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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에게 대들다
어느 날 20년 단골손님 메드린이 암이 전신 곳곳에 퍼져 있다면서 아마 오늘이 우리가 볼 수 있는 마지막 날일 것이라며 내게 깊은 허그를 해줬다. 머리 염색, 매니큐어 페티큐어까지 하고 쓸쓸한 미소를 지우며 떠나는 그녀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서서 그녀와 보냈던 애증의 시간들을 떠올려봤다. 그녀는 직원들이 진상, 밥맛으로 리스트에 올려놓았던 손님이었다. 그런 그녀가 2년여 전 내게 자신의 병 치유를 위한 기도를 부탁해 왔다. 그 후 하루 두 번씩 1시간을 그녀를 위해 열심히 기도했는데 그녀를 위해 기도를 멈추어야 하는 일이 생겼다.
2014 년 8월 밤이었다. 4살 반의 첫 손자 아담이 갑자기 머리가 아주 아프다며 잠에서 깨어났다. 아침에 주치의에게 진찰을 받았더니 바이러스에 걸렸다며 두통약을 처방해 주었다. 그러나 며칠 뒤에 더 큰 고통이 왔다. 구급차를 부르고 기다리는 동안에 아담이 조그만 두 손으로 마구 머리를 치며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모습은 지옥의 공포였다.
롱 아일랜드에 있는 유대인 어린이 병원에서 매일 피 뽑기와 각종 검사를 하고도 병명을 알 수 없었다. 결국, 다른 병원에서 초청해 온 의사가 뇌에 물이 차 있으니 뽑으면 괜찮을 거라고 해서 머리에 구멍을 내고 물을 뽑아 치료될 줄 알았지만, 차도가 없어서 다시 뇌 조직 검사를 한 결과 ‘중추신경계 이상’으로 진단이 되었다. 최초에 진단은 기이하게도 일종의 중풍이었다. 뇌에서 스트록을 일으키라는 명령을 신경계에 계속 주어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처음엔 한 쪽 팔이 마비됐고 두 번째 풍에서는 다리 한 쪽, 세 번째는 눈 한 쪽을 뜨지 못했다. 한 번에 오는 것이 아니고 서서히 부분마다 무너뜨리는데 그 모습을 바라보는 마음은 흡사 눈앞에서 자식의 살을 한 점 한 점 도려내는 잔인한 고문을 당하는 심정이었다. 더욱 고통스러웠던 것은 몸을 하나씩 움직일 수 없을 때마다 아담이 “왜 안 돼?” 라고 묻는데 대답을 해줄 수 없었다.
오진을 바탕으로 키모 테라피와 스테로이드 주사를 투여하니까 아이가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했다. 증세는 같았지만, 정확한 원인을 진단하는 것에서는 실패한 셈이다. 아담에게 중풍이 15번이 넘게 오는 4개월 동안 뇌 MRI를 20여 회 찍었던 것은 의사들도 병의 원인을 찾기 위해서 나름대로 필사적인 노력을 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아담의 엄마 아빠는 제 정신이 아니었고 사위는 새로 잡은 직장도 나갈 수가 없게 되었다. 언론과 인터넷에 아담의 소식이 알려져서 많은 이들이 격려를 보내고 염려를 하는 분위기 때문에 당장은 못 자르겠지만, 사람들의 관심이 덜하게 되면 우선순위로 해고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되었다. 그러나 그것을 염려할 상황이 아니었다. 나도 엄마 아빠 대신 손녀딸 에밀리도 돌봐야 하고 직장 일도 꾸려나가야 하고 도무지 어찌할 바를 몰라서 비즈니스를 제대로 할 수가 없었고 더욱이 1년 전에 친구와 함께 열었던 스파도 흔들거리고 모든 것이 뒤죽박죽 되어 정신을 차릴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런 일들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3시간 거리라 자주 갈 수도 없지만 병원에 가서 아담을 보는 일이었다. 안 갈 수도 없고 보고 나면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내가 다니는 베이사이드 천주교 안에서도 수백 명 마리아 봉사단체 단원들이 매일 기도를 하고 나도 순간마다 기도를 하면서 오직 “기적이 일어나겠지. 살려주시겠지.” 하는 마음뿐이었다.
병원을 바꿔도, 더 전문성이 있는 의사가 처방한대로 투약하는데도 전혀 호전되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한 의사가 아담의 발에 생긴 붉은 반점을 주목하고 조직을 떼어서 미국에서는 아직 할 수 없는 검사이기 때문에 직접 독일로 검사를 하러 갔다. 독일에서의 진단 결과 환자로 밝혀진 숫자가 전 세계에 150명밖에 안 되는 Degos 라는 유전적 희소병으로 판명되고 현재로써는 치료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신약 개발을 위해서는 돈이 많이 들기 때문에 수요가 많아져야만 정부나 단체의 기금으로 개발하는 것인데 150명을 위해서 서둘러 개발을 할 수 없으므로 아직 약이 없고 Degos 전문의도 세계에 단 3명뿐이었다. 그 3명이 네트워크로 함께 아담의 병세를 지켜보며 치료방법을 모색하는데 밝혀진 바로는 Degos는 발병 부위에 따라 생존율이 다른데 Adam은 하필이면 뇌에서 발생했기 때문에 생존율이 다른 환자보다 짧고 통증이 더 극심하다고 했다. 약을 개발 중인데 2년 뒤에나 나온다니 그때까지 아담이 버틸 수가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15분 마다 아담은 고통으로 몸부림치며 울고 불며 아우성을 치다가도 모르핀을 맞고 고통이 가라앉으면 엄마에게 “마미, 미안해.”라고 해서 더욱 가슴을 아프게 했다. 죽음이 뭔지 알 리가 없는 아담이 자기에게 나쁜 병이 있다는 걸 느꼈는지 그렇게 안 먹겠다고 버티던 7가지나 되는 약을 냉큼냉큼 받아먹기 시작했다. 또 나에게 오레오 쿠키와 지퍼 백을 사달라고 해서 사 왔더니 움직일 수 있는 한 손으로 쿠키 3개씩을 백에 넣어 의사와 간호사가 오면 나눠주기 시작했는데 그 모습이 내게는 "나를 살려 주세요." 하는 애원으로 보였다.
의사들이 그 동안 아담에게 주었던 치료약이라는 게 결국은 "이것, 저것"이었던 것이다. 아니면 말고 식의 치료 끝에 아담은 코마에 들어갔지만, 그 코마 속에서도 통증은 계속된다고 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지옥의 형벌이 천사 같은 어린 아담에게 내려졌는지 나는 신에게 항의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 번은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운전하면서 “당신이 존재한다면 이제 겨우 4살 반밖에 안 된 아이가 통증으로 몸부림치는 것쯤은 해결해주셔야 하지 않느냐? 그것 하나 들어 주시지 못하는 하느님이라면 왜 우리가 당신을 믿어야 하느냐? “고 소리소리 치며 대들었다.
발병 4개월 만에 더는 가망 없는 아이에게 고통만 주는 산소 호흡기를 떼기로 결정한 날 우리는 한 사람씩 아담과 인사를 하기로 했다. 내 차례가 되어 아담이 좋아했던 한국 노래 ‘나비야’를 부르니 말을 못하는 아담의 눈에서 눈물이 보였다. 산소 호흡기를 떼고도 24시간 동안 딸 내외는 아담을 안고 잠도 안자고 먹지도 않고 긴 대화를 나누었다. 평소 좋아하던 음악을 틀어주고 딸이 “아담아. 이제 떠나렴.” 했더니 숨을 멈췄다고 했다
아담이 죽은 후 병원 측에서 희귀병의 원인과 치료제 개발에 도움이 된다고 어렵게 부검을 부탁해 왔다. 세상에 4살 먹은 아이의 몸에 칼을 대기를 바랄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처음에는 물론 거절했지만 ‘그 방법도 아담의 짧은 삶이 세상에 빛을 남기는 것이 아니겠는가?’“하는 생각이 들어서 결국 승낙을 했다. 부검결과는 살았다면 극한의 통증을 평생 안고 살아야 했을 것이고 장애로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통증만 없었다면 장애가 있었던들 어떤가?
아담의 동생 에밀리 앞에서 슬픈 표정을 하지 말자고 해서 마음대로 울지도 못하고 장례식을 치렀다. 아담을 사랑했던 온 동네 사람들이 슬퍼했고 데일리 뉴스와 로컬 뉴스도 아담의 기사를 발병 때부터 마지막까지 비중 있게 다뤘다. 아담의 장례식이 마치 유명한 사회인사의 장례식처럼 많은 사람이 참석해서 계속해서 단상에 올라가 나도 모르는 아담과의 아름다운 추억들을 말하는 것에 아픔인지 슬픔인지 모를 혼돈 속에서도 놀라웠다. 주치의와 담당 의사 두 분이 필라델피아에서 오셨고 간호사들, 유치원 원장. 그 외의 수많은 사람이 각자 기억나는 에피소드를 얘기 했다. 특별히 유치원장은 아담이 유치원에서 누구에게나 친절해서 여자 친구가 많았다고 유머를 해서 슬픔 중에도 웃게 하였다. 장례식 내내 나는 “신문과 인터넷에서 화제를 되기는 했지만, 어린이 희귀병이 하나 둘인가? 수많은 사람이 고작 4년 반 인생을 살았던 아담을 위해 이렇게 먼 길까지 올 수 있을까? 무엇이 사람들을 이렇게 움직이게 한 것일까?” 하는 생각을 했다.
아담은 친화력이 뛰어난 아이였다. 날씨가 좋은 날은 식구 모두 함께 아담과 에밀리가 타는 세발자전거를 따라서 동네를 한 바퀴 도는데 자전거를 타는 동안에도 동네 사람을 보면 반갑게 인사를 했다. 그래서 우리 집 앞을 지나가는 자동차는 아담이 보이면 속도를 줄이고 손을 흔들어 주곤 했다. 아담이 좋아하는 던킨 도넛을 살 때, 드라이브 웨이에서 아담이 종업원과 눈을 맞추고 인사를 하느라고 시간을 끌어서 기다리는 뒷 차에 신경이 쓰여서 항상 안절부절 해야 했다. 그러나 아담은 이미 인사성 밝은 아이로 소문이 나서 직원들은 손을 흔들어 주고 몇 마디 인사말도 나누곤 했다. 일요일에는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서 베이글을 사러 가는데 아담은 사위 에븐의 어깨에 올라 앉아 항상 긴 줄을 서서 기다리는 동안에도 아담은 마치 선거에 나온 후보자처럼 인사를 했다. 덕분에 덤으로 얻은 미니 베이글을 들고 오는 아담의 얼굴은 항상 기쁨에 차 있었다.
아담을 아름다운 동산에 묻고 와서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추울 터인데, 무서울 터인데, 외로울 터인데…….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아서 가슴이 아렸다. 집에 오니 옆 집에 사는 로즈가 집안을 말끔히 치우고 음식도 준비 해놓고 유대인의 풍습인 망자에 대한 예의로 집 안에 있는 모든 거울은 천으로 씌워놓았다. 아담은 그리스인 할아버지, 한국인 할머니, 유대인 아빠의 혈통을 이어받았지만 법적으로 유대인이었다.
딸과 사위가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는 동안 로즈와 딸, 사위의 친구, 동네 사람들의 헌신적인 도움을 받아서 나는 손녀 에밀리를 돌보며 직장 일을 할 수 있었다. 아담의 투병을 통하여 30년 넘는 미국생활에서 보지 못한 이웃들의 따듯한 배려를 느끼게 되었고. 유대인 사회에 대하여 새로운 사실도 많이 알게 되었다. 아담의 일이 알려지자 유대인 사회에서 관심이 집중되어 에본의 고등학교 친구들 중에 평소에 연락이 없던 친구들까지도 자기들의 사업이나 직장 일을 제쳐놓고 찾아와서 운전도 해주고 음식도 만들어오곤 했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서 선물과 음식이 매일 집으로 배달되어 왔다. 선물은 아담의 방을 가득 채웠고 음식은 두 개의 냉장고에 넣어도 넘쳐서 가게에 가져와 직원들과 함께 나눠 먹어야 했다. 장례 후 7일 동안 매일 사람들이 음식을 가지고 와서 유족들을 위로해 주는 ‘시바’라는 기간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처음에 나는 한국식으로 그 많은 손님을 어떻게 대접해야 하나 하고 고민했었는데 손님들이 음식에서부터 접시, 컵 등 모든 필요한 것들을 가지고 와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함께 해 주고 청소까지 깨끗이 해주고 갔다. 하다못해 서빙까지 해주니 한국에서 어릴 적 할아버지 초상 때, 상복 입은 엄니와 큰 엄니가 손님 식사 대접 하랴 곡 하랴 피곤에 젖어 있던 모습이 떠오르면서 한국 여성들의 삶이 얼마나 힘들었겠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심신이 피로했던 우리에게 큰 위안이 되었던 7일이 지났다. 우리는 어린 에밀리 앞에서 우는 모습을 보여 주지 말자고 약속을 했지만 매일 내 방문을 힘차게 발로 차며 들어와 안기던 아담이 없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소리 죽여 통곡하는 밤을 보냈다.
2014년 12월 28일에 아담이 떠났지만 어린이와 부모들, 할머니들이 3월 말까지 스파게티, 중국음식, 샌드위치, 자이로 등등 사랑과 정성이 담긴 음식을 가져왔다. 그 뿐이 아니고 지금도 아담이 다니던 유치원과 어린이 헬스클럽에서는 우리가 사양을 했는데도 아담 동생 에밀리의 모든 비용을 무료로 해주고 있다.
‘Sweet Adam's fight against degos disease.’에 $43,986이 모금이 되었다. 아담이 하늘나라로 이민 간지 11개월 만에 후원 금액 말고 사위와 딸 친구들이 모금해서 타운의 허락을 받아 아담의 이름으로 아담이 자주 놀러 가던 공원에 벤치를 설치하고 기념식을 가졌다. 아담 친구들이 부모와 함께 풍선을 가지고 와서 하늘에 있는 사람에게 보낸다는 행사를 했는데 아담의 친구들은 아담이 혼자서 그 많은 풍선을 가질 수 있어서 기뻐할 것이라고 믿고들 있었다. 또 유대인 회당에서는 아담이 떠나고 난 다음 1년 6개월 동안에 두 번이나 유대인 커뮤니티 안에서 silence auction, door prizes를 해서 아담처럼 어린 나이에 희귀병으로 죽은 아이들을 위해 기금을 모아 수입을 degos의 신약개발을 하는 연구기관에 보냈다. 그 날은 모든 어린이들이 코슘 복장을 하고 참석을 해서 슬픔 보다는 즐거운 분위기를 연출했다.
한 가지 슬프지만 재미있는 이벤트는 아담 생일날 아담 친구들이 ‘저녁 식사 전 디저트 먹기’ 행사를 하는 것이었다. 생전에 생일날만은 아담이 좋아하는 디저트를 저녁 식사 전에 먹도록 허락했던 것을 기념해서 아담의 생일날 모든 아담의 친구들이 저녁 식사 전에 디저트 먹는 인증 샷을 페북에 올리도록 한 것이다. 아담이 떠난 후 두 번 째 생일 때는 새로운 어린이들이 더 많이 참가해 주어서 우리에게 큰 기쁨을 주었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에 꺼지는 슬픔을 당했지만 이런 아름다운 풍습과 사람들 때문에 큰 위안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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