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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싸커코리아 원문보기 글쓴이: ★싸커메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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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한다. 실수 한 것 그 자체가 잘못이 아니라 실수를 하고 나서 어떻게 행동하는지가 중요하다.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고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자신의 실수를 모르고 반복하는 사람도 있다. 실수는 실패가 아니다. 실수는 성공의 어머니가 아니라 성장의 어머니이다.
부산 아이파크 이범영 선수. 그는 어린나이에 너무나 큰 경험을 했다. 2009 이집트 청소년 월드컵 카메룬전. 단순한 실수였지만 그는 한동안 그라운드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그리고 좀처럼 그 기억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다시 축구화 끈을 질끈 매어 묶는 이범영. 어리기에 더욱 크게 성장하고 있는 그를 부산 클럽 하우스에서 만나보았다.
골키퍼는 본능이자 체질!
축구를 하고 싶어 하는 어린 아이들은 하나같이 공격수가 되고 싶어 한다. 골을 넣고 주목을 받을 수 있는 스트라이커와 같은 멋진 선수를 원한다. 하지만 유독 한 아이의 눈에는 골키퍼의 자리가 너무나도 멋있어 보였다. 골키퍼. 저 자리에는 당연히 그 아이가 서 있어야 했다.
“축구를 정식으로 시작하기 전. 우리 초등학교가 축구부가 없는 일반학교인데 시에서 학교별로 하는 축구 대회가 있었죠. 저는 평소에 친구끼리 축구를 할 때도 골키퍼를 봤었기 때문에 대회 때에도 골키퍼 자리는 제 몫이었죠. 특별한 이유는 없었어요. 단지 골키퍼가 너무 멋있어 보였죠. 어느 날 이모께서 ‘생일날 선물로 받고 싶은 것 없니?’라고 물으셨을 때 골키퍼 장갑 가지고 싶다고 예기했어요. 이미 골키퍼는 제 마음속에 있었던 것이었죠.”
골키퍼를 하고 싶었던 그는 부모님의 반대도 있었지만 자신의 길을 찾아갔다.
“초등학교 때부터 축구가 하고 싶었어요. 처음에는 어머니께서 힘들다고 반대도 하셨죠. 운동을 싫어하신 것은 아니셨는데 축구를 하게 되면 제가 많이 힘들어 할까봐 반대를 하셨죠. 그래서 축구교실로 가서 취미 삼아 축구를 했는데 그 축구교실이 이태엽 축구교실 이었어요. 거기서 취미 삼아 축구를 했는데 이태엽 감독님께서 축구부가 있는 장안중학교로 오라고 하셨고, 부모님이 이태엽 감독님과 예기 하시더니 축구를 해도 된다고 허락하셨죠. 그래서 장안중학교로 입학했죠.”
“장안중학교에 입학하니 뭔가 아쉽더군요. 장안중학교가 축구부는 있지만 일반 학교여서 잔디가 없었어요. 저는 좀 더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축구를 하고 싶어서 1년 6개월 동안 장안중학교를 다니고 난 후 용인FC로 가서 축구를 계속 하게 되었죠.”
(C) 부산 아이파크
골키퍼로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유소년, 청소년 시절!
허정무 축구 국가대표 감독이 만든 용인 FC 산하 원삼중학교에서 축구를 계속 하게 된 이범영은 골키퍼로서의 재능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15세 이하 대표 팀에도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처음에 원삼중학교에서 경기를 나가지 못했어요. 저보다 잘하는 다른 친구가 주전이었죠. 어느 날 학교에서 훈련을 하려고 봤는데 원삼중학교 축구선수 20명 중에 13명이 대표팀에 가고 7명만 남아서 훈련을 하는데 그 7명 중에 저도 포함 되었었죠. 그래서 열심히 해서 그 친구를 이겨야겠다고 생각했고, 뛰어넘으려고 노력하다 보니 나중에는 주전이 되었고 대표팀에도 들어가게 되었죠.”
2004년도 그는 최고의 활약을 펼쳤다. 추계중등연맹 GK상, 춘계중등연맹 GK상, 경기도 협회장기 GK상, 프리미엄 나이키배 GK 상등을 받았다.
“기네스에 올랐는지 모르겠는데 3학년 대회를 용인 FC 원삼중학교 창단멤버. 총 2학년 멤버만 나가서 이겼던 적이 있었어요. 대회가 상당히 컸는데 3번인가 4번인가를 PK로 이겼었죠.”
김봉수 코치의 조언은 어린 시절 그를 바로잡아주었다.
“김봉수 전남 드래곤즈 골키퍼 코치님이 제 스승님이신데 코치님께서 평소에 축구선수는 겸손해야하며 건방지고 경솔한 행동을 하는 것을 싫어하셨죠. 그래서 상을 받고 겸손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휴가를 받고 다시 운동을 시작하려고 하는데 어떻게 해야 겸손인지 잘 모르겠더군요. 그래서 나의 행동 하나가 건방져 보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소극적으로 행동했었죠.”
“어느 날 코치님이 ‘너 왜 그래? 왜 평소와 다르게 이상하게 행동하니?’라고 물어보셔서 ‘상을 받았는데 어떤 행동이 겸손한 행동인지 모르겠어요. 말을 잘못하면 건방져 보인다고 할 것 같아서 어떻게 행동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말씀드리니까 코치님이 웃으시며 평소대로 행동하는 것이 겸손한 것이라고 얘기해주셨죠.”
(C) 부산 아이파크
빨리 시작된 프로팀에서의 생활!
축구 실력에 겸손함까지 갖춘 그는 18세 대표팀에도 자연스레 활약하게 되었다. 대표팀에서의 경험은 그의 생각을 넓혀주었다.
“18세 대표에 처음 갔을 때 주전 골키퍼가 강원FC 정산 선수였어요. 승규(울산현대 GK)도 그당시 프로팀에 있었고 제가 내세울 것이 없었죠. 고등학교에서 단지 하는 아이일 뿐이었어요. 다른 형들은 프로나 대학에 가 있었는데 제가 처진다고 생각하니 빨리 프로에 가서 그 형들보다 더 먼저 앞서 나가야겠다고 생각했죠.”
프로에 입단할 결심을 한 그는 2007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2순위로 부산에 입단하게 된다. 그는 항상 자신의 부족함을 느꼈다.
“부산에 입단할 때부터 경기에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요. 프로에 가서 적응을 잘하기 위해 프로적응 훈련으로 전남, 포항, 인천팀에 가서 미리 연습을 했죠. 프로팀에서 연습을 하니 부산에 가서 정말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자연스레 들더군요.”
하지만 그의 프로에서의 시작은 순탄치 않았다.
“처음에 7개월 정도 2군에 있었죠. 형들이 하는 경기를 보면서 ‘이 상황에서 어떤 부분이 잘 됐고, 어떤 부분이 부족했으며, 나였으면 그 상황에서 어떤 플레이를 했을까?’ 하고 항상 생각하고 공부했어요.”
“형들한테 슈팅 좀 때려 달라고 부탁했고, 지금은 안 계시지만 제재 선생님한테 개인 훈련 시켜달라고 많이 했었죠. 저녁시간 때는 줄넘기를 하며 경기에 뛸 날을 대비했죠.”
프로에서 뛸 날을 고대하던 그에게 마침내 기회가 왔다. 2008년 6월 25일 인천 원정 경기. 프로에 첫 발을 디디게 되었다.
“프로 첫 경기가 기억에 많이 남을 것 같은데 그때는 이상하게 저한테 공이 잘 오지 않았어요. 오히려 이어진 서울 원정 경기, 특히 수원 원정경기에서 종료직전에 김대의 선수에게 골을 내주고 승리하지 못했던 경기가 기억에 남아요.”
수원 김대의가 회심의 왼발 중거리 슈팅을 날릴 당시, 수비 시야에 가려 있던 이범영에게 실점의 책임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자신을 나무랐다.
“저는 골을 먹으면 왠지 제 잘못 같다는 생각을 해요. 주위 분들이 제가 너무 자책하니까 문제가 될 때도 있다고 하시는데 골키퍼는 골을 막아야 하지, 골을 먹어야 하는 위치는 아니잖아요.”
그는 신인임에도 불구하고 시즌 첫 해 16경기에 출전했다. 2009 시즌에도 탄탄대로 일 것 같던 그의 행보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2009시즌 초반 그는 경기에 자주 출전하지 못했다.
“올 시즌 초반 어느 정도 경기에 나가지 못할 것이라는 예상을 하고 있었어요. 첫 시즌에 경기를 잘 했지만 시즌 막바지로 갈수록 저 때문에 지는 경기가 많아서, 내년에 어쩌면 경기를 잘 못나갈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죠.”
“청소년 대표팀에도 자주 호출 되고, 청소년 경기에서도 경기를 나가지 못하니까 많이 힘들었죠. 대표팀이나 프로팀 경기에 자주 나가지 못하다 보니까 오랜만에 경기에 나가서도 실수를 많이 하게 되고 자신감도 많이 잃게 되었죠.”
이런 자신의 어려움을 그는 자신만의 방법으로 극복해 나갔다.
“저는 김봉수 선생님에게 많이 의지를 해요. 전화를 해서 조언을 듣고, 혼자 조용히 생각도 많이 하죠. 그리고 작년에는 막내인데 주위에 제 또래가 혼자여서 외로움을 많이 탔는데 올해에 원삼중학교 때부터 친구였던 김익현 선수가 입단해서 많이 편해졌죠. 올해 드래프트에서 또 친구인 박종우 선수가 입단해서 내년 시즌이 벌써부터 기대가 되네요.”
(C) 부산 아이파크
실수는 성장의 어머니!
성남과의 피스컵 코리아 8강 2차전 승부차기에서 멋진 선방으로 상승세를 구가한 그는 20세 이하 청소년 대표팀에서도 주전으로 점점 입지를 굳혀갔다. 수원컵 주전에 이어 U-20 이집트 세계 청소년 월드컵에도 주전으로 출전했다. 하지만 첫 경기 카메룬전이 그의 운명을 바꿔놓을 줄은 꿈에도 예상 못했다.
“수원컵 때 주전으로 나갔고, 20세 이하 월드컵 때도 주전으로 나가서 준비를 많이 했는데 이상하게 긴장을 많이 한 것 같아요. 수원컵 때 열정적인 한국 국민들의 응원, 우리가 항상 먹고 지내던 곳에서의 생활과 다른 나라에서의 생활은 다르더군요. 어렸을 때도 해외원정을 가보았지만 제가 주전이 되어서 해외 원정 대회에 나간 것은 처음이었죠.”
“생각보다 컨디션도 좋지 않았고, 자신감도 많이 없었어요. 많이 떨린 것을 이겨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서 아쉽고, 지금도 그 대회를 주전으로 나가서 계속 뛰었다면 이득이 더 많았을 텐데 그런 부분을 놓쳐서 아쉽기도 하고, 그런 실수를 다시는 하지 않도록 해야 하겠죠. 그 실수 때문에 조금 많이 힘들었는데 지금도 그 때 생각이 많이 나네요.”
그는 부모님과 주위 분들의 격려에 다시 힘을 낼 수 있었다.
“다들 아직 어리니까 새로운 경험을 한 것이라고 생각하라고 하셨어요. 경험 많은 선수가 그런 실수를 했다면 많이 자책해야하는데 어린 선수가 그런 실수를 했기 때문에 큰 자책은 할 필요가 없다며 긍정적으로 해라고 하셔서 마음을 가다듬고 있어요.”
“부모님께서는 잘했다고 해주셨는데, 제가 힘든 표시를 하니까 ‘왜 자꾸 그러냐고 누가 알아주는 것이 아니다. 팬들이, 사람들이 너를 보는 것은 경기장에서의 너의 모습이다. 경기장에 다시 나가서 그런 실수를 다시 하지 않으면 된다.’고 얘기 해주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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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과 함께 할, 기대되는 그라운드!
지난 2010 K-리그 신인선수 선발 드래프트가 열린 날. 이범영은 마음을 비우고 결과에 주목했다.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리던 순간, 동생 이범수가 전북에 지명이 되었다. 비로소 그는 마음이 놓였다. K-리그에서 프로 첫 형제 골키퍼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드래프트 날 같이 있었어요. 제 휴가랑 날짜가 겹쳐서 집에 있었죠. 제가 드래프트 할 당시에는 제가 프로팀에 뽑힐 수 있을지 없을지, 고민을 많이 하고 초조해 했기 때문에 동생 이 드래프트 할 때는 마음을 비우고 있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마음을 비우고 있으니까 좋은 결과가 생기더군요.”
그는 동생과 다른 팀이 되어서 마음이 더 편했다고 한다.
“고등학교 때 동생과 같은 팀이었어요. 저는 괜찮은데 동생입장에서는 형을 라이벌로 생각해서 그런지 많이 대들기도 하고 말도 잘 듣지 않더군요. 그래서 같은 팀에서는 경쟁을 하고 싶지 않아요.”
“같은 팀이 되면 훈련시간에 같이 훈련 할 수 있고, 의지도 할 수 있어서 좋을 것 같긴 하지만, 형제가 같은 일을 하면 많이 싸운다고 그러잖아요. 같은 일을 해도 팀이 다른 것이 나을 것 같아요. 나중에 올림픽 대표나 국가대표에서 경쟁을 해보는 것은 좋을 것 같아요.”
내년 시즌 동생과 함께 할 그라운드에서 그는 더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소망이 있다.
“저의 롤모델이 이탈리아 부폰 골키퍼에요. 골키퍼로서의 부폰만의 카리스마가 있어요. 골키퍼는 경기장에서 카리스마가 있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어렸을 때 선생님이 그러시더군요. ‘골키퍼는 폼생폼사다. 골키퍼는 멋있어야 한다.’ 딱 봤을 때 경기장에서 골키퍼 한명만으로도 무게감이 느껴져야 하는 것이죠.”
2010. 그의 내년 시즌 목표를 들어봤다.
“지금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생각으로, 축구를 처음 시작했을 때의 마음, 초심으로 돌아가서 올림픽이라는 새로운 목표를 향해 전진해야죠. 우선은 우리 팀에서 좋은 활약을 펼치는 것이 더 중요하겠죠.”
이범영! 그의 나이 만 스물. 푸른색 그라운드에서 보여 줄 그의 활약은 무궁무진하다. 실수를 통해 자신을 되돌아보고, 자신의 부족함을 깨우칠 줄 아는, 어린 나이지만 마음만은 어른인 그의 성장은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다...
K-리그 명예기자 한충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