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불』, 최명희, 한길사
서사의 허와 실
-최명희의 『혼불』에서 보이는
소설은 구체적인 이야기나 사건들을 통해 주제를 드러내는 양식이다. 소설은 추상적인 명제나 관념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기 보다 삶에서 일어날 수 있는 구체적인 사건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표현한다. 이때 이야기나 사건이 풍부할수록 관념은 구체적이고 사실적이고 진실성을 갖는다. 또한 이야기나 사건들이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을 때 주제는 더욱 풍부하고 뚜렷하게 부각됨은 물론이다. 이야기나 사건들이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게 만드는 것을 구성(plot)이라 한다. 구성은 이야기나 사건들은 통합하고 어떠한 주제로 나아가는 기율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구성이 너무 지나치게 방대하나 다단복잡하면 독자가 소설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경우를 초래할 수도 있다. 작가가 독자에게 주제를 강요하거나 독자로 하여금 소설이 작가의 작의적 조작이라는 생각까지를 갖게 하는 결과가 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최명희의 『혼불』은 풍부한 이야기를 담은 소설이지만 사건이나 구성이 빈약해서 그 주제가 모호하다는 아쉬움을 남긴다.
작가가 17년 동안 오로지 이 작품에만 몰두했다는 호사취미적인 말을 듣지 않더라도, 이 작품을 읽으면서 우리는 작가가 이 작품에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가를 알 수 있다. 이 작품에는 우리 민족의 풍속과 야사, 전설, 야담 그리고 불교에 관한 담론들이 풍부하게 담겨 있다. 작가는 집요하리 만치 자세하게 그것들을 소개하고 있다. 혼례나 제례 그리고 대보름의 풍속 등을 마치 눈에 보이는 듯 생생하게 재현하고 양반의 삶과 상민의 삶의 모습을 상세하게 그린다. 내방가사나 아녀자들의 대화 속에는 전근대적 사회에서의 여인네들의 생활과 정신세계가 섬세하게 드러난다. 이것은 이 소설의 가장 지대한 성과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성취는 무엇보다도 문체 미학에서 오는 위업이다.
과거 우리 민족의 삶의 모습을 재생하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것이다. 만약 풍속사나 여성 생활사를 읽는다면 우리는 과거 우리 민족의 풍속이나 여성의 삶의 모습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생생하게 느끼기에는 부족하다. 여기에 이 소설이 가지는 의미가 있다. 이 소설은 과거 우리 민족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느끼게 해준다. 이 소설의 생동감은 위에서 언급했듯이 이 소설의 문체의 성취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상황에 맞는 정확한 어휘의 사용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면서 사학의 그것보다 깊은 맛이 나도록 형상화된 것이다.
매안 이씨 종친의 정신세계를 이루는 서릿발같은 비장함이나 근엄함이 드러나는가 하면, 상민이나 노비들의 질박한 삶이나 억눌린 정신, 그리고 지식인의 시대에 대한 회의와 사회 개혁에 대한 의지 등이 그에 맞는 적절한 어휘를 만나 생생한 상황을 만든다. 풍부한 우리 속담과 더불어 무엇보다도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전라도 사투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 민족의 삶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근거가 되는 이러한 풍부한 이야기들은 대체로 소설의 전체 구성과 긴밀한 관계를 이루고 있지는 못하다. 또한 이 소설은 17년 동안 쓰여진 전10권 분량의 소설이라는 거대한 물리적 축적에도 불구하고 사건은 너무 단순하다. 매안 이씨 가문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다루고 있으나 실제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강모와 강실이가 상피붙은 사건이다. 이와 관련해서 벌어지는 춘복이의 강실이 강탈과 용구네의 춘복에 대한 집요한 소유욕 그리고 강모와 오유끼의 만남이라는 주변적 사건뿐이다. 또한 중요한 내용을 이루고 있으며 『혼불』의 요체가 되는 청암 부인에 대한 이야기도 그저 삶의 내력을 설명하는 정도에 머문다. 그리고 여기에 한가지를 추가한다면 강태와 강호 그리고 심진학 선생에 대한 이야기가 더해질 수 있다.
이와 같은 사건들조차 너무 단순하다. 소설 전체를 두고 가장 중요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강모의 경우만 보더라도 그렇다. 강모는 가문의 종손이라는 상황을 갑갑하게 생각한다. 강실이와의 사랑은 어쩌면 그에 대한 극단적인 반발의 소신인지도 모른다. 그는 소설의 커다란 중심 사건을 이끌 듯한데 종국에는 그저 중국 봉천으로 도망쳐 독립운동을 시작한다는 것을 암시처럼 비칠 뿐이다. 강태의 경우도 공산주의 지도자의 소양을 쌓는다는 말을 스스로 할 뿐 별다른 사건의 전개가 없다. 강실에 대한 사건이 좀 많다 할 수 있으나 이 또한 작가의 전반적 설명이 지나치게 개입하면서 강모와 못 다 이룬 사랑의 설움을 안고, 춘복의 자식을 밴 상태로 비접을 간다는 것뿐이다. 혹자는 이렇게 빈약한 사건과 구성을 새로운 형식으로 보기도 하는 것 같다. 사건 중심이 아니라 이야기가 중심이 되는 소설이라는 틀에서 말이다. 하지만 이야기 중심이라는 말은 결국 변죽만 울리고 있는 것과 같다.
이 소설은 전체가 근대 이전의 삶의 모습을 재현하고 그것이 붕괴하려는 상태의 인물들의 의식을 추적하는데 집중되고 있는 듯하다. 작가는 이것을 모든 인물의 입장에 서서 그린다. 소설의 중심이 청암 부인과 매안 이씨 가문에 있으나 상민이나 종들의 행위나 생각 또는 강태 강호 심진학 선생과 같은 지식인들의 의식이 모두 그들의 입장에서 서술되는 부분이 그것이다. 작가는 모든 인물들의 입장을 동시에 고려하며 작품에서 그들의 의지를 배분하며 실현한다. 모든 인물들은 나름대로 자신의 의식이나 행동에 대한 정당성을 가진 것이다. 가령 일종의 악역이라 할 수 있는 용구네의 입장도 작품을 읽으면서 우리는 허구적 소산 측면에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어쩌면 이 소설은 초반부에 나타나는 청암 부인의 삶에 대한 이야기로 어떤 완결의 의미를 가진다. 다른 이야기들은 이에 대한 부연인지도 모른다. 강모의 봉천행이나 강태의 혁명 지도자로서의 수업은 모두 전근대적인 우리 사회에 대한 반발인 동시에 청암 부인에 대한 반발이다. 거기에는 역설적으로 강한 애착이 담겨 있기도 하다. 또한 강실이를 통해 양반의 자식을 얻고자 하는 춘복이의 행위나 아들 봉출이를 언젠가 매안 이씨의 가문의 자식으로 만들겠다는 우례의 의지도 이러한 테두리에서 의미를 갖는다. 그래서 이 소설의 의미상의 뿌리는 역시 청암 부인의 삶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 삶의 뿌리이기도 하다.
소설의 내용은 크게 전근대 양반 사회의 전통을 굳굳이 지키려는 인물들과 그에 반발하는 주축의 정신적 길항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인물이 모두 전근대적 양반 뻣英맛? 의식에 젖어 있다. 청암 부인과 그 주변의 인물들 뿐 아니라 청암 부인의 은덕을 입은 대다수 상민도 이에 적극 동조한다. 이에 반발하는 인물인 듯한 춘복이 조차도 사실은 양반 자식을 낳고자 함으로 도리어 그의 의식이 이를 동경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에 적극 반발하고 있는 인물은 청암 부인의 손자인 강모와 강태다. 특히 매안 이씨의 종손인 강모의 강실과의 사랑은 양반 사회에 대한 반발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사건이다. 이것은 양반 윤리로서 도저히 인정될 수 없는 일종의 근친 상간이다. 돌아오고 싶어도 돌아올 수 없는 어떤 선을 넘게 되는 것이다.
이 소설이 전근대적 삶의 모습을 재현하는데 집중되고 있는 반면 당대의 역사적 상황에 깊이 뿌리내리지 못한 것 같다. 이 소설의 역사적 배경이 되고 있는 것은 1930년대 후반에서 1940년대 초로 추측될 수 있으나 그 시대의 모습을 깊이 느끼기에는 훨씬 이전 시대의 가치와 삶을 그리고 있다. 창씨개명에 관한 문제나 만주 이민 권장에 관한 몇몇 사실을 제외하고는 일제에 관한 이야기는 없다. 이러한 면에서 볼 때 작가는 일제의 침략보다는 그와 연관되는 것으로 백제의 역사에 주목하는데, 이는 작가의 고향이기도한 전주에 대한 감회와 만나 격분의 어조로 드러난다. 이는 어찌 보면 편협한 지역주의로까지 나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우려조차 들 정도이다.
이 소설이 주는 매력이나 가치는 역시 다양한 이야기들이다. 이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삶과 연결되는 질박하면서도 살아있는 역동적 이미지 덕분이다. 여기에 강한 힘이 되는 것은 이 작품의 문체다. 이러한 성취만으로도 이 소설은 충분히 훌륭한 소설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사건이나 구성의 빈약성은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다. 이는 이 작품을 폄훼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소설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서사적 힘이 부족하지 않은가 하는 아쉬움이 크다는 것이다.
※최명희
1947 전주 출생
1972 전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1972∼1974 전주기전여자고등학교 국어교사 재직
1974∼1981 서울보성여자고등학교 국어교사 재직
1980 중앙일보 신춘문예 소설 부문, 단편「쓰러지는 빛」 당선
1981 동아일보 창간 60주년 기념 2천만원 고료 장편소설 공모에『혼불』(제1부) 당선
1988년 9월 ∼1995년 10월 월간 『신동아』에 『혼불』 제2부 연재 시작. 만 7년 2개월간 제3부에서 제5부까지 집필, 국내 월간지 사상 최장기 연재 기록
1990『혼불』 제1∼2부(전4권) 출간(도서출판 한길사 刊)
1996『혼불』 제1∼5부(전10권) 출간(도서출판 한길사 刊)
1997 한길사 제정 제11회 단재상(丹齋賞) 문학부문 수상
1997 전북대학교 명예문학박사학위 받음
1997 제16회 세종문화상(문화부 주관) 수상
1998 제15회 여성동아대상(동아일보사 주최) 수상
1998 호암상(호암재단) 예술부문 수상
1998 12월 11일 금요일 영면
1999 교보문고가 각 분야 전문가 100명에게 조사 의뢰, ‘90년대 최고의 책’으로 선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