 법 십계명 돌비가 법궤에 안치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법막 되신 예수 안에 성령의 법이 있을 것을 예표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 안에 살면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막의 명칭이란 이름에서 끝나지 않고 거기에 귀한 복음이 담겨 있습니다.
7. 하나님의 집입니다.
삿18:31 “하나님의 집이 실로에 있을 동안에” 왜 성막이 하나님의 집입니까? 하나님과 관계된 집이기 때문입니다. 즉 이 곳에 하나님이 거하시고, 이곳에서 말씀하시고, 이 곳에서 말씀하시고, 이 곳에서 하나님께 제사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 거하십니다. 성막 되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집이예요. 그러므로 예수를 영접한 사람은 아버지를 모신 것입니다. 요일2:23에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영접하면 삼위일체 하나님은 물론 천국과 그 안의 모든 복까지 다 얻은 것입니다.
8. 여호와의 집입니다.
삼상1:7 “매년에 한나가 여호와의 집에 올라갈 때마다” 앞에서는 하나님의 집이라 했는데 여기서는 여호와의 집이라고 말씀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또 다른 이름이 여호와시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라는 명칭은 특별히 하나님의 행하심에 관계가 깊은 이름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는 전능의 하나님으로만 나타나셨지만 약속을 성취시키시기 위하여 모세에게는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집 역시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성도는 하나님께서는 도구 삼으사 귀한 구원 사역에 쓰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늘 그런 마음 자세를 가지고 대기하고 순종하려는 마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9. 세상에 속한 성소입니다.
히9:1 “첫 언약에도 섬기는 예법과 세상에 속한 성소가 있더라” 본래 성소는 하늘 성소가 원형입니다. 그런데 지상의 성소는 모세가 구속의 진리를 전파하기 위해서 그 형태를 본 떠서 만든 모형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속한 성소란 하늘의 성소를 간접적으로 암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성소로서 이 땅에 오셨고 지금도 우리와 함께 거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도 성소이시지만 그 공로로 우리 각인도 하나님을 모신 성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아니 계신 곳이 없으시지만 우리 안에 계십니다.
10. 하나님의 처소입니다.
행7:46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케 하여 달라 하더니” 이 하나님의 처소라는 명칭에는 다윗이 자기 처소를 건설했지만 성전은 짓지 못한 죄송함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삼하7:2에 “왕이 선지자 나단에게 이르되 볼지어다 나는 백향목궁에 거하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 있도다” 이것이 다윗의 양심이었습니다. 오늘날 예배당은 성전과 동일한 계념은 아니지만 우리에게도 이러한 양심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다윗이 이 양심은 어디서 생겼나요?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은혜를 받은 사람만이 그런 양심이 있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에서 성막을 여러 명칭에 따라 말하고 있습니다. 장막 성막 회막 증거막 성소 법막 하나님의 집 여호와의 집 세상에 속한 성소 하나님의 처소가 그 명칭입니다. 우리 모두 이 명칭에 맞게 하나님 잘 경외하며 성령 충만하여 하나님을 모신 집으로 부족함이 없기를 바랍니다.
성막의 변천사 2007.12.26 16:33 | 성막론 | http://kr.blog.yahoo.com/jjss0815/4740
제목 : 성막의 변천사 본문 : 창 3:21 주요내용 : 영적교제 점검
오늘은 “성막의 변천사”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성막의 역사는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 변동사입니다. 에덴동산 이후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만남이 곧 구원이고 그것이 영생이고 그것이 확신이고 그것이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죄의 담이 가로놓여 있어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성막을 내셨고 거기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막의 변천사는 곧 계시의 완성을 향한 점진성을 보여줌과 동시에 하나님을 만남에 대한 여러 교훈을 줍니다. 그러므로 이 역사를 살피는 가운데 우리의 영적인 교제를 다시 한 번 점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성전이 필요 없는 시대가 있었습니다.
창2:8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그 시대는 에덴동산의 시대입니다. 에덴에서는 성전이 따로 필요 없었습니다. 아무 곳에서나 어느 때나 누구든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때는 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안에도 계시고 내 밖에도 계시고 온전히 임마누엘 상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보여주는 진리는 죄가 없어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59:1-2에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했습니다. 분명 성경은 화평함과 거룩함이 없이는 주를 만나지 못하리라(히12:14) 하셨습니다. 혹시 영적인 교제가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면 죄의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가죽옷 시대가 있었습니다.
창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안타깝게도 인류는 그 축복을 유지하지 못하고 범죄함으로 하나님과의 평화를 깨고 말았습니다. 그 타락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서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뱀의 미혹에 넘어가 범죄하고 저주 받게 되고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위해서 구원하시고 만나시기 위해서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여기 가죽옷은 무엇을 뜻할까요? 우리를 위해 희생 제물이 되신 구주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구언은 물론이고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으로 옷 입어야 합니다. 갈3:27에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했습니다. 여기 세례는 곧 성령 세례입니다. 성령 세례는 단회적이면서도 점진적입니다. 그러므로 더 풍성한 은혜 가운데로 나가야 합니다. 아주 예수로 칭의의 옷만이 아니라 성화의 옷까지 입기 위해서 성령세례의 충만한 곳으로 나가십시오. 그 때 하나님과 온전한 영적인 교제가 열리게 될 것입니다.
3. 돌단시대가 있었습니다.
창28:18에 “야곱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베개하였던 돌을 가져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에덴에서 나온 아담 자손들은 돌단을 쌓고 양을 잡아 제사하며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여기 돌단을 쌓는다는 의미는 오늘날로 치면 무엇일까요? 우리 성도들의 예배생활입니다. 이 제단을 잘 쌓아야 하나님을 만납니다. 즉 기도의 제단을 쌓고 예배의 제단을 쌓고 찬송의 제단을 쌓고 감사의 제단을 쌓고 전도의 제단을 쌓아야 합니다. 이것이 제단을 통해서 보여주는 하나님과의 만남의 교훈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가 없다면 그것은 제단을 쌓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단이란 구약적 용어이지만 신령한 의미에서는 제단은 계속 쌓아야 합니다(롬12:1). 얼마나 제단 쌓음이 중요한가?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가 끊어지면 영적으로 죽습니다. 영적 사망이란 하나님과의 분리입니다. 이 분리가 곧 죄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 믿지 않는 것이 죄요, 하나님께 예배하는 생활이 부족한 것이 죄입니다. 그러므로 돌단에서 예배생활 기도생활의 회복을 교훈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영적인 교통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4. 성막시대가 있었습니다.
출26:30 “너는 산에서 보인 식양대로 성막을 세울지니라” 여호와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광야에서 성막을 짓게 하셨습니다. 이 성막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입니다. 이 성막에는 구속의 진리가 잘 담겨 있고 이 곳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여 계셨고 그래서 이스라엘은 이 성막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성막이 보여주는 귀한 진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과정을 잘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앞에서의 계시보다 더 구체적인 계시입니다.
즉 하나님께로 나아가려면 성막 울타리의 하나 뿐인 문에서 예수님을 나의 유일하신 주님으로 믿고, 번제단에서 나를 위해서 죽으신 예수님의 공로를 믿으며, 물두멍에서 내 죄를 씻어야 함을, 성소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 자세가 확립되어야 함을, 또한 휘장이 갈라지듯 나의 옛 사람을 완전히 내려놓을 때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통이 주어지게 됩니다. 이 과정을 잘 준비할 때 하나님과의 만남은 더욱 가까워집니다. 앞으로 성막 연구를 더 하겠지만 성막을 통해서 온전히 하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5. 장막시대가 있었습니다.
대상6:48 “하나님의 집 장막의 모든 일을 맡았더라” 왕상3:2 “전을 아직 건축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들이 산당에서 제사하며” 이 장막시대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하고 실로에 있을 때입니다. 이 때는 삼상1:9의 “여호와의 전 문설주”라는 구절을 참고할 때 텐트형이 아닌 건물형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광야생활이 끝나고 이스라엘이 안정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때는 전반적으로 발전이 아니고 퇴보입니다. 왜냐하면 엘리 제사장이 블레셋에게 법궤를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법궤는 얼마 가지 않아서 되돌아오긴 했지만 성전에 안치되기까지 성막과 법궤가 분리된 기간이 약 112년 가량 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산당이라 해서 법궤가 없는 장막시대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장막에 법궤가 없음을 우리 신앙에 적용한다면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신앙이 잘못되면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짐을 보여줍니다. 즉 그 문제점이란 무엇일까요? 먼저 엘리 제사장에게서 보듯 게으름과 안일입니다. 그러므로 영적 생활에 게을러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그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에게서 보듯 잘못된 양심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죄를 회개하고 또 회개한 후에는 평안함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법궤를 이용하려 하다가 빼앗겼듯 내 주권적인 신앙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사용되어지는 겸손함을 가져야 합니다. 이처럼 무언가 잘못되어 있으니까 하나님과의 교통이 단절됩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 자신을 검토해 보시기 바랍니다.
6. 성전시대가 있었습니다.
대상22:10 “저가 내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할지라” 솔로몬이 금으로 만든 가장 찬란했던 성전시대입니다. 설계도와 재료는 다윗이 준비했고 솔로몬은 그것에 더하여 잘 지었습니다. 가격으로 치면 성전의 금값만 해도 900조에 해당한 답니다. 900조원 상상이라도 됩니까? 900조면 천문학적인 액수입니다. 성막의 금값은 약 500억이지만 성전은 그것은 수천 배에 해당한 것입니다. 이 놀라운 부요를 다윗은 하나님을 위하여 세계 열방에서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는 낙성식한 날 밤 솔로몬에게 나타나 그 곳에 와서 기도하면 기도응답을 해 주시고, 죄를 용서해 주시고, 재앙을 제거해 주시고, 병을 고쳐 주시고, 땅을 고쳐 주시고,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은 성전에서 하나님과의 더욱 온전한 교제를 암시한 것입니다. 이 성전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성전이십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 안에서 기도 응답을 받고 예수 안에서 용서를 받고 예수 안에서 고침을 받고 예수 안에서 변화를 받으며 아버지의 사랑을 받음을 가리킵니다. 나아가 우리들이 바로 성전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을 어디서 만나느냐? 그것은 예수님 믿어 우리가 성전 되면 거기서 우리를 만나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이제 솔로몬 성전의 온갖 귀한 보물과 같이 우리 몸과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마치 다윗이 수많은 나라들을 정복하고 전리품을 얻어 성전을 지었듯이 우리 마음이 바로 만국입니다. 이 마음을 다 정복하여 온전히 하나님께 다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보배와 같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응답이 멀리서가 아니라 우리 안에서 우러납니다. 여기 성전시대도 여러 가지 수난을 겪습니다만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막. 교회시대입니다.
마24:2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를 예언하신 말씀입니다. 그 예언대로 A.D. 70년 로마의 디도 장군에 의해서 성전은 완전 파괴되었습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에 대한 심판을 의미할 뿐 아니라 더 중요한 의미는 새 시대의 도래를 의미합니다. 그 시대는 교회시대입니다. 교회시대란 더 이상 하나님께서 건물 성전에 계시지 않고 신령한 성전인 우리 성도들과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들이 신령한 성전으로서 부족함이 없도록 성전으로서의 기능 즉 하나님을 잘 경외해야 할 것입니다. 혹시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통에 문제가 있다면 성전으로서의 역할에 문제가 있는지 한 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과 우리 죄인이 만나는 성막 변천의 역사를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만나고 교제할 수 있는가를 보았습니다. 죄를 해결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신령한 제단을 쌓아야 합니다. 성령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몸과 마음을 드려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과 온전한 만남과 교통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성막의 울타리 2007.12.26 16:34 | 성막론 | http://kr.blog.yahoo.com/jjss0815/4741
성막의 울타리 출27:9-19
이 시간 함께 은혜 나눌 말씀은 [성막의 울타리]입니다. 성막 울타리에 관해서 잠시 설명하면 크기가 가로 50규빗 세로 100규빗입니다. 1규빗을 약 50cm로 본다면 가로 25m 세로 50m입니다. 한국에서 늘 사용하는 평수로 치면 378평입니다. 울타리의 주재료는 흰세마포입니다. 이 세마포 울타리를 치기 위해 기둥이 모두 60개입니다. 기둥과 받침의 재료는 놋입니다. 그리고 울타리를 견고하게 하기 위해 갈고리나 가름대는 모두가 은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울타리가 주는 영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1. 이 울타리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의 견고한 사랑이 나타나 있습니다.
10절 “그 받침 스물은 놋으로 하고” 받침만이 아니라 기둥도 놋입니다. 놋은 성경에서 십자가 사랑을 뜻합니다. 놋이 나오면 대부분 예수님의 고난이나 심판에 관계가 있습니다.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에 심판을 받으사 고난 받으신 장소입니다. 그런데 놋으로 된 기둥과 그 받침은 십자가 은혜의 견고성을 시사합니다. 즉 예수님의 구속사역은 그 효력에 있어서 결코 폐해질 수 없는 영원한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에 관하여 히5:9에 “영원한 구원”이라 했고, 히10:12에는 “영원한 제사”라 했으며, 히10:14에는 “영원히 온전케” 하셨다 하셨고, 히9:12에는 “영원한 속죄”라 했으며, 요이1:2에는 “영원히 함께 할 진리”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예수님의 울타리 신앙의 울타리에 들어온 사람은 영원히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기둥이 60개입니다. 60은 사람의 수 6에 완전 구비수 10을 곱한 것으로 하나님의 사랑은 육신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의 것 즉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을 암시해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울타리에 오도록 하시기 위해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시65:4에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 했습니다.
2. 이 울타리에서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봅니다.
9절 “세마포장을 쳐서 그 한 편을 당하게 할지니” 여기 세마포는 백색으로 성결을 뜻합니다. 그래서 세마포 옷을 입는다는 것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입니다. 이 세마포 높이가 5규빗입니다. 5규빗이면 2.5m입니다. 이 정도의 높이면 일반적으로 사람의 키보다 높아서 너머를 볼 수 없는 높이입니다. 지금 세계에서 가장 키가 큰 사람이 2m 40여 cm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울타리 높이라면 아무도 넘 볼 수 없는 높이입니다. 성전의 울타리는 아주 낮지만 성막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교훈합니까? 예수 안에 있으면 죄악에서 구원을 받는다는 교훈입니다. 세속을 이깁니다. 정죄에서 해방됩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어야 하나님께서 의롭다 여겨 주시고 또 성령으로 거룩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그것을 시사하기 위해서 길이가 100규빗입니다. 100은 온전 구비수 10을 제곱한 수입니다. 그러니까 온전하게 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히10:14에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하셨고, 고후7:1에도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 했습니다.
3. 이 울타리에서 오직 예수만이 구원이심을 봅니다.
16절 “뜰 문을 위하여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수놓아 짠 이십 규빗의 장이 있게 할지니” 이 문은 오직 하나인 문입니다. 뜰의 동쪽에 한 문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만이 죄인의 구세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4:12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했고 요14:6에는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했습니다. 예수님 말고는 다른 길은 없습니다. 종교는 다 같다는 말은 틀린 말입니다. 어찌 천지와 만물을 지으시고 인간을 지으신 분이 하나님 말고 다 같을 수 있습니까? 세상 어떤 종교를 보아도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신 예수님같은 분이 있습니까? 또 하나님의 성령 말고 세상 어떤 신이 참 신입니까? 세상 신을 받았다 하면 모두 귀신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인 문에서 하나님의 유일성과 구원의 유일성을 봅니다.
4. 이 울타리에서 하나님의 특별하신 여러 은혜를 봅니다.
그 은혜는 먼저 보호의 은혜입니다. 이 울타리는 사막의 폭풍에서 보호합니다. 계11:1-2에 “성전의 밖 마당은 이방인에게 주어 마흔 두 달간 짓밟으리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야 보호가 있습니다. 다음은 안전의 은혜입니다. 시91:10에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의 장막에도 그렇다면 하나님의 성막에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계21:3-4에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했습니다. 그리고 소유의 은혜입니다. 울타리 안에 있으면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밖에 있으면 마귀의 것입니다. 혹은 공급의 은혜입니다. 혹은 구별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울타리의 안과 밖은 천국과 지옥을 판가름하는 큰 차이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느냐 아니 믿느냐는 것은 영생이냐 영벌이냐를 결정짓는 중요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구약 율법을 해석하면서 수많은 울타리를 만들어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율법은 하라는 율법이 248개, 하지 말라는 율법이 365개, 도합 613가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 율법에 다른 조항을 붙여 수천가지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울타리라 하면 율법을 연상시키지만 성막의 울타리는 그런 울타리가 아니라 은혜의 울타리입니다.
5. 그럼 기둥의 갈고리와 가름대를 은으로 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기둥 위 끝부분에 갈고리가 양편으로 두 개씩 있는데 그 기능은 거기에다 세마포를 걸었습니다. 그리고 노끈으로 양편 고리에 걸어 말뚝을 매어 어떤 바람에도 넘어지지 않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가름대는 기둥과 기둥 사이를 고정시켜 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이 갈고리와 가름대를 모두 은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가 울타리를 이편으로나 저편으로나 기울어지지 않게 튼튼히 잡아주는 역할을 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보여주기 위함일까요? 은이란 본래 하나님의 특별한 구속의 은혜를 가리킵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도록 하시기 위해 주시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로서 은 갈고리는 하나님의 붙드심의 은혜와 섭리적 사랑인 징계요, 가름대는 하나님의 교회 그리스도의 지체를 통해서 주시는 여러 신령한 직분과 은사들입니다. 이 두 가지가 있을 때 우리 신앙은 견고해집니다. 이 사랑이 우리를 붙드시기에 우리는 영원히 안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직접적으로도 역사해 주시고 교회를 통하여도 순탄한 영적생활을 하게 해 주십니다. 교회는 엘림의 오아시스와도 같이 광야생활에 꼭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에게 최고의 고통은 안정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교회를 정하지 못하고 방황할 때입니다. 은퇴하신 목사들의 고통은 평신도들의 고통보다 더 큽니다. 이 분들이 교회에서 존재해도 불편하지 않는 의식적 풍토가 이루어져야 하며 계속하여 봉사할 수 있는 길이 열려야 합니다.
6. 19절에 놋 말뚝이 나옵니다.
이것 역시 울타리를 견고하게 해 주는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놋은 고난의 사랑이요, 말뚝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모든 말씀이 다 귀하지만 우리 성도들의 신앙을 가장 견고하게 해 주는 말씀은 아버지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의 사랑의 말씀을 마음 깊이 둘 때 그 믿음은 영원히 견고해집니다. 어릴 때는 축복의 말씀도 성장의 좋은 촉진제이지만 더 자란 성도에게는 주님의 십자가 사랑에 감동하는 그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좌우편만 노리는 제자들과 예수님의 발아래서 고난의 말씀을 들었던 베다니 마리아의 차이입니다. 이 주님의 고난을 깨닫는 마음이 있을 때 그 신앙은 영원히 흔들리지 않습니다. 베드로도 박해를 피해 도망할 때 예수님게서 십자가를 지시는 환상을 보고 다시 가서 순교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막의 울타리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사랑을 보여줍니다. 또 거룩하게 하심과 오직 예수님만이 구언이심과 우리를 사랑하시는 모든 은혜를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견고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교훈합니다. 그러므로 에수님 잘 믿고 큰 은혜 속에서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성막의 뜰문 2007.12.26 16:36 | 성막론 | http://kr.blog.yahoo.com/jjss0815/4742
성막의 뜰문 출27:9-19
오늘은 성막론에서 [뜰문]을 배우는 시간입니다. 늘 강조하는 것이지만 모세가 말하는 것은 모두 예수님을 말씀한 것입니다. 요5:46-47에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하시니라” 했습니다. 이것을 몰랐기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우리도 이것을 알지 못하면 오묘한 진리를 깨달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막에 덮인 수건을 예수 이름으로 열고 그 내막을 보아야 합니다. 성막의 뜰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교훈합니다. 요10:17에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하셨습니다. 요10:9에도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한 것을 보아 이 문은 보통 문이 아니라 구원의 문입니다. 이처럼 성막의 뜰문도 구원의 문을 상징합니다.
그럼, 성막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진리는 무엇입니까?
1. 오직 구원자가 예수님 한 분이심을 보여줍니다.
성막에는 오직 한 개의 문이 있었습니다. 성막 사방에 이스라엘 12지파가 3지파씩 진치고 있었지만 오직 문은 한 개였습니다. 이것은 이미 언급했던 대로 구원자는 오직 예수님 한 분이심을 보여줍니다. 새 예루살렘의 문은 12문으로 하나님께서 설치하신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에 의해서 은혜 받는 법에 대한 것이라면 성막의 문은 오직 예수님만이 구원자이심을 시사합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하셨고, 행4:12에도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습니다. 예수님 말고 다른 문으로 들어가는 자는 모두 잘못 인도하는 절도요 강도며 그 길은 시망길이요 지옥길입니다.
2. 성막의 뜰문은 누구든지 예수님께로 오기만 하면 다 구원 받음을 보여줍니다.
16절 “이십 규빗의 장이 있게 할지니” 성막의 뜰문은 아주 컸습니다. 동쪽 50규빗 중에 20규빗이 문입니다. 우리 교회문은 몇 미터 되지 않지만 성막의 문은 무려 10미터가 됩니다. 300여평 되는 땅에 그토록 넓은 문을 내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런데 20규빗이란 넓다는 뜻도 되지만 2라는 숫자에 담긴 의미도 그것입니다. 그것은 증거의 수입니다. 10은 모두를 가리키는 만수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복음 증거를 듣는 사람들은 다 하나님께로 나올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그래서 듣지 아니하고 어찌 믿으리요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다 구원에 이르기를 바라십니다. 이 누구든지란 선하든 악하든 부자든 가난하든 건강하든 병들었든 배웠든 못 배웠든지 남녀노소 누구든지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세리도 창기도 왕도 제사장도 보통사람도 회개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가 성막 문을 보면서 담대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천국의 문은 크게 열려 있다는 것입니다. 주인이 사람들을 강권하여 내 집을 채우라 하실 때 어떤 사람이든지 무엇을 하든 사람이든지 가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옆에 달린 한 강도도 회개하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3. 성막 뜰문은 누구든지 예수님께로 오는 자는 소망을 얻음을 보여줍니다.
문이 동쪽으로 났는데 동쪽은 해가 뜨는 곳입니다. 해는 소망입니다. 이것이 천국문과 지옥문의 차이점입니다. 지옥문은 소망을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로 오는 자는 소망을 얻습니다. 영생의 소망 행복의 소망 든든한 소망 그 뿐 아니라 하나님의 위로를 받습니다. 이 문은 죄를 짊어지고 어둡게 왔다가도 나갈 때는 다 부리고 기쁨으로 나가는 문입니다. 홀메스와 라헤가 스트레스 수치를 계산했다고 합니다. 배우자가 사망할 때 받는 스트레스를 100으로 볼 때 이혼시 73% 질병 53% 은퇴 43% 성문제 39% 직업전환 시 36% 상사와 알력 23% 임신 30% 이사 20% 그런데 스트레스 수치가 200을 넘으면 병들기 시작하고 300이 넘으면 미치게 된다고 합니다. 혹시 200 300의 수치를 가지고 나왔습니까? 하나님 앞에 나와서 은혜를 받으면 울고 들어왔지만 웃으면서 나가게 될 줄 믿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하면서도 마음은 세상을 사랑하여 하나님과 멀었기에 그들 심령의 상처는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1:5-8에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 더욱 패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어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너희 땅은 황무하였고 너희 성읍들은 불에 탔고 너희 토지는 너희 목전에 이방인에게 삼키웠으며 이방인에게 파괴됨같이 황무하였고 딸 시온은 포도원의 망대같이, 원두밭의 상직막같이, 에워싸인 성읍같이 겨우 남았도다” 했습니다. 이런 심령 상태라면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성막의 문을 활짝 여신 것처럼 마음의 문을 여시기 바랍니다.
4. 이 문은 아름다운 4가지 색깔의 문입니다.
16절 “뜰 문을 위하여는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수놓아 짠” 청색은 생명의 색깔로 생명이신 예수님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문으로 들어가 예수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는 교훈입니다. 자색은 왕권을 의미하는 색깔로 나의 왕 되신 예수님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으면 우리 주님께서 우리 마음을 다스려 주십니다. 세상에서 방황하는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오면 그 방황은 끝납니다. 홍색은 피의 색으로 나를 위해 고난 받으신 에수님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죄인도 이 문으로 들어와 예수 믿으면 다 용서 받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늘게 꼰 베실은 흰색으로 무죄하시고 거룩하신 에수님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 믿으면 심령의 거룩함을 입혀주시고 변화되게 하십니다. 분명히 아셔야 할 것은 뜰문에 돈 달아놓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하면서 먼저 우리는 영적인 은혜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돈을 추구하면 돈도 은혜도 멀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찾으면 영육 간에 채우심을 받게 됩니다. 이 뜰문에만 들어오면 이러한 복을 받는다는 것이 뜰문의 문양에 다 나타나 있습니다. 진실로 내가 바로 되는 신령한 신앙에 관심 갖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5. 성막의 뜰문은 문턱이 없습니다.
즉 누구든지 들어가기 쉽습니다. 계3:20에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했습니다. 예수 믿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이니 쉬운 것입니다. 내가 이루어야 할 것을 우리 주님께서 다 이루어놓으시고 오라고 부르십니다. 그래서 이제는 그 은혜를 믿고 누리면 됩니다. 옛날 은행은 문턱이 높아서 아무나 돈을 빌려 쓰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은행은 웬만한 사람에게나 돈을 가져다가 쓰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나아와 은혜 받는 문은 이보다 그 문턱이 낮을 정도가 아니라 아예 없습니다. 문턱이 있다면 거지 나사로가 어찌 구언을 받았겠습니까? 문턱이 있다면 세리 마태 삭개오, 귀신들린 죄 많은 여자 막달라 마리아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겠습니까? 문턱이 있다면 저부터 들어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 편에서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믿음의 문제요 우리 관념의 문제입니다. 안 된다 못 한다 어렵다 난 불행하다 이런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진나라가 6국을 통일했는데 그 일을 한 공신 중에 상앙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상앙은 백성들의 신뢰를 받아야 정치를 잘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남문 곁에 석자 나무를 심고 거기 방을 붙였습니다. “이 나무를 북문 앞에 옮겨 심는 자는 황금 10근을 준다” 그런데 사람들은 농담인줄 알고 또 옮겨 심어도 주지 않을 줄 알고 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상앙은 다시 10근에서 50근으로 올리고 방을 붙였습니다. 사람들은 거금을 준다니까 비웃기만 하고 옮겨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한 사람이 장난 삼아 나무를 옮겼는데 상앙은 그에게 정말 금 50근을 주었습니다. 그 소문은 온 나라에 퍼졌고 그 후부터 사람들은 상앙이 무슨 말을 해도 믿었다고 합니다. 사람도 그렇거니와 우리 하나님을 왜 못 믿습니까?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그 모든 은혜를 믿고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막의 뜰문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귀한 진리를 우리는 잊지 맙시다. 구원자는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께로 오면 구원을 받습니다. 소망을 얻습니다. 영생을 얻습니다. 큰 은혜를 받습니다. 이 귀한 은혜를 온전히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번제단 2007.12.26 16:37 | 성막론 | http://kr.blog.yahoo.com/jjss0815/4743
번제단 (출27:1-8)
지난 번에는 성막의 뜰문에 대해서 공부했습니다. 오늘은 번제단입니다. 성막의 뜰문을 열고 들어가면 맨 먼저 나타나는 것이 번제단입니다. 이 번제단에 담긴 의미가 큽니다. 먼저 번제단은 어떻게 생겼는가 말씀드리면 제물을 태우기 좋게 만들어졌는데 크기는 가로세로 사방 다섯 규빗에 높이 세 규빗입니다. 집에서 쓰는 사각 되 모양을 확대한 것으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 모양에 안 중간 부분에 그물을 달아서 제물이 잘 탈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1. 번제단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단”이란 ‘미쯔하바’라 해서 ‘학살하다, 죽이다’는 뜻입니다. “번제”는 ‘오라’라고 하여 ‘올라간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동물을 잡아서 태우니 연기가 되어 위로 올라감에서 유래한 용어입니다. 번제는 먼저는 우리를 위해 자기를 온전히 드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상징하고 나아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우리 성도의 아름다운 모습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번제란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산제사요 영적인 예배입니다. 참으로 자신을 성령으로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번제의 재료는 무엇입니까?
1-2절에 “너는 조각목으로 만들되 그 단을 놋으로 쌀지며” 번제단은 아카시아의 일종인 조각목으로 만들어 놋쇠로 쌌습니다. 가장 궁금하게 생각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나무로 만들어 놋쇠로 싸면 번제단의 그 화염에 나무가 타지 않을까 하는 의문입니다. 그런데 영국 소방 당국에서 실험해 보았는데 신기한 것은 불 속에서도 나무가 조금도 타지 않더랍니다. 왜냐하면 밀폐된 나무는 산소가 없기 때문에 열을 받아도 연소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여기에 귀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놋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상징이고 조각목은 비천한 인성의 상징입니다. 즉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셨지만 다시 부활하신 우리 주님의 모습이요, 혹은 비천하고 약한 우리일지라도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를 의지하는 사람들은 심판의 불길에 타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단의 참소나 양심의 가책으로 심령에 맹렬한 불길이 있다 해도 예수님의 피공로를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3. 번제단의 크기입니다.
1절 하반절에 “장이 오 규빗, 광이 오 규빗의 단을 만들되 네모 반듯하게 하며 고는 삼 규빗으로 하고” 가로 세로가 5규빗인데 5는 고통의 수입니다. 짐승이 죽어 불타는 모습은 고통의 상징입니다. 또 한 죄와 결별하기가 그렇게 고통스럽습니다. 그리고 3은 하나님의 완전수입니다. 그러니까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고난을 시사하는 대목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우리 죄인을 대신하여 고난을 당하심을 시사해 줍니다. 그러므로 번제단은 죄 사함을 받는 곳이요, 죄를 버리는 곳이요, 세상과 이혼하고, 마귀와 결별하는 자리입니다. 성막에 여러 성물들이 있지만 번제단이 가장 큽니다. 이처럼 죄사함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이사야가 그랬듯 죄악의 잔재들을 성령의 불로 모두 태우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4. 번제단에서 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먼저, 피를 뿌립니다.
번제단 사면에 피를 뿌렸습니다. 이처럼 우리 죄가 사해지려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를 믿어야 합니다. 내 죄를 담당하신 그 공로를 믿을 때 죄사함이 있고 양심의 평안이 있습니다. 그런데 한 면만이 아니라 4방향 4면 모두 뿌렸습니다. 그것은 어떤 방행에서든지 내 죄가 용서 받았음을 시사합니다. 즉 현재의 죄도 사하시고 과거의 죄도 사하시고 미래의 죄도 아는 죄도 모르는 죄도 다 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죄사함에는 두 가지 구분이 있습니다. 믿음과 자백입니다. 제물을 안수할 때 이스라엘을 위한 제사는 제사장이 안수하지만 개인의 죄는 개인이 동물에 안수한다는 사실입니다. 안수는 죄의 전가를 의미합니다. 그런 다음 동물을 잡고 피를 뿌렸습니다. 이처럼 원죄는 자백하지 않고도 믿음으로 과거 현재 미래 모든 용서를 받지만 자범죄는 하나님께 자백함으로 용서를 받습니다. 물론 모든 자범죄를 다 알아서 고백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는 죄를 자백하며 진정으로 돌이키시고 용서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음은 불을 피웠습니다.
이 불은 사람이 만든 불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신 불을 간직했다가 사용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불이요 성령의 불입니다. 이것을 무시하고 광야에서 다른 불을 드린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는 불에 타서 죽었습니다. 번제단에 쓸 불은 언제 주었는가? 레9:22-24에 나옵니다. “아론이 백성을 향하여 손을 들어 축복함으로 속죄제와 번제와 화목제를 필하고 내려오니라 모세와 아론이 회막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백성에게 축복하매 여호와의 영광이 온 백성에게 나타나며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사른지라 온 백성이 이를 보고 소리 지르며 엎드렸더라” 대하 7:1-2을 보면 솔로몬 성전의 쓸 불도 하늘로부터 임합니다.
이 불은 하나님의 불이요 성령의 불의 상징입니다. 행 2장을 보면 성령의 불이 하늘로서 임했습니다. 번제단의 불이 보여주는 교훈은 우리 죄를 없애 주기 위해서는 성령의 불이 필요함을 보여줍니다. 이사야도 자신의 부정을 보았을 때 스랍천사가 제단에서 불을 가져다가 부정을 제해 주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번제단의 과정은 아주 중요합니다. 이 과정이 없이 은혜의 성소 안에 들어가려고 하니까 안 되는 것입니다. 은혜생활을 원하시고 능력 받기를 원하신다면 이 과정을 철저히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제단 네 귀퉁이에는 뿔이 있었습니다.
뿔은 권세를 가리킵니다. 우리가 보혈공로에 굳게 서고(칭의) 성령의 불로 태움을 받으면(성화) 그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또 그 어떤 보배라도 받을 수 있는 권세가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이 번제단의 과정을 철저히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복이 옵니다. 그래야 사단이 물러갑니다. 그래야 저주가 사라집니다. 그래야 평안이 옵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의인은 간구하는 힘이 강합니다.
5. 그럼 번제단에 쓰이는 기구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먼저 재 담는 통이 있습니다.
제물을 태우고 나면 남은 재를 여기 담습니다. 만약 재를 함부로 취급하면 여기저기 날아다녀서 더럽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기 때문에 잘 처리해야 합니다. 식물이 타면 카본이라 하여 독극물까지 처리하는 좋은 재료가 되나 고기가 타지면 암을 유발하는 벤조피아렌이라는 독극성 물질로 변하게 됩니다.
이처럼 좋은 성도는 사람의 죄 찌꺼기를 퍼뜨리지 않고 꼭 모아서 갖다 버립니다. 죄라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만 사람의 마음도 아프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하여 죄성을 처리해야 하며 혹은 남의 죄를 용서하고 남의 약점을 위해 기도하고 그 약점을 덮을 줄 아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번제의 온전함의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지 않으면 우리 천부께서도 그렇게 하시겠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부삽이 있습니다.
이 부삽은 번제단에서 탄 재를 떠 담을 때 사용합니다. 이처럼 서로의 약점을 발견하면 잘 긁어내어서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형제의 약점을 보았다면 비난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처리하라고 맡겨주신 것으로 알고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재가 채이면 번제를 드릴 수 없음 같이 용서하고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 양심이 거리끼게 됩니다.
다음에 대야가 있습니다.
대야는 제물을 제단에서 태우기 위해서 담아 나르는 도구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물을 늘 갖다 바쳐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예배입니다. 찬송입니다. 기도입니다. 선행입니다. 봉상비니다. 전도입니다. 이것을 잘 하면 우리 영혼이 복을 받습니다.
다음에 고기 갈고리가 있습니다.
가져온 고기를 제단 위에 올려놓는 도구입니다. 이것은 다름 아닌 사랑입니다. 우리는 사랑의 갈고리로 모두 하나님을 잘 섬기도록 격려하고 권면하십시다.
그리고 불 옮기는 그릇이 있습니다.
성막이 이동할 때 불씨를 여기에 담았습니다. 절대 성령의 불을 꺼쳐서는 안 된다는 교훈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불길을 퍼뜨려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도 성령의 불을 던지려고 오셨습니다. 성령의 불 꺼지면 희망이 없습니다. 영혼이 죽습니다. 부흥이 중단됩니다. 문제가 생겨납니다. 그러므로 이 심령 저 심령 성령의 불을 던지십시다. 열심 있는 신앙생활운동이 바로 그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이제 번제단에서 죄 문제를 해결하십시다. 예수 보혈로 죄 사함 받고 성령의 불로 태우심을 받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십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거룩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물두멍 2007.12.26 16:38 | 성막론 | http://kr.blog.yahoo.com/jjss0815/4744
물두멍 (출30:18-21)
이 시간에는 성막의 물두멍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영적생활에서 심령이 약해지고 거의 죽을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과 영적인 교통이 끊어지고 주님과 아무 상관이 없어지는 현상이 있습니다. 그것은 겔18:20에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한 대로 심령이 죄의 오염으로 그렇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심령을 씻어야 합니다.
이 씻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실 때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가 너무나도 황송해서 제 발을 절대 씻기지 못합니다 할 때 내가 너를 씻기지 않으면 너와 상관이 없느니라 하셨습니다. 그만큼 씻음이란 중요합니다. 씻지 않으면 예수님과 영적인 교통이 끊겨지고 씻지 않으면 본문 20절에 나타나듯 그 심령이 죽게 됩니다. 이러한 영적인 죽음의 현상을 구약에서는 육체의 죽음을 통해서 묘사하였습니다.
이러한 씻음의 진리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설치하게 하신 것이 바로 물두멍입니다. 물두멍이란 물 담는 놋대야입니다. 이 놋대야에서 아론과 그 아들 제사장들이 손과 발을 씻고 성소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니까 이 놋대야의 씻음의 과정이 없이는 성소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만큼 중요한 과정이 이 과정입니다.
이처럼 이 과정이 없이는 영의 세계가 열리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본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히12:14에도 “화평함과 거룩함이 없이는 주를 보지 못하리라” 했습니다. 이 사실을 잘 묘사해 주는 것이 성막의 물두멍이요, 계시록이 보여주는 천국의 모습입니다(계22:14).
그럼, 차근차근 물두멍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 물두멍의 재료입니다.
18절에 “너는 물두멍을 놋으로 만들고” 그랬습니다. 출38:8을 보면 “회막에서 수종 드는 여인들의 거울로 만들었더라” 했습니다. 먼저 못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공로가 아니라면 씻음이 없음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벧전1:18-19에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했습니다.
그런데 회막 여인들이 쓰던 놋거울로 만든 이유는 무엇일까요? 성막은 이런 상징적인 면이 많기 때문에 쉽게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거울은 자기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특히 회막에서 봉사하는 여인들은 자신들의 모습을 더욱 단정히 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거울에 비추어 보고 거룩한 회막 여인들처럼 정결하게 씻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이 거울이 된다는 해석은 제 해석이 아닙니다. 약1:22-23에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물두멍의 재료만 봐도 그 출처만 봐도 무엇을 의미하는 지 알 수 있습니다.
2. 물두멍의 내용입니다.
18절 하반 절에 “그 속에 물을 담으라” 했습니다. 그러니까 물이 물두멍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물의 여러 기능 중에서 씻는 기능이 강조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물은 여기서 몇 가지의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는 성령의 씻음입니다. 고전6:11에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엎디어서 은혜 받을 때 우리의 심령이 깨끗해집니다.
그 다음에 씻음은 말씀의 씻음입니다. 엡5:26에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그랬습니다. 말씀의 씻음에는 이러한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서 죄를 사해주신 그 용서의 복음을 듣고 믿을 때 우리 양심이 자유를 얻으며 깨끗이 씻어집니다. 혹은 성경을 보면서 우리가 고쳐 나가는 것도 씻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말씀을 보면서 그 말씀을 믿고 감사하고 깨닫고 회개하며 성령으로 새롭게 함을 받아야 합니다.
3. 물두멍의 위치입니다.
18절 중반에 “그것을 회막과 단 사이에 두고” 그랬습니다. 먼저 물두멍은 회막뜰에 위치했습니다. 성막 뜰 밖이 아닙니다. 성막 뜰 안이란 하나님 백성들에게 관계된 도구입니다. 그러므로 물두멍은 이미 예수 믿어 구원을 얻은 성도들이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미 예수 믿어 중생한 사람은 목욕한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나 목욕했어도 손발은 시시때때로 씻어야 하듯이 중생했어도 늘 씻어야 합니다.
어느 교파에서는 이미 속죄함을 받은 사람들은 씻을 필요조차 없다고 하는데 이것은 성경 전체를 다 보지 못한 결론입니다. 이미 중생해서 영원한 속죄를 받았어도 심령의 때는 존재합니다. 그래서 성도들도 마음에 죄가 있고 근심과 염려가 있습니다. 이것을 깨끗이 씻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칭의적으로는 의인이요 성화적으로는 아직 죄인입니다.
그리고 단과 회막 사이에 둔 것은 제사장이 단에 제사하든지 회막에 들어가든지 씻지 않고서는 안 됨을 교훈합니다. 20절에서 보듯이 번제단 봉사 시에도 반드시 물두멍에 나아가 손발을 씻게 되어 있습니다. 신약에서 손과 발은 행실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영적생활에서 씻음은 기본입니다. 씻음이 신령한 삶의 기본입니다. 어떻게 신령한 성도가 될 것인가 고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씻음 없이 신령함은 없습니다.
4. 물두멍의 크기입니다.
특이하고 참으로 이상한 것은 성경이 다른 기구들에 대해서는 크기를 그토록 자세히 가르쳐 주시는데 물두멍에 있어서는 그 크기를 가르쳐 주시지도 않고 또 몇 번 씻으라는 말씀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가르쳐 주시지 않음 자체가 귀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그것은 죄의 다양성을 암시해 줍니다. 사람마다 죄가 클 수도 있고 작을 수도 있습니다.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고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도 있습니다(요일5:16). 모르고 지은 죄보다 알고 지은 죄도 있습니다. 쉽게 씻어지는 죄도 있고 오래 걸리는 죄도 있습니다. 어떤 면에 약점이 있는 사람은 그 약점 분야는 집착이 강해서 쉽게 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물두멍의 크기가 기록되지 않음은 각각의 죄를 씻는 수준이 다름을 시사합니다.
그럼 언제까지나 씻어야 할까요? 그 답은 다 씻어질 때까지입니다. 나아만 장군이 요단강에서 일곱 번 씻었는데 문자적으로 일곱 번 씻은 것이 사실이지만 거기서 보여주는 교훈은 7은 완전수입니다. 즉 완전히 씻어야 함을 우리에게 교훈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와 그 보좌 앞의 물두멍에서 다 씻어 새털같이 가볍고 아름다운 심령이 되시기 바랍니다.
5. 물두멍의 모양은 어떠합니까?
왕상7:23에 “그 모양이 둥글며” 그랬습니다. 이 둥근모양은 하나님의 죄인을 용납하시는 사랑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죄를 가지고 하루에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가지고 나오면 받아주십니다. 그래서 사1:18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키우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회개하지 않을 때 바벨론의 칼을 사용하셨는데 오늘 이 시대에도 회개하지 않으면 율법의 칼 양심의 칼이 작용합니다. 그러나 순종하면 풍성한 은혜의 양식을 먹게 됩니다. 이 원리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동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나아오면 하나님께서는 흰 눈과 같이 양털과 같이 희게 해 주시고 영혼의 풍성한 양식으로 먹여 주십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샘물과 같은 보혈은 수많은 인생들의 죄를 씻어주시고 계십니다.
6. 물두멍에 씻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19-21절에 “ 아론과 그 아들들이 그 두멍에서 수족을 씻되 그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 물로 씻어 죽기를 면할 것이요 단에 가까이 가서 그 직분을 행하여 화제를 여호와 앞에 사를 때에도 그리할지니라 이와 같이 그들이 그 수족을 씻어 죽기를 면할지니 이는 그와 그 자손이 대대로 영원히 지킬 규례니라” 했습니다. 한 마디로 씻지 않으면 죽습니다. 구약에는 육체가 죽었지만 신약에서는 대개 심령이 죽습니다. 범죄한 영혼은 죽으리라가 성경입니다. 물론 성도에게 완전한 죽음은 아니지만 범죄하면 그 심령이 죽습니다. 이 사실을 매일 경험하며 살고 있지 않습니까? 이제는 더 이상 반복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씻을 때 어떤 결과가 옵니까? 시124:3-4을 보면 여호와의 산에 오른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씻으면 하늘에 속한 사람이 됩니다. 욥17:9에는 “손이 깨끗한 자는 점점 힘을 얻느니라” 했듯이 씻은 사람은 능력이 임합니다. 깨끗이 씻으면 마귀도 도망합니다. 귀신이 돼지 떼에 들어갔음을 기억하세요. 이것은 깨끗한 심령에는 들어가지 못함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의 보상이 따릅니다. 삼하22:21에 “내 손에 깨끗함을 좇아 갚으셨으니” 이 기도처럼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사울에게서 이기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은혜의 물두멍에서 죄성을 깨끗이 씻으면 하나님께서 신령한 보배를 채워 주십니다. 그리고 깨끗한 사람을 귀한 그릇으로 사용해 주십니다. 가장 귀한 사람은 성령의 사람인데 깨끗한 심령이 되어야 은혜의 일군으로 써주십니다. 그리고 깨끗이 씻으면 하나님과 사귐이 있고 성도와도 교통이 있습니다(요일1:7). 그러므로 성막의 물두멍은 이렇게 놀라운 기능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막의 물두멍에서 우리를 용납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 나아가 씻으십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받아 누리시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성막의 널판과 띠 2007.12.26 16:40 | 성막론 | http://kr.blog.yahoo.com/jjss0815/4745
성막의 널판과 띠 출26:15-30
이 시간에는 [성막의 널판 그리고 아울러 띠]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동안 뜰 부분을 말씀드렸습니다. 이제는 성막 부분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 중에서 널판에 관한 말씀입니다. 널판이란 무엇인가? 성막의 벽을 이루는 부분입니다. 긴 판자를 둘러 세워서 벽을 이루게 합니다. 그래서 튼튼한 성막이 완성됩니다. 오늘 말씀에 어울리는 성경구절은 히12:1절의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 즉 장성한 그리스도인들에 관한 교훈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시는 성도되시기 바랍니다.
그럼 널판에 관해서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널판의 재료입니다.
15절 “너는 조각목으로” 그랬고, 29절 “그 널판들을 금으로 싸고” 그랬습니다. 29절 보면 띠 역시 조각목을 금으로 쌌습니다. 여기 재료는 조각목과 금입니다. 그러니까 조각목에 금을 싼 금널판입니다. 여기 조각목은 예수 그리스도의 비천한 인성을 뜻하고, 금은 다시 부활하신 신성을 뜻합니다. 즉 천한 가시목과 같은 주님이셨지만 다시 살으심으로 영광스럽게 되셨습니다. 이 진리를 우리에게 적용하면 우리의 구원이 주님의 죽으시고 다시 살으심의 은혜로 된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롬10:9에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그랬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살으심이 이토록 중요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죽으심과 살으심은 그 뿐 아니라 온전한 영광까지를 의미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살고 예수님과 함께 하늘에 앉혀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장성한 성도가 되려면 무엇보다 이 함께 되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먼저 잘 알고 서는 것입니다. 그 때 그 천한 가시나무 조각목이 금으로 싸여 영광스럽게 되듯 버림 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 괴수 같은 우리일지라도 에수님의 공로로 구원을 받고 영광스럽게 됩니다. 그래서 버림 받은 삭개오도 구원을 받았고, 버림 받았던 막달라 마리아도 구원을 받았으며, 버림 받은 강도도 구원을 받았습니다.
2. 널판의 모양입니다.
16-17절 “각 판의 장은 십 규빗 광은 일 규빗 반으로 하고 각 판에 두 촉씩 내어 서로 연하게 하되” 그러니까 아주 큰 널판입니다. 폭이 75센티 정도 되는 나무판이 5미터입니다. 이것을 금으로 쌌으니 가벼운 무게는 아닙니다. 하나가 아마 수십 키로 이상이 됐을 것입니다. 유대인의 전승 기록인 미드라쉬를 보게 되면 이스라엘 제사장들이 다 세울 수 있었는데 널판만은 못 세웠다고 합니다. 브살렐과 오홀리압도 세우지 못했습니다. 그 때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모세야 네가 가서 세어라. 내가 도와주마” 해서 모세가 세웠더니 하나님의 능력으로 쉽게 세웠다고 합니다. 이 전승이 보여주듯 이 황금널판은 대단히 크고 무거운 것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의문점은 어떻게 그렇게 넓은 조각목을 구할 수 있었을까 하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조각목이 수백년 자라지 않는다면 그만큼 큰 것을 얻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역시 미드라쉬에 기록된 전설에 의하면 야곱이 애굽으로 들어갈 때 시내산에서 하룻밤을 자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야곱아 네가 네 자손과 함께 애굽으로 들어가지만 앞으로 다시 나오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곳을 통과하게 될 것이다. 이 곳에서 내 집을 지으리라. 이 곳에 나무를 심고 들어가라” 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내용은 성경은 아니기 때문에 참고만 하면 되겠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만큼 조각목이 오래되고 거대한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성도들이 누리는 구원의 풍성함입니다. 그런데 숫자에 담긴 의미로 보아도 충만한 분량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길이가 십 규빗의 10은 장성한 만수입니다. 거기다 광이 한 규빗 반에서 0.5가 더해지는 것은 되고도 남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그리스도의 충만하신 분량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 성도들도 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충만한 분량까지 자라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계획하신 우리의 설계도를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엡4:13-15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귀히 쓰이는 하나님 나라의 귀한 널판이 되려면 영적으로 장성해야 합니다.
3. 널판의 수효입니다.
20절 “성막 다른 편 곧 그 북편을 위하여도 널판 스물로 하고” 이렇게 남편에 널판이 스무 개, 북편도 널판이 스무 개, 서편에는 널판이 6개에 모퉁이에 2개 더해서 8개 합하면 모두 48개의 황금 널판이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성막 들어오는 입구 동편에는 널판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출입구가 되기 때문입니다. 널판이 48개란 우리 신앙의 원만성과 완전성입니다. 구체적으로 20은 완전 갖춤 등을 의미하는 구비수 10의 두 배로 된 수로서 이것이 두 배일 때는 영육 간에 잘 갖추어짐을 의미합니다. 6은 사람이나 육신이나 짐승이나 세상의 수요, 2는 증거의 수입니다. 이 수효가 보여주는 교훈은 이것입니다. 우리 신앙이 보이는 면 보이지 않는 면 영육 간의 생활적인 여러 면에서 하나님 앞과 사람들 앞에서 원만하고 완전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한 편만 잘한다고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그리고 교회생활만이 아니라 가정과 사회생활도 원만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겨자씨와 같은 작은 천국의 씨지만 자라고 자라서 모든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들어오는 입구가 막히지 않았듯이 우리의 신앙생활이 이렇게 될 때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 전도이 문이 열립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이 예수 잘 믿으면 우리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옵니다. 대신 잘못하면 우리로 인해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오지 않게 됩니다. 그러니까 전도하는 것도 교인들이 하지만 전도 길을 막는 것도 교인들이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예수님처럼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 받고 칭송 받으시기 바랍니다.
4. 널판의 받침입니다.
19절 “스무 널판 아래 은 받침 마흔을 만들지니 이 널판 아래에도 그 두 촉을 위하여 두 받침을 만들고” 이 말씀대로 각 널판마다 아래에 은 받침을 두개씩 놓았습니다. 그러니까 널판이 모두 48개이니까 은 받침은 96개입니다. 그리고 “두 촉을 위하여” 라는 말씀이 있는데 두 촉과 은받침과 무슨 상관이 있어서 이렇게 말씀했는가? 먼저 촉이란 서로 묶어지기 위하여 아래 튀어나온 부분을 가리킵니다. 은 받침은 널판을 받칠 뿐 아니라 17절을 참고할 때 은 받침은 이 촉들은 연결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은 받침에 구멍이 뚫려 촉이 들어가 널판들이 연결되게 합니다. 그러니까 이 은 받침이 없으면 널판도 설 수 없고 널판이 틈이 납니다. 그래서 은 받침이 중요합니다. 그럼 은 받침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을 알기 위해서 이 은은 누가 드린 것인가? 출30:14절을 보면 이십 세 이상의 군사로 뽑힌 이스라엘의 장정들이 드렸습니다. 이 은은 매년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입니다. 그러므로 이 은 받침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는가? 장성한 신앙이 되려면 예수님의 군사와 같이 견고하게 예수 복음에 서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우리는 장정과 같이 진리에 서서 싸워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에도 힘써야 합니다. 이 기초가 잘 되어야 합니다. 초대교인들이 그렇게 장성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복음과 기도하는 경건생활을 잘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 이름과 복음을 위해서 목숨을 내어 놓았고 기도에 생명을 걸었습니다. 이것이 은 받침입니다. 이 은 받침 역할이 제대로 안되어 틈이 벌어지면 그것이 바로 시험입니다. 그래서 말씀이 부족하면 사탄이 시험을 합니다. 또 기도가 부족하면 사단이 시험을 합니다. 그러므로 장성한 성도가 되기 위해서는 용사의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5. 널판의 금띠에 대해서 말씀드립니다.
28-29절 “널판 가운데 있는 중간띠는 이 끝에서 저 끝에 미치게 하고 그 널판들을 금으로 싸고 그 널판들의 띠를 꿸 금고리를 만들고 그 띠를 금으로 싸라” 이 널판들이 하나의 울타리로 묶어지려면 띠가 필요했습니다. 널판에는 고리가 밖에는 상하 4단으로 달려 있고, 널판 중앙 부분에 속으로 띠를 꿰게 되어 있어 이 모든 것을 장치하면 튼튼한 벽이 만들어집니다. 그러니까 널판 중앙 부분을 꿰뚫은 띠는 속에 위치하여 보이지 않습니다. 이 띠는 모두 조각목에 금으로 쌌습니다. 여기 나무는 예수님의 인성이요, 금은 신성이나 믿음의 상징입니다. 고리는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이 띠는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요 성령의 은혜요 성도들의 믿음이요 사랑입니다. 이것이 있어야 하나가 됩니다. 먼저 십자가로 하나가 됩니다. 그래서 엡2:16에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했습니다. 또 성령으로 하나가 됩니다. 그래서 엡4:3에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했습니다. 이 띠는 보이지 않는 띠입니다. 그리고 사랑으로 하나가 됩니다. 그래서 골2:2에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그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이 서로 늘 은혜를 받고 은혜를 끼칠 때 영적성장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서 주시는 은혜, 지체를 통해서 주시는 은혜가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우리 성도들이 자기 지체와 직분과 은사의 달란트를 통해 서로 봉사함으로 온전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천국의 널판과 같이 진리에 서고 서로 서로 도우므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장성함으로 하나님 나라의 그 축복을 받아 누릴 뿐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 앞으로 달려 나오게 되는 귀한 은혜를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막의 덮개 1 2007.12.26 16:41 | 성막론 | http://kr.blog.yahoo.com/jjss0815/4746
성막의 덮개 1 출26:1-14
이 시간 말씀의 제목은 “덮개” 성막의 덮개입니다. 오늘은 부흥회 참석을 위해서 간단히 말씀하도록 하겠습니다. 덮개란 성막의 지붕입니다. 성막은 4겹의 덮개로 덮었습니다. 맨 먼저 덮는 것이 청색 자색 홍색 가늘게 짠 베실로 만든 세마포 덮개입니다. 그 위에 염소털로 짠 덮개를 덮었고, 세 번째 덮개는 붉은 물들인 수양의 가죽이며, 맨 위 밖에는 해달의 가죽으로 덮었습니다.
왜 한 가지로만 덮어도 될 것을 이렇게 네 겹으로 덮도록 하셨을까요? 거기에는 모두 복음적인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이 덮고 또 덮고 또 덮으시고 또 덮으시기에 우리들이 행복한 존재입니다.
그럼 구체적으로 각 덮개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1. 제 1덮개인 세마포 덮개의 의미입니다.
출26:1 “너는 성막을 만들되 앙장 열 폭을 가늘게 꼰 베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로 그룹을 공교히 수놓아 만들지니” 이 덮개는 넓이가 10폭인데 5폭씩 두 개를 만들어 연결시켰습니다. 그리고 이 덮개는 청색 자색 홍색 백색실로 짰습니다. 그러니까 상당히 아름다운 천연색 천입니다. 이미 언급한 대로 청색은 생명이신 그리스도, 자색은 왕 되신 그리스도, 홍색은 고난당하신 그리스도, 백색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이는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영화롭게 하신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나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구원의 큰 사랑이 우리를 덮으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롬8:34에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랑의 하나님이 우리를 덮고 계신 한 우리는 영원히 구원의 백성입니다.
2. 제 2덮개인 염소털로 짠 덮개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7절 “그 성막을 덮는 막 곧 앙장을 염소털로 만들되 열한 폭을 만들지며” 이 덮개는 염소털 모직입니다. 이 염소털 모직은 세마포 덮개 위에 덮어야 하기 때문에 세마포보다 가로 세로 한 폭씩 즉 길이로는 두 규빗씩 더 컸습니다. 성경에서 염소는 제물로 쓰였는데 그러므로 염소털은 버림 받은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높고 높은 하나님의 보좌를 떠나 낮고 천하게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하심입니다. 이렇게 대신 버림을 받으신 예수님이시기에 우리는 다시는 버림을 받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추하고 부족하고 문제된 것들을 다 지셨습니다. 가난도 지셨습니다. 질고도 지셨습니다. 저주도 지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염소털 덮개는 축복의 장막입니다. 예수 잘 믿으면 하나님께서 축복으로 덮어씌우십니다.
3. 제 3덮개는 붉은 수양의 가죽입니다.
14절 상“붉은 물들인 숫양의 가죽으로 막의 덮개를 만들고” 양은 죄를 속죄하는 대속의 대표적인 제물입니다. 이 수양 가죽을 붉은 물을 들이도록 했습니다. 붉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공로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모든 죄를 덮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우리의 어떤 죄라도 다 덮으시고 용납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장막이 바로 보혈의 장막입니다. 그래서 사1:18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하셨습니다. 사43:25에도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사44:22에는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같이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 이렇게 회개하는 자의 죄를 덮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4. 마지막 제 4덮개는 해달의 가죽입니다.
14절 하“해달의 가죽으로 그 웃덮개를 만들지니라” 여기 해달은 물개입니다. 이 해달은 땅과 물을 마음대로 드나들면서 승리하는 활동이 능한 동물입니다. 그리고 털이 물에 강해서 비가 쓰며 들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시험을 이기시는 능력의 예수를 상징합니다. 이것이 능력의 장막입니다. 바울에게도 이 장막이 있었지요? 고후12:9에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에서 여기 능력으로를 원문을 보면 능력의 장막으로 라고 되어 있어요. 그래서 해달의 가죽이 궂은비도 이슬도 바람도 햇빛도 다 이기는 것처럼 하나님의 능력이 다 이기게 하십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영광이 천막을 치실 것을 말씀합니다. 사4:5-6에 “여호와께서 그 거하시는 온 시온 산과 모든 집회 위에 낮이면 구름과 연기, 밤이면 화염의 빛을 만드시고 그 모든 영광 위에 천막을 덮으실 것이며 또 천막이 있어서 낮에는 더위를 피하는 그늘을 지으며 또 풍우를 피하여 숨는 곳이 되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럼 이 귀한 축복을 어떻게 받아 누릴까요? 예수를 구주로 믿고 하나님 앞에서 죄 씻음을 받고 하나님을 경외할 때 누립니다. 계7:14-17에 “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저희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지니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것이 이처럼 안전하고 복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잘 믿고 이 귀한 은혜를 지상에서나 천상에서나 영원히 누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막의 덮개 2 2007.12.26 16:42 | 성막론 | http://kr.blog.yahoo.com/jjss0815/4747
성막의 덮개 2 출26:1-14
이 시간에는 지난 시간에 이어서 “성막의 덮개”에 대해서 계속하여 말씀드립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성막의 덮개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덮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주보에 소개 되어 있듯이 천연색 세마포 덮개는 죽으셨으나 다시 다신 그리스도로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하나님의 큰 사랑을, 염소털로 짠 덮개는 우리를 위해 낮게 오셔서 버림 받은 예수님으로서 우리의 질고와 저주까지도 제거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붉은 수양의 가죽 덮개는 속죄 제물이신 그리스도로서 우리의 자범죄까지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해달가죽의 덮개는 시험을 이기시는 예수님으로서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뜻합니다. 이 놀라운 사랑을 다 받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어떻게 전달됩니까?
1.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전달 됩니다.
4절 “그 앙장의 연락할 말폭 가에 청색 고를 만들며 다른 연락할 말폭 가에도 그와 같이 하고” 성막의 제 1, 2덮개는 길게 두 쪽으로 만들어 지붕에서 갈고리로 연결했습니다. 그 때 갈고리를 끼울 양 말폭 가에 뚫은 구멍이 바로 고입니다. 그런데 이 고의 색깔이 청색입니다. 청색은 생명의 색깔입니다. 이 청색 고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왜 덮개의 고를 청색으로 했을까요? 이것은 죽느냐 사느냐 가장 중요한 생명의 말씀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왜 구멍을 뚫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믿음으로 꿰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왜 두 쪽으로 하여 서로 고가 짝이 되어 마주 보게 했습니까? 신구약의 말씀을 잘 깨달아 확실한 믿음에 서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약만 가지고도 구원은 받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결론을 구약에 적용함을 통해서 신앙생활하는 법을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성막을 통한 구체적인 설교가 그 예입니다.
이 고를 통해 보여주는 진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아무리 복음으로 준비되어 있어도 우리가 믿지 않으면 영생을 얻지 못합니다. 그래서 히4:2에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 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예수님의 복음을 믿음으로 잘 붙들어 꿰어 메야 합니다.
이미 언급했듯 네 종류의 사랑 모두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구원하신 그 사랑을 믿고 영생을 얻으며, 우리의 질고와 저주까지도 지신 그 은혜를 믿고 자유함을 받고, 우리의 죄를 고백함으로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는 그 사랑을 받아 시험을 이겨야 합니다. 그래야 그 은혜가 내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믿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믿음이 자라야 합니다. 롬1:17에 “복음에는 하나님의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했습니다. 그래서 벧전1:9에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했습니다. 이 믿음은 은혜로 와지는 것이니 잘 믿기 위해서 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2.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그리스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덮개의 갈고리는 금과 놋의 두 종류 갈고리로 되어 잇습니다. 세마포 덮개는 6절에 나와 있듯 금 갈고리입니다. 그러나 그 위에 덮는 염소털 덮개는 11절에 나와 있듯 놋 갈고리입니다. 이 금과 놋의 갈고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은혜입니다. 이 금은 신성의 상징이니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아들 되심이요, 놋은 고난과 심판을 상징하는 것이니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그 육신의 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려면 이 갈고리를 잘 걸어야 하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곧 예수님께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이 고백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 고백 따라 영생이냐 영사냐가 결정됩니다.
마16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이렇게 구원을 확신시켜 주셨습니다.
요일3:23-24에도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우리의 구주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 금과 놋의 두 갈고리는 아주 중요합니다. 이 갈고리를 채웠느냐에 따라 구원의 여부가 결정됩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는 이단 분별법도 됩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적그리스도입니다. 또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도 적그리스도입니다. 즉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하나라도 부인하는 자가 적그리스도예요. 하나라도 부인하면 구원 받은 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갈고리를 잘 걸으시기 바랍니다. 잘못 믿으면 영생이 없어요. 이단이란 지엽적인 문제가지고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구원과 관련된 중요한 문제와 관련됩니다. 그러므로 이단이 되면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물론 나와 다르다고 아무나 이단이라고 해서는 안 되겠지요? 이렇게 성경은 우리 신앙을 정확하게 진단해 주고 어떻게 믿을 것인가 가르쳐 줍니다.
3. 성령의 부어주심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임합니다.
6절 “금 갈고리 오십을 만들고” 11절 “놋 갈고리 오십을 만들고 ” 이 놋과 금 갈고리는 무엇일가요? 이미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라 했습니다. 그러니까 갈고리도 결국은 예수님이예요. 그렇다면 50개씩의 갈고리는 무엇일까요?
성막 학자인 솔타우는 하나님께 왜 하필이면 갈고리가 50인지 가르쳐 달라고 기도하던 중에 성경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성경에 예수님을 의미하는 단어가 50개가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을 소개하면 강하신 하나님, 전능하신 여호와, 여호와, 아들, 하나님의 아들, 아버지의 독생자, 첫 태생, 말씀,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영광, 영생, 처음과 나중, 임마누엘, 예수, 메시야, 주, 영광의 주, 생명의 왕, 평강의 왕, 영원한 아버지, 창조자, 확증자, 하나님의 거룩한 자, 동일하신 자, 놀라움, 상담자, 사람의 아들, 여인의 씨, 부활, 영의 소생, 빛, 진리, 의, 길, 의의 태양, 새벽별, 아멘, 만왕의 왕, 만물의 상속자, 다윗의 뿌리, 다윗의 자손, 목자, 하나님의 어린양, 반석, 진리의 증인, 보냄을 받은 자, 구속자 등입니다. 즉 이런 주님이 계시기에 우리가 든든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솔타우의 말대로 이 50개의 이름은 우리에게 귀한 은혜가 됨은 사실입니다.
성경 해석이란 솔타우처럼 신비한 방법으로도 아는 경우가 있지만 성막은 충분한 비유로 나타나 있기 때문에 성령의 도우심으로 충분히 성경 안에서 풀 수 있습니다. 즉 50 갈고리라 해서 꼭 50개의 이름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야 하기보다 50이 주는 의미를 보아야 합니다. 50은 오순입니다. 그러니까 오순절 성령강림과 깊은 관계가 있는 수입니다. 그리고 50개 50개 모두 100개의 의미도 보아야 합니다. 제 3, 4덮개에 대하여는 그 수효가 나와 있지 않기 때문에 성경이 계시하신 데까지만 가야 하기 때문에 제 1,2덮개의 갈고리만 가지고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즉 50+50=100개는 온전 구비수 10의 제곱이니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붙들어 주시는 하나님의 완전하신 성령의 은혜를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솔타우가 말한 예수님의 은혜로운 이름과 같은 해답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은혜로운 이름은 결국 우리에게 성령의 은혜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을 통하여 부어집니다. 그 때 회개하여 예수 믿게 되고 그 때 회개하여 참 신앙을 갖게 되며 저주도 물러가고 삶 자체가 변화하며 임재의식로 오는 참 행복감을 누리게 됩니다.
즉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이 완전하신 이름이 있기에 우리들도 하나님의 은혜로 온전히 구비된 사람으로까지 나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약1:4에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히12:2에도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도 주시고 체험도 주시고 훈련도 주시고 징계도 주십니다. 이 시간 우리 하나님에 대한 은혜의 갈고리가 잘 채워져 있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 은혜의 갈고리에 걸리면 하나님 앞에 나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하나님 안 믿으려고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갈고리란 엄청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귀한 축복의 부르심 앞에 더 이상 거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에게도 이 은혜의 갈고리가 있었기에 그 많은 것을 알고 체험하고도 교만해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갈고리가 있었기에 예루살렘에 가면 결박과 환난이 기다린다 하나 목숨 걸고 로마의 황제 앞에 서기 위해 달려갈 수 있었습니다. 이 하나님께 붙들리는 갈고리야 말로 복 중에 복입니다. 우리는 이 갈고리에 걸려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온전하게 준비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믿음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온전한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하나님께 구하십시다. 그래서 하나님의 온전한 은혜를 누리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휘장 2007.12.26 16:43 | 성막론 | http://kr.blog.yahoo.com/jjss0815/4748
휘장 (출26:31-33)
오늘은 여러분과 함께 성소의 휘장에 대해서 함께 공부하고자 합니다. 성소에는 두 휘장이 있습니다. 처음 성소에 들어갈 때 문 역할을 하는 휘장과 성소 안에서 지성소로 들어가는 휘장입니다. 흔히 성소의 휘장이라고 하면 두 번째 말씀한 휘장을 가리킵니다. 이 시간에는 이 휘장이 우리에게 주는 신령한 의미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 휘장은 인간의 죄의 담을 시사합니다.
사59:1-2에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그랬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휘장이 암시하는 바는 바로 죄의 담의 모습입니다. 인간이 마음껏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다름 아닌 죄 때문입니다. 만약 죄인이 하나님 앞에 나가면 죽고 맙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빛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추한 모습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적 생활에 있어서 보혈 공로를 잘 모를 때 거룩한 것을 의식하거나 율법 앞에 서게 되면 양심의 가책 때문에 영이 죽기 시작합니다. 영적 생활에 있어서도 그러한데 하물며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갈 때 어떠하겠습니까? 그러므로 휘장은 인간의 죄의 담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2. 이 휘장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입니다.
히10:19-20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했습니다.
휘장은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다는 표시인 동시에 이 곳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임을 동시에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나아가려면 반드시 이 휘장을 거쳐야 합니다. 성막에서 지성소로 들어가는 길은 이 길밖에는 없습니다. 지성소의 다른 3면은 모두 황금 입힌 조각목으로 되어 있어서 들어갈 길이 없습니다. 오직 이 한 길만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종교를 가지든지 천국에 가는 길이라는 다원주의는 진리가 아님이 여기서 증명됩니다.
3. 이 휘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합니다.
히10:20에 “휘장은 곧 저희 육체니라” 했습니다. 왜 이 휘장을 예수님의 육체라고 한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몸이 찢겨지심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상징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운명하실 때 성소와 지성소 사이의 휘장을 찢어주셨습니다. 그래서 복음서의 기록을 보면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운명하시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막15:37-38) 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거룩해서 아무나 출입할 수가 없고 또 휘장은 튼튼해서 전해오는 문헌에 의하면 두께가 15cm로 여러 마리의 황소가 당겨도 찢어지지 않는답니다. 그런데 이 휘장이 찢겨졌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찢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지성소가 훤하게 드러났습니다. 그러자 깜짝 놀란 제사장 300명이 달려들어 다시 꿰맸지만 꿰매자 말자 또 다시 찢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이 찢어진 사건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인간이 화목됨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엡2:14-18에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여 담대히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4. 이 휘장을 통과하여 나아갈 때 큰 은혜를 받습니다.
히4:16에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했습니다.
이 휘장을 통과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주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긍휼하심의 은혜입니다. 불쌍히 여겨주십니다. 사랑하여 주십니다. 그리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주십니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받는 은혜를 휘장을 통해서 발견합니다. 본문 31절에 “너는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짜서 장을 만들고” 그랬습니다. 청색은 생명의 색깔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게 됨을 보여줍니다. 자색은 왕의 색깔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 영적인 권세를 입혀주십니다. 또 홍색은 예수님의 보혈의 색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고 긍휼히 여겨 주시고 위로해 주십니다. 그리고 가날게 꼰 베실은 흰색으로서 성결의 색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 우리의 추한 인격을 거룩하게 변화시켜 주십니다.
그리고 이 휘장에는 구룹천사가 수놓아 있었는데 구룹천사는 하나님을 모시는 천사요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던 천사입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생명과이신 예수님을 막는 천사가 없어요.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운명하실 때 휘장이 찢어지면서 무덤에서 부활한 사람들이 있었던 것도 그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금지된 구역이 개방되어 영원한 생명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껏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를 인하여 살리라”(요6:53-57) 하셨습니다. 어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예수님을 먹는 것입니다.
5. 이 휘장은 좁은 의미에서 보면 우리 안에서 사라져야 할 옛사람의 휘장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성전의 휘장은 사라지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휘장도 사라졌는데 아직도 각인의 마음속에 있는 죄악의 휘장이 가로놓여 있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 속의 옛사람이 십자가의 공로로 사라지게 될 때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 안에 충만하게 됩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휘장이 예수님의 공로로만 갈라질 수 있음 같이 우리의 옛사람의 휘장은 예수 공로가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예수님의 공로를 우리에게 경험되도록 적용시켜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휘장은 불신의 휘장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멀리하려는 휘장이기기도 합니다. 내 마음대로 살려는 자아의 휘장이기도하고 교만의 휘장이기도 합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오셔서 성경에 덥힌 수건은 사라졌으나 아직도 마음에 덥힌 수건이 있다는 말고도 같습니다. 마15:7-9에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게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셨습니다. 이 시간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는 옛사람의 휘장이 다 사라지기를 바랍니다.
6. 그런데 휘장은 네 기둥에 달려 있었습니다.
출26:32에 “금 갈고리로 네 기둥 위에 드리우되” 했습니다. 휘장이 네 기둥에 달려서 지성소 앞을 가로막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4는 땅의 수입니다. 기둥은 십자가의 나무의 예표입니다. 그리고 갈고리는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섭리와 예정입니다. 그러므로 휘장이 네 기둥 갈고리에 달려 있음은 장차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가 오셔서 죄인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실 것을 묘사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달리실 때 우리도 함께 달렸으므로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도 역시 철저히 죽어져야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히12:14에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실 그 때 부활의 역사가 있었던 것처럼 우리 영혼이 살게 됩니다. 살뿐 아니라 그들이 거룩한 성에 들어간 것처럼 우리 영혼이 하늘의 영광을 맛보게 됩니다. 그래서 무엇보다 주의 은혜로 철저히 죽어짐이 필요합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이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휘장은 사라졌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공로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각지 마음의 휘장입니다. 하나님과 담 싸고 휘장치고 산다면 속히 회개하시기를 바랍니다. 용서의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옛사람의 휘장이 있다면 십자가 공로로 제거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먹고 마시며 즐거워 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은혜의 기쁨 속에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떡상 2007.12.26 16:45 | 성막론 | http://kr.blog.yahoo.com/jjss0815/4749
떡상 출25:23-30
오늘 우리 함께 공부할 말씀은 [떡상]입니다. 성막의 성소에는 세 가지 성구가 있었는데 그것은 등대와 분향단과 떡상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떡상이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리고 어떤 마음으로 먹어야 되는가? 그리고 어떤 사람만이 이 떡을 먹을 수 있는가?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먼저, 떡상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출25:23-28 “너는 조각목으로 상을 만들되 장이 이 규빗, 광이 일 규빗, 고가 일 규빗 반이 되게 하고 정금으로 싸고 주위에 금테를 두르고 그 사면에 손바닥 넓이만한 턱을 만들고 그 턱 주위에 금으로 테를 만들고 그것을 위하여 금고리 넷을 만들어 네 발위 네 모퉁이에 달되 턱 곁에 달라 이는 상 멜 채를 꿸 곳이며 또 조각목으로 그 채를 만들고 금으로 싸라 상을 이것으로 멜 것이니라”
간략히 말하면 여기 떡상은 떡을 진설하는 상입니다. 크기는 넓이 100, 폭 50, 높이 70cm의 낮고 작은 금상입니다. 재료는 조각목으로 만들어 금으로 쌌습니다.
1. 이렇게 귀하지 않는 조각목에 작고 낮은 것은 무엇일까요? 여기에 약 두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는, 우리 예수님에 대한 예표입니다.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낮고 천하게 세상에 오실 것을 예표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베들레헴에 오셨는데 베들레헴의 뜻이 무엇입니까? 떡집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아주 우리의 생명의 떡이시라는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 말의 밥그릇인 구유에 오셨습니다.
다음은, 우리들에 대한 교훈적인 의미입니다. 즉 이 낮고 작은 떡상은 우리가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전에서 일하는 제사장들의 금기사항이 있었는데 그것은 앉아서 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떡을 먹을 때마다 낮은 상 연고로 언제나 허리를 굽혀서 먹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의 고대 문서에 “내가 허리를 굽혀 주의 떡을 먹을 때에 내가 나를 낮추었더니 주께서 내 영혼을 만족케 하시고” 라는 표현이 많이 나타납니다. 여기에는 귀한 진리가 숨어 있습니다. 우리가 겸손해야 영생의 떡을 먹습니다. 겸손해야 예수도 믿게 되고 겸손해야 하나님의 말씀도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베다니의 마리아도 예수의 발아래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것이 말씀 듣는 자세입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역사가 나타납니다(살전2:13).
2. 또 떡상의 특징은 손바닥 높이의 태도리가 있는 것입니다.
출25:25 “그 사면에 손바닥 넓이만한 턱을 만들고” 이렇게 떡상의 턱을 높게 만든 것은 무엇일까요? 떡이 떨어짐을 방지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손바닥이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알아야 합니다. 손은 행함입니다. 말씀을 들었으면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떡이 땅에 떨어져서야 되겠습니까? 이와 같이 말씀이 땅에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그 말씀대로 행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할 때도 무교병을 먹었는데 그 자세가 아주 중요합니다. 출12:11에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제는 여행자가 급히 먼 여행을 떠나기 위해 행장을 갖추듯 말씀의 떡을 순종의 자세로 먹도록 하십시다. 가장 복 있는 사람은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입니다. 다음은, 진설병에 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레24:5-7에 “너는 고운 가루를 취하여 떡 열둘을 굽되 매 덩이를 에바 십분 이로 하여 여호와 앞 순결한 상 위에 두 줄로 한 줄에 여섯씩 진설하고 너는 또 정결한 유향을 그 매 줄 위에 두어 기념물로 여호와께 화제를 삼을 것이며” 했습니다.
진설병에 관하여 성경에 지시한 말씀을 보면 고운 가루로 만들어라, 진설병은 기름을 부어 반죽한다, 열둘을 만들어라, 반드시 구워서 만들어야 한다, 떡 하나의 크기는 에바 십분의 이 즉 4.4리터 그러니까 대승 두되가 넘는 떡덩입니다, 그리고 두 줄로 쌓아라, 다른 떡을 올려서는 안 된다, 매 안식일마다 새 떡을 진설하라, 항상 진설되어 있어야 한다, 진설병 위에 유향을 놓아라. 성소에 봉사하는 제사장만이 먹을 수 있고, 물린 후에 먹어라 등의 규칙입니다.
이 진설병을 예수님의 관점에서 살펴보면 진설병이 고운 가루이듯 예수님은 무흠하신 분이시고, 열둘이듯 하나님의 백성들 모두를 위해서 오셨고, 구워서 만들 듯 고난을 통하여 우리의 떡이 되셨고, 기름으로 만들었듯 예수 안에 성령이 계시며, 항상 떡이 있었듯이 예수님은 우리의 영원한 생명의 양식이 되시고, 떡 위에 유향이 있었듯이 우리를 위해 지금도 중보자가 되시는 분이심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 진설병을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생각해 보면 이 고운 가루의 떡은 바로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임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대충 대충의 말씀이 아닙니다. 또 이 떡들은 기름과 함께 반죽했는데 기름은 성령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성령으로 영감된 말씀임을 보여줍니다. 또 12개의 12는 선택수로 하나님 백성들을 가리킵니다. 즉 이 떡은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이 반드시 먹어야 할 영의 양식입니다. 또 떡을 두 줄로 여섯 개씩 진설함은 둘은 증거의 수로서 하나님의 말씀은 틀림없는 진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설된 떡 위에 유향을 놓았는데 유향은 기도로서 성경은 반드시 성령의 감동으로 이해됨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7일 후에 먹었듯이 충분히 말씀이 묵상된 후에 먹어야 합니다. 어쩌면 이렇게 진설병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비유하고 있는지 감탄스럽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생명의 떡도 먹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예수는 믿어야 하고, 말씀은 날마다 상고해야 합니다. 욥23:12에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일정한 음식보다 그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구나” 했습니다. 이 욥의 말씀 신앙을 그대로 실천한 사람이 무디 선생입니다. 그는 말씀을 대하기 전에는 결코 식사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가지고 식사 전에 말씀을 묵상하고 취하는 생활을 일생 동안 지켜 나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역사 속에 몇 사람이 나올까 말까한 귀한 전도자였던 것입니다. 크고 귀한 종이 되고 싶으십니까? 방법이 있어요. 성경을 많이 보십시오. 그러나 반드시 성령의 조명을 받아 보십시오. 그러면 어떤 방향에서든지 반드시 세상을 바꿀 귀한 일군이 될 것입니다.
애굽에 흉년으로 애굽 사람들이 모두 자기의 재산을 바로에게 바치고 주변 모든 나라 사람들까지 바로왕의 지배를 받게 된 것도 바로 애굽에 양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바로왕은 애굽 본토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요셉의 도움으로 양식을 백성에게 팔아 애굽을 합법적으로 접수한바 되었습니다. 양식이 없으면 죽습니다. 식량은 원자탄보다 귀한 무기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연구하고 더욱 풍성한 말씀을 성도들에게 공급해야 하겠습니다.
그럼, 이 떡은 누가 먹을 수 있을까요?
요6:51에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하셨습니다. 그럼 과연 누가 먹을 자격이 있을까요?
1.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먹습니다.
레24:9 “이 떡은 아론과 그 자손에게 돌리고” 눅6:4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이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진설병은 제사장들의 양식이었습니다. 제사장이 성소에 들어와서 제사장의 직무를 수고할 때만이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 떡은 지난 한 주간 동안 진설해 놓았던 물려 낸 떡으로 이 떡을 한 주간 동안 성전에서 수고하면서 먹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떡은 제사장밖에는 먹지 못하는 떡입니다.
그러나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벧전2:9에 우리 성도들을 왕 같은 제사장들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모두 하나님을 예배하는 제사장 역할을 잘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무엇보다 매일 예배하고 기도하고 남을 섬기는 제사장의 직무를 감당해야 합니다. 그래야 벧전2:5에 말슴한 것처럼 “너희도 산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섬기는 생활이 부족하면 영혼이 주릴 수밖에 없습니다.
2. 주 안에서 참 안식을 가진 자가 먹습니다.
레24:8 “항상 매 안식일에 이 떡을 여호와 앞에 진설할지니 이는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요 영원한 언약이니라” 진설병을 매 안식일마다 진설한 것은 주일마다 선포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예표하기도 하지만, 신령한 측면에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할 때 진정한 영혼에 만족을 얻게 됨을 시사합니다. 즉 가나안 땅의 안식은 곧 이스라엘의 배부름이었던 것과 같습니다(신8:8-10). 그러므로 내가 주가 되어 염려하지 말고 예수님을 주로 삼고 평안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영생의 떡이 되시기 위해서 낮고 천하게 오신 주님을 기억하십시다. 주님께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겸손히 믿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진실로 경와하고 안식을 가집시다. 그래서 영생의 양식으로 충만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떡상2 2007.12.26 16:45 | 성막론 | http://kr.blog.yahoo.com/jjss0815/4750
떡상 2 민4:7-8
이 시간 [떡상]에 관하여 계속하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지난 시간에 떡은 예수님이요,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떡상을 운반할 때 율법의 규칙이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민4:7-8 “또 진설병의 상에 청색 보자기를 펴고 대접들과 숟가락들과 주발들과 붓는 잔들을 그 위에 두고 또 항상 진설하는 떡을 그 위에 두고 홍색 보자기를 그 위에 펴고 그것을 해달의 가죽 덮개로 덮은 후에 그 채를 꿰고” 그러니까 먼저 진설병 상에 청색 보자기를 펴야합니다. 그 위에 떡상과 부속 기구들을 놓고, 홍색 보자기로 덮습니다. 그 위에 해달의 가죽으로 또 덮습니다. 그 후에 채를 꿰고 어께로 메고 갑니다. 이 떡상 운반법을 통하여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란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그럼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일까요?
1.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말씀입니다.
7절 “또 진설병의 상에 청색 보자기를 펴고” 떡상 위에 보자기를 펴라! 떡상과 그 위의 진설병과 기구들을 이렇게 취급하라 하신 이유는 청색이 생명의 색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곧 생명의 말씀임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요12:49-50) 하셨습니다.
그리고 행5:20에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했고, 빌2:16에도 “생명의 말씀”이라 했고, 요일1:1에도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이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영생을 얻습니다. 구원도 복음의 말씀을 받음으로 받습니다(롬10:8). 그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한 것이 하나님의 세세토록 있는 말씀이라 한 것입니다. 롬10:9에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복음의 말씀을 받느냐 받지 않느냐는 생사가 달리 문제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필립 브룩스(1835-1893년)라는 목사님이 계셨는데 유명하신 분이라 그가 임종할 때 많은 사람들이 그의 임종을 보려고 몰려들었습니다. 그러나 일절 한 사람도 그를 만나 주지 않았는데 딱 한 사람만 만나게 해주었습니다. 그 사람은 법률가 잉거솔인데 잉거솔이 “목사님 만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때 브룩스 목사님은 “여보게 다른 사람들은 다 천국에서 만날 수 있으니 특별히 시간 내서 만날 필요가 없었네. 그러나 자네와는 아무래도 천국에서 못 만날 것 같아서 만나 주는 것일세. 예수 믿게 예수 믿어야 영생이 있다네” 이 말을 들은 잉거솔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가 이 전하는 말씀을 믿었기에 영생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은 한 순간도 잊어서는 안 될 말씀입니다.
다시 7절 “대접들과 숟가락들과 주발들과 붓는 잔들을 그 위에 두고 또 항상 진설하는 떡을 그 위에 두고” 여기 항상 진설하는 떡을 그 위에 두라고 했습니다. 지난번에 떡상 위에 진설병은 항상 놓여져야 한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보자기에 싸서 옮길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떡을 조금 든 상태에서 보자기를 밀어 넣어야 합니다. 그래서 옮길 때도 항상 떡상 위에 진설병이 진설되어야 합니다. 왜 항상 진설하라고 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한 순간도 잊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멀리 할 것이 따로 있지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가까이 해야 합니다.
그래서 신6:6-9에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 했습니다. 시편 1:1-2에도 “복 있는 사람은 -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했습니다.
이렇게 성막을 연구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까지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 전도도 역시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데모데에게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4:2) 했습니다. 그래서 설교를 듣든 방송을 듣든 간증을 듣든 늘 말씀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의 말을 더 듣느냐에 따라 그렇게 변합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불변 진리의 말씀입니다.
8절 “홍색 보자기를 그 위에 펴고” 여기 홍색 보자기는 피의 색깔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피로 쓰여진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없었다면 쓰일 수가 없는 거지요. 이 피로 쓰였다는 것은 죄인을 구원하신 복음의 말씀이라는 뜻도 있지만 또 달리는 피로서 확증하신 진리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약이란 피로써 맺어진 약정을 가리킵니다.
고전11:25에도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그리고 롬5:8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셨습니다. 이처럼 성경은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볼 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믿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마음 문 열고 온전히 받아야 합니다. 아멘으로 받아야 합니다. 조금도 의심 없이 받아야 합니다. 다른 생각을 물리치며 받아야 합니다. 성경을 의심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참새도 하나님 아버지께서 먹이신다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출애굽할 당시 “라바”라는 랍비 선생이 있었는데 거지가 찾아 왔습니다. “먹을 것을 주세요. 배가 고픕니다” “어떤 음식을 좋아하십니까?” 그러니까 거지가 “저는 늘 살진 닭고기와 오래된 좋은 포도주를 먹습니다. 그것을 주십시오” 이 말을 들은 라바 랍비는 어이가 없어서 “아니 이런 것은 보통 사람도 못 먹는 음식 아닙니까? 당신은 구걸하면서도 이런 비싼 음식을 먹고 살아 왔습니까?” “예 하나님이 주셔서 항상 그런 음식만 먹고 살아 왔지요. 하나님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주시는 하나님임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음식을 먹을 수 있었고 달라고 할 권리가 있지요”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바로 그 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문을 열어 보니 지난 13년간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던 랍비의 누나가 음식 바구니를 들고 찾아 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구니를 자세히 보니 그 바구니에는 살진 닭고기와 좋은 포도주가 담겨 있었습니다. 그래서 랍비는 “당신 말이 맞습니다. 이 음식은 틀림없이 하나님이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늘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시는 분이심을 알았습니다. 우리 함께 드십시다”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님의 보혈로 기록된 진리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조금도 의심하거나 가감하지 말고 믿고 순종해야 합니다.
4.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가운데서도 증거 되어야 할 말씀입니다.
8절 “그것을 해달의 가죽 덮개로 덮은 후에 그 채를 꿰고” 이미 말씀드린 대로 해달의 가죽은 승리의 상징이라 했습니다. 이 물개의 가죽으로 덮어서 어께에 메고 날랐습니다. 마차가 여섯 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떡상은 마차에 실어서는 안 됩니다. 고핫 자손들이 힘을 써서 메어야 합니다. 이처럼 복음이 승리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힘을 다해 날라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복음을 힘써 전해야 합니다. 어느 곳이든지 어떤 희생이 따르든지 물질을 드려서라도 증거 되어야 합니다. 복음을 안 사람이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있습니다. 그래서 고전9:16에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했습니다. 좋은 소식을 가진 자가 잠잠하는 것은 죽으라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도와 선교의 사역에 많은 것을 투자해야 합니다. 희생 없이 투자 없이 수고 없이는 되지 않습니다. 고후 11장을 보면 바울이 얼마나 복음 증거하다가 많은 고난을 받았는지 나와 있습니다. 사도들은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혀도 말씀을 전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가까이해야 할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전해야 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사랑합시다. 믿으십시다. 전하십시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께 칭찬 받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분향단1 2007.12.26 16:49 | 성막론 | http://kr.blog.yahoo.com/jjss0815/4751
분향단 1 출30:1-10
이 시간에는 “분향단”에 관해서 말씀드릴 시간입니다. 분향단은 성소의 휘장 쪽에 있는 향을 피우는 단입니다. 분향단이 모양은 조각목으로 만들되 금으로 쌌습니다. 그래서 흔히 금단이라고 부릅니다. 크기는 사방 1규빗에 높이가 2규빗으로 작은 궤짝을 세워 놓은 것처럼 생겼습니다. 위 네 귀퉁이에 뿔이 한 개씩 나 있고 상단 4면 주위에는 금테를 둘렀습니다. 그리고 운반하기 쉽도록 양편에 금고리를 두 개씩 만들었습니다. 그 고리에 꿰었던 체 역시 조각목에 금을 입힌 금채였습니다. 이 분향단에는 아침 저녁 등불을 간검할 때 향을 살랐습니다. 그리고 대제사장이 1년에 1차씩 향단의 뿔에 속죄제의 피를 바르며 속죄하였습니다.
그럼 이 분향단은 과연 무엇을 상징할까요? 계5:8에 “향이 가득한 금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했습니다. 또 계8:3-4에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들과 합하여 보좌 앞 금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 한 말씀을 볼 때 이 분향단은 기도의 제단을 상징합니다. 시141:2에도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분향함과 같이 되며 나의 손 드는 것이 저녁 제사 같이 되게 하소서” 한 기도를 볼 때 역시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분향단은 우리에게 기도의 비밀을 가르쳐 줍니다.
그럼 기도는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1.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입니다.
출30:6 “그 단을 증거궤 위 속죄소 맞은편 곧 증거궤 앞에 있는 장막 밖에 두라 그 속죄소는 내가 너와 만날 곳이며” 증거궤 앞이 분향단이 놓여졌습니다. 이제 휘장마저 사라진 복음시대이기 때문에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장애 없이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참고해야 할 것은 분향단에서 피우는 연기는 모락모락 피어나는 연기가 아니라 수직 상승한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성막에서만 쓰였던 향연의 비법입니다. 이 수직 상승에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기도는 하나님께 올라가는 오직 하나님께 하는 것이지 사람에게 하는 것이 아니란 점입니다. 마태복음 6장의 예수님의 경고처럼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기도하면 그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2. 기도는 오직 한 분이신 그리스도의 중보로 이루어집니다.
대하4:19 “금단과 진설병 상들과”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도 분향단은 변함없이 오직 하나였습니다. 이것은 바로 기도의 중보자는 오직 예수님 한 분이심을 보여줍니다. 딤전2:5에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했습니다. 롬8:34에도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했고, 히7:25에도 “이는 그가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했습니다. 오직 예수님 말고는 중보자가 없습니다. 우리가 남을 위해서 기도해 주는 것은 도고라고 합니다. 중보기도가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중보기도를 할 수 있다면 분향단도 많이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분향단이 하나인 것은 베드로도 마리아도 어떤 성인 그 누구도 중보기도자가 아님을 보여줍니다.
3. 기도는 믿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3절 “단 상면과 전후 좌우 면과 뿔을 정금으로 싸고” 분향단은 천한 조각목으로 만들지만 겉은 모두 금으로 쌌습니다. 여기 금은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오직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그래서 야고보도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약1:6) 했습니다.
그러므로 조각목이 밖으로 드러나서는 안 됩니다. 금으로 잘 싸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철저히 의심을 몰아내고 믿음의 기도를 하십시오. 또 깊이 기도하려고 애를 쓰십시오. 그래야 그 기도가 하나님 앞에 상달 됩니다.
4. 기도는 예수님의 권세입니다.
2, 3절에 “뿔”이 나옵니다. 분향단의 네 모서리에는 뿔이 있었는데 뿔은 권세요 능력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사방 네 개는 세계요 우주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우주에 미칩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세요. 왕이 아무의 말이나 다 들어 줍니까? 즉 기도는 권세를 받아서 기도해야 하는데 그 권세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합니다. 그래서 요14:13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하셨습니다. 그러무로 우리들이 자기 기도를 무시하지만 않는다면 그 기도는 참으로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나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11:23-24) 하셨습니다.
5.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좇아서 해야 합니다.
2절 “장이 일 규빗 광이 일 규빗 네모 반듯하게 하고” 여기 사방 1규빗은 더 이상 나가서는 안 될 한계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네모 반듯하게 하라는 말씀은 오직 공의의 바른 기도여야 함을 보여줍니다. 즉 내 뜻의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 뜻의 기도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합당치 않는 저주의 기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기도해야 하고 하나님의 마음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15:7)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번도 자기의 뜻을 구한 적이 없습니다. 이처럼 만사의 성공은 기도를 잘함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처럼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는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사람은 만사에 성공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가장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히스기야가 병들었을 때 회개한 이전과 이후의 말씀이 달랐던 것과 같습니다. 티모르 섬의 선교사 멜 테리가 티모르 섬에서 선교하다가 성만찬을 하려니 포도주가 없자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 달라니까 하나님께서 포도주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옷이 더러워질 때마다 기도하면 신기하게도 깨끗해 졌습니다. 세월이 흘러 휴가차 공항 호텔에 하루 밤을 자게 될 때 옷이 더러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내일이면 귀한 손님들을 만나는데 이 옷을 빨아 주세요” 그런데 예전처럼 빨아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물으니 “테리야 여기에는 빨래비누가 있단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특별하신 때는 아주 특별한 방법으로 역사하시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일반적인 방법으로 일하시는 것을 봅니다.
6. 기도는 겸손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2절 “고는 이규빗으로 하고” 사람의 키가 4규빗정도니까 고가 이규빗이면 분향할 때 숙여야 합니다. 이렇게 기도는 겸손한 마음으로 해야 하나님께서 들어주십니다. 눅18장에서 자기를 드러내고 자랑하던 바리새인보다 가슴을 치며 나를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며 자기를 낮춘 세리의 기도가 더 의롭다함을 받았던 것에서 보듯이 겸손해야 하나님께서 상대하여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를 반드시 물리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7. 감사와 찬양의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9절 “너희는 그 위에 다른 향을 사르지 말며 번제나 소제를 드리지 말며 전제의 술을 붓지 말며” 한 마디로 말하면 번제단에서 드린 제사를 분향단에서 반복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예수 안에서 이미 약속하시고 이루신 것들에 대해서는 불신의 기도하지 말라는 교훈입니다. 도리어 우리는 말씀의 언약을 되새기며 감사의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염려를 맡아 주세요가 아니라 책임져 주시니 감사합니다. 함께 하여 주세요가 아니라 함께 하심을 믿고 감사합니다. 이렇게 감사의 기도를 드리면 얼마나 은혜롭고 기도가 잘 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빌4:6에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 예수님 안이 축복과 약속을 생각지 않는 불신의 기도는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제단에 나가서 분향할 그리스도의 제사장입니다. 기도의 향불은 피우셨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열심히 기도하여 영육 간에 강건하고 응답받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분향단2 2007.12.26 16:50 | 성막론 | http://kr.blog.yahoo.com/jjss0815/4752
분향단 2 출30:1-10
지난 시간에 이어서 “분향단”에 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분향단은 성소의 휘장 쪽에 있는 향을 피우는 단입니다. 분향단은 기도의 제단을 상징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분향단을 살펴보면 기도에 관해서 잘 가르쳐 줍니다. 기도를 어떻게 하는가? 지난 시간에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한다, 기도의 중보자는 오직 예수님이시다, 기도는 오직 믿음으로 하며, 기도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바른 기도여야 하고, 겸손함 마음으로 하되, 이루시고 약속하신 것에 대해서는 감사와 찬양의 기도여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계속하여 분향단이 가르쳐 주는 기도를 살펴보면
8. 기도는 바른 마음의 자세로 기도해야 합니다.
출30:3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소합향과 나감향과 풍지향의 향품을 취하고” 여기 향들은 모두 고난을 통과한 산물이라는 점이 그 특징입니다. 먼저 소합향은 스티릭스 나무를 뜨거운 태양에서 진액을 내어 만든다고 합니다. 나감향은 홍해에서 나는 쉘 휘쉬 조개껍질을 빻아서 만든 향입니다. 풍자향은 아라비아의 고무나무 뿌리에서 나오는 진액으로 만듭니다. 그리고 유향은 감람나무과 나무에서 나오는 우유 빛 진액에서 만든 향입니다. 이처럼 고통 속에서 진액을 내거나 깨뜨리고 빻아서 만든 향처럼 기도는 몸과 마음과 힘과 땀과 인내와 진심을 다 드려 드리는 기도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실 때 얼마나 성의 있는 기도냐 그 중심을 보십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 땀방울이 피방울이 되도록 간절하게 기도하셨습니다. 이 기도는 우리에게 보여주신 모본의 기도이기도 합니다.
9. 성령의 불로 기도해야 합니다.
민26:61에 “나답과 아비후는 다른 불을 여호와 앞에 드리다가 죽었더라” 분향단의 불은 반드시 번제단의 불로 피웠습니다. 번제단의 불은 하나님께서 피워주신 불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불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번제단의 불이니 이는 영적이요 구속사 관점의 복음의 기도입니다. 그런데 광야에서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는 여호와의 명령을 어기고 다른 불로 분향하다가 죽었습니다. 이 사건을 우리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줍니다. 이것은 육신의 생각으로 기도하면 우리 심령이 죽는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롬8:6-8에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드리는 기도가 성령의 불이냐 육신의 불이냐 복음에서 난 것이냐 육정에서 난 것이냐 육정에서 난 것이면 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무엇이라고 교훈하셨습니까? 마6:25-33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셨습니다.
10. 모든 것을 기도로 시작하여 기도로 마쳐야 합니다.
출30:7-8 “아론이 아침마다 그 위에 향기로운 향을 사르되 등불을 정리할 때에 사를지며 또 저녁때 등불을 켤 때에 사를지니 이 향은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 앞에 끊지 못 할지며” 성막에서 분향은 조석으로 했습니다. 조석이란 아침과 저녁인데 이 두 번하는 것은 오늘날도 두 번만 드리라는 뜻이 아니라 조석이 갖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시작과 마침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일을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마치라는 교훈입니다. 가령 무슨 일 해야 하는데 도저히 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아도 실망하지 말고 기도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일을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좋은 뜻이 주어질 때 안돼 하지 마시고 기도부터 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아침 분향의 의미입니다. 기도만 기작하면 그 일은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하게 하셔도 이젠 됐다 하지 마시고 계속하여 기도로서 지혜 받아서 해야 합니다. 그래야 온전히 잘 마쳐지게 됩니다.
예를 들어 느헤미야가 조국 예루살렘성이 불타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다는 소식을 듣고 기도했습니다. 사실 이 일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만약 성을 재건하려고 하면 그것은 지배국에 대한 반역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계속하여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왕의 허락을 받고 예루살렘을 재건할 사명 가진 총독이 되어 돌아옵니다. 그러나 이 일은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주변국의 계속되는 방해로 말미암아 어려움 속에 있었습니다. 그 때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이것이 기도로 시작하여 기도로 마치는 것입니다.
11.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서 기도해야 합니다.
출30:7-8 “향을 사르되 등불을 정리할 때에 사를지며 또 저녁때 등불을 켤 때에 사를지니” 분향단에서 향을 사를 때 왼쪽에 있는 등대가 없으면 불가능하비다. 여기 등대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등대를 정리하며 등대의 불을 켜면서 향을 사르는 것은 말씀의 조명을 받아 기도해야 한다는 진리입니다. 내 생각대로 기도하지 말라는 교훈입니다. 성막 안의 등대가 없으면 캄캄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 환경이 어두워서 기도가 나오지 않으려 할지라도 말씀을 생각하면 기도가 나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면 “나와 함께 계심을 감사합니다. 나를 사랑하심을 감사합니다. 나의 도움이신 것을 감사합니다. 말씀의 약속을 확신합니다. 나에게 믿음의 훈련시켜 주심을 감사합니다.” 등등 얼마든지 긍정적인 온전한 기도가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아름다운 응답이 주어집니다. 엘리야의 우울증이 최종적으로 체험 의존 아닌 말씀 의존으로 바꾸어졌을 때 가능했던 것처럼 진리에 서서 희망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12. 잘못한 기도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바꾸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출30:10 “아론이 일 년 일 차씩 이 향단 뿔을 위하여 속죄하되 속죄제의 피로 일 년 일 차씩 대대로 속죄할지니라” 대제사장은 1년 1차 7월 10일 대속죄일이면 분향단의 뿔에 피를 발라 속죄했습니다. 레16:18-19에 좀더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여호와 앞 단으로 나와서 그것을 위하여 속죄할지니 곧 그 수송아지의 피와 염소의 피를 취하여 단 귀퉁이 뿔들에 바르고 또 손가락으로 그 피를 그 위에 일곱 번 뿌려 이스라엘 자손의 부정에서 단을 성결케 할 것이요” 했습니다.
여기 부정은 이스라엘 자손으로부터 입은 부정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잘못 드린 기도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고쳐서 들으실 것을 시사합니다. 아무리 우리가 바로 기도하려 해도 그게 잘 됩니까? 그러나 감사한 것은 현명하시고 온전하신 우리 하나님이시기에 우리의 기도를 고쳐서 들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혹시 스트레스 받은 것 있으면 솔직히 그대로 하나님께 고해 보십시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위로해 주시고 나중에는 우리의 그 탄식의 기도를 변화시켜 바른 기도가 나오게 만들어 주십니다. 한나의 기도가 그것입니다. 처음에는 탄식의 기도였으나 나중에는 찬양의 기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향단 뿔을 속죄함이란 고쳐서 들으신다는 뜻이고 또 우리 기도까지도 고쳐주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기도에 대해서 잘 알아도 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기도는 마음을 다하여 힘을 다하여 해야 합니다. 성령의 불로 해야 합니다. 기도로 시작하여 기도로 마쳐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서 해야 합니다. 그러나 잘못한 기도일지라도 하나님께서 고쳐서 들어주시고 우리의 기도가지도 바로 고쳐주신다는 사실을 믿고 늘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법궤1 2007.12.26 16:52 | 성막론 | http://kr.blog.yahoo.com/jjss0815/4753
법궤 1 출25:10-22
오늘은 법궤에 대해서 말씀을 드립니다. 법궤는 세계에서 가장 거룩한 곳인 지성소에 있는 가장 거룩한 성물입니다. 지성소는 너무도 거룩해서 제사장은 들어오지 못하고 대제사장도 대 절기 때만 피를 가지고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법궤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일컫는 귀하고 귀하며 거룩하고 거룩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늘 이렇게 말합니다. “세계의 중심은 이스라엘, 이스라엘의 중심은 예루살렘, 예루살렘의 중심은 성전, 성전의 중심은 지서소, 지성소의 중심은 법궤, 법궤의 중심은 십계명이라” 그렇다면 십계명의 중심은 무엇이겠습니까? 사랑이요 사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법궤 이야기도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 이야기입니다.
1. 법궤의 모양은 어떠합니까?
10절 “그들은 조각목으로 궤를 짓되 장이 이 규빗 반, 광이 일 규빗 반, 고가 일 규빗 반이 되게 하고” 출 25장 10-22 전체가 법궤의 모양에 대한 기록인데 네모난 법궤 상자와 그 위에 두 그룹 천사가 날개를 펴고 마주보고 있는 모양입니다. 구체적으로 법궤는 가로 125cm 세로 75cm의 크기입니다. 조각목으로 만들었고 모두 정금으로 쌌습니다. 윗 가로는 금테가 둘러져 있고 운반하도록 금고리 넷이 있습니다. 법궤를 나르는 금채도 조각목에 금을 입힌 것입니다. 법궤 위 뚜껑 부분이 속죄소입니다. 그 위에 황금으로 만든 구룹천사가 마주 보고 있고 그들이 편 날개는 속죄소를 덮고 있습니다. 이 조각목과 금으로 된 법궤는 인성과 신성을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2. 법궤에는 여러 이름이 있습니다.
법궤(fp16:2), 궤(출25:10), 증거궤(출26:33), 하나님의 궤(삼상3:3), 여호와의 궤(삼상6:1), 거룩한 궤(대하35:3), 권능의 궤(시132:8), 이스라엘 신의 궤(삼상5:7), 여호와의 언약궤(민10:33), 나무궤(신10:1) 이 명칭을 통해서 법궤가 어떤 것인지 짐작하게 합니다. 이 궤는 법이기도 하고, 증거이기도 하고, 하나님의 이름이기도 하고, 거룩이기도 하고, 권능이기도 하고, 언약이기도 하는 이 궤는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율법 해석서인 미드라쉬에는 이런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법궤를 나를 때는 전혀 무게를 느끼지 않았다. 속죄소 위의 두 천사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기뻐하실 때는 마주 보다가 노하실 때는 얼굴을 돌렸다. 광야 40년 동안 맨 앞에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법궤를 하나 더 만들었다. 그랬더니 이 법궤가 앞장서서 갈 때 초음파가 나와서 독사나 전갈 등을 다 죽여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대제사장이 대 속죄일에 지성소에 들어가 활동할 때는 갑자기 공간이 넓어졌다”는 등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는 참고만 할 일이지 그대로 믿을 이야기는 아닙니다.
3. 그럼 법궤 안에는 무엇이 들어 있는가?
히9:3-4 “또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일컫나니 금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비석들이 있고” 히브리서만 참고한다면 법궤에는 세 가지가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학자들은 이 세 사지가 들어 있는 기간은 불과 몇 십 년일 뿐이고 지속적으로 들어 있던 것은 언약의 비석인 십계명뿐이라고 합니다.
성경이 기록들을 보면 십계명의 위치가 나와 있습니다. 출25:16에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줄지며”, 그리고 싹난 아론의 지팡이의 위치에 대해서는 민17:4에 “그 지팡이를 회막 안에서 내가 너희와 만나는 곳인 증거궤 앞에 두라” 했습니다. 그럼 만나 항아리는 어디에 두었을까요? 출16:33-34에 “또 아론에게 이르되 항아리를 가져다가 그 속에 만나 한 오멜을 담아 여호와 앞에 두어 너희 대대로 간수하라 아론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그것을 증거판 앞에 두어 간수하게 하였고” 여기 분명히 증거궤 앞에 두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율법책 역시 신31:26에 “이 율법책을 가져다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곁에 두어 너희에게 증거가 되게 하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가 말씀한 법궤 안에 만나 항아리, 아론의 지팡이와, 십계명은 어느 기간 동안만 있었습니다. 언제 사라졌는지 알 수 없지만 왕상8:9에 보면 궤 안에는 두 돌판 외에 아무것도 없으니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후 여호와께서 저희와 언약을 세우실 때에 모세가 호렙에서 그 안에 넣은 것이더라” 즉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 법궤를 성전에 두기 위하여 가져와서 법궤를 열어 보았더니 거기에는 두 돌판만 남아 있었습니다. 여기서 살펴볼 수 있는 교훈은 인본주의는 사라지고 신본주의만이 남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넣지 않는 것은 반드시 사라지게 됩니다.
4. 법궤의 특징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 법궤는 가장 중요한 곳입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이 계신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레16:2에 “네 형 아론에게 이르라 성소의 장 안 법궤 위 속죄소 앞에 무시로 들어오지 말아서 사망을 면하라 내가 구름 가운데서 속죄소 위에 나타남이니라”했습니다.
(2) 법궤는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입니다. 민9:15-16에 “성막을 세운 날에 구름이 성막 곧 증거막을 덮었고 저녁이 되면 성막 위에 불 모양 같은 것이 나타나서 아침까지 이르렀으되 항상 그러하여 낮에는 구름이 그것을 덮었고 밤이면 불 모양이 있었는데” 여기 불기둥 구름기둥은 하나님 임재의 상징이었습니다.
(3) 그 곳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출25:22에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즉 예수 믿는 것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믿기 전에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4)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계시를 주셨습니다. 출25:22에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제사장에는 세 가지가 있었습니다. 레위지파의 일반 제사장입니다. 다음은 아론 계통의 대제사장입니다. 다음은 모세와 같은 특별제사장입니다. 성막 시대에 모세는 지성소에 자유자제로 드나들어 하나님을 만나고 그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제 우리 성도들은 모세와 같이 언제든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으니 얼마나 큰 특권입니까?
(5) 항상 법궤를 중심하여 행하였습니다. 민10:21에 “고핫인은 성물을 메고 진행하였고 그들이 이르기 전에 성막을 세웠으며” 이렇게 미리서 성막 세워 항상 법궤를 모시는데 총력을 기울였습니다. 법궤가 성막의 가장 중요한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여리고 성을 무너뜨릴 때도 법궤를 중심한 군대가 앞장서 돌았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6) 법궤가 가는 곳마다 승리가 있었습니다. 민10:35-36에 “궤가 떠날 때에는 모세가 가로되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로 주의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하였고 궤가 쉴 때에는 가로되 여호와여 이스라엘 천만인에게로 돌아오소서 하였더라” 했습니다. 이처럼 성령 따라 살면 가는 곳마다 승리가 있습니다.
(7) 법궤는 거룩한 것이었습니다. 대상13:9에 “기돈의 타작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펴서 궤를 붙들었더니 웃사가 손을 펴서 궤를 붙듦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치시매 웃사가 거기 하나님 앞에서 죽으니라” 다윗이 법궤 찾기 운동에는 성공했지만 법궤운반에는 실패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법궤는 거룩해서 제사장이 어께에 메고 날라야 하는데 블레셋 이방인들이 하는 대로 수레에 실어 날랐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소가 뛴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나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의 방법대로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안 된다는 교훈입니다. 그리고 법궤는 거룩해서 대제사장도 피가 없이는 법궤 앞에 나가지 못합니다.
(8) 법궤 앞은 속죄와 은혜와 사랑의 자리였습니다. 시61:4에 “내가 주의 날개 밑에 피하리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 자리를 은혜의 보좌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 앞에 나아가면 누구든지 속죄함을 받고 긍휼을 받으며 은혜를 받고 축복을 받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법궤는 곧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에게 성부 성령 하나님이 임재해 계십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 구원이 있고 승리가 있고 축복과 안위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법궤로 말미암아 복을 받은 것처럼 예수 잘 믿어 하나님께 복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법궤2 2007.12.26 16:53 | 성막론 | http://kr.blog.yahoo.com/jjss0815/4754
법궤 2 출25:10-22
이 시간에도 지난 시간에 이어 법궤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누가 법궤를 아무리 잘 설명한다 할지라도 결론에 있어서는 법궤의 의미는 한 마디로 예수님이시란 점입니다.
왜 그런지 여러 면에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모든 것의 중심면에서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계의 중심은 이스라엘, 이스라엘의 중심은 예루살렘, 예루살렘의 중심은 성전, 성전의 중심은 지성소, 지성소의 중심은 법궤, 법궤라” 고 했습니다. 그리고 법궤가 언제나 이스라엘 진의 중앙에 있었던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20)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이 세계의 중심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세계의 중심이요 우리 신앙의 중심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잘 믿는 성도가 세계 중심에 서 있는 것입니다.
2. 중보자라는 면에서 그렇습니다.
구약시대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어디로 왔느냐? 법궤 앞으로 왔습니다. 수7:6을 보면 이스라엘이 아이성 싸움에 지고 법궤 앞에 엎드려 물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한 분밖에 없는 중보자이십니다.
3. 비밀이란 점에서 그렇습니다.
법궤는 숨겨져 있던 하나님의 비밀이었으나 계시로 모세에게 나타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렇습니다. 요일1:2에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 했습니다.
4. 성령으로 되어진 점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출37:1을 보면 브살렐이 조각목으로 궤를 만들었습니다. 유대인의 미드라쉬를 참고하면 그 때 브살렐이 13살이었다고 합니다. 브살렐은 성령에 사로잡혀 신비한 손길로 법궤를 만들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도 신비롭게도 여자의 몸에서 성령으로 탄생했습니다(마1:20). 그러므로 예수님은 원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5. 역사적인 면에서 보면 또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집의 변천사를 보면 돌단에서 성막으로, 성막에서 장막으로, 장막에서 성전으로, 성전에서 교회로 발전했습니다. 그 때마다 번제단이나 물두멍이나 떡상이나 등대나 이런 성물들을 다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법궤만은 항상 그 법궤만을 사용하였습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이 새 성전을 짓기 위하여 성물들을 다시 만들어 두었지만 법궤만은 만들지 않았습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주실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법궤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6. 증거적인 면에서도 그렇습니다.
출26:34에 법궤를 증거궤라고 했고, 출25:22을 보면 그곳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통해서 말씀하셨고 성령의 여러 표적으로 하나님을 증거하셨습니다.
7. 성령으로 된 면도 그렇습니다.
출30:22-26을 보면 거룩한 관유를 만들어 증거궤에 발랐습니다. 이미 법궤가 만들어졌지만 사용하기 전에 다시 거룩하게 한 것과 같이 마3:16을 보면 예수님께서도 메시야로 일하시기 전에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임했습니다.
8. 가시적인 면에 있어서도 법궤는 사람의 눈에 띠지 않았습니다.
민4:44-45을 보면 법궤를 운반할 때에도 대제사장들이 챙기고 보자기에 싸고 싸서 레위 제사장들도 볼 수도 없었고 무게만 느꼈습니다. 그러니까 특수한 사람들만 보았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도 말구유에 탄생하실 때 주님을 사모했던 특수한 사람들만 볼 수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하나님께서 눈 열어 주신 사람들만 볼 수 있었습니다. 지금 이 시간 이 자리에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지만 믿어지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믿어지는 사람들은 영의 눈으로 보이기 때문이요 그렇지 않는 사람들은 아직 영적 조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9. 능력도 마찬가지입니다.
법궤는 이스라엘의 능력이었습니다. 시132:8에 “주의 권능의 궤”라고 했고 법궤가 가는 곳마다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하나님의 영광의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법궤가 가는 곳에 강도 갈라졌듯이 예수님께서 죄악으로 막힌 담을 가르셨습니다.
10. 법궤에 담겨진 내용면에도 예수님의 상징입니다.
법궤 안에는 만나와 십계명과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들어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하늘의 만나이시고, 십계명처럼 십자가의 도 우리의 길이 되시고, 싹 난 아론의 지팡이처럼 부활이 되십니다.
11. 영광이 충만하신 면에서도 예수님의 상징입니다.
법궤에는 언제나 영광의 구름이 머물러 있었습니다. 왕상8:10에 여호와의 전에 구름이 충만하여 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인하여 능히 서서 섬기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변화산상에서 계실 때 홀연히 빛난 구름이 덮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승천하실 때 구름을 타시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12. 예루살렘 입성에도 그렇습니다.
다윗이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올 때 다윗도 춤을 추고 많은 사람들이 나팔을 불고 즐거워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도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호산나 찬송하며 환영하였습니다.
13. 법궤를 우습게 안 사람들이 저주를 받았습니다.
삼하6:20을 보면 다윗이 법궤를 보고 너무 기뻐 춤을 추는데 사울의 딸 미갈이 다윗을 비웃다가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었습니다. 장차 왕비될 사람이 왕자를 낳지 못한다는 얼마나 비극입니까? 이처럼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섬기지 않고 체면 차림으로만 섬기면 영적권세가 나타나지 않게 됩니다.
15. 다윗의 피난 역사를 봅시다.
다윗이 압살롬에게 배척을 받고 기드론 시내로 법궤를 가지고 피한 적이 있었는데(삼하15:23-25) 요18:1을 보면 예수님도 핍박을 받아 기드론 시내를 건너 피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16. 법궤가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모습을 봅시다.
법궤가 이스라엘 진영의 3일 길을 먼저 가서 쉴 곳을 찾았듯(민10:33) 예수님도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3일 만에 다시 부활하셨서 우리들을 참 안식과 승리를 주셨습니다.
17. 법궤가 가는 곳마다 승리가 있었습니다.
민10:35에 “궤가 떠날 때에 모세가 가로되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로 주의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했는데 주님이 가시는 곳마다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귀신이 떠나갔고 병이 떠나가고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그 뿐입니까? 삼상 5장을 보면 법궤 앞에서 다곤 우상도 부서진 것처럼 예수의 영이 임하면 육에 속한 것이 무너지게 됩니다.
18. 축복과 저주가 된 점에서 그렇습니다.
법궤는 이스라엘에게는 축복이지만 삼상 4장 이하를 보면 블레셋에게는 저주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는 믿는 자에게는 영생 불신자에게는 사망입니다(딤전2:5). 혹은 법궤가 축복의 산인 그리심산과 저주의 산인 에발산 사이에 놓여진 적이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마지막 날 예수님께서는 양과 염소를 가르실 것입니다.
19. 알파와 오메가가 되신다는 점에 같습니다.
출25:10-22을 보면 하나님께서 맨 먼저 계시하신 성물이 법궤였고 왕상8:9에 보면 성전 건축 후 마지막으로 들여 놓은 것이 법궤였듯이 예수님은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나중이 되십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천지 창조에서 시작하여 구속과 섭리와 그리고 재림과 신천신지와 영원한 세상가지 예수님께서 이루어가십니다. 이와 같이 법궤는 무엇으로 보나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법궤는 실상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이 땅에 있어야 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이것은 예레미야 선지자가 예언한 말씀입니다. 렘3:16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가 이 땅에서 번성하여 많아질 때에는 사람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시는 말하지 아니할 것이요, 생각지 아니할 것이요, 기억지 아니할 것이요, 찾지 아니할 것이요, 만들지 아니할 것이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확실히 일기 위하여 성경을 연구할 뿐이지 법궤는 숭배의 대상도 보존의 대상도 찾아야 할 대상도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나중에 천상에서 계11:19에 나타난 법궤를 다시 보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법궤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법궤를 귀히 여겼던 것처럼 예수님을 잘 믿으십시다. 그래서 이스라엘과 오벧에돔이 받았던 그 귀한 복을 충만히 누리시는 성도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사장 2007.12.26 16:54 | 성막론 | http://kr.blog.yahoo.com/jjss0815/4755
제사장 민3:40-51
이 시간에는 “제사장”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구약에는 기름부음을 받는 3직이 있었습니다.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이 그것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 편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에게 전달하기 위한 사명입니다. 왕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다스리기 위해서 세웠습니다. 그럼 제사장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제사장은 그와는 반대로 인간편에서 인간의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갑니다. 제사장이란 라틴어로 ‘폰티텍스’라고 합니다. 이 말은 ‘다리를 놓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제사장은 하나님과 죄인들 사이에서 화목제를 통하여 화해의 다리를 놓는 사람들입니다.
이 시간 살펴 볼 것은 제사장의 변천과정입니다.
1. 족장제사장이 있었습니다.
역사상 첫 제사장은 아담이었습니다. 그 다음의 족장 제사장은 아벨이었습니다. 그 후 셋이나 에녹이나 노아나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이 다 족장의 제사장들이었습니다. 욥도 족장 제사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장이 제사장이 되어 활동하던 시대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지나갔지만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며 이 직무는 영적으로 존재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가정에서 가장이 가족을 축복하고 신앙으로 이끄는 일을 하기를 바라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족장 제사장 제도가 끝난 이 후에도 가장들에게 가족들의 신앙교육에 대하여 늘 교훈으로 나옵니다.
그래서 신6:6-7에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2. 장자제사장이 있었습니다.
이 장자 제사장은 실재로 활동한 적은 발견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출애굽 시에 여호와께서 초태생은 다 내 것이니 내게 돌리라고 하셨지만 얼마 가지 않아서 시내산에서 그 장자를 대신하는 또 다른 제사장을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제사장은 그 의무가 끝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장자들은 자기가 할 일을 다른 제사장이 하기 때문에 장자대속금이라 해서 자기의 의무금을 그 제사장들에게 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 모든 성도들의 가족이 다 주의 종들에 관한 의무를 감당해야 할 것을 시사해 줍니다. 내 가족에서 주의 종들 내지 않는다면 다른 주의 종들을 도와야 합니다. 최소한 한 사람의 신학생은 졸업을 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이것은 자기 사명인데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 자녀들이 십자가 지지 않으려는 것 다른 자녀들이 져준다는 의미에서도 봐야 합니다. 즉 직분적인 형태는 사라졌지만 그 정신은 지금도 맥맥히 흐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3. 레위제사장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레위 제사장을 세우신 이유는 장자 제사장은 그 의미는 타당하지만 실재적으로 수행하기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문적인 레위지파 제사장 시대를 여시게 됩니다. 오늘 읽은 본문 민3:40-51은 장자 제사장이 레위 제사장으로 바뀌는 순간을 기록하신 말씀입니다.
그럼 레위 지파가 제사장이 된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제사장의 축복은 아무에게나 주는 것 아닙니다. 그것은 목숨 걸고 신앙생활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레갑 자손들이 제사장이 된 것도 그러합니다. 그들은 선조 요나답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평화를 추구하며 술을 마시지 말라는 말을 300년 동안 목숨 걸고 지켰습니다. 그러자 여호와께서는 이 레갑 자손들을 영영한 제사장으로 삼으셨습니다.
이처럼 레위 자손들도 애굽에서 목숨 걸고 신앙 지키며 살았습니다. 출2:1-2에 목숨 걸고 신앙 지킨 레위 지파가 나타납니다. 모세의 부모입니다. 이스라엘 12지파 중에 레위지파는 다른 지파의 평균수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데 학자들 중에는 레위 지파가 애굽에서 남아를 나일강에 던져야 하는 등 가장 박해를 많이 당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이 신앙은 광야에서 확실히 드러났습니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 사람들은 모세가 더디 오자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레위인들은 그것을 만드는데 금도 드리지 않았고 숭배하지도 않았습니다. 출32:26에 그들은 여호와 편에 서 있었다고 했습니다. 모세가 내려 왔을 때 레위지파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 우상숭배자들을 처단하였습니다. 이 신앙이 하루 아침에 생기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미 애굽에서 철저한 신앙의 사람이었고 광야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미드라쉬에 의하면 이스라엘 12지파는 광야에서 하례를 행치 않았지만 레위지파만은 이동하는 고통을 감수하고서 할례를 행했다고 합니다. 그랬기에 하나님께서는 레위 지파를 제사장 지파로 삼으셨습니다.
애굽은 세상의 예표입니다. 이처럼 오늘날도 주의 종이 되려면 세속에 물들지 않아야 합니다. 이것이 최소한의 기본입니다. 오늘날도 죄를 원수 삼고 비 진리를 원수 삼고 사탄을 원수 삼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귀히 쓰십니다. 세상만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손에 쓰임 받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레위지파가 주는 현재적인 교훈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레위 제사장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면
1. 땅에 대한 기업을 받지 못하고 각 지파로 흩어졌습니다.
신10:9에 “그러므로 레위는 그 형제 중에 분깃이 없으며 기업이 없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심같이 여호와가 그의 기업이시니라” 했습니다. 레위인은 땅의 기업은 없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기업이 되었습니다. 레위인은 24반으로 나누어 반차를 따라서 봉사하였습니다. 안식일마다 교대했는데 그러면 1년에 2번씩 일할 차례가 옵니다. 그리고 4주 남은 것은 모두 모여서 함께 일했습니다. 그 때가 유월절 오순절 대속죄일과 초막절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대하5:11에 “이 때에는 제사장들이 그 반차대로 하지 아니하고 스스로 정결케 하고 성소에 있다가 나오매”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2. 레위인들은 전국에 흩어져서 가르치는 일을 했습니다.
레10:8-11에 “여호와께서 아론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나 네 자손들이 - 여호와가 모세로 명한 모든 규례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르치리라” 했습니다. 이렇게 레위인들의 사명은 율법 가르치는 일이었습니다. 이 사명은 어떤 일에도 그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로마가 이스라엘을 속국으로 다스릴 때 율법공부를 절대 금했지만 율법 교육은 계속되었습니다. 만약 율법을 교육하는 것이 발각되면 사형이었습니다. 그런데 랍비 아키바가 태연하게 율법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사형 당하는 것이 두렵지 않습니까?” 하자 “우리는 율법 밖으로 나가면 죽고 마는 민족입니다. 잡히더라도 당장 죽는다고 하더라도 율법 공부를 멈출 수 없습니다. 율법을 향하여 가다가 죽을 수는 있어도 율법을 피하다가 죽을 수는 없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3. 레위인은 온 백성이 드리는 십일조로 살았습니다.
민18:21에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의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생활이 평준화가 이루어졌습니다. 11지파에서 낸 십일조를 레위지파는 받아서 다시 대제사장 아론족에게 바칩니다. 그래서 십일조를 받으면 이스라엘에 제사가 회복되지만 십일조가 드려지지 않으면 레위지파는 살길 찾아 뿔뿔이 흩어져 이스라엘 성전의 제사는 무너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 있어서 십일조는 생명과 같이 중요했습니다.
오늘날로 적용해 본다면 십일조의 의미는 부족한 것을 보충하는 초대교회의 연보의 개념입니다. 모두가 평균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 된다면 십일조의 목적은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가 공산주의와 다른 것은 이것을 사랑과 신앙 안에서 한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사랑과 신앙 안에서 놀라운 결속이 이루어진 적이 크게 두 번 있었는데 하나는 에스더서에 나타나듯 파사에서였고, 또 한 때는 오순절 성령이 강림했을 때였습니다. 이 때 특징은 모두 내 것을 내 것이라고 하지 않고 서로 나누었다는 점입니다. 진정 참된 신앙의 감격 속에서 산다면 십일조의 의미는 지켜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성도는 모두가 레위 지파입니다. 장자 제사장과 레위 제사장에서 보여 주듯 정면에 나섰느냐 협력하느냐만 다를 뿐이지 모두가 하나님의 일에 대한 사명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 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나가는데 힘쓰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사장2 2007.12.26 16:55 | 성막론 | http://kr.blog.yahoo.com/jjss0815/4756
제사장 2 출29:1-9
이 시간에도 계속하여 “제사장”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지난 시간에 제사장의 변천과정에 대해서 족장제사장과 장자제사장과 레위제사장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나실인제사장과 만인제사장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4. 나실인제사장입니다.
나실인이란 히브리어로 ‘나지르’라 하여 ‘성별된, 봉헌된’이라는 뜻입니다. 즉 여호와께 자신을 거룩하게 구별하기로 서원한 사람입니다. 나실인은 본래 제사장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그렇게 작정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나실인이 레위제사장이 부족할 때 제사장으로 쓰이게 됩니다. 여기서 발견하는 교훈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거룩하게만 준비하면 언젠가는 쓰신다는 것입니다.
당시 성전에서 필요한 사람은 성막이나 성전이나 변함없이 24,000명이 필요했습니다. 본래 제사장의 규정은 30세 이상입니다(민4:2).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레위지파의 수가 감소하여 민8:24을 보면 25세로 그 연령을 낮춥니다. 그런데 더 인구가 감소하자 대상23:27을 보면 20세 이상으로 계수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사장의 수가 모자랍니다. 그러나 그 연령을 더 낮출 수가 없으니까 나실인의 서원한 사람 중에서 제사장으로 임명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나실인제사장의 기원입니다.
그런데 이 나실인제사장은 까다로운 조건이 있었습니다. 먼저 지켜야 할 사항인데 그 사항은 세 가지입니다. 먼저는 포도에서 난 것이라면 그 어떤 것도 먹어서는 안 됩니다. 다음은 머리를 깎으면 안 됩니다. 시체를 가까이해서도 안 됩니다. 만약 이것을 지키지 않으면 나실인의 서원은 무효가 됩니다. 그리고 이 서원을 오직 이스라엘 땅에서 지켜야 합니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가 전해 옵니다. 디아베네라는 조그만 왕국의 헬렌즈라는 여왕이 있었습니다. 이 여왕은 이방인이었지만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한 번은 그 아들이 전쟁터에 나가게 되었는데 불안하여 여왕은 하나님께 “만일 아들이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오게 하신다면 7년간을 나실인으로 살겠습니다” 서원했습니다. 그의 아들이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왔습니다. 여왕은 기뻐서 7년간 나실인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 후 여왕이 율벙을 가르쳐 준 힐렐을 방문하여 그 이야기를 하자 힐렐은 말하기를 “여왕의 나실인의 삶은 무효입니다. 나실인의 삶은 이스라엘 땅에서만 지켜야 합니다” 그래서 여왕은 자기 왕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7년간 나실인의 삶을 다시 살았습니다. 그런데 7년이 다 지날 즈음 왕은 시체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7년을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처럼 나실인의 삶은 그 조건이 지극히 까다롭습니다.
자 그럼 이 나실인제사장의 현대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성령 충만한 성도의 예표입니다. 성도들이 성령으로 충만하면 하나님께서 비록 직분적으로 주의 종이 아니지만 주의 일에 쓰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성령충만 받으면 누구나 강단에 올라온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쓰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족한 사역자들의 주의 사역을 보충하고 보조하도록 해 줍니다.
그런데 성령충만하여 하나님께서 맘대로 쓰시려면 나실인의 조건을 지켜야 합니다. 여기에 성령충만의 비결이 나타납니다. 먼저 포도나무의 소산을 먹지 않아야 합니다(민6:3-4). 포도는 부정적 의미에서 세속적 즐거움입니다. 세상 것을 사랑하지 말고 하나님으로 기쁨을 삼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만으로 기쁨을 삼지 않고 어떻게 성령충만할 수 있겠습니까?
다음에 머리를 깎으면 안 됩니다(민6:5). 머리는 위에 누가 계시다는 것으로 순복의 표시입니다. 이처럼 성령충만하려면 철저히 하나님께 순복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십니다.
다음에 시체를 만지거나 가까이 해서도 안 됩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과 하나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즉 같이 믿음 없는 행동을 하거나 같이 불신앙적인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내가 죽습니다. 불신앙과 철저히 분리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나실인에게는 그 기한이 있었습니다. 그 서원하는 동안만 나실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우리가 은혜의 조건을 지키고 성령충만할 때만 하나님께서 쓰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도 영적으로 모두 나실인이 되어야 하는데 이 조건을 철저히 잘 지킬 때만 하나님께서 은혜의 도구로 쓰십니다.
삼손도 보세요. 성령께서 얼마나 특별하게 쓰셨습니까? 그는 무서운 힘과 카리스마적인 지도력으로 블레셋을 쳐부수었습니다. 그러나 들릴라에게 자기 머리를 깎도록 허락함으로 그 힘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머리가 나자 다시 블레셋 원수를 갚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항상 성령충만의 조건을 지켜야 합니다. 아실 것은 우리 성도들도 신령한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쓰시는 나실인제사장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5. 만인제사장입니다.
만인제사장의 성경적 근거는 벧전2:5과 9절입니다.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왜 신약시대에는 모든 성도들이 다 제사장일까요? 그것은 구약시대에 제사장밖에 할 수 없는 것을 신약시대에는 모두가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제사장만이 죄를 고할 수 있는데 우리도 제사장 없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사함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카토릭의 고해성사라는 것은 사실 근거가 없어요. 그리고 각인이 예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신령한 제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1520년에 마틴 루터가 쓴 ‘독일 귀족에게 고함’이라는 책에 보면 1. 모든 성도는 세례 받는 순간에 사제의 소명을 받았다. 2. 성도와 사제의 계급이 있을 수 없다. 3. 신부에게 죄를 고해성사할 필요가 없이 직접 하나님께 고백하면 된다. 4. 기능면에서 구별이 될 뿐이다. 즉 사제는 성례 집행과 말씀 선포에서 그리고 평신도들은 세속 직업에서 소명을 감당해야 한다. 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성직의 개념은 제사장이라는 계념은 아니지만 그리스도를 대신한다는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교회 중에서 들어 쓰시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모두가 제사장이지만 그렇다고 다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대신한다는 성경 근거는 마10:40입니다.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또 고후5:20에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이라는 근거는 고전12:28입니다.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 그리고 엡4:11-12에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만인제사장이라는 이 은혜를 마음껏 누려야 합니다. 구약 제사장들이 활동함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복을 누린 것처럼 복을 누리려면 신령한 제사를 잘 드려야 합니다. 구약 제사장들의 의무와 생활이 바로 신약 성도들의 생활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제사장들이 조석으로 제사하듯 우리 성도들도 매일 조석으로 예배하는 생활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안식일에 제사하듯 주일성수해야 하고, 대 절기 때마다 봉사하듯 우리 성도들에게도 그런 기회가 있어야 합니다. 좋은 집화라면 참석해야 합니다. 그리고 시시때때로 범죄를 고백하며 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구약 제사장이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 아니라 신령한 관점에서 우리가 그대로 행해야 합니다. 그 때 은혜 생활이 이루어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믿음의 규정을 철저히 지켜 거룩하게 하여 성령 충만한 나실인제사장이 됩시다. 그리고 만인제사장의 사명을 잘 감당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온전히 누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사장3 2007.12.26 16:56 | 성막론 | http://kr.blog.yahoo.com/jjss0815/4757
제사장 3 출29:1-9
이 시간에는 “제사장의 위임식”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출 29장 본문은 제사장 위임식장입니다. 위임식이란 제사장이 되는 것으로 오늘날 용어로 임직식과 같은 것입니다. 이 제사장 위임식은 먼저는 대제사장 되신 우리 주 예수님에 대한 설명이고, 한 편으로는 하나님을 바로 섬기는 우리 성도들의 모형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제사장 위임식은 이런 순서로 진행됩니다. 먼저 몸을 씻깁니다. 그리고 제사장의 옷을 입히고 허리에 띠와 머리에 관을 씁니다. 그런 다음 제사장의 머리에 기름을 붓습니다. 그리고 속죄제와 번제와 화목제와 요제와 거제와 상번제를 드립니다. 그런 다음 회막문에서 제사장들이 남은 제물로 식사를 합니다.
그럼, 제사장 위임식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신령한 의미는 무엇일까요?
1. 제사장은 성결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4절에 “너는 아론과 그 아들들을 회막문으로 데려다가 물로 씻기고” 그랬습니다.
제사장 위임을 위해서 먼저는 깨끗이 씻어야 합니다. 이 씻음이 보여주는 진리는 대제사장 되신 우리 주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히4:15에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했고, 히7:26에 도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씻음의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성도들이 제사장의 사역을 감당하려면 양심과 행실이 깨끗해야 함을 교훈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양심에 문제가 생기면 거리껴서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사장은 첫째가 씻음입니다. 예수님의 보혈 확신 가지시기 바랍니다. 죄가 있으면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2. 제사장은 사랑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5-6절에 “의복을 가져다가 아론에게 속옷과 에봇 받침 겉옷과 에봇을 입히고 흉패를 달고 에봇에 공교히 짠 띠를 띠우고 그 머리에 관을 씌우고 그 위에 성패를 더하고” 그랬습니다.
제사장 위임을 위해서 아론에게는 대제사장복을 그 아들들에게는 제사장복을 입혔습니다. 미드라쉬를 보면 제사장복을 입는 데도 엄격함이 있었다고 합니다. 아론 계열의 제사장만 제사장복을 입습니다. 아론계열이어도 성막이나 성전에서만 입어야 합니다. 성막 안일지라도 제사의 일이 아닐 때는 벗어야 합니다. 그리고 옷을 입을 때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옷을 다 착용하되 한 가지라도 빼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특수한 옷을 입게 하신 것은 제사장은 성별해야 함을 보여줍니다. 왜냐하면 제사장이란 행실 그 자체가 하나님께 제사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롬12:1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했습니다. 그 뿐 아니라 찬미와 구제도 제사가 됩니다(히13:15, 16).
그런데 행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대제사장복의 에봇 조끼 앞 중앙에 12개의 보석이 달려 있고 거기 12지파의 이름이 쓰인 것은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을 가슴으로 사랑하심을 보여줍니다. 나아가 이것은 제사장된 우리가 사랑의 마음을 가져야 함을 교훈합니다. 사랑 으로 모든 사람을 품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제사장된 우리에게 사랑은 필수입니다.
3. 제사장은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7절에 “관유를 가져다가 그 머리에 부어 바르고” 그랬습니다.
제사장 위임을 위해 머리에 기름을 붓되 많이 부어 수염을 통해 아래 옷깃까지 흐르도록 부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성령충만을 시사합니다. 예수님은 성령이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이처럼 우리가 제사장직을 행하려면 성령충만해야 합니다. 그래야 신령한 찬미를 부를 수 있고 이웃을 섬기며 죄인을 위해서 기도해 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머리부터 수염과 옷깃까지 기름이 흐름은 충만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시133:1-3에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 같고” 했는데 왜 형제의 연합을 기름부음에 비유했을까요? 성령 충만할 때 주님과 우리의 연합이 이루어지고 성도 간의 연합도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벧전2:5에 “신령한 제사장이 되라”고 했습니다. 성령 충만해야 신령합니다.
4. 그 다음 제사장은 매일 신령한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29:10-28절 내용인데 거기 보면 제사장 위임을 위해서 드려야 할 제사가 나타납니다.
제사장 위임을 위해서 먼저 속죄제를 드렸고 번제를 드렸고 화목제를 드렸고 요제와 거제와 상번제를 드렸습니다. 속죄제란 자기 죄를 속하기 위한 것이요, 번제란 태워 드리는 제사로 온전한 헌신의 상징이며, 화목제란 하나님과의 아름다운 관계를 위한 제사이고, 요제란 제물을 흔들어 드리는 것이고, 게제란 제물을 높이 들어서 드리는 것이고, 상번제는 매일 조석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입니다.
구약 제사장에게 이런 의식이 필요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히5:1-3에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취한 자이므로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 저가 무식하고 미혹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싸여 있음이니라 이러므로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림과 같이 또한 자기를 위하여 드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한 대로 그들은 인간이기에 허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시기에 그런 제사가 필요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이 아니기에 이 구약 의식대로는 할 필요 없지만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제사장이 속죄제를 드렸듯 우리가 제사장 직분을 행하려면 자기 죄와 남의 죄를 위해서 기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남의 흠만 보고 방치하거나 흉보는 것은 제사장이 할 일이 아닙니다. 내 눈에 그것이 보인 것은 그를 위해서 기도해 주라고 그런 줄 알아야 합니다. 내 책임입니다.
그리고 번제를 드리듯 나 자신과 성도들이 세상에 마음 빼앗기지 않고 온전히 하나님만 사랑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아직 세상 욕망에 마음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제사장일지는 몰라도 신령한 제사장이 아닙니다. 온전히 하나님께 마음 드리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고 기도하면 온전히 하나님께 마음이 드려지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번제를 기뻐하시듯 아주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화목제를 드리듯 우리 만인제사장들은 하나님과 나, 나와 다른 사람들, 그리고 가정과 교회와 사회와 나라와 세계 평화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이 제사장 역할이 부족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깁니다. 바른 소리의 선지자 역할도 필요하지만 제사장 역할이 더 앞서야 하고 함께 병행해야 합니다. 오늘날 선지자 역할을 하겠다고 외치는 사람 많지만 눈물 없는 선지자가 많습니다. 예레미야처럼 기도하는 제사장 역할까지 겸한 눈물의 선지자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흔들어서 요제를 드리고 높이 들어 거제를 드리듯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드리고 감사해야 합니다. 모든 영광 하나님께 돌리는 것 우리 제사장이 해야 할 역할입니다.
그리고 매일 조석으로 상번제를 드렸듯 우리는 매일 하나님께 예배하고 기도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상번제를 조석으로 드림은 하루 두 번의 예배의 개념도 있지만 시작과 나중이라는 점에서 하루 전체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함을 가르쳐 줍니다. 이렇게 각종 제사는 우리에게 제사장 역할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잘 가르쳐 줍니다.
5. 그리고 무엇보다 제사장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행복해야 합니다.
31-32절에 “너는 위임식 숫양을 취하여 거룩한 곳에서 그 고기를 삶고 아론과 그 아들들이 회막문에서 그 숫양의 고기와 광주리에 있는 떡을 먹을지라” 했습니다.
제사장 위임식 후에 제사장들은 거룩한 곳에서 식사를 하였습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난 나머지 제물은 삶아서 제사장들이 거룩한 회막문에서 모여서 식사를 하였습니다. 이 때 광주리에 남아 있는 떡도 함께 먹습니다. 그러나 아침까지 남은 것은 모두 불태워야 합니다.
이 때 먹는 고기가 넓적다리와 갈비를 먹는데 모두 풍요롭고 맛이 있는 부분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누리는 것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헌신하고 봉사하는 것도 좋아하시지만 하나님의 풍성한 그 은혜를 받아 누릴 때 더 기뻐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무엇보다 내가 행복해 지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교회를 위해서 수고하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 먼저 잘 믿어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제사장으로서 누리는 성도의 축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고 계십니다. 우리들도 제사장의 직분을 잘 감당하여 먼저 우리가 은혜 받고 남까지 섬길 수 있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사장4 2007.12.26 16:57 | 성막론 | http://kr.blog.yahoo.com/jjss0815/4758
제사장 4 레21:1-9
이 시간에는 “제사장의 자격”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모든 직분에는 자격이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집사도 자격이 있고, 목사도 자격이 있고, 다른 직분에도 자격이 있습니다. 이처럼 구약의 제사장이나 대제사장도 자격이 있었습니다. 본 21장은 제사장과 대제사장의 자격에 관한 것입니다. 이 자격은 한 마디로 거룩함입니다. 제사장이 거룩해야 할 이유는 먼저는 거룩하신 제사장이신 예수님을 예표하기 때문이고 나아가 제사장의 직책이 죄를 처리하는 직책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제사장의 자격은 어떤 것입니까?
1. 선택받은 자여야 합니다.
신21:5에 “레위 자손 제사장들도 그리로 올지니 그들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사 자기를 섬기게 하시며 또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게 하신 자라”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 성도들도 택하심을 받은 족속입니다. 벧전2:9에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했습니다. 그런데 택하셨다는 데는 몇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는 우리에게는 공로가 없고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임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제사장의 권위가 신적인 것임을 나타내줍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삼으실 때도 택하셨습니다. 불학무식하여 배운 데 것도 없는 어부들이었지만 주님께서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직접 택하셨으니 이것이 바로 신적 정통성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택하시면 하나님의 사자가 됩니다. 남북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입니다. 북쪽 이스라엘은 인간적인 방법으로 이탈했기 때문에 왕권에 정통성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남쪽 유다는 계속하여 다윗 왕의 줄기를 이어갔습니다.
그런데 신약의 성도에게는 이런 정통성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공로 없지만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택해 주셨고 성령으로 예수님께서 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메시야의 줄기는 메시야만 낳게 한 것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이제 신약에서는 전도를 통해서 거꾸로 성령으로 나무 가지 뻗듯이 뻗어나깁니다. 그래서 우리가 바로 아브라함과 같은 복을 받고 다윗과 같은 복을 받은 것입니다. 여기서 이탈한 집단은 결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닙니다. 어느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 그것은 천만의 말씀입니다.
2. 제사장의 자격은 흠이 없는 정상인이어야 합니다.
레21:18-21절에 “무릇 흠이 있는 자는 가까이 못할지니 곧 소경이나 절뚝발이나 코가 불완전한 자나 지체가 더한 자나 발 부러진 자나 손 부러진 자나 곱사등이나 난장이나 눈에 백막이 있는 자나 괴혈병이나 버짐이 있는 자나 불알 상한 자나 제사장 아론의 자손 중에 흠이 있는 자는 나아와 여호와의 화제를 드리지 못할지니 그는 흠이 있은즉 나아와 하나님의 식물을 드리지 못하느니라” 했습니다.
제사장은 신체에 이상이 있으면 안 됩니다. 이것은 구약적인 말씀이고 신약에서는 그렇게 적용되지 않습니다. 신약에서는 팔이 하나 없어도 눈이 하나 없어도 쓸개를 떼어내고 콩팥을 하나 떼어냈어도 주님께서 쓰심에는 아무 지장 없습니다. 왜냐하면 신약적으로 풀면 이것은 영적인 불구를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비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하면 제사장 역할을 할 수 없다는 교훈입니다.
그럼 소경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분별치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도 모르고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기도하는 제사장이 됩니까? 또 코가 불완전한 자란 이 역시 분별의 기능인데 썩은 것 썩지 않은 것 즉 속된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이래서는 제사장이 될 수 없습니다. 곱사등이란 믿음의 긍정적 신앙을 갖지 못함입니다. 담대히 가슴 펴고 사시기 바랍니다. 지체가 더한 자는 불필요한 염려과 걱정입니다. 그것 아무 쓸데없는 것입니다. 다 떨어버리셔야 합니다.
그런 난장이는 무엇입니까? 항상 어린 신앙입니다. 이래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합니다. 신앙의 연조 자랑할 것 없습니다. 문제는 얼마나 자랐느냐 입니다. 그리고 눈에 백막이 있다는 것은 눈에 반점이 있다는 것으로 잘못된 관점을 가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아야지 육신의 눈으로만 보면 안 됩니다. 그리고 괴혈병은 “심하게 긁다”는 뜻으로 옴이나 비듬을 가리킵니다. 마음의 평안을 갖지 못하는 것이 괴혈병입니다. 그리고 버짐이란 윤택하지 못할 때 생기는 병으로 슬픔과 비관과 어둠의 생각들입니다. 혹시 이런 가운데 있다면 영적으로 병들었음을 깨닫기 바랍니다. 그리고 불알이 상한 자가 나옵니다. 성경에는 이런 말도 있어요. 이 사람은 자손을 생산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전도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이처럼 제사장이란 지극히 정상적인 신앙의 기초에서만이 가능합니다. 바른 신앙에 서 있지 못하면 남을 관용하거나 사랑하거나 기도해 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제사장적인 믿음을 가졌다는 것은 사랑 안에서 성숙했음을 가리킵니다. 아주 높은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신분만 제사장이 아니라 제사장과 같은 제사장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3. 제사장은 정결해야만 자격자가 됩니다.
4절에 “제사장은 백성의 어른인즉 스스로 더럽혀 욕되게 하지 말지니라”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을 보면 죽은 시체를 가까이 해도 안 된다, 기생이나 부정한 여인을 취해서도 안 된다, 제사장의 딸까지도 행음한 딸을 가져서는 안 된다 그런 딸이라면 불살라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럼 신약에서도 그래야 할까요? 우리가 지금 이 말씀을 육으로 풀면 큰 일 나지요? 요즘은 입관 거의 않지만 옛날에는 교회에서 얼마나 입관 많이 했습니까? 신약에서는 이 말씀은 영적으로 받아드려집니다.
즉 성경에는 불신자를 죽은 자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제사장은 불신의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교훈입니다. 또 성경에서는 음행도 음행이라 하고 세상 탐욕이나 이방신을 섬기는 것도 음행이라고 합니다. 세상 종교와 악한 정욕 가지고는 제사자이 되지 못합니다. 그리고 제사장의 부정을 저지른 딸은 버리기 어려운 세상 사랑입니다. 그러나 다 멀리하고 끊고 성령으로 불살라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의 신부된 성도들은 거룩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죄악을 처리하지 않으면 기도가 안 나옵니다. 그래서 제사장 일이 행해지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이 자격을 갖추어야 기도가 나와요. 제사장일이 되어요. 이렇게 신령하게 지어져야 신령한 제사를 드릴 신령한 제사장이 됩니다(벧전2:5).
그리고, 제사장은 오직 처녀와 결혼해야 하는 규정이 있습니다.
13-15절에 “그는 처녀를 취하여 아내를 삼을지니 과부나 이혼된 여인이나 더러운 여인이나 기생을 취하지 말고 자기 백성 중 처녀를 취하여 아내를 삼아 그 자손으로 백성 중에서 더럽히지 말지니 나는 그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임이니라” 했습니다.
이렇게 처녀에게 결혼해야 하는 이유는 대제사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장차 정결한 신부인 교회를 택하실 것을 예표합니다. 처녀란 세상과 짝하지 않는 죄가 없는 성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악 많은 인생들을 은혜 주셔서 거룩하게 하셔서 처녀로 삼으십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사람들은 네가 진짜 처녀냐 과거를 묻지만 하나님께서는 죄인된 우리를 정케 하사 처녀라고 부르십니다. 즉 제사장이 처녀와 결혼해야 한다는 것은 우리의 영혼이 깨끗해야 할 것을 시사해 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처럼 아름다운 제사장이 되십시다. 그러기 위해서 신앙적으로 흠이 없어야 합니다. 정결해야 합니다. 주님만 사랑해야 합니다. 날마다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겨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 아래 거하시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제사장5 2007.12.26 16:58 | 성막론 | http://kr.blog.yahoo.com/jjss0815/4759
제사장 5 출30:7-10
이 시간에는 “대제사장의 임무”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구약시대에 제사장에는 대제사장과 제사장이 있었습니다. 대제사장은 아론의 후예로서 제사장보다 더 귀한 일을 하는 직책입니다.
대제사장에는 10대 임무가 있습니다.
1. 대제사장의 임무는 번제단에서 속죄하는 일입니다.
레16:18-19에 “그는 여호와 앞 단으로 나와서 그것을 위하여 속죄할지니 곧 그 수송아지의 피와 염소의 피를 취하여 단 귀퉁이 뿔들에 바르고 또 손가락으로 그 피를 그 위에 일곱 번 뿌려 이스라엘 자손의 부정에서 단을 성결케 할 것이요” 그랬습니다.
이 대제사장의 임무 속에서 여러 가지 신앙적인 교훈을 받는데 이 번제단에서 우리는 보혈을 믿음으로 확실히 발라야 한다는 교훈을 받습니다. 피를 제단 뿔에 바르는 것은 보혈의 권세를, 손가락으로 일곱 번 뿌림은 완전성을 상징합니다. 이는 그리스도이 속죄의 완전성을 시사합니다. 그러나 개인에게 적용하면 이처럼 속죄의 공로를 믿되 온전히 믿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나의 죄를 담당하신 보혈 공로를 잘 믿는 것이 마음의 문설주와 인방에 보혈을 잘 바르는 것입니다.
2. 대제사장의 임무는 수족을 씻는 일입니다.
출30:19-20에 “아론과 그 아들들이 그 두멍에서 수족을 씻되 그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 물로 씻어 죽기를 면할 것이요” 했습니다.
이처럼 자범죄를 범했을 때나 우리 심령이 더럽혀 졌을 때 늘 회개하여 깨끗이 씻어야 합니다.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것이 없듯 예수 믿어 영원한 속죄를 받았지만 죄성은 늘 씻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만약 씻지 않으면 죽는다고 했듯 주님과 교통이 끊겨져서 관계가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심령을 깨끗이 씻기를 바랍니다.
3. 대제사장의 임무는 떡상에 떡을 진설하는 일입니다.
출25:30에 “상 위에 진설병을 두어 항상 내 앞에 있게 할지니라” 했습니다.
이 진설병은 항상 진설되어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 중요한 진리가 있는데 즉 우리 영혼도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즐거워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시편 1편에도 “ 복 있는 사람은 -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그랬지요? 이것이 정상적인 영적생활입니다. 우리 마음의 성전에 생명이 떡은 있습니까?
4. 대제사장의 임무는 등대를 관리하는 일입니다.
출27:20-21에 “너는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감람으로 찧어 낸 순결한 기름을 등불을 위하여 네게로 가져오게 하고 끊이지 말고 등불을 켜되 아론과 그 아들들로 회막안 증거궤 앞 휘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여호와 앞에 그 등불을 간검하게 하라” 했습니다.
여기 감람유는 성령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이 등불을 꺼쳐서는 안 됩니다. 이처럼 우리 심령의 불도 꺼쳐서는 안 된다는 교훈입니다. 주님이 라오디게아 교회에 하신 말씀 보세요. 계3:16-19에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아무리 겉이 번드레해도 신앙의 불 꺼짐은 곧 병든 것이요 죽은 것입니다.
5. 대제사장의 임무는 분향단에 향을 사르는 일입니다.
출30:7-8에 “아론이 아침마다 그 위에 향기로운 향을 사르되 등불을 정리할 때에 사를지며 또 저녁때 등불을 켤 때에 사를지니 이 향은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 앞에 끊지 못할지며” 그랬습니다.
여기 분향은 기도의 상징입니다. 분향을 조석으로 했듯 모든 것을 기도로 시작하여 기도로 마치라는 교훈입니다. 이 향은 대대로 끊지 않아야 하듯 기도 쉬거나 기도 부족한 죄를 범치 마시기 바랍니다.
6. 대제사장의 임무는 지성소에서 속죄하는 일입니다.
히9:7에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 년 일 차씩 들어가되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이 피는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것이라”
7월 10일 대속죄일에 하는 일에 관한 것입니다. 이 일은 대제사장밖에는 아무도 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하나님 앞에 온전히 나가야 우리 죄가 다 씻어집니다. 하나님 앞에 나가려면 씻어야 하지만 반대로 하나님 앞에 나가면 죄가 씻어지는 이중적인 축복이 있습니다. 그래서 요일1:7에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그랬습니다. 그러므로 대제사장처럼 영적으로 깊이 되어 하나님 앞에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7. 대제사장의 임무는 백성들을 판결하는 일입니다.
신21:5에 “레위 자손 제사장들도 그리로 올지니 그들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사 자기를 섬기게 하시며 또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게 하신 자라 모든 소송과 모든 투쟁이 그들의 말대로 판결될 것이니라”
대제사장의 판결은 왕의 판결과는 다른 특수한 것입니다. 대제사장은 우림과 둠밈이라는 판결 흉패를 이용하여 판결을 합니다. 그래서 검은 것이 나오느냐 흰 것이 나오느냐 제비뽑기로 하나님이 뜻을 깨닫습니다. 이것을 우리들 성전에 비유한다면 곧 양심입니다. 양심이 어둡게 표시되면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양심이 빛나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것 잘해야 합니다. 양심 거스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8. 대제사장의 임무는 백성들을 축복하는 일입니다.
민6:23-26에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하셨습니다.
이처럼 주의 종의 축복은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 모두도 늘 축복해야 할 것을 교훈합니다. 나를 축복하고 내 가족을 축복하고 이웃과 원수까지도 축복해야 합니다. 이렇게 대제사장의 임무가 우리 신앙생활에 주는 교훈이 큽니다.
9. 대제사장의 임무는 성막의 일을 총 지휘하는 일입니다.
성막의 제반사는 레위인만이 할 수 있었습니다. 가령 게르손 자손은 성막 장막 덮개 회막 문장 뜰 휘장 등을 맡았습니다. 고핫 자손은 증거궤 떡상 등대 번제단 등을 맡았습니다. 그리고 므라리 자손들은 널판 띠 기둥 받침 말뚝 줄 등을 맡았습니다. 이렇게 회막에 봉사하는 레위인은 8,500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을 총지휘 하는 사람은 대제사장이었습니다. 이처럼 교회도 모두 일군이지만 주관자가 있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10. 대제사장의 임무는 율법을 가르치는 일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께 말씀을 받습니다. 그러나 제사장은 이미 주신 말씀을 백성들에게 가르칩니다. 우리들도 전도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이것이 구약 대제사장의 일이요 신약 성도가 해야 할 신앙적인 내용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몸은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우리는 그 성전을 관리하고 제사하는 제사장입니다. 제사장의 일을 잘 하십시다. 그래서 우리 주님이 우리 안에서 영광 받으시고 복 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사장6 2007.12.26 16:59 | 성막론 | http://kr.blog.yahoo.com/jjss0815/4760
제사장 6 출28:1-5
이 시간에는 “대제사장의 의복”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제사장에 대한 내용은 성막론의 상당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 중에서 의복도 대단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대제사장은 8가지의 옷을 입습니다. 이 옷에 담긴 의미가 있습니다.
그럼, 8가지의 옷은 무엇일까요?
1. 대제사장은 고의를 입었습니다.
출28:42-43절 “또 그들을 위하여 베로 고의를 만들어 허리에서부터 넓적다리까지 이르게 하여 하체를 가리게 하라 아론과 그 아들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나 제단에 가까이 하여 거룩한 곳에서 섬길 때에 그것들을 입어야 죄를 지어서 죽지 아니하리니 그와 그의 후손의 영원히 지킬 규례니라”
대제사장이 맨 처음 입는 옷이 고의입니다. 고의란 지금으로 말하면 좀 긴 사각팬티에 해당합니다. 이 고의로 허리부터 넓적다리까지 보이지 않게 잘 가려야 합니다. 속살이 보이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속살의 첫 인상은 성(性)적인 것입니다. 만약 고의를 입지 않아서 속살이 보이면 대제사장은 죽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더워도 제사장은 팬티를 입었습니다.
이것을 영의 제사장인 우리에게 적용하면 하나님 앞에서 영의 정절을 지켜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하나님 말고 이방신을 따라 가거나 이단을 따르거나 세상을 사랑하면 제사장이 죽는 것처럼 우리 심령이 죽습니다. 그러므로 늘 깨끗이 씻고 또 씻어야 하며 말씀을 보고 고치고 또 보고 고쳐가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 성도가 지킬 영원한 규례이기 때문에 강조하고 또 강조해도 모자랍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옷은 성화의 옷입니다.
2. 대제사장은 반포 속옷을 입었습니다.
출28:39 “너는 가는 베실로 반포 속옷을 짜고”
대제사장이 두 번째 입는 속옷으로 어께에서 발까지 내려오는 가장 길고 기본적인 옷입니다. 이 옷은 고운 베실로 짠 흰 세마포 옷입니다. 그 나라는 덥기 때문에 보온 내의 같은 것은 없습니다. 일반 백성이 이 옷을 입으면 옷을 다 입은 것이 됩니다. 그러나 대제사장은 그 위에 또 입는 것이 있기 때문에 속옷이라 부릅니다.
이 옷을 우리에게 적용하면 예수 보혈의 옷입니다. 늘 하나님 앞에서 거리낌이 없도록 예수 보혈 공로에 서서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 때 우리 심령이 빛이 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심령이 답답하고 어둡습니다. 그래서 사1:18-20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키우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하셨습니다. 우리가 세세토록 살아계신 하나님의 제사장 노릇을 하려면 이런 밝고 빛나고 가볍고 평안한 세마포와 같은 심령이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항상 보혈 공로 의지하고 사시기 바랍니다. 내 죄가 아무리 흉악해도 내 죄보다 더 귀한 것이 보혈인 줄 알고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떳떳이 나오시기 바랍니다. 마음에 가책을 가지고 웅크리고 나온다고 하나님께서 너 참 양심적이구나 칭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보혈 공로로 해보다 밝은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 때 우리의 영이 맑습니다.
3. 대제사장은 에봇 받침 겉옷을 입습니다.
출28:31-35 “너는 에봇 받침 겉옷을 전부 청색으로 하되 두 어깨 사이에 머리 들어갈 구멍을 내고 그 주위에 갑옷 깃같이 깃을 짜서 찢어지지 않게 하고 그 옷 가장자리로 돌아가며 청색 자색 홍색실로 석류를 수놓고 금방울을 간격하여 달되 그 옷 가장자리로 돌아가며 한 금방울, 한 석류, 한 금방울, 한 석류가 있게 하라 아론이 입고 여호와를 섬기러 성소에 들어갈 때와 성소에서 나갈 때에 그 소리가 들릴 것이라 그리하면 그가 죽지 아니하리라”
대제사장이 세 번째로 입어야 할 옷이 에봇 받침옷입니다. 옷 모양은 긴 조끼입니다. 이 옷은 그 위에 에봇을 입기 위한 받침 겉옷입니다. 이 옷의 색깔은 청색입니다. 왜 청색인가? 생명의 색이기 때문입니다. 대제사장의 활동은 심령을 살리는 활동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이처럼 우리들이 제사장 일을 하면 심령이 삽니다. 그러므로 제사장의 금방울 소리는 사람 살리는 소리요, 은혜 받는 소리입니다.
어떻게 해야 내 심령이 살아 숨쉬고 평안과 기쁨과 사랑과 행복과 능력이 있을까? 성경은 그것을 대제사장 겉옷을 통해서 말씀합니다. 제사장 일을 잘 하라는 교훈입니다. 늘 예배하고 감사하고 기도하고 찬송하고 충성하고 나를 내려놓고 순종하면 은혜가 옵니다. 심령이 삽니다. 참으로 어려운 문제인데 이 귀한 진리를 아주 쉽게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진리를 깨닫지 못해서 갈급하고 방황하고 있는데 아주 간단히 가르쳐 주잖아요. 너무 쉬워서 여러분이 경홀히 여길까 그게 걱정입니다.
그런데 이 받침 겉옷은 옷의 가장자리를 튼튼하게 깃을 박았고 그 깃에 청색 홍색 자색실로 석류를 수놓았고 또 거기에 금방울을 달아서 움직일 때 소리가 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을 잘 섬기며 사는 것은 그것이 실족치 않을 견고한 것이며 아름다운 것이며 하나님과 사람 앞에 영광이 되는 일입니다. 열 두해 혈루증으로 앓은 여인이 예수님의 옷가를 만지고 혈루의 근원이 마르지 않았습니까? 계속해서 시험 들고 넘어지고 은혜를 쏟고 내 생명이 유출되는 성도들 계신다면 열심히 예수님의 삶을 본 받아 제사장 일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큰 은혜를 받게 될 것입니다.
벧후1:10-11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했습니다. 그러니까 에봇 받침 겉옷은 열심히 하나님 잘 경외하는 예배생활의 예표입니다. 그런데 이 방울 달린 옷은 성소에서 봉사할 때만 입었고 레 16장을 보면 지성소에 들어갈 때는 벗고 흰 세마포 속옷만 입고 들어갔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장차 하나님 앞에 나갈 때 어떤 직분의 이름으로도 아닌 흰 세마포 예수 공로 입고 들어갑니다. 천국에는 장로교인도 감리교인도 어느 교단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 믿는 성도들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만 자랑하시기 바랍니다.
4. 대제사장은 에봇을 입었습니다.
출28:6 “그들이 금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공교히 짜서 에봇을 짓되”
이것은 대제사장이 조끼 모양이 에봇 밭침 겉옷 위에 입는 에봇입니다. 정확히 설명하면 입는다기 보다는 행주치마처럼 가슴에 걸치는 것입니다. 이 에봇은 금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공교히 짜서 만들었습니다. 백색까지 합하면 다섯 가지의 색깔입니다. 대개 금실은 신성이나 믿음, 청실은 생명, 자색은 왕의 색이요, 홍색은 고난의 예수님 색이요, 백색은 성결의 색입니다. 그러므로 이 색은 하나님이시오 영생이시오 왕이시오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그럼 이 4색의 에봇을 우리에게 적용하면 무엇일까요? 우리 주님을 마음을 다해 그렇게 존경하고 높이고 사랑하고 그 앞에 순복하며 그의 고난에 동참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 에봇이 가슴에 있듯이 우리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신령해지는 길이요, 상명을 누리는 길이요, 능력의 영권을 누리는 길이며, 주님과 온전히 연합되는 길입니다.
그래서 잠3:1-10에 “내 아들아 나의 법을 잊어버리지 말고 네 마음으로 나의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그것이 너로 장수하여 많은 해를 누리게 하며 평강을 더하게 하리라 인자와 진리로 네게서 떠나지 않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이것이 네 몸에 양약이 되어 네 골수로 윤택하게 하리라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즙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 예수님은 우리의 대제사장이십니다. 우리도 제사장이며 구약의 대제사장이 하는 것까지 우리에게 허락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 섬기게 되었습니다. 우리 하나님 잘 섬겨 대제사장이 누리는 그 풍성한 은혜를 다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제사장7 2007.12.26 17:01 | 성막론 | http://kr.blog.yahoo.com/jjss0815/4761
제사장 7 출28:6-14
이 시간에도 이어서 “대제사장의 의복”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동안 대제사장이 입었던 네 가지의 옷을 말씀드렸습니다. 반드시 대제사장은 부끄러운 하체를 가릴 고의를 입어야 하고, 그 위에 세마포 반포 속옷을 입고, 그 위에 에봇 받침 겉옷을 입고, 그 위에 에봇을 입어야 합니다. 오늘도 나머지 네 가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립니다.
5. 대제사장의 두 어께의 견대를 메었습니다.
9-12절 “호마노 두 개를 취하여 그 위에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을 새기되 그들의 연치대로 여섯 이름을 한 보석에, 나머지 여섯 이름은 다른 보석에 보석을 새기는 자가 인에 새김같이 너는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을 그 두 보석에 새겨 금테에 물리고 그 두 보석을 에봇 두 견대에 붙여 이스라엘 아들들의 기념 보석을 삼되 아론이 여호와 앞에서 그들의 이름을 그 두 어깨에 메어서 기념이 되게 할지며” 그랬습니다.
견대란 멜빵과 같이 어께에 메는 띠입니다. 이 양편 견대에는 열두 지파의 이름이 새겨진 호마노 보석을 하나씩 달았습니다. 우편 견대에는 루우벤 레위 단 시므온 유다 납달리의 이름을, 좌편 견대에는 아셀 스불론 베냐민 갓 잇사갈 요셉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이렇게 12지파의 이름을 보석에 새겨 견대에 메고 다니는 것에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의미는 책임입니다. 대제사장은 자기에게 맡긴 하나님의 양 무리를 책임져야 합니다. 그들을 가르치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할 책임입니다. 이 메는 책임을 버리고 제사장 노릇을 하리라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 모습 이대로 주님께서는 우리 죄를 담당하셨을 뿐 아니라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책임 있는 중보의 기도를 하시고 계십니다. 아버지께서 주신 자들을 하나라도 버리지 않겠다는 주님 얼마나 귀하십니까?
이처럼 진정한 신령한 제사장이 되려면 맡겨진 양 무리와 주변의 관심 가져야 할 자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정상을 달리는 신앙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성숙할수록 하나님께서는 지체와 이웃을 위한 기도감을 붙여주십니다. 그러므로 붙여주신 기도감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만큼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정하심입니다. 그래서 계20:6에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했습니다. 이 책임과 은혜를 지금부터 감당하고 누리시기 바랍니다.
6. 대제사장의 가슴에 판결 흉패를 가슴에 찹니다.
15-30절이 흉패에 대한 설명입니다. 우리 함께 읽어 봄으로 설명을 대신하도록 하겠습니다. “너는 판결 흉패를 에봇 짜는 법으로 금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공교히 짜서 만들되 장광이 한 뼘씩 두 겹으로 네모반듯하게 하고 그것에 네 줄로 보석을 물리되 첫 줄은 홍보석 황옥 녹주옥이요 둘째 줄은 석류석 남보석 홍마노요 셋째 줄은 호박 백마노 자수정이요 넷째 줄은 녹보석 호마노 벽옥으로 다 금테에 물릴지니 이 보석들은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대로 열둘이라 매보석에 열두 지파의 한 이름씩 인을 새기는 법으로 새기고 정금으로 노끈처럼 땋은 사슬을 흉패 위에 붙이고 또 금고리 둘을 만들어 흉패 위 곧 흉패 두 끝에 그 두 고리를 달고 땋은 두 금사슬로 흉패 두 끝 두 고리에 꿰어 매고 두 땋은 사슬의 다른 두 끝을 에봇 앞 두 견대의 금테에 매고 또 금고리 둘을 만들어 흉패 아래 양편 가 안쪽 곧 에봇에 닿은 곳에 달고 또 금고리 둘을 만들어 에봇 앞 두 견대 아래 매는 자리 가까운 편 곧 공교히 짠 띠 윗편에 달고 청색 끈으로 흉패 고리와 에봇 고리에 꿰어 흉패로 공교히 짠 에봇 띠 위에 붙여 떠나지 않게 하라 아론이 성소에 들어갈 때에는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을 기록한 이 판결 흉패를 가슴에 붙여 여호와 앞에 영원한 기념을 삼을 것이니라 너는 우림과 둠밈을 판결 흉패 안에 넣어 아론으로 여호와 앞에 들어갈 때에 그 가슴 위에 있게 하라 아론이 여호와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판결을 항상 그 가슴 위에 둘지니라”
간단히 설명하면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이름을 새긴 12가지 보석을 단 사각 흉패를 대제사장 가슴에 차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흉패는 두 겹으로 되어 주머니처럼 되어 있어 안에 우림과 둠밈을 넣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 열 두 보석이 어느 지파를 의미하는가에 대하여 연구한 학자로 슬레밍(Slemming)이라는 학자가 유명한데 그는 창 49장의 야곱의 축복과 신 33장의 모세의 축복을 종합하고 실재 12지파가 어떤 축복을 받았는지를 연구한 결과 각 보석이 어느 지파를 의미하는지 알아냈습니다. 그런데 이런 규명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흉패에 12보석을 다신 의미가 더 중요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들을 보석보다 귀하게 여기시어 가슴에 품고 생명과 같이 사랑하신다는 점입니다. 얼마나 감사하고 감격스런 일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눈동자와 같이 사랑하십니다. 불가운데 지날지라도 타지 않게 하시며 물 가운데 지날지라도 빳지 않게 하십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우리 만인 제사장들도 사람들을 사랑으로 품고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의 신앙이란 신앙의 최고봉입니다. 모든 사람을 가슴에 품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 수준의 신앙을 목표하고 사모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림과 둠밈은 하나님의 뜻을 묻는 판결 도구입니다. 민27:21에 “우림의 판결법으로 여호와 앞에 물을 것”이라 했습니다. 이 보석이 네모반듯한 흉패주머니에 담겨 있었습니다. 이 네모반듯함은 공의의 상징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바르고 공의로운 뜻을 묻는 것으로 대체적으로 이것이냐 저적이냐 양자택일케 해주시는 것으로 봅니다.
이것을 우리 성도들에게 적용하면 양심의 판결입니다. 성도는 네모진 흉패처럼 바른 진리의 양심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어떤 일을 할 때 양심이 검게 반응하면 즉 양심이 허락지 않으면 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나 양심이 허락하고 좋아할 때는 해야 합니다. 양심을 거슬리면 그 심령은 죽습니다. 그러나 양심을 따라 행하면 기쁨과 축복이 충만합니다. 그러나 양심은 지식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진리에 서야 바른 양심이 됩니다. 그래서 요즘 양심적 병역거부는 비 진리에 선 여호와증인의 주장이므로 배격해야 합니다. 만약 그것을 용납한다면 공산주의 양심을 가진 사람이 병역을 거부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우리 민주주의 체제에서 용납이 될까요? 잘못된 지식의 양심은 고쳐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흉패는 우리가 사랑의 가슴 양심의 가슴이어야 함을 교훈합니다.
7. 대제사장은 허리에 띠를 띠어야 합니다.
28:4에 “그들의 지을 옷은 이러하니 곧 흉패와 에봇과 겉옷과 반포 속옷과 관과 띠라” 했습니다.
이 띠도 금색 청색 자색 홍색 그리고 가늘게 꼰 베실 즉 흰색이었습니다. 대게 띠는 봉사를 말합니다(눅17:8). 혹은 힘을 의미합니다(사22:21). 즉시 준비 태세나 겸손의 자세를 가리키기도 합니다(눅12:35, 출12:11). 그런데 이 띠는 그냥 봉사도 아니고 그냥 힘이나 준비나 겸손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단단한 모습으로 애쓰는 모습입니다.
한의학에서는 몸의 힘이 모이는 곳이 단전이라고 합니다. 단전이란 배꼽 아래 부분인데 그 자리가 띠를 띠는 자리입니다. 이 곳에 띠가 띠어지면 힘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띠는 한 마디로 대제사장의 충성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대제사장은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충성해야 합니다. 대제사장 되신 예수님 얼마나 충성된 분이십니까? 그래서 히2:17에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했고, 히3:2에 “저가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충성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으니” 했습니다. 우리 모두 충성된 제사장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사람 언제나 사는 것 아닙니다. 열심히 인생을 사십시다.
8. 마지막으로 대제사장은 관을 머리에 썼습니다.
28:36-38에 “너는 또 정금으로 패를 만들어 인을 새기는 법으로 그 위에 새기되 (여호와께 성결)이라 하고 그 패를 청색 끈으로 관 위에 매되 곧 전면에 있게 하라 이 패가 아론의 이마에 있어서 그로 이스라엘 자손의 거룩하게 드리는 성물의 죄건을 담당하게 하라 그 패가 아론의 이마에 늘 있으므로 그 성물을 여호와께서 받으시게 되리라”
대제사장은 모자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는 글을 썼습니다. 그만큼 대제사장직이 거룩하다는 뜻도 되겠지만 여기에 담겨진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생각과 지식까지도 새롭게 되어져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골3:9-10에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성물을 받지 않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반면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생각으로 하다가 성과가 없거나 잘못 했을지라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보십니다. 그 마음으로 한다면 좋은 결과도 하나님이 받으시고 실패도 하나님께서 그 중심을 보사 받으십니다.
그럼 사람의 마음 판은 날마다 전쟁터인데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그러나 주님을 진정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하면 생각조차도 빗나가지 않고 온전히 하나님께 드려지게 됩니다. 이것이 생각까지도 새롭게 되는 비결입니다. 그래서 사랑이란 그렇게 성숙한 것이고 완전한 것이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제물을 진정 기쁨으로 받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대제사장으로 이렇게 우리를 책임지시고 아끼시고 사랑하시며 기도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최고의 자랑입니다. 우리도 더욱 영적으로 성장하여 신령한 제사장의 의무를 다하여 그 아름다운 축복을 모두 누리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첫댓글 귀한 강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