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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논단
베트남전쟁과 한국군
한국군사학회 회장 박경석
위대한 선택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현재의 평가는 대개 두 갈래로 요약된다. 첫째는 긍정적인 평가다. 가난을 물리치고 한강의 기적을 성취시킨 업적을 찬양한다. 그의 남로당 전력이나 5.16 군사 쿠데타에도 불구하고 역대 가장 위대한 대통령으로 추앙한다.
두 번째는 부정적인 평가다. 그의 원죄에 더하여 3선 개헌과 유신 헌법 등으로 영구집권을 꾀한 독재자로 매도한다.
평가의 두 갈래는 노년층과 젊은 층으로 분류되고 지금의 야당세력과 여당세력으로도 나뉜다.
양쪽 주장이 모두 일리가 있다는데서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그러나 두 갈래 모두 합의점이 있으니 그것은 곧 대한민국의 경제발전을 이룩한 원동력으로서의 공적이다. 심지어 북한의 김정일까지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업적 평가를 긍정하고 있다.
1960년대 초기의 우리나라는 지금 사람들에게는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가난하였다. 근래 우리나라에 노동자를 보내어 한국인이 기피하는 업종에 종사케 해 그 크지 않은 임금으로 가난을 극복하고 있는 나라들도 그 당시에는 우리보다 더 잘사는 나라였다. 가령 당시 필리핀은 우리나라 보다 GNP가 약 3배나 되었다.그러나 지금은 거꾸로 우리가 무려 열 배 앞섰다.
박정희, 그는 분명 한국인의 가난을 물리치게 한 원천적 공적을 자랑할 만한 지도자임이 틀림이 없다. 그렇다면, 그는 경제발전의 여러 메커니즘 가운데 어떤 선택을 하였는가를 살필 필요가 있다.
미국의 원조를 통한 방법, 한일협정으로 얻어낸 8억 달러의 배상금 등이 떠오를 것이다. 그러나 가장 큰 경제발전의 계기가 된 것에 대해서는 국민들이 간과하고 있다.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는 뜻이다.
가난을 물리치게 한 원천적 동기는 베트남전에 전투병을 파견한데서 기인한다고 필자는 굳게 믿고 있다.
1965년 1월 6일. 참모들로부터 베트남 전투부대 파병문제에 대한 보고를 받은 박 대통령은 그 보고서에 직접 “파견은 불가피하나 충분한 대가를 받도록 할 것”이라고 썼다.
야당과 일부 국민의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대통령의 의지는 확고했다. 한국군 전투부대 파병으로 얻어지는 국익이 엄청나다는 것을 이미 계산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국군의 여론은 거의 일치되다시피 전투부대 파병을 찬성했다. 국군 수뇌부의 생각의 초점은 국군 현대화의 계기에 두고 있었고 직업군인들은 전투경험의 축적에 두고 있었다.
박대통령은 야당과 일부 국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군 자체가 적극 찬성하고 있음을 확인하고는 전투병 파병을 최종 선택했다.
정부는 박대통령의 의도에 따라 미국과의 협상을 통해 파병의 대가를 얻어내는데 주력하였다. 1966년 3월 정부는 미국과 줄다리기 끝에 -전쟁물자 및 용역의 한국제공 -한국군 장비 현대화 -차관제공 등 미국의 한국에 대한 경제, 군사적 지원계획이 포함된 ‘브라운 각서’를 받아냈다.
전투부대 편성과 훈련
전투부대 파병이 결정되면서 파병부대 지정과 편성 그리고 훈련 등 여러 문제가 대두하였다. 국방부의 지침은 정예부대의 선정과 희망자에 의한 우수 자원의 선발이었다.
여러 과정을 통하여 육군본부는 강원도 홍천에 주둔하고 있는 수도사단을, 해병대사령부는 포항에 주둔하고 있는 해병 제2연대를 지정, 건의하였다.
수도사단 및 해병대 공히, 6.25전쟁에서 용맹을 떨친 전통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국방부는 그대로 승인하였다. 바로 맹호사단과 청룡여단이 결정되면서 초대 주월 한국군사령관으로 채명신 장군을 임명하고 맹호사단장을 겸직하게 하였다.
두 부대 모두 재편성에 들어갔다. 우수자원과 희망자를 선발하고 보니 두 부대의 적격자는 20% 수준에 불과했으므로 전군으로 선발 범위가 확대되었다.
필자는 당시 진해 육군대학에서 대부대학을 강의하고 있을 때였다. 육군본부에서 맹호사단 대대장 요원으로 선발되었다는 통보를 받았다.
필자뿐만 아니라 모든 장교들이 파병부대 지휘관으로 선정되는 것이 큰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을 때였으므로 필자는 대대장 지정에 대해 얼마나 감격했던지 지금도 회고하면서 군대생활 30년을 통해 장군 진급과 함께 가장 영광스러운 충격으로 받아들이고 있을 정도였다.
군대 밖의 사람들은 죽을지도 모를 전장에 가는 것을 왜 좋아하는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전형적인 직업군인으로서는 첫 해외 파병부대 지휘관으로 선발되었다는 자체가 영광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맹호사단은 선발과정을 통하여 장병 약 80% 정도가 교체되었고 주요 지휘관은 거의 100%가 수도사단 외의 전군에서 선발된 자원으로 충원되었다. 청룡여단 역시 비슷한 비중으로 재편성되었다.
1965년 8월 13일. 국회에서 전투부대 파병 동의안이 가결되면서 재편성 작업과 함께 전투에 대비한 훈련에 들어갔다.
채명신 장군에 의해 계획된 고도의 전투훈련은 실전에 필요하고 비정규전에 적용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특히, 대민 민사작전에 대비 심리전 교육이 강조되었다.
필자는 훈련과정에서 엄청난 사고를 당했다.
예하 중대장인 강재구 대위가 수류탄 훈련장에서 중대원이 잘못 던진 수류탄에 의해 순직했기 때문이었다. 일반적인 군대의 관례라면 직속 중대장이 사고로 죽었다면 대대장인 나는 해임될 수 있을 것이고 더 나아가 군 복무의 끝장을 의미할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사고 경위조사에서 부하사랑의 살신성인(殺身成仁)이었음이 밝혀져 사고 수습은 다른 국면을 맞았다.
박해천 이등병이 사선에서 긴장한 나머지 수류탄 투척한다는 것이 대기하고 있는 중대원 복판에 떨어지고 있었다. 강재구 대위는 즉각 달려가 떨어진 수류탄을 몸으로 덮쳤다. 이렇게 하여 단 한 명의 부하 희생 없이 강재구 대위는 장렬하게 순직한 것이다.
이 사실이 보도기관을 통하여 전국에 알려지자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지시로 최고훈장 및 1계급 특진의 추서와 함께 육군장으로 장례식이 치러졌고 고 강재구 소령은 창군 이래 최초의 군신(軍神)으로 추앙되었다.
만약, 채명신 사단장이 ‘살신성인의 부하사랑’을 묵살해 버렸다면 필자는 희생되었을 것이고 오늘날까지 이어진 강재구 정신은 묻혀 버렸을 것이다.
지금 화랑대 육사 연병장 동쪽 중앙에는 고 강재구 소령의 동상이 우뚝 서 있고 매년 졸업 및 임관식 이후 이어지는 빅 이벤트는 고 강재구 소령 동상에서의 세레머니이다.
여하간 이 사건으로 필자가 지휘하는 대대의 명칭으로 재구대대(在求大隊)가 탄생하였고 베트남전에 임하는 모든 지휘관은 부하사랑과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무장하기에 이르렀다.
채명신 장군은 훈련기간 줄곧 부대를 순시하면서 강재구 소령의 살신성인의 희생정신과 함께 골육지정(骨肉之情)으로 정신 무장할 것을 강조하였다.
작전지휘권의 확보
학계의 일각에서 심지어 김영삼 정부의 교육부장관까지 베트남 한국군 파병을 폄하하고 미국의 용병(傭兵)이라는 욕설을 퍼붓는 슬픈 사례를 맞으면서 필자를 비롯한 대부분의 국민들이 분개하는 사건이 있었다. 용병이라고 하는 그 사람들의 무식함을 탓하기 전에 한국군의 파병은 우리의 의지에 의해 결정되었고 그 결정사유가 여러 가지 뜻이 있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첫째, 미국은 동맹국이고 6.25 전쟁 때 대부대를 참전시켜 3만이 훨씬 넘는 전사자까지 감내하면서 남침을 저지시켜준 은혜에 보답한다는 명분.
둘째, 북한당국이 적화통일 야욕을 버리지 않고 남침의 기회를 노리고 있는 상황에서 주한 미군사단을 베트남전선에 돌린다면 한국방어에 결정적 위기가 온다는 사실.
셋째, 현대화가 안 된 한국군을 신예장비로 무장케 하여 북한보다 우위의 전투력을 확보한다는 시급한 현실.
넷째, 자유 민주주의 공존의 명분과 세계평화에 기여한다는 뚜렷한 목표.
다섯째, 경제적 난관을 극복하여 경제의 활성화에 기여.
여섯째, 한국과 한국인을 세계무대에 진출시킬 수 있는 기회 포착.
일곱째, 한국군 장병의 전투의지를 향상시키고 전투경험 축적을 원하는 직업군인의 욕구 충족.
이외에도 무궁무진한 긍정적 효과가 있음을 선각자들은 알고 있었다. 당시 한 조사에 의하면 영관급 이상의 장교 가운데 베트남 파병에 반대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위관급 장교도 90%가 전투부대 파병을 지지하고 있었다. 전투부대 파병은 한국군에 있어서 희망사항임은 물론 축제와 같은 성격을 띠고 있었음도 분명히 밝혀둔다.
파병이 무르익을 무렵 국방부나 육군본부 등에서 회자되는 문제 가운데 베트남에서의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에 관한 것이 있었다.
이미 한국군은 국내에서 미군에 의해 작전이 통제되고 있었으므로 베트남에 파병되는 것이 미군을 지원하는 것이라면 으레 미군 지휘 하에 둘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쪽으로 가닥이 잡혀가고 있었다.
청와대에서도 논의가 있었고 박 대통령은 미군 지휘하의 주월 한국군 쪽으로 결론을 맺고 있었다.
심지어, 합참 작전국장 손희선 소장은 미군 장성과 회담하는 자리에서 “주월 한국군이 미군 사령관 지휘하에서 작전하게 된 것이 영광”이라고까지 미군 지휘권을 당연시하는 추세였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채명신 장군을 비롯하여 젊은 장교 상당수는 베트남전에서의 한국군 작전지휘권의 확보를 강력히 희망하고 있었다. 그 근거로 베트남전에서 자유월남군이 미군 지휘하에 있지 않음을 상기시켰다.
한국군이 베트남까지 가서 미군의 작전 지휘를 받는다면 그러잖아도 미군의 용병이라는 모략을 받는 마당에 그 모략을 해소할 길이 없다는 논리를 폈다. 그 주장은 타당하고 애국적인 생각에서 나온 것이었다.
채명신 장군은 뚜렷한 소신이 있었다. ‘베트남에서의 한국군은 내가 지휘하겠다.’라는 신념이었다.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우선 박 대통령의 생각을 바꾸는 일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자신의 주장에 동의하도록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다음 차례는 베트남에 있는 미군 사령관 웨스트모얼랜드(Westmoreland, William C., 1914~2005.7) 장군을 비롯한 주월 미군 수뇌부의 장성들이었다. 이 과정은 드라마틱하고 여러 고비가 첩첩산중이었다. 여기서 그 내용을 자세히 설명하기에는 지면이 너무 좁다.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채명신 장군의 승리였다. 미군 장성들도 채 장군의 설득에 손을 들고 말았다.
훗날 웨스트모얼랜드 장군은 그의 회고록에서 채명신 장군의 예지에 손을 들고 말았다고 그를 칭찬하고 있다.
창군 역사상 최초의 한국군이 작전지휘권을 행사하는 전통을 세운 쾌거였다.
중대전술기지 개념 창안
채명신 장군의 전략개념은 근본적으로 미군과 달랐다. 당시만 하더라도 육군대학을 비롯한 한국군의 모든 군사학교의 전술교리가 100% 미군 교리에 의한 것일 때여서 한국군 단독의 전략과 전술은 전무했던 실정이었다.
따라서 한국군 독자적인 전략개념이나 전술교리의 적용에는 많은 난관이 있었고 미군 당국과 빈번한 충돌과 의견대립에서 오는 언쟁이 이어졌다.
베트남에서의 미군의 전략과 작전은 정규전에 기반을 두고 있었고 소탕작전에 있어서도 ‘탐색 및 격멸(Search & Destroy)개념’에 의하여 군사작전 위주로 전개하고 있었다. 따라서 미군은 대대 및 연대단위로 집결하면서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다.
채명신 장군은 미군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전략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월남전의 성격을 게릴라전으로 규정하고 첫째, 물과 고기와의 관계에 있는 민간인과 베트콩을 분리시키고 상호관계를 차단함으로써 적을 고립시킨다는 것, 그리하여 정보를 획득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고립화 또는 약화된 적을 아군의 유리한 장소와 시간에 압도적으로 우세한 병력과 화력으로 포착 섬멸한다는 것이다. 셋째, 평정된 지역을 계속 확대해가면서 지역 안정을 도모하여 평화를 정착시킨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개념의 작전을 수행하기 위하여 채명신 장군이 창안한 것이 바로 중대전술기지 개념이다.
중대전술기지 개념이란 유사 이래 처음인 것은 물론 세계 어느 나라의 군사 작전에서도 실증되지 않는 독특한 개념이었다.
부여된 전술책임지역(TAOR)내에 중대단위기지를 설치하되 적 연대규모 공격을 48시간 이상 지탱하도록 탄약, 식량, 기타 보급품의 비축을 전제로 하여 진지구축, 철조망 등 경계시설을 완비해야 한다. 특히 모든 중대전술기지는 포병 화력의 지원거리 내에 있으므로서 적의 공격시 화력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어야 한다.
필자는 맹호사단 제1진으로 베트남에 도착하여 첫 번째로 중대전술기지 설치 지시를 받았다. 필자 또한, 생소한 것이었으므로 중대전술기지 설치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대대본부 및 12중대 기지, 9, 10, 11중대 등 4개 기지를 설치했다.
전술책임지역 전반에 걸쳐 작전통제가 용이했을 뿐만 아니라 대민접촉을 통한 심리전을 전개하여 필수 정보 획득에 효과적이었다.
필자는 14개월 대대장 재직 기간 중 적으로부터 단 한 번 기지가 유린된 적도 없었고 완전한 지역 평정, 재구촌 건설 등 대민지원사업을 통해 부여된 임무를 완수할 수 있었다.
특히, 파월 제1진 가운데 1년 만에 첫 대대단위 적 무기 노획 200정 돌파의 영예를 얻었고, 채명신 장군은 거의 모든 VIP 방문 코스로 대대지역 내의 중대전술기지를 이용하였다.
중대전술기지 개념이 미군 장성들은 물론 세계 군사학계에 널리 인정받게 된 것은 맹호사단의 두코 전투와 해병 청룡여단의 짜빈동 전투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이 두 전술기지가 연대병력이 훨씬 넘는 적의 공격을 무찌르자 주월 미군은 물론 세계군사학계가 크게 놀랐다.
채명신 장군이 창안한 중대전술기지 개념에 대해 회의의 눈초리로 보고 있던 모든 사람들에게 잘못되었음을 시원하게 인식시킨 멋진 승전보였다.
필자는 지금도 당시 베트남전쟁을 회고하면서 채명신 장군이 어떻게 그런 묘안을 창안해냈는지 그에게 고개가 숙여질 뿐이다. 만약 중대전술기지 개념을 적용하지 않고 미군 방식대로 베트남전을 치렀다면 한국군 사상자 수가 두 배 이상은 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백 명의 베트콩을 놓치더라도 한 명의 양민을 보호하라
베트남전의 특징은 목표 또는 표적이 불확실하다는 점이다. 양민과 베트콩의 구분이 어려운 것도 불확실성의 연장선상에 있다. 따라서 게릴라전에 있어서 중국의 모택동이 설파한 ‘물과 고기의 논리’가 가장 극명하게 나타나는 것 또한 베트남전의 특징이다. 물이 양민이라면 고기는 베트콩이다. 이를 분리시키지 않는 한 전과 확대나 평정이 불가능하다. 자칫 양민학살이라는 누명을 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기껏 평정한 평화도 순식간에 잃을 수 있다.
작전 중에 민간인이 희생을 입는 경우는 어떤 전쟁도 마찬가지지만 베트남에서는 그 위험성이 높다.
여기에 착안한 채명신 장군의 대민 심리전의 목표와 함께 작전시 유의사항 가운데 기초적 의미를 갖게 한 훈령이 바로 ‘백 명의 베트콩을 놓치더라도 한 명의 양민을 보호하라.’이다.
파월 직후 재구대대의 내 지휘지침이었는데 이를 공감한 채명신 장군이 주월한국군의 훈령으로 격상 채택하였다.
이 훈령이 내려져 그 내용이 널리 퍼지면서 두 갈래의 평가가 소용돌이쳤다. 미군 당국과 일부 한국군 장교들 간에는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은 전투가 목적인데 양민 보호가 웬 말이냐?”라고 투덜거린 반면 베트남 정부 당국과 언론 그리고 사료가 깊은 한국군 장교들은 ‘당연한 이치’라고 긍정하고 나섰다. 이 훈령 덕택으로 두 가지 소득이 있었으니 하나는 양민의 희생을 줄이면서 베트남인에게 한국군의 좋은 이미지를 심어 주었고 두 번째는 민간인들로부터 양질의 정보를 얻어 싸우지 않고 승리하는 길이 열렸다.
이 훈령이 내려지면서 제일 먼저 실천에 옮긴 부대는 바로 필자가 지휘하는 맹호 제1연대 재구대대(在求大隊)였다. 정보관 권준택 대위가 주관하여 대민접촉을 시도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베트남 땅에 최초의 한국군이 만든 부락 재구촌(在求村)을 탄생시켰다. 이 여파로 파월 한국군 가운데 가장 많은 귀순자를 내게 했고 그들로부터 얻은 정보로 싸우지 않고 승리하는 소득도 올려 미군 심리전 장교는 물론 월남 정부군 장교들까지 견학하러 오는 일까지 생겼다.
당시 필자는 채명신 장군의 중대전술기지 개념이나 심리전과 대민사업 지침이 내려올 때마다 제일 먼저 실행에 옮겼으나 당시는 그저 명령에 따른다는 생각뿐이었는데 지금에 와서 회고해 보노라면 채명신 장군의 탁월한 선견지명(先見之明)에 감탄할 뿐이다.
여하간 필자는 대민사업을 철저히 했다. 성과가 눈부시게 나타나자 재미도 있었고 보람도 있었다. 한 에피소드를 들어보자.
필자의 대대가 한창 작전 중이었다. 2개 중대가 적 거점을 포위 중에 있었고 대대본부에 있던 105밀리 곡사포가 굉음을 울리면서 포사격을 하고 있었다.
공교롭게 그날 대대본부 인근 부락과 자매결연이 약속된 날이었다. 필자의 참모들은 행사를 연기하자고 건의해 왔으나 나는 그대로 강행했다.
사단 군악대가 행진곡을 연주하고 베트남인들이 환호성을 올리고 있을 때 참모 한 사람이 달려와 “큰일 났습니다. 대대본부에 연대장님이 오신답니다. 군악 연주를 중지시켜야 되겠습니다.” 나는 대꾸를 하지 않고 그대로 대대본부에 도착했다.
군악대는 계속 경쾌한 베트남 가요곡 ‘사이곤 뎁불람’으로 이어졌다. 이윽고 연대장이 도착했다. 필자는 정중히 맞았다. 연대장은 군악대 연주 소리에 놀라는 기색으로 “무슨 소리요”라고 묻는 것이었다. 필자는 “지금 자매결연 행사가 진행 중입니다.”라고 보고 했다. 연대장은 놀라면서 “아니, 지금 작전 중이잖아”고 좀 화난 언성으로 추궁했다.
필자는 결례인 줄 알면서 “연대장님 저 행사도 작전입니다.” 그 말을 들은 연대장은 아무 말 없이 지프차를 타고 대대본부를 떠나는 것이었다.
어디 필자의 대대뿐이랴. 이런 자세로 한국군이 베트남전에 임했기 때문에 지금도 베트남 사람들이 한국군과 한국인에 대한 원성이 적은 편이다.
전투 중 양민의 피해는 불가피하다. 일부 무식하고 몰지각한 대학교수들이 한국군의 양민학살을 들고 나와 한 때 시끄럽게 한 적이 있으나 필자는 한 세미나 기조연설에서 “베트남전에서의 민간인 희생은 어느 전쟁 어느 전투보다 적다. 모든 전쟁에서 민간인 희생은 전투 당사자의 희생보다 많다. 그러나 한국군의 베트남전에서의 민간인 희생은 다른 전쟁에서의 민간인 희생과 비교하면 안전사고 수준에 불과하다.”고 다그치자 그들은 반론을 제기하지 못했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극한 상황하에서 민간인만을 골라 포탄•총탄을 피해가게 하는 재주는 하늘도 없다.
첫 한국 군사 교리의 탄생
주월 한국군은 베트남전에서 1965년 10월부터 1969년 4월까지 약 3년 7개월간 채명신 장군에 의해 지휘 되었다. 재임 기간 중 오작교 작전, 홍길동 작전 두 군단급 작전을 비롯하여 대대급 이상 작전이 470여 회 실시되었다. 놀랍게도 이 모든 작전을 승리로 일관하였다. 단 한 번의 패배 없는 전승기록이었다. 이 사실이 세계 유명한 언론매체에 의해 연속적으로 보도되자 채명신 장군은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 자유 우방국가의 전쟁영웅으로 크게 부상하였다.
고국 대한민국에서는 대통령 박정희보다 채명신 장군이 모든 국민의 입에 회자됨으로써 정치적으로 민감한 영남권 실세들은 어떤 움직임을 시작하고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 자신 또한 한국군의 연전연승에 자랑스러움을 느끼면서도 마음 한편으로 우울해지는 것을 막지 못한 징후가 여러 곳에서 포착되었다.
이 무렵 1968년 1월 자유중국 장개석 총통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친서를 보냈다. 주월 한국군이 베트남전선에서 한국군의 단독 전략전술을 구사하여 연전연승을 거두고 있는 것을 축하하고 그 교리를 전수하고 싶다며 한국 육군의 교수단 파견을 요청해 온 것이다.
자유 중국의 전체 장성급과 영관급에 강의해 달라는 내용까지 첨부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즉시 수락의 회신을 장개석 총통에게 보내는 한편 육군본부에 지시하여 교수단 파견을 지시했다.
이렇게 하여 파월 제1진 초대 맹호사단 참모장 최영구 준장을 단장으로 하여 전임교수에 박경석 대령(필자)과 두코 전투시 대대장 최병수 대령이 임명되었다.
1968년 여름, 자유 중국에 도착한 교수단은 3군 대학을 비롯하여 전국 군단급 사령부를 순회하면서 전체 장성급과 영관급 장교 및 군사학교 관련 교수 전원에게 주월 한국군의 전략과 전술, 심리전 및 선무활동, 중대전술기지개념, 야간 침투작전 등을 강의하였다.
당시까지만 하여도 한국군은 100% 미국 군사교리에 의존하고 있을 때여서 이 강의를 통해 한국의 군사 분야 첫 학문의 탄생을 의미하게 되었으며 비로소 한국 군사학교에서도 토종 군사학의 첫 출발점이 되었다.
한편, 이 강의 내용은 오로지 채명신 장군에 의해 창안된 『채명신학』의 성격을 띠고 있음도 밝혀둔다.
퇴색되어가는 파병의의
채명신 장군이 베트남을 떠나고 새 주월 한국군 사령관에 이세호 장군이 부임했다. 1969년 후반부터 지휘봉을 잡은 두 번째 사령관은 시기적으로도 좋지 않은 국면에 접어들고 있었다.
미군이 곳곳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고 미국의 반전여론도 드세지고 있을 무렵이었다.
주월 한국군도 파병 명분이 퇴색되는 분위기가 역력했고 때때로 불미스러운 일까지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파월 장교 특히, 지휘관급 선발에 잡음이 일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전과 조작을 위한 추태까지 생겨났다.
가령 훈장을 타내기 위한 방법으로 월남군이나 민병대로부터 매수한 총기로 전과를 조작하는 행위. 부정부패로 인사 문제가 오염되기 시작하면서 흔들리는 지휘권 등 여러 국면에서 파병의의가 퇴색되어갔다.
이러한 분위기가 만연되면서 주월 한국군 불패의 신화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첫 전투부대 파병시의 그 당당했던 긍지와 명예 또한 석양이 기울 듯 스러져 갔다.
이 무렵 맹호사단 기갑연대의 안캐패스 전투는 가장 대표적인 실패작으로 끝났다.
안캐패스는 중부 베트남의 허리를 동에서 서쪽으로 관통하는 19번 도로상의 약 7.5㎞에 달하는 고개이다. 안캐고개 정상인 638 고지를 비롯하여 553고지, 544고지, 240고지 등으로 높고 낮은 고지군(高地群)으로 형성되어 있다.
기갑연대 1중대는 당연히 제일 높은 638고지에 중대전술기지를 구축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638고지 하단부의 600m 정도로 경사가 완만한 구릉에 기지를 설치하고 있었다.
1972년 4월 11일 새벽, 적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1중대가 중대전술기지보다 높은 638고지를 장악하지 못하고 있는 한 적은 우세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1중대만으로는 당해내지 못하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하자 연대는 축차적으로 병력을 투입시켰다.
불행히도 1중대는 중대전술기지 바로 눈앞의 638고지 정상에 이미 한 달 전에 월맹군이 완강히 진지를 구축한 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투입된 병력 또한 건제(建制)가 뒤죽박죽 된 혼합편성이었다.
12일간에 걸친 이 전투에서 맹호 기갑연대 장병 75명이 전사하고 200명이 훨씬 넘는 전상자를 냈다. 주월 한국군 전 기간을 통해 실시하였던 모든 단일 전투 가운데 최대의 인명 손실을 기록했다.
베트남전에서 한국군의 크고 작은 손실이 계속 늘어나자 청와대는 긴장했다. 마침내 김용식 외무장관은 하비브 주한 미 대사를 만나 “베트남에서 한국군의 전사율이 계속 높아진다면 중대한 문제가 야기될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하비브 대사는 “한국군은 후방지원이 주된 임무다. 따라서 전사율은 대단히 적은 것으로 알고 있다.”라고 되받아쳤다. 이에 김 장관은 다시 “이것은 대통령 각하의 중요 근심거리”라고 협박 비슷한 말로 끝냈다. 이 무렵의 증가 추세에 있는 한국군의 인명손실에 대해 얼마나 심각한지 보여준 사례라 하겠다.
안캐패스 전투의 실패 때문에 박정희 대통령은 무척 고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국내의 보도 내용은 외신과는 달리 안캐패스 전투가 승리한 것처럼 가장한 것 또한 당시 군 당국의 치부가 아닐 수 없다.
이 전투를 승리한 전투로 위장하기 위하여 맹호사단은 「전승비」를 크게 세웠다. 이 추태는 난센스가 아닐 수 없다.
크고 작은 손실이 계속 이어지면서 베트남에서 한국군의 철수가 확정되는 막바지에 백마사단 제29연대 1대대는 책임 지역 내에 밤새 게양된 베트콩 기를 뽑아 버리고 기습으로 소대초소가 유린당한 것에 보복하기 위해 긴급 출동했다. 대대장 유재문 중령은 평소와 같이 베트콩을 깔 본 나머지 1개 분대를 차출하여 장갑차를 타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교량에 꽂힌 베트콩 기를 발견한 대대장과 분대원은 경계도 제대로 않고 깃발을 끌어내리기 위해 교량에 접근하자 잠복해 있던 베트콩의 일제 사격을 받아 대대장 유재문 중령을 비롯하여 심재철 중사 등 6명이 현장에서 전사하고 나머지 병사가 모두 부상했다.
교량은 계속 베트콩이 장악했다. 연대는 교량확보보다 숨진 시체의 회수가 시급했다. 포병사격을 가했으나 베트콩은 까딱 안 했다. 마지막 수단으로 포병사격으로 적을 제압한 다음 특공조를 투입하여 대대장을 비롯한 전사자의 시신을 회수하려 했으나 그것 역시 실패했다. 상상외의 완강한 저항 때문이었다.
사단장 김영선 장군이 직접 지휘 사단 수색중대와 제29연대 예하 5개 중대를 투입하는 대대적인 소탕전을 계획했다. 이 사고로 흥분하고 있던 이세호 주월 한국군사령관은 사단장의 작전계획을 승인했다가 불과 몇 시간 후에 이 작전을 중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더 큰 사고로 이어질까 겁먹은 것이었다. 이러는 사이 계속 지역 내의 교량이 베트콩에 의하여 파괴되어 갔다.
철군을 앞둔 주월 한국군에게 커다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사이 이세호 주월 한국군사령관과 김영선 사단장 간에는 티격태격 논쟁이 이어지는 추태가 연출되었다.
여하간 이 난리통에 주월 한국군의 철군 과정에서 불미스러운 오점을 남겼다는 일은 불행한 일이었다. 최후의 순간까지 경계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일깨워준 교훈이 될 만하다.
이 사건으로 사단은 1번 도로를 사용하지 못하고 미군 C-130 수송기를 이용 철군 길에 올랐다.
국익에 기여한 주월 한국군
브라운 각서를 받아내기 이전인 1965년 5월 박정희 대통령은 민선 대통령의 당당한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하여 한국군 베트남 파병 문제를 확정시키면서 이에 대한 대가로 경제 및 군사원조를 증액 제공받기로 미국과 합의하였었다.
당시, 미국으로부터의 경제원조가 1957년을 정점으로 하여 큰 폭으로 감소하는 추세였기 때문에 경제 및 군사원조의 증액은 가뭄에 단비를 맞는 호재였다.
박 대통령이 잡으려던 두 마리의 토끼는 국가안보와 경제발전이었기 때문에 베트남전 파병은 이 두 현안이 한꺼번에 해결되는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제1차 경제개발 5개년(1961~1966)계획과 제2차 경제개발 5개년(1967~1971)계획 기간과 한국군 베트남 참전이 맞물려 경제개발 계획이 성공할 것이라는 굳은 믿음을 갖게 했다.
참전 기간 중 무역 및 무역 외 수입, 파월장병의 송금, 미국의 경제 및 군사원조 그리고 차관 등을 합계한 막대한 달러는 고속 경제성장에 직접적인 촉진에 기여했다.
채명신 주월 한국군사령관은 기본 임무인 전투 지휘 외에 가장 심혈을 쏟은 분야가 국익을 위한 헌신적 봉사였다. 장병들이 귀중한 전투수당인 달러를 80% 이상 고국에 송금할 것을 장려했고 한국인의 일자리를 만들어 기업이 들어와서 자리를 잡는 일에 주야를 가리지 않았다. 때로는 미군 당국에 사정도하고 어떤 경우에는 여차하면 ‘철수하겠다.’는 위협도 서슴지 않았다. 이 과정 하나하나의 에피소드는 지면 관계상 일일이 설명할 수 없지만, 이 분야에 공들인 점은 군사작전에 버금가는 정도라고 요약할 수 있다.
한국인과 한국의 노동자 그리고 기업인들의 베트남에의 인력송출은 1971년까지 25,000여 명에 이르렀고 이들로부터 송금되는 달러 또한 경제개발계획에 직접적인 자금으로 활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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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선배님의과 같은 세대에 살아왔던 우리세대들은 가난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가를 요즈음의 젊은이들은 모릅니다. 모든 굴욕은 다 참고 이겨나갈수 있으나 배고품의 고통은 참기 어려운 당시의 현실은 지금 젊은 이들은 모릅니다. 굶어 누렇게 부황키가 떠 일어스기조차 힘든 세월은 지금 젊은 이들은 모름니다. 춘삼월 보리고개에 시골 동내에는 아침 연기나는 집이 몇체이였던가를 이야기하면 남에나라 아프리카의 빈곤국의 이야기처럼 듣습니다. 원남전 파병이야 말로 우리가 가난에서 벗어나는 기회였슴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1965년10월 맹호부대가 월남전쟁에 참전 할 당시 대부분의 지휘관이나 참모들은 비정규전의 정의조처 솔직희 몰랐습니다. 주요지형지물을 확보하고 월맹군과 베트콩을 섬멸하고 무공을 세우는것이 파병의 목적인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생각하면 오랜전쟁에 지쳐버린 많은 월남인들은 비록 베트콩이지만 자기동포가 외국인에 희생되는것은 원치않했습니다. 이중요한 사실을 박경석대대장이 간파하였지요 미군의 교리에도 "대비정규전은 군사작전과심리전과대민작전의 combination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제가 대민자전과심리전을 소신껏 수행할수있었던것은 박경석대대장님의 전폭적인 신뢰와 지원의 결과이었습니다. 정보관 권준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