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의 마지막 유조(遺詔)
“옥새를 세손에게…” 새 군주의 시대 열리다
사도세자를 제거하는 데 성공한 노론은 세손(世孫:정조)을 겨냥했다. 세자의 아들이 즉위할 경우의 후과(後果)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론 벽파는 “죄인의 아들은 임금이 될 수 없다”는 ‘죄인지자(罪人之子) 불위군왕(不爲君王)’이라는 ‘팔자흉언(八字凶言)’을 조직적으로 유포시켰다.
그러나 영조와 혜경궁 홍씨가 모두 세손 제거에 반대하면서 제동이 걸렸다.
자식과 남편을 제거하는 데 가담했던 두 실력자의 이탈은 노론에게 큰 타격이었다. 영조는 사도세자 3년상을 마친 재위 40년(1764)에 세손의 호적을 고(故) 효장세자에게 입적시켰다. 이복(異腹) 백부(伯父)의 아들로 입적시켜 ‘죄인의 아들’이란 허물을 씻어 주려는 일종의 ‘호적 세탁’이었다. 하지만 노론은 여전히 세손 제거에 당력을 기울였다.
정조는 세손 시절의 일기인 '존현각일기(尊賢閣日記)'에서 “잡거나 놓고, 주거나 빼앗는 것이 전적으로 저 무리들(노론 벽파)에게 달려 있었으니, 내가 두려워 겁을 내고, 의심스럽고 불안해서 차라리 살고 싶지 않았던 마음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고 토로했다.(존현각일기' 영조 51년 2월 5일)” 또한 “흉도(凶徒)들이 내 거처를 엿보아 말과 동정(動靜)을 탐지하고 살피지 않는 게 없었기 때문에 옷을 벗고 편안히 잠을 자지도 못했다”는 토로도 했다. ('존현각일기' 영조 51년 윤10월 5일)
세손이 잠도 자지 못할 정도로 공포에 떨던 영조 51년(1775) 11월 20일. 영조는 죽기 전에 세손을 자신의 후사로 공포하겠다고 결심했다. 이날 영조는 집경당에 나가 세손을 시좌(侍坐)시키고 대신들을 불렀다. 영조는 “신기(神氣)가 더욱 피곤하니 한 가지 공사도 제대로 처리하기 어렵다”면서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졌다.
세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다는 선언이었다. 노론 대신들의 경악감을 모른 체하면서 영조는 계속 말을 이었다.
“옛날 황형(皇兄:경종)께서 ‘세제(世弟:연잉군)가 가(可)한가? 좌우(左右:신하)가 가한가?’라는 하교를 내리셨는데, 지금은 그때보다 백배나 더하다. ‘전선(傳禪:왕위를 물려줌)’이란 두 자를 하교하고자 하나 어린 세손의 마음이 상할까 두려우므로 하지 않겠다. 그러나 대리청정은 국조의 고사가 있는데 경 등의 생각은 어떠한가?('영조실록' 51년 11월 20일)”
경종이 신하들이 아니라 핏줄인 자신을 선택한 것처럼, 자신도 신하들이 아니라 세손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는 뜻이었다. 이때 영조의 나이 만 여든하나. 당장 오늘밤을 장담할 수 없는 나이였다. 세손이 대리청정하게 되면 영조 유고 시 자동으로 즉위하게 되어 있었으니 노론은 좌시할 수 없었다.
혜경궁의 숙부 좌의정 홍인한(洪麟漢)이 노론 벽파의 대표로 나섰다.
“동궁은 노론이나 소론을 알 필요가 없고, 이조판서나 병조판서를 누가 할 수 있는지 알 필요가 없으며, 국사나 조사는 더욱 알 필요가 없습니다.”
이때 세손의 나이 만 스물셋으로 숙종 즉위 때보다 아홉 살이 많았다. 그럼에도 일체의 국사를 알아서는 안 된다는 논리였다. 홍인한뿐만 아니라 영돈녕 김양택(金陽澤), 영의정 한익모(韓翼謨), 판부사 이은 등 모든 대신들이 대리청정을 반대했다. 대신들의 반대에 직면한 영조는 기둥을 두드리며 울었고, “나의 사업을 손자에게 전할 수 없다는 말인가?”라고 한탄했다.
▲1.원릉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 김씨의 능(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2. 정순왕후 생가 효종이 김홍욱에게내려준 집인데,
김홍욱은 소현세자 부인의 신원을 주장하다 사형당했다(충남 서산시 음암면 유계리).
열흘 후인 11월 30일 영조는 입자(笠子:갓)를 쓰고 집경당에 나가 세손에게 기대어 앉은 채 상참(常參:신하들이 국왕을 알현하고 정사를 논의하는 것)을 받았다. 영조는 “조사니 국사니 하는 것들이 다 하찮은 말이 되었다. 나의 기력이 이와 같으니, 수응(酬應)하기가 더욱 어렵다. 자고로 전례가 있던 일을 나는 지금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례가 있던 일’이란 대리청정이었다.
영조는 대신들에게 자신이 늙고 병들었으니 대리청정을 시키겠다고 호소한 것이지만 노론은 거부했다. 홍인한은 “차라리 도끼에 베어져 죽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받들어 행할 수 없습니다”라고까지 반발했다.
54년 전인 경종 1년(1721) 34세의 젊은 경종에게 세제 대리청정을 주창했던 당파가, 82세 노인의 대리청정에 대해선 ‘도끼에 베어져 죽어도’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세손은 지금이 자신의 왕위는 물론 목숨까지 걸려 있는 승부처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세손은 홍인한에게 대리청정을 사양하려 하지만 “문적(文跡:문서로 된 글)이 있어야 상소할 수 있으니 두서너 글자라도 전교를 받아 내가 상소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오”라고 타협안을 제시했다. 영조가 자신을 후사로 삼았다는 문헌적 근거를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홍인한을 비롯한 노론 대신 누구도 이런 근거를 남기고 싶지 않았기에 거부했다.
영조는 대신들을 물리치고 세손에게 순감군(巡監軍)을 수점(受點)하라고 명했다.
군사권을 주어야 세손이 무사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나아가 이비(吏批:문관 임용자 명단)와 병비(兵批:무관 임용자 명단)도 세손이 수점하라고 명했다.
대신들이 세손의 순감군 수점에 격렬하게 반발하자 영조는 임금의 경호부대인 상군(廂軍)과 협련군(挾輦軍)을 불러들였다. 그제야 두려워진 대신들이 한 발 물러섰다.
'영조실록' 51년 11월 30일조는 “여러 신하들은 다만 순감군 만 궐내에서 점하(點下)하는 줄로 알고 있었는데, 홍인한은 언찰(諺札:한글 편지)로 인하여 임금의 뜻을 알고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언찰’이란 세손의 대리청정이 영조의 뜻이니 방해하지 말라는 혜경궁의 한글 편지였다. 그러나 홍인한은 조카의 언찰을 무시하고 계속 반대의 선봉에 섰다.
노론 벽파는 13년 전 사도세자를 제거하기 위해 썼던 방법들을 다시 사용했다.
화완옹주의 양자 정후겸(鄭厚謙), 숙의 문씨의 오빠 문성국(文聖國), 정순왕후와 그 오라비 김귀주 등이 나서 세손이 몰래 미행(微行)했으며, 금주령 중인데도 술을 마셨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세손을 지지하는 세력은 세손궁의 사서(司書) 홍국영(洪國榮)과 정민시(鄭民始) 등 소수에 불과했다. 이때 홍국영이 소론 출신의 행 부사직 서명선(徐命善)에게 홍인한을 공격하는 상소를 올리게 함으로써 전기를 만들었다.
서명선은 홍인한이 ‘동궁은 국사를 알 필요가 없다’고 말한 것을 강하게 비판하면서 “저군(儲君:세자)이 알지 못한다면 어떤 사람이 알아야 하겠습니까?”라고 비난하고, 영의정 한익모도 내시들이나 할 행위를 하고 있다고 공격했다.
서명선으로서는 목숨 건 상소였는데, 영조가 서명선을 불러들여 상소를 읽게 한 후 “우는 소리를 들으니 강개함이 마음속에 맺혀 있음을 알 수 있다. 내가 그 위인이 부드럽고 선함은 알고 있었으나 오늘날 이렇게 자기 뜻을 세울 줄은 몰랐으니 어질다 하겠다”고 서명선의 손을 들어주었다.
노론에서는 부사직 심상운(沈翔雲)을 시켜 세손궁의 궁료들을 갈아치우라는 맞상소를 올렸으나 영조의 마음을 돌리지는 못했다. 재위 51년(1775) 12월 8일 영조는 세손의 대리청정 절목(節目)을 마련해 정식으로 세손 대리청정을 시행했다. 이로써 세손의 대리청정이 공식화되었으나, 그해 12월 22일 세손이 “양사(兩司)의 여러 신하들 중 대리청정 조참(朝參)에 참여한 자가 한 사람도 없다”고 말한 것처럼 아직 노론은 세손을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영조의 병세가 심각해지고 있었다. 영조가 세손에게 군사권을 주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발생했을지 알 수 없었다. 세손은 노론 벽파의 동태를 주시하면서 영조를 간호했다.
영조 52년(1776) 3월 3일 영조가 위독해졌다. 세손이 감귤차와 계귤차(桂橘茶)를 올렸으나 효과가 없었고 의관은 맥도(脈度)가 가망이 없어졌다고 진단했다. 세손이 미음을 떠서 올렸으나 영조는 받아먹지 못했다. 드디어 “전교한다. 대보(大寶: 옥새)를 왕세손에게 전하라”는 영조의 마지막 유조(遺詔)가 반포되었다. 영의정 김상철이 속광(코에 솜을 대어 보는 것)을 청했는데 미동도 없었다.
드디어 영조시대가 끝난 것이다. 춘추 만 여든둘. 경종독살설 속에 즉위해 끝내 경종독살설을 뛰어넘지 못한 재위 52년이었다. 세손에게 왕위와 함께 노론 일당독재란 무거운 짐도 함께 넘겨준 것이었다.
만 열살 때 아버지의 죽음을 목도한 소년이 스물네 살의 나이로 새 시대를 향해 첫발을 내디딘 것이었다. <이덕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