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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제4를 위한 세류
#1. 우주력 1031년. 해적선 신천지호. 우주 선교사 수선050의 회상
우주의 조화는 일개 인간의 두뇌로는 어림할 수 없는 것이었다. 우주선교사 수선050은 자신이 우주력 1031년의 해적선 신천지호에 타게 된 경과를 생각할 때마다 그러한 생각을 하였다. 은하연방의 수도 제2지구에서 작은 공동체를 만들어 10여 명 남짓한 신도들과 생활하던 수선050은 우연히 참가한 경품대회에서 옛 지구가 있던 성역을 구경할 수 있는 여행권을 뽑았는데, 몇몇 희망자와 더불어 떨치고 나선 여행길에서 해적선 신천지호의 습격을 받아 배와 함께 나포되어 해적의 일원이 되었던 것이다.
수선050은 자신의 전생들에게서 해적선 신천지호의 기억을 전수받고 있었지만 오래 전의 일이었고 납득할 만한 해적선이 남아있을 리 없다고 생각해 왔기 때문에 망설임 끝에 그들의 뜻을 받아들였다.
“우리는 인연이 있던 사람들을 모으고 있습니다. 뿌리를 찾아 옛 태양계가 있던 곳을 찾을 계획입니다.”
“한 세대만큼의 동지가 모이면, 해적선을 이루고 우주로 나갈 것입니다.”
그간 여러 집단으로부터 그렇게 권유를 받곤 하였지만 응하지 않았던 해적선 참여를 허락한 이유를 돌이킬 때마다 ‘운명이었다’하는 한 마디 해답이 떠오르곤 하였다. 마침내 있을 곳을 찾았구나 하는 감상…….
“우리는 모의 해적게임에서 탈출한 해적 역할 용병들이 추적을 피하기 위해 만든 결과물입니다. 살기 위해 모인 잡류 해적이라서 전생테가 들쑥날쑥 통일되지 않아 수명이 길 것 같지는 않지만, 괜찮다 싶으면 참가하세요. 목회자 한 분쯤 선목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공간은 충분하니…”
안내를 받아 선장실로 가면서 오덕양708에게서 권유받은 말이었다. 수선050은 700개가 넘는 전생테를 달고 나타난 현재의 오덕양을 보면서 자신의 기억 속에 있는 해적선 신천지호의 간부급 중 막내인 그와 비교해 보았다. 그리고 그러한 비교는 김진욱과 간디를 만났을 때 끝이 났다.
“잘 오셨습니다. 아마 우리는 인연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김진욱625의 말이었다. 해적게임의 선장으로 가장 많은 재생을 거친 김진욱 가의 말류의 하나가 거기에 있었다.
“전장에 뿌려진 피들을 수거하여 재생시킨 게 우리지요. 우리는 옛날 해적선 신천지호에서의 우아한 기억이 지워진 채로 전쟁게임의 말 노릇을 하였답니다.”
간디325였다. 파란 색깔 눈과 커다란 머리통을 가졌지만 그 옛날의 간디와 같은 명랑한 기색이 없는, 전생테가 잔뜩 늘어난 늙고 우울한 간디였다.
기억이 지워진 채로 해적게임의 말이 되기 위해 재생된 해적들의 마지막 피…… 수선050은 자신이 머물러야 할 곳을 찾았음을 알았다. 그 옛날 전생테 열 셋의 풋내기 우주선교사로 승선했던 성간무역선 복분자호에서 만난 B계열 김진욱과 간디 등의 우아한 진지함도, 구 태양계의 제6행성의 위성이었던 타이탄의 장미장원의 여성들이 우상으로 가졌던 본류 신천지호 해적들에게서 느꼈던 깊이를 알 수 없는 남성상도 보이지 않는, 아마추어를 간신히 벗어난 말류 해적들에게서 참가를 권유받은 수선050은 만남과 헤어짐을 되풀이했던 인연이 새로운 조화를 시작하였다는 감상이 되었다.
그렇게 타게 된 신천지호였다. 초우주적인 첨단무기를 구사하던 신천지호가 아닌, 모의 해적게임의 산물로 구식 총탄과 대포를 장착한 우스운 꼴의 해적선에서, 수선050은 은원의 끝을 보았다.
#2. 우주력 11세기. 해적선 신천지호.
우주력11세기 초의 은하우주, 해적은 공식적으로 사라진지 반백년이 넘었다. 우주를 일통한 은하연방의 정규군이 그 끈질긴 암 덩어리를 찾아 우주를 샅샅이 헤집어 근절시킨 때문이었다.
그러나 해적이라는 개념은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풍요가 극대화되자 귀족들이 스스로 황금전함 함대를 몰고 해적을 찾아 우주를 누비는 게임을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신천지호의 해적들이 보인 초인적인 용맹은 우주 안에 전설로 회자되고 있었다. 귀족들은 우주 곳곳에 뿌려진 해적들의 피를 수집하여 과거를 지운 전사로 다시 살려낸 후 기본적인 장비만 주어 해적선을 만들어 냈다.
과거 은하연방의 실력자 류우 가문의 사설함대 황금전함 전대가 은하우주의 패권을 호령할 때, 자웅을 겨루었던 해적선 신천지호의 후예를 찾아 말살한다는 것이 그들이 만든 해적게임의 줄거리였다.
해적게임은 사실상 은하우주의 주요한 사업 중의 하나였다. 우주력 11세기의 은하연방의 수도에서 제일 인기 있는 게임은 용병을 재생시켜 전쟁을 시키는 것이었고, 신천지호의 해적들이 전장에 뿌린 피를 재생하여 전사로 만들어 매매하는 일은 가장 성공한 사업의 사례로 꼽혔다.
그러나 오랜 세월 전장에 잠들었던 유전자의 재생으로 현세에 나온 당사자들로서는 호사가들의 도락이 만들어 낸 전쟁게임의 전사가 되어 해적 역할을 해야 하는 현실은 즐거운 행사일 수 없었다. 단대 재생의 1회용 해적이었고, 해적으로서의 용맹을 남긴 외에 모든 기억이 지워진 로봇전사였지만, 그들의 본능은 끝없이 우주를 향해 달려가고자 했다.
전생테가 들쑥날쑥한 잡류 해적들이 전장을 이탈하여 우주로 나섰다. 그들은 우스꽝스러운 전쟁게임용 무기를 갖춘 엉터리들이었지만, 해적 사냥에 굶주린 귀족들에게 좋은 목표가 되었다. 우주선교사 수선050이 승선한 해적선 신천지호는 그러한 탈주 우주선의 하나였다.
그들은 전생테를 수십 수백 개씩 붙이고 있는 해적들이었지만, 과거가 지워진 말류였고, 현상금을 탐낸 은하연방 우주군 전체의 추격을 받고 있는 고달픈 무리였다. 50개의 전생테를 갖고 있는 우주선교사가 해적선 신천지호에 있게 된 경로는 그런 연유였다.
#3. 앞 장면의 다른 시각에서의 연속. 어느 우주해적의 독백
우주가 부릅니다. 울고 있는 소리가 들립니다. 앞선 이에게 뒤따르는 이들을 살상해도 좋다는 특권을 부여한 이는 아무도 없는데, 소위 고등생물을 자처하는 지성체들은 진화가 늦은 생물을 양식으로 삼아 생존을 꾀합니다. 그래서 생명으로서의 완성을 경험해 보기도 전에 소멸하고만 하급생물들은 통곡으로 최고의 세계에 하소연을 합니다. 우리는 우주의 한 조각이었지만 별의 자격을 얻기 전에 먹힘을 당했다! 우주의 울부짖음은 그래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는 그 소리를 신호로 삼아 우주선에 오릅니다.
총을 들었습니다. 적대하는 모든 것에 사망을 줄 수 있는 끝이 뾰쪽한 무기물의 덩어리가 장전됩니다. 신기하다거나 오묘하다거나 하는 찬사가 높은 고등생물일수록 조화가 무너질 여지가 많은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한 발의 총탄이 세포의 배열은 흩뜨려 놓는 순간, 어떤 내노라 하던 고등생물도 평소에 자랑하던 완벽에 치명적인 결함이 있음을 증명하듯 힘없이 무너집니다. 죽음, 그렇군요. 소위 지성체를 자부하는 이들이 생존의 증명으로 삼는 영혼이 머물던 유기체로부터 떠나는 순간, 온갖 오욕된 짓을 반복하여 현재의 경지에 올랐던 유기체는 당대의 생명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하고 맙니다. 생전에 사랑하고 미워하고 뽐내는 것을 능사로 하던 고등생명체일수록 추락하는 정도가 심합니다. 이 조그마한 쇳조각 하나가 그만한 위세를 떨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총탄을 사랑합니다. 총탄을 발사할 수 있는 총기를 사랑합니다. 총을 만들었고 사용에 찬사를 보내는 전쟁주의자들을 사랑합니다. 때문에 당연히 우리 우주선의 승무원들은 모두 총과 총탄으로 무장을 한 전사들이고, 서로 사랑하는 전쟁주의자들입니다.
#4. 앞 장면의 다른 시각에서의 연속. 어느 해적의 이야기. 탈취
그날 우리는 한 척의 은하연방 관용 무역선임을 쫓고 있었다. 우리는 해적을 표방하고 우주를 누비는 세력이었고, 저들은 우리를 적으로 분류한 은하연방의 관용 무역선이었므로 그들이 공격 목표가 된 이유는 순전히 자신의 불운에 기인할 뿐, 사상이나 이념, 혹은 적아의 세력 편향과는 관계가 없는 사건이었다.
우리의 해골깃발은 아득한 옛날 우리가 떠나온 지구의 모든 바다를 누볐던 선배들의 기상이 서려 있는 해적의 상징이었다. 고대 지구시대의 전설들인 해적들, 일테면 드레이크와 키드, 저 유명한 청해진의 장보고도, 방법과 형식에는 차이가 있었을지언정 옛날의 해양 교통수단이던 범선으로 미지의 세계를 찾아 달렸었고, 그들이 발견한 신대륙과 그들이 노획한 재물이 자칭 문명국가들의 넘치는 인구를 먹여 살렸다. 그뿐 아니라 우주 개척기인 21세기말에, 최초로 태양계 밖으로 진출했던 우주선이 타이탄의 수용소를 탈출한 범죄자들이 탈출 때에 탈취하여 해적선으로 개조해 사용했던 유형선이었음을 생각할 때, 해적이란 오욕보다는 영광이 많은 직업임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하기는 현대는 경찰과 정규군만이 우주의 질서를 주재하는 방위력이라고 인정받던 신화시대가 아니었다. 해적은 세계 질서의 정통 위계를 흩뜨려 놓는 이단자인 일면 강력한 통치체제 하의 세계일수록 더욱 번성하여 약자의 자아 수행을 돕기 위한 윤리 집행자 역할을 충실히 해 온 정의의 수호자이기도 하였다.
목표인 연방 관용 무역선은 해적선의 노림을 받고 있음을 모르는 듯 정규 항로를 한가로이 달리고 있었다. 보다 효과적인 파괴를 이룰 강한 위력의 무기를 만들 자재를 가득 실었음이 확실한 무역선은 적아의 구별이 엄정한 전란의 시대에도 자유 왕래가 허용되는 유일한 특권 계층이었다. 국가는 힘을 잃고 국민은 피폐되어도 전쟁 무기를 사고 파는 상인들은 배를 불리는 부조리는 예나 지금이나 부단히 이어지고 있었다. 투쟁을 본능으로 갖고 태어난 불완전 지성체의 불행은 우주를 둘로 가른 대전쟁을 불렀고, 전쟁에 기생하여 생명을 이어가는 무기상들과 그들을 다스려 법도를 지키는 우리들 해적이라는 이름의 파괴예술가들을 낳았다.
이물에 장치된 대포가 불을 뿜었다. 화약의 폭발을 동력으로 삼는 쇳덩어리의 우주 비행이 시작된다. 대개의 우주선은 포탄이 나는 속도보다 더욱 빨리 달릴 수 있으므로 기습이 아닐 경우 포탄은 목표를 놓치고 우주 미아가 되기 일쑤인데, 오늘도 예외가 아니어서 우리는 우리가 발사한 포탄이 적선에 명중하는 멋진 광경을 보기는커녕 우리 우주선의 앞길을 막는 방해물이 되었음을 열심히 웃어대며 그를 피하는 곡예를 부려야 하였다.
열심히 달려도 더욱 열심인 물체에 대해 짐이 될 수밖에 없는 세계…… 전쟁이 도락이 된 이후 우리에게 주어진 무기가 그토록 시대착오적인 것이 많았던 탓에 우리는 해적의 본령을 잊어야했고, 그 같은 웃음거리의 전쟁을 치러야 했다.
멀리 뒤떨어져 별의 하나가 된 포탄을 의식하며 전망창 가득히 투영되어 오는 크고 작은 별무리들을 보는 순간 문득 철학자가 되고 있었다. 시간과 속도의 상관관계를 풀지 못했던 고대 지구인들은 그 불완전성으로 인하여 행복할 수도 있었다고 하였다. 우민 일색으로 규격화 된 세계에의 열망과도 같은 시행착오적인 낙원 찾기가 역사 속에 점철되었고, 그 과정에서 얻어진 보람이 행복의 근간을 이루었던 것이다. 지구적인 단견적 사고의 범주 안에서 우주적인 개화를 이룰 때까지의 긴 어둠의 시간 동안 개명의 박차가 된 세력은 우리의 선배인 해적들을 비롯한 전쟁주의자들이었다. 따라서 우리가 온갖 순간파괴무기들을 외면하고 가장 고전적인 무기인 대포를 펑펑 쏘아 대며 해적 행각을 계속하는 이유는, 그러한 선인들의 기상을 이어가려는 기특한 뜻을 무의식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행태의 하나일지도 모를 일이다.
#5. 앞 장면의 계속. 만남
지나친 사유에의 몰두로 잠깐 현실을 망각했던 모양이었다. 곁에 있던 일등항해사 예진003이 눈을 흘겨 주의를 주었다. 나는 예진의 고운 눈이 핀잔의 빛을 보이는 양을 고맙게 받아들이고 조종장치의 키를 넘겨주었다. 예진은 조종권을 넘겨받자 우주선의 속도를 최고로 올려 목표물을 따라잡으며 나직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늘 푸른 하늘에 흐르는 강물,
하얀 쪽배 한 척 흘러흘러 어디로 가나.
어디로 갈까, 어디로 갈까, 우리네 인생.
쪽배 위에 시름 실어 푸르름에 흘리고
천년만년 살고 지고, 천년만년 살고 지고
언제나 한결 같은 예진003의 노래 소리가 들리자 승무원들은 모두 눈짓으로 미소를 교환하며 귀를 기울였다. 예진은 신명이 나면 그렇게 푸른 색깔 일색의 노래를 부르곤 하였는데, 때문에 예진003이 일등항해사로 취임한 이래 신천지호의 모든 창문은 푸른 색깔 일색으로 통일되었다. 예진003의 노래를 듣는 값으로 승무원들이 장식을 바꾼 탓이었다. 승무원들은 예진003의 노래를 들으며 푸른 색깔 전망창을 통해 보이는 푸른 색깔 우주에 취해 아마도 천 년 전 지구시대의 동요인 듯싶은 ‘늘 푸른 강의 하얀 쪽배’에 어울리는 ‘쪽배 위의 사공’이 되곤 하였다.
예진003은 두뇌의 재활용으로 생명을 이어가는 인조지성체 중 성인 조립의 여성이었다. 생명의 파괴와 재생산이 새로운 윤리로 정착된 이후 죽음의 개념이 육체의 파괴에서 지성의 소멸로 바뀐 탓이었다. 아름다운 인조 육체에 접목된 예진의 두뇌는 놀랍게도 천 년을 거슬러 지구시대를 되살리기도 하였다. 나는 예진003의 노래 소리에 취해 들어 먹잇감을 추적하는 사냥꾼으로서의 현실을 잊고 처음 예진을 만나게 되었을 때를 회상하기 시작했다. 하기는 신천지호의 조종이야 하는 대로 맡겨 두면 좋았다. 그 만큼 예진003은 모든 면에서 완벽한 여성이었다.
그날의 전투에서 우리는 크게 손해를 보았다. 악전고투 끝에 점령한 적의 화물선은 무장의 엄중함에 비해 화물이 보잘것없어서 우리를 화나게 하였다.
나와 내 부하들은 포로로 잡은 적선의 승무원들을 하나씩 끌어내어 우리와 한편이 될 것인가를 묻고 거부할 경우 즉각 처형하곤 하였다. 물론 처형이라고는 하지만 총살이나 교살 따위의 무지막지한 의식은 아니었다. 우리는 전투 중에는 난폭하지만 전투가 종결된 후에는 신사가 되는 우주해적의 전통을 충실히 지켜 길을 달리하는 적에게도 한 조각 활로를 남겨 주곤 한다. 사형을 선고받은 적은 구명정에 태워져 우주로 뿌려지는데, 그가 자신의 동료들에게 구원을 받고 못 받고의 여부는 온전히 구명정의 성능과 자신의 운수에 기인할 뿐 우리의 책임은 아니다. 신천지호의 승무원들은 모두 그러한 상황을 한두 번 이상씩 겪어본 사람들이라는 말을 덧붙이면 이해가 될까.
그 중의 하나, 적선의 인문담당 전문위원이 묘한 흥정을 붙여 왔다. 자신을 자유인으로 놓아주면 이 대단찮은 화물선에 터무니없는 중무장이 필요했던 이유를 털어놓겠다고 제의해 왔던 것이다.
해적이란 약탈을 직업으로 하는 신분이다. 때문에 우리에게 나포된 적선의 화물은 당연히 우리의 차지가 된다. 그의 제의는 그러한 해적의 윤리상 부당한 것이었지만 나는 그의 자유인 운운하는 태도가 마음에 들어 응하기로 하였다.
그가 자유의 대가로 내어놓은 선물이 예진이었다. 견고한 투명 금속으로 이루어진 냉동상자 속에 밀봉된 한 무더기의 두뇌 세포와 그것의 출처라는 타임캡슐을 한데 묶어 소형 우주선의 조종 장치와 맞바꾼 우리는 그가 남긴 “지구시대에 우주로 발사된 타임캡슐인 모양인데 연방정부가 대단한 보물 취급을 하였으니 그 시대의 기억이 그대로 살아있을 것”이라는 조언을 근거로 보물 재생 작업을 시작했다.
갓 재생되어 전생테 셋을 달고 나타난 예진이 승무원들에게 이끌려 선장실을 찾았을 때, 나는 부지중에 퉁겨져 일어나 뚫어져라 쳐다보는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재생된 보물인 ‘예진003’은 스무 살 남짓의 아름다운 여성이었는데, 그 외모며 태도, 분위기 등에서 뜻밖의 어떤 감동들이 밀려와 내 이성을 흩뜨려 놓았던 것이다.
#6. #4의 연속. 외계의 우주. 우주력 1031년 6월. 소행성지대
‘저 무역선은 우리를 유혹하려는 미끼일 것이다’라는 것이 신천지호의 해적들 모두의 생각이었다. 근자에 추적이 급해진 은하연방 우주군 함대의 동향으로 미루어 보아도 그랬지만 여객선의 비행 행태로 보아도 짐작하기 어렵지 않은 결론이었다. 처음 포촉된 순간부터 무역선은 관광을 목적으로 우주를 항해하는 유람선인양 광속 이하의 속도로 달리다가 돌연 초광속 운동을 보이곤 하여 신천지호의 주의를 끌었던 것이다.
“은하연방 우주군이 대거 동원되었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정보 분석의 책임을 맡은 오신564의 보고였다. “추격을 계속해도 괜찮겠습니까?”를 생략한 오신564 특유의 어법이었다.
“해적이 복병을 두려워해서 사냥을 포기했다면 음유시인들이 웃을 걸.”
알렉산더608의 빈정거림이었다. 원래 말수가 적은 코넬613은 시종 같은 자세로 전망 스크린을 응시하고 있었다.
김진욱625는 자신이 결정해야 할 상황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여객선이 적의 미끼라는 것은 동료들 모두의 공통된 의견이지만 그 미끼를 물고 물지 않고의 최종 결정은 언제나 선장인 자신의 몫이었다.
은하연방 우주군의 추격이 급박해진 것은 최근의 일이었다. 연합함대 이상 급의 대군을 동원하여 신천지호가 나타날 듯싶은 여객선의 항로를 지키고 있었고, 혹 흔적을 잡으면 수백 이상의 별동함대를 풀어 뒤를 쫓았던 것이다.
‘뜻대로 잡히지 앉자 미끼를 푼 모양…… 단단히 작정을 하고 대군을 잠복시켰을 것이다. 차라리 이대로 후퇴하는 것이 좋을 듯싶다’는 것이 솔직한 김진욱625의 감상이었다. “복병이 있을 듯하다. 후퇴하자”고 말하면 그대로 따라줄 동료들이었다. 비겁하다, 비겁하지 않다 따위로 의견을 나누어 다투는 듯 보여도 동료 해적들은 어느새 하나의 공동 지성체가 되어 있었다. 신천지호의 해적들은 내부에 생긴 감정의 갈등을 토론의 형식을 빌려 풀어, 스스로 가진 바 지성의 경중을 저울질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얻고 있었다.
“우린 엉뚱한 전체 생물로 진화한 모양이야.”
간디325의 풀이였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인간 개개인은 천문학적인 생명체의 집합으로 하나의 소우주이자 전체 생물이라고 했다. “두뇌만 해도 1000억 이상의 단세포 생물의 집합”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신천지호의 일천 명 이상 되는 해적들은 선장인 나를 정점으로 하나의 지성에 묶인 전체생물이다’하는 것은 김진욱625의 생각이기도 했다. 간디325의 논리를 빌리기는 했지만 그 또한 하나의 공동 지성체의 지혜 나눔이니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의 결정이 곧 전체의 결정이 된다는 것은 그런 만큼 더욱 신중한 처신을 필요로 하는 까닭에 김진욱625는 내내 침묵을 지켰다. 동료들의 움직임은 곧 내 움직임이니 일동의 움직임이 결정되면 그대로 따르리라 하는 생각으로였다.
신천지호는 무역선을 계속 뒤따르고 있었다. 김진욱625는 조종석에 앉은 일등항해사 예진003을 돌아보았다. 이 여인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여인이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김진욱625는 예진003을 신천지호의 일천 명 해적들의 대칭에 있는 유일한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지난 3년, 어떠한 일을 결정할 때에 예진003이 찬반을 표시하면 전체의 절반만큼의 비중으로 투표권을 행사한 형식이 되어 대부분 그대로 결정되곤 했던 것이다. ‘역시 남과 여는 영원한 대칭형의 타인이지만, 하나의 전체생물과 또 하나의 전체생물로서 한데 엮여 새로운 전체생물을 이룰 경우, 가장 완전한 우주를 만드는 것’이라고, 김진욱625는 자신을 비롯한 신천지호의 승무원들에게서 차지하고 있는 예진003의 크기를 어름하고 있었다.
#7. 앞 장면의 연속. 회고
우주 안에 흩어진 과거 해적들의 유전자를 모아 조형된 모의 해적단 중의 한패가 탈출하여 시작한 것이 우리였다. 해적선 신천지호를 표방하고는 있지만 원래의 피가 가진 정통의 기억을 잃은 지 오래인 먼 방계의 피였고, 때문에 우리가 가진 기억이란 지난 몇 세대의 인간적인 것이 전부였다.
내 이생의 기억은 사실상 주어진 것일 가능성이 높았다. 저들은 모의 해적단에 사실성을 부여하기 위해 당대의 삶을 마감한 군인출신의 두뇌에 전장에서 얻은 해적의 피를 접목시키는 방법을 취하고 있었는데, 때문에 내 기억 속의 여성들은 해적 본연의 것이 아닐 수도 있었다.
그렇더라도 가진바 기억은 존중되어야 했다. 자신의 기억을 부정하는 일은 자신의 존재가치를 부정하는 것과 같을 터이니만큼.
일찍 가신 어머니, 먼 별의 농부에게 시집을 간 후 전란으로 인해 소식이 끊긴 누님, 보존영상으로 밖에 뵈온 적이 없는 할머니와 외할머니, 아픈 기억을 남기고 떠난 어떤 여인의 모습까지, 예진은 한 몸에 지니고 있었다. 물론 그 기억들이 사실일 때의 가정이기는 하지만.
잠시의 혼란스러운 대면을 어색하게나마 마무리한 후 예진을 안내해 온 재생의료부문 책임자인 간디325에게 짐짓 화난 표정을 해 보였다. 커다란 머리통과 파란 색깔 눈을 가진 그는 옛 해적의 말류로 역시 과거를 잃고 있었다. 전날 의사로서의 소양을 인정받아 연방군의 재생의료센터에 근무할 때 특유의 괴짜를 발휘하여 군인들의 두뇌 중에서 파괴되지 않은 것을 골라 재생을 시키곤 하였는데, 공적인 임무에 자신만의 기호를 가하여 규격 외의 인간을 생산한 혐의를 받아 모의 해적 게임의 일원으로 축출된 것이었다. 때문에 이번의 예진 생산도 그의 솜씨가 작용되었음이 확실할 터였다.
내게서 눈총 공격을 받은 간디325는 재생 전문가답지 않게 전혀 손대지 않은 얼굴을 있는 그대로 찡그리며 웃어 대고 있었다. 자신의 작품에 만족한 예술가의 희열을 얕은 겸손으로 포장하려 들지 않고 내키는 대로 나타내는 오만한 웃음이었다.
구태여 설명을 듣지 않아도 그가 내 기억을 훔쳐 예진을 조형해 냈음을 알 수 있었다. 예진003은 내가 평소에 그리워하던 모든 여성의 외형과 인격과 지성을 타임캡슐로부터 얻어진 두뇌 세포 속의 본래 기억에 조합하여 만들어 낸 재생 지성체였다.
그렇다고는 하여도 어찌 된 추태였을까. 첫 대면 때의 예진은 기쁜 듯 슬픈 듯 참으로 어색한 표정과 눈빛을 하고 있었는데, 나는 예진의 그러한 모습에서 육친과 이성에게서 받았던 사랑 이상의 어떤 성스러운 아픔이 방전되어 오는 것을 느꼈고, 그 순간 평소의 색깔이던 평정을 잃고 말았다.
아마도 간디325를 비롯한 신천지호의 반골 기질이 거센 과학자들은 내 기억 속에 숨은 어떤 요소를 예진003의 창작에 가미하여 자신들의 대표자에게도 인간적인 허술함이 있음을 증명하려 들었을 것이다. 겸하여 여주인이 없는 신천지호에 가장 이상적인 안방마님을 들이려 하였다면, 그들이 내 의식 속에 잠들어 있던 본능을 훔쳐 도전을 해온 행위가 괘씸하기는 하지만 일면 호의로 설명이 된다. 실제로 그 이후 그들은 나와 예진을 같은 선상에 놓고 빙글거리기를 즐겼는데, 자신들이 이루지 못한 행복의 대리만족을 찾은 것일 그 행동들을 나는 짐짓 아량을 보여 미소로 받아들이곤 하였다.
재생 지성체의 전생 지우기에는 두 가지 대표적인 경로가 있었다. 범법자의 기억을 법률이 말살시키는 경우와 스스로 과거를 잊고 싶어 하는 경우였다. 어느 쪽도 상처를 입은 영혼의 과거 지우기임은 마찬가지였지만, 전직 해적으로 전장에 뿌려진 피를 재생시켜 해적게임의 도망자 역할을 맡았던 우리는 위의 두 사례에도 적용되지 않는 가장 특별한 경우라고 할 수 있었고, 내가 자신을 포함한 신천지호의 승무원 모두에게 애정을 보내는 필연적인 이유이기도 했다.
그러한 상처 입은 영혼 중의 하나인 내 두뇌 속에 숨어 있던 전생의 기억 어딘가에 소위 ‘성스러운’ 분위기의 여성에게 보내는 존중의 마음이 있었고, 간디325를 비롯한 재생 의료진이 예진의 몸에 재현해 내어 나를 놀라게 했던 것이다. 그날 이후 10여 년, 예진은 어머니의 헌신과 누이의 은근함과 사랑하는 이의 다정함에 예의 성스러움을 더한 분위기를 신천지호의 승무원 모두에게 고루 베풀어 재생 의료진의 기대에 만족을 주었다.
#8. 우주력 1025년 2월. 해적선 신천지호. 예진의 이야기
예진003이 신천지호에 온 후 승무원들이 보인 변화 중의 대표적인 하나가 단정해진 차림새와 말씨였다. 예절을 아는 해적이 되자는 취지의 말은 신천지호의 중간 간부인 오덕양708의 입버릇이었는데 평소에 거친 행동을 장기로 삼던 해적들에게는 효과가 없던 것을 예진003의 무언의 노력으로 면목이 일신된 것이었다.
가슴을 열고 잘 발달된 근육을 보이는 것은 해적들이 포로로 잡은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고자 할 때 보이는 가장 고전적인 수법이었다. 남성미를 과시해 보이므로 양가의 여성들이 해적이라는 용어를 들을 때면 으레 연관시켜 떠올리는 강한 남성상으로서의 기대치에 만족을 줄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예진003은 해적들의 제복에 단추를 다는 일부터 착수했다. 제복이라고는 하지만 맨몸에 조끼를 걸치는 것이 고작인 해적들이었으므로 그 조끼에 단추 구멍을 뚫어 앞가슴을 가리게 했던 것이다. 예절은 수치심을 감추기 위한 행동이라는 것은 예진003이 전생의 기억 속에서 찾아낸 논리였다. 그녀는 자신의 지난 두 차례의 재생 중에 예사롭지 않은 교육을 받은 한 시절이 있었음을 깨닫고 해적들의 그것과 너무 큰 시대의 차이를 갖고 있는 자신의 어이없는 운명에 슬픔을 느끼기도 했지만, 곧 그 운명을 만들어 준 주체의 실체와 그 실체들이 겪어온 세류 속의 파도를 읽게 되어, 스스로 택하지 않은 운명일망정 결과만은 아름답게 맺으리라고 작정을 하고 있었다. 해적들의 제복에 단추를 달아주어 앞가슴을 여미는 습관을 길러 준 일은 그러한 결심의 표현인 셈이었다.
장미꽃이 가득한 정원을 신천지호 안에 만들고 꽃에서 채취한 당분으로 술을 빚고 꽃잎을 띄운 술잔을 권하는 일은 예진003이 가장 보람을 갖고 한 일이었다. 그녀는 처음 김진욱625를 대할 때 그가 보이던 표정에서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음을 읽고 하늘이 무너지는 절망을 느꼈었다. 간디325의 도움으로 자신이 되살아난 시대가 상상 밖의 미래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그저 당황스럽고 두렵기만 하였지만, 자신을 살려낸 주체가 김진욱을 비롯한 해적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벅찬 기대로 가슴을 떨기도 하였다. 내가 빚은 술을 가장 아름답게 즐겨주던 사람…… 예진003은 다시금 옛날로 돌아간 듯한 행복을 느꼈다.
그런데 아니었다. 김진욱625는 예진003이 알고 있던 그 옛날의 김진욱이 아닌 해적 김진욱625였다. 그 옛날의 김진욱은 자신의 마음을 술로 감추고 술 이야기만 해대던 선한 사람이었는데, 현재의 김진욱625는 온갖 범죄단체의 대표자 격인 해적선 신천지호의 선장으로서 자신들의 약탈행위를 정당화시키는 엉뚱한 논리까지 갖춘 전쟁전문가였다. 예진003은 김진욱의 그러한 극단적인 변화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음을 스스로 짐작하여 깨닫게 된 후 가야 할 길을 작정하고 있었다. 예진003이 그 옛날의 장미장원을 흉내 낸 정원을 만들고, 꽃을 피우고 술을 빚어 해적들에게 권하는 일을 밝은 마음으로 하게 된 이면에는 그러한 결심이 숨어 있었다.
“아이를 하나쯤 갖는 게 좋지 않을까?”
간디325의 권유였다. 그리고 신천지호의 승무원들 모두의 꿈이기도 했다. 성인 재생 일색인 해적들의 세계에서 아빠와 엄마의 사랑으로 태어난 아이는 얼마나 아름다운 풍경일 것인가.
그러나 예진003은 수긍할 수 없었다. 예진003은 자신만의 가슴앓이 병을 앓고 있는 불행한 여인이었다. 당신들은 기억하지 못하는 모양이지만 나는 달라요. 우리는 처음부터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로 만났었지요. 나는 당신에게 이모님으로 불린 결혼한 여자였고, 당신들은 내 아들 격인 사람의 친구였어요. 우리 사이에는 천 년이라는 시간의 차이보다 더 큰 배분의 차이가 가로질러 놓여 있어요. 그런데 그런 우리 사이에서 아이를 꿈꾸다니…… 예진003이 아득한 옛날의 전생 시절에 배우고 익혔던 윤리관은, 그렇게 그녀를 고통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늘푸른 하늘에 흐르는 강물,
하얀 쪽배 한 척 흘러흘러 어디로 가나.
어디로 갈까, 어디로 갈까, 우리네 인생.
쪽배 위에 시름 실어 푸르름에 흘리고,
천년 만년 살고 지고, 천년 만년 살고 지고
해적들이 부르는 노래였다. 목소리로 보아 오덕양708이었다. 돛대 꼭대기쯤에 올라가서 일부러 부르는 노래로 보였다. 예진003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 저 사람들 전부를 내 아이로 삼으면 되지. 저렇게 가르치면 곧바로 배워서 나를 기쁘게 해주려고 노력하는 착한 사람들이 아닌가. 나는 이대로 행복한 여자인 거야.
지난 세 해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만남의 순간 이후 내내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김진욱625의 무심함에 가슴을 졸였지만, 그 옛날의 김진욱도 그렇게 자신의 감정을 감추고 술만 마셔 댔던 사람이었음에 생각이 미쳐 그것을 위안 삼아 살아왔던 세월이었다. 그만하면 됐어. 나는 그 동안 행복했던 거야. 물론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 고마운 일이야, 고마운 운명이야.
#9. 앞 장면의 연속. 우주력1027년 4월. 신천지호. 예진의 이야기 계속
“당신들이야말로 가정을 꾸며 보는 게 어때요?”
해적들의 극성스러운 놀림에 대한 반격으로 문득 권하는 말을 한 이후 예진003은 자신에게 또 하나의 임무가 주어졌다고 생각했다. 그래, 이 사람들을 가정으로 돌려보내는 거야. 무례하고 거친 삶을 멋으로 알고 살아온 사람들이지만 이 사람들의 마음속에도 인간을 사랑하고 싶은 욕망은 있었어. 내게 이렇게 대하는 것은 나와 그 사람을 빌어 자신들이 이루고 싶은 것을 대신 이루어 보려는 몸부림에 지나지 않은 거야. 이 사람들에게도 가정을 만들어 주어야 해.
그렇게 작정을 한 이후 나포한 무역선이나 상선, 여객선에 승선한 젊은 여성을 포로로 할 경우 해적들과의 짝짓기를 은근히 권해 오곤 했었다. 해적 생활의 자유스러움과, 오랜 세월 우주를 떠도는 생활을 해온 덕분에 얻어진 남성다움을 장점으로 내세워 양가의 처녀들의 마음을 신천지호로 돌려놓으려 했다.
대개의 경우 여인들은 해적생활에 대한 호기심을 갖고 있었고 전설적인 해적선 신천지호의 승무원들에게 호의를 갖고 대했다. 비록 포로가 된 상태이기는 하지만 만찬이나 무도회에 참석할 경우 자연스럽게 해적들과 어울리곤 했다. 예진003은 갖은 명목으로 해적들과 포로로 잡은 여인들을 한 장소에 모이도록 유도하고 그들 사이에 사랑의 감정이 싹트도록 배려를 했는데, 더러는 로맨스가 이루어지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정작 신천지호의 생활을 권할 경우 선뜻 받아들이는 여인은 드물었다. 해적들은 일시적인 연애의 상대일 뿐 결혼의 상대가 아니라는 것이 양가집 처녀들의 사고방식인 셈이었다. 예진003이 동원한 온갖 계책도 양가집 처녀들의 그러한 견고한 사고의 벽은 뚫지 못하고 있었다.
신천지호의 해적들은 민간 우주선을 습격하여 승객들을 포로로 잡을 경우 특별히 적대적인 행동을 하지 않은 민간인은 적당한 량의 식량과 에너지를 주어 석방을 하곤 했다. 끊임없이 추적자들에게 시달려야 하는 해적의 특성상 즉시 구함을 받을 수 없도록 복선을 깔기는 하지만 무작정 포로를 살상하는 일은 결코 없었다. 그러나 해적들에 의해 외딴 행성에 놓여나거나 작은 우주선으로 정처를 알 수 없는 항해를 하게 된 승객들 중에는 제명에 죽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해적선 신천지호의 악명을 높이는 결과를 만들곤 했다. 양가의 처녀들이 해적들을 대할 때에 보이는 태도의 절반쯤은 그러한 악명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된 것이었기 때문에 예진003이 권하는 신천지호에서의 생활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여인은 영원히 나타나지 않을 듯이 보였다.
그런 까닭으로 한 여인이 오덕양708을 사랑하여 결혼을 승낙하게 된 사건은 신천지호로서는 일대 경사인 셈이었다. 오덕양708은 신천지호의 일천 명 해적들 중 가장 수려한 외모를 가졌고 지위 또한 선장인 김진욱625의 경호대장 격이었는데도, 여성들에게 대해서는 냉담하여 예진003이 포로로 잡은 여성들 중 미인을 골라 짝을 지어 주어도 물리치곤 했었는데 뜻밖에 한 여인과의 결혼을 선포했던 것이다.
경사의 날, 신랑과 신부를 침실로 보낸 후 몇몇 간부들은 따로 자리를 마련하여 장미주를 나누었다. 신랑과 신부가 혼인을 서약하는 가장 기쁜 순간에도 간부급 선원들의 얼굴에는 잠깐씩 수심의 빛깔이 스쳐 지나가곤 했는데, 모처럼 결혼을 하고도 해적 생활을 청산하지 못할 동료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 외에 그 결혼이 이루어지게 된 사정이 마음을 아프게 했기 때문이었다. 해적이라는 특이한 신분의 남성에게 호기심 정도의 호의를 가졌을 뿐이던 양가의 처녀가 별안간 열렬한 구애로 오덕양708의 마음을 돌려놓게 된 이면에는 간디325의 지성교정 시술이 있었던 것이다.
가장 마음이 어두운 사람은 예진003이었다. 오덕양708이 자신에게 보이는 호의의 의미와 그간의 절제를 깨고 여인의 구혼에 응한 이유 중에 자신에 대한 애모의 마음이 숨어 있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덕양708 뿐만 아니라 신천지호의 전 승무원에게 예진003은 선장의 연인 이상의 의미를 가진 여인이 되어 있었고, 오덕양708의 결혼은 그러한 성역에 누가 되기 싫은 자제의 결과였다.
마음이 아름다운 젊은이에게는 가장 아름다운 신부를 맞도록 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 예진003의 생각이었다. 신천지호의 장미장원에 꾸며진 식장에 입장한 신부는 장미 문양이 가득 새겨진 비단 드레스를 길게 늘이고, 장미꽃 화관을 쓴 모습으로 장미꽃만큼이나 밝게 웃고 있었다. 예진003이 아름다운 해적 오덕양708을 위해 전생의 기억을 되살려 엮어 낸 최대의 선물이었다.
이후에도 이렇게 행복한 시간이 계속되었으면 좋겠다. 신천지호에는 아직 천 명 이상의 미혼 남성들이 짝짓기의 순서를 기다리고 있으니 차례로 신부감을 찾아 주리라. 예진003은 간디325의 도움을 빌어 여성들의 의식을 개조하는 수술을 계속해서라도 신천지호의 모든 승무원들에게 가정을 갖게 하리라고 다짐하며 장미정원의 산책로를 걷고 있었다.
결혼식의 뒷정리가 끝난 장미정원은 예진003이 알고 있던 그 옛날의 장미장원을 연상케 하는 신비로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자연 그대로의 하늘을 갖추지는 못했지만, 자연 그대로의 초목을 가꾸려고 노력한 결과였다. 연못과 폭포와 동산이 있는 정원의 중심에는 처마를 길게 늘인 누각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그 또한 옛날의 장미장원의 재생이었다.예진003은 누각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누군가가 있다’고 생각한 순간 가슴은 두방망이질 치고 있었다. ‘그 옛날에도 이렇게 늦은 밤에 누각으로 나가면 누군가가 있었다’는 생각이 또한 떠올랐다. 구태여 연상하려 애쓰지 않아도 예의 누군가의 정체는 짐작하고 남음이 있었다. 김진욱…… 과거의 기억을 잃은 해적 김진욱625가 아닌, 세상의 온갖 시름을 술로 달래던 나그네족 출신 예술인 김진욱이 그곳에서 홀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을 터였다.
#10. 지구. 지구력 2102년 2월(우주력 원년 3년 전). 동경. 인간 재생 연구소
“방법이 없어. 이모님은 재생 후유증으로 인한 급성 노화야. 300년 전에 죽은 구 중국 황실의 공주를 현세에 되살려 놓았으니 신이 벌주신 것일 테지만.”
간디의 어조에는 절망의 비명이 숨어 있었다. 김진욱과 류우는 서로 얼굴을 마주볼 뿐 위로의 말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왜 방법이 없다는 거야? 비상수단이 있다고 했잖아?”
김진욱이 간디의 목덜미를 붙잡아 흔들며 절규했다. 아끼던 영혼을 빼앗기기 싫은 절박함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행동이었다.
“최후의 방법으로 유전자를 추출해 건강한 사람에게 이식하는 수술을 생각해 보지 않은 건 아냐. 그런데 그게……”
간디가 말꼬리를 흐렸다. 이번에는 류우까지 가세해서 간디를 공박해 댔다.
“그게 어쨌다는 거야? 왜 방법을 알면서도 시도해 보지도 않고 포기하겠다는 거야?”
“300년 전의 유전자를 현세의 어머니에게 살려 예진 이모님을 만들어 냈듯이 전혀 별개인 제3의 인물이 될 수도 있다는 거야. 이모님과 같이 고귀한 영혼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의 좋은 대물이 있을 것 같지도 않고.”
세 사람은 무거운 침묵 속에 잠겨 있었다. 영혼으로서의 기능을 잃은 육체에 새로운 유전자를 주입하여 또 하나의 생명을 만들어 내는 일이 예진의 경우와 같이 단명한 또 하나의 불행한 생명을 세상에 내놓는 일이 되지 않을까 하는 간디의 불안감이 전이된 때문이었다. 더구나 류우의 죽은 어머니와 같은 고귀한 혈통의 대물이 아니면 구 황실의 계통을 이은 예진의 유전자가 접목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데서 어려움은 더했다.
“대물이라면 있다고 생각해. 흑장미가 다시 죽어가고 있어.”
류우의 말이었다. 요 이태 동안 유신호가 보살피던 흑장미가 다시 의식을 잃고 식물인간이 된 것은 최근의 일이었다. ‘화성 바이러스’라고 불리는 외계 병원체에 감염되었다고 발표되기는 했지만 실은 흑장미 역시 복제피로현상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간디는 인간재생학의 스승격인 화성생명법인의 대표 ‘교수’에게서 흑장미가 그의 작품인 안드로이드가 낳은 딸이었고, 복제피로현상으로 죽어갈 수밖에 없다는 전언을 들은 바 있었다. 21세기 말의 지구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공연예술인의 하나인 흑장미가 죽음 직전에 일시나마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류우의 열성 어린 치료 덕분이었다. 류우는 아주연방 내의 의사들은 물론이고 구주연맹과 아메리카 합중국의 의료진까지를 망라한 치료로 흑장미의 몸에서 ‘화성 바이러스’를 몰아내는 데 성공했는데, 병마와의 오랜 사투로 생기를 잃은 흑장미의 육체는 새로운 실험용 의약품의 해독을 이겨내지 못하고 끝내 소생을 거부했던 것이다.
“저질러 보세. 신께서 어떤 결과를 주실지 모르지만, 두 생명을 모아 한 생명을 만드는 범죄 행위를 해보도록 하세.”
종교의 나라 인도 출신인 간디의 탄식이었다.
#11. 지구력2102년 3월. 화성. 화성생명법인의 인간 재생 연구소
“여기는 어디지요? 나는 누구? 나는 공연을 해야 하고…… 진욱 조카님이 보고 싶은데……”
예진과 합체되어 되살아난 흑장미가 일시 예진의 기억을 되살리는 듯이 보이다가 흑장미의 기억으로 돌아가는 등으로 혼란 상태에 있는 모습을 본 김진욱과 간디는 착잡한 마음으로 병실을 나왔다. 두 사람은 수심이 가득한 얼굴빛으로 인간 재생 연구소 주변의 산책로를 거닐고 있었다.
“이게 내 능력의 한계인 듯하네.”
“당신은 최선을 다했어. 현세 재생의료학의 최고 대가인 간디가 할 수 없는 일을 또 누가 하겠나.”
“그건 그래. 현재의 우리가 가진 사람을 살리는 능력이 죽음의 신의 끌어가는 능력보다 턱없이 약함을 탓할 뿐 무슨 변명의 말을 할 수 있겠나. 10년, 혹은 20년, 그래도 아니면 50년이라면 어떠한 영혼이라도 살려낼 수 있을 법한데, 그럴 만한 시간이 없음이 안타까울 따름일세.”
김진욱과 간디의 대화는 거기서 멈추었다. 두 사람은 동시에 어떤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다. 50년, 그래. 50년만 유해를 보존하면 우리가 아는 여인을 되살릴 수 있다……
그러한 그들에게 다가온 류우가 확신을 주었다.
“내게 맡기게. 의료용 타임캡슐이 완성되어 있다네. 무중력 무산소의 곳, 일테면 소행성지대의 어느 별쯤을 향해 타임캡슐을 발사한 후, 먼 훗날 복제피로현상의 치료법이 개발된 후에 다시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겠네. 내 명예를 걸고.”
#12. 태양계. 지구력2105년. 우주력 원년. 해왕성이 보이는 우주
한 척의 우주 전함이 태양계를 떠나 외계 우주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선수에 꼽은 해골깃발이 선명한 해적선 신천지호의 외계 우주행 항진이었다.
전망 스크린을 통해 멀어지는 태양계의 경치를 보는 사람들의 표정은 어두움 일색이었다.
“이 배로 우주로 나갈 수 있을까?”
아무도 소리 내어 묻는 이는 없었지만 모두들 그러한 질문을 듣고 있었다. 결과를 알 수 없는 여행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가 봐야지. 태양계 안에는 우리가 찾는 ‘그 무엇’이 없는 걸.”
누군가 답변한 것 같은 데 실제로 입을 연 이는 없었다.
#13. #6의 연속. 외계 우주. 소행성지대
“목표물의 움직임이 또 변했습니다.”
추적장치의 모니터를 주시하고 있던 오덕양708이 보고를 했다. 전망 스크린을 통해 무역선의 움직임을 감시하던 오신564도 새로운 분석을 내놓고 있었다.
“함정입니다. 저 소행성지대는 전함의 대군을 숨기기에 적합한 지형을 하고 있습니다.”
무역선은 크고 작은 암석 덩어리로 이루어진 소행성들이 군집한 성역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소행성지대는 우주전에서 복병전술을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성역이었다. 다차원물리학을 응용한 초광속 우주비행이 일반화된 후 공간도약의 여지를 주지 않을 수 있는 장애물이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소행성지대는 지구계 인류가 우주로 나온 이후 수없이 이용해 온 고대 전술의 시범장이었다. 따라서 여객선이 유유히 소행성지대로 들어가는 것은 “이곳에 복병을 감추어 두었으니 용기가 있으면 따라 오라”는 과시일 수 있었다.
‘이쯤에서 후퇴하는 게 어떨까’하는 회의가 다시 한 번 일었다. 김진욱625는 자신의 한 마디면 신천지호가 곧 선수를 돌릴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소행성지대에 들어가면 제멋대로 늘어서 있는 암석 덩어리들이 공간 도약의 장애물로 작용하여 초광속 운동을 이용한 탈출은 불가능해질 것이었다.
소행성지대가 눈앞에 가까워 오면서 ‘배를 돌리려면 이때이다’라는 갈등의 시간도 시시각각 줄어가고 있었다. 일부러 대군을 동원했다는 은하연방 우주군이고 보면 복병이 줄 위험도는 짐작하고 남음이 있었다. 김진욱625는 줄어오는 생존의 시간에 반비례하여 위험을 향해 달려가는 긴장감의 강도가 상승하는 것을 느끼며 끝내 침묵을 고수하고 있었다.
‘해적은 영혼의 본능으로 살아가는 불완전 지성체의 완성형과 같은 존재들이다’라는 말을 한 이는 간디325의 전신 중 한 사람이었다. 김진욱625는 자신이 해적의 본령인 투쟁의식의 본능을 지성에 의해 닦인 후천적인 본능에 구애받지 않고 십분 발휘했다고 생각했다. 동료들도 모두 같은 기분이리라 하는 의식은 있었으나 문득 예진003의 의중을 살피지 않았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미끼이리라 짐작되는 무역선을 추적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떠올랐던 ‘이대로 후퇴하고 싶다’는 의식은 예진003에 의해 얻어진 평화를 빼앗기기 싫다는 욕망의 발로이기도 하였을 것이었다.
오덕양708의 아내가 아기를 가졌고, 오덕양 일가의 뒤를 따를 해적 부부들도 잇달아 탄생할 예정이었다. 더구나 김진욱625 자신으로 말하면 가장 예진003과 헤어지기 싫은 사람이었다. 어떠한 우연에서 비롯된 만남인지 모르지만 우리는 만났고, 이 만큼 행복하지 아니한가. 이 행복을 잃는 것은 싫다. 정말 싫다. 김진욱625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신천지호는 소행성지대 안으로 진입했다. 미끼로 짐작되던 여객선은 어느 별의 그늘로 숨었는지 보이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배를 돌리면 탈출할 수 있다는 생각이 다시금 김진욱625의 뇌리를 스쳤다. 수없이 많은 위기상황을 돌파해 왔으면서도 느끼지 못했던 긴박감이 가슴을 쳐왔다.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하고 간신히 목숨을 구해 달아났던 다섯 해 전의 전투에서도 여한 없이 싸웠다는 통쾌함은 있었을망정 오늘 같은 두려움은 없었다. 결국은 그랬어. 역시 아쉬운 거야. 5년 전과 5년 후인 지금의 사이에는 예진003의 등장과 그녀로 인해 얻어진 평화가 있었어. 우린 그것이 놓치기 싫었던 거야. 김진욱625는 가정의 안락함을 맛본 해적들의 모습을 지금의 신천지호가 보이고 있다고 생각했다.
예진003은 일등항해사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있었다. 소행성지대로 들어온 이후 크고 작은 암석 덩어리가 수시로 앞을 막아 항해를 방해했지만 예진003의 익숙한 조종 솜씨는 장애물을 잘 피해내어 신천지호를 전진시키고 있었다.
“적이 나타났습니다.”
시종 침묵을 지키던 코넬613이 입을 열었다. 전투가 임박했다는 선언이었다.
#14. 외계 우주. 우주력 1031년 6월. 소행성지대
은하연방 우주군은 소행성의 그늘마다 일급 전함을 숨겨 두고 있었다. 신천지호가 소행성지대 깊숙이 들어온 순간부터 하나씩 둘씩 모습을 드러낸 우주군 함대는 어느새 소행성지대 전체를 전함의 대군으로 덮고 있었다.
신천지호가 개전을 알리는 전기를 올린 것은 연방우주군 함대의 각 함정에서 육전대를 태운 단승공격기들이 출격한 이후였다. 해적의 장기인 기습 공격을 시도하기에는 적인 연방우주군의 병력이 너무 많았고, 주력의 공격 목표가 될 적의 지휘부 또한 표면에 드러나지 않았던 것이다.
“최고의 적이군. 완벽한 작전이야.”
정보 분석 담당 장교이자 단위부대의 대장인 오신564가 적정 분석을 대신해서 적을 칭찬하는 말을 하고 있었다. 다른 부대의 장인 코넬613과 알렉산더608 역시 같은 심정인 듯 말없이 전망 스크린을 보고 있었다.
김진욱625는 결심의 시간이 왔다고 생각했다. 이제 끝내는 거야. 다시금 재생의 기회가 주어질지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의 기억으로는 끝이 온 게 확실해. 아쉬움이 남는 일생이었지만 보람 또한 적지는 않았지. 저 여인이 있었으므로 이번의 내 생애는 살 가치가 있는 것이었어. 차례로 출격하는 동료 해적들의 단승공격기를 전송한 김진욱625는 예진003을 흘낏 돌아본 후 자신의 전투 군장을 꾸리기 시작했다.
오덕양708이 김진욱625의 팔을 잡았다. 그가 손가락질하는 곳에는 그의 아내와 해적들의 연인들인 여인들이 잔뜩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고 들어서고 있었다. 여인들은 예진003을 중심으로 모여 출정을 준비하고 있는 해적들을 향해 원망어린 시선을 보냈다.
김진욱625는 손에 들었던 보병용 소총을 곁에 놓았다. 그래. 나는 선장이야. 선장에게는 마무리의 책임이 있지.
#15. 앞 이야기의 계속. 전투
총탄과 원자파괴무기가 함께 사용되는 기묘한 전장이었다. 화약을 재고 철환을 넣고 용수철을 퉁겨야 발사되는 단발총으로 고집스레 적선의 일급 조종사만을 찾아 심장을 꿰뚫곤 하는 해적들의 기막힌 솜씨에 놀란 적들은 잔뜩 겁을 먹고 한달음에 몇 광년씩 달아나곤 하였다. 해적들은 더욱 기세가 올라 뒤쫓곤 하였는데, 실은 그 또한 함정이어서 적을 노리고 대열에서 이탈한 해적단의 단승공격기들은 몇 곱절 큰 적에 의해 겹겹이 포위되곤 하였다. 각개 격파의 전술임을 읽지 못할 바도 아닌데 해적들은 적의 유인 전술에 차례로 속았고, 우수한 지휘관이 작정을 하고 대군을 동원한 듯싶은 적에게 후군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는 소수 해적 부대는 초반의 승세를 지키지 못하고 바닷물에 조약돌 삼켜지듯 어느 결에 스러지고 말았다.
#16. 앞 이야기의 계속. 해적선 신천지호. 종결
김진욱625는 예진003의 가슴에 보병용 소총의 총구를 들이대고 있었다. 예진003은 평소와 다름없는 미소 띤 표정으로 김진욱625를 바라보고 있었고, 간디325가 역시 가장 행복한 모습으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제 아내를 부탁합니다.”
오덕양708이 마지막 남은 경호병들을 끌고 사령실의 문을 나섰다. 그의 아내는 임신 중이었다.
사령실 밖의 통로 쪽에서 총성과 비명이 들려왔다. 오덕양708과 그의 수하 경비병들이 은하연방 우주군 육전대와 최후의 사투를 벌이고 있는 증거였다. 김진욱625는 입술을 깨물었다. 길게 버티지는 못하리라. 그 안에 모든 것을 마무리해야 한다.
보병용 소총의 방아쇠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이 잠깐의 동작으로 예진003과의 모든 인연을 끝낸다고 생각하니 아득히 두려움으로만 느껴왔던 생사로 인한 별리가 별안간 우스운 행사로 다가왔다. 그래, 우리가 대단하게 생각했을 뿐 삶과 죽음 사이에는 한 발의 총알의 짧은 흐름이 있었을 뿐이었어. 잠깐 방아쇠를 잡은 손가락에서 힘을 빼고 전망 스크린 쪽을 돌아보았다. 소행성지대 가득히 크고 작은 암석 덩어리들이 흩어져 있었고, 그 사이사이로 신천지호의 해적들과 은하연방 우주군 육전대의 시체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누군가 거두어 주지 않으면 시체들은 소행성지대의 암석들과 함께 영원히 우주를 흘러 다닐 것이었다. 저렇게 별이 되는구나. 어쩌면 저 암석 덩어리들도 언젠가 생명이었던 시절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냐. 지금쯤 저들은 죽어서 더 행복한 생명이 되어 있는 지도 모른다. 우리가 가본 적이 없는 어떤 세계에서. 우리도 저 길로 가야 하는가. 시선을 돌려 예진003을 보았다. 예진003은 기도하듯 눈을 감고 엷게 웃고 있었다. 김진욱625는 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예진003의 가슴에서 핏줄기가 솟았다. 이 여인은 끝내 자신의 마음을 밝히지 않고 가는구나. 조용히 옆으로 쓰러지는 예진003을 보며 김진욱625는 여러 가지 생각이 차례로 스쳐 가는 것을 느꼈다. 이 여인은 처음 우리에게 왔을 때부터 시종 저런 모습이었다. 무언가 입을 열까 말까 망설이는 듯, 알 수 없는 미소를 흘리고 있는 저 입술.
“나는 김진욱625라고 합니다. 이 배의 선장이지요.”
처음 김진욱625가 그렇게 소개말을 했을 때 예진003은 잠깐 복잡한 표정의 변화를 보이다가 이내 예의 알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고, 함께 한 시간 내내 그 표정을 유지했다. 무언가 꼭 밝히고 싶은 비밀을 간직하고 있지만 밝힐 수 없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는 듯이 보이면서도, 자신만의 비밀을 비밀로 간직하고 있는 데서 보람을 찾는 듯싶은, 망설임과 설렘이 번갈아 스쳐 가는 복잡한 미소였다.
저 미소는 그 날 이후 우리가 함께 해온 10년여의 세월 동안 어느 한시도 사라진 적이 없었다. 어떤 상황과 조건 아래에서도 저 여인은 저 알 수 없는 미소를 변치 않아 가슴을 졸이게 하였다. 최후를 맞은 이 순간까지도. 김진욱625는 오덕양708의 결혼식 날 밤에 있었던 예진003과의 은밀한 만남을 되새겨 보았다. 신천지호 안에서 유일한 초록 지대인 장미정원 내의 누각에서 그는 예진003을 기다리고 있었다. 예진003이 밤 깊은 시간이면 홀로 누각 근처를 산책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선장과 일등항해사로 공인된 연인 사이였다. 김진욱625가 그 날 밤에 장미정원의 누각에서 예진003을 기다린 이유는 그러한 사실을 실제의 사실로 만들고 싶었던 욕심 때문이었다. 낮의 오덕양708의 결혼이 그의 방심에 불을 붙였던 것이다.
장미정원은 밤의 어둠에 힘입어 본래의 아름다움에 신비로운 분위기를 더하고 있었다. 계절이 없는 우주인지라 언제나 장미꽃을 피우는 정원의 사이 길로 예진003이 걸어 나왔다. 김진욱625는 반색을 하며 기다렸다. 이제 우리는 하나가 된다. 예진003은 김진욱625를 발견한 모양으로 잠시 멈칫거리다가 다시 몇 발짝 다가오는 듯이 보였다. 김진욱625는 감정이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이런 것을 사랑이라고 하는가보다. 이제 우리도…… 그러나 김진욱625의 그러한 기대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예진003은 김진욱625의 얼굴 표정을 구별할 만큼의 거리에 멈추어 예의 알 듯 말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무언가 뜻을 전하고 싶지만 차마 전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마음을 예진003의 미소는 나타내고 있었다.
김진욱625가 누각에서 내려와 다가갔다. 그러나 예진003은 더욱 빠른 속도로 뒷걸음질 쳤다. 잠시 같은 실랑이가 계속된 후, 두 사람은 서로 멀어졌다. 그날 밤 김진욱625가 얻은 것은, 예진003의 알 수 없는 미소의 의미를 더욱 알고 싶은, 갈증뿐이었다.
죽음을 맞은 이 순간까지도 저 여인은 그 때의 의문을 밝힐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런데도 억울하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 무언가 우리 사이에 있었던 듯한 비밀을 알고 있으면서도 끝내 밝히지 않는 저 여인의 마음이 고마워서일까. 내 전생은 천 년 전 지구 시대에 연원을 두고 있다고 했다. 간디도 그렇고 다른 동료들도 그렇다지만, 특히 이 여인은 내게 특별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나를 선장으로 받아들인 일등항해사 자리를 감수하고 있는 것이 그 증거가 아니겠는가. 해적선의 여성 일등항해사란 선장의 연인, 혹은 그 이상의 의미가 있는 역할임을 우주 안의 음유 시인들의 노래가 증명하지 않았는가. 동료들의 놀림의 말에도 싫은 표정 한번 보인 적이 없었다. “일등항해사님은 선장님의 이거!”하고 새끼손가락을 들어 보이는 막내 동료들에게 마냥 해맑은 웃음을 보이는 것이 반응의 전부였다. 우리 사이의 인연을 인정하고 있는 증거가 아니고 또 무엇이겠는가.
저 여인은 천 년 전의 기억을 간직한 채로 천 년 후인 현세에 다시 살아났다고 했다. 저 여인이 나를 인정한다는 것은 천 년 전의 내 전생과의 인연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본다면 무리한 추측일까? 아니다. 저 여인은 나를 천년의 세월을 격한 전생의 나와 동일 인물로 보고 있다. 그간의 신뢰는 그 증거이다. 그렇다면 어떠한 우연의 결과인지는 몰라도, 우리는 다시 만난 것이다…….
아니다. 우리의 만남은 반드시 만나야 할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 어렵사리 다시 만난, 필연의 산물이었는지 모른다. 저 여인은 천년에 걸친 그 인연의 경과를 알고 있는 유일한 인물일 것이다.
천 년, 그 긴 세월 동안 이어진 인연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천 년 전의 만남과 천년 후의 만남이 한결같을 수 있는 인연이란……
저 여인은 그저 미소를 띠고 죽었다. 내게 죽임을 당하는 데 대해 불만을 갖지 않음은 물론이고 오히려 행복하다는 표정이었다. 고마운 일이다. 고마운 인연이었다.
김진욱625는 간디325가 수술도를 능숙하게 휘둘러 예진003의 두뇌를 적출하고 있는 양을 보았다. 그는 간디325를 거들어 예진003의 두뇌를 무균 용기에 넣었다. 두 사람은 신천지호의 최후를 마무리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온 곳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보시이다’하는 것이 두 사람의 생각이었다. 예진003의 두뇌는 다시금 원래의 타임캡슐 속에 넣어져 우주로 보내질 예정이었다. 오덕양708의 부인을 비롯한 동료 해적들의 연인들을 위해 비상 구급용 우주선이 준비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어느새 해적선의 분위기에 물들어 삶에 연연하지 않게 된 여인들을 위해서 간디325는 간단한 시술을 했다. 여인들은 짧은 잠에서 깨어나면 안전한 곳에 모셔져 있을 것이었다.
사령실의 문이 무거운 물체에 부딪힌 듯이 요란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문 밖의 통로에서 마지막 사투를 벌이고 있던 오덕양708과 경호병들이 모두 희생된 모양으로 은하연방 육전대 병력이 문을 부수려 드는 소리였다. 이제 정말 다 끝난 게지? 김진욱625는 간디325를 향해 눈인사를 했다.
간디325는 예진003의 두뇌를 타임캡슐 속에 안치하는 작업을 끝내가고 있었다. 저 친구와의 인연도 이것으로 마지막이로구나. 긴 세월 동안 불평 한마디 없이 우리 신천지호의 동료들 전부의 생명을 지켜 주었는데. 함께 최후를 맞게 되는 것은 저 친구의 우정을 저버리지 않는 그 나마의 다행이지 싶다. 김진욱708은 다시 한 번 간디325를 위해서 눈인사를 한 후 예진003의 두뇌가 들어 있는 타임캡슐과 오덕양708의 부인을 비롯한 여인들이 탄 우주선을 우주로 발사시키는 발진장치의 단추를 눌렀다.
두 개의 물체가 해적선 신천지호를 떠나 우주로 날아오른 것을 확인한 후 김진욱625는 자폭장치를 가동시켰다. 그의 가슴에서는 진작 핏줄기가 솟구치고 있었다.
적들이 문을 부수고 들어왔다. 김진욱625는 이미 죽어가고 있었다. 파괴예술의 전문가를 자처하는 해적 집단의, 배와 운명을 함께 해야 하는 선장은 스스로 자신을 파괴하는 것으로 적에게 승리의 기회를 주지 않았다.
#17. #3의 연속. 기약
우주가 부릅니다. 울고 있는 소리가 들립니다. 생명체로서의 성장을 완성하기 전에 앞선 생명체에게 육체를 겁탈 당해 영양이 되고 만 미생물들의 통곡 소리인 듯싶습니다마는, 그러나 실은 사랑을 빙자하여 천 년을 이어온 생명을 끊은 내 마음속의 슬픔이 흐르는 소리일지도 모르고, 내 육체에서 빠져나가는 지성이 단말마의 고통을 잊기 위해서 내지르는 비명 소리일지도 모릅니다.
인간은 죽음 직전에 가장 선량해지고 현명해진다고 하던가요. 천 년쯤의 세월이 흐르고 삼백 번쯤의 재생이 이루어진 후라면 예진이 타고 떠난 타임캡슐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하는 탄식을 터뜨린 순간, 문득 환각인지 전생의 기억이 재생되고 있는 것인지 잊었던 무언가를 되찾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아마도 천 년쯤 전의 지구인 듯싶은 풍경 속에서 어떤 강력한 문명 집단의 횡포에 의해 내가 핍박을 받고 있었는데, 곤란의 와중에 사랑을 같이 했던 여인을 온 곳으로 돌려보내는 의식을 치르고 있었습니다. 의식의 끝에 우주로 날아오르는 여인의 관은 예진이 타고 떠난 타임캡슐과 흡사해 보였습니다. 그렇다면 나와 예진은?
#18. 소리
-그 시대로 보낼 친구를 찾아냈군.
-저토록 절실히 원하는데 이루어주어야겠지.
-상도를 거스르는 게 아닐까?
-…….
-…….
-우리가 시작했던 일이야. 우리가 끝을 맺어야지. 또 한 차례의 애증사가 빚어질지라도……
#19. 우주력 1031년. 우주선교사 수선050의 해적선 신천지호에 관한 기록
-죽음이 희롱되는 시대에 ‘늘 푸른 강’을 떠도는 한 척의 우주선이 있었습니다. 우주선의 주인은 해적. 해적선의 선장은 과거를 꿈으로 갖기 위해 자신을 죽이곤 하였습니다. 그는 꿈이란 삶과 죽음, 사랑 이외에 지성체가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갖추어야 하는 네 번째 조건일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믿음에 증거를 주기 위해 가장 가치 있는 제4를 찾아 매번 자신을 죽였던 것입니다.
#20. 구 태양계. 지구력2105년 8월. 우주력 원년 1월. 해왕성이 보이는 우주. #12의 반복
한 척의 우주 전함이 태양계를 떠나 외계 우주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선수에 꼽은 해골깃발이 선명한 해적선 신천지호의 외계 우주행 항진이었다.
전망 스크린을 통해 멀어지는 태양계의 경치를 보는 사람들의 표정은 어두움 일색이었다.
“이 배로 우주로 나갈 수 있을까?”
아무도 소리 내어 묻는 이는 없었지만 모두들 그러한 질문을 듣고 있었다. 결과를 알 수 없는 여행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가 봐야지. 태양계 안에는 우리가 찾는 ‘그 무엇’이 없는 걸.”
누군가 답변한 것 같은데 실제로 입을 연 이는 없었다.
(우주선교사 수선013 시리즈 종결.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첫댓글 살고지고 살고지고 천년만년 살고지고 그들이 살아간 이야기는 전설이 되지요
좋은글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
변변치 못한 글을 시종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장편의 우주 공상 드라마를 완성하시느라 대단히 수고하셨습니다. 수 많은 세월이 흐른 뒤 다시 만난 김진욱과 예진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해적의 운명이 그러하듯 패배와 자폭을 거치면서 결국 죽음으로 종결되는 비극적인 스토리 이군요. 좁은 지구가 아니라 광활한 우주를 배경으로 탐험과 전쟁을 두루 섞어가면서 흥미로운 신천지 해적선과 주인공들의 사랑 이야기를 그려낸 형님의 상상력에 다시금 심심한 경의를 표합니다. 저도 마음이 안정되면 전쟁과 사랑을 주제로 하여 단편 순정소설을 쓰고 싶습니다. 차 후 많은 가르침을 바랍니다.
변변찮은 글을 시종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사랑은 영원한 숙제라고 하는데, 지금의 우리 인생이 풀리지 않는 은원의 매듭을 안고 몸부림치는 윤회 중의 한살이가 아니라고 할 수도 없지 않나 싶어 그렇게 끝을 만들어 보았습니다.
이피터 님의 글 실력이야 이미 공인된 상태이니 작업하여 수확하는 일만 남은 듯싶네요. 목소리만 큰 제 글과는 비교가 안 될 명작의 탄생을 기대하겠습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잘읽고갑니다.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