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항아리의 꿈 / 최희명
두꺼운 겨울옷이 답답해질 때쯤이면 김장김치를 꺼낼 때마다 김칫독 속으로 몸이 쏠려들어 갈만큼 독이 비어간다. 간간이 들려오는 남녘의 화신들이 김칫독에 칙칙한 겨울 이불처럼 덮인 골마지를 참지 못하게 한다. 햇빛 좋은 날, 마당가에 묻었던 김칫독을 파내어 남은 김치를 갈무리하고 김칫독을 말갛게 씻어놓으면 하나의 과정이 끝났다는 느낌으로 편안해진다. 동시에, 돌아올 겨울에 새로운 김치로 독을 채우겠다는 계획이 자연스럽게 정리된다. 빈 항아리에는 김치 대신 바람과 꿈이 담긴다. 시작과 끝, 비움과 채움은 꼬리를 물고 돌아가는 윤회 같은 것이다.
어릴 적, 마을의 공동우물에 이끼가 끼면 마을구성원 전체가 우물 청소에 참여했다. 순전히 사람 손에 의지했던 우물 청소는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이끼로 미끄러운 우물 벽을 밟고 내려가면서 솔질을 하는 일은 경험이 많은 사람이라야 할 수 있었다. 헹구는데 사용된 물을, 고이는 물의 속도보다 훨씬 빠르게 퍼내야만 우물은 바닥을 드러낸다. 깨끗해진 우물에 새물이 고이는 시간은 물이끼로 덮여 있을 때보다 빠르다. 생각도 그럴 것이다. 딱딱하게 굳은 고정관념들을 버리면 부드럽고 젊은 생각들이 빠른 속도로 샘물처럼 고일 것이다. 하지만 스스로 꾹꾹 눌러 우겨온 고정관념들은 그리 쉽게 떨어져나가지 않는다. 물이끼를 밟은 것처럼 자꾸만 미끄러진다. 자랄수록 굳고 굳을수록 스스로 뛰기 힘들어지는 게으른 짐승의 발톱처럼 관념도 그러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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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개의 평균 수명은 40년이지만 고정관념처럼 굳어진 부리를 스스로 깨부수고 너무 길어 굽은 발톱과 욕심처럼 무거워진 깃털을 뽑아 거듭나면 70년까지 살 수 있다고 한다. 비움이란 단어의 느낌은 가볍지만 늙은 솔개가 산꼭대기의 바위에 올라 고통을 견뎌내며 제 부리를 바위에 부딪쳐 깨부수는 고통을 수반한다. 동시에 새 부리가 자라나 그 부리로 발톱을 뽑아내고 깃털을 골라 새롭게 채워지는 30년의 시작을, 스스로 택한 고통이라는 의식으로 여는 것이다. 아프지 않고 성숙되는 진리는 없다.
결과가 눈에 보이는 욕심들은 좋지 않은 상황으로 조건이 악화되면 포기라는 절차에 의해 밀려난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감정은 좀처럼 비우기가 힘들다. 사랑이 그렇다. 어느 날 갑자기 마음이 변해서 떠난 사람을 준비도 없이 보내고 아직도 가슴속에
남아 있는 사랑을 어쩌지 못해 목숨을 버리는 이도 있지 않던가. 미움은 더 지독하다. 미움 중에도 친구나 혈연에 대한 오해나 의심으로 생긴 미움은 끝이 길기도 하지만 그 독소로 인하여 주변은 물론 자신까지 피폐해진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미움으로 똘똘 뭉쳐서 주변과 담을 쌓고 사는 친정어머니다. 그런 관계가 십수 년째 이어져오고 있어서 늘 ‘어머니’라는 명사 앞에서는 울컥 설움이 앞선다. 어머니의 미움을 대표 격으로 받고 있는 남동생이 계모설을 주장하여 형제간들조차도 분열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아픔은 더욱 깊어진다. 어머니의 그 끝 간 데 없는 미움을 용해시킬 수 있는 묘약이 있다면 어디든지 달려가겠다. 치석 같은 오해와 의심들을 녹여서 비워내고 진정한 자신을 찾은 어머니를 향해 아무런 수식 없이 ‘어머니’라고 절절하게 한 번 불러보고 싶다.
찌는 듯한 칠월의 더위 속에서 일주일간 고향 집에 머문 적이 있다. 그곳에는 물도 전기도 없었다. 사업 실패로 인해 짓다만 집이 된 지 십 년이다. 십 년 째 빈집이지만 아직 새집이다. 대지마저 경매로 넘어간 상처를 가진 집이다. 광양의 옛집은 그러나 늠름한 모습이었다. 초록으로 둘러싸인 그 안에서 온갖 자연들이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 살고 있었다. 지상권만은 뺏기지 않겠다는 왜곡된 나의 집념만이 집안 곳곳에 불씨를 뿌리고 있었다.
좋아진 세상에서 물과 불과 밥을 사가면 한 달도 거뜬하리란 착각을 하지 않았던가. 새로운 땅 주인이 협상을 해올 때까지 일주일간 라면을 먹으며 집안의 쓰레기들을 치우며 인간의 한계를 깨달음과 동시에 마음을 비워 갔다. 처음 한동안 땅 주인과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은 이유도 있었지만 나 여기 있노라는 퍼포먼스의 성격이 있었음도 부정하지 못하겠다. 누군가 손해 보지 않으면 내 집과 그 땅은 기찻길처럼 평행선의 운명을 갈 수 밖에 없다. 뉘라서 시간을 되돌릴 수 있겠는가. 청소를 마치고 집념도 비운 집을 놓아 주기로 하니 십 년 동안 서걱대던 가슴에서 바람이 사라졌다. 집은 집의 운명이 있을 것이다.
가난처럼 가뿐한 삶이 있을까. 의도한 결과는 아니었다. 스스로 내다 버리거나 누구에게 인심을 써서 없어진 재산이 아니었기에 가벼운 마음이 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젊었던 한때는 집안에 살림살이가 늘어나는 기쁨이 삶의 활력소가 되었다. 어느 날 갑자기 예전의 반의 반도 안 되는 집으로 내려앉았다. 삶의 기쁨이자 활력소가 되던 가구들이 짐이 되었을 때 비로소 그것들의 무거움을 알았다. 요사이는 낡은 가구를 버릴 때마다 공간이 넓어져 속이 시원해진다. 빈손의 자유를 조금은 아는 나이가 된 것인가.
빈손이기에 할 수 있는 일이 참으로 많다. 길을 걸으면서도, 계산이 가득하여 보고 있어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눈을 들어 하늘을 본다. 가을이 깊은 쪽빛 하늘을 보며 미소를 지어 본다. 전사처럼 딱딱하던 표정이 무장을 풀고 곡선이 되는 느낌이다. 부산스럽던 속도를 늦추고 천천히 걸으니 사람들의 표정이 보인다. 표정으로 사람살이를 유추해보니 웬만한 일은 이해하고 넘어 갈 수도 있을 것 같다. 소유는 관리를 필요로 하고 관리는 시간과 에너지를 요하는 일이다. 자유롭게 돌아온 시간을 나누어 응시하는 습관을
가지니 공간이 비어가는 만큼 가슴이 여유로워진다.
산마다 길마다 단풍 천지다. 노을이 지듯 붉게 타는 마무리가 오히려 꽃보다 곱다. 뿌리의 이불이 되기 위해 초록 물기를 몸통에게 돌려주고 내려앉는 낙엽이 양털처럼 가볍다. 수다스럽지 않게 사뿐히 내려앉는다. 눈치 계산 없이 수직으로 떨어져 제자리를 찾는다. 따가운 햇살을 받아주던 때보다 더 촘촘하게 뿌리를 덮고 있다. 겨울바람도 빈 가지에는 머물지 못하리라. 나무는 가볍게 물기를 뿌리 쪽으로 비워 내리고 마른 몸으로 겨울을 준비한다. 채움을 담보로 하기에 빈 가지의 관절마다 새순이 예비 되어 있다.
비어 있는 것에서는 소리가 난다. 빈들의 바람 소리나 나목의 떨림에서는 빈 항아리처럼 청아한 소리가 난다. 칠팔월 땡볕에 꽈리가 붉게 익어 갔다. 겉옷까지 입은 신비한 열매는 먹는 음식이 아니었는데도 우리들은 꽈리만 보면 눈이 번쩍 뜨였다. 탱탱하게 잘 익은 꽈리의 속을 조심스럽게 파내어 아랫입술에 얹고 불면 소리가 났다. 공기를 많이 채울수록 맑은 소리가 났다. 꽈리의 생은 속을 비우고 남는 소리로 마무리 되었다. 어느 생인들 터질 듯 물오른 욕심이 없을까. 욕심의 절정은 유효기간의 마지막 단계이기 쉽다. 때가 오면 자리를 비우고 떠나는 욕심의 여운을 들어야 하리라.
빈 항아리의 꿈은 어둡고 쓸쓸할 때 싹튼다. 제 몸을 비워 우리들의 곳간을 채워준 빈들의 그루터기는 어둠을 밝히고 흘러내린 촛농이다. 이제 막 해산을 하고 몸이 가벼워진 여인의 땀방울이다. 그것은 졸업장을 품에 안겨 아이들을 떠나보낸 운동장이다. 무언가를 이루어 때에 이르면 내어주는 비움이 숭고하다. 그 숭고함보다 더 위대하고 아름다운 건 자신의 일부가 된 욕심 한 덩어리, 미움 한 뿌리를 살을 깎듯 도려내어 버리고 차라리 비워두는 일이다. 지식도 욕심도 물질도 너무 많이 가져서 숨 막히는 세상이 아닌가. 11월의 들판은 비어서 더욱 풍요롭다. 어느 한 구석이라도 덜고 비워서 청정 구역 같은 여백을 가져볼 일이다
첫댓글 연숙님은 이미 빈항아리를 채우시고도 남아서 저에게까지 항아리속에 있는 묵은 김치의 싱그러움과 맛을 전해주고 계십니다.
자신의 것이라고 여겨지면 그것을 내려농기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설사 그것이 친정 어머님이 가지신 이웃들이 대한 미움같은 것이라 해도 말입니다. 그건 오로지 육화되어 우리안에 살아계시는 성령께서 빛을 비추어 줄 때에만 가능하겟지요!!!
작은 물건에도 애착이 있어 나누거나 버리지 못하는데 어떻게 마음에 고착되어 굳어버린 미움이나 욕심들이 쉽게 비워지겠습니까?자신의 힘으로는 불가능하지요.. 우리 모두에게 주님께로부터 오는 믿음의 은총이 무엇보다도 필요한 때라 생각됩니다. 좋은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