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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도 부지사로 공직생활의 마지막 열정 쏟아 농도 전남 농민들의 아픔을 공감하고 대변
2003년 여수 부시장으로 가게 됐다. 당시 여수는 심상치않은 분위기였다. 2010년 엑스포 유치 위해 6년 동안 범시민적 노력을 기울이다 2001년 말에 상하이한테 밀려 탈락한 상태였기 때문에 유치 실패에 따른 시민들의 공허감이 큰 시기였다.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다. 당시 김춘섭 시장과 고민을 공유하면서 시민들의 허탈감을 메울 범정부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 했다. 새로운 엑스포, 즉 2012년 세계박람회 유치를 정부에 건의한 결과 5월에 정부 정책으로 결정이 났다. 2010년 탈락의 고배를 마신 가장 큰 이유를 살펴보니 지역기반시설(SOC)이 열악하다는 점이 가장 큰 걸림돌로 판단됐다. 여수라면 바다를 끼고 있어 예전에는 ‘여수에 와서 돈자랑하지 말라’던 윤택한 지역이었다. 그러나 어족자원이 점차 고갈되고 수산업이 저조해지면서 인구가 줄고 오동도 중심의 관광자원 역시 접근성이 미비해 관광객이 계속 감소하는 상황이었다. 해답은 역시 박람회였다. 2012년 유치를 목표로 일단 첫과제를 지역 접근성 개선으로 꼽았다. 과거에 여수가 영화를 누렸던 시절은 해상교통 시절이었다. 전남의 광양·고흥은 물론 경남의 하동·남해에서도 뱃길을 통해 인적·물적 교류가 활발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세월의 변화에 따라 운송체계가 육상운송체계로 바뀌면서 여수는 그저 끄트머리에 붙어있는 지역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SOC 개선을 위해 우선 광양-여수 간을 잇기로 했다. 광양시청-여수시내 광양읍-세풍길-해룡 구간은 40분 이상이 소요되던 시절이었다. 나는 광양제철-묘도-여수산단을 잇는 다리를 놓자고 제안하고, 연초 여수시 도시기본계획을 수립하면서 그 안을 넣었다. 어림잡아도 설계비로 1조원이 들어갈 거대사업이었다. 여수 시비로는 턱도 없었다. 광양 부시장한테 이야기해 율촌산단까지의 진입도로, 즉 여수산단 진입도로를 개설해달라고 정부에 요구하도록 했다. 당시 여수시 도시계획과장으로 일하던 명성인 과장과 건설교통부로 올라가 여수산단의 교통체증과 더딘 물류 흐름을 해결하기 위해 여수산단 진입도로를 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 이순신대교(여수산단 진입도로)가 정부정책으로 결정돼 2006년에 설계 들어갔다. 여수시로의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추진했던 도로망사업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화양면-고흥반도 간 교량 건설, 남해-여수 간 한려대교 건립, 순천-여수 간 국도 확장 같은 사업들이 다 그때(2003년) 시작돼 거의 완공됐거나 가시화됐다. 여수는 관광자원은 많은데 인프라가 부족한 것이 관광유치의 걸림돌이었다. 관광자원들이 대체로 섬에 산재해 있는데, 섬에 숙박이나 편의시설을 갖추기는 힘들었다. 대신에 여수 시내에 그런 시설을 건립하기로 하고 추진한 것이 화양면 관광단지 유치다. 여수라는 도시는 광양 못지않게 관리수요가 많은 지역이기도 했다. 석유화학단지가 있어 공해유발로 인한 환경수요도 많았고, 과거 수산업시대에 상당히 번영을 구가하다가 갑자기 어획량이 줄면서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 많아서 복지수요도 많았다. 그런 만큼 민원도 많을 수밖에 없었다. 여수시청 앞 광장은 시위횟수가 많은 지역 중 하나였다. 돌아보면 당시 여수에서 일하던 1년 내내 시위대 대표들과 대화하면서 보낸 것 같다. 고생은 많이 했지만 그 때 민원인들을 만나고 상대하며 얻은 것도 많다. 언제나 민원인들 의 편에 서서 이해하고 사고하고 도움을 주려 노력했던 덕분인지 여수에서 떠나기 직전에 보니 나에 대한 평이 엄청나게 좋았다. 민원을 워낙 많이 처리했기 때문에 시민들과 접촉할 기회가 많았고, 그 부단한 접촉 과정에서 나에 대한 인상이 긍정적으로 각인됐던 것 같다. 또 여수시민단체들과도 가까워지는 계기가 됐다. 여수 YWCA 정금희 명예회장, 유중국 시단협회장, 한창진(현 전남시민연대회의 상임대표) 등 여수에서 시민활동을 하는 분들과 친분을 쌓으며 허심탄회한 대화 속에서 여수 지역 발전을 도모할 수 있었다. 2004년 여수를 떠나 도에 자치행정국장으로 다시 오게 됐다. 오긴 왔으되 도가 그 어느 때보다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었다. 정무부지사가 구속되고 박태영 지사는 수사에 들어간 시점이었다. 그런 시기였던 만큼 조직안정화를 위해 시급한 것은 공정한 인사였다. 모든 사태 발생의 원인은 인사에서 나온다는 생각으로 철저하게 원칙을 지켰다. 그런 와중에 2004년 3월15일, 박준영 도지사는 결국 투신자살로 생을 맺었다. 갑자기 도지사 선거를 또 치러야 하는 상황이 됐다. 열린우리당 민화식 후보와 민주당 박준영 후보가 보궐선거에 나섰다. 자치행정국장은 숨만 쉬어도 오해를 받는 자리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선거 국면 당시 나는 유럽 출장중이었기 때문에 중립을 지킬 수 있었고 선거결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박준영 도지사가 취임한 후 최초로 만난 공무원은 나였다. 내가 맡은 업무가 인수인계였으니 당연했다. 돌이켜보면 허경만 지사와 박태영 지사를 거쳐 박준영 지사까지 인수인계를 내가 다 한 셈이다. 2005년 기획관리실장으로 승진했다. 공직의 고향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 것이다. 기획계장, 기획관, 기획관리실장을 다 거친 사람이 전남도청 역사에 몇 사람 되지 않는다. 최초로 거친 분이 강영기씨, 두 번째로 거친 분이 안주섭 전 전남도 부지사님, 세 번째로 거친 분이 문덕형(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상임위원)씨였고, 그 다음이 나였다. 과거에는 행정기획이 기획관리실의 가장 큰 업무였지만 이제 민선시대에는 예산편성이 가장 큰 업무로 대두됐다. 예산이란 것이 따지고보면 다양한 이해집단의 서로 상충하는 이해관계들을 총괄조정한 결과표나 마찬가지였다.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의 이해 조정 뿐 아니라 시대상황이나 시대정신의 반영이기도 했다. 복지에 대한 인식이나 요구가 높아지면 복지예산이 커질 수밖에 없는 식으로 말이다. 나는 2005년 1월 초부터 2006년 6월 초까지 1년 반 동안 기획관리실장으로 일하면서 두 번 예산 편성을 맡았다. 특히 지역예산에 관심이 많았다. 2006년 초에 균특회계 예산배정을 하면서 담양 실내체육관 건립에 20억을 배정했다. 또 지리산은 민족의 영산이기 때문에 구례 지리산박물관 건립에 관심을 두고 예산편성을 했는데 여러 가지 이유로 사업이 원활하게 추진되지 못해 아쉬움이 남아 있다. 대신 산악박물관으로 바꿔 유치하기 위해 지금도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중이다. 2006년 6월 초에 행정자치부로 발령이 나 자치경찰추진단장을 맡게 됐다. 이듬해 2007년 초부터는 공무원노사협력관으로 일하게 됐다. 전국의 공무원 노조 대표들과 대정부 교섭을 맡는 역할이었다. 힘든 일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노조는 노조대로 내가 정부 대변 역할에 치우친다며 불만을 지녔고, 정부 부처는 부처대로 내가 지나치게 친노조 성향이라고 불만을 터뜨렸다. 당시 300여 개의 의제가 있었는데, 양쪽 모두의 불만과 요구사항에 귀기울이면서 어떻든 조정을 해냈다. 2007년 12월14일, 대선을 며칠 앞둔 시점에서 타결이 됐다. 대정부 교섭이 유일하게 타결된 사례였다. 타결 이후 전국의 6급이하 공무원들로부터 감사의 인사를 많이 받았다. 당시 5급이상 공무원 정년은 60세, 6급이하 공무원 정년은 57세였던 것을 60세로 통일해 정년을 연장하는 성과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2008년에는 심신이 지칠 대로 지친 시기여서 예전부터 마음 속에 계획했던 국방대학원 안보과정 공부를 시작했다. 그 기간 동안 산에도 많이 다니고 국내 곳곳을 순례하며 배운 것들도 많았다. 한국의 국가적·군사적·경제적 현실에 대한 이해도 새롭게 했다. 다음 해인 2009년, 행정자치부가 행정안전부로 개편된 가운데 다시 복귀했다. 정권이 바뀌어 있었다. 더욱이 나는 전남 출신인 데다 노사교섭을 타결시킨 장본인이었다. 코드가 안 맞을 수밖에 없었다. 대선 직전에 노사교섭을 타결시킨 장본인이라 신정부에서는 나에 대해 부정적 인식을 갖고 있었다. 고시 기수가 빠르고 조직기여도도 높은 데다 업무역량을 인정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국장들 중에서 상대적으로 비중이 떨어지는 자리인 기업협력지원관으로 발령이 났다. 정부의 규제완화 정책에 지방 의견을 수렴해서 각 부처와 협의하는 역할이었다. 당시 맡았던 일들은 국립공원 규제완화, 해상국립공원 지역규제 완화, 신재생에너지산업에 대한 규제 완화, 농업규모화를 위한 규제완화 등이었다. 대통령이 나서서 ‘전봇대를 뽑자’ 식의 분위기가 확산돼 있었으니 규제 완화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덕분에 동료들한테 “너는 거기 가서도 고생하냐. 일복 많은 놈이라 역시 다르다”는 우스개소리를 듣곤 했다. 그러다가 그 해 7월31일, 전남도 부지사로 오게 됐다. 전남도 부지사로 올 때 도청 분위기는 나에 대한 기대가 상당히 컸다. 성품이 부드럽고, 같이 일하는 동료들을 배려할 줄 알고, 업무에 대해 최선을 다해 챙기는 점들에 대해 도청 내 간부와 직원들이 후한 점수를 주는 분위기였다. 당시 해냈던 일들 중에 제일 힘들었던 일은 추곡수매, 정부비축미 문제해결이었다. 10월부터 매일같이 도청 앞에서 농민들의 야적시위가 이루어졌다. 그래도 큰 어려움을 겪지 않고 무난히 사태를 해결할 수 있었던 힘은 과거에 농업정책과장 으로 3년여 동안 일하면서 농민단체 지도부와 쌓은 신뢰에서 왔다. 내가 현장에 나가면 서로 대화가 이루어지고 타결점을 찾을 수 있었다. 농도인 전남 농민들의 아픔을 공감하고 이해하는 입장에서 대화가 이루어지고 정부를 향한 요구사항이 관철되도록 함께 노력했다. 2010년에 가장 중점을 뒀던 일은 여수세계박람회와 관련한 SOC 예산확보였다. 그 결과 연간 1조4천억 원 정도가 집중투입될 만큼 획기적으로 예산이 늘어났다 전라선 전철 복선화가 완성되고, 전주-광양 간 고속도로가 준공되고, 목포-순천 간 고속도로가 완공단계에 접어들고, 이순신대교가 개통 직전까지 가는 등 수많은 SOC 관련 예산이 전남 동부권에 투입됐다. |