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타연의 가을
그해 가을 양구 두타연의 단풍은 유난히 고왔다. 두타연 계곡은 1953년 휴전 이후 50년 넘게 민간인 출입이 허락되지 않았다. 우리 일행이 이곳을 찾은 2012년 가을은 민간인 탐방이 허용된 지 8년 정도 지났을 때였다. 지금은 잘 정비되어 DMZ 평화의 길, 금강산 가는 옛길, 생태 탐방로로 잘 정비되었다고 하지만 당시는 이목정 검문소에서 예약과 신분증 확인을 마치고 두타연 계곡을 낀 비포장 전술도로 자갈길을 타박타박 걸어 올라갔다. 3㎞가 넘는 길이라 가벼운 여정은 아니었다.
한국전쟁 이후 군사분계선 아래가 된 이곳 너머 양구군 옛 수입면 청송령에서 발원하여 파로호로 흘러드는 수입천의 지류인 사태천 물길이 깊은 골짜기를 따라 굽이쳐 흐르다가 잠시 멈추는 곳. 여기가 바로 두타연(頭陀淵)이다. 오랜 세월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원시림 지대를 돌아온 계류가 10미터 절벽에서 숨을 고른 후 일제히 쏟아져 내리며 만들어진 소(沼)이다.
당시는 10월 중순 건기여서 장쾌한 물줄기를 볼 수는 없었다. 다만 계곡 주위의 상수리나무, 신갈나무는 은행빛 고운 노랑으로, 당단풍, 애기단풍, 고로쇠나무는 홍(紅), 적(赤)으로 붉게 타올라 가을 산의 정수를 드러냈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았던 이곳 원시림은 멸종위기 1급 산양과 사향노루의 보금자리가 되었고, 계곡물에는 수달과 청정 1급수 어종인 열목어가 힘차게 물살을 타고 있었다. 계곡을 건너지르는 다리의 강화 유리 바닥으로 계곡물을 직관할 수 있었다. 너무 맑은 청잣빛 물빛이었다. 청량한 계곡물 소리가 귓전을 파고들었다. 다리를 건너 북동 방향 계곡 길로 들어설 때 북쪽으로 다른 계곡이 보였다. 동행한 지인이 말했다. 저 계곡 길이 금강산 가는 길이라고…. 지인은 이곳 최전방 수색대에서 군무를 마쳐 여기 계곡의 위치를 기억하고 있었다.
두타연 계곡의 원류인 수입천이 있는 수입면 문등리는 일제강점기 당시 형석 광산으로 번성한 곳으로 금강산 가는 최단 거리 도로가 그곳을 거쳐 내금강으로 이어진다고 했다.
2023년 4월. MBC는 ‘금강산 전철 100년, 그 흔적을 찾아서’라는 방송에서금강산 철로의 흔적이 남아 있는 DMZ 풍경을 송출했다. 금강산 가는 철로는 경원선 철로가 철원역에서 갈라져 한탄강, 동송역, 정연철교, 김화, 용연습지로 이어지는 흔적으로 남아 있었다. 몇 해 전 가 본 철원 노동당 청사는 총탄 흔적에 벽돌조만 남아 있었는데, 서북쪽으로는 논밭이 이어지며 적막했다. 방송에는 그 논밭 한가운데 철원역이 있었다고 했지만, 지금은 흔적도 없다. 다만 경원선, 금강선 두 방향 철로가 마른 풀숲에 남아 있었다. 금강산 철로를 찾는 여정은 용연습지에서 끝났다. 이제 더 이상 갈 수 없는 길이다. 북으로 북으로 기차가 달려 백양, 탄감, 현리, 단발령, 말휘역을 지나면 그다음 역이 금강산역이었다. 단발령은 겸재 정선의 금강산 그림 <풍악도첩>의 한 폭으로 남아 있다.
작가 정비석은 1940년대 초 금강산을 여행하고 기행 수필의 백미 ‘산정무한’을 남겼다. 당시 정비석의 금강산행은 금강산 전철로 이루어졌다. 다만, 여기 탐방로는 철로가 놓인 길이 아니고, 육로로 금강산 가는 길이었다. 필자가 확인해 보니 일제강점기 때 금강산 육로는 ‘경성–오리진선’이 있었는데, 오리진은 지금의 고성군 죽왕면 오호리였다. 이 도로는 서울-춘천-양구로 이어지고, 금강산 육로 길에 오른 사람들은 양구에서 말휘(북강원 회양군)행 길로 방향을 잡았다. 말휘는 금강산 단발령, 장안사 부근으로 당시 철로와 도로가 교차하는 교통의 요지였다. 여기가 그 길 어디쯤일까? 나는 오래도록 북쪽 골짜기를 바라보았다.
우리 일행의 다음 탐방지는 <을지통일전망대>였다.
양구군 해안면 분지, 일명 펀치볼 능선의 군사도로를 타고 1049고지 가칠봉 GP(최전방 감시초소)를 향해 올라갔다. 내려다보는 펀치볼 마을과 밭 풍경은 평화롭고 가을빛이 완연했다. 분지의 경관이 화채 그릇을 닮아 펀치볼이라고, 당시 어느 미군 종군기자가 붙인 이름은 언제부터인가 전설이 되어 본래 마을 고유명에 앞서고 있다.
휴전 회담 중에도 이 일대는 펀치볼 전투, 가칠봉 전투, 도솔산 전투 등 격전지였다. 당시 미 해병 1사단과 국군 해병 1연대는 이른바 모택동, 스탈린 고지라고 부르던 602, 702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여기 펀치볼 해안분지에서 상상할 수 없는 격전을 치렀다. 피아간 1만 명이 넘는 사상자가 났지만, 연합군은 결국 이곳 해안분지와 가칠봉 일대를 탈환했다.
1956년 인제 주민 160가구가 이곳으로 집단이주를 했다. 이주민들은 지뢰밭, 자갈밭으로 폐허인 이곳을 개간해 나갔다. 정착민들에게는 개간 및 경작권은 주어졌지만, 원주민 토지소유권 등 복잡한 문제로 60년 넘게 소유권을 얻을 수 없었다. 2020년 국민권익위원회에서 나서서 <수복 지역 내 미복구 토지 특별조치법>이 만들어졌고, 이제 상당수 정착민들이 재산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전쟁의 폐허였던 이곳은 그 이름 높은 양구 사과와 양구 시래기 주산지로 문전옥토가 되었다.
을지통일전망대는 1049고지 가칠봉 능선에 자리 잡고 있었다. 서북 방향 정상에 GP 초소가 보였다. 이 일대가 양구 7대 격전지의 종결지다. 국군 5사단은 이곳 가칠봉 정상을 탈환하고 나서 북쪽의 1211고지를 점령하기 위하여 수차례 일진일퇴를 거듭하였으나, 결국 탈환하지 못하고 휴전이 되었다. 그래서 여기 전망대 아래부터가 DMZ이 되었다.
이곳 산이 가칠봉인 까닭은 북측의 쌍봉, 운봉, 매봉, 문필봉 등과 더불어 여기 마지막 가칠봉(加七峰)이 더해져 비로소 금강산 1만 2천 봉이 완성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울산암(岩) 전설이 떠 오르는 이야기다. 속초 울산바위 너머 고성 신선봉부터 금강산 시작이라고 하고, 신선봉 아래 화암사를 금강산 화암사라고 칭하고 있다.
전망대 현장에 나온 소위는 아주 젊은 청년이었다. 그의 얼굴은 방금 세수한 것처럼 맑았다.
북쪽으로 두 개의 연봉이 겹쳐 수해(樹海)를 이루고 있었다. 그 너머 손톱만 한 바위산이 모습을 드러냈다. 내금강이라고 했다. 누군가 1만 2천 봉의 최고봉인 비로봉이라고도 했지만, 아마 내금강 연봉 중 한 봉우리일 것이다. 발아래 비무장지대 원시림은 이제 가을옷으로 갈아입고 무아지경의 모습을 뽐내고 있었다. 너무나도 고요하고 아름다웠다. 그러나 이곳은 당시 가칠봉 전투의 격전지가 아니던가! 하여, 발아래 골짜기에는 수습하지 못한 수많은 인골과 지뢰가 묻혀있을 것이다. 슬프고도 기막힌 역설에 돌아오는 버스 길에서 나는 졸시 한 편을 엮어 보았다.
그때,
해금강이 아스라이 보이는 북녘을 보면서
늙수그레한 사내가 말했지
저기 송도진이 내 고향이야.
해안선과 이어지는 작은 섬 봉우리
은빛 파도에 쓸리며 아름답고 평화로웠다.
저기 역이 있었지, 오일장터도 대진* 못지않았어야.
비무장지대 고향을 내려다보는 사내는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시,
갈 수 없는 나라에 왔다.
여기서는 아주 먼 곳, 두 개의 연봉 너머로
내륙의 내금강이 손톱만큼 눈에 들어온다.
발아래 중동부 DMZ의 가을은 유난히 곱다.
수많은 인골과 지뢰가 묻혀있을 저 비무장지대
앳된 관측 소위의 얼굴처럼 말갛고 고요하다.
남쪽의 펀치볼과 북녘의 내금강을 번갈아 보며
스무 몇 해 전 북고성 출신 그 초로의 사내가 문득 떠오른다.
머지않아,
눈앞 갈대밭 저 송도진에 부디 갈 거라고 하던 그 사내
이제 팔순이 넘었을 그 사내…….
오늘도 대진항구에서 북쪽 고향 바다를 보고 있을 것이다.
* 대진: 고성군 현내면 소재지 어항
- ‘가을의 DMZ’ (2012년 10월)
1989년 늦가을, 나는 고성 통일전망대에서 해금강을 바라다본 적이 있었다. 안내를 해 준 분은 고성군 현내면 부면장 겸 호병계장(호적, 병사 담당)으로 정년을 몇 년 안 남긴 것으로 기억한다. 다시 기억해 보면, 그분은 당시 50대 후반, 30년도 더 지난 요즘은 60대도 노인으로 치지 않지만, 당시 청년이었던 필자의 눈에는 늙수그레해 보였다. 이제 이름도, 모습도 기억나지 않지만 금강산을 향하는 철로길 옆 고향 마을을 가리키며 하던 그분의 말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멀리 해금강 구선봉 말무리반도 아래 군사분계선 바로 위쪽으로 해안선에 붙은 작은 섬 봉우리가 보였다. 기가 막힌 풍경이었다. 송도라고 했다. 그분이 나고 자란 곳은 송도 섬 앞마을 송도진으로 큰 마을이라고 했다. 기차역이 있었고, 큰 오일장이 열렸던 고장. 마을 잔치가 열릴 때 기차역 앞에서 제기차기하던 때를 자랑했다. 머지않아 고향마을에 가 볼 거라고 했다. 그러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 1연 마지막은 독일 전후문학의 상징인 하인리히 뵐의 소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의 제목을 빌려 썼다. 하인리히 뵐은 “침묵은 가장 강력한 언어이다.”라고 했다. 그 후로도 통일전망대에 여러 번 갔다. 해금강 말무리반도와 송도 섬 봉우리, 은빛 해안선은 언제나 아름다웠다. 그때마다 북고성 송도진 출신의 그 늙수그레한 사내가 떠올라 나는 목이 메었다.
또다시 가을이다. 마음속으로 가을 여행을 준비한다. 두타연의 단풍은 그해처럼 붉게 타오를 것이고, 아스라이 보이던 해금강과 송도 섬 봉우리, 흰 파도에 쓸리는 해안선은 여전히 아름다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