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3장 날 위하여 십자가의
시편 40:3
오늘 찬송은 ‘은혜와 사랑’이라는 주제 찬송으로서 마지막 부분에 ‘어찌 찬양 안할까?’라는 가사를 사용하여 우리가 하나님께 찬양을 드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삼중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첫째는 1절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 때문에 찬양할 이유가 있고, 둘째, 2절에서 말씀의 축복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셋째는 3절에서 천국에의 소망을 주셨기에 하나님께 찬양할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찬송의 가사는 동양선교회의 성서학원 교수로 활동하며 많은 찬송을 일본어로 번역하고 만들었던 사사오 뎃쓰사브로(T.Sasao<笹尾鐵三郎>1868-1914)목사가 1897년에 작사했고, 곡은 미국 펜실베니아 출신의 침례교회 목사이며 루이스버그 대학의 문학 교수인 로버트 로우리(R. Lowry, 1826-1899) 목사가 작곡하였습니다. 그는 펜실베니아 웨스트 체스터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여 뉴저지 주 플레인필드에 있는 파크 아베뉴교회에서 목회사역을 마쳤습니다. 20권의 찬송가책을 출판하였으며, 500여곡의 어린이 찬송과 복음 찬송을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1절
날 위하여 십자가의 중한 고통 받으사
대신 죽은 주 예수의 사랑하신 은혜여
보배로운 피를 흘려 영영 죽을죄에서
구속함을 받은 우리 어찌 찬양 안할까
1절 가사에서 핵심적인 내용은 “예수님께서 날 위하여 십자가의 중한 고통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고통당하신 예수님, 그렇다면 십자가에서 받으신 고통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요?
첫째,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십자가를 지시며 인격적으로 조롱당하신 고통입니다. 로마 군병들은 예수님을 조롱하기 위하여 옷을 벗기고 죄수의 옷인 홍포를 입히며, 왕관 대신 가시 면류관을 머리에 씌웠습니다. 그리고 눈을 가리고 갈대 몽둥이로 머리를 때리며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라며 조롱했습니다. 그리고 침을 뱉으며 차마 인간에게 하지 않아야 할 온갖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둘째, 채찍에 맞아 살이 찢어지며 피가 티는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때린 가죽 채찍은 39개의 가닥으로 되어있고, 가죽 안에는 쇠 구슬과 뼛조각이 들어 있었는데 이것들은 예수님의 살을 찢는 역할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병사들에 맞아 근육이 찢어지고 피범벅이 되었으며 살점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3시간 채찍에 맞으시고 9시간 피를 흘리시는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셋째, 못에 손과 발이 못 박히는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로마 군병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누이고 양손에 대못을 박았습니다. 양 손에 이어서 두 다리는 겹쳐서 발등에 못을 박았습니다. 못 박힌 채로 십자가에 달리시자 체중까지 실리는 고통과 양손과 발에서 더 많은 피가 흘러 십자가 밑으로 떨어졌습니다. 넷째, 창에 찔려 돌아가신 고통입니다. 지금까지의 고통으로 예수님은 결국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넫 당시 사람이 십자가에 죽게 되면 죽음을 확인하기 위하여 창으로 옆구리를 찌릅니다. 찔렀더니 물과 피가 흘러나왔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은 피만 흘리는데 죽은 자에게서는 피와 함께 물이 나옵니다. 주님은 살아서도 보혈을 흘리셨고 죽어서도 보혈을 흘리셨습니다. 죽음 후에도 보혈을 흘리신 이유는 죽음의 문제와 죽음 후의 문제를 해결하신 것을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예수님은 보배로운 피를 흘려 영영 죽을죄에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이사야 53:5입니다. “그가 낄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구원의 은혜를 받은 우리가 어찌 찬양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2절
예수 안에 있는 우리 한량없이 즐겁고
주 성령의 위로함이 마음속에 차도다
천국 음악 소리 같은 은혜로운 그 말씀
끊임없이 듣는 우리 어찌 찬양 안할까
2절은 ‘성령의 위로함과 천국 음악 같은 하나님의 말씀 듣는 우리가 어찌 찬양 안 할까’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본래 예수님은 영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구속함의 은혜를 베풀고자 이 땅에 육신의 옷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피와 물을 다 쏟으시고 죽은 지 3일 만에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사도행전 1:4~5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요한복음 16:7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예수님은 부활하신 몸으로 우리와 함께 거하실 수 있으나, 성령님을 보내주셔서 “성령님 안에서 우리와 함께 영원히 함께 거할 것이라.”(요 14:16~17)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는 성령님께서 우리와 함께 거하시면서 하시는 일 세 가지를 소개합니다.
첫째, 하나님을 잘 섬기도록 위로하고 도와줍니다. 요한복음 14:21입니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성령은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잘 지켜 순종하며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성령님은 이 땅에서 우리에게 위로자, 돕는 자(helper)의 역할을 하시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고 또 하나님을 잘 섬기며 잘 따르도록 마치 가정교사처럼 도우십니다.
둘째, 가르쳐 주십니다. 요한복음 14:26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우리는 무지하고 연약해서서 무엇이 필요한지 모릅니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그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언제 가르쳐주시는가 하면 기도할 때 가르쳐 주십니다. 로마서 8:26입니다.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말씀을 읽고 묵상할 때 가르쳐주십니다. 히브리서 4:12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 기도와 말씀, 성령의 감화를 통해 영광된 성도의 길을 걸어가서 결국 푸른 초장과 맑은 시냇가로 갈 수 있도록 인도하심을 받는 은총을 베풀어 주십니다.
셋째, 주님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4:12에서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성령님을 통해 예수님은 이 약속을 분명하고 확실하게 이루어가고 계십니다. 3년 동안 예수님을 뒤따르며 주의 몸 된 사역을 배웠던 제자였지만 유다는 예수님을 은 30냥에 팔아먹었고,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을 부인하고 다시 어부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약속하신 오순절 성령강림의 충만을 받고 나서는 영혼 구원하는 일에 자신들의 몸을 아낌없이 내어던졌습니다. 그 결과 베드로가 한번 설교 할 때 3천명이 회개하고 주께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를 일으키는 역사도 일어났습니다. 사울을 바울로 변화시켜 세계선교의 중심역할을 담당하는 선교사로 세워주셨습니다. 이렇듯 성령님은 성도들의 마음속에 들어오셔서 영원히 함께 거하시며 참된 위로와 평강을 주시며, 말씀을 읽고 들을 때 깨닫는 지혜와, 기도하며 부르짖을 때에 간구의 영과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주사 담대하게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므로 내 안에서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끊임없이 주님을 찬양할 수 있는 축복을 부어 주십니다.
3절
이 세상의 모진 풍파 쉬지 않고 불어도
주님 안에 보호받는 우리 마음 편하다
늘 깨어서 기도하고 저 천국을 바라며
주님만을 기다리니 어찌 찬양 안할까
3절은 ‘모진 풍파 같은 우리 인생가운데에서도 우리가 주님 안에 보호받고 천국 평안 얻으니 어찌 찬양 안 할까’라고 노래합니다. 여러분 성경은 우리를 세상에서 보호해주시겠다고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시편 32:7입니다.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두르시리이다.” 유다서 1:24입니다.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기쁨으로 서게 하실 이” 이사야 42:6입니다.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므로 우리들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은 죄 사함과 구원을 완성하신 일입니다. 지옥에 갈 우리들을 천국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아무나 천국에 가는 것은 아닙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믿고 진심으로 회개하고 진심으로 주님과 사람들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지옥에 가지 않고 천국에 갑니다. 이렇게 죄 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천국 자녀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 곧 성도들의 이 땅에서의 삶을 하나님은 두 가지로 보호해 주십니다.
첫째, 세상의 모진 풍파기 쉬지 않고 불어도 감사하며 살 수 있는 숭리의 백성이 되게 하십니다. 주님께서 광야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을 먹이고 입히시며 낮에는 구름기둥과 밤에는 불기둥으로 보호하시며 인도하셨듯이, 하나님의 백성을 천국 가는 그 날까지 먹이시고 입히시며 보호하사 그 어떤 풍파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이겨내게 하사 범사에 감사하며 승리하는 주의 백성으로 삼아주십니다.
둘째, 이 땅에서 저 천국 바라보며 늘 깨어 기도하며 찬양하는 주의 백성으로 인도하십니다. 근세 선교 운동의 선구자였던 ‘데이빗 브레이너드’는 자기의 젊음을 인디언 선교를 위해서 모두 불태웠습니다. 그 분의 삶은 언제나 천국을 사모하며 주님 만나 뵈올 것을 간절하게 사모했습니다. 그의 기도일기는 온통 주님을 사모하고 천국을 사모하는 간절한 그리움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아 새 예루살렘이여! 내 영혼이 갈망하노라. 모세와 어린 양의 노래여! 이 땅에서 구속 받은 사람이 아니면, 누구도 배울 수 없는 그 복된 노래여! 주여, 나 홀로 나그네로 있사오니 이 땅에 아무런 위로가 없시 때문이다.”(1742년 4월 25일). “오늘 아침 잠에서 깨어났을 때 내 마음은 하나님과 하나 되고 싶은 갈망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날아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천국은 가까이 있었다. 내 영혼은 이미 멀리 날아오르고 있었다.”(1743년 3월 7일). “죽음이여, 오게나 자네의 끈에 입 맞추리니 죽는 건 참으로 행복한 일, 겁날 것 조금도 없어, 영원한 곳으로 가는 길일뿐”(1743년 8월 23일). 브레이너드의 마지막 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지금 영원의 문턱에 서 있다. 나는 지금 죽어가고 있다. 나는 지금 영광을 얻기 위해 천국으로 가는 것은 아니다. 내가 천국을 사모하는 것은 하늘나라의 한 모퉁이에 서서 모든 영광과 찬양을 하나님께 돌리기 위해서이다. 이것만이 나의 부르짖음이요 소원이다.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하나님을 더욱 찬양하는 것! 그리고 그를 영원토록 기쁘시게 하는 것! 오직 이것만이 내 영혼이 갈망하는 것이다.” 브레이너드는 자신이 이렇게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그의 약혼녀인 제루샤에게 다음과 같이 속삭였습니다. “나는 그대와 차마 이별할 수 없소. 그러나 우리는 행복한 영원을 함께 누릴 것이요. 나의 영혼은 오늘 하나님의 품에 고이 안기오. 나는 그의 영광을 바라보고 싶소.” 그는 1747년 10월 9일 2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주님 품에 안겼습니다. 제루샤는 넉 달 뒤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 주님 품으로 그리고 브레이너드의 곁으로 갔습니다.
천국은 주님을 만나는 곳이기 때문에 기쁨과 축복이 있습니다. 바울은 주님을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만나 볼 천국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고린도전서 13:12입니다,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찬송가 작사의 여왕 화니 크로스비도 주님을 눈과 눈으로 만나 뵈올 천국을 사모하면서 이렇게 간증한 일이 있습니다. “목사님, 제가 태어날 때 하나님께 기도를 할 수 있었다면 저는 맹인으로 태어나게 해 달라는 기도를 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천국에 이르렀을 때 내 눈이 제일 먼저 보고 좋아할 수 있는 얼굴이 나의 주님의 얼굴이기 때문입니다.” 손양원 목사님도 “주님고대가”를 부르면서 주님 만나 뵈올 날을 사모하면서 사셨습니다. “낮에나 밤에나 눈물 머금고 내 주님 오시기만 고대합니다. 가실 때 다시 오마 하신 예수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고적하고 쓸쓸한 빈 들판에서, 희미한 등불만 밝히어 놓고 오실 줄만 고대하고 기다리오니,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먼 하늘 이상한 구름만 떠도, 행여나 내 주님 오시는가 해 주님 계신 그곳에 가고 싶어요.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오 주여 이 시간에 오시옵소서.”
천국은 나를 위해 지옥의 형벌을 대신 받으시고, 나를 구원해주시고, 한 평생 나를 사랑하신, 나의 주님을 얼굴과 얼굴을 대하며 만나는 곳이기 때문에 그야말로 기쁨과 축복입니다. 우리가 천국에서 받을 상급과 면류관은 모두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공로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영원토록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그리고 성령님을 통해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 하시는 주님, 천국에서 금 면류관으로 관 씌워주실 주님을 생각하며 영영 죽을죄에서 구속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1절), 은혜로운 말씀 끊임없이 듣는 하나님의 백성들(2절), 저 천국 바라며 주님만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3절)로서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찬양하며 살아가는 주의 백성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
첫댓글 귀한 자료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