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부터 6개월이 지나 1923년 신학기가 되어도 양주삼 총리사로부터 입학통지서가 오지 않자, 호빈은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어서 무작정 서울로 떠났다. 교회에서 마련해준 여비만 들고 서울에 왔으나 양 총리사로부터 들은 대답은 미국에서 장학금이 아직 오지 않았으므로 다음해 신학기에 입학토록 하라는 것이었다. 그는 용정으로 다시 돌아갈 수도 없고 더군다나 고향으로 돌아가서 편히 세월을 보낼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기에 현재의 감리교신학대학교 전신(前身)인 협성신학교 학장실로 찾아가서 당시 학장이던 왕영덕 선교사에게 딱한 사정을 호소했다. 그러나 이미 학기가 시작된 지 두 달이나 지난 데다 빈자리도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하고 말았다. 그래도 물러서지 않고 계속 학장실과 교무실을 번갈아 드나들며 종일 주저앉아서 가능하다면 청강생으로라도 받아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는 사흘이나 떼를 쓰다시피하여 허락은 받았으나, 교실에 앉을 책상이 없어 뒷자리에 서서 강의를 듣기로 했으며 학기말에 시험을 쳐서 합격하면 정식입학 허가를 받겠다는 조건으로 하루에 4시간만 자면서 공부를 했다. 그는 "그렇게 열심히 공부해보기는 내 일생 그 때 밖에 없었다"라며 그 당시의 일을 늘 제자들에게 들려 주었다. 다음 학기부터는 미국에서 장학금이 왔고 시험 성적도 좋아서 정식으로 입학 허가를 받았다. 신학도로서 어려운 학창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그의 학창생활은 그렇게 순탄치 않았다. 등록금은 미국에서 오는 장학금으로 충당할 수 있었으나, 숙식비와 교재비 등은 스스로 마련해야 했다. 그는 기숙사에 들어갈 수 있는 형편도 안되어 전전긍긍하고 있었을 때, 광복군을 따라 시베리아로 가는 도중에 헤어졌던 이환신을 만났다. 이환신이 서울에서 피어선 성경학교(현 평택대학교 전신)에 다니고 있었던 것을 알고 그의 자취방에서 함께 기숙하게 되었다. 이런 인연으로 이환신도 협성신학교로 옮기고 이용도와 함께 친형제처럼 학창시절을 보내게 된다. 호빈은 학업에 열중하는 것은 물론 학교 축구팀에 들어가 열심히 운동도 했고 배구와 정구 등에도 뛰어난 기량을 발휘하면서 학우들과의 교우 관계를 넓혀 갔다.
우원(이호빈의 雅號)은 신학교에 다니면서도 평양에 두고 온 가족들을 돌보기 위해 1925년 봄 서울로 이사를 오게 하였다. 인왕산 밑에 방 한칸 집을 마련하고 새로운 살림을 시작하였으나, 가족의 고생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이 때 둘째 아들 준영이 1921년에 태어났고, 첫째 딸 화자와 아들 준일은 소학교 학생이었으며, 어머니와 아내는 온갖 궂은 일을 해가며 어려운 살림을 꾸려나갔다. 그러나 일년 이상 그런 서울 생활을 더 버틸 수가 없었고 졸업을 한 학기 남긴 1926년 북간도 지방에 서리 전도사로 파송 되어 갔다. 그는 감리교 선교회의 배려로 용정 변두리에 단칸 셋방을 얻어 가족들을 이사시키고 약 5시간 거리에 있는 경신향 구사평 교회를 맡아 부임하였다. 경신향은 남쪽은 함경북도 경흥읍을 마주보고, 동쪽은 러시아 국경에 인접한 삼각지대이다.
경신향 구사평에는 많은 늪과 호수가 산재해 있어서 논과 밭을 고루 경작하던 곳이었다. 그리고 구사평에 이르는 유일한 통로인 훈춘은 러시아, 한국, 중국의 삼국이 접해 있는 국경지대로서 교역이 한창이었고 군사적, 지리적 요충지로 개발되고 있었다. 이러한 지정학적 조건으로 이미 일본 영사관이 있어서 항일 투쟁이 극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훈춘에는 러시아와 중국을 잇는 철도가 왕래하고 있으며, 조만간 양국 간의 고속도로도 개통될 예정이어서 중국에서 신천 지역 개발 이후 가장 급속도로 개발되고 있는 도시이다.
우원이 파송된 구사평교회는 반경 5리, 혹은 30리 거리로 떨어져 있는 연당촌, 경신동, 옥천동, 금당촌 등 다섯 지역과 닿아 있었다. 그는 다섯 지역을 번갈아 가며 예배를 인도하였으나, 주일예배는 한 곳에서 드릴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 외의 네 곳은 그가 없으면 예배를 드리지 못하였다. 그는 주일이 되면 주일예배를 위해 다섯 곳을 걸어서 순회하며 인도해야 했고, 수요일 예배 역시 일주일 중에 하루를 택하여 인도하느라 한 주간을 예배로 보내는 셈이었다.
그 당시 이 지역 주민들은 러시아와 한국 국경 지역인 웅기, 선봉, 웅향(雄向), 아오지(阿吾地), 은성(隱城), 풍인(豊仁) 등지를 넘나드는 유랑민과 소작빈농들로 초막 에 사는 매우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교육 수준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낙후되어 있었으며 인근 지역을 휩쓸고 다녔던 마적대와 공산당에게 시달리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지난 해의 가뭄으로 겨우 연명을 하는 매우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용정에 있는 식구들은 선교부에서 지급하는 생활비만으로는 어머니, 부인과 세 자녀의 생활을 꾸리기가 어려워 어머니와 부인이 국수집 메밀을 멧돌로 갈아주고 받은 막가루를 품삯으로 겨우 살아가는 처지였다. 이런 힘겨운 생활 속에서 우원은 자신의 몸이 점점 쇠약해지고 정신적 의욕도 상실됨을 느꼈다.
그 곳에 부임한 지 10개월이 지난 어느날 우원은 아침에 세수를 하다가 질그릇 세수통을 깨면서 거기에 머리를 처박고 기절해 쓰러진 일이 있었다. 자신이 선택한 목회자의 길을 감당하지 못하는 자신을 한탄하면서 고민 끝에 모든 해결을 하나님께 맡기고 방문을 걸어 잠근 후 해답을 얻기까지 문을 열지 않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문 앞에 "이 문을 절대로 열지 말라"라는 글을 써 붙이고 무기한 금식 기도에 들어갔다. 나흘이 지나 닷새 째 되는 금요일 새벽 날이 채 밝기도 전에 "네가 무슨 염치로 불만, 불평, 원망을 가지고 있느냐? 지금까지 먹고 마시며 살아가고 있는 것만도 감사한 일이거늘 이 몰지각한 놈아"라는 응답이 들려왔다.
네 과거를 스스로 살펴보아라. 자식으로 부모에게, 남편으로 아내에게, 아비로서 자녀에게, 이웃과 친구에게, 국민으로 나라에, 신자로서 하나님께 네 할 책임을 모두 감당했느냐? 가장 못된 자식, 못된 남편, 못된 아비, 못된 이웃, 못된 친구, 불충한 국민, 불 신앙의 죄인임을 통회하는 것이 마땅할진대 아직도 정신을 못차리고 불만, 불평, 원망으로 지옥을 꾸미고 있느냐? 자신을 몰라도 분수가 있지, 너 같은 무지몽매한 놈을 선택하여 지금까지 살려두고 거룩한 사명까지 맡겼거늘 무슨 불평불만이 있단 말이냐? 조그만 피곤, 작은 가난, 잠시의 고통이 있다고 종이 순종을 버리고 딴 길을 돌아보고 방황하느냐? 내가 너를 어찌하면 좋겠느냐?
이와 같은 음성과 함께 "저 십자가를 쳐다보아라"라는 소리에 우원은 동편 담 벽에 나타난 십자가가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십자가를 바라보자마자 "주여, 이 반역의 죄인을 용서하옵소서"라고 외치며 한없이 울기 시작했다. 방문을 잠근 채 아무런 인기척도 없는 그 방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던 교인들은 고생만 하고 있는 젊은 전도사가 죽지나 않았는지 걱정하였다. 우원은 하나님께 매달려 용서를 구하고 있는 중에 "너도 십자가를 질 수 있느냐?"하는 두번째의 떨리는 음성을 들었다. 그는 그때 뭐라고 기도했는지 자세히 기억할 수는 없었으나, 다만 십자가가 나타난 벽을 쓰다듬으며 울기만 했을 뿐이다. 그때 세번째 부드러운 음성이 들렸다. "내가 너와 함께 있다. 아무런 걱정도 말고 근심할 것도 없느니라. 내가 너와 함께 하니 안심하라"이 음성이 곧 우원의 일생을 붙잡아 준 생명이요, 길이었다. 여기서 우원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승리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고 그의 생활에 은총과 감사와 기쁨의 찬송이 넘치는 새로운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다. (허 도, "끝날의 징조와 사는 길" 1992. 7. 30. pp. 44-49)
새로운 힘과 자신감을 가지고 목회에 전념하게 된 우원의 영향으로 구사평교회와 교인들은 재도약과 부흥의 감격 속에서 성장하였다. 그는 농토가 없이 공산당과 마적들에게 시달리고 있었던 가난한 주민들을 위해 함경북도 웅기 지역을 중심으로 농토에다 농장을 마련하여 그들을 정착시키는 일을 추진하였다. 그 후 구사평에 초등학교를 세우고 조화철, 박계주, 박승걸, 김형배 등을 끌어들여 무보수로 가르치는 일을 맡기기도 하였다. 또한 목회 생활 초기부터 우원은 ① 미운 교인을 갖지 말라. ② 돈에 간섭치 말라. ③ 설교 부탁은 사양하지 말라는 목회 계획을 정해놓고 몸 전체를 바치는 생활을 하였다. 또한 그는 ' ① 싸우지 않게 (항상 지고 사는 사람으로) ② 빼앗음이 없게 (모두다 주고 사는 사람으로) ③ 믿고 살게 (원수라도 믿고 사는 사람으로) 하소서, 오직 주만이 나와 함께 하실 때 모든 것에 지고 이기며, 모든 것을 잃고도 얻는 생활이 되며 원수도 주님 품에 안길 것을 믿습니다' 라고 기도하며 살았다.
1928년 삼촌인 이원붕(李元鵬) 일가를 평양에서 경신향으로 이사오게 하여 농장을 관리하며 난민 정착사업을 주도하게 하였다.
이때에 갑자기 우원이 공산당에 납치되어 러시아 국경으로 넘어간 사건이 일어났다. 그가 회심하기 전 독립운동을 함께 하던 사람들 중 사회주의 운동에 가담했던 몇 사람이 구사평에서 목회활동을 하고 있던 우원을 배신자라 하여 끌고 간 것이다. 그들은 뚜렷한 죄목도 없이 인민의 적이라는 이유로 우원에게 사형판결을 내렸고 우원은 사형이 집행될 날짜를 기다리게 되었다. 그동안 교회에서는 우원이 죽은 것으로 알고 추도예배까지 드렸으며 사형집행 전날밤 그는 밤새도록 길 잃은 양들처럼 방황하고 있는 가난한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그런데 이튿날 새벽 인기척이 없어 문틈으로 내다보니 모두들 철수했는지 아무도 없었다. 그는 결박당한 채 문을 부수고 밖으로 뛰어 나와 정신 없이 달렸다. 또 한번 그의 생애에서 생과 사의 기로를 경험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