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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과 허구 사이
-김회직의 「바람소리」에 관해
신재기
1.
수필을 낮게 평가하고 비판하는데 자주 사용하는 개념이 아마 ‘신변잡기(身邊雜記)’일 것이다. 그 앞이나 뒤에 곧잘 ‘문학성 부족’이라는 말이 들어가 비판의 의미를 선명하게 드러내기도 한다. 여기서 ‘신변잡기’는 ‘문학성 부족’이란 말과 동의어로 사용된다. 수필이 문학성이 부족하여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데, 그 까닭은 신변잡기 수준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신변잡기’는 수필계 안에서나 밖에서나 수필이 극복해야 할 문제점으로 두루 지목되고 있다.
과연 ‘신변잡기’는 수필문학이 극복해야 할 중요한 과제인가? 결론부터 말한다면, 한편은 맞고 다른 한편은 오류다. 수필가 신변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을 기록하는 글이라는 점, 즉 수필가의 일상을 제재로 삼는 글쓰기라는 점은 수필의 본질적인 측면이다. 이 점을 부정하고서는 수필은 존립할 수 없다. 그런데 이를 그렇게나 못마땅해 하는가?
‘잡기’라는 말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자질구레한 일상의 체험은 수필문학의 바탕이고 출발점이다. 수필담화를 구성하는 기초가 조각난 일상이다. 하지만 잔잔한 일상을 수필이란 그릇에 어떻게 담는가 하는 방법문제다. ‘잡기’는 어감으로 보아 기록한다는 뜻이 강하다. 즉, ‘잡기’라는 말은 있었던 일상의 체험을 사실에 근거하여 기록한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신변잡기’라는 말에 내포된 기록성의 측면이 수필의 문학성에 흠집을 내고 있는 셈이다.
사람이 직접 체험한 일은 언어를 통해 하나의 경험으로 드러난다. 경험은 시간의 경과를 따라 언어로 정리된 일종의 서사다. 언어로 서사화하지 않고서는 어떤 경험도 성립할 수 없다. 언어화한다는 것은 무질서한 체엄을 일관성 있은 서사나 이야기로 구체화한다는 말이다. 서사나 이야기로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실제성과 허구성이 동시에 개입하기 마련이다. “현실은 불완전하다. 어느 한순간, 한 장면이 감동적이지만 그것은 체계적이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지속적이지 않고 일관성이 없는 분절된 이야기에 질서를 부여하는 일을 서사화라고 한다.”(방현석의 『서사패턴 959』22쪽) 서사화 과정에는 서사 구성자의 관점이나 의도가 당연히 작동한다. 언어를 통해 체험을 서사화하는 단계까지는 역사와 문학, 논픽션과 픽션, 다큐멘터리와 드라마는 차이가 없다. 그러나 역사, 논픽션, 다큐멘터리의 서사화는 일차적이고 육체적인 체험을 언어로 정리하되 사실세계 자체를 드러내고자 한다.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이나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사람의 관점과 의도가 작동되더라도 그것은 사실을 충실하게 보여주기 우한 수단과 방법의 차원이다. 기록자와 제작자는 사실 자체가 지닌 감동과 의미를 전달하는데 목적을 둔다. 하지만 현실적인 경험은 완결된 구조나 통일된 의미를 지니지 못한 불완전한 상태에 있다. 단편적인 경험의 단순한 배열은 사실로 존재할 뿐 감동을 주지는 못한다는 말이다. 사실의 기록적인 차원에서 벗어나 완전한 감동을 주는 미적인 구조물을 만들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의 순서를 바꾸어 재배열하기도 하고, 감동을 방해하는 요소는 배제하고 필요한 부분에 방점을 찍어 강조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실제적인 경험으로 감동을 주기에 부족할 때는 상상력을 동원하여 사실을 보충해야 한다. 더욱이 감동적인 이야기로 연결하려면 사실과 사실 사이의 빈자리에 상상력을 동원하여 허구로 채워나갈 필요가 있다. 즉, 완전한 미적구조물을 창조하려면 허구화가 필수적이라는 말이다. 문학과 예술은 이 허구화과정을 통해 탄생하는 것이다.
사실기록 단계에서 허구단계로 나아갔을 때, 그것을 문학 혹은 예술이라고 규정한다. 물론 이는 좁은 의미의 문학을 지칭하는 것이고 일반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기록문학’이라는 개념도 성립하고 사실기록에 충실한 작품도 훌륭한 문학으로 평가되는 경우가 흔하다. 상상력에 의한 창조적인 글만을 문학으로 제한할 필요는 없다. 철학, 역사, 에세이 등도 한 사회 안에서 존중받는 훌륭한 글이면 문학으로 인정됐다. 하지만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허구의 세계가 사실기록차원보다 훨씬 문학과 예술의 본질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허구화가 문학을 규정하는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지만, 문학의 핵심을 가장 잘 드러내는 개념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실제 경험에서 출발하는 수필은 사실기록과 문학적 허구 사이에 놓이는 독특한 장르이다. 기록성과 허구성의 양면을 지닌다는 뜻이다. 수필이 작가의 실제적인 경험이나 일상 현실을 재료로 삼는 담론이라는 점에서 일차적으로 사실의 기록이란 성격을 지닌다.
반면에 수필가는 일상적 경험을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의도한 특정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작가는 자신의 경험을 기록하는 차원을 넘어 의미화를 위해 재구성한다. 다양한 문학적 전략을 통해 실제경험을 감동으로 불러올 수 있도록 완전한 미적구조물로 만든다. 즉, 문학적인 창조를 이루어낸다. 수필을 문학이라고 할 수 있는 근거는 여기에서 마련된다. 따라서 수필은 기록성이라는 구심력과 문학적 허구성이라는 원심력이 팽팽한 긴장관계를 이루는 장르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균형이 깨지는 데서 생긴다. 미적완결구조를 획득하기 위한 구성적 아이디어와 상상력, 실제경험과 사실을 해석하고 의미하는 작가의 세계관, 문학적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언어표현 등은 수필이 사실의 단순한 기록에 머물지 않고 문학으로서 자질을 확보하는 기본적인 전략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적극적인 전략이 부재한 작품 대부분은 ‘신변잡기’라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우리 주위에 기록적 차원에 한가하게 머물고 있는 미성숙한 수필이 양산되고 있음을 목격한다. 일상체험의 기록은 수필의 근원적 고향이면서도 넘어야 할 산인 듯하다.
2.
김회직의 「바람소리」를 읽어본다.
완전한 미적구조물을 얻기 위한 구성적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이런 점에서 지난 호에 수록된 작품 전체를 통틀어 유일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설의 기법을 전격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수필 전문지에 수록되었기 때문에 수필로 읽는 것이지 소설판에 들어있다면 짧은 소설이나 꽁트로 읽어도 무방하다. 수필 혹은 소설이라는 맥락이 전혀 주어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소설로 읽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소설의 특징이 두드러진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보이는 특징이 소설의 절대적 속성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다음 발언은 문학 일반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소설이나 수필과 같은 하위 장르에도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문학을,『베어울프』(Beowulf)에서 버지니아 울프(VirginiaWoolf)에 이르기까지 특정 종류의 글들이 보여주는 어떤 내재적인 성질 혹은 일단의 성질들이라기보다는 사람들이 글에 ‘자신을 관련시키는’ 어떤 방식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다양한 방식으로 ‘문학’이라고 일컬어졌던 모든 것으로부터 어떤 불변의 내재적 특징들을 떼어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실상 그것은 모든 게임들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단일한 특성을 밝히려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한 것이다. 문학의 ‘본질’이라는 것은 결코 없다.(테리 이글턴, 『문학이론입문』창작사, 1980, 17쪽.)
문학을 개인마다 제멋대로 규정하는 것도 문제가 크지만, “객관적이고 기술적인 범주”로 보는 것도 오류라는 말이다. 이런 관점은 소설과 수필에서도 마찬가지다. 수필과 소설의 고유 요소가 각각 분명한 경계를 가진 것으로 인식하는 것은 본질에서 그렇기 때문이 아니라, 제도나 문화적 측면에서 관습으로 굳어졌기 때문이다. 소설의 방법을 원용했다고 해서 수필의 고유성이 훼손되는 것도 아니고, 소설적인 특징이 강하다고 해서 그것을 수필이 아니고 소설이라고 우길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장르의 경계는 늘 넘나듦이 빈번하여 있는 듯 없는 듯 분명하지 않은 법이다.
작품 「바람소리」는 한마을에 사는 ‘이 노인’과 ‘최 노인’ 두 인물의 대화가 주를 이루는 작품이다. 작품 전체는 처음, 중간, 끝,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중간이 두 노인의 대화이고 처음과 끝은 화자의 진술이다. 중간의 대화 부분은 인물 중심 시점이고, 처음과 끝은 삼인칭 서술자 시점이다. 어느 부분이든 화자는 전여 드러나지 않는다.
이 작품을 수필로 읽는다면, 수필적 자아인 ‘나’는 완전히 뒤로 물러나고 삼인칭 화자와 등장인물을 내세워 자신의 체험과 상상을 이야기하는 셈이다. 이것은 수필이라는 가정 하에서 그렇다는 말이지 이런 가정이 부재하다면 십중팔구 소설로 읽힐 것이다.
작품 서두는 이렇게 시작한다. “들녘을 휩쓸고 지나가는 바람결이 어수선하고 썰렁한 것으로 보아 가을 문턱에 들어서 있음이 느껴진다. 등 따갑던 한나절 햇살이 설핏 기울고, 먼 지평선 서쪽 끝으로부터 차츰 노을이 물들기 시작하면 온몸이 으스스하도록 한기가 스며든다.” 배경묘사다. 주제를 아주 효율적으로 드러낸다. 자식들은 모두 도회지로 떠나고 농촌 고향땅에 남아 쓸쓸하고 외로운 노년의 삶을 보내고 있는 노인들의 처지를 암시한다. 작품 결미는 “지금까지 늘 그래왔듯이 이번 소문도 동네 한 바퀴 돌고 지나가는 매듭 없는 바람결처럼 어디론가 흔적 없이 사라져버릴 게 분명했다.”로 끝맺는다. 작가의 직접적인 진술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수필의 일반적인 방법과는 달리 분위기만 암시할 뿐이다. 서두나 결미가 소설의 전형적인 방법임을 알 수 있다.
문학적 관습이라는 일반적인 측면에서 보면, 이 작품은 수필보다 소설에 가깝다. 그런데 우리는 문학작품을 읽을 때, 의식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그 장르의 고유한 문법에 기대어 작품을 감상하고 이해한다. 장르 의식이 어떤 통로든 작동한다는 말이다. 동일한 문학작품을 두고 두 가지 이상의 다른 장르를 각각 전제하고 그것을 읽는다면 결과는 어떠할까? 전하는 메시지에는 큰 변동이 없다 하더라도 독서 과정에서나 독후에 느끼는 정서적인 반응에는 차이가 날 수 있다. 문학작품 독서 과정에는 장르 의식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김회직의 「바람소리」를 소설로 읽었을 때와 수필로 읽었을 때의 차이는 무엇인가? 소설적인 요소가 우세한 작품을 소설로 읽는 것은 자연스럽겠지만, 이를 수필로 읽을 때에는 다소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수필의 관습적이고 일반적인 특징을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수필의 입장에서는 전격적인 소설의 기법 차용이 낯설게 다가온다. 이로 말미암아 독자의 주목을 받았다면 일차적으로 성공이다.
다음으로 독자는 작가가 왜 이러한 방법을 사용했는가, 소설의 방법을 빌려와서 얻은 것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우선 이를 낯선 실험을 통한 작가의 자기과시욕망으로 보아서는 곤란하다. 미적구성물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전략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작가, 즉 수필적 자아가 문면에 나타나 진술을 주도하면서 의도적 메시지를 강제하는 수필의 교술적인 측면에 대한 무언의 저항이다. 문학과 예술의 고유한 방법인 구체적 형상화를 실천해 보인 것이다. 수필이 태생적으로 일상의 진실을 기록하는 것이지만, 기록성에 안주하지 않고, 실제의 경험과 사실을 해석하고 미학적으로 완성된 구성물을 만들기 위한 시도이다. 수필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시도가 낯설고 충격적일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소설 같은 「바람소리」를 수필로 읽을 때 얻는 문학적 효과이고 차이다. 이 같은 방법이 수필의 고유한 규범을 벗어났다고 해서 수필인가, 아닌가를 따지는 것은 소모적이다. 수필의 장르 경계를 융통성 있게 이해하는 태도가 요구된다.
3.
앞에서 수필은 사실의 기록적 측면과 형상화를 통한 허구적인 측면사이에 놓여 있으며, 기록적인 측면에 편향됨으로써 ‘신변잡기’라는 비난을 받아왔다고 했다. 이러한 주장의 표면만을 수용하면 수필은 허구화를 지향하고 소설을 닮아가야 한다는 말로 들릴 수 있다. 수필의 태생적인 기록성이나 교술성이 문학구실을 하는 데 방해요소로 작용할 때도 있으나 이것 자체가 수필의 고유성이며 이것만으로도 충분한 감동을 줄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형식과 방법은 특정내용을 위해 일방적으로 봉사하는 종속적인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존재가치이고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일종의 그릇으로서 수필은 형식은 그것만으로서 고유성을 지닌다는 뜻이다.
① 밥 한 끼 뜨끈허게 채려 줄 여편네가 있나, 용돈 한 번 살갑게 쥐어줄 자식 놈이 있나, 시상천지 달랑 내 몸땡이 하나뿐인 이 늙은이는 도대체가 뭐냐 이거여 시방, 젊어서 속 못 채린 놈은 일찌감치 죽어지야 마땅허고 또 그리돼야 옳은 이칠 것 같은디.
-김회직의 「바람소리」에서
② 노인이 되면 심리적으로 고독이 오고 고독은 괴로움을 수반한다. 노인이 남긴 업적에 소모된 육체의 고통을 제외하더라도 심리적으로 쓸쓸함은 피할 수 없으니 그것은 경제적 상실, 동료의 상실, 배우자의 상실에서 외롭고 쓸쓸합니다.
-최강렬의 「노인에 대하여」
위의 두 글은 같은 내용의 의미를 다른 방식으로 말한다. 전자가 소설의 방법에 바탕을 두고 구체적인 형상화로 나아갔다면, 후자는 메시지를 작가가 직접 진술하는 교술의 전형적인 형식을 취했다. 둘은 모두 메시지를 전달하는 자기 나름의 고유한 방식을 가졌다는 점에서 비교 대상이 아니다. 하지만 수필의 문학성 확보와 미적구성물의 완성이라는 점에는 전자가 더 가까이 다가가 있다.
우리 주위에는 ‘신변잡기’라는 비난 앞에 무력한 수필이 적지 않다. 물론 수필은 일상의 경험, 즉 사실을 기록하고 정리하는 데서 출발하므로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이 감동을 줄 때도 잦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은 순간적으로는 감동적이지만, 대부분 분절되어 있고 체계적이지 못하다. 이러한 일상을 문학의 영역 안으로 끌어와 완성된 미적구성을 이루어내기 위해서는 작가의 상상력과 구성적 아이디어는 절실하다. 수필은 사실기록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면서도 언제나 그 끈을 끊고 작가의 상상력 속으로 비상하려는 자기모순을 드러낸다.
이것이 수필의 운명인지 모른다. 운명은 어쩔 수 없는 한계이지만, 그 한계에 도전함으로써 존재의 의미를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바람소리」를 수필로 읽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신재기― 문학평론가, 수필가,『수필미학』편집주간. 『수필창작의 원리』등 비평집 다수 『앉은 자리 꽃자리』등 수필집 다수. 현재 경일 대학교 교수
첫댓글 좋은 글은 언젠가는 빛이 나기 마련입니다. 좋은 작품에 좋은 평가가 따르기 마련입니다. 늘 깊이 있는 수필을 써오신 김선생님의 작품도 '낭중지추'지요.
'낭중지추'는 제게 너무 과찬의 말씀입니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짧은 글에만 익숙하자보니 훌륭한 작품을 미처 감상하지 못했군요. 오랜 시간을 들여 다듬은 귀한 보물을 분별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미술과 문학을 아우르는 김선생님의 예술혼에 머리를 숙입니다.
분에 넘치는 과찬에 오히려 제가 더 부끄럽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그림, 글,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선생님 작품 '바람소리'는 찾을 수 없네요. 작품의 평론을 읽다가 문득 한 번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졸작입니다. 한 번 읽어보고 싶다 하셨으니 늦었지만 올려놓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