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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재경 목사(총회교육진흥원) |
철학자 볼테르는 “기독교를 죽이고 싶으면 주일(Sunday)을 폐지시키면 된다”고 말했다. 이처럼 주일성수와 기독교의 존립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실제로 그리스도인이 세상 사람들과 구분 되는 표식 중 하나가 주일성수이다.
한국교회는 너무도 많은 힘을 잃어 가고 있다. 근본적인 원인은 주일성수에 대한 급격한 쇠퇴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므로 주일성수의 회복은 곧 한국교회의 회복이라는 등식이 성립된다.
주일성수에 대해 성도 500여명을 상대로 설문을 실시했다. 주일에 교회를 결석을 하지 않는다는 응답이 29.1%, 자주 한다 34.7%, 조금 한다 34.4%로 나타났다. 주일성수를 철저히 하지 않는 경우가 69.1%로 2/3을 상회하고 있다.
그리고 출석 못한 요인은 영적침체 13.6%, 가족과 함께 함 14.0%, 경조사 20.0%, 학업 및 경제활동 19.2%, 여가 및 취미생활 33.2%로 조사 되었다.
이를 역으로 생각하면, 성도의 70%는 신앙생활이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주일성수에 대한 교육과 훈련이 시급하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
또한 주일성수를 하지 못하는 원인을 보면 무엇보다도 관계문제(47.2%)가 절대적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변화하는 사회상에 대한 교회의 대응이 시급하다. 한국 문화에서는 경조사가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대안교육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학업이나 경제활동으로 불가피하게 주일성수를 하지 못하는 성도들을 위한 대안도 필요하다.
주일성수가 무너지는 이유는 산업화와 주5일근무제, 정보화, 세속주의(물질·쾌락·권력)로 정리할 수 있다. 주일성수 개념이 신앙생활의 중심에서 부수적인 위치로 변하고 있기 때문에 주일성수에 대해 다시 한 번 강조해야 한다.
주일성수가 중요한 이유는 △삶으로 신앙을 전수하고 교육하는 ‘영적 생명 전수의 날’이기 때문이며 △세계 인류 공동체성을 깨닫고 회복하는 ‘믿음과 교회의 공공성’을 갖기 때문이다. 또한 △열려진 미래를 향하여 ‘창조적인 꿈을 꾸는 사람’을 만든다.
주일성수를 논의하고 강조할 때 주의해야 할 부분도 있다. “주일에 물건을 사도 되느냐”처럼 행동에 대한 이분법적 논리에 집착하면 안 된다. 주일성수를 하지 못하면 무조건 정죄하는 역사·전통적 관점도 우려의 대상이다. 또한 주일을 가볍게 생각할 수 있는 교회문화적 현상도 경계의 대상이다.
무너지는 주일성수를 다시 세우기 위해서는 우선 신학적인 작업이 필요하다. 삶의 체계로서 주일성수를 정의해야 한다. 이어 삶을 통한 가치교육체계도 세워야 한다. 삶을 통한 주일성수 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뜻이다.
마지막으로 기독교 문화를 창조하여 주류의 문화로 만드는 것이다. 21세기는 문화의 시대다. 문화는 문화로 맞서야 한다. 교회는 새로운 거룩한 문화창조의 모태가 되어야 하며, 주일은 그 씨앗이 형성되는 날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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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①/ 주일성수에 대한 역사신학적 고찰
초대교회부터 주일 지켜 타협하지 않는 정신 중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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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용규 교수(총신신대원·역사신학) |
현재 서구 세계는 물론 한국교회 역시 주일성수와 관련하여 두 가지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첫째는 외부적 원인으로 주일을 지키기 힘든 시대적 상황이다. 둘째는 안식교와 같이 주일성수의 무효성을 주장하는 내부로부터 오는 도전이다.
요즘처럼 주일성수 개념이 퇴색해지고 있었던 시대는 없었던 것 같다. 특히 우리나라도 주5일근무제로 노동 형태가 바뀌면서 교회보다는 가정을, 영적인 일 보다는 세상적인 즐거움에 중점을 두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더 심각한 도전은 기독교에서 주일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 주일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사실이다.
안식교에서는 구약의 안식일(the seventh day Sabbath)이 주일(Lord’s Day)로 바뀌게 된 근거를 신약에서 찾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신약에는 안식일에서 주일로 바뀌게 된 증거가 많다. 첫째, 주님의 부활이다. 제자들과 초대교회는 안식 후 첫날 주일(주님의 날)은 부활의 승리를 기념하는 날로 특별 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가 그를 따르는 이들에게 부활의 몸으로 친히 나타내신 날이 주일이다. 셋째, 교회에 성령이 강림하신 날이 오순절이었다. 오순절 성령강림은 부활의 주님이 친히 부활의 승리를 기념하시고 신약교회의 태동을 선언하신 의미를 담고 있다.
특히 사도행전 20장 7절에서 누가는 “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라고 했다. 그 주간(안식 후) 첫날은 주일을 뜻하며, 떡을 뗀다는 것은 주일에 성찬식을 했다는 뜻이다. 즉 초대교회는 안식 후 첫날(주님이 부활하신 날)을 주의 날로 기념하고 예배를 드렸다. 이밖에 주일성수에 대한 초대교회 교부들의 증거도 수없이 많다.
주님이 부활하신 이후 안식일 준수가 주일성수로 변천되어 왔고, 이미 초대교회부터 안식일 대신 주의 날을 지켰다. 따라서 주일을 성수하는 문제는 성경과 기독교 역사가 가르치는 중요한 교훈이다.
그러나 오늘날 세속화의 도전, 주 5일근무제 등 우리 주변에 주일성수를 평가절하 하는 환경적 요인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미국교회의 경우 1930년대에 주일성수에 대한 위기가 왔었으며, 이는 곧바로 교회의 세속화로 전이됐다. 현재 한국교회는 미국교회와 동일한 흐름으로 가고 있다. 미국처럼 결국 성탄절이나 부활주일에만 교회에 출석하는 명목상의 기독교인이 등장할 수 있다.
따라서 주일성수에 대한 초대교회와 청교도적인 엄격한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 쉽게 타협하는 길은 결국에 가서 주일성수를 완전히 무시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현대 한국교회는 주일에 대한 중요성을 다시 일깨워주고, 산업화와 주5일근무제로 인해 주일성수가 퇴색되지 않도록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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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②/ 주일성수에 대한 성경신학적 이해
‘안식의 회복’이 완성된 날 힘써 모여 믿음 지켜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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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희석 교수(총신신대원·구약학) |
성경에서 안식 개념이 처음 나타나는 본문은 창세기 2:1~3이다. 이는 단순한 육체적 쉼의 개념이 아니며, 하나님께서 모든 창조계획을 성취하신 ‘완성’의 개념이다. 그러나 창세기 2장에서 나타난 안식 개념은 창세기 3장(선악과 사건)에 이르러서 파괴되고 만다.
안식 개념은 출애굽기 20:8~11(십계명 중 4계명)에서 다시 등장한다. 그런데 창세기의 ‘안식’과는 다른 ‘안식일’로 바뀌었다는 점에서 주목해야 한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안식의 회복을 위함이었다. 하나님은 창세기 1~2장에서 이루셨던 안식을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 회복하려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령하신 안식일은 ‘장차 경험하게 될 종말론적 안식의 회복을 믿음으로 미리 경험하는 날’인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일을 지키면서 ‘창조기사 속에 드러난 하나님 나라 회복을 소망해야 하며, 동시에 종말론적 안식의 회복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했다. 안식일은 이처럼 창조사건과 구속사건이 함께 연결되는 안식의 회복을 뜻하는 절기였다.
신약교회의 성도들은 구약시대의 안식일을 ‘제도적 의미’에서 지켜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종말론적 안식의 회복을 바라봐야 한다. 즉 일주일의 모든 요일이 안식이 충만하게 회복된 날이지만, 예수께서 다시 오실 날까지는 구약시대 안식일을 본받아서 일주일에 적어도 하루는 함께 모여 예배드리고 말씀을 배우고 기도해야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날을 지켜야 하나? 역시 안식의 회복이 완성된 날이어야 할 것이다. 신약이 알려주는 안식이 회복된 날은 예수께서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안식 후 첫날, 즉 주일이다. 우리가 제1일을 ‘주일성수’로 지키는 것은 제1일인 일요일을 지킨다는 의미가 아니며, 오직 예수께서 안식을 완성하신 ‘부활의 날’을 지킨다는 의미다.
21세기 한국교회는 주일성수를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가? 주일성수에 대한 극단적인 오해를 피해야 한다. 구약의 안식일 제도는 노동의 금지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의 회복에 있었다. 예수께서도 노동의 금지만으로 모든 것을 규정하려고 한 자들의 태도를 비판하셨다. 반대로 율법폐기론을 펼치면서 주일성수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주장 역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우리는 신약교회의 일원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완성을 바라봐야 한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기억하면서 주일에는 교회에서 예배드리고 교회의 일에 동참해야 한다. 주중에는 마치 주일을 지키는 것처럼 각자의 삶 가운데 마음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켜 나가야 한다.
또한 한국교회는 주일을 잘 성수할 수 있도록 실천적인 노력과 연구에 더욱 힘써 나가야 한다.
강의③/ 주일성수 교육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
육체와 영혼의 쉼 포함된 ‘전인적 안식’ 바로 알려야
안식일 계명의 첫 번째 특징은 인간의 전인적 건강을 위하여 제정된 인간을 위한 날이라는 것이다. 예수님도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막 2:27)라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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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원 교수 (총신신대원) |
안식일 계명은 일을 중단하라는 목적도 있지만, 죄의 세력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킴으로써 영적인 건강을 도모하고, 나아가서는 전인적인 건강을 유지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안식일은 즐거운 날이며,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진 선물이자 축복이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 먹는 것을 허용하시고(마12:1이하), 각종 병든 자를 치유하셨다. 이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사탄과 질병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즐거운 해방의 날’인 안식일의 성격과 부합한다.
안식일 계명의 두 번째 특징은 이 날이 하나님의 날이라는 데 있다. 따라서 이 날에는 여호와를 찬양하며, 별도의 제사를 드렸다. 예수님도 “늘 하시던 대로” 안식일에 회당에 가셔서 청중들을 교육하셨으며, 바울도 회당에 갔다.
따라서 첫째, 교회는 안식일이 인간의 육체적인 쉼(출애굽기의 안식일 명령)과 영혼의 쉼(신명기의 명령)이 모두 포함된 전인적인 쉼을 위하여 제정된 날임을 가르쳐야 한다.
둘째, 교회는 안식일이 인간의 쉼을 위한 날인 동시에 하나님을 위하여 성별된 날이라는 점도 가르쳐야 한다.
셋째, 교회는 안식일이 하나님이 계시로 직접 제정하여 명령하신 독특한 제도로서, 안식일과 비슷해 보이는 고대의 이방관습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넷째, 교회는 인간의 탐욕 때문에 안식일을 지키지 않음으로써 안식일을 훼손하는 것이 잘못된 일임을 가르쳐야 한다. 반대로 성경이 규정하지 않은 조항까지 만들어서 과도하게 인간의 행위를 제약하는 것도 잘못임을 가르쳐야 한다.
다섯째, 교회는 구약시대의 안식일이 신약시대에는 예수님의 부활을 지키는 날로 전환되었음을 가르쳐야 한다.
여섯째, 교회는 어거스틴, 재세례파, 루터와 칼빈과 같은 종교개혁자들이 안식일을 다른 날과 동일한 날로 환원 시킨 것은 안식일에 대한 중대한 오해임을 가르쳐야 한다. 어거스틴은 안식하라는 명령을 영적인 안식을 뜻한다고 해석함으로써 사실상 안식일법의 외형적 준수를 반대했다. 그러나 어거스틴의 해석은 잘못된 것이다. 안식일법은 다른 의식법들처럼 신약시대에 폐기된 것이 아니라 지키는 날짜가 좀 더 완전한 의미를 지닌 날로 바뀐 것일 뿐이다.
일곱째, 교회는 종교개혁 이후 표준 신앙고백서들, 개혁주의 신학자·윤리학자들이 안식일법은 모든 시대의 모든 교회들이 준수해야 할 보편법으로 받아들였음을 가르쳐야 한다.
여덟째, 교회는 토요일에는 무급노동(집안일이나 여가활동 등)을 하고 주일에는 온전히 전인적으로 안식하는 일에 집중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주5일근무제를 ‘5일 유급노동+1일 무급노동+1일 예배와 휴식’으로 지킨다면 주5일근무제는 주일을 좀 더 온전하게 지키는 계기로 선용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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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④/ 청교도의 주일성수 평가와 계승
율법주의 접근 경계하며 신학적 의미를 가르쳐야
청교도들은 기독교 역사상 가장 성경적인 교회와 신앙을 추구했던 사람들이었으며, 연단된 꿋꿋함과 성숙한 경건을 보여주었다. 청교도 연구가인 제임스 패커(James I. Packer)는 주일성수에 관하여 청교도들의 유산을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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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남준 목사 (열린교회) |
첫째, 주일을 지키는 태도이다. 주일은 ‘영혼을 위한 장날’이요 ‘심령의 일을 위한 날’이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은 그 전날인 토요일 밤을 어떻게 보내는가에 의해 결정된다. 따라서 신자는 토요일 저녁을 주일을 준비하는 시간으로 구별해 놓을 필요가 있다. 주일에 받을 신령한 복을 기대하고, 예배드릴 자로 자신의 몸과 마음을 하나님께 바칠 수 있도록 충분한 휴식을 취해야 한다.
둘째, 주일성수에 대한 율법주의적이고 바리새주의적인 자세를 경계해야 한다. 패커에 의하면 청교도들이 탁월한 신앙과 신학을 가진 사람들이기는 하였지만, 그들의 규칙을 절대화시켜 그대로 답습해야 할 것은 아니라고 했다. 따라서 그들의 주일성수 규칙을 율법주의적으로 따르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또한 바리새주의적인 태도로 남을 정죄하는데 사용해서는 안 된다.
한국교회의 주일성수에 관하여 현실적인 제언 몇 가지를 한다.
첫째, 우리 시대의 신앙고백을 작성하여야 한다. 우리는 약 370년 전에 작성된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서’와 ‘성경 대·소요리문답’을 교리적 표준으로 따르고 있다. 그러나 17세기 청교도들의 정치·문화·경제·사회적 상황은 오늘날 우리 시대와 현저히 다르다.
우리 시대의 교회는 자신의 신앙을 자기 시대의 언어로, 현실과의 치열한 씨름 속에서 자기의 입술로 고백해야 할 책임이 있다. 이러한 신학적 고백의 큰 틀 안에서 새로운 신앙고백이 이루어져야 한다.
둘째, 주일의 신학적 의미를 가르쳐야 한다. ‘주일’의 신학적 의미를 모르는데 어떻게 ‘성수’를 하겠나? 주일의 신학적 의미를, 성경을 통해 정확하고 풍부하고 쉽게, 그리고 반복해서 가르쳐야 한다.
셋째, 율법적 바리새주의에 대한 경계가 요구된다.
넷째, 자유주의적 방종에 대한 경계가 필요하다. 주일성수에 대한 율법적 바리새주의도 문제지만, 주일성수에 대한 규칙도 없이 주일을 아무렇게나 보내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아도 침체 상태에 있는 교인들의 영적 생활을 악화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성령의 역사로 주일성수의 의무에 대해 깊은 은혜를 받았다고 할지라도, 스스로 구체적인 실천의 규범을 갖지 않는다면 현실적으로 주일을 거룩히 지키기 어렵다. 따라서 스스로 신앙과 양심에 합당하게 주일성수에 관한 개인 규칙들을 만들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다섯째, 영적 변화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무너진 주일성수 뒤에는 실패한 주일예배가 있고 실패한 주일예배 뒤에는 잠든 설교단이 있고, 잠든 설교단은 영적으로 잠든 교회 안에 있다. 우리는 이렇게 방종에 가까울 정도로 느슨해진 주일성수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며 조국 교회에 참된 영적 각성과 거룩한 부흥을 주시도록 기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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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⑤/ 21C 주일성수와 기독교 문화 창조
성경적 안식은 축복·명령, 일과 쉼의 리듬 회복해야
문화창조는 종교를 빼놓고는 논할 수 없다. 이는 문화와 예술이 삶의 원초적 차원인 종교적 영성에 토대를 두고 자라나는 나무요 열매이기 때문이다.
문화는 특히 종교와 예배의식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 사실은 종교(cultus)와 문화의 관계는 그 어원이 같다는 점이 이를 잘 보여준다. 문화와 예술은 삶 너머에 있는 존재의 근원을 향한 예배와 섬김에서 비롯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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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국원 교수 (총신신대원) |
“문화의 원천은 여가(leisure)”라고 주장한 조셉 피이퍼는 여가란 단순한 여유로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종교적인 개념인 안식을 가리키며 그것 없이는 문화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피이퍼의 주장을 확대하자면 여가의 진정한 의미는 종교적인 휴식인 ‘안식’에서 찾을 수 있다. <안식>이라는 책을 쓴 마르바 던은 안식의 의미를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인간의 원죄적 성향을 버리는 것이라고 했다. 안식일의 히브리어 ‘사밧’은 중단이라는 의미이다. 삶
의 안정을 추구하는 생산과 성취, 노력의 중지를 뜻한다. 참된 안식을 누리기 위해서는 잠에 떨어진 것처럼 모든 짐을 내려놓는 것이 필요하다. 진정한 휴식을 위해서는 영혼의 안식을 전제해야 하기 때문이다. 삶을 틀어쥐고 애쓰는 태도를 버리지 않는 한 진정한 휴식은 불가능하다.
주일에는 관계, 특히 하나님과의 관계를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 안식은 일로부터 도피가 아니라 그것을 직면할 수 있는 은혜를 받는 기회이다. 하나님의 임재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염려하지 않는 최선의 방법은 감사하는 것이다. 어려움과 염려, 환란 속에서도 하나님께 감사드릴 수 있는 것이 안식이다.
이 시대의 문제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은 시간을 오락에 사용한다는 점이다. 일과 여가, 현실과 환상은 거대한 산업이 되어버렸다. 현시대 문화는 연예산업이 되어버렸다. 그것은 환상도 여가도 아니고 또 하나의 일이 되고 있다. 거기에는 자유와 환상이 말살되고 상업적 고려만이 남는다. 이는 장난감의 상업화가 가져오는 빈곤함과도 같다. 단순한 놀이와 연예가 되어버린 현시대 문화는 이런 제동장치와 비전의 역할을 감당할 수 없다.
진정한 안식은 창조주께서 정하신 일과 쉼의 리듬을 회복하는 것이다. 쉬지 않고 일해서 돈을 많이 벌어 경제적 여유를 갖게 되면 노동자 신분을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쉬고 잘 때에도 하나님께서 삶을 붙들고 계심을 인정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성경적 안식은 선택이 아니라 축복이고 명령이며 초대이다.
어거스틴의 말처럼 하나님 외에 다른 것에서 안식을 얻을 수 없다. 안식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되어 있는가에 전적으로 달렸다. 삶을 스스로 통제하려는 욕망을 내려놓고 하나님으로 하나님 되시게 할 때 안식과 평안이 찾아온다. 오락으로 안식을 대신하는 것은 지혜가 아니다.
쉬는 날만 기다리다 튀어 나가 노는 것도 오히려 일과 안식의 리듬을 교란시킨다. 창조질서의 리듬을 따라 일과 쉼 모두에서 평안을 누리는 것이 안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